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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5장 신리의 참 언어-의식

by Yuneelif 2023. 2. 7.

영도개안은 사명 완수를 위한 첫걸음

1970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나는 법우들과 함께 시즈오까현 후지기시에서 제1회 연수회를 개최했다. 

목적은 도시의 소음을 피해서 집단 생활을 하면서 그제까지의 과거를 반성하고 자신을 조용히 살펴봄으로써 마음과 행동의 결점을 수정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엄격한 계율 같은 것이 없는 가장 자유스러운 집단 생활을 통해서 팔정도를 근본으로 한 상념과 행위를 실천하고,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했던 것이다. 만성화된 일상 생활의 타성을 타파하고 마음의 청량제가 된다면 이 연수회는 성공적이며 우리의 영혼을 한 계단 더 승화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단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결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곧 그 결점을 수정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기 때문에 늘 그 결점을 감추려고 하는 나머지 오히려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신을 훌륭하게 꾸미려는 자기 비호의 마음은 거꾸로 자신의 마음에 어두운 상념의 구름을 끼게 한다.

자신의 속 마음과는 달리 외관을 좋게 꾸미는 언동은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공허하고 씁쓸한 느낌을 안긴다.

자기 보존의 본능에 의해서 남에게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자기 자신을 조그마한 틀 속에 가두어 버린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한편 여성들이 미적 본능에 의해서 옷과 화자으로 외모의 단장에 힘쓰는 경우도 있다. 추한 것을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는 오히려 자기 자신과 외부와의 조화이며 자연스러운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표현이어야 할 것이다.

또는 아무리 고통스러운 병상에 누워 있는 몸이라 할지라도 문병객들에게 미소로써 대해 주는 마음씨는 상대방에 대한 보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질병은 육체의 고장이지 마음의 결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질병이라는 것도 어떤 원인이 있어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좋은 반성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거짓말도 방편'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거짓이 제 삼자에 대한 조화를 위한 것이라면 자비의 모습, 보살심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곧잘 마음 속에는 원망, 질투, 비방, 노여움을 품고 있으면서도 막상 상대방과 대면하면 그 속 마음과는 반대의 언동을 취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것은 올바른 마음가짐, 조화라고는 볼 수 없으며 자기보존의 허위심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부조화가 일어났을 때에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조화에의 첫걸음이며 마음의 짐을 벗는 길이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들으며, 바르게 말하는 팔정도에 부합되는 생활이다.

자신의 허영심을 행동으로 나타내보아야 괴로움ㅁㄴ 쌓일 뿐이며 그것은 공허한 인생이다.

'무사는 먹지 않아도 이쑤시개질'이라고 하는 무사도의 정신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에만 있는 것이며 신리와는 거리가 먼 허영심에 지나지 않으며, 자기보존의 조화를 깨뜨리는 사고 방식이다. 

마음에 거짓이 없는 생활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진솔하게 토해낼 수 있는 사람은 상념에 구름을 끼지 않게 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마음에 구름이 없으므로 괴로움이나 슬픔의 원인을 만들 리 만무하며 그런 마음은 신불의 빛에 싸여 환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괴로움이나 슬픔이 어떤 결과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원인, 즉 연을 멀리해야 한다. 정법은 이러한 올바른 자신을 확립해 가는 길이며,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한 신의 뜻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내용을 안고 연수회에 참가한 회원들은 정법의 실천 생활을 했다. 이 연수회를 지도한 간부 가운데에는 남의 마음 속에 낀 어두운 상념을 찾아낼 수 있는 영능자도 있었다.

이 영능자들은 마음의 눈이 열려 있기 때문에 마음의 조화도에 다라 발생하는 아로도 볼 수 있고 마음의 부조화에 의해서 빙의한 어두운 악령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차원이 다른 세계, 즉 실재계에도 가 볼 수 있고, 이 지상계 어디든지 즉시 신족(신기할 정도로 빠른 발)으로 달려갈 수 있는 관자재력을 갖춘 분들이다. 저세상의 사람들과 즉시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자도 있다. 이 능력자는 생전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망령이라도 그의 특징이나 생전의 이력들을 모조리 알아버리니 그의 영능력을 부정할 수 없다.

단, 지옥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망령들은 지상계에서의 생활을 잊어버리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생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기가 힘들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종의 기억 상실에 빠져 암중 모색의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것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등속운동, 즉 관성의 법칙이 반드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상계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물질적인 집착심이 강했던 사람들의 의식이 관성의 법칙에 따라 등속 운동을 되풀이하고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천상계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승에서의 과거를 기억해서 말할 수 있으므로 저승의 존재를 실증하는 데에는 다시 없는 증인이다.

또 지상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 수호령, 지도령들의 모습도 당장에 알아볼 수 있으며 서로 대화도 나눌 수 있다. 수호령, 지도령들은 늘 곁에서 지켜주고 있는 저 세상의 영혼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당사자의 성격이며 특징, 경력 등을 죄다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수호령이나 지도령의 입을 통해서 당사자의 신상을 모조리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인간의 의식 속에 기록되어 있는 상념과 행위의 녹화 테이프를 보는 일도 가능하다. 심안으로 확인되는 의식의 녹화 테이프는 빛깔별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당사자의 마음의 모습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결코 꿈이나 착각이나 자기 최면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비과학적이라고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진성을 알고 있을까.

부정은 탐구를 중지하는 행위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나 전자기의 실용화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인가. 

부정하기 전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의문을 가지면 탐구하게 되고 과학적인 노력으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행전 제2장의 영적 현상이 현재 나의 둘레에서 일어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부터 2000년만에 여러 사도들에 의한 영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이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마음을 상실하고 머리로 배운 지식만으로 영적 현상을 부정하는 자는 지의 늪에 빠져 어리석게도 눈 앞밖에 못 보는 자이다.

자기 과시, 자만, 오만에 빠진 자는 남의 의견에 좀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기의 좁은 소견을 고집하고 외골 인생을 걸어가는 자들이다. 남의 생명을 경시하고 남의 고통을 외면하는 위인이다.

올바른 결론은 체험을 통한 연구 탐색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근거가 없는 부정은 자기 자신마저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인생이 난해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인생을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의 지와 의가 신리의 보고를 잠궈 버렸다. 

연수회를 통해서 이러한 신리의 실천 활동과 관자재의 영능자들의 지도에 의해 마음이 수정됨으로써 그 동안 부조화했던 회원들의 어두운 마음에도 평안의 빛이 비춰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신불의 자녀이며 이러한 영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능력은 마음의 구름을 벗김으로써 누구나 지닐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본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은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관자재력의 영능이 있는 사도들은 남의 마음을 즉석에서 알아버린다는 사실을 연수회에 참가한 회원들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자기 마음 속의 어두운 구석을 숨기고 더어두려고 하는 사람들은 구제받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법에서 이탈하여 괴로움과 슬픔의 인생 항로를 스스로 자진해서 걷는 자들이다. 하지만 반성의 마음만 있으면 상념과 행위의 잘못을 수정하여 편안한 인생을 엮어갈 수 있다.

신리는 인간의 힘으로는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다. 비록 일시적으로 폭력이나 권력에 의해서 배척된다 하더라도 태양이 동에서 떠서 서쪽에 지듯이 언젠가는 미망한 인간의 마음에 환한 빛이 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에 대해서 진실을 추구하고 있다.

연수회는 참가자의 마음을 씻고 인생의 가치를 알게 하며, 인간은 누구나 지금 수행 도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연수회에 참가하여 한두 달 사이에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 가운데 열세 살 된 중학생 2명이 있었다. 생명의 전생 윤회를 깨닫고 약 2500여 년 전의 중인도 바라나시의 도시와 제다베나에서 비구니 생활을 했던 당시의 상황을 말하였다.

또 다른 한 사람의 중학생은 스탓다 장자의 딸로 태어났던 2560여 년 전의 인도 시라바스티의 기억을 더듬었다.

카피라성의 아사지의 이름과 바라나시의 미가다야에서 고타마 붓다의 제자가 된 야사라는 아라한의 이름을 기억하여 당시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또 고타마 싯달다의 의모 마하파쟈파데의 시녀였던 비구니가 과거세를 기억하여 붓다의 제자로 입문할 당시의 경위를 설명하였으며, 한편 데바다바성의 무사였던 자신의 과거세를 기억해 낸 사람은 마하베나에서 붓다의 제자가 되어 붓다의 가르침을 받았던 당시의 상황이며 설법 내용을 말했다.

그러나 영도가 열리고 이러한 과거세를 회상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다. 과거세를 알았으면 금세에서는 더욱 분발하여 인생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다. 영도는 정법에의 첫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실제의 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로 인해 자신에겐 더욱 엄격하고 타인에겐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익을수록 고개를 더 숙이는 벼이삭'이란 격언처럼 겸허한 마음과 행동으로써 자신을 다스려 나가는 것이 도다.

인간은 남보다 앞선 특기, 지위, 명예, 가문 등으로 우월감에 젖고 오만에 빠지기 쉽다. 인간이 거만해지면 그 마음은 이미 몰락의 내리막길을 치닫는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인생의 신리이며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는 산 법칙이다.

인간의 마음은 일념삼천이라는 말과 같이 어디라도 통하는 것이며, 행복해지는 것도 불행해지는 것도 모두가 다 자신이 만들어 내는 상념행위의 결과다. 이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의식은 영혼

의식이란 영혼을 말한다.

이 의식은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신의 주인공이다.

저승과 이승을 전생윤회하면서 지상 환겨에 적응한 육체를 지니고 자신의 영혼을 연마하면서 신체인 이 현상계를 평화스러운 불국토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지상에 태어났다.

옛부터 영혼이란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언급해 왔고 나 자신도 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지만, 그 실체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해서 마치 구름을 잡는 듯하여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열 살 때부터 현재까지 '또 한 사람의 나 자신'을 추궁해 왔지만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몇 번인가 벽에 부딪혀 한때는 공부를 중단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영혼이란 문제를 종교적인 학문이나 형식에 의해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지식으로 배운 철학의 힘으로 이것을 알 수만 있다면 오늘날과 같은 불교 기독교의 몰골로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안 것을 마음으로 소화시킴으로써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능 현상이 중단되는 수가 있는데 그 원인도 인간의 마음이 물질적 경제적 욕심으로 비뚤어져 신불의 자녀로서의 자각을 상실하여 위대한 불지를 끌어낼 수 없게 된 데 기인한다.

나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인간은 왜 생각할 능력이 있는 것일까. 왜 괴로워하면 피로해지는 것일까. 왜 잠잘 동안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는 것일까 등등 온갖 의문을 품고 있었다. 깨어 있을 때와 잠자고 있을 때의 차이점 등 나의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며 언제 해답을 얻을지도 모르는 나의 탐구 생활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육체야말로 자기 자신에 다름 아니며 육체 조상이 우리 영혼의 제공자라고 하던 생각이 내 안에서 붕괴되었다.

그리고 내가 알아 낸 것은, 우리들의 육체는 이 현상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신불의 설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수행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차원이 다른 의식의 세계야말로 실재계의 세계이며, 이 현상계는 실재계의 수행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보다 고차원으로 진화시키기 위해서 고락이라는 인생 항로가 필요하다. 영혼이 육체배를 타게 되면 신불의 자식으로서의 사명을 자각하기는 커녕 육체의 눈·귀·코·혀·몸이라는 오관에 사로잡혀 그 본성마저 잃고 만다. 저 세상에서 약속하고 다짐했던 일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조상과 가문, 지위, 명예, 그리고 자신의 육체에 집착하게 된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인간이다.

의식, 즉 영혼이야말로 진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육체 오관이 감지하는 현상계에 마음이 사로잡혀 자신의 본성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물질에는 에너지가 공존하고 있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에너지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육안으로 볼 수 없다. 에너지 입자가 집합하여 이루어진 물질에 관해서는 계량과 실험, 데이터 등을 수학적으로 산출해서 객관적인 고찰이 가능하다. 그리고 육체적인 요소에 관해서는 그 모습을 육안으로 관찰할 수가 있지만 의식을 육안으로 보는 것은 심안이 열린 사람 이외에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볼 수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정신적으로 고민했을 때 어째서 피로를 느낀단 말인가.

우리들이 육체 노동에 의해서 피로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피로하다는 것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 노동에 의해서 소모된 에너지는 동물, 식물, 광물의 에너지를 흡수함으로써 회복된다. 타액과 함께 식도를 통해 위 속으로 들어가서 위액과 함께 소화되어 피나 살이나 뼈가 된다.

이 때 타선에서 입안에 분비되는 소화액은 소화를 돕는 미세한 균이다. 이 세균은 매우 작은 것이며 그들은 아마 우리의 위를 거대한 우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들이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며 놀라고 있듯이 육체의 세포 집단을 은하계 우주처럼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

이 조그마한 세균 하나가 부조화를 일으켜도 우리들의 육체는 변조를 일으킨다.

이처럼 인류의 부조화가 얼마만큼 지구에 영향을 미치고 대우주에 해를 끼치는가 하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화야말로 우리 인류의 지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대조화의 법칙을 잊어버리게 되는 원인은, 우리의 영혼이 육체의 옷을 입게 되면 잠재의식과 표면의식의 비율이 달라져서 자신의 본심을 망각하게 되고 자기보존과 아욕의 포로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마치 물이 열 작용에 의해서 고체, 액체, 기체라는 세 가지 모습으로 변화하듯이 의식의 표출 비율도 변화한다. 변화는 하지만 물로서의 본래의 성질 H2O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H2O 중의 열 에너지 입자가 변화할 따름이다. 온도가 영도 이하가 되면 H2O의 분자는 집중되어 고체가 되고 거꾸로 온도가 상승하면 열 에너지 입자는 분산되어 수증기가 된다. 같은 성질인 H2O도 온도의 변화에 따라 고체, 액체, 기체의 세 가지 모습으로 변화함과 동시에 그 비중도 차이가 난다.

액체인 물 속에 얼음 덩어리를 넣으면 서로의 비중이 다르기 때문에 얼음덩어리는 떠서 수면에 고개를 드러낸다. 그러나 대부분은 물 속에 잠겨 있다. 그 비율을 보면 약 10%가 수면에 나오고 90%는 수중에 잠겨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의식도 저 세상 이 세상을 왕래하면서 그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의식의 승용차가 달라질 뿐이다.

이 현상계에 육체를 지니고 태어나면 표면의식은 10%가 되고 90%라는 대부분의 의식은 잠재의식으로 숨어 버린다. 때무에 우리는 영혼(의식)의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슬픔이나 괴로움이 많은 험난한 인생 항로에서 자신을 똑바로 보고 육체의 지배자인 마음과 잘 상의해서 팔정도의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의 문은 열릴 것이며 인간으로서 태어난 목적과 사명도 깨닫게 된다. 이 때의 기쁨은 말로써는 표현 못할 정도다.

자기보존, 자아아욕에 의해서 만들어진 어두운 상념이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의 조화를 방해한다. 어두운 상념의 구름에 의해서 신불의 빛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인간은 슬픔과 고통의 인생을 스스로 피할 수 없게 된다. 신리에 의존한 생활 이상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길이 없다.

아무리 영적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신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은 자비도 사랑도 겸손도 없으며 오만에 빠져 버린다.

종교 지도자들은 정법에 귀의해서 우선 정법에 따른 생활을 체험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연후에 신도들을 지도해 나가야 한다. 신불의 가르침을 설법할 경우에도 교단이나 종파를 고집하여 신리를 왜곡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지식으로 습득한 학문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 실천이 따르지 않는 종교가 과연 신리라고 할 수 있을까. 10%의 표면의식에 의한 가치 판단은 번뇌에 떨어지기 십상이다. 자기 보존적인 사고 방식을 떨쳐 버릴 수가 없고 외면적인 현상에 사로잡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중심인 마음, 이 마음이 감동했을 때에는 누구든지 가슴에서 치밀어오르는 그 무엇을 느낀다. 가슴에서 치밀어올라 눈물이 나오는 그런 감각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속마음이 우리들의 과거세의 기억과 위대한 불지의 보고에 다름 아니다.

70~80세의 인생 경험은 향불과 같은 수유의 것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몇 억 몇 만 년 그칠 줄 모르는 전생윤회를 거친 모든 경험을 잠재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자기 자신의 마음의 상태는 과거세의 자신의 경험의 축소형 내지 상사형에 다름 아니다.

어느 때는 임금이었으며 어느 때는 거지였기도 했다. 또 예술인, 시인, 승려 등 저마다 여러 가지 인생의 경험을 거친 후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육체를 지니게 돠면 이러한 과거세의 축적된 경험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정법을 깨닫고 올바른 생활을 함으로써 잠재의식의 문은 열려 수호령이나 지도령의 도움을 받아 축적된 지혜를 끌어내어 더욱 풍부하고 뜻깊은 인생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생활이야말로 신불의 자녀로서의 참다운 자세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인류는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 자기보존, 자아아욕의 어두운 상념에 싸여 투쟁과 파괴의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인류의 부조화한 상념이 신체의 일부인 이 지구의 영역을 무너뜨렸고 지구는 어두운 상념에 덮혀 신불의 빛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지금도 그런 상태이다. 우리들의 마음이 신리를 깨달은 생활을 하고 있으면 육체에서 발생하는 후광이 금색으로 보이지만 마음이 부조화한 사람들의 후광은 어둡고 빛이 희미하다. 가정도 조화를 이루면 그 집에서 환한 후광이 나타난다는 것이 영능자의 눈에는 보인다.

 이러한 가정은 모든 가족들의 마음이 아름답고 화목하며 질병과 재난이 없는 행복한 환경으로서 신불의 빛에 싸여 있다.

반대로 어두운 상념의 가정은 가족들이 음울하고 웃음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환자나 돌발 사고가 자주 발생하며 신불의 빛을 받을 수 없다.

가족들의 마음의 조화도가 좌우하기 때문에 그 부조화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가족들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다.

자기보존, 자아아욕이 강한 사람들의 집단은 한 국가의 영역마저도 어두운 상념으로 덮고 만다. 나라의 혼란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의 혼란에서 온다. 지도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기 전에 국민 각자가 마음을 자각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물질의 노예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만족할 줄 아는 생활 가운데 진정한 평화, 진정한 인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음의 존엄성을 깨달아 잠재의식의 문을 열고 지의 학문을 마음 속에 흡수하여 생활에 실천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연마하고 나아가 사회와 인류를 위해서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봉사를 아끼지 않을 때 진정한 보살심이 싹트게 된다. 보살심에는 용기가 따르는 법이다.

잠재의식의 무한대의 보고는 정법 생활에 대한 자신의 노력과 수호령, 지도령의 협력으로 열 수 있다. 마음의 왕국의 지배자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과거의 캐캐묵은 문헌이나 지와 의로 개조된 경을 보물단지처럼 안고 있을 뿐, 자기 자신의 올바른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자연과학 분야에 있어서는 문헌은 도움이 되지만 종교적인 서적의 대부분은 인간의 지와 의가 가미되어 마음을 상실한 경우가 많다. 교조의 생년월일이 틀렸다든가 가문이 어떻다든가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 '진짜 마음'의 문제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여기가 본가의 정통파이고 저기는 분원이다 등으로 종파 내에서의 세력 싸움은 이미 불법도 아니고 신리도 아니다. 이러한 형식주의는 이미 마음을 잃은 말법의 모습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와 행위'이다. 종교가 신리를 잃고 형식주의에 빠져 중생에게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설법할 수 없다는 것은 화석화된 전세대의 유물이라고밖에 표현할 일이 없다.

그 원인은 오랜 역사의 과정에 있다. 정법이 그때 그때의 권력자의 손에 의해서 변조되고 정책의 도구로 사용됐던 사실이 이를 여실이 증명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육체를 지니고 인생의 수행을 하고 있는 개인에게도 책임이 있다. 마음의 세계를 탐구하지도 않고 물욕에 빠져 욕망대로 살아가려는 개개인이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매스컴에 대해서 언급해 보면, 돈만 벌 수 있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무엇을 보도하건 상관 없다는 사고방식은 재고되어야 한다. 인류 사회의 조화와 평화를 위한 보도라면 참된 평안을 줄 수 있지만 정욕을 유발하고 인간의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저속한 기사는 독을 뿌린다. 인간의 마음을 한때는 사로잡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외면 당하게 마련이다.

진실하지 못한 것을 출판하거나 영화화하는 사람은 그 부조화한 상념의 반작용을 받아 그의 마음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힌다. 그들은 언젠가는 뉘우칠 날이 있을 것이다.

지위나 명예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어두운 상념은 스스로 부조화한 괴로움과 아픔을 불러들이게 된다는 진리를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정법의 레일 위를 달리고 있는 사람과 그 레일을 무시하고 달리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다르며, 죽어서 이 현상계를 떠날 때에는 자기 자신이 정부(옳고 그름)의 심판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도 예외 없이 그런 순간을 맞게 될 날이 일초일초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조상 예배나 타력 신앙에 의해서 구원받는다고 하는 그릇된 종교에서 깨어나야 한다. 특히 불교는 지식으로 배우고 머리의 판단으로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불교의 신리는 한 가지뿐이다. 몇 백을 헤아리는 종파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지와 의의 산물일 뿐 거기 마음이 있을 리 없다. 만일 이 사실을 부정하고 나서는 스님이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진짜 불제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보고 싶다.

진짜 불제자라면 자기보존은 없을 것이다.

종파의 난립에 당연히 의문을 가질 것이다.

권력욕에도 의심이 갈 것이다.

노여움, 시기, 질투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일체의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을 상실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생로병사의 근본을 깨닫고 중도의 상념행위로써 정법의 진수를 밝힐 것이다.

보시에 대해서는 만족할 줄 알 것이며,

겉모양에 사로잡히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입장에서 자비와 사랑을 베풀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정욕에 마음이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항상 정법에 따르고 있으며, 올바른 마음 그대로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진짜 불제자라면 고락의 인생에서 해탈해 있을 것이고, 사부대중에게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가르치고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겐 관대하며 생사를 초월하고 있을 것이다.

영혼의 전생윤회를 똑똑하게 깨닫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상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진짜 불제자라고 할 수 있다. 종이 위의 논문으로 깨달을 수는 없는 일이며, 상념과 행위의 조화에 의해서 마음의 문은 열린다. 거기에 조화에 의한 기쁨과 평안의 세계가 전개된다. 지는 망므을 우선할 수 없다. 마음이 있으므로 지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석가나 예수는 대학에 다니지도 않았다. 종교의 전문가도 아니었다.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인간의 지와 의의 먼지가 묻은 낡은 성서나 불경을 버리고 우리는 올바른 마음 속에 잠재해 있는 신리를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잠재의식의 문을 열고 종교적인 영혼의 체험을 쌓아가는 길이야말로 인생의 정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깨달음은 일초일초의 정진 가운데서 싹트는 것이며, 그 노력의 축적에 의해서 마음의 세계는 신불의 빛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신불과 표리일체의 조화와 평안에 근접해 간다.

지식의 길만을 좇고 있는 학자들은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고 있으므로 영적 현상이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금기사항처럼 기피하고 있을 정도다. 의문은 가지고 있지만 입 밖에 내기를 두려워한다. 지위욕, 명예욕, 금전욕, 정욕은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러한 인간들에게 마음의 평안이 있을 리 없다. 외면의 허식에 비해서 마음 속은 모순 덩어리다. 이것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외면의 겉치레로써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이 원인은 지와 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기보존의 상념행위에 있다. 육체에 매달린 번뇌에 의해서 자신의 본성을 상실한 데 그 원인이 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부조화한 상념행위, 즉 신불의 자녀다운 자각을 망각하고 동물적 본능대로 살아가는 인간들, 투쟁과 파괴를 생각하고 있는 인간들, 종교의 미명 아래 인간의 마음을 타락시키고 있는 지도자들, 자기 보존만을 생각하고 남의 불행을 돌보지 않는 인간들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말법의 모습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도 사회제도가 너무나 외면적 현상에만 치중되고 내면적인 마음의 문제에 대한 교육이 부족한 데 그 원인이 있다. 그 결과 부자연스러운 신흥종교가 난립하여 인간의 마음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벌을 주는 신불이 있다면 그런 신불은 버려야 한다. 벌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 결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지적 학문에 의해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고 시험지의 채점으로써 인간의 지위를 결정짓는 사회구조는 자아아욕의 입신출세형의 인간을 낳고 급기야는 정신이상자가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앉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

마음과 지식이 조화된 사람이야말로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있으며 보다 나은 사회의 조화와 정신 정화의 역군이 될 수 있다.

육체를 떠난 우리의 영혼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이며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불생불사의 윤회하는 보배이다.

육체는 자신이 아니다. 언젠가는 이 현상계에 벗어던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육체의 운명이다. 그런 육체에 집착하는 나머지 온갖 고뇌를 생산하고 있다. 한시바삐 이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

저 세상과 이 세상의 전생은 육체의 갈아타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알 때 죽음은 인생의 종착이 아니라 이승의 졸업이며 저승에의 귀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용기있는 자는 인간의 마음을 물질 경제의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손잡고 나갈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

 

의식의 중심은 마음

마음은 육체 내면에서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의 중심이며 영혼의 핵이다.

마음이 육체를 부리게 되면 외계의 여러 현상에 사로잡혀 본성을 잃게 마련이다. 마음은 붙잡아두기가 어렵고, 경솔하여 동요하기 쉬우며,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분수를 지키기가 어려워 그 목을 잡아죌 수도 없는 괴물이다.

자기보존으로 치닫고 아욕에 탐닉하기 쉽다.

그러나 마음은 그 중심 핵에 가까울수록 신불의 자녀로서의 자각심과 선악의 판단력이 뚜렷해진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사실이며 마음의 중심 핵이야말로 무한대의 우주 생명과 상통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다.

중심에서 벗어나 멀어질수록 의식은 오관의 영향을 많이 받아 번뇌에 사로잡히기 쉬워진다. 의식의 세계는 무한대로 확대될 수도 있고 정교한 극미의 세계로도 통할 수 있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선과 악의 세계에도 통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일념삼천이다.

대우주의 지배자는 만상만물의 에너지의 근본이요 중심이다. 이 지배자야말로 신불에 다름 아니며 대우주체의 의식이다. 

우리의 의식은 대우주체의 분신이다. 분신은 우주의식과 조화하기 위한 수행을 거듭하고 있으며, 저승과 이승 사이를 전생윤회하는 영원한 영혼으로서 보다 고차원의 의식세계로 지향하기 위한 연마를 거듭하고 있는 존재다.

육체를 지니고 있는 개개의 생명이 부조화하고 불안전한 경험을 통해서 고차원의 조화로 나아가는 학습 과정에 있다. 개중에는 후퇴하는 자도 있고 진보하는 자도 있다. 개개인의 노력의 정도에 따라 상반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음, 욕정대로 움직이는 마음, 미묘한 마음, 정처 없는 마음, 침착하지 않는 마음, 성내는 마음, 기쁜 마음, 슬픈 마음.

이러한 마음을 올바른 신리에 따라 고삐를 잡고 제동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음의 올바른 신리를 깨닫지 못하고 방종으로 흐르는 사람은 마음이 불안하고 신념도 없으며 마왕의 손아귀에 붙잡혀 자신을 잃게 된다.

올바른 신리를 깨달은 사람은 마음에 번뇌가 없으므로 상념의 헤맴이 없고 항상 신불의 빛에 싸여 있으므로 상념은 대우주로 넓어지며 여러 가지 현상에 흔들리지 않는다.

항상 중도의 마음을 지니고 선악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상황에도 결코 당황하지 않으며 두려움이 없다. 괴로움도 없고 늘 만족할 줄 알며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고 생활한다.

현상에 절대로 붙들리지 않는 마음을 불퇴전(굳게 믿어 움직지 않음)의 마음이라고 하며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