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박령·부유령
영혼이 타고 부리는 배에 지나지 않는 육체에 미련과 집착을 가지게 됨으로써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이런 현상계에 대한 집념이 지박령, 부유령 등이 되어 현상계의 인가네게 여러 가지 부조화한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박령은 교통사고 현장, 불의의 죽음을 당한 장소, 자살 현장, 전쟁터, 제사지내는 장소, 신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 지상계에 미련을 강하게 남긴 장소 등에 붙박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든 못하든 간에 살아 있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내 장소다, 내 물건이다'하고 집착을 가지며 거기 머물러 있다.
'건드리지 않는 귀신은 설치지 않는다.' 택지를 조성할 때에는 설령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땅의 지박령에게 신리를 가르쳐 주고 사용하겠다는 취지와 양해를 사전에 얻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야 할 정당한 장소, 이승과 저승의 다른 점, 신리 등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철도 사고는 특히 건널목 같은 곳에서 자주 일어난다. 이것은 그 장소에 지박령으로 붙어 있는 망령이 비슷한 환경,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빙의해서 사고를 유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들 지박령은 육체는 없지만 자기가 죽었다고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는 운동을 계속하려고 하며, 정지해 있는 물체는 그 위치에 정지해 있으려고 한다'라는 관성의 법칙에 따라 현상계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의 의식 상태에서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생과 사의 분간을 죽은 뒤에도 못하고 있다. 돌발 사고로 사망했을 경우 한동안은 흡사 기억상실증 같은 현상이 된다. 따라서 죽음을 자각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사고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 내기까지에는 대단한 시간과 단서가 필요하게 된다.
육체가 없는 자기 자신을 자각할 수 이게 되면 깨닫는 것도 빠르지만, 현상계와는 달리 실재계에서는 표면의식이 90%, 잠재의식이 10%의 비율로 작용하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 소생이 매우 힘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옥에 떨어지면 같은 류의 악령들에 둘러싸이기 때문에 한층 더 깨닫기가 어렵게 된다.
원망을 품으면 그 상념이 현상화되어 스스로를 괴롭히게 된다. 부조화한 환경에는 비슷한 마음을 가진 망령들이 모여들게 마련이지만 지옥령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밝은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사고를 당하지는 않는다. 지박령들은 제사 공양같은 것을 바치도록 인간들을 꼬드겨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사고를 되풀이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아이일 경우에는 부모의 마음이 크게 반영되므로, 어린이(주로 10세 이하)가 사고를 당하는 것은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부모는 자신들의 마음의 상태, 생활 방식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이의 자기 보존 본능은 어른의 자아 아욕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순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가 끼었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마음의 바늘은 마치 전류계나 온도계, 혹은 자동차의 속도계처럼, 선과 악, 명과 암 사이를 왕래하면서 늘 움직이고 있다. 악의 어두운 상념을 바늘이 가리킬 때 우리에게 마가 끼게 된다. 마음의 바늘이 항상 선의 밝은 세계를 가리키는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자 삼 대를 넘기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육체 조상은 인생 항로에 필요한 나룻배(육체)를 물려 준 분들이다. 그런 조상을 신앙적으로 받들어 공양하는 것이 종교 행사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러한 관습적, 종교적, 사고 방식이 자손에 대한 과잉 보호를 초래하여 재산이나 지위를 유산으로 남기려고 안달이다. 조상의 공양, 자신의 욕망을 위한 자기보존으로 인생을 허송하는 사람도 많다. 그 결과 죽은 뒤에도 신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므로 재산과 자손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천상계로 올라갈 수 없게 된다. 가족들에게는 부조화의 원인이 되는 재산 쟁탈, 질병 등의 어처구니 없는 유산을 물려주게 된다.
재산이라는 것은 자신의 소유도 아니며, 사회 인류의 소유물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산에 대한 집념은 전통있는 가문일수록 더욱 심하다. 지옥에 떨어진 조상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자비와 사랑이 결여된 냉랭한 가정을 만들기 일쑤다. 따라서 조상의 공양이 형식 종교화 되어버린 폐단을 묵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살아있는 사람이 정법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 죽은 망령들도 살아있는 유족들의 마음을 보고 자기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철학화된 어려운 경문을 듣고 이해할 수 잇는 망령이라면 이 현상계의 일은 걱정도 하지 않고 천상계에서 유유히 지내고 있을 것이다. 현상계에 미련을 가지고 걱정하는 따위의 망령은 의식이 정화되지 않은 저급령이다. 부모를 포함한 육체 조상들에 대한 공양은 감사와 보은의 실천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지박령의 대부분은 지금도 육체를 지니고 살아있는 양 착각하고 있다. 병원이나 사찰 등에서도 영적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역시 금생에 집착을 가지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망령들이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지박령의 한 예를 들겠다.
1970년 7월 19일자 아사히 신문 도쿄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었다.
지요다쿠 오대마찌 1정목 1번지 1호의 땅은 천 년 동안 머리무덤에 살고 있는 원귀 때문에 1등지가 손도 못댄 채 건물을 세우지 못하고 방치돼 있다.
고양이 이마만한 공지도 남아 있을 수 없는 마루노우찌의 괴담이다.
그 첫 번째 사건.
1926년 관동 대지진으로 재가 되어버린 오쿠라성이 머리무덤 일대를 정지해서 가처사를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쿠라성 내부에서는 병자가 속출하여 일 년 동안에 장관을 위시해서 국장급의 간부 14명이 잇달아 죽어버렸다. '이것은 무장 다히라노마사가도공의 묘를 소홀히 취급한 데 대한 재앙'이라고 해서 무덤 위의 청사를 헐고 1931년 4월에 성대한 진혼식을 올리고 오쿠라성 내의 불안을 제거했다.
두 번째 사건.
1940년 3월 20일 같은 오쿠라성 본청사 위에 별안간 우중의 벼락이 떨어져 화재 사고가 일어났다. 다시 성내에서는 '위령제를 소홀히 한 벌'이라는 여론이 일어나 마사가도공 사망 천 년이기도 해서 천년제를 거행, 대신(장관)이 손수 유적 보존비를 건립했다.
세 번째 사건.
1945년 말경에 일본에 진주한 맥아더 사령부에서 황폐한 머리무덤 주변을 모터 풀로 선정해서 착공에 들어갔다. 그러자 정지 작업중이던 불도저가 갑자기 전복되어 운전 기사와 작업 중이던 인부 두 사람이 그 밑에 깔려 한 사람은 즉사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전설을 알고 있는 근처의 목재상 엔토 마사조씨가 사령부를 찾아가서 '저 무덤은 일본의 옛날 대추장의 무덤이니 제발 건드리지 말아 주십시오'하고 진정한 결과 일은 무사했다.
네 번째 사건.
1961년 모터 풀 철수 후에 머리무덤의 동쪽 땅이 일본장기 신용은행과 미쓰이생명보험회사에 불하되어 빌딩 공사가 착공되었다. 이 때 장기신용은행의 건물은 무덤으로 가는 도로 부지를 깔고 앉았다. 1963년경 무덤 쪽으로 창문이 난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행원들이 차례로 발병하여 은행 당국에서는 '재앙이란 참마로 있는 것일까'하고 반신반의를 하면서도 무덤의 관리자오 간다명신의 신관을 불러 성대한 굿을 올렸다. 현재도 무덤 쪽으로 창문이 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행원의 책상은 창문 쪽을 향하던가 옆으로 빗겨 앉아 있다. 이유인즉 '무덤 쪽으로 궁덩이를 보여선...'이라는 배려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재앙인가 우연인가. 화를 입은 당사자와 주위의 사람들도 '당연히 우연이겠지요'라고들 말하고 있지만 기분 나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을 우연이라고 일소에 부치는 것이 과연 과학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원인과 결과는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순환의 법칙이다.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원인 불명의 현상이 같은 장소에서 몇 번이나 일어난다는 것은 집착이 강한 악령이 지박령이 되어 여러 사람에게 화를 입히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지박령에 의해서 화를 입는다는 것은 당사자의 마음의 상태에도 문제가 있다. 신리를 깨닫지 못하고 부조화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유사한 저 세상과 상통하게 되므로 마음의 안정을 잃고 스스로의 어두운 상념에 덮혀 불행의 구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마음을 밝게 가지고 올바른 상념 행위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불의 황금빛 광자에 싸이게 되므로 지박령 따위의 덫에 걸려드는 일은 절대로 없다.
영의 선악도 역시 우리의 상념과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은 일념삼천의 세계다. 고뇌도 즐거움도 그 원인을 자신이 만들고 있다.
다이라노마사가도의 원령도 마찬가지이다. 천 년이나 지옥에 떨어져 있는 영이라면 신불의 자식이라고 할 수 없다. 신불의 자식이라면 반드시 자기 반성을 통해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고 신불의 자식이라는 자각을 되찾게 되며 그 자비의 빛에 의해서 구제받도록 되어 있다. 인간은 지옥에 떨어져도 보통 이삼백 년 정도에서 천상계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천 년, 2천 년이나 지옥에서 생활하면서 깨닫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현상계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영혼의 형제, 수호령, 지도령들이 항상 협력을 보내주고 있듯이 지옥에 떨어진 자들을 위해서도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신불의 자식이라는 자각을 일깨우기 위한 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다. 마루노우찌의 경우에는 지옥의 마왕과 동물령들의 어두운 상념으로 뒤덮혀 있는데 이런 것들은 영도가 열려 있는 사람의 눈에는 금방 보인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 재앙과 화를 입히는 그 런 악령들을 두렵다고 받들고 모시고 재를 올리고 공양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람들의 눈은 무명의 눈이기 때문에 그러한 실상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악령들은 인간을 조롱하고 어지럽히며 사회를 혼란으로 빠뜨린다. 그들을 선으로 돌려 구제해 주는 길은 제사지내는 것이 아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정법에 맞는 생활을 하며 평화스러운 환경을 만들어나갈 때 이것을 보고 그들 악령들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법을 설법해 주고 우리들 자신이 정법 생활을 실천으로 보여 주는 것이 유일한 구제 방법이다. 신심이란, 경을 읽고 찬미가를 부르는 우상 숭배가 아니다. 독경이나 찬송가는 마음을 조화시키고 영역을 높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으며 그 소게 담겨 있는 신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현상을 잘못 판단하여 신이다, 부처다 하여 예배 공양하면서 본성을 잃고 광신자, 맹신자가 되고 만다. 그 결과 신앙 생활이 길면 길수록 자신의 마음은 조그마한 틀 속에 갇혀 버린다. 또한 벌을 받는다는 협박에 짓눌려 어느새 그 조직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신불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빛을 부조화한 상념행위로 차단해 버리고 불행한 인생으로 몰고 간다.
어두운 마음은 지박령이나 지옥령을 불러들여 사고, 질병, 가정 불화 등을 유발하는 원인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모든 현상은 우리들의 마음이 지어내는 것인 만큼 그 마음의 개조에 의해서 얼마든지 구제하고 구제받을 수 있다. 지박령과 상통하는 부조화한 상념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금전이나 물질에 대한 강한 욕심은 악령의 것이므로 그런 상념행위를 버리고 가난한 자, 노약자, 어린이들을 돌보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보살심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감사의 마음을 보은으로 실천한 보시는 반드시 자신의 마음에 빛으로 돌아온다. 모든 집착, 욕망에서 벗어날 때 영도가 열리고 과거세· 현세·내세를 꿰뚫어볼 수 있는 영능자가 될 수 있다.
어떤 친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요쯔야 괴담의 영화 촬영이나 연극을 할 때에는 요쯔야의 이나리 신사에 무사고를 비는 참배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상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사가도묘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공양제를 올리고 있다.
공양이라는 것은 사자에 대한 명복을 비는 것이며 정법을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지상계에 집착을 가지고 있는 망령에게 평화스러운 천상계에 올라가도록 신리를 일깨워주는 것이 최고의 공양이 된다. 이익을 탐내는 공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의 대상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수호령, 지도령, 영혼의 형제, 육체 조상, 부모, 생활의 터전을 제공해 주고 있는 만생만물, 환경들이다. 기도의 마음은 감사의 마음이어야 한다. 그런 자신의 마음과 신불의 마음 속에서 평안의 인생을 찾을 수 있다. 기도한다는 것은 신불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과의 대화이며 신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허위의 생활, 체력의 한게를 넘어선 생활을 하고 있으면 부조화한 악령에 빙의되어 원인불명의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 그럴 땐 반성으로 자신의 상념행위 속에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부조화한 악의 상상이나 공포심은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공포심은 상념이 만들어내고 현상화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연극에서 원령의 역을 맡았다 해도 연기ㅏ의 마음이 조화되어 있으면 수호령, 지도령의 보호를 받아 악령에게 의식을 빼앗기는 일은 없다.
우상의 대상물에게 그저 기도만 올리고 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동물령도 신불의 이름을 사칭해서 나타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인간 이하의 동물령 앞에서 합장하고 빌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함부로 아무데서나 손을 모으고 기도하며 빌 일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우상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영구불멸의 자신의 영혼인 마음을 믿어야 한다. 자비의 당체인 마음 속의 신불이야말로 인간의 아버지요 어머니다.
또 알콜 중독자는 거의가 지옥령에 빙의되어 있다. 주정뱅이에게 빙의하는 영은, 현상계에 육체를 지니고 있었을 때 술에 빠져 일생을 보낸자들이며, 그들은 죽은 뒤에도 술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 있는 비슷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여 술독에 빠지게 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옥의 생활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현상계의 인간에게 빙의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부조화할수록 그들은 더욱 기세를 올려 인간의 마음을 병들게 파고든다. 그러니 인간은 빙의령의 유혹에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인간이 정법을 깨닫고 정법을 실생활에 살려 나가면 자신이 구제될 뿐더러 빙의령까지도 구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빙의령
빙의령이란 지옥에 떨어진 영이 그 환경을 견디지 못하여 이 지상계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의 부조화한 의식에 빙의하고 있는 영을 말한다.
유유상종의 법칙에 따라 우리들의 마음은 일념삼천, 선악을 가리지 않고 어느 세게에든 통한다. 빙의령은 한때 이 지상계에서 육체를 지니고 생활한 적이 있는 인간이나 동물이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태어났던 목적과 사명을 잊고 신리도 깨닫지 못한 채 에고이즘에 빠져 금전욕, 정욕, 권력, 지위 등에 탐닉한 자들이다. 물질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돌보는 일도 없었으며 신불도 믿지 않았다.
어떤 자들은 마음을 무시한 유물론 사상을 맹신하여 투쟁과 파괴에 자신을 던져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른 언행불일치의 부조화한 인생을 보냈다.
신불의 이름을 팔고 사리사욕의 배를 채운 자, 모순 투성이의 교리를 진리인 양 설법해서 맹신자 광신자들을 만들어 낸 교조들, 그들은 죽기 전에 이미 지옥계에 떨어졌던 자들이다.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표리가 부동한 생활을 한 자들도 지옥에 떨어진다.
신리를 깨닫지 못하고 부조화한 인생을 보낸 사람들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죽은 뒤에도 생전과 같은 의식의 세계로 가게 마련이다. 그 세계는 생전의 세계보다 훨씬 더 가혹한 지옥계에 다름 아니며 그 어렵고 힘드는 환경 속에서 신불의 자식이란 자각을 할 때까지 반성을 하고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들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거기서 도망쳐 나오려고 발버둥친다. 그래서 이 지상계에서 같은 류의 검은 상념을 발신하고 있는 인간의 의식에 빙의한다. 인간의 후광(아로)의 어두운 부위에 거주지를 정하고 빙의해 있는 곳이 바로 질병이다. 이러한 현상은 영시, 즉 심안으로 볼 수 있다. 빙의돼 있을 경우에는 그 부위가 하얗게 보인다. 그들은 부조화한 육체 세포에 붙어서 살고 있다. 이럴 경우 그 부위는 염증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당사자도 병적 증상을 똑똑하게 자각할 수 있다.
곤드레만취가 된 사람에게도 100% 빙의령이 붙어 있다. 술은 양약이라고 조금씩 마실 때는 좋다. 하지만 광기의 액체로 바뀌면 빙의령의 매체가 되어버린다. 자제심과 절제가 필요하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자신이 만든 버릇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을 개조해 나가는 노력이 신리 실천의 첫걸음이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타인에겐 엄격한 사람은 자기 보존이 강한 사람이며, 자신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겐 자비를 베풀며 관대한 사람은 보살이다. 불심의 소유자에게는 부조화한 빙의령이 붙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에 구름이 없어서 신불의 빛을 스트레이트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원망, 시기, 질투가 강한 사람에겐 동물령이 빙의하기 쉬우며 육체적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질병의 80%는 빙의령이 원인이다. 이러한 빙의령을 제거하는 길은 그 빙의령에게 정도를 잘 타일러 주는 한편 자기 자신이 정법 생활을 실천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설령 그 빙의령을 제거해 주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본인이 정법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불러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왕국을 지배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빙의의 실례를 들어 보자.
한 친구가 오랜만에 우리집에 왔다. 피차 사업을 하고 있는 처지라 월급쟁이와는 달리 어려운 점이 많다고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새 나의 특기인 영적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이 친구는 영의 세계를 도무지 믿지 않는 친구다. 그가 나에게 충고한다.
"자네는 과학을 공부하고 있는 주제에 그런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하면 남들의 신용을 잃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게. 인간은 현실을 직시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지 영적이란 그런 헛된 꿈을 좇는 것은 잘못이야. 그것은 인생의 도피이다. 자신을 상실하고 있다."
말이 매우 준엄하다. 근 10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던 친구이고 보니 어지간히 객관적이다. 더욱이 고생을 많이 한 친구라고 그 어조도 매우 신랄하다. 나는 친구의 표정을 보면서 약간 경복했다.
자수성가해서 조그마한 회사의 사업주가 된 나는 남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자신의 소신을 그대로 말해 주는 친구가 그지없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 충고를 진솔하게 듣고 있는 나 자신의 마음의 성숙함도 깨달았다. 성질이 급했던 나로선 이 이상의 큰 수확이 없었다. 반성해서 자신의 결점을 알아내고 그 결점을 시정함으로써 보다 높은 경지로 마음은 승화해 간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경제학 박사나 경제 평론가가 사업을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듯이 인생도 이론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이 친구도 사업이 번창할 때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듯이 기세가 당당했으며 남을 깔보고 오만하기 그지 없었다. 인간은 경제적으로 곤경에 부딪쳐 시련을 겪게 되면 풀이 죽게 마련이다. 사업이 부진하여 고난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재기를 노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그에게서 끈질긴 근성을 읽을 수 있었다. 친구는 변했던 것이다.
만회의 ㄱㄹ을 역학에서도 찾아보았고 타력 신앙에서도 구했던 모양이지만 효과도 없이 파산으로 끝난 그런 친구였다. 그런 뼈아픈 경험의 결과에서 우러난, 나에게 대한 충고였으니만큼 우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비과학적이라는 말에 나는 저항이 생겼다.
타력 신앙이나 역학에 의해서 소원성취가 되지 않았다 해서 신불을 부정하는 태도는 타당하지 못하다. 자신이 실패한 원인을 추궁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질문했다.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에 대해서 너는 경험을 통해서 느낀 것이 없는가?"
평범한 질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평범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가슴으로는 모르고 있다. 그래서 말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인간사회는 경제력만 있으면 사업의 실패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나의 실패의 원인은 종업원의 부족과 무역의 실패였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가 '마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타력 신앙이나 역학적인 구원은 모두가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지, 신불의 근본을 깨닫고 있는 짓이라고는 보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업은 인간이다'라는 말처럼 종업원 부족의 문제도 '마음'이 있는 종업원의 양성을 하지 못한 데 있는 것 같았다. 물질 경제의 노예가 되어버리면 자신을 잃을 위험성이 농후해진다. 사업가로서는 부적격이 된다.
인간과 인간의 마음이 사업을 목적 삼고 조화를 이루어 연구 노력할 때 비로소 판매력·생산력·경제력이 향상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제력이 제1이라고 생각한 데 그의 큰 오산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말을 듣고 그는 자신의 결점을 곧 시인했다. 나는 영적 이야기를 했으며, 신심이란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믿는 것이며, 매일의 생활 가운데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타력 신앙의 구걸로 아무리 빌어보아야 자력의 실천 활동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친구는 마음 속 깊이 수긍했다.
"나의 신불에 대한 생각이 잘못이었다. 지금까지 종교라는 것은 신불에 빌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 잘못을 이젠 깨달았다. 신불은 각자의 마음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 자기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자신에게 타이르듯 되뇌는 것이었다.
그의 몸에 붙은 빙의령이 내 눈에는 똑똑하게 보인다. 등 뒤 오른쪽 어깨 근처에 희멀건 것이 움직이면서 붙어 있다. 그래서 물어 보았다.
"오른쪽 어깨가 아프지 않는가?"
"사실은 어깨가 굳어졌어. 갱년기이니까 침이라도 맞으면 낫는다 해서 오늘은 침구의에 다녀오는 길이야. 그런데 그런 것까지 어떻게 잘 아는가."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비과학적이라고 나를 힐난하던 그가 지금은 경탄하고 있다. 그에게 신리를 가르쳐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붙은 빙의령을 내 누이의 의식 속에 집어넣어 대화를 시작했다.
"당신은 어째서 이 분에게 빙의해 있습니까. 이름이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그러자 누이의 몸 속에 든 빙의령이
"나는 류기찌라고 합니다. 이 분은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붙어 있으면 매일 저녁 무렵에는 술집에 같이 갈 수 있습니다. 함께 가는 것이 어째서 안 됩니까." 라고 오히려 반문한다.
류기찌는 우마야교 근처에 있는 대장간에서 직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생전에는 말 술을 마실 정도의 호주가였다. 아까부터 내가 말하던 신리를 듣고 있었으며 언제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지 조마조마했던 모양이다. 오랜 지옥 생활이 견디기 힘들어 현상계의 비슷한 인간에게 빙의하여 붙어 사는 것이 편하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에게 "어깨는 5년 전부터 아프지 않았나?" 하고 물으니
"맞았어. 술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5년 전에 아사구사에 있는 한 바에서 술을 마시고 어깨를 테이블에 부딪친 적이 있었지. 그 때부터 좋지 않은 거야."
그는 감탄하는 얼굴로 나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걱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류기찌라는 그 빙의령에게 생시에 늘 술이 없으면 일을 하지 않았던 악습, 가족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일 등 정법에 어긋난 그의 인생을 지적하는 한편 인간으로서 태어났던 목적과 사명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사후의 세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그의 잘못도 일깨워 주었더니 그 빙의령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친구의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지옥의 영도 신리의 반성에 의해서 천상계로 올라가 성불하게 되어 있다.
무거운 돌이 얹힌 것처럼 불편하던 친구의 어깨는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빙의령은 사리를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질이 좋은 편이며, 아무리 설법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한 지옥령들이 대부분이다.
생물의 빙의령
'한 치의 벌레에도 오푼의 혼(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이라는 속담처럼 동물, 식물 등 모든 생물들은 살아갈 권리를 부여받아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서 종족보존을 이어간다. 저마다의 환경에 적응할 몸고 구조를 지니고 생존하고 있다.
그 생물의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육체를 보존하고 있다. 동물, 식물, 광물의 자손 보존의 본능을 알면서도 인간은 그들을 섭취함으로써 피와 살과 뼐로 만들고 있다.
동물이나 물고기를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예사로 살생해 버린다. 그래서 그들도 생의 애착 때문에 성불할 수가 없어서 인간에게 빙의한다. 인간은 마땅히 그들에게 감사와 공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동물, 식물, 광물의 에너지원이 있으므로 우리들은 육체 보존이 가능한 것이다. 식사 때에는 그들의 희생에 대한 명복을 빌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 당연한 행위이다.
"여러분들이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되어 줌으로써 우리들은 육체보존이 가능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도 생명의 불멸을 깨달아 부디 성불하기 바랍니다."
하고 조석으로 감사드리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 쓸데없는 살생을 금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살 권리가 부여된 생물을 살생하여 차려진 음식이므로 식사는 함부로 해서도 안 된다. 태양의 열과 빛의 에너지, 동식물, 광물의 에너지원에 대해서 거의 감사의 마음을 잊고 있다는 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항상 만족할 줄 알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생물들을 돌보고 위하는 공존공영의 길이 된다.
생명의 불변을 깨달은 식물이나 미생물들은 헤매지 않고 평화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감사의 마음이 없는 인간에게는 생물의 영이 빙의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는 사람도 많은데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생만물의 상호 작용이 있으므로 우리들의 육체 보존은 가능하다. 그들의 영혼의 존재를 존귀하게 여기고 항상 감하사면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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