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육체
의식(영혼)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영원히 왕래하면서 살아가는 생명이다.
물질은 에너지 입자가 모여서 고체화된 것으로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한 질량과 에너지는 공존하며 불멸이라는 것을 현대 과학은 증명하고 있다. 에너지 입자가 집결된 것은 육안으로 볼 수 있으나 에너지 입자의 원형을 볼 수는 없다. 전기의 에너지, 빛의 에너지, 열 에너지, 자력 에너지, 중력의 에너지를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 에너지들이 우주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영혼)의 존재도 부정하지 못한다.
육체가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수면 중에는 눈, 귀, 코, 혀, 몸의 오관의 작용이 멈추는 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시각도 청각도 그 전기적 진동은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기능은 작용하지 않는다. 즉 잠잘 동안에는 귀가 열려 있는데도 듣고 기억하지 못한다. 인간의 뇌세포가 기억 연합령이라고 불릴 만한 유기질세포소자로써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잠잘 동안에도 외부적인 일체의 현상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수면 중에는 의식이 육체에서 떠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자선이라는 것에 의해서 육체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언제라도 필요에 따라 육체로 되돌아올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리의 오관은 단독으로는 작용할 수 없으며, 의식이 육체에 되돌아왔을 때 비로소 그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오관은 객관적으로 현상을 포착하여 대뇌에 전기적 진동을 일으켜 그 파장을 의식(영혼, 마음)에 통신 전달한다. 의식의 지배는 육체 전체에 미치고 있다. 사고하는 능력도 일을 하는 능력도 모두 영혼의 의지에 의해서 가능하다.
육체를 지닌 생명이 이 지상계에 태어나서 공기에 접하게 되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데도 젖을 빤다. 이것은 신불로부터 부여 받은 본능의 힘인 동시에 전세에서 되풀이했던 습성의 반복이며 관성의 법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유아가 과연 두뇌로써 판단하고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의식(영혼,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본능이 현상화된 모습이다. 울고, 잠자고, 젖을 빠는 시간대를 거쳐 유아는 성장해 간다.
잠잔다는 것은 육체의 휴식인 동시에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마음의 연료(에너지)를 보급받아 오기에 필요한 시간대이다. 자비도 사랑도 없는 부조화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 의식(영혼, 마음)이 차원이 다른 세계에 갔을 때(즉 잠잘 동안에) 자신의 분신(영혼의 형제)이나 본체(영혼은 한 개의 본체와 다섯 개의 분신으로 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음), 또는 수호령에 의해서 그 의식이 연마될 때가 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머리가 무겁거나 아픈 것은 대개 영혼이 연마된 뒤에 일어난 현상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 때는 연마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원인을 찾고 자신의 일상 생활을 잘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기분 나쁜 꿈도 또한 영혼에 대한 경고이다. 의식(영혼)이 육체에 돌아오면 꿈은 거의 기억에 남지 않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띄엄띄엄 단편적인 것만 기억할 수 있다.
마음이 조화되어 있으면 부조화한 기분나쁜 꿈은 꾸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원인이 있으므로 현상이 일어난다는 진리를 이해한다면 결코 엉터리 같은 이야기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뜻밖의 장소를 보고 있을 때는 과거세의 장소를 보고 있을 경우가 많다.
의식이 육체로 돌아오면 단편적인 희미한 기억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꿈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이 현상계는 어디까지나 영혼의 수행장인 3차원의 세계인 만큼 조화되어 있는 올바른 마음의 소유자, 정법 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이외에는 비록 차원이 다른 세계의 상태를 보고온 경우에도 기억을 되살릴 수 없도록 틀이 짜여져 있다. 신리를 깨닫고 마음이 조화됨에 따라 비록 꿈이라 할지라도 차원이 다른 저 세상에서 견학한 것을 처음부터 끝가지 기억해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의식이 육체를 이탈한다는 사실은 광자체라는 '또 한 사람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광자체가 차원이 다른 저세상에 갔을 때 이따금 죽은 친지들을 만날 경우도 있다. 이 현상계에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에 꽃을 피우기도 하고, 저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이며 저 세상 사람들이 입고 있는 각양 각색의 의복 등 일체의 기억을 가지고 돌아온다. 또한 살아있는 친구의 수호령을 만나 대화하고 돌아올 경우도 있다. 우리 영능자들은 차원이 다른 저 세상을 탐방하고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물론 지구상에서도 우리의 의식이 즉 광자체가 육체를 이탈하여 지구 어디든지 보고 온다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며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고 사장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능력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조화에 의해서 발휘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사람들은 육체적인 수행이나 최면적인 암시 등으로 그것을 구하려고 한다. 문제는 이럴 때 일어나게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부조화한 영(악령)에 빙의되어 폐인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리를 깨닫지 못한 채 영적 현상만을 좇는 것은 인생의 가장 위험한 줄타기이다.
관자재력이 생기는 신리는 심행의 일치에 있다. 불지도 신의 힘도 자신의 마음의 왕구에서 샘솟는 것이고, 수호령이나 지도령의 협력에 의해서 지혜의 보고가 열림으로써 생기는 초능력이다.
일상 생활을 소홀히 하고 마음과 행위가 조화되지 못한 채 영적 현상이 일어나는 사람은 우선 마음에 불안이 없는가, 몸에 이상은 없는가, 거만하지 않은가, 성내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가 등을 잘 살펴서 한 가지라도 걸릴 경우에는 그 마음을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하지 않고서는 영적 재화를 면할 일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영도를 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신불의 자녀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정법을 배우고 그것을 마음과 행동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다. 심행의 조화를 꾀하고 서로 협력해서 보다 좋은 인간 사회를 구축하며 평화의 유토피아를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인생 수행의 중요한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은 상념의 힘에 의해서 의지가 생기고 그 의지는 육체를 통해서 행위로 나타나며 그 행위에 의해서 선과가 열린다. 이 선과를 위해서도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자기 확립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법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악몽에 시달리지도 않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하다. 항상 마음은 평화롭고 여러 가지 현상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안심입명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정법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가끔 지옥에 끌려가게 될 경우가 있다. 그것은 견학을 위한 의도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여행이다. 정도에서 벗어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부조화한 세계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그 꿈도 악몽이다. 꿈은 의식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 의식이 현상계의 육체에 되돌아오면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표면의식과 상념대의 저항에 부딪쳐 기억해내기가 힘들다.
의식이야말로 기억의 근본이다
의학적으로 대뇌는 사고하고 상상하며 기억하는 장소라고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육체 현상만을 관찰한 결과에서 비롯된 판단이다. 그런데 이 의학적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일까.
여러 차례 보기로 인용하였지만 인간이 수면 중에는 어째서 오관의 변화에 대하여 뇌 속의 기억실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가령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에는 눈을 열어도 보이지 않고 머리맡에서 누가 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귀는 틀림없이 말 소리를 듣고 그 소리의 진동을 전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기억에는 남지 않는다. 그러니 뇌 세포가 모든 기억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판단은 사람이 눈뜨고 있을 동안에는 합당하게 여겨지지만 수면 중의 해답은 되지 못한다. 즉 뇌 세포 이외의 제 3의 작용이 있다고 보지않을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순리다. 그것은 무엇일까. 기억의 장본인 그것은 육체의 주인공에 다름 아니다.
주인공의 뜻에 따라 육체주는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잠들어 있을 동안에는 의식이라는 주인공이 육체를 떠나있기 때문에 육체 차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의 파장을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잠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의식(주인공)이 육체에 돌아온 것이므로 육체는 색심불이의 상태가 되어 자기의 의지에 따른 상념과 행위의 생활 활동이 가능해진다.
눈에 보이는 것은 시각 신경을 통해서 뇌세포의 신경 부분에 전기적 반응을 일으켜 그 뇌파의 진동(통신)에 의해서 의식(영혼)에 전달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오관들도 저마다의 담당 신경 부위에 통신이 전달되어 의식이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즉 오관의 작용은 객관적으로 포착한 영상을 각 신경이 뇌에 전달하면 뇌에서는 뇌파라는 전기적 진동을 일으켜 의식(영혼)에 전달하는 메카니즘으로 구성되어 있다.
뇌 속에 기억실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신리를 깨닫고 정법 생활을 통해서 영도가 열린 우리 영능자들은 금세에서 배운 적도 없는 말로써 저마다의 과거세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과거세의 이야기들이 한 곳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에 의해서 말하여 지고 있다. 그 내용의 명칭이나 사건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물질주의 사고로써도 차원이 다른 의식(영혼)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영능자들이 사도행전 2장에 기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 과거세의 대화를 거침없이 하고 있다는 이 현상적 증거가 있는 이상 영적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처럼 불교나 기독교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이와 같은 신리에 통달하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그 증거의 하나이다. 독자들 가운데에는 종교에 조예가 깊은 분도 많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야말로 풋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내가 과거세를 상기할 수 있으니 만약 기억의 장치가 뇌세포에 있다고 한다면 내가 과거세로 거슬러 올라가서 나의 과거세의 육체(뇌)를 되찾지 않는 한 과거세의 회상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과거세로 가서 당시의 육체를 찾기란 그야말로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현실적으로 과거세의, 그것도 여러 회수에 걸친 과거세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모든 기억의 근본은 의식(영혼) 속에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결국 뇌라는 것은 의식으 의지에 따른 통신 활동의, 육체 각 기능의 관리실 계산센터와 같은 곳이라고 인식하면 좋을 것 같다.
의식(영혼)이야말로 우리들의 근본이요 우리들 자신에 다름 아니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전생윤회하고 있는 생사가 없는 생명이다. 인간의 생사란 육체의 갈아타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비록 육체가 멸망해도 영혼은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세를 회상하기도 하고 금세에서 배운 적이 없는 말로써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현상은 당연한 것이며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이 결코 금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잠재의식의 비디오 테이프로 재생시켜 볼 수 있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본다.
우리는 인생 항로의 나룻배(육체)의 눈·귀·코·혀·몸이라는 오관을 부리면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육체가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다. 그 결과 무슨 일이든지 간에 육체의 지배자인 의식, 그 의식의 중심인 '마음'과 상의함이 없이 오직 오관의 판단에만 의존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자기보존, 자아아욕에 빠져 지적 판단에만 기울어져 신성, 불성을 망각하기 일쑤다.
우리들의 영혼 즉 의식에 잠재하고 있는 마음의 세계에는 과거세에서 배운 경험이 무한한 지혜의 보고로 간직되어 있다.
조화된 정신생활에 의해서 그 잠재의식은 열리고, 보고 속의 위대한 지혜는 용출한다. 우리의 영혼은, 전생윤회에서 쌓아온 과거세의 귀중한 경험들을 살림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진화해 간다. 이것이 인생수업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신불의 자녀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여기에 의문을 품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숙독해서 우선 신리를 일상 생활에 살려볼 필요가 있다. 건강, 운세 등 모든 면에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영적 현상만을 좇고 영능이 탐이나는 사람들이 조급, 자기 만족, 영업 목적, 자아아욕, 자기보존 등의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부리면 예외없이 동물령이나 마왕에게 의식을 빼앗기고 고뇌의 늪에 빠진다. 신리의 조화를 유지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이런 생활을 할 때 비로소 인간은 두뇌가 전부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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