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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5장 신리의 참 언어-육체는 인생항로의 배

by Yuneelif 2023. 2. 15.

이 현상계에서는 색심불이, 즉 육체와 마음은 일체라는 뜻이다. 영혼과 육체는 제각기 차원이 다른 세계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혼이, 변하는 육체의 배를 타고 항해하는 과정이 바로 이 현상계의 인생이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에너지와 물질의 관계와 마찬가지인데 다른 점은 에너지는 자율적인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육체는 약 60조나 되는 세포 집단에 의해서 각 기관과 오체가 구성되며, 이 세포들은 에너지의 보급을 받아서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 자신은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각 세포 제기관은 저마다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단독으로 활동할 수는 없다.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와 매우 닮았다.

육체는 지배자인 의식이 작동함으로써 비로소 그 의지에 따라 오체의 행위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육체는 어디까지나 영혼의 나룻배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육체는 영혼을 수행하는 인생의 나룻배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신불과의 약속 하에 모체 내에서 정자와 난자의 결합 조화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또 이 현상계에 적합한 나룻배(육체)는 신불의 뜻에 따라 생식 본능이 부여되어 자손보존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우리의 의식(영혼)은 차원이 다른 의식의 세계에서 수행차 내려오는 것인 만큼 이 현상계에 존속되고 있는 육체라는 나룻배를 타지 않고서는 인생을 항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신은 신체인 이 지구상에 인류의 마음과 마음의 조화를 도모할 수 있도록 만상만물을 부여하였다. 투쟁과 파괴가 없는 사회를 구축할 사명과 과거세에서 지은 자신의 업(카르마)을 수정하고 보다 고차원의 세계로 진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우리 인간이다.

종래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육안으로 보이는 육체적 현상에서 신앙의 대상을 구해 왔다. 그 결과 육체 조상이 전부인양 생각하여 영혼까지도 육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착각을 해 왔다. 그런 연유에서 신앙은 조상에 대한 훌륭한 묘지와 재를 공양함으로써 성불될 수 있는 것으로 변질하였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손들도 구제받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즉 장례 불교, 재 의식에 의한 조상 공양에 빠져버렸다. 일종일파의 교조를 자칭하는 자들도 이런 좁은 소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엉터리 교리를 광신하고 있는 신자들은 그 또한 얼마나 많은가. 

신심이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행사를 올리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사념과 행위를 항상 반성하면서 감사와 보은으로 중도를 실천하는 일상 생활 가운데 올바른 신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도 석가도 조상을 예배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물론 우리들은 조상과 부모의 인연에 의해서 육체를 부여 받고 있으므로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감사의 표현은 보은의 행위로써 보답할 수가 있다. 형제 자매가 의좋게 생활하는 것도 그 효행의 하나요, 정신적 경제적으로 조화된 생활을 누리는 것도 그 보은의 하나이다.

죽은 육체 조상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좋은 묘지와 융숭한 불공을 바라는 조상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조상은 100% 지옥에 있다. 만일 조상이 지옥에 떨어져 있을 경우에도 살아 있는 자손들이 그 조상을 향하여 육체 생활을 하던 당시의 마음의 상태, 사명, 목적 등을 잘 설명해 줌으로써 그 조상의 방황하는 마음을 구제 천도해 줄 수 있다. 불경의 뜻도 모르고 죽은 분들에게 어려운 경문을 외워 공양하는 것은 아무 뜻도 없다. 상대를 이해시키지 않고서는 개과천도시킬 수 없다.

이 현상계의 묘지나 불단 제단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영들은 100% 지옥에서 생활하고 있는 영들이기 때문에 가족의 부조화한 상념에 빙의해서 집안을 더욱 부조화하게 하는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수록 살아 있는 가족들이 신리에 맞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영역이 조화되지 않으므로 부조화한 악령을 불러들이게 된다.

죽은 조상의 영에게 이 현상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으뜸 가는 공양이다. 가족들이 정법에 귀의해서 빛이 충만한 즐거운 가정을 꾸미게 되면 죽은 망령들도 이것을 보고 깨닫게 된다.

불단만이 공양의 장소가 아니다. 한편 깨달은 조상의 영은 현상계에 집착이 없기 때문에 아무 재앙이 없다.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생활해야 하는 몸인데도 불구하고 이 현상계에 집착하여 방황하고 있는 영들에게 우리는 빙의되어서는 안 된다. 정법을 실천하고 있으면 몸은 신불의 빛에 싸여 보호를 받게 되므로 부조화한 영들에 빙의될 리 만무하다. 악령에게 빙의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 

진심으로 명상적 반성을 실천할 때 우리의 의식은 신불의 빛에 싸이므로 부조화한 영들도 그 빛에 의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조상은 예배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감사하는 대상으로서의 보은 공양이 바람직하다. 몸이 건강하다는 것도, 훌륭한 사회인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도 보은의 공양이 되는 것이다.

현대 종교의 많은 부분이 조상 신앙으로 타락하여 신심의 근본도 흐려져 버렸다. 그 원인은 오랜 세월 동안에 신리가 인간의 지와 의가 가미되어 타력 신앙으로 변질해 버린데 있다. 여기에 따른 종교 산업이 인간의 마음을 더욱 신리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많은 학자들 가운데에는 이 책을 읽고 이런 엉터리 같은 일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식으로는 내가 설법하고 있는 정법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종교에 대한 기성 관념을 버릴 것, 이것이 자기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또 교조를 자칭하는 자들 가운데에도 언젠가는 정법에 귀의하게 되는 자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불교나 기독교의 원리를 잘 깨닫고 있는 목자들 가운데에도 내가 설하는 신리가 자신들이 탐구하는 법과 일치한다는 데 확신과 기쁨을 가지는 분들도 많이 나타나리라고 본다.

고타마 싯달다가 신리를 설법하던 당시에도 푸르나 가샤파, 아지타 케사간바리, 막가리 코사라, 나간다나 푸다, 파구다 카차냐, 산자 등이 대표적인 교조들이었는데 그 교리는 저차원이었으며 그들의 제자들은 싫증이 나서 불법에 귀의해 버렸다. 카차나, 푸르나, 카샤파, 샤리푸트라 등도 한 교단의 지도자 혹은 그 제자들이었었다.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수호령으로부터 설명을 들어 알 수 있었으며, 이 정법은 과거 예수와 고타마가 설했던 신리와 일치한다는 것도 아울러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