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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3장 신의 빛과 팔정도-팔정도

by Yuneelif 2023. 2. 4.

불경에 고집멸도라는 말이 있다. 고는 인생의 온갖 괴로움을 말하고 집은 그 괴로움의 원인을 말하며, 멸은 그 원인을 없앤다는 뜻이고, 도는 그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 방법은 팔정도를 실천하는 생활에 다름 아니다.

태양의 열과 빛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지상에 방출되고 있다. 물과 공기도 일정한 양을 유지하면서 줄지도 불어나지도 않는다. 지구의 운동도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면서 자전·공전하고 있다. 대자연계는 어느 것 하나 조화를 흐트리지 않고 항상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안정되어 있다.

대자연계는 이와 같이 중도라는 가장 안정된 축을 중심 삼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중도의 정신은 만물을 살리는 조화의 마음이며, 조화는 자비와 사랑이 그 근본을 이룬다.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대자연의 중도의 리듬과 합치될 수 있으며 평화의 낙원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선택과 창조의 자유를 부여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래도 중도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어서 오늘날 인류 사회는 온갖 주의와 사상이 난무하여 투쟁과 파괴가 그칠 날이 없다.

따라서 팔정도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취해야 할 으뜸의 기준이고, 대자연의 마음과 합일하기 위한 규범이며, 천국에 이르는 가교이다. 좌에도 우에도 치우치치 않는 중도의 길, 즉 신성 불성의 길, 정각의 길이다.

반성의 척도가 되는 이 팔정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 하나하나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노력과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1 정견 (바르게 보기)

사물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개인의 입장을 버리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보통 남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 더욱이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가 되면 시비의 판단이 흐려져 이따금 후회스러운 결과를 빚기도 한다.

이것은 자신의 문제가 되면 어느새 자기보존의 마음이 작용하여 아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올바른 관찰, 올바른 판단은 자신을 버리고 이를테면 제삼자의 입장, 즉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냉철하게 보는 데에서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마음의 내면까지 파고 들어가서 지금까지 옳다고 여겼던 일이 전혀 반대일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상의 겉모양만을 보고 판단을 내리면 틀리는 수가 많다. 현상의 뒤에 숨은 원인을 찾아내어 그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반성을 해야 하며, 객관적 입장의 반성을 통해서 그 원인을 찾아내어 그 원인을 없애야 한다.

올바르게 보는 힘은 올바른 견해를 낳는다. 그렇게 되면 이 인간 사회의 어지러운 움직임에 일일이 마음이 흔들릴 리도 없으며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이 지상계에 일어난,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그 원인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인 만큼 정견의 실력이 갖추어짐에 따라 현상의 뒤에 숨은 원인을 찾기가 쉬워진다.

정견은 이러한 마음의 눈을 길러감으로써 향상되고 정확해지며 마침내는 신의 마음에까지 닿게 되는 것이다.

정견의 목적과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목적: 사물의 정확한 판단과 견해를 얻는 데 있다.

1. 모든 사물의 원인은 인간의 상념에 있으며, 물질적 현상계는 상념의 결과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2. 기성관념을 백지화하고 사물의 진실을 파악한다.

3. 정견의 반대는 사견이며, 사견은 사심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사심을 버리고 항상 선의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본다.

정견은 팔정도의 각 규범의 기본이기도 하다.

 

2 정사 (바르게 생각하기)

보고 듣고 말하는 행위 이전에 중도를 중심으로 한 올바른 생각이 있어야 한다. 자기 중심의 생각은 자신을 망친다. 왜냐하면 모든 현상은 상호 작용하며 순환의 법칙에 따르고 있으므로 자기보존의 상념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제 꾀에 제가 넘어진다', '남의 눈에 눈물 내면 내 눈에 피눈물 난다' 등의 속담 그대로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창조 행위이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좋게 하려면 우선 생각을 늘 올바르게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은 행동의 전제이지만 실은 행동 그 자체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음으로 간음한 것은 행동으로 간음한 것 이상으로 죄악시하는 것이 신리다.

정사도 정견과 마찬가지로 제삼자의 입자에서 생각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 상대방의 행복을 비는 조화를 목적으로 한 사념이 중요하다. 정도의 목적은 '마음의 평화'이며 마음이 늘 어둡고 불안하면 아무 일도 안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인내와 인욕을 구별해서 생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 견디는 인내는 고통, 슬픔, 노여움, 미움 등의 감정을 뱃속에 집어 넣는 것을 의미한다. 나 혼자만 참으면 집안이 평온할 것이니 참는다는 그 '인내'는 독이 되고 질병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

반대로 '인욕'이라는 것은 견디고 참는다는 뜻이긴 하지만 고통, 슬픔, 노여움, 미움 등을 티끌만큼도 뱃속에 삼키지 않는 행위를 말한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때에는 상대방의 평안과 조화를 신불에게 빌어 주는 넓고 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정사를 기르는 데에도 역시 반성이 필요한다. 하루의 일과를 통해서 내 생각은 옳았던가를 살펴보고 잘못이 있었으면 고쳐야 한다. 이런 가운데 중도의 정사를 심중에 확립할 수가 있다.

 

정사의 목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생각하는 것은 만물의 시초이다. 모든 현상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되므로 남을 살리는 사랑의 생각이 정사의 밑바탕이 된다. 이 정사는 팔정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3 정어(바른 말)

말은 살아있는 영파로써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한번 표현된 말은 상대편의 귀를 통해서 조화나 부조화 어느 한 가지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지나치게 알랑거리는 말과 불손한 말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자기의 뜻을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말은 적어도 안 되며 많아도 좋지 않다.

상대편의 마음이 되어 대화해야 한다.

흔히 거리에서 운전 기사들이 서로 고함지르며 다투고 있는 꼴을 볼 수 있다. 설사 상대방이 고함을 질러도 이쪽에서는 반발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백 번 옳다는 판단이 서도 반발을 해서는 안 된다.

반발심은 자기보존이며 자기중심의 생각이다. 이럴 때일수록 올바르게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툰다는 것은 부조화의 원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가 화를 내어도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선악을 잘 판단하고 그 위에 마음을 조화시켜야 한다. 화낸 마음의 파장은 결국 화낸 사람에게 되돌아가는 것이 순환의 법칙이다.

'말한다'는 것은 나와 상대의 뜻이 교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드러운 말에서 받는 느낌과 거친 말에서 받는 느낌은 크게 다르다. 느낌이 좋은 부드러운 대화 가운데서 조화는 이루어진다. 아무리 심한 비방이나 험담이나 노여움에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되며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려야 한다.

그러나 왜 그런 말을 듣게 되었는가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런 억울한 말을 들을 만한 원인이 없을 때에는 '불쌍한 사람이다'하고 발언자를 동정해 주어야 한다. '신불이여, 부디 저 분의 마음에 평안을 주소서'라고 기도해 주어야 한다. 이런 마음이 바로 보살심의 표현이며 정어의 핵심이 된다.

 

목적: 생각하는 것은 말이 된다. 사랑의 생각은 사랑의 말이 된다. 정어란 사랑의 말이다.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말 이전의 말이 상대에게 전달된다.

 

4 정업 (바른 일)

지상계의 모든 생물은 일을 하도록 틀이 짜여져 있다. 동물도 식물도 그리고 광물까지도 다른 생명체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제공하고 있다.

사람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외가 아니다. 유아는 젖을 빨고 자는 것이 일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 다음 세대를 짊어지고 큰일을 하게 된다.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사회인은 사회를 위해서 일한다. 주부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지키며 남편의 일이 잘 되도록 편안한 보금자리를 꾸민다.

일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의무이다. 동시에 직업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은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업이 없는 사람,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오늘날의 사회 생활은 저마다 분업에 종사하면서 자기의 생계를 이어가는 동시에 남을 돕고 있다. 따라서 일한다는 것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인만큼 사랑의 행위가 된다.

일을 하고 직업을 가진다는 것이 사랑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이렇게 혼란해지는 것은 일을 단순히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나만 좋으면 그뿐이라는 사고방식이 만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업은 이 지상계의 조화에 이바지하는 행위이며 그 기초는 사랑과 봉사의 마음이다.

오늘날의 기업은 노사의 대립이 심각하여 투쟁고 반목이 그칠 날이 없다.

경제의 합리화는 분배의 공평에 있으며, 분배의 공평은 인간존중의 대화에서 풀어야 한다.

인간은 경제의 노예가 아니다. 저마다 맡은 바 직업을 통해서 영혼을 닦아야 하는 생명임을 명심해야 한다.

 

<노사분규의 해결>

직장을 투쟁의 장소라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은 자기의 목을 자신이 죄는 결과를 초래한다.

싸움과 파괴의 마음은 그대로 지옥으로 통하고 있다. 항상 노사의 마음을 조화시켜 사업의 실체를 보다 항상시키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신불의 빛이 쏟아져 공생 공존할 수 있게 되며 하나의 작은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

 

<망하지 않는 사업체란>

노사 쌍방의 마음이 조화되어 서로 단결이 이루어져 자기보존, 자아아욕을 찾아볼 수 없는 사업체는 신의에 따른 사업체다. 마음이 서로 조화를 이룬 직장은 신불의 빛에 의해서 보호받는다. 다른 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기술을 개발한 사업체도 망하지 않으며 영존하다. 기술이 없어도 영업활동이 부지런하고 정업에 전념하며 훌륭한 고객을 확보하고 있는 사업체는 넘어지지 않는다. 연구 노력의 결과 항상 인류 사회에 공헌하는 신제품의 개발로 획득한 전매 특허의 활용도 망할 수 없다.

대자연의 법칙에 따른 올바른 일은 지·정·의와 함께 인류 사회를 행복으로 인도하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영혼을 닦으며 조화의 환경을 구축해 간다. 이것이 일의 본질이다. 기술이나 노동력 이전에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하다.

평안과 조화와 즐거움을 주는 작품은 보다 높은 차원의 예술을 낳는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활도 몰락하지 않는다. 자만심은 고립을 자초한다. 마음을 상실한 예술은 자아 그 자체로 떨어진다.

또한 마음을 상실한 지와 의만의 과학은 투쟁과 파괴의 원인을 만든다.

마음을 상실한 지도자는 한동안은 번영하지만 멀지 않아 그 지도력을 잃고 저지른 죄를 스스로 보상받지 않으면 안 된다.

투쟁과 폭력으로 구축한 모든 것의 결과는 투쟁과 폭력에 의해서 또다시 전복된다. 마음을 심지삼아 근면과 노력으로 이룩한 사회는 조화와 평화의 환경이 되어 보다 높은 문명을 열어가며 우리들의 영혼은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진화해 간다.

이와 같이 일은 그대로 인생의 수행이며, 그 일터는 그대로 영혼의 수행장이다. 우리들은 모두 개체의 생명이며 그 개체를 개발 노력함으로써 보다 조화있는 사회를 구축할 수가 있다.

만생만물이 서로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유독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불의 분신이 만생만물을 정법으로 활용함으로써 비로소 정업을 이룰 수 있다.

고용주가 스스로 만족할 줄 알고 이익은 종업원에게 돌려주며, 진심의 대화로써 보다 높은 업적을 올리고 남은 이익의 일부는 사회 복지에 환원한다. 이러한 행위에 의해서 경영자의 보살심은 갈고 닦아진다.

이러한 일들은 인간 각자가 신불의 자녀로서의 자각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결코 물질이나 경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의 진심을 발휘하는 일이야말로 신리에 맞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업의 목적은 다음의 세 가지다.

1. 영혼의 수행

2. 지상계의 조화(일로써 남을 살림)

3. 봉사(조화의 기초는 감사의 마음과 봉사의 행위)

 

5 정명(바른 생활)

우리들의 육체는 인생항로를 건너는 배이며, 이 배의 선장은 의식 즉 영혼이다.이 영혼은 신불의 분신으로서의 본성이며, 따라서 우리들은 신의 품안에 존재하는 생명체이다. 이 현상계를 왕래하는 긴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지은 업(카르마)의 상념은 하나 남김없이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신의 자녀로서의 올바른 상념으로 조화시키는 것이 인생의 첫째 목적이다.

 업 상념이라는 것은 마음 속에 있는 부조화한 자기보존, 자아아욕의 모습에 다름 아니며 과거세부터 지속적으로 지녀왔던 악의 상념이다. 이 업 상념은 행위로 나타나게 되며, 자신을 반성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성격상의 결점이다.

인간은 눈·귀·코·혀·몸·뜻의 육근에 의해서 미혹당한다. 과거세의 악업의 씨도 이 육근의 유혹으로 뿌려졌다. 마음은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의 중심이며, 자기에겐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형편에 따라 남을 속인다. 그러한 자기보존에 의해서 더 큰 업을 짓고 만다.

우리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현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올바르게 마음의 눈으로 보는 훈련을 통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하고 중도라는 조화의 마음으로 결론을 얻어야 한다. 

가령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면 스스로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 판단해 보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며, 육체의 오관만으로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육체적인 조건만으로써는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

신리에 맞는 개개인의 마음이 사회 집단을 구성하고 그 가운데서 상호 협조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올바른 생활 즉 정명을 통해서 조소, 원망, 질투, 비난, 노여움 등의 악념은 꼬리르 감추게 된다. 대자연의 무한한 자비에 대한 보은의 행위가 평화스러운 안심 입명의 빛을 인간 사회에 형상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신불은 인류의 지상 생활에 필요한 만생만물을 이미 부여해 주었으므로 기도하는 것보다는 감사와 보은의 생활을 구현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보은을 실생활에 실천하겠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신리에 맞는 수행은 바랄 수 없다. 즉 수해이라는 것은 1초 1초의 연속적인 올바른 일상 생활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사나 사찰에 가서 신불에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기도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가지는 것이 진짜 신심이며 신불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고 생활하는 가운데 비로소 '마음'의 위대함과 존엄성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 마음의 문이 열리고 관자재의 능력을 구유할 수 있게 된다.

과학자가 과학을 통해서, 예술가가 예술을 통해서, 문필가가 문학을 통해서, 운동가가 운동을 통해서, 각자 신리에 맞게 조화를 이루는 생활이야말로 진짜 정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학문화된 철학적 종교는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 신리를 깨닫지 못한 참선이라든가 번뇌를 멸하기 위한 육체 고행 등은 무의미한 것이며, 신리를 깨달아 실천하는 생활이야말로 진짜 정명이다.

신리는 자신의 생활 환경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심의 신앙이다. 생활과 직결되지 않는 신앙은 모두 종교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나 자신에 있다. 생활의 부조화가 그 원인이며 책임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을 추구해서 제거해 나가는 반성의 생활 가운데 영혼의 진보는 있다.

일상생활이 조화를 이룰 때 신불의 빛의 보우를 받게 된다. 그러면 거기에는 불행이 얼굴을 내밀 수 없다. 행복은 올바른 생활의 지속적인 실천 가운데 쌓여가는 것이다.

 

목적: 정신적 육체적 조화를 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장·단점을 잘 살펴서 카르마가 된 여러가지 원죄(자기 보존의 상념)을 바로잡아야 한다.

 

6 정정진 (바른 노력) : 바르고 정성스럽게 나아간다

우리의 일생은 길어야 80년~90년이다. 영혼이 육체와 결합해 버리면 표면의식이 10%, 잠재의식이 90%라는 비율로 작용하기 때문에 거의 눈앞의 일밖에 알지 못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깨달을 수 있는 수행의 장소로는 이 세상이 가장 훌륭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이 현상계에서는 남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한치 앞의 내일의 일을 모르므로 스스로 고뇌의 원인을 만들어 나쁜 짓도 당당하게 하게 된다. '인생은 암흑이다'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을 존중하고 아욕에 사로잡힌 생각을 바로잡아 자신의 언동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살피면서 생활하는 것이 이른바 정도이다. 이러한 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무한대의 지혜가 솟아나 인간으로서 생활하고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실재계, 즉 저 세상에서는 이 현상계에 있는 우리의 생활상태나 마음의 움직임을 흡사 유리상자 속을 들여다 보듯이 환하게 알아볼 수 있다. 거짓말도 금방 알 수 있다.

자신의 생활이 이처럼 유리상자 속이라는 것을 안다면 인간은 함부로 불행의 원인이 되는 언동은 취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 마음 속에 비밀로 하고 있는 부조화한 생활을 청산하고 진실로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올바른 생활에 정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단독으로는 태어날 수도 없고 또 살아갈 수도 없다. 반드시 부모가 있으며 나아가 형제자매, 부부, 이웃, 친구, 선후배 등 대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닦아지며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길러진다.

오늘날처럼 물질만능주의가 되면 부자의 사이도 남이며, 부부 사이를 향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친구는 이익을 위한 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 이외에는 모두가 남이 되는 것이다.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부의 관계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가정이라는 천국을 창조하고 자손을 키우는 곳이며, 부모자식의 관계는 과거세의 인연과 약속에 의해서 맺어진 사이이니 부모는 자식을 돌보고 자식은 부모에게 마당히 효도해야 한다. 형제는 영혼의 향상을 위해서 서로 절차탁마하는 사이이며, 친구나 선후배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좋은 협력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조화에 일관하는 기둥은 사랑의 마음에 다름 아니다. 사랑이야말로 조화의 모습이며 이 지상의 빛이다.

또 인간은 공동생활이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동물·식물·광물 등의 자연 자원을 바르게 정비하고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원을 순환의 법칙에 맞게 소중하게 가꾸어야 한다. 산림보호, 수렵금지, 자연보호 등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인간 관계를 비롯하여 자연 자원과 관계가 항상 '복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복수라는 사회환경, 자연환경 속에서 타를 이롭게 하고 상부상조해 나가는 것이 바로 올바르게 도에 정진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목적:

1. 인간 관계의 조화

2. 자연 환경과의 조화

 

7 정념 (바른 기억)

현대 종교의 대부분은 그저 기도하는 것만이 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문은 예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경문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불교에서는 어렵게 철학화된 경을 올리는 것이 하나의 공식적인 행사처럼 되어 있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 그 속에 다긴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왜 모르고 있을까. 고마운 경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럴수록 실천에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죽은 자를 위해서 경을 올림으로써 좋은 곳에 천도시키는 공덕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그 경의 의미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공덕이 있단 말인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상식적인 관념으로써는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말로 상대방이 말을 건네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이승에서의 생활 상태,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저승으로 돌아간다. 죽은 뒤에 천도불공으로 부처가 된다고 하는 스님이 있다면 그 분이 과연 저승의 실상이나 알고 하는 말인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즉 현재의 의식을 지닌 채 차원이 다른 저승으로 순환해 가는 사자는 깨닫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독자들 가운데에는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실을 즉석에서 현상화시켜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결코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살았을 때의 그 모습, 그 음성, 그 사람의 특징까지 죄다 드러나는, 죽은 영과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려줄 수 있다. 이것은 죽은 자가 살았을 때의 사념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증명이다. 인간으로서 올바른 생활을 해서 자기 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있는 영 이외에는 모두가 다 지옥에 떨어져 있다. 나는 이런 사실을 두 눈으로 확실히 볼 수도 있고 또한 그들과 대화도 나눌 수 있다.

신불에 대한 기도도 자기 욕심의 기도가 아니고,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일 때 보다 확실한 신불의 조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마음 속에 사념하는 것은 그대로 현상화되고 만다. 가령 자신이 어떤 욕망을 이루려고 사념하는 마음은 이미 욕망의 포로가 된 상념으로 자신의 의식 속(상념대)에 기록되어 버린다. 그 기록을 지울 수는 없다.

우리들이 걸어온 과거를 지울 수가 없듯이 우리들의 상념은 하나 남김없이 기록되고 보존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부조화한 기록들도 반성을 통해서 수정되고 진화할 수 있는 것이므로 반성이 없는 인간은 불쌍하다. 반성은 신불이 인류에게 준 자비이다.

또 교회나 사찰에 나가서 기도하고 참배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지만, 신불에겐 그 사람의 행·불행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올바른가 아닌가가 행·불행을 결정짓는다.

올바른 염에 의해서 그 행위가 신리에 따르고 있다면 우리의 수호령, 지도령은 반드시 신의 빛을 보내 준다. 또한 이 지구 그 자체도 신체의 일부분인 대신전이기 때문에 정념은 반드시 통한다.

오늘날의 사찰이나 교회 가운데에는 영역이 높은 곳도 있으며, 실재계의 제천선신과 늘 연락되어 일념이 현상화되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신역은 극히 드물다. 따라서 사찰이나 교회는 어디든지 영역이 높다고 믿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오히려 불행을 불러들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올바른 염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신불의 빛에 의해서 보호를 받으며, 다른 나쁜 영에게 지배당하는 일은 없다.

흔히 신이다, 불이다 하는 것은 실은 실재계의 천사들을 말한다. 그런데 천사들도 마음의 조화도에 따라서 단계의 차이가 있다. 한편 천사들 이외에도 부조화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의 상상력은 무한대이다. 하지만 그것도 올바른 조화를 위한 상상이어야 정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잘못된 사념에 의해서 자신의 본성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증거로 부자연스러운 신흥 종교나 부조화한 일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에게 과연 마음의 평안이 있을까. 마음에 족쇄를 채우고 늘 불안한 나날을 보내며 불행에 빠진 자가 적지 않다.

인간은 산 신이 될 리 없다. 신불의 마음과 조화하는 길은 자기 자신의 올바른 상념과 행위 이외에는 없다. 신이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 염은 에너지이며 사물을 만들어 내고 이 지상계의 모든 것의 원인이다. 염은 목적 의식이므로 행위를 의미하며 남을 살리는 자비와 사랑의 염 이외의 것은 카르마의 온상이 된다. 사념과 비교해서 생각하면 정념의 뜻이 더 명확해진다.

 

8 정정 (바르게 바로잡다)

신불의 자녀로서의 자각이 눈뜰 때 우리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세상은 영혼의 수행장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세계는 따로 있다. 인간은 번뇌라는 바다 가운데에서 깨달을 수가 있다. 반성의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영역을 정화하고 마음의 신성·불성이 잠재의식의 문을 열 때 불멸의 세계 저 세상의 생활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의식은 실재계, 현상계 어디든지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다. 우리들이 잠자고 있을 때에는 육체에 연결된 영자선을 타고 실재계나 이 현상계의 낯익은 장소, 또는 자신이 태어났던 과거세의 장소 등에도 가 볼 경우가 있다. 더욱이 수면 중의 가장 중요한 일은 저승에서 에너지를 보급받고 온다는 사실이다.

잠잔다는 것은 육체라는 배를 휴식시킴과 동시에 의식·마음의 세탁도 하는 시간이다. 때론 천사들에게 강제로 연마되는 경우도 있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숙취 현상이 일어난다든가 또는 몸살 감기끼가 든다든가 하는 육체적 현상은 그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심장의 박동이 심해져서 기분이 나빠질 경우도 있다.

하지만 수호령이나 지도령으로부터 닦여진지 10수 시간 후에는 몸은 말끔해진다. 그런데 이 경우의 육체적 증상은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의사의 진단도 소용없다. 만일 이와 같은 현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잘 반성해서 하루 빨리 정법에 따른 궤도 수정을 해야 한다.

이밖에도 불안, 초조, 신경질이 잘 나는 사람은 부조화한 저급령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신불의 빛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만성 두통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지나친 간섭 주의자에게 많다. 무엇이든지 전부 머리 속에 집어 넣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뇌는 60조가 넘는 육체 세포의 총사령실이며 통제 부분이다. 기억 담당실은 대뇌피질의 신경 섬유로 흐르는 모든 전기적인 파동 입자에 의해서 성립된다. 거기서 발신된 진동 에너지가 의식에 전달되어 상념대에 기록된다.

'모든 것은 뇌 속에 기록되어 있다'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만일 우리의 뇌가 일체의 기록 장치를 가지고 사고에너지를 발신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수면 중에는 일체의 사고활동이 중단되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수면 중에 뇌파의 진동이 발신된다는 것은 의식과의 접촉을 시도하기 위한 현상에 다름 아님을 보여 준다. 영자선이 끊어져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때에는 뇌파의 진동은 멈추게 되며 육체와 영혼(광자체)은 분리되어 저 세상으로 돌아간다. 즉 죽음을 의미한다.

오관을 통해서 수용된 것이 뇌에 전달되어 다시 뇌파의 발신 진동에 의해서 마음(의식)에 보고되는 것인데, 수면 중의 뇌파의 진동수가 다른 것은 오관이 휴식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세는 육체 세로포써는 기억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기억 장치는 뇌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 나라에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 환경과 조건이 다른 여러 나라를 스스로 희망하여 전생윤회하고 있다. 따라서 육체적 조상이 자신의 유일한 뿌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생명이 부모의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부모자식간의 부조화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성격이 다르며 사고방식이 다를 수 있겠는가. 이 의문에 대답 못할 것이다.

멘델의 유전 법칙은 육체 유전에 한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뇌세포 수는 약 2백억 개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억(마음)에의 한 길목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기억 뇌세포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영계와의 통신을 언제든지 보여 주겠다. 영도가 열린 사람은 모든 차원이 다른 세계와의 교신이 가능하다.

신리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면서 정(참선 명상)에 들면 우리의 의식체는 대우주로 확대되어 신불의 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법열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은 상념의 정지에 의해서 깨달음을 열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엉터리이다. 만상 만물 일체의 현상은 한 시간도 정지함이 없다. 상념 정지의 순간 동물령에 지배되어 '나는 신이다, 부처다' 등으로 뽐내는 신흥 교주가 있는데 그런 교주는 한결같이 병약하거나 물욕 덩어리이다. 병약의 원인을 신자의 업을 대신 짊어진 탓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사실은 검은 상념에 의해서 악령에 빙의된 현상이다.

더러는 입산 수도했다고 자칭하는 자가 훌륭한 도사처럼 행세하고 있는데 이들 역시 진짜일 수 없다.

폭포욕이나 육체 고행을 통해서 번뇌를 멸각할 수는 없다. 육체 수행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의식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 순간에 주로 동물령에 빙의되고 그 둔갑술에 현혹되어 천상의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선도나 요가 등의 수행자에게 흔한데 이런 사람들은 자아가 강하고 자비심도 없으며, 마음도 부조화하여 평안이 없고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신통술이 있다고 뽐내는 경우에는 거의가 동물령의 지배 하에 있다.

이러한 행위는 정정이라고 할 수 없다.

정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겸허하다. 뽐내는 마음이 없다. 일체의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올바르게 팔정도를 실천하며 현재, 과거, 미래의 삼세를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녔다.

인간은 산중에 들어가서 수행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올바르게 일에 전념하여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 육체를 얻어 나왔다. 

인도의 고타마 붓다도 6년 동안의 고행으로는 깨달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예수도 어릴 때 산중에 들어갔지만 육체적 고행은 거의 하지 않았다.

신리를 깨닫지 못한 채 참선을 한들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신리를 깨달은 실천 생활 가운데 육체적인 수행은 운동으로서는 좋은 일이다. 깨달음은 어디까지나 형식이나 이론 속에는 있지 않다. 형식과 이론에 사로잡힌 사람은 깨달음의 경지에는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다. 정정은 신리의 깨달음과 올바른 상념과 행위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학문 불교, 의식 불교, 관광 불교, 장례 불교 등은 아예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인도에서 고타마가 설법한 당시의 불교에 의해서 비로소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편 기독교도 예수 생존시의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신리로 돌아가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진짜 마음의 존엄성을 깨닫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여심이라고 말한다.

팔정도는 나 자신의 깨달음이며 인간은 최소한도의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태어난다.

정법은 어느 한 나라에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고 전인류, 전우주의 신리임을 알아야 한다. 불교도 기독교도 고타마의 시대, 예수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선결 문제다. 신리는 시대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 문명은 생활의 지혜이며 보다 높은 차원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 만물의 영장다운 행위이다.

 

목적: 반성에 의해서 마음이 안정되면 부동심이 길러지는데 그 부동심을 일상 생활에 활용하지 않으면 정정의 의미는 반감된다. 정정은 실재계와의 가장 가까운 교류장이며, 정정에도 여러 단계가 있지만 요는 마음의 조화, 안정, 지혜의 용출 등이 그 목적이 된다.

 

팔정도를 현실 생활에 살리는 방법

1. 냉정할 것: 항상 선의의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것.

2. 친절할 것: 사랑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염원하며 말하고, 자기 중심의 입장에서 떠날 것.

3. 감사·보은할 것: 사람들의 협력으로 개인도 사회도 성립된다는 점을 명심하여 봉사와 협조의 마음을 잊지 말것.

4. 성격상의 단점을 수정할 것: 장점을 기르고 단점을 수정하여 서로 손을 잡고 살아갈 것.

5. 늘 반성할 것: 영혼의 진보는 정법이라는 올바른 순환에 있으므로 중도의 척도로써 하루의 언동, 마음의 움직임을 반성하여 상념의 정화와 수정에 노력할 것. 반성 후의 명상은 마음과 육체의 파장이 신에 접근하여 밝고 상쾌한 기분이 된다. 이 기분으로 하루의 생활을 보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