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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3장 신의 빛과 팔정도-신리론

by Yuneelif 2023. 2. 3.

색심불이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도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도 다 같은 한 가지 신리이다. 두 분 다 빛의 천사들이다. 다만 그 설법한 방편이 달랐을 뿐이지 인간으로서의 마음가짐을 한결같이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가르침은 생활의 방법, 신과 인간과의 관계, 우리와 천사와의 관계 등을 알기 쉽게 설법하고 있다. 결코 어려운 학문도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철학은 아니었다. 마음과 행동의 가르침, 색심불이의 가르침, 자신의 마음이 바로 신앙의 대상이라는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을 어렵게 만든 원인은 천 년, 2천 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인간의 지와 의가 가미된 데 있다. 신리는 인간의 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고 말았으며, 그 결과 동물적인 자기보존 사상, 물질경제, 컴퓨터의 노예로 인간은 전락하고 말았다.

대자연의 열과 빛의 에너지를 비롯하여 우리가 생활할 수 있는 일체의 환경을 신불은 제공하고 있다. 이 만물만상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감사의 마음이 인류의 조화, 상호신뢰, 협력으로 발전해 간다.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도 생활에 편리한 적합한 환경과 입지 조건을 먼저 고려하게 된다. 택지환경·수도·도로·전기 등의 사정을 첫째로 고려하고, 교통·시장·병원·학교 등의 환경을 다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윽고 한 채의 집이 세워지고 생활의 환경이 정돈되면 점차적으로 집단 주거가 형성되어 간다.

하지만 멀지 않아 인간은 자기 보존적이 되어 평온한 환경을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 마음을 상실한 사상적 집단이 되어 투쟁과 파괴의 부조화를 불러일으키고 물욕의 노예가 되어 마음의 평안을 잃고 만다.

더러는 타력 신앙에 빠지기도 하고, 더러는 자기 입장만을 고집부려 조화를 깨트려 버리기도 한다.

마음을 상실한 인간은 불쌍하다.

인간은 하루 빨리 본성의 마음을 되찾아 물질 노예에서 행방되는 것이 시급하다. 현실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알게 되면 자신의 마음은 대우주로 넓어져 구속 받는 일도 없게 되며, 모든 방면에 은혜로운 환경이 완성되어 같다.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은 밤낮 없이 물욕에 사로잡혀 마음 편안할 날이 없다. 육체도 조화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쓸쓸한 인생을 걷게 된다. 결국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에 상응하는 고통스러운 생활이 저 세상에서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나의 둘레에는 영적 현상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물질주의적 사상에 사로잡힌 인간들에게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우기 위한 현상에 다름 아니다. 또한 올바른 인간으로 후회없는 인생을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한 신의 자비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영적 현상은 앞으로 더욱 많이 일어나서 마음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신리의 빛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영적 현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인간다운 올바른 인생을 걷는 것이 으뜸 가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육체에도 변조가 생긴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안다. 또한 자신의 마음이 조화됨에 따라 운세가 나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 것으로 여겨진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육체적 변조가 생기는 것은, 육체는 인생항로의 나룻배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사공(마음)이 젓는 노에 따라 배(육체)는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영혼, 의식의 집중적인 일념은 사물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알게 될 때 의문을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리의 실천 생활을 통해 해답은 절로 얻어진다.

마음의 조화에 따라 운세가 나아진다는 것은, 팔정도 즉 중도의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가치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음이 얼마나 광대하며 인간의 신불의 자녀로서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자기 중심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자각을 할 때 비로소 인간은 평안이 충만한 조화의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거짓이 없는 생활이 확립되어 간다.

자신의 상념 행위가 신리와 부합될 때 마음은 신의 빛으로 감싸인다. 한 개인의 조그마한 마음의 조화가 가정의 행복을 만들고 이웃과 사회와 국가의 조화로 파급되며 나아가 조화의 집단은 인류의 마음에 투쟁과 파괴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종교적 투쟁 따위는 자기 보존의 종파적 사상 이외에 와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음을 역설해야 할 종교인의 마음을 상실하고 종파의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현실을 딱하기 그지 없다. 종교 지도자는 종교인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내가 설법하는 신리에 모순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모른다면 무지하거나, 우상의 문지기이거나, 자기 보존의 에고이스트이거나, 종파를 미끼 삼고 있는 위선자이거나, 아니면 돈과 지위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설법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마음의 천국이야말로 대신전·대불전에 다름 아니며, 겉모양만 번드레한 대신전·대불전의 건립은 재정의 낭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지구는 신체이며 대신전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지자라면 살아있는 동안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인 세 가지 방면의 조화를 위한 상념과 행위의 실천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모든 것에 우선하며 지와 의의 조화를 유지하는 받침대이다.

 

부조화의 원인은?

부조화는 대개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보다 출세하고 싶다, 좋은 옷을 입고 싶다, 맛 좋은 음식을 먹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 아이들을 일류 학교에 보내고 싶다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끝없는 욕망의 늪에 허덕이기 일쑤다.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은 마음에 제동이 걸리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제동이 풀린 마음으로 욕망의 늪에 빠진다. 그 결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청정한 보리의 생활은 찾을 길이 없다. 

자신의 입신 출세를 위해서라면 동료도 예사로 배신한다. 상사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속이고 봉건 사회의 머슴 같은 짓도 서슴지 않는다. 

지위·명예·돈이 인생을 풍족하게 하는 것일까. 아욕이 생기면 평온한 생활을 기대하긴커녕 자신을 멸망으로 몰고 갈 때도 있다. 인간은 거짓이 없는 생활 가운데에서만 올바른 마음의 싹이 눈뜨며 평안의 인생을 보낼 수 있다. 허영과 욕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처럼 얻은 이 지상의 귀중한 인생을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부지런히 살아가면 마음의 불안도 없어지고 평화로운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조직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노사가 다 같이 서로 감사의 마음과 보은의 행위로 뭉칠 때 비로소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것처럼 상부층과 하부층의 대립으로 발생하는 투쟁과 파괴의 사상을 필연적인 인류의 진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사상에 물든 마음은 부조화한 그늘이 되어 파멸의 길을 재촉한다. 부조화한 사념가 행위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화살처럼 짧은 것이다. 후회없는 인생을 위해서 날마다 반성하는 생활은 우리의 마음을 보다 고차원으로 정화시킨다.

신의 빛은 감사의 마음이 보은의 행동으로 옮겨지는 인간에게 쏟아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신의 빛으로 충만한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팔장을 끼고 있어도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실천하는 가운데 선의의 운동은 퍼져가는 것이다.

사회 현상의 외면에 사로잡히지 말고 내면의 마음을 중심으로 한 조화야말로 신의 뜻이며, 그 조화는 신리에 맞는 실천 생활 이외에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류는 다 형제이다. 지구호의 한 배를 탄 동시대의 동기생들이다. 피부색이나 민족의 종류는 각기 그 환경에 적합한 육체적 조건에 지나지 않으며, 그 육체의 지배자인 의식 즉 영혼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형제 자매들이다.

태양의 광열은 인류에게 평등하며 신불의 자비와 사랑도 또한 평등하다. 따라서 인종 차별의 편견은 신의 뜻이 아니다. 

차별은 생활환경의 차이에서 생겨났다. 마음을 볼 수 없는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기 보존을 위한 봉건 제도적인 계급 의식이다. 우리들은 하루 빨리 내면의 마음을 깨달아 인간으로서 태어난 금생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과거세보다 중요한 현세

자신의 과거세를 알고 악업을 수정하는 것은 인생 수행의 한 가지 목적임엔 틀림없지만, 우리가 과거세에 어떠한 인물로 태어났든 그것보다는 금생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리에 맞는 상념과 행위만이 마음을 진화시키고 물질 경제나 여러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간성을 형성해 간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왕국을 만들 수 있다.

설령 자신의 과거세가 훌륭했다 하더라도 현세에 육체를 지니고 있는 자신이 삶의 가치를 알아내지 못하고 자아 아욕과 오관에 사로잡힌다면 그 인생은 실패작이다. 신불의 자식다운 자각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금생의 가치는 달라진다.

상단계의 빛의 천사들도 이 현상계에 육체를 지니게 되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수행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환경과 교육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경제적인 고통이나 여러 가지 괴로움에 부딪치기도 하면서 인생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안게 된다.

그래서 과거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대체로 승려나 학자로는 태어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의문과 회의가 일어나기 쉬운, 결코 안일하지 않는 환경을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 상례다.

고타마도 예수도 모세도 승려나 학자가 아니었다. 승려나 학자와 같은 조그마한 틀 속에 갇혀 버릴 것을 예견하여 여래(메시아)들도 짐짓 고락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택해서 탄생한다. 그래서 여래는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는 일단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나 깨달은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저승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죽음에 임박해서 깨닫는 것은 너무 늦다. 육체가 건전할 때 신리를 깨달아 중생에게 가르쳐 주고 조화 있는 인생을 다져 줄 책임이 있다.

지금까지 여러 명의 여래가 이승에 태어났다. 하지만 인생 항로의 고난에 봉착하고 환경에 지배 당하여 사명도 완수하지 못한 채 일생을 마친 경우도 있었다.

나의 수호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역사적인 물적 증거라는 것이 우선되기 쉬운데 그것은 중요한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신리에 관한한 너무 과거의 기록에 사로잡히면 자칫 지와 의가 앞서서 자신의 본성을 상실하기 쉽기 때문이다. 자신을 상실하고서는 신리를 깨달을 수 없다."

과거의 사실에 사로잡혀 문헌에 의존하고 있으면 학문적 탐구에 기울어져 마음이라는 자기의 본성을 잃기 쉽다. 

자연과학의 분야에서는 문헌이 큰 참고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신리에 관한 문제는 그 시대의 몰지각한 권력자에 의해서 왜곡된 경우가 많다. 불교도 여러 나라의 전래의 사상이 상당히 가미되고 말았다. 따라서 불교도 기독교도 원전으로 돌아가기가 몹시 어렵다.

신리는 대자연의 법칙으로 시대의 신구와는 상관이 없다. 헌 것도 새 것도 없다. 불변의 것이다. 누구의 마음 속에도 신불의 자녀로서의 신리는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신리는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으며,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고 항상 중도에 따라 아욕을 버린 생활을 계속해 가면 누구든지 신불의 자식으로서의 긍지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나의 수호령은 보충 설명하고 있다.

저 세상 즉 실재계에 돌아가서 후회해 보아야 소용없다.

학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늙어서 '아, 젊었을 때 좀 더 공부를 해 둘 것을'하고 뉘우쳐 본들 소용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태에 빠져 버리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신리를 개닫고 정법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들조차도 저승으로 돌아갈 때에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제도했으면 좋았겠다'라는 아쉬움을 남기게 될 것이다. 육체를 버려도 지상계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의 의식의 상태에서 광자체라는 육체를 갈아입게 되는 것이 저 세상이다. 따라서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서의 생활 즉 상념가 행위의 일체가 하나 남김없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그래서 지상에서 저지른 죄값은 그 곳에서 자신이 갚지 않으면 단 된다. 즉 자신이 자신을 재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후회하게 된다. 유계의 입구에서 그 재판을 하게 된다. 신불은 결코 재판하지 않는다. 이것이 신불의 자식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부조화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인간은 마음에 평화가 없고 검은 상념으로 뒤덮혀 있다. 이런 인간은 이 현상계를 떠나서도 똑같은 검은 상념의 세계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정화될 때까지 그 지옥계에서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옥도 자기 자신이 만들고 있었던 세계에 다름 아니다. 책임 전가는 용납될 수 없다. 책임을 전가시키면 그 고통은 더욱 커질 뿐이다.

따라서 행복을 획득하는 지름길은 하루 빨리 과거세에 지은 업(카르마)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두 번 다시 그런 과오가 없는 인생을 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나쁜 성격을 고쳐가야 한다. 반성의 명상은 마음을 정화시킨다. 그리고 신불의 빛에 에워싸이게 된다. 이럴 때 생도 없고 사도 없는 생명의 전생윤회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단지 육체라는 현상만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육체가 없어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육체의 지배자인 영혼은 불변이며 다만 이승과 저승의 환경에 적합한 옷을 갈아입을 따름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생명의 불변을 불신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종교는 아편

미신, 맹신, 광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신앙이며 신리와는 거리가 멀다.

사찰이나 교회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얼마나 많은가. 신불에 대한 기도로써 자신이 행복해진다고 여기는 신앙적 자세가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우리는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한다.

유물론자들의, 마음을 상실한 사상에 젖으면 인간은 회색빛 인생을 겪에 된다. 지와 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투쟁과 파괴의 사상은 자유와 평화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단결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자유는 속박 받으며 비정한 압력에 짓눌려 사생활은 고통스러운 궁지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그들도 마음의 번뇌에 대해서는 어찌 할 바를 모른다. 따라서 그들의 집단은 마음을 상실한 사람들끼리 유유상종의 법칙, 파장 공명의 법칙에 따라 한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한다.

유물 사상에 따르지 않는 자유 의지의 발언은 그들 집단에 의해서 여지없이 짓밟혀 버린다. 유물 사상에 세뇌된 자들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폭력을 거침없이 휘두르며 거기에는 자비와 사랑이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다. 사상 이데올로기를 위해서는 범죄 의식도 마비된다. 공산주의 집단의 세포들은 한 지도자의 꼭두각시들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의 본성을 100% 잃어버리고 있다. 참으로 가엾고 불쌍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마음을 상실하여 서로 믿을 수 없게 된 인간의 집단은 어느 날엔가 내부투쟁에 의해서 자멸의 길을 밟게 된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신리로 돌아와야 한다. 잃어져 가는 인간의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인도 당시의 석가의 가르침, 이스라엘 당시의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위대한 마음의 존엄성을 깨달아 조화있는 사회를 하루빨리 이룩해야 한다. 그런데 불교도 기독교도 인간의 지와 의에 의해서 너무나 왜곡되어 버렸다. 그래서 대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의식, 즉 신불은 우상화되고 말았으며, 빛의 천사들조차도 우상화되어 예배 기도하는 종교로 전락하여 세상은 바야흐로 말법 시대로 접어든 감이 없지 않다.

기독교도 불교도 그 진수를 잃었기 때문에 많은 중생은 신불에게 기도하는 것이 종교라고 착각하게 되었으며 악덕 종교 지도자들의 밥이 되고 말았다.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 생활은 형식적 행사로 지샌다.

'불교는 어려우며 그 진수를 터득하기가 힘들다'하고 불제자인 승려까지도 고개를 젓고 있는 실정이다.

지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불교이다. 인간이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불교가 어째서 철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어째서 엄격한 계율에 의한 자기류의 규율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나는 의문이다.

많은 중생은 불교의 원점에서 멀어졌다. 권력자, 학자, 승려 들에 의해서 철학화된 종교는 이미 진실한 마음의 종교가 아니다.

계급 제도가 엄격했던 지난날에 어째서 종교가 필요했던가. 그것은 그들 특권 계급의 무리들의 자기 보존의 수단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불의 이름 아래 그들은 대중을 희생시켰다. 겨우 5% 정도의 소수 귀족과 승려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95%의 대다수 중생이 희생되는 종교는 아편과 같다. 아편이 된 종교는 인간을 구제할 수 없다. 신리도 아니다. 사리 사욕의 산물일 뿐 결코 신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은 신불의 이름을 팔아서 생활하고 있는 위선자들에 다름 아니다.

기도하는 것만이 구제받는 길이 아니며 맹신, 광신, 미신이 사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올바른 신리에서 마음이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한다.

신불의 자녀로서 아버지인 신을 믿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도리이며 신리를 모르고 맹신, 광신에 빠지는 것은 바로 자시 자신을 상실하는 사도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다운 생활을 잊어버리고 고락 양극단의 인생을 보내며 정도를 무시한 삶은 신앙이 아니다. 지도자의 지시대로 움직이며, 구하는 바를 오직 기도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맹신이다. 의문을 가지는 일도 없이 기도에 빠진다는 것은 바로 인생을 도피하고 있는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루 빨리 자신의 본심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의 불행은 몇 대의 조상이 천도 받지 못한데 있으니 불공 드려야 합니다."

혹은 "당신의 병은 집을 지키는 용신을 소홀히 한 탓이니 이러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고 미신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장사가 잘 되기 위해서는 이 부적을 붙이고 초하루와 보름에 고사를 지내야 합니다." 라는 말을 들으면 사리사욕의 마음은 그만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욕망을 채우기 위한 신앙에 바지면 빠질수록 마음이 불안해 지고 불행한 인생을 걷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열심히 기도할 때에는 일에도 열중하기 때문에 장사가 잘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돈과 시간이 생기면 기도할 대상에는 무관심해지고 그저 형식적인 신앙이 되고 만다. 장사가 잘 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잊어버린다.

낭비를 일삼고 욕망의 충족만을 좇는다. 어느 틈인가 마의 포로가 되어 마음은 평안이 없고, 가정은 조화가 파괴되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불행을 스스로 자초한 셈이다.

'건드리지 않는 귀신은 잠잠하다'라는 속담은 신리다. 신불에 기대지 않고 신리에 따른 생활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쌓아가는 삶이 신불의 마음으로 통하는 길이다.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최선의 노력이야말로 우리들 마음에 평안을 얻고 신불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다운 생활이란 신리에 따른 팔정도의 실천에 있다. 올바른 상념과 행위, 신불의 자녀라는 자각을 가지고 의식주에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이 바로 그것이다. 끝없는 욕망은 고통과 번뇌를 가중시킬 뿐이다.

우리들 생활 환경에서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육안에 보이지 않는 악령들은 신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

악령에 빙의되는 데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상념과 행위에 대해서 우선 반성해야 한다. 재앙의 악령을 신불로 착각하여 받들게 되면 악령들은 더욱 거만하게 득세하여 그 재앙을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잡고 그들을 천도해 주는  것이 정법이다. 그들을 받들고 공양해 주는 것은 결코 정도가 아니다.

악령을 숭배하라는 교조가 있다는 그는 참다운 법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법력이 있다면 그들 악령들의 잘못을 깨우쳐주고 정법에 귀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이러한 종교적 환경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간에게 그 고통의 원인을 가르쳐 주고 올바른 마음가짐과 생활방식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조상 탓이다, 용신 탓이다' 하고 예배 공양 드리게 하는 신앙은 자기 자신이 신불의 자식이라는 자각과 긍지를 팽개쳐 버리는 짓이다.

'냄새 나는 물건은 묻어 버려라'라고 하는 투의 신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것이 바로 행복을 얻을 수 잇는 길이다.

형식 신앙에 빠지면 빠질수록 생활도 불안정하게 되고 마음의 평화도 없어진다. 흔들려서는 안 된다. 아편의 중독에서 자신의 마음을 구제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강하며 어떠한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는 크나큰 마음을 가지고 자신있는 인생을 걸어야 한다.

불행한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을 잘 찾아내어 악의 씨를 제거하고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신불은 그 노력에 대해서 반드시 평화와 안심의 빛을 비추어 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장님으로 만들고 기도에 의해서만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큰 죄를 짓고 있다.

신불은 인류가 이 현상계에서 육체를 지니고 영혼의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 태양의 광열 에너지에 의해서 식물·광물·동물 상호의 생존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이 모습이야말로 바로 사랑과 자비의 나타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불은 인간에게 자손 보존의 본능을 부여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들은 부모로부터 육체를 공짜로 얻었다. 부모의 사랑과 희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근원을 따지면 신불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 육체가 창조되었던 것이다.

이 육체의 운전수인 우리들의 의식, 영혼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부조화한 현상이 일어난다. 자신의 마음고 행동을 바로잡는 일이 바로 그 부조화를 바로잡는 길이다. 

대자연의 은총에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감사와 보은을 하는 생활이야말로 사회의 조화를 완성할 수 있는 길이다. 질병, 빈곤, 불행 등의 괴로움에 대해서 그 원인을 추궁해 보지도 않고 자신의 형편, 자신의 행복, 자신의 이익만을 좇기에 급급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신불을 비롯하여 우리들의 수호령, 지도령, 영혼의 형제들은 아전 인수격인 이기적 기도에 대해서는 절대로 협력하지 않는다. 신불의 세계는 중도의 정법에 의해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

거울에는 실물과 같은 모습이 비친다. 실물이 아름다우면 그 영상도 아름답다. 우리들 마음의 거울도 마찬가지로 실재계의 천사들에게 비친다. 마음의 모습은 빛의 천사들의 눈을 절대로 속일 수 없다.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과 관계가 깊은 실재계의 인물에 의해서 반드시 협력이 있다. 

'스스로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말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구하기 위해서는 상념과 행위가 일치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하는 바는 기도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할 때의 마음의 상태가 문제다. 특히 대어만선, 오곡풍년을 기원할 때에는 그것이 생물의 생명을 취득하는 것이 되는 만큼, 수확물을 소홀히 하거나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되는 희생적 공양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 생명들에게 깊은 감사를 올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식사를 할 수 있는 것도 많은 생명들의 희생에 의한 것이므로 신불에 감사드림과 동시에 만물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는 커녕 모든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 낭비를 일삼고 있다.

기도는 자기 보존의 일방적 요구여서는 안 된다. 은총을 입었으면 감사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보은의 행위는 우리의 마음을 조화있게 하고 이웃사랑을 눈뜨게 한다. 보은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며 이에 대한 보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공양으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불교도 기독교도 원래는 하나인데 여러 가지 종파로 갈라져 반목과 투쟁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불교에도 기독교에도 투쟁과 파괴의 가르침은 없다. 만일 투쟁과 파괴의 길을 정당화해서 지도하고 있는 종교가가 있다면 그것은 아류이며 오만한 아집이 빚어낸 사생아일 뿐이다.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것은 신리가 아니다.

신리는 신구에 관계없이, 태양이 동에서 떠서 서로 지듯 불변이다. 그것을 모르고 인간이 함부로 아전인수격의 사상을 날조하고 있는 것은 신에 대한 불손이요 모독이다.

불교도 철학화된 감이 없지 않다. 어떤 신자를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구사하면서 자만에 빠져 용어를 모르는 신자들에게 뽐내며 고압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자비를 팽개친 아수라계 지옥으로 통하고 잇다.

부조화의 행동을 강요하고 신불의 이름 아래 인간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지도자의 마음은 평안이 없고 지옥계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 죄를 반성하지 않는 한 천상계로 갈 수는 없고 지옥에서 준엄한 반성의 생활을 강요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불은 교단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하물며 돈벌이에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기회로 신자들을 속여서도 안 된다. '벌을 받는다. 공덕이 없다' 등으로 위협받고 있는 신도들은 불쌍하다. 자기보존의 욕심이 강한 광신도는 그런 말을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만든 부조화의 상념에 의해서 더욱 불안하고 어지러워진다.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 정성을 다한다. 신불이 어찌 장님이나 다를 바 없는 인류에게 벌을 내릴까. 벌은 자기 자신의 부조화한 생활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귀여운 자식을 어찌 부모가 불행하게 할 것인가. 부모도 신불도 자비와 사랑의 당체임을 알아야 한다. 부모의 말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스스로 가시밭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고 그 의문이 해결돌 때 신리는 가까워진다.

마음의 문이 열려 사는 기쁨, 인생의 의의를 깨닫게 되는 것이야말로 정도에 다른 아니다. 만생만물 대자연계야말로 바로 살아 있는 경이다. 이것을 모르고 벌을 겁내어 자기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신앙은 자승자박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순진한 신자들에게 마음의 자유를 빼앗는 종교 지도자는 위선자이다.

신자들에게 '공양한 사람은 그 공양의 몇 10배의 공덕을 받게 된다'라는 거짓말로 욕심에 부채질을 하여 막대한 재물을 긁어 모은다. 경제적인 곤경에 빠진 사람, 부부가 이혼하고 가정이 파괴된 사람, 사업을 도산시킨 사람, 투쟁에 지쳐 요절한 사람 등 이러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선결 문제가 아니겠는가. 마음에 족쇄가 채워진 불쌍한 신자들의 희생으로 모은 재물을 그들은 산중에 신전을 세우는 데 쓰고 있다. 이 지구가 바로 신불의 몸인 대신전, 대불전 임을 그들은 알 리가 없다. 성스러운 대신전에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 모은 금전으로 건물을 짓고 죽은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미 인간의 마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인간을 구제하는 것이 최고의 선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마음을 혼란하게 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특히 가혹한 현상이 나타난다. 우선 육체적으로는 두통이 심하며, 마음의 평안도 없어질 뿐더러 자신의 자유 의사도 없어지며, 간부들에게 떠받쳐져 로보트가 된고 만다. 이윽고 몸은 저리고 마비가 오며, 그래도 자기 보존의 욕심만은 살아 '신불을 신앙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몸이 이상해지나'하고 자문자답한다.

그리고 "몸이 이상해지는 것은 신자들의 업을 대신 받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자위하기도 한다.

또 어떤 종교 지도자는 경제력을 앞세워 신자들을 깔고 앉아 뻔뻔스러운 짓을 하고 있다. 자신의 육체적 부조화도 만성화되었으며 마음의 평안을 잃고 사리사욕의 권화가 되어 조직의 내부는 권력 투쟁의 불씨를 안고 있다. 이렇게 마음을 상실한 종교가 난립한 사회를 말법 시대라고 한다.

'신불을 모독하고 있는 지도자에겐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없는 것이 실재계의 규율이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리는 인간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영능자들은 엉터리 지도자들의 마음과 행동을 금방 알 수 있으며, 우리를 불신하는 자에게는 즉석에서 영적 현상을 보여 줄 수도 있다.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정법의 실천을 위해서 어려운 장애를 이겨 나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잃게 한 아편을 자력으로 팽개치고 정도에 들어서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전쟁도 또한 부조화한 상념 행위이다. 전승기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승부를 다툴 때, 스포츠를 제외하고는 그런 기도는 인간으로서 취할 행위가 아니다. 신불은 언제나 중립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 편들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의 싸움에 대해서 공평한 판단을 내리는 것처럼 한쪽으로 편들지 않는 것이 정법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부모는 아이의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하물며 신이 전쟁 따위를 원할 리 없다. 전쟁은 절대로 인간이 취해야 할 행위가 아니다. 인간의 육체 즉 수행주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비참한 참상을 안겨 죄없는 인간의 마음을 불안에 떨게 한다.

전쟁은 인간 최대의 죄악이요 범죄다. 전쟁을 즐기는 지도자. 그는 살아있는 지옥의 아수라이며 그 대가는 육체가 없어져도 지옥계에서 극심한 고통을 감당하게 되리라. 히틀러도 스탈린도 무간지옥에 떨어져 상기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 권력의 명령에 의해서 전쟁에 휩쓸려서도 가능한 한 부정해야 한다. 국법과 싸울 수 없는 것이 우리 국민이지만 항상 올바른 자신의 마음에 물어 정도에 따른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 성전 따위의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쌍방이 다 5대 5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인간은 신불의 자녀로서 만물의 영장임을 자각하고 전쟁 따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투쟁은 투쟁을 낳는 악순환을 거듭할 뿐이다. 조화를 위한 인내와 노력은 언젠가는 평화의 사회를 완성하게 된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도 저마다의 노력으로 자신의 마음을 열어가야 한다. 그러면 그 기쁨은 형용할 수 없이 크다.

 

반성

반성이란 지난 날의 상념과 행위를 뒤돌아보고 신리에 맞는가 안 맞는가를 마음 속에서 자문자답해 보는 것이며, 그 잘못의 원인을 바로잡고 보다 훌륭하게 영혼을 정화해 가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중도에 두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보존, 아욕의 수정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며, 혹 자만심에 빠져 있지 않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반성의 한 가지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가 상대방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까.

상대방을 동정하는 나머지 혹 자비마가 되어 있지나 않을까 등 반성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끝이 없다. 반성의 재료는 무한하리만큼 많다. 자신의 마음에 거짓은 없는가. 나쁜 사고  방식,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결심해야 하며, 자신에겐 엄격하고 남에겐 관대한 마음으로 생활해야 한다. 만원 전철 속에서 일어난 한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한 시간이 넘도록 청년은 서 있다. 입추의 여지도 없는 혼잡 속에서 짐은 양 손에 든 채이다. 바닥에 내려 놓을 수도 없다. 청년은 다음 역에서는 하차하는 손님들이 있으리라는 예측을 하고 출입문 가까운 좌석 앞에 서 있었다. 

'어쩌면 앉을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스스로 달래면서 참고 있었다. 

그 때 눈 앞의 부인이 일어났다. 

"다음 역에서 내립니다. 여기 앉으세요."

그래서 청년은 앉으면서 살았다 싶었다. 다음 역은 큰 지방 도시였으므로 많은 통근 손님들이 하차했다. 그러나 좌석은 여전히 만원이다. 그런데 그 역에서 지팡이를 짚고 한 노인이 승차하여 그 청년 앞에 섰다.

'한 시간 동안이나 무거운 짐을 들고 겨우 잡은 좌석인데 양보하기 싫구나.'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전철이 속력을 더했기 때문에 차는 흔들려 노인은 공교롭게도 청년의 무릎 위에 넘어졌다.

노인은 "미안합니다." 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러자 청년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중년의 신사가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하고 노인의 등을 두드리면서 자리를 양보했다. 노인은 넘어질 듯 그 자리에 가 앉았다. 이빨이 빠졌는지 입을 오물오물하면서 기쁜 얼굴로 인사말을 되풀이했다.

청년은 노인과 신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가방에서 잡지를 꺼내 얼굴을 가리듯이 하고 읽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 두 시간이나 더 가야 하기 때문에 좌석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청년이 혼자 변명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일뿐이었다. 잡지의 글이 머리에 들어올리 없었다. 눈은 활자를 건성으로 더듬고 있을 따름이었다.

청년은 뒷맛이 개운치 않은 생각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청년은 사소한 일이었지만 마음의 상처를 준 전철 내에서의 사건을 반성했다.

자기에게 좌석을 양보해 준 부인에 대해서 나는 왜 감사하지 않았을까. 짐을 들고 괴로운 얼굴로 서 있는 나를 본 그 부인은 하차하기 10분 전에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았던가. 청년은 반성을 하고 그 부인에게 새삼스럽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어 노인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때 나는 이미 짐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홀가분한 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겨우 앉았다, 갈 길은 멀다'라며 자기만을 생각하고 결국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 때의 초라한 자신의 몰골을 생각해 보고 청년은 자기 혐오감에 빠졌다. 그 때 다리가 불편한 노인에게 좌석을 양보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 좌석에 앉은 신사가 청년의 무릎에 넘어진 노인을 보다 못해 자리를 양보했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으며, 좌석을 양보하지 못한 것이 더욱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 신사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던가. 나는 왜 그 때 읽지도 않는 잡지를 꺼내 얼굴을 가렸던가. 이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이기주의와 자기 보존의 엄폐술에 불과했던 것이다. 

남에게 좋은 점을 보이고 싶은 마음은 비록 선의로 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답례와 감사를 탐내는 심리가 깔려 있다. 청년은 '왜 좀 더 순수한 마음으로 자리를 양보할 수 없었던가, 행여 꾸밈의 선생처럼 보이기가 싫어서 양보를 주저했던 것은 아니었던가'라고 반성했다.

또 자신의 편안함만을 구한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도 반성했다. 

그 때 신사가 보여준 행동을 앞으로의 인생의 교훈으로 삼아야겠다고 청년은 깊이 명심하였다.

그 후 청년은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중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나에게 털어놓았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를 지니고 육근이 있으므로 잘못을 저지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청년처럼 잘못을 잘못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자신의 본심을 단단히 가다듬어 아욕을 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누구든지 반드시 신리에 도달할 수 있다. 

올바른 길을 걷겠다는 수행이 자신을 향상시키고 진보시킨다. 흔히 세간에 '나는 자기 비판을 했다' 등의 기사가 신문지상에 실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신리에 맞는 자기 비판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반성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겉으로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것이 특정한 사상 통일을 위한 자기 비판이라면 더더욱 무의미한 짓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은 자유자재인데 그것을 사상적인 틀 속에 가두어 버린다면 인위적인 조직을 위한 자기 비판밖에 되지 않으며 진심의 반성이라고는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조직을 위한 자기 비판은 인간성을 잃고 인간 로보트가 되기 위한 반성밖에 되지 않는다. 모순을 안고 있는 사상을 통일하기 위한 세뇌용 자기비판은 비정한 조직의 압력에 의한 지만의 반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본이 잘못된 자기 비판은 조직의 세포로서 한정된 사고일 뿐이며 인간 본래의 생명의 자유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

정신적 폭력, 조직의 폭력이 항상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자아 비판이나 자아 반성이라는 것은 거의가 다 조직 속의 자기 보존이며, 진심에서 벗어난 지적 이론으로서의 형식적인 반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조직을 위해서 조작된 자아 비판은 어느 날엔가는 내부에서 불만이 폭발하여 그 조직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조직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마음 그 자체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 자신을 구제하는 길이 보일 것이다.

폭력으로 지배하는 것은 어느 날엔가는 폭력에 의해서 멸망한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순환의 법칙이다.

인간은 일시적인 표면상의 인생을 즐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선상에서의 인생을 즐기지 않으면 안 된다. 반성은 어디가지나 행복에의 전제이다.

올바른 반성 속에서 신불의 빛을 부여받게 된다. 반성은 올바른 이성의 힘을 길러주기도 한다. 이성은 마음의 유일한 브레이크이다. 

이와 같이 반성은 신불이 내려준 자비의 빛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