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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5장 신리의 참 언어-마음2

by Yuneelif 2023. 2. 10.

마음

육체의 지배자는 이승과 저승을 영원히 전생윤회하고 있는 의식이요 영혼이다.

이 영혼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 다름 아니며 그 잠재의식 속에는 과거세에서 체험한 일체의 경험이 남김 없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각자의 희망에 따라 어버이로부터 육체를 얻어 영혼의 부조화한 카르마를 수정하는 한편, 이 지상에 인류가 화합하는 불국토 유토피아를 세우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우리의 인생은 전생윤회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으며 언젠가는 실재계인 저 세상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다. 좋든 싫든 신의 의지 하에 놓여 있으며 누구도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신불의 법도이다. 

그러나 육체라는 배를 일단 타게 되면 과거세에서 익힌 경험의 일체가 잠재의식의 보고 속에 매장되고 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잠재의식의 문을 자신의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로 말미암아 닫아버리고 있다. 이 문을 열기 위해서 과거의 많은 사람들은 육체적 고행으로 번뇌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또 형식적인 의식이나 방식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엇길을 걷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상의 두 가지 방법으로써는 정법에 어울리는 안심의 경지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리에 맞지 않는 부조화한 상녀모가 행위의 어두운 저항이 불지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산중에서 폭포욕을 한다든가 단식을 한다든가 혹은 육체 고행의 수행을 아무리 해 보아야 번뇌를 멸할 수는 없다. 이러한 행위들은 육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수행자들의 독한 상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지배자인 의식, 그 의식의 중심인 마음을 잊고서는 깨달을 수 없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음외 전자가 돌고 있듯이 또는 태양을 중심으로 혹성이 자전·공전하고 있듯이, 인간도 마음을 중심으로 몸 세포 전체의 의식이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음은 흡사 유연한 와상구(소용돌이 모양의 공)와 같은 느낌이며 감정·이성·본능·지성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음의 중심은 무한대의 우주 생명과 통하고 있어서 우리의 의식에 무한량의 상념 에너지를 공급해 주고 있다. 

인생항로의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서 판단력, 자제력을 발휘하는 이성,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감정, 육체 보존의 본능, 인생 경험의 학습으로 얻은 지성, 이것들이 서로 조화를 유지하면서 우리들의 인격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마땅히 조화되어야 할 마음에 '감정'의 영역만이 유독 표면으로 불거져 나오면 정서는 불안정해지고, 자기 보존적이 되어 마음의 평안을 잃게 된다. '자존심이 상했다'하고 감정적이 되어 충고자의 결점을 도로 찾아내서 반격하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보존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부조화한 감정적인 언동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하지만 자신이 취한 부조화한 말과 행동의 반작용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진심으로 충고해준 상대방에게 감정적인 상념행위를 보내면 신불의 빛에 싸여 있는 상대방의 마음에 거울처럼 반사되어 오히려 자신의 부조화한 상념의 업이 곱절이 된다.

상대방을 원망하고 시기 질투하며 상대방의 불행을 비는 따위의 행위는 바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멸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이 악의 상념행위는 자신을 고난으로 몰아넣어 꼼짝달싹 못하게 한다. 올바른 자기 판단은 진솔한 마음으로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데 있다. 자기보존의 감정은 자신을 다치게 할 뿐만 아니라 남도 다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편 본능만이 표면으로 불거져 나오면 자기 방어, 자기 본위가 되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동물적 정욕의 포로가 되기 쉽다. 사랑이 없는 육욕적 본능은 인간 사회를 혼란으로 빠뜨리고 자신의 마음에 괴로움의 씨를 뿌린다. 깨달음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현상계의 영화에 눈이 가려 물질을 즐기는 것과 도를 즐기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들추어보면 번영했던 국가들이 어째서 멸망했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약한 자를 희생물로 깔고앉은 권력자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동물적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어 육욕적 행위를 탐닉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수행을 거부하고 부귀영화만을 좇는 쾌락의 인생을 하루 빨리 청산하고 정도의 궤도 위에 인생을 올려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구한 것이 얻어졌을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다. 마음의 길은 깊고 멀며 깨달으면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

이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단하는 이성,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감정, 신불로부터 부여받은 본능, 인생 경험과 지성, 이런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마음에 집착이 없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만물에 대한 감사와 보은, 공양과 보시의 마음을 가지고 신리의 실천 생활을 할 것. 그러면 마음의 문이 열리며 자력으로 위대한 지혜의 보고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며 영혼의 형제들, 수호령, 지도령들과도 대화가 가능해지며 차원 높은 인생을 위한, 그들의 자비와 사랑에 넘치는 지도와 협력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부여되어 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올바른 생활 노력 가운데에서 유도해 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런 생활 노력이라는 것도 실은 신불로부터 부여받은 본능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기후 환경에 적합한 의복을 고안해 오고 있다. 육체 보존을 위해서 동·식·광물의 에너지를 흡수할 줄도 안다. 자연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장소로써 주거를 정할 줄도 안다. 이런 능력과 노력은 모두 본능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한편 지성만을 앞세우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내일을 내다보지도 않고 발전시켜온 물질문명은 공해라고 하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질과 경제의 효용성을 앞세운 문명의 일대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신리를 알고 만생만물은 상호 의존의 관계를 맺고 존립한다는 것을 알았다. 상념을 중심으로 본능, 감정, 이성, 지성의 조화가 늘 이루어져 있는 마음의 상태, 그것이 바로 원만한 안심의 모습이다. 

이성은 마음의 제동장치이며,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는 자신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조화한 감정적인 상념행위는 상대에게도 좋은 영역을 줄 수 없다. 우리는 마음의 안정과, 지성으로 얻어지는 부동심을 확립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 가운데 한 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물질적·육체적 쾌락에 빠져 허둥거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은 항상 생과 사, 물질과 경제 등 온갖 욕망의 늪 속을 헤매기 때문에 신성, 불성을 깨닫기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기 전에는 이번에야말로 카르마를 수정하고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태어나는데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허송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혹자는 왕으로 군림하여 자기 욕망대로 살다가 연옥에 떨어져서 인생에서 지은 죄업을 씻게 되는데, 천신만고하여 간신히 천상계에 올라간 자도 있다. 그래서 천상계에서 곰곰히 반성하여 이번에는 반대로 가난한 환경을 택해서 태어나 열심히 땀흘려 일하면서 이웃을 돕는 생활을 통해서 성공적인 인생을 경험하기도 한다.

사람은 저마다 이와 같이 천차 만별의 인생을 자기 희망에 따라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그 마음의 상태대로의 인생을 보내고 있다. 그 마음이 올바른 법을 깨닫고 있으면 번뇌에 대해서는 이성의 브레이크가 잘 걸리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드물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의식의 중심인 마음은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온갖 고락의 인생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번뇌에 지배당하기 쉬운 마음을 정법에 귀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평안과 조화의 불성을 자각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불퇴전의 정법을 알아야 한다.

이 현상계의 만생만물은 조금도 쉬는 일이 없이 변하고 있으며 그 위치에 그대로 멈추어 있을 수 없다. 또한 무엇 하나 자기의 소유물이라고는 없다.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부모 형제도 심지어는 자신의 육체마저도 이 세상을 떠날 때는 가져갈수 없다. 모든 것이 이 현상계에서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교재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인생의 진상이다.

저 세상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인생 항로에서 경험한 일체의 선과 악, 잠재의식에 수록된 상념과 행위의 기록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하루가 후회없는 삶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반성하는 마음은 인간을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여 영혼을 정화시켜 준다. 노여움, 비난, 탐욕, 어리석은 마음을 멀리함으로써 일체의 괴로움의 원인을 끊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 속의 악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마음 속의 악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사리 사욕, 부귀영화에 끌리는 유혹을 무리치고 일념삼천의 바늘을 항상 빛의 세계, 조화의 세계에 맞추어 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해손득, 정욕, 지위, 명예 등의 집착에서 떠나 항상 겸허하게 정법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물질경제문명의 고도 성장으로 말미암아 현대 사회의 인간들은 거의가 다 마음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는 올바른 마음을 되찾아 자아아욕을 물리치고 진심의 정신문명을 물질문명 위에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비록 억울한 비난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하고 칼로 베이는 한이 있어도 노여움의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인욕의 마음을 가지고 일체의 현상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으로써 올바르게 생활해야 한다. 행여 육체가 찢기는 한이 있어도 노여움의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신리의 생활을 지킬 수 있다. 

마음이 정법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운 일도 완수하고 잘 견디며 베풀기 힘드는 경우에라도 곧잘 보시해야 한다. 선생을 해도 결코 그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하며 자신에겐 엄격하고 남에겐 항상 관대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인생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물질문명이 향상도어 경제적으로 의식주가 안정되면 인간은 여분의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그런 의욕을 부추기는 사람이나 그런 욕망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장사꾼들은 마음에 평안이 없고 마음속에 언제나 격투가 그칠 날이 없는 삶의 주인공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만성화된 사람도 많다.

마음을 설법하는 자가 사리사욕의 욕심을 품으면 더욱 어두운 상념에 지배되어 마음의 평안을 잃고 육체적으로도 부조화한 현상이 나타난다.

종교 지도자 가운데 늘 몸이 아픈 사람은 마음 속에 격투가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지도자가 지와 의만으로 중생을 지도하게 되면 마음의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신자들을 불행에 빠뜨리는 짓은 가장 큰 죄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지도자는 현상계에서 이미 지옥의 생활을 체험하고 있으며, 저 세상에 돌아가서는 더욱 신랄한 반성이 요구되는 고통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다.

나와 같은 영능자는 이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을 수 있다. 그들의 마음을 구석구석까지 즉석에서 가장 명확하게 지적할 수 있다. 믿든 믿지 않든 이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영능자의 마음은 항상 빛의 세계에 통하고 있기 때문에 일목요연하다.

신심이란 자신의 마음을 믿는 것이다.

기독교나 불교는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마음의 양식이다. 형식적인 염불로써 인간을 구제할 수 없다. 만일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기도하는 것만으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 떨어질 리가 만무하다'는 속담을 한번 새겨볼 일이다. 신리적 생활 이외에 인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랜 전통적인 종교 행사가 신리일 수 없다. 이승을 떠난 망령들에게 경문을 공양해 줌으로써 그들이 과연 성불할 수 있을 것인가 한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경을 외는 기도만이 신앙이 아니다. 마음을 상실한 종교 활동으로 가정 생활에 지장이 생긴다면 이것은 이미 안심입명의 신앙의 목적을 잃고 있다.

신리에 맞는 인생을 항해한 사람들은 이승을 떠난 뒤에도 광명의 세계에 거주하게 되며, 반면 부조화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불안에 떤 사람들은 지옥계에서 자신의 본성을 깨달을 때까지 암울한 생활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상에 대한 공양은 생존한 자손들이 밝고 바르게 생활하는 길뿐이다. 그것이 조상에게 최고의 기쁨이며 최대의 공양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조상은 자손들의 마음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도 반성할 수 잇는 기회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조상 탓에 불행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족들의 마음이 신리에 어긋나고 있지나 않은지 한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아름다복 건강하며 평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공양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인간의 불행은 살아있는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부조화한 상념행위가 방황하는 빙의령을 불러들임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이다. 가족 전체가 항상 정도를 걷는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이 신불의 빛에 싸일 뿐만 아니라 그 가정도 또한 빛으로 덮히기 때문에 방황하는 망령은 이 빛에 의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성불할 수 있게 된다.

살아 있는 인간들이 영역을 정화하는 것은 방황하는 망령을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구제하는 길이 된다. 마음을 잃은 경을 몇 만 번 외워보아야 그것은 인내력과 성대를 단련시키는 연습은 될지언정 자기 자신이 마음을 구할 수는 없다. 경의 내용을 실생활에 살리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에도 석가의 가르침에도 투쟁이라는 말은 없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인내',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뺨 마저 대어 주라', '인욕', '원수를 부모님처럼 공경하라' 등 조화가 신리임을 깨닫게 하는 말들뿐이다.

미담으로 여겨졌던 '원수 갚기' 등은 신불의 자녀로서는 할 짓이 아니다. 충동적 감정적 행위에 다름 아니며 이 원수에 대한 앙갚음의 파장은 반드시 나 자신에게 반작용으로 되돌아 온다.

'부모의 원수다', '주인의 원수다' 하고 항상 평안이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이 과연 인간의 참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인욕이 필요하다.

인과응보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나타나난다는 것인데, 결과에 응분하여 앙갚음한다는 것은 더욱 그 죄목을 무겁게 할 따름이다.

응보라는 것은 자신이 발신한 어두운 상념의 결과가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말한다. 물리적인 제재를 가하는 것은 좋지 않다. 죽은 부모의 원수를 갚아보아야 그 원수의 아들은 또 '부모의 원수다'하고 자신을 겨누게 되니 이 악순환은 그칠 날이 없다.

원수를 갚겠다는 상념은 아수라계에 통해서 어둡고 검은 빛이 자신을 덮쳐 자신이 지옥계에 떨어진다. 그래서 이 지상계의 집념보다 더욱 강력해져서 연옥 지옥에서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된다. 지옥계에서도 서로 앙갚음의 보복행위는 그칠 새 없이 되풀이되며 이 지상계보다 몇 십 배 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원수를 갚기 전에 이런 결과를 낳게 한 원인을 추궁해서 어디까지나 냉정한 중도의 입장에서 이성의 힘을 발휘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지혜있는 인생의 수행을 완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법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상대를 원망하는 일이 없으며 오히려 연민의 정을 가지고

"하느님, 이 불쌍한 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잘못된 상념을 바르게 잡아주시고 마음에 평안을 내려 주십시오."하고 상대를 위해 기도해 준다.

"원수를 원수로써 복수하지 않는다."

라는 도량이 참다운 보살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행위는 반성하지도 않고 지위나 권력의 힘으로 상대의 목숨을 배앗는 자기중심의 어두운 상념은 언젠가는 그 입장이 바뀌어 자기 자신이 아픈 맛을 보게 된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복수는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인간은 자신의 상념과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 어람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떠한 사소한 문제라 하더라도 그 원인과 결과를 잘 살펴서 판단을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깔보아서는 안 된다. 어쩌면 장차 우리들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지 모르는 존재이다. 아무리 조그마한 불이라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작은 불씨가 이윽고 광대한 산야와 대도시를 연소시킬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물방울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차돌까지도 뚫는다. 실날 같은 물줄기도 대하에 이르면 모든 물체를 밀어 붙이는 힘을 발휘한다.

마음의 문이 ㅇ려리면 대자연이 생활의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인생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정법을 실천함으로써 번뇌가 소멸되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이 인생의 중심이다. 마음이 이 지상계의 여러 현상에 유혹당하여 쾌락에 빠지면 고통과 혼미가 생겨나고, 반대로 마음이 정도를 찾아 편안햊면 깨달음과 법열의 기쁨이 찾아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실천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본성을 깨달을 것,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 남에게 보살행을 실천할 것, 더욱 마음을 정화해서 평화와 조화가 있는 사회를 반들어 낼 것 등을 실천해야 된다. 여기에는 물론 집착이 없어야 한다. 육체는 누누히 말해 왔지만 인생항로를 건너는 나룻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목적지에 닿는 날에는 내버려야 할 물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에 대한 집착으로 온갖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의 의식, 영혼은 항상 일정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동하고 있으며 변화무쌍하다. 만생만물은 신불의 법인 인연에 의해서 성립되며 전생윤회의 법에 따르고 있다.

마음에서 생겨나는 악의 눈을 떼버려야 하며 이미 현상화된 악의 결과는 잘 반성해서 그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선근을 키우고 정법을 믿으며 올바른 상념과 행위를 실천하고 항상 반성으로 마음을 정도에 올려놓음으로써 위대한 불지의 문은 열리게 된다.

자는 사랑해서 키운다는 뜻이고 자의 마음을 가짐으로써 탐욕을 끊을 수 있다.

비는 불쌍히 여겨 도운다는 뜻이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중도의 마음을 잊지 않으며, 이 비의 마음을 가짐으로써 노여움을 끊을 수 있다.

희는 타인의 기쁨을 나의 것처럼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하고, 이 희의 마음을 가짐으로써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심을 없앨 수 있다.

사는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보수를 바라지 않는 마음을 말하며 은인과 원수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집착의 마음을 끊을 수 있다.

그래서 중생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자비이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차별없이 대하고 중생에게 환희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 이것이 희사의 정신이다. 그러나 이 자비희사의 마음을 가지고 번뇌를 이겨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도를 지키는 일도 또한 어렵다.

올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인생항로에 있어서 올바른 상념행위를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부동심은 길러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