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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6장 인생론 노트-인생

by Yuneelif 2023. 2. 16.

인생

인간은 왜 태어나서 늙고 병들며 죽는 것일까.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인생!

친한 사람과의 이별, 싫은 자와 함께 사는 괴로움, 경제적인 고통, 원망, 시기, 질투, 노여움, 독점욕,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마음이 고독한 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유명인의 오만, 육체적 불구에 대한 고민, 종교를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위선자, 주색에 대한 욕망, 지위·명예욕, 인종차별에 우는 자, 동족끼리의 권력다툼, 종파싸움, 주의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투쟁과 파괴, 노사 분쟁, 고부간의 갈등 등등, 일일이 기록해 가자면 끝이 없는 부조화한 인생!

이러한 슬픔, 괴로움의 원인은 모두 중도의 마음을 상실한 행동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욕망의 와중에 자신을 매몰시켜 거기서 빠져나올 줄 모르며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어떤 자는 인생에 실망하여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불가해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난해할 뿐이다.

이 난해한 인생을 가장 알기 쉽게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설명한 빛의 천사가 있다. 다름 아닌 인도의 석가모니부고 ㅏ이스라엘의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그들의 설법도 오랜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많은 승려와 학자들의 지와 의에 의해서 변질돼 버렸다. 철학화, 의식화, 심지어는 상업화로 타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도 불교도 학문화, 철학화, 상업화되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신리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즉 이치는 알고 있는데 상념과 실천의 방법이 모호해졌다.

마음이 없는 종교, 실천이 없는 종교가 현대 사회를 왜곡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와 의로써 도금된 불교와 기독교를 버리고 본래의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되찾는 길이다.

학문 종교, 관광 종교, 의식 조교로써는 현대 사회의 인간의 마음을 구제할 수 없다. 타락된 종교로써는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깨달을 수 없을 뿐더러 제멋대로의 인생을 밟게 되고 물질 경제의 노예가 되어 본성을 잃은 자가 수없이 많아진다. 신리의 철학화, 종교 전문화에 의한 타력 신앙, 이익주의 종교의 탈바꿈, 신불의 대량 생산화, 이런 것들이 종교의 왜곡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래도 대중은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헤맨다. 종교를 왜곡시킨 지도자의 죄는 무겁다.

경은 일상 생활의 방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석가와 예수의 가르침은 신리이며 인류의 마음의 고향이다. 우리는 이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육체 조상의 관습이나 종교적 관례에 따라 생활하고 있으므로 자기의 종교가 정법인지 사법인지 확실하게 구별조차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신사, 사찰, 교회가 신불이 존재하는 곳, 기도하는 장소로 착각되어 어느새 기복 신앙, 타력 신앙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신사, 사찰, 교회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신불의 자녀로서의 자각심을 일깨워주고 신리를 실생활에 실천하도록 가르쳐주는 교실이어야 한다. 석가도 예수도 신불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우상을 세워 중생에게 예배하도록 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라지그리하 교외의 베느베나(죽림정사)나 시라바스티 교외의 젯다베나(기원정사), 그밖의 많은 정사들은 여러 나라의 왕이나 장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었지 교단에 의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정사는 비구와 비구니들의 숙소요 신리를 설법하는 전당이었지 결코 신불에게 제사 지내거나 우상을 받드는 곳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리그랏드의 산저이나 공원의 광장 등이 설법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한편 이스라엘에서 신리를 설법한 예수 그리스도도 신불이나 우상 앞에서 공양 예배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병든 중생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어 때론 요르단강에서 때로는 나자렛 언덕에서 혹은 헤르몬산에서 신리를 설법했다.

이렇게 설법된 신리는 오늘날에 와서도 불멸이며 우리들은 석가나 예수 당시의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거기 진짜 마음의 신리가 있으며 경문의 바른 정신이 있다. 

종파의 싸움이나 파벌의 추한 투쟁을 버리고 신리의 대도 위에 종교를 올려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 않아 중생들의 버림을 받게 된다. 종파의 고집은 나 자신을 구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파멸로 몰고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리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학문 종교는 지에만 머물 뿐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일상 생활의 행위는 위선이 되기 쉽다. 행위와 신리는 불이일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인간으로서 태어난 목적과 사명, 나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스스로 알게 된다.

석가와 예수가 설법한 신리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질되었으며 마침내 말법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중생은 마음을 상실하고 부조화한 생활의 늪에 빠져 사회 혼란의 원인을 만들고 있다. 물질경제 지상주의의 현ㄷ 사회가 과연 인간에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을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은 신불을 찾고 있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헤매고 있지 않은가. 말법 시대이기 때문에 상업 종교, 타력 신앙을 광신 맹신하여 본성을 잃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신불의 존재를 부정하고 유물 사상에 심신이 빼앗겨 인간 사회는 계급투쟁을 거쳐서 발전해 가는 것이며 물질문명도 거기서 번영해 간다는 사고 방식에 젖어 있다. 그런 지와 의에 의한 인간의 사상은 실은 동물적 본성인 것이므로 약육강식적 투쟁과 파괴의 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현대에도 계승되어 물질 우선 심부재의 폭력에 의한 피의 혁명을 실행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설령 일시적인 성공을 거둔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심의 인간까지는 도저히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결국은 깨닫게 될 것이다. 권력이나 폭력의 힘으로 일시적으로 사상을 통일하였다. 하더라도 자유를 욕구하고 평안을 갈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을 상실한 지와 의만으로 무장된 지도자에게 세뇌된 사상은 어디까지나 도장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는 그 도장의 칠이 벗겨져 인간 본래의 불성인 알몸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신리에 거스른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가 만들고 있다. 부조화한 사상은 투쟁과 파괴를 불러일으켜 괴로움과 슬픔의 현상으로 나타나 순환한다. 왜냐하면 투쟁으로 쟁취한 것은 언젠가는 투쟁에 의해서 상실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조화한 사상으로 마음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은 무한대로 넓으며 지와 의의 산물인 협소한 사상의 올가미로 묶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상상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자유 자재이며 그 누구도 제약할 수 없으며 그 누구로부터도 제약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없다.

선인가 악인가의 판단은 신리인가 아닌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나 자신의 올바른 마음을 충실하게 지니고 인생을 영위하고 있는가, 그리고 자기중심이 아니라 남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중도의 척도로써 생활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선악은 결정된다. 신리는 불변이며 인간의 지와 의로써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신리는 신불의 지혜요 마음이며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인류는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조화와 파괴가 동거하는 사회를 만들었으며, 오늘날의 물질적 사고방식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 사고 방식은 큰 잘못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신불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마음을 잊어버렸다. 대자연의 만생만물은 모두 상호 작용에 의해서 존립하며 대조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의 육체에 있어서도 한 개의 세포가 이상해지거나, 또는 한 기관이 부조화를 일으키면 여러 가지 변조가 나타난다. 즉 질병이라는 현상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병원이다, 의사다, 약이다 하고 당황한다.

조화는 질병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수행 목적의 으뜸가는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투쟁 운운하는 이 현실 사회의 양상으로 과연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부조화한 행위가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물질경제 지상주의에는 마음이 없으므로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항거하는 사람들의 인생에 과연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존재하는 것일까.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배신자라는 말처럼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지옥의 아수라계에 통하고 있으며 그런 인생은 실로 어리석은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지배 계급의 횡포가 대중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생겨난 것인 만큼 지배층은 잘 반성해야 한다.

설령 자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경제력이나 지위라 할지라도 거기 만족할 줄 모르고 보다 많고 높은 것을 탐내고,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비심도 없으며 자아아욕, 자기보존의 권화가 된 인간은 참으로 불쌍하고 저속한 자들이다. 사회에 이런 인간들이 많으면 혼란이 그칠 날이 없다.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대자연의 신리이며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의식에도 작용한다.

신불의 자비, 즉 육체보존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자연의 환경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행위가 보은이다. 인간 사회의 조화를 자기의 능력 범위 내에서 봉사하는 것이 인간 상호의 신리를 다질 수 있으며 조화와 평안의 사회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원래 누구든지 평화를 원하고 있다. 슬픔이나 괴로움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인간은 눈 앞의 현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잃고 스스로 슬픔과 괴로움의 원인을 짓는다.

마음이 없는 지적 사고 방식이 부조화한 사상을 낳고 표면적인 물질경제의 추구에 몰두하게 되며 인간 본래의 목적과 사명을 잃고 있다. 그래서 괴로움과 아픔의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불행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물질경제가 근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인류는 조화의 틀이 잡힌 사회를 완성할 수 없다. 물질문명은 생활의 지혜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정신 문화나 마음의 진화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대인은 물질경제에 사로잡혀 여러 방면으로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 이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 인간으로서 신성 불성을 되찾을 수 있는 첫걸음이다.

신리에 따라 인생을 엮어가는 것, 이것이 행복으로 통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