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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사냥꾼과 사슴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6. 26.

바시슈타(또는 바사)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신들은 그들끼리 계속 말했습니다. "악귀들은 이제 이 시체의 피와 살을 다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땅이 보였습니다. 그 시체의 뼈 자체는 새로운 산맥들을 이루었습니다." 신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악귀들은 만족한 나머지 공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신들은 땅에 약간의 피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그 피로 여러 바다를 채우고, 그 피를 술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악귀들은 이 술을 마시고 계속 춤을 추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 지구는 그 시체의 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는 '메디니(땅)'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지구와 그 주민들은 다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창조주는 새로운 인류를 창조했습니다.

(바사가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불의 신에게 이 사람은 죽기 전에 누구였는지를 물었습니다. 불의 신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순수한 의식으로 가득 찬 무한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무수한 세상들이 무수한 원자들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자기 자각을 갖춘 우주적 인격체가 생겨났습니다. 그 사람은 마치 그대가 꿈 속에서 하나의 대상을 보듯이 그 자신의 빛을 경험합니다. 그러한 경험들로부터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감각들과 그 해당 기관들이 생겨납니다. 이 감각들은 이 세상으로 변하는 그들 각자의 대상들을 자각합니다.

그 세상에서 아수라(악마)란 사람이 셍겨났습니다. 그는 자기의 힘을 자랑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느 현자의 은둔처를 파괴했고, 그때 그 현자가 다음과 같이 그를 저주했습니다. "그대는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다. 그대는 죽어서 모기가 될 것이다." 그 저주의 불은 아수라를 태워서 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무의식적인 사람의 마음과 꼭 같이, 육신이 없는 인격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공간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그것은 그 공간 속의 바람과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이 바람은 생명력(쁘라나)입니다. 이제 아수라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깨어나 에너지와 물 등을 얻었습니다. 그가 다시 한 번 다섯 원소(딴마뜨라)들과 무한한 의식의 미립자를 부여받자, 그는 하나의 개인으로서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알맞은 조건에서 씨앗이 싹트는 것처럼, 그에게 자기 자각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기 자각 속에는 그 현자의 저주와 모기의 관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기가 되었습니다.

(라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브람마로부터 풀잎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들은 두 가지 형태의 탄생을 겪습니다. 하나는 브람마의 창조이며, 다른 하나는 환영의 창조입니다. 그가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창조주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창조는 '자궁을 통한 탄생'이 아닌, 브람마의 창조입니다. 잠재된 망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태어난 환영과 같은 탄생입니다.")

모기는 그 짝과 함께 풀잎 위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풀은 사슴에게 뜯어 먹혔습니다. 그가 사슴을 쳐다보면서 죽었기 때문에, 그는 사슴이 되었습니다. 그 사슴은 사냥꾼에게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슴은 다음 생에서는 사냥꾼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사냥꾼은 숲 속을 떠돌아다니다가 운 좋게도 어느 거룩한 현자를 만났으며, 그 현자는 "그대는 왜 이같이 잔인한 사냥꾼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이 사악한 삶을 버리고, 니르바나를 얻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하며, 그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사냥꾼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오, 현자시여! 그렇다면, '어렵거나' 혹은 '힘들지 않은' 수행을 하지 않고도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 활과 화살을 버리십시오. 바로 여기에 남아서 슬픔이 없는 침묵의 생활에 의지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사냥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그는 마치 꽃의 향기가 사람의 몸에 스며들듯이, 경전들의 지혜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현자에게 "오, 현자시여! 어떻게 해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그 꿈이 밖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이 질문은 맨 처음부터 나의 마음속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나는 집중을 수련했습니다. 나는 연꽃 자세로 앉아서 순수한 의식의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수천 가닥으로 분산된 마음의 모든 광선을 모아서 나 자신의 가슴에 집중했습니다. 생명의 힘과 함께 나는 몸 밖으로 마음을 '토해 냈습니다.' 그 쁘라나는 내 앞에 나타난 어떤 살아 있는 존재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존재는 그 쁘라날르 '들이키면서' 그 자신의 가슴에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다음 나는 그 존재의 가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나 자신의 지성에 속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쁘라나를 따라 그 존재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내부가 무수한 통로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그 통로들은 모두가 밖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내부는 또한 마치 집이 가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간이나 비장과 같은 다양한 오장육부와 신체 기관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내부는 따뜻했습니다. 몸 밖에서 안으로 흘러들어 온 시원한 산들바람 때문에 그 몸은 살아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통로들은 음식의 정수를 운반했습니다. 내부는 지옥처럼 매우 어두웠습니다. 이 통로들을 따라 흘러가는 생명력의 흐름들은 불규칙적인 생명력의 흐름들을 따라가는 신체적 혼란의 징후를 충분히 보여 주었습니다. 연꽃 줄기처럼 생긴 한 통로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강렬한 힘이 흘러갔는데, 그 힘은 멀리서 바람이 좁은 관을 통해 흘러갈 때 내는 그런 소리를 냈습니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대상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것은 공기의 움직임에 의해 함께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곳에서는 유쾌했으며, 어떤 곳에서는 동요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천상의 음악가들이 혓바닥 어딘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또 다른 곳에서는 그것이 마치 좋은 음악인 것처럼 들렸습니다.

나는 그 존재의 가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가슴속에서 나는 빛의 근원에 도달했습니다. 그 속에는 삼계가 다 비춰졌습니다. 그것은 삼계의 빛입니다. 그것은 만물의 본질 자체입니다. 그 속에는 지바도 있습니다. 지바는 몸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지만, 이 '오자스'(내면의 빛)가 그 지바의 특별한 자리입니다. 그것은 생명력에 의해 사방에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나는 마치 물이 토기에 스며들듯이 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남아서 나는 마치 나 자신의 '오자스'로부터 우주를 보고 있는 것처럼 우주 전체를 보고 있었습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그 꿈의 세상 속에서도 신들과 악마들과 인간들은 물론, 태양과 산들과 바다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도시들과 숲들과 시간의 척도들과 방향들이 있었습니다. 그 꿈의 환영은 영원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나의 수면이 끝난 뒤에 일어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잠을 자지도 않는데 어떻게 이 꿈을 볼 수가 있을까?'라고 스스로 물었습니다. 오랫동안 탐구를 한 뒤에, 나는 '이것은 의식에 관한 신성한 형태의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그 의식이 본질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깨달았습니다. 말하자면, 이 의식의 씨앗이 그 자체의 형태를 어디에서 보든지 간에, 그때 그 자리에서 그것은 무한한 의식으로서의 그 자체의 실재를 버리지 않고 이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꿈의 대상이라고 하는 이 세상이 이 무한한 의식의 지각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 의식의 나타남(빛남)을 깨어 있는 세상이라고 하며, 또한 꿈의 세상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의식입니다. 그래서 그 의식에는 어떤 구분도 없습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와 관련해서 꿈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꿈은 꿈 자체와 관련해서는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어 있는 상태 그 자체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은 단지 의식에 불과합니다. 백 개의 몸이 썩어 없어진다 해도, 의식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의식은 공간과 같지만 마치 몸인 것처럼 존재합니다. 무한한 것은 형태가 있거나 없는 무한한 대상들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경험의 무수한 입자들이 무한한 의식 내에서 빛나기 때문입니다. 지바가 외부 세상의 경험을 외면하고, 가슴속에 있는 내면의 세상으로 방향을 돌릴 때, 그때 꿈이 일어납니다. 지바가 의식을 외면화시킬 때, 깨어 있는 상태가 됩니다. 똑같은 지바가 그 시선을 자체로 돌리면, 꿈이 일어납니다. 지바 그 자체는 그들이 안에서 보이든 밖에서 보이든 간에, 공간이나 지구, 바람, 산 그리고 바다들로서 펼쳐집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사람은 바사나 즉 정신적 조건화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 다음 나는 "잠은 무엇일까?"라고 자문했습니다. 나는 잠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의 대상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당분간 완전한 평화 속에서 휴식이나 취해 보자.'라고 생각할 때, 잠은 일어납니다. 똑같은 몸 속에 지각력이 있고 또한 지각력이 없는 부분(손톱, 머리카락 등)들이 있는 것처럼, 잠도 지각과 무지각 두 가지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평화롭게 쉬어나 보자.'와 같은 하나의 관념이 마음을 지배할 때, 잠이 옵니다. 이것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나는 뚜리야의 상태(제4의 상태)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뚜리야 상태에 자리를 잡게 되면, 이 현상계는 완벽한 깨달음(조명)때문에 사라집니다. 그때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깨어 있음과 꿈과 수면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이 뚜리야의 존재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그것을 생기게 할 원인이 전혀 없기 때문에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과 '이 세상으로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은 오로지 브람만뿐이다.'라는 깨달음이 곧 뚜리야입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그 다음 나는 그 존재의 의식과 하나가 되고 싶었습니다. 내가 의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그 존재의 '오자스'를 떠났을 때, 나 자신의 감각들은 즉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즉시 감각들을 억제하고 의식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그 의식 속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동시에 두 개의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모든 것이 두 개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각하는 두 개의 지성이 닮았기 때문에 이원성은 동일한 것처럼 보였고, 마치 물과 우유처럼 잘 혼합되었습니다.

곧 나는 의식의 도움을 받아, 나 자신 속으로 그 다른 존재의 의식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러자 즉시 '두 세상'은, 마치 복시 환자에게 달이 두 개로 지각되다가 치료가 되면 달이 하나로 지각되는 것과 똑같이,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지혜를 버리지 않았지만, 나 자신의 사고 형태는 크게 약화되어, 다른 존재의 사고 형태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사람처럼 이 세상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는 마음의 빛들을 한 곳에 모았습니다. 마치 거북이가 그 수족들을 그 자신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그의 감각들도 그들의 작용과 함께 그의 가슴속으로 글려들어 갔습니다. 그의 감각 기관들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변했거나, 아니면 그려진 초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그의 내부에 있으면서 그의 마음의 진로를 따라갔고, 그의 가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외부의 대상들에 대한 경험을 포기하고 '오자스' 속으로 들어간 상태였으므로 잠시 수면의 행복을 즐겼습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모든 통로들이 밀집해 있었고, 피로 때문에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음식과 음료 등 때문에 생명의 숨결이 콧구멍을 통하여 천천히 흘러들어 갔습니다. 생명력은 가슴속에 있는 그 자체의 근원을 자극하여 마음의 중요성을 없애 줍니다. 즉, 마음을 중요하지 않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그 자체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참나는 이제 그 자체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외면화된 활동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로서 빛납니다.

라마는 물었다.

마음은 오로지 생명력 때문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 자체로서는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입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비록 몸은 실재하는 것으로 경험되고 있지만, 그것은 진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꿈 속에서 본 산 만큼이나 비실재적입니다. 어떠한 원인도 없고 어떤 '대상'도 창조된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짜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브람만입니다. 그리고 브람만이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심지어 몸과 마음 등도 오직 브람만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것을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설명할 일이 아닙니다.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의 무한한 의식은 그 자체를 그 자신의 대상으로서 자각했으며, 우리는 그것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움직임의 관념이 일어났을 때, 그 관념은 쁘라나 즉 생명력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쁘라나는 감각들을 통해 경험을 일으키고, 따라서 이 세상이 나타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마음은 실재적이거나 비실재적이거나 혹은 혼합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창조자입니다. 쁘라나(생명력)는 다음과 같은 생각과 더불어 마음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쁘라나는 나의 움직임이다. 그래서 나는 쁘라나 즉 생명력이 없이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나의 목적이 되도록 하겠다. 비록 내가 얼마 동안 쁘라나 없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 곧 쁘라나와 함께 있겠다.' 이 쁘라나가 마음과 결합되는 순간, 그것은 환영의 세상을 봅니다. '나는 생명력과 몸이 없이는 다시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겠다.'라는 확고한 생각 때문에, 그것은 순수 의식으로서의 그 진정한 본성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슬픔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심으로 인하여 양 극단으로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슬픔은 참나 지식이 일어날 때를 제외하고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참나 지식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나는 이것이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없앨 수 없습니다. 참나 지식은 해방의 방법에 대한 탐구를 통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해방의 방법을 탐구해야 합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생명력이 나 자신의 생명이다.'라는 생각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쁘라나에 의지해 있습니다. 몸이 건강한 상태에 있을 때, 마음은 작용을 잘 합니다. 그러나 몸이 건강한 상태를 누리지 못할 때, 마음은 신체적인 혼란 이외의 어떤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쁘라나가 그 자체의 힘찬 움직임에 분주하게 종사할 때, 그것은 그 자체의 움직임에 몰두한 나머지, 참나 지식에 힘을 기울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과 쁘라나의 관계는 기수와 마차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처음부터 무한한 의식이 지닌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까지도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물질, 마음, 쁘라나 그리고 몸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관념들을 계속 지니고 있습니다. 마음과 쁘라나가 조화롭게 작용할 때 사람들은 다양한 활동들에 종사합니다. 혼란이 있을 때 부조화가 있습니다. 둘 다 쉬고 있을 때 수면이 있습니다. 나디(에너지의 통로들)가 음식물 따위로 막히고 활발하지 못할 때, 쁘라나의 움직임은 둔해지고 수면이 있습니다. 또한 나디가 음식물 등으로 막히지 않을 때라도 힘이 약하거나 피로가 있을 때는 쁘라나가 적절하게 움직일 수 없어서 잠을 잡니다. 나디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부드럽고 약해질 때, 나디가 온갖 종류의 불순물로 채워질 때, 따라서 쁘라나가 어떤 특별한 활동에 종사할 때도 역시 잠이 일어납니다.

현자는 말했습니다.

어둠이 다가오자, 내가 가슴속으로 들어갔던 그 사람은 깊은 수면에 들었습니다. 나도 이러한 깊은 수면을 즐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먹었던 음식물이 소화가 다 되고 나디가 깨끗해졌을 때, 생명력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잠은 약화되었습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이렇게 잠이 약화되었을 때, 나는 마치 가슴속에서 세상이 떠오른 것처럼 태양 등이 있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나는 내가 있던 곳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주 소멸의 홍수로 뒤덮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신부와 함께 어느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홍수가 우리 모두를 휩쓸어 가고 있을 때, 집 전체는 마치 홍수와 싸워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듯이 물 위에 떠 있었습니다. 곧 내가 앉아 있던 집은 홍수에 떠내려가다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나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나는 이미 가족과 친구들을 포기했고, 오로지 나의 생명의 보존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따금 물아래로 내려가기도 하고, 이따금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바위에 발붙일 곳을 얻어 잠시 쉬려고 했지만, 거대한 파도들이 다가와서 다시 나를 홍수 속으로 내동댕이쳤습니다. 이 기간 중에 내가 경험하지 못한 고통의 형태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모든 형태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 겪은 것입니다.

한편, 비록 내가 제법 의식은 있었지만 완전한 절망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마디 상태에서 전생 때의 경험을 회상했습니다. 그때는 내가 고행자였습니다. 나는 꿈의 상태를 목격하고 싶어서, 이미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내가 하나의 환영을 지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나는  또한 현재의 경험도 자각했습니다. 즉 비록 내가 홍수에 떠내려가고 있었지만, 나는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홍수와 그 홍수가 일으킨 파괴를 보고 있는 동안,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운명이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심지어 눈이 세 개 달린 신도 이 홍수로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이 홍수 속에서 모든 신들과 악마들도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구나. 이 산더미 같은 파도들이 바로 창조주 브람마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치속고 있다. 이들 파도는 코끼리처럼 생겼고, 사자만큼이나 강력하고, 마치 구름처럼 하늘을 떠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구를 지키는 보호자들조차 그들의 궁전 및 탈 것과 함께 이 홍수에 휩쓸려 익사하는구나. 신들과 악마들도 함께 이 홍수 속에서 떠다니며 서로서로에게 매달린다. 무너지는 도시들과 물에 떠다니는 궁전들 때문에 홍수가 일으키는 파도들은 견고한 성벽처럼 보인다. 태양마저도 이 홍수에 정복당하여 하계로 끌려가고 있다. 오직 진리를 아는 이들(참나 지식을 갖춘 현자들)만이 조금도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구나.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몸이 물살에 따라 떠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지만, '내가 몸이다.'라는 잘못된 생각이 그들에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힘없는 여자들은 익사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죽음에 잡아먹히고 있는 이 우주 소멸의 홍수 속에서, 누가 누구를 구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주 전체가 오직 무한한 바다인 것처럼 보인다. 인드라가 왕으로 있는 모든 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사냥꾼은 물었습니다.

오, 현자시여! 당신과 같은 그런 위대한 사람들에게서도 그러한 환영이 일어납니까? 명상 수행을 통하여 그들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현자는 대답했습니다.

모든 것은 이 세상의 주기가 끝날 무렵에 사라집니다. 어떤 것들은 서서히 종말에 이르지만, 어떤 것들은 갑자기 없어집니다. 또,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것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납니다. 더욱이, 불운이 도래하면, 힘과 지성과 활력(광채)은 심지어 위대한 사람들의 경우에서조차 언제 어디서나 모두 불리하게 영향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지금까지 묘사했던 것은 단지 하나의 꿈에 불과했습니다. 꿈에서 불가능하거나 꿈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이 꿈의 경험을 그대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그 진리를 말해 주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주 소멸의 거대한 홍수를 목격하고 있는 동안, 나는 우연히 어느 산 정상과 마주쳤습니다. 나는 그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 다음 순간 장면 전체가 바뀌었습니다. 나는 홍수의 큰 물살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알지도 못합니다. 지구 전체가 진흙 덩어리로서, 인드라와 같은 신들과 코끼리 같은 동물들이 모두 목까지 진흙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피로로 곧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후에, 비록 나는 나 자신의 '오자스'에 남아 있었지만, 여전히 전생의 경험으로 결정된 심리적인 조건화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일종의 이원적인 의식을 경험한 뒤에 깨어났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서 그 산 정상을 보았습니다. 둘째 날은 거기에서 일출을 보았습니다. 이후에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대상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 세상 속에서 나의 일상적인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나는 열여섯 살이야. 이분들은 나의 부모님들이야.'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나는 마을 하나와 그 마을 속에 있는 한 은자의 집을 보았습니다. 나는 나에게 진짜가 되어 버린 그 은자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전생 경험의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몸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혜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바사나 즉 정신적 조건화는 내 존재의 정수 자체였으며, 나는 부에 헌신했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사회적 종교적 의무들을 다 했습니다. 나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현자가 나의 손님으로 나에게 왔습니다. 나는 그를 환대해 주었습니다. 밤에 그는 나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무한한 우주를 상세히 묘사했고, 결론적으로 그 모든 것이 무한한 의식이라고 말했습니다. 나 자신의 지성이 깨어났습니다. 즉시 나는 모든 과거와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갔는지를 기억했습니다. 나는 그 상대가 우주적 인격체라고 생각하고 거기로부터 빠져나오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쁘라나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된 뒤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내 앞에서 제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은자의 집에서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는 나 자신의 몸을 보았습니다. 이들 제자들에 따르면, 내가 사마디에 들어간지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가슴속으로 들어갔던 그 사람은 잠자고 있는 또 다른 여행자였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재빨리 그 잠자는 사람의 가슴속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우주의 소멸이 완료된 뒤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친척들과 살았던 마을도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모든 것이 우주 소멸의 불길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나는 바람에 대한 명상을 하고, 그 안에서 돌아다녔습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비록 거기에서 그 무시무시한 불길에 휩싸여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꿈꾸는 동안 그것이 단지 꿈이라는 것을 알 때, 그대는 심지어 불길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나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불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내가 그 불길의 본성을 탐구하고 있는 동안, 무서운 열파가 일어났습니다. 그 열파가 일으킨 거센 바람 속에서 모든 것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면서 전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파괴의 춤과 같았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의아한 생각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내가 다른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살아 있는 동안, 내가 꾸는 꿈에 불과하다. 나는 왜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러한 고통을 목격하고 있는가?

사냥꾼은 물었습니다.

당신은 꿈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 사람의 가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왜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결심했습니까? 당신은 진리를 알아냈습니까?

현자는 대답했습니다.

우선, 이 우주는 생겨나야 할 어떠한 원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라는 단어도, 객체인 '창조물'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무지나 비실재성도 또한 의식이나 실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관념입니다. 그리고 의식이나 실재 안에서 ('창조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는 무지와 어리석음이 사라진 그런 사람의 관점에서 그대에게 진리를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관점에서는 무엇이 진리인지를 나는 모릅니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순수 의식으로서, 순수 의식은 만물에 충만해 있습니다.

몸은 어디에 있고, 마음은 어디에 있으며, 또 꿈은 무엇입니까? 물과 홍수 등은 어디에 있습니까? 각성은 어디에 있으며, 그러한 각성의 멈춤은 어디에 있습니까?  탄생과 죽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순수 의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있는 곳에서는 가장 작고 가장 미묘한 공간일지라도 그 공간은 대우주로 나타납니다. 자연스럽게 이 의식이 잠깐 동안 '생각'하면, 세상의 관념이 아직은 순수한 공간이지만 일어납니다. 마치 꿈 속에서 오직 의식만이 다양한 옷을 입고, 어떤 도시 등도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은 오직 순수 의식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외양도 없으며, 비실재적이거나 실재적인 것도 아무것도 없으며, 공간도 전혀 없습니다. 대신, 오직 형태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비이원적인 무한한 의식만이 있습니다. 꿈은 어떤 원인도 없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의 독립된 객체도 없이 오직 지각하는 사람의 순수 의식만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또한 어떤 원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체나 객체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순수 의식이거나 그 본질입니다. 그러나 비이원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은 순수한 경험입니다.

시간은 존재와 파괴 둘 다입니다. 씨앗 그 자체는 꽃들과 열매들에 이르기까지 그 씨앗에서 나오는 모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브람만도 이 모든 것입니다. 의식은 항상 순수하게 빛납니다. 꿈을 꾸는 동안에 그 꿈 속에 깨어 있음의 특성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깨어 있음도 또한 오직 꿈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모든 마음의 활동이 사라질 때, 그대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사냥꾼은 물었습니다.

신이시여! 과거의 까르마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러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창조주 브람마처럼 창조를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에 생겨난 존재들은 탄생도 까르마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이원성의 관념도, 삼사라도, 다른 여러 개념들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의식은 순수합니다. 창조가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에 어떤 누구에게도 까르마가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오로지 무한하고 절대적인 브람만만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가 시작될 때, 그 창조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은 브람만이었습니다. 창조가 처음 시작될 때, 창조주 브람마와 다른 것들이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지바들도 그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을 브람만 이외의 다른 존재로 생각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고, 이원성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들의 경우에는 탄생과 까르마가 저절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이들 존재들은 비실재성에 의지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브람만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브람마, 비슈누, 쉬바 등)의 경우에는 까르마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무한한 의식은 절대적으로 순수합니다. 브람만은 그 자신에게 의지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단지 지바의 작은 개념 하나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지바의 개념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무지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것 자체가 동일한 의식에 의해 창조로서 간주됩니다. 의식은 그 자체의 참된 본성을 알아차리게 되며, 그것이 현재도 브람만이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항상 브람만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물 그 자체가 소용돌이의 현상을 띱니다. 마찬가지로, 브람만 그 자체도 이 우주의 현상을 띱니다. 이 우주는 나타난 브람만입니다. 그것은 꿈도 아니요, 각성 상태의 실재도 아닙니다. 그 경우에, 무엇이 까르마이고, 그 까르마는 누구의 것이며, 그 까르마는 얼마나 많은 종류로 되어 있습니까? 진실로, 까르마도, 무지도, 우주도 없습니다. 이 모든 관념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경험 때문에 일어납니다.

오로지 브람만만이 우주로서, 개인적 자아로서, 까르마로서, 탄생과 기타 그러한 관념들로서 빛납니다. 그것이 신이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이들 개념들이 진실인 것처럼 그 개념들을 경험합니다. 창조가 시작될 때, 지바는 어떤 까르마의 지배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그것은 그것이 지니는 관념들 때문에 까르마에 연루되게 되었습니다. 소용돌이의 몸이나 개별성은 무엇이며, 그 까르마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인 브람만도 꼭 그와 같습니다.

꿈 속에서 본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까르마가 전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조가 시작될 때 생겨난 지바에게도 까르마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지바가 순수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까르마의 관념이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이 현상계를 실재로서 보는 관념에 확고히 뿌리를 내릴 때입니다. 그러면 지바들은 그들의 까르마에 속박된 채로 이곳을 떠돌아다닙니다. 이 우주 자체가 전혀 우주 아님을 깨닫고, 브람만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까르마가 어디에 있으며, 까르마가 누구의 것이며, 또 누가 그 까르마에 속하겠습니까? 까르마는 오직 무지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올바른 지식이 일어나자마자, 까르마는 구속력을 잃게 됩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빤디따(참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는 모든 다르마, 까르마와 지식의 연꽃을 피우는 태양과 같습니다. 참나 지식을 가진 현자의 지혜에 비교하면, 신들의 왕이라는 신분조차도 쓸모없는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참나 지식이 일어날 때, 실존계의 환영 같은 관념들은 사라지고, 브람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꼭 같이, 뱀으로 오인받았던 화환이 진짜 화환으로서 빛을 냅니다.

꿈 속에서 보인 사람들에게는 부모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꿈같은 세상도 원인이 없습니다. 꿈 속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현재의 탄생을 일으킬 어떤 과거의 까르마도 없었습니다. 이 꿈같은 세상에서 실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과거의 까르마가 없습니다. 지바가 여기서 꿈을 자각하고 경험하는 것과 꼭 같이, 그것은 그 자체의 정신적 조건화(바사나)에 따라서 전생과 까르마를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상상하고 경험합니다.

창조가 시작될 때와 몸의 존재가 끝날 때에, 지바는 꿈과 같은 상태를 경험합니다. 그것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실제적이고 비실재적인 것처럼 보이고, 또한 그것은 실재적이며 동시에 비실재적입니다. 꿈 속에서 비록 그러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대상들과의 접촉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다른 대상들을 자각하는 것도 비록 그 대상들이 비실재적이지만 가능합니다. '깨어 있음'과 '꿈'은 자각을 가져다주는 의식의 움직임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두 개의 단어입니다. 창조가 시작될 때(사르가디)와 몸의 생명 주기가 끝날 때(데한따)에 일어나는 자각이나 경험은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즉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주라고 합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나 꿈 속에서 보이는 대상들에 대한 의식과 자각 사이에는 마치 바람과 움직임 사이에 어떤 구별도 없는 것처럼 어떤 구별도 없습니다. 오직 브람만만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거나 죽는 것처럼 보이고, 또한 대상들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고, 영원히 평화로운 상태에서 순수한 것은 오직 순수 의식뿐입니다. 그 무한한 의식이나 우주적 인격체가 그 자체 내에서 자각하게 되는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 둘 다가 됩니다. 이 우주는 마치 꿈이 그대의 가슴속에 있는 것과 꼭 같이 그 무한한 의식의 가슴속에서 원인과 결과 모두로 존재합니다.

그것이 처음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든지 간에,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 자연의 질서, 시간, 공간 등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우주가 그때 어떤 특성을 얻었든지 간에 그 특성은 그때 이후로 계속 존재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의식 속에서 하나의 관념이나 느낌 혹은 개념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 우주라고 하는 것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의식의 놀라운 작용에 불과합니다. 무한한 공간은 푸른색을 띤 것처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무한한 의식은 이 우주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사냥꾼은 물었습니다.

이 몸을 떠난 뒤에, 쾌락과 고통을 경험할 목적으로 어떻게 다른 몸을 얻습니까? 원인이 되는 요인은 무엇이며, 그것을 협조해 주는 원인들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현자는 대답했습니다.

다르마(미덕), 아다르마(죄), 바사나(잠재적 경향성이나 정신적 조건화), 활동적인 자아 그리고 지바 등과 같은 이 모든 것은 거기에 해당하는 어떤 실재가 없는 관념에 불과한 동의어들입니다. 의식은 의식의 공간(혹은 차원)에서 이러한 관념들을 가집니다. 참나는 몸의 관념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참나는 몸과는 완전히 독립된 순수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관념은 비실재적이지만, 마치 꿈의 대상처럼, 실재하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죽은 사람에게 '저승'은 그 자신의 의식 속에서 하나의 관념으로 빛납니다. 그가 얼마 동안 이것을 보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다른 누군가가 옛날 죽었던 사람을 낳았다고 주장한다면, 그 죽은 사람은 어떻게 현생에서 그 과거를 기억합니까? 죽은 자는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의식 안에 있는 그 자신의 정신적 조건화 때문에 '나는 이런 식으로 여기에 존재한다.'와 같은 관념을 경험합니다. 이 경험이 얼마 동안 지속되고 뿌리를 깊이 내릴 때, 그것은 실재의 특성을 띠게 됩니다. 순수한 공간(공)에 지나지 않는 참나는 그 공간(공) 자체 속에서 하나의 꿈을 봅니다. 그것은 그 꿈을 거듭 기억하고, 그럼으로써 환생과 또 다른 세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 세상과 그 탄생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게 되며, 그 세상 속에서 그 지바로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수백만 개의 세상들이 있습니다. 그 세상의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면, 그것들은 단지 순수 의식 즉 브람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창조된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결코 창조된 적이 없습니다. 개개의 지바는 그 세상들 가운데 각각의 세상을 마치 '이것이 세상인' 것처럼 경험합니다. 이러한 환영에 실재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호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들은 창조되지 않은 실재로서 알려지게 됩니다. 현자에게 실재하는 것은 무지한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환영입니다. 반대로, 현자에게 실재하지 않는 것은 무지한 사람에게는 가장 명백한 진리입니다.

무한한 의식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그때 그 자리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험들은 그 특별한 경험자와 관련하여 실재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 모든 것(경험자와 경험들)이 순수 의식이므로 '다른 것'이나 혹은 이원성으로 불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이것은 이것이다.'라는 관념이 일어날 때, 그것은 '이것은 이것이다.'로서 빛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것이 이것이다.'라고 보일 때, 물론 그것은 비실재적인 것이 됩니다. 만약 그것이 의식의 경험이라면, 그것은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반면에 존재하지도 않는 무지의 상태에서만 그 경험은 독림적으로 경험이 됩니다. 따라서 참나 지식 속에는 알아야 할 대상이 전혀 없습니다. 그 지식이 알려진 것이 될 때, 참나는 그 자체를 압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의 깊게 보고 조사하더라도, 우리는 실재 이외의 어떤 것도 보지 못합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보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현자의 시각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이 순수하고 분할할 수 없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의 눈에는 바로 그것이 무수한 별개의 분리된 대상들(지각력이 있고, 지각력이 없는)처럼 보입니다. 단 하나의 순수한 의식이 꿈 속에서는 다양한 꿈의 대상들로서 나타납니다. 꿈 속에서 나타나는 수백만 개의 이 모든 대상이 다시 깊은 수면 속에서는 하나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꿈의 세상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 나타날 때, 바로 그것이 우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깊은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들어갈 때, 그것을 우주의 소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순수한 상식입니다.

하나의 분할할 수 없는 의식은 다양한 대상들이 되고 동시에 무한한 개체들이 됩니다. 의식 그 자체는 마치 꿈 속에서처럼, 공(空)이 되고 동시에 물질이 됩니다. 이 모든 다양성은 단지 경험입니다. 그것은 순수합니다. 그것은 그것을 생각하는 방식대로 빛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없앨 수 없습니다. 이 의식만이 창조가 시작될 때 이 꿈의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불 등이 됩니다. 지구 등으로서 빛을 내는 것은 오로지 순수한 경험뿐이빈다. 비록 실제로는 그 지구가 창조된 세상으로서 빛나는 공간이나 공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자각이나 경험은 이따금 이겨내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없애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경험은 다른 모든 것이 없어진 후에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대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가 동쪽을 알기도 하고, 서쪽을 알기도 하지만, 안다는 경험은 항상 동일한 상태로 있습니다. 그대가 상당히 오랫동안 무엇을 열심히 생각하면, 그대는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즉 그대가 평화에 안주해 보면, 그대는 그 평화를 경험합니다. 그대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 그대는 동쪽과 서쪽을 압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 않고 한 곳에 남아 있어도 그는 여전히 동쪽과 서쪽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무한한 의식은 그것이 경험되는 혹은 생각되든지 간에 전혀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동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두 개의 경험이 일어나고, 또 두 개의 경험이 사라집니다. '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겠어.'라는 소망이 일어나면, 이들 두 개(남과 북)는 움직이지 않는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이 일어나지 않으면, '남'과 '북'이라는 방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늘의 도시가 될까?" 아니면 "내가 지상의 동물이 될까?"라고 의식이 생각하면, 이들 두 개는 생겨납니다. 반면에 그러한 관념이 거기에 없으면, 그들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다른 어떤 것으로 보입니다.

몸이 필멸이든 불멸이든 간에, 진실은 이 삼사라와 지바가 꿈과 같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외국인들 사이에도 그들의 과거의 여러 생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회상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오로지 이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무한한 의식은 죽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영원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의식은 그대로 남아서, 이곳저곳에서 어떤 관념들이 그 의식 속에서 일어나든, 그 일어나는 관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입니까? 그래서 사람에게 몸들이나 활동들, 슬픔이나 기쁨이 일어날 때 그것들이 일어나는 대로 그것들을 경험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지게 내버려두십시오. 이 모든 것에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식이 되든, '저런' 식이 되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존재하든지 존재하지 않든지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이러한 망상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은 상태로 계십시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은 꿈의 경험과 같습니다. 진실이 이렇다면, 속박이란 무엇이며, 해방을 얻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늘의 구름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양들과 패턴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상계도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불변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무지 때문입니다. 이 무한한 공간 속에는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세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무수한 세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세상은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물과 호수와 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개구리들의 판단 기준과 경험은 각기 서로 다릅니다. 그들은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한 집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도 각기 다른 꿈을 구며, 그 꿈 속에서 각기 다른 세상의 삶을 경험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같은 공간에 있어도, 일부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각기 다른 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무한한 의식의 신비스럽고 능률적인 작용에 불과합니다.

의식은 어떤 것에 매달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매달린 하나의 관념을 삼스까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관념이 의식 속에서 단지 비추어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의식과 관계없는 어떤 삼스까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꿈 속에서는 이전의 기억은 전혀 없고, 오직 당분간 경험된 대상들에 대한 경험만이 있습니다. 꿈 속에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대상들을 보듯이 경험할 수도 있는데, 이때 나타나는 대상들은 이전에 보았던 대상들과 같습니다.

이 우주는 처음에는 분할할 수 없는 의식이라는 거울에 비친 영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브람만(무한한 의식)만이 이 세상으로서 빛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원인이 결과입니다. 결과가 있기 전에 원인이 있었으며, 그 원인은 결과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원인이 결과를 야기시킬 때 '능률적으로 작용하기'(샴야끄 까로띠) 때문에, 원인 그 자체가 삼스까라로서 알려집니다.

꿈이 일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것이지만 전에 보여졌던 것으로서 빛나는 그것이 삼스까라입니다. 삼스까라('과거의 경험과 활동들에 대한 잠재적 인상들'이라고 통속적으로 번역됨)라고 알려진 다른 외부적 요인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거나 보지 않았던 것은 그 자체의 빛으로 빛을 내며, 그러한 모든 것을 이미 보았던 것처럼 경험하는 그런 의식 속에서 존재합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창조된 삼스까라들이 꿈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상태 그 자체 속에서 그 삼스까라들은 새로이 창조됩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 삼스까라들이 깨어 있는 상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닌 상태에서 창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움직임이 공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듯이, 관념들도 의식 속에서 꼭 그와 같이 일어납니다. 삼스까라가 그것들을 창조할 필요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 가지 사물들에 대한 경험이 의식 속에서 일어날 때, 그것이 우주입니다. 그리고 천 가지 사물들에 대한 경험이 의식 속에서 사라질 때, 그것이 우주의 소멸입니다. 따라서 마치 그대가 그대의 꿈 속에서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듯이, 순수한 의식(찌다까샤)은 그 분할할 수 없는 성질을 조금도 버리지 않고, 그 모든 이름과 형상을 가진 이 다양성을 생겨나게 합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지각이나 경험은 무한한 의식의 극미한 미립자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마치 거울에 비친 반사물이 오직 거울에 불과하듯이, 그것도 무한한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무한한 의식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한한 의식 그 자체가 우주적 인격체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빛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이 우주는 존재하며, 마치 몸이 그 수족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처럼, 이 우주 또한 그 무한한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대와 나도 의식이고, 온 세상도 의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게 되면, 이 우주는 의식의 중요한 일부로 보이게 되며, 그러므로 우주는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도 의식의 그 미세한 미립자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나는 무한하며 어디에서든지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나는 바로 거게에서부터 모든 것을 봅니다. 나는 미세한 의식이지만, 마치 물이 물과 꼭 같은 것처럼, 나도 이 진리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 무한한 의식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자스'에 들어감으로써 삼계를 경험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일어났고, 또 바깥이 아닌 그 안에서 나는 삼계를 보았습니다. 그것을 꿈이나 혹은 각성으로 부르든, 안이나 혹은 밖이라고 부르든 간에, 이 모든 것은 무한한 의식 안에 있습니다.

사냔꾼이 물었습니다.

이 우주에 원인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이 생겨났습니까? 만약 하나의 원인이 있다면, 이 꿈같은 우주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현자는 대답했습니다.

처음에 이 우주에는 전혀 원인이 없었습니다. 이 우주의 대상들에게 전혀 원인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상반되는 대상들이 충돌하는 다양성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의 절대적인 브람만만이 이 모든 것으로서 빛나고, 그것은 '우주'와 같은 말들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원인이 없는 우주가 브람만이지만, 그것은 어떤 부분도 없는 것의 부분인 것처럼 보이고, 분할할 수 없는 것 속에서 다양한 것처럼 보이며, 형태가 없는 것 속에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순수 의식이기 때문에, 그것은 움직일 수 있고, 또 움직일 수 없는 대상들처럼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신들과 현자들처럼, 모든 지시들과 금지들을 통하여 하나의 세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시킵니다. 존재와 비존재, 거친 것과 미묘한 것 등은 편재하는 의식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결과들은 원인이 없다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질서와 그 주인(브람만)은 비록 두 개의 팔이 같은 사람의 것이지만, 한 팔이 다른 팔을 억제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이 창조는 욕망이나 심리적 인과 관계가 없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의 질서(니야띠)는 브람만 안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브람만은 니야띠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우주에는 하나의 원인이 있지만, 그것은 오직 그것을 창조한 사람과 관련해서이며, 또한 그 창조된 우주가 그와 관련해서 지속된다는 조건이 있을 때만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브람만이 어떤 원인도 없이 이 우주로서 빛나거나 혹은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과의 혼란이나 인과 관계가 어길 수 없을 정도로 실재한다는 현혹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역시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이 우주는 마치 까마귀가 야자나무에 내려앉는 순간 우연히 익은 야자열매가 떨어지는 것처럼, 우연의 일치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니야띠가 '이것은 이것이다.', '저것은 저것이다.'라고 결정합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지바는 외부의 세상을 외적 감각들로, 그리고 내면의 꿈의 세상을 내적 감각들로 알고 경험합니다. 감각들이 외부 세상의 경험에 관여할 때, 내적 관념의 장은 모호하고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감각들이 내부로 향할 때, 지바는 최대한 명료하게 그 자신 내부에 있는 세상을 경험합니다. 이 현상계에서는 언제나 모순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시선이 외부로 향할 때, 지바는 무한한 의식 속에서 마치 그 세상이 밖에 있는 것처럼 그 세상을 경헙합니다. 청각(귀), 촉각(피부), 시각(눈), 후각(코), 미각(혀)과 욕망의 집합체가 지바라고 하는 것이며, 그 지바는 생명력을 부여받은 순수 의식의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바는 어디에서나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으로 존재하며, 그러므로 어디에서나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지바('오자스' 즉 생명의 정수)가 '점액'(슬레슈마 혹은 까빠, 신체의 생명의 정수를 구성하고 있는 체액들)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는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점액의 효과를 봅니다. 그는 우유의 바다로부터 떠오르는 자기 자신을 '봅니다.' 그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봅니다. 그는 호수들과 연꽃들, 정원들과 꽃들, 여자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축제들과 환희, 많은 음식과 술이 있는 연회들,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들, 흰 색의 거대한 궁전들, 갓 내린 눈으로 뒤덮인 들판들, 사슴이 쉬고 있는 공원들 그리고 산맥들을 봅니다.

지바가 '담즙'(삐따, 또 하나의 체액)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는 그 담즙의 효과를 그때 그 자리에서 경험합니다. 그는 아름다운 불꽃들과 신경 과민의 땀을 흘리게 하는 불꽃들, 하늘을 어둡게 하는 검은 연기를 내는 불꽃들, 광채가 눈부시며 열기가 뜨거운 태양들, 바다와 그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지나갈 수 없는 숲들, 백조들이 수영하는 신기루들을 '봅니다.' 그는 자신이 두려움 속에서 길을 따라 달려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뜨거운 먼지로 덮인 채, 그는 불에 타서 뜨겁게 말라 버린 땅을 봅니다. 어디를 보든지 간에, 두 눈은 모든 것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심지어 구름들도 불의 비를 뿌리고, 이처럼 사방에 불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나 보입니다.

지바가 '바람'(바따, 또 하나의 체액)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경험합니다. 그는 이 세상이 마치 새로운 것처럼 봅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심지어 바위들과 산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봅니다. 모든 것이 자전과 공전을 합니다. 천사들과 천인들이 날아다니며, 지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나 무서운 재앙에 빠졌거나, 아니면 어마어마하게 높은 나무 꼭대기나 산 정상에 위험스럽게 서 있는 것을 봅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지바가 바따(바람)와 삐따(담즙)와 슬레슈마(점액)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는 바람의 영향을 받고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는 빗발치듯 쏟아지는 산들과 바위들을 봅니다. 그는 땅 속에서 나무가 돌아가며 내는 무서운 소리들을 듣습니다. 모든 숲이 그 숲 속의 모든 동물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모든 나무들이 불에 타고 있으며, 모든 동굴 속에서부터 불타는 소리가 나옵니다. 그는 산들이 충돌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여러 바다들이 일어나 하늘을 채우고, 모든 숲과 심지어 구름들마저 쓸어가며, 그들을 창조주 브람마의 세상까지 치솟게 하는 것을 봅니다. 하늘 전체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마찰 때문에 맑고 깨끗한 것처럼 보입니다. 삼계는 전쟁터에서 군인들과 전사들이 내는 함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이 이 모든 무서운 광경을 보고 지바가 동요되고 고통에 빠질 때, 그는 무의식 상태가 됩니다. 땅 속에 묻혀 있는 지렁이처럼, 바위 속에 숨겨져 있는 개구리처럼, 자궁 속의 태아처럼, 열매 속의 씨앗처럼, 씨앗 속의 태어나지 않은 싹처럼, 분자 속의 원자처럼, 바위 속의 조각하지 않은 상처럼, 그는 쁘라나의 움직임에 방해받지 않은 채, 그 자신 속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안식처에서는 어떠한 '구멍'이나 출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깊은 수면 상태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마치 바위 속이나 보이지 않는 우물 속에서 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정신적 노력이 그 안식처에 하나의 큰 구멍을 내면, 그는 꿈들의 세상을 압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명력 즉 쁘라나의 움직임으로 그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명력이 하나의 나디(신경 통로)에서부터 또 다른 나디로 흘러갈 때, 빗발치듯 쏟아지는 산들의 비전이 나타납니다. 바따, 삐따, 슬레슈마로 인한 이러한 움직임이 너무 많이 있다면, 그러한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그러한 움직임이 적다면, 그 경험도 적습니다.

지바가 바따, 삐따, 슬레슈마 때문에 꿈 속에서와 같이 내부에서 무엇을 경험하든지, 그는 그것을 외부에서 경험하고, 그 분야에서 그 자신의 활동 기관들은 적절하게 작용합니다. 그가 내부와 외부에서 동요되거나 어지럽혀질 때, 만약 바따, 삐따, 까빠(슬레슈마)의 동요가 약간이라면 그 지바는 약간의 동요를 경험하고, 만약 그들이 균형이나 평형 상태에 있다면 그 지바는 평온을 경험합니다. 이 세 가지 체액들이 동요되거나 어지럽혀지면, 지바는 외부에서 이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즉, 그는 뜨거운 불, 익사, 공중 이동, 바위와 산에서의 휴식, 지옥, 하늘로 올라갔다가 떨어짐, 운동장에서 익사하는 것과 같은 환각, 한밤중의 햇빛, 자기 자신의 것이 낯선 사람들로 보이고 적들이 친구처럼 보이는 지성의 왜곡 등을 경험합니다. 눈을 감으면 이 모든 것이 자기의 내부에서 보이고, 눈을 뜨면 이들이 왜부에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망상은 세 가지 체액들의 평형이 깨어졌을 때 야기됩니다. 그들이 평형 상태에 있을 때 그들 속에 안주해 있는 지바는 정말로 존재하는 그대로, 브람만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이 세상 전체를 있는 그대로 봅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오자스' 내부에 있을 때, 우주 소멸의 징후들이 일어났습니다. 산들이 하늘에서 비 내리듯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의 '오자스' 내부에 앉아 있는 동안 그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처럼 깜깜한 하늘에서부터 산들이 쏟아져 내리는 이 환영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의 신체의 통로를 따라 나아가고 있던 음식의 입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둠은 그 자신의 깊은 수면의 어둠이었습니다. 나는 또한 깊은 수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에, 나는 깨어나는 의식의 여명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수면에서 깨어나고 있을 때, 나는 꿈의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같은 '오자스' 내부에서 나는 나처럼 보였던 거대한 바다를 보았습니다. 경험의 장이었던 그 '오자스'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든지 간에, 나는 어떠한 왜곡이나 곡해 없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식은 전혀 움직임이 없이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식은 사방에 퍼져 있고, 그 안에서 이 현상계가 일어납니다. 이 현상계는 마치 아기가 어머니에서 태어나듯이 깊은 수면 상태에서 나옵니다.

사냥꾼은 물었습니다.

당신은 현상계가 깊은 수면 상태에서 나온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깊은 수면 속에서는 어떤 경험을 하는지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현자가 계속 말했습니다.

'태어난다', '나타난다', '세상으로서 나타난다' 등과 같은 기타 이원적인 표현들은 전혀 의미가 없는 단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태어난다'(자따)가 무슨 뜻인지를 말해 주겠습니다. 그 표현의 정수는 '존재하게 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존재'는 영원히 실존하는 실재를 암시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조'(사르가)라는 말도 똑같은 함축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은 '존재'를 가리킵니다. (주의: '자야테'와 '사르가'란 말의 구조가 산스크리뜨 문법에 따라 여기에서 검토되고 있다. '자니'는 '쁘라두르바바'와 같고, 그리고 쁘라두르바바의 핵심적인 부분은 '존재'를 가리키는 '부후'이다.)

깨달음을 얻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창조도, 죽음도, 사라짐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영원히 태어나지 않고 평화롭습니다. 브람만은 순수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도 순수한 존재입니다. 지시들과 금지 사항들이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마야라고 하는 환영의 힘만이 '그것이 존재한다.'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토론과 논의의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쟁은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브람만 즉 무한한 의식까지 확대됩니다.

진리 즉 지고의 상태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깨어 있음과 꿈과 수면의 상태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 자신의 상상 속에서 보는 세상은 물론, 꿈의 세상도 비록 그들이 당분간은 실재한다고 경험되고 있지만, 실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순수 의식이란 것을 깨달으면, 그것은 지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체나 관찰자도 없는 것이고, 경험이나 경험자도 없습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깊은 수면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이 세상은 마치 조각상이 돌에서 나오듯이, 꽃이 나무에서 나오듯이, 기억이 마음에서 나오듯이, 파도들이 바다에서 나오듯이, 마치 바다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나의 꿈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였고, 그것들이 땅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보였으며, 그것들이 가슴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였고, 그것들이 땅에서 솟아난 곡식인 것처럼 보였으며, 그것들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걷힌 것처럼 보였고, 또한 그것들이 사원에서 나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세상은 어디에서부터 생겨났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무한한 의식이라는 돌 속에 만들어진 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공간이나 공인 성벽들로 만들어진 가상이 도시입니다. 그것은 무지라고 하는 요술쟁이의 속임수입니다. 비록 그것이 확고한 실재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공간과 시간이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다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비이원적이고 다양하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그것은 공중 누각에 비유될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보이고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록 창조된 적이 없지만, 마치 창조되었던 것처럼 존재합니다. 그것은 순수 의식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물질, 활동, 창조와 파괴를 부여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신들과 악마들, 인간 존재들, 기타 다양한 형태의 피조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강들과 산들, 숲들과 하늘, 그리고 별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관찰의 장'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나는 나의 모든 친척들의 건물들과 함께 내가 전에 보았던 집을 거기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전에 있었던 그대로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잠재되어 있던 바사나 즉 심리적 경향성에 의해 관찰의 장 속으로 끌려온 것입니다. 바사나 때문에 나는 일시적으로 그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망각해 버린 채, 곧 나의 친척들을 반가이 맞아 포옹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거울이 그 거울 앞에 위치한 모든 사물을 반사시키듯이, 의식도 그 의식 앞에 제시되는 모든 것의 형태를 그대로 띱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수하고 무한한 의식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이원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어던 영향도 받지 않고 혼자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일원성에 대한 지식을 결코 망각하지 않는 사람은 차이나 분리에 대한 자각이라고 하는 이 악귀로부터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습니다. 성현들과 가까이 지내고 이 경전을 공부함으로써 이 지식을 얻은 사람들은 두 번 다시 그 지식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나 자신의 이해력은 명확하거나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도 관계의 관념들에 의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의 이해력을 흔들 수 없으며, 또한 나의 개달음을 흐리게 할 수 없습니다. 오, 사냥꾼이여! 그대의 마음도 지금은 확고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성현들과 함께 지내는 삿상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냥꾼은 말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사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당신의 깨우침에 대한 말들을 지금까지 경청했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사실일까?' 하는 약간의 의심이 있습니다. 아, 이것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이 무지가 너무도 명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냥꾼은 물었습니다.

오, 현자시여! 꿈 속의 대상들이 어떻게 실재적이며 또한 동시에 비실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하는 커다란 의문이 나에게 있습니다.

현자는 대답했습니다.

꿈 속에서는 시간과 공간, 활동과 물질성의 현상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로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관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현상은 꿈 속에서 실재로서 빛납니다. 보석들(마법의 지팡이?)이나 만뜨라 그리고 약물의 도움으로 일어난 환각의 경우에는, 때로는 그것들이 실재하지만 또 어떤 때는 완전히 환영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꿈 속에서 참된 실체를 경험할 때, 그것은 오로지 우연의 일치 때문입니다. 의식 속에서 확고한 하나의 관념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그런 방식으로 구체화됩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구체화시키는 그런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체화가 다른 힘에 의해 바뀔 수 있다면, 우리는 의식 속에서 일어난 관념이 확고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소망'이나 무한한 의식의 관념이 구체화되지 않고서는 내부나 외부 그 어디에서도 어떤 구체성이 없습니다. '이것은 꿈이다.'라는 관념이 일어날 때, 그 꿈은 실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의심의 관념이 있다면, 그 꿈은 또한 의심의 특징을 띠면서 실재하지 않게 됩니다. 아마도 꿈을 꾸는 것과 동시에 꿈을 꾸는 사람은 그 꿈과 무관한 경험들을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경험들을 그 꿈 자체의 탓으로 돌립니다. 따라서 순전히 우연의 일치로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계는 조만간 어떤 변화를 겪습니다.

이러한 창조의 관념은 태초에 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그것은 구체화됩니다. 이 구체화가 순수 의식입니다. 이것을 막을 때, 그 밖의 모든 것은 실재하기도 하고 또한 실재하지 않기도 하며, 질서정연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사람들의 눈에는 꿈이 때로는 사실인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 꿈들은 실재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비실재적인 것도 아닙니다. 현상계는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현상'이라는 말 자체는 거기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탐구도 배제합니다.

꿈을 꾼 뒤에 잠을 잡니다. 깨어 있는 상태 이후에도 잠을 잡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과 꿈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의식의 거친 '대상'이 진정한 의미가 전혀 없는 말들인 깨어 있음의 상태, 꿈의 상태 및 수면 상태로 간주됩니다. 이 기나긴 꿈 속에서는 질서도 무질서도 없습니다. 꿈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공기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처럼, 그것만이 존재합니다. 명확한 인과 관계가 없으면, 질서란 얼토당토않습니다. 명확한 인과 관계가 없는 우주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대상이 무엇으로 보이든지 간에, 그것은 보이는 그대로이며, 그리고 이것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꿈이란 때로는 실재적이지만, 때로는 비실재적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정된 원리나 질서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입니다. 마술이나 만뜨라나 마약 때문에 일어나는 비전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또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상태, 꿈의 상태 그리고 깊은 수면 상태의 조건화를 받지 않는 것, 즉 절대적인 순수한 의식만이 실재합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여전히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 있는 동안 나 자신의 친척들 등을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이 나 자신의 관념이 빚어낸 것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그들과 함께 16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위대한 고행자 한 분이 내 집에 왔습니다. 나는 헌신적으로 그를 잘 섬겼습니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선하고 악한 활동들에 따라 선하고 악한 결과들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모든 경우에 적용됩니까?"

고행자는 이 질문을 받고 놀란 듯이 보였습니다.

고행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대 마음속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는 누구이고, 그대는 어디에 있으며, 나는 누구이며, 이 세상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대의 꿈의 대상이고, 그대는 나의 꿈의 대상입니다. 대상은 진실로 형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식이 이것은 이러한 형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러한 형체를 띱니다. '이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관념은 인과적 관계를 낳습니다. 반면에, '어떤 원인도 없다.'라는 관념은 어떤 인과 관계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모두에 의해 대우주의 존재로 간주되고 있는 그런 대우주의 존재의 가슴속에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른 대우주의 존재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대우주의 존재가 쾌락과 고통을 경험하는 원인이며, 또한 다양한 형태의 활동들을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이 대우주의 존재의 '오자스'가 어지럽혀지면 그것은 동요되고, 그러면 그 영향은 그의 가슴속에 있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의 가슴이 평정을 회복하면 사라지는 그런 자연 재해의 영향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우주의 존재는 이 특수한 창조물의 실재입니다. 우연의 일치로 어떤 사람들이 사악한 활동들에 관여할 때, 그 결과로 생기는 불행이 모두에게 일어납니다.

행동들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 관념("내가 이것을 한다.")에서 일어나면, 의식은 그 사람에게 보상을 줍니다. 그러나 의식이 그러한 관념에서 해방되어 있을 때는 그러한 행동은 그 결과들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념이든 그것이 어디에서든지 그리고 어떤 크기로든지 일어나기만 하면, 거기에 해당하는 원인이 있든 없든 간에, 그 관념은 열매들을 맺습니다. 꿈 속에서처럼, 어떤 활동의 결과는 명확한 원인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따금 꿈의 경험에는 원인이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어떤 원인이 없기도 합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입니다. 깨어 있는 상태의 경험은 명확한 인과 관계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관념 자체도 하나의 꿈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무한한 의식의 단순한 왜양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와, 이 창조물과, 창조주 브람마의 창조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공기와 불, 물 혹은 공간의 본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왜 사람들은 죽어 미묘한 몸으로 들어갑니까? 이 모든 것에는 전혀 원인이 없습니다. 즉 이 모든 것은 태초부터 이처럼 일어났던 것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이러한 관념들이나 현상들은 물질성을 얻게 됩니다. 원래 의식 속에서 어떤 관념들이 일어났든지, 그 관념들은 지금까지 그러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은 현재의 새로운 노력으로 이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고행자의 가르침을 받고, 나는 즉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그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나의 요청으로 나와 함께 살았습니다. 바로 그 고행자가 지금 당신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사냥꾼은 깜짝 놀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꿈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형체를 부여받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놀랍고도 이상합니다. 어떻게 해서 당신의 꿈 속에서 나타났던 이 성현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조차 하나의 실체가 되었습니까?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그대에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성현의 가르침을 듣고 난 뒤에,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감각적 쾌락에 대한 나의 욕망과, 쾌락의 대상들에 대한 나의 욕망 때문에, 비록 내가 지금까지는 현명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나의 정도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니면, '이것이 나다.'라는 관념은 환영과 같고 비실재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천 가지의 기묘한 사건들을 일으킬 수 있다. 아니면, 비록 내가 이 모든 것이 비실재적이고, 또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내 마음속에서 분리의 씨앗을 볼 수 있다. 나는 즉시 그것을 버려야겠다. 이러한 환영이나 무지를 그냥 그대로 있다고 하자. 그것은 하나의 공허한 현상이다.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나는 이제 망상을 버렸다. 나에게 가르침을 주신 현자마저 환영에 불과하구나. 나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브람만이고, 그도 또한 그렇구나. 상대적인 형체는 단지 지나가는 구름에 불과하구나."

이러한 지식에 도달한 뒤에 나는 고행자에게 "오, 현자시여! 내가 지금 가려 하는 것은 내가 이미 탐구하기 시작했던 그 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몸을 보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미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몸들이 어디에 있지요? 그 몸은 이미 저 멀리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혼자 힘으로 이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가 보십시오." 나는 그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제발 여기에서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이후, 나는 공기 같은 이동 수단에 올라타고, 매우 오랫동안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있던 그 사람의 가슴에서 나가는 출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낙담했습니다. 나는 내가 그 집에 묶여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거기로 다시 돌아가서 고행자에게 "제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들어갔던 그 몸과 나의 몸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나는 출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고행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만약 그대가 내면의 눈으로 그것을 본자면, 분명히 그대는 모든 것을 알 것입니다. 그대는 이렇게 하찮은 개별성이 아닙니다. 그대는 대우주의 인격체 그 자체입니다. 일단 그대는 꿈을 경험하기 위하여 어떤 존재의 가슴속으로 들어가소 싶어 했습니다. 그대가 들어간 그것이 바로 이 우주입니다. 그대가 그 몸 속에서 계속 꿈을 꾸는 동안, 큰 화재가 일어났고, 그래서 그 불이 그대가 들어갔던 그 몸 안의 숲을 다 태워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불이 그대가 가슴속으로 들어갔던 그 사람의 몸뿐만 아니라 그대의 몸마저 파괴시키고 만 것입니다."

(사냔꾼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현자는 대답했습니다. "마치 현상계의 원인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난 생각의 움직임이고, 또한 창조주 브람마의 의식 속에서 일어난 생각의 움직임이듯이, 불의 원인은 단지 의식 속에서 일어난 생각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행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대 두 사람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 두 개의 몸이 큰 불로 다 타 버렸을 때, 그대는 단지 의식으로서 계속 진동했습니다. 몸은 '오자스'에 속하고, 두 개의 몸이 그 '오자스'와 함께 다 타 버렸기 때문에, 그대는 출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그대가 두 개의 몸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대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대의 꿈은 깨어 있는 상태의 실재로 물질화되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대 자신의 꿈이 만든 대상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대들도 우리의 꿈이 만든 대상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는 순수 의식(찌다까샤)입니다. 그대는 이전에 하나의 꿈의 대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이것이 깨어 있는 상태의 세상이라고 당연히 생각했기 때문에, 그대는 가족과 친척 등이 딸린 호주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그대에게 말했습니다.

현자는 말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꿈의 본질이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이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행자는 대답했습니다.

실재하는 것이 생겨날 수 있다면, 또한 다른 어떤 것도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실재 그 자체가 의심스러우면, 어떻게 우리가 후자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심지어 본래의 우주도 하나의 꿈과 같습니다. 그것은 한낱 환영과 같은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은 땅과 땅에 속한 나머지 모든 것이 없지만, 땅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 사냥꾼의 스승이시여! 본래 꿈과도 같은 이 세상의 창조와 또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그 꿈은 둘 다 비실재적입니다. 현재의 꿈은 그 소재로서 이미 보여졌던 대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꿈과도 같은 세상은 이전에도 보여졌던 것처럼 공간에 나타나 있습니다. 왜 그대는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듯이, "'나는 꿈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대가 이 세상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경험할 때, 그 참된 본질에 대한 의심은 어떻게 일어나겠는가?"라고 주저하며 말합니까?

현자는 (사냥꾼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고행자의 말을 가로막고, 그에게 "그대는 어떻게 그리고 왜 내가 사냥꾼의 스승이라고 언급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고행자는 대답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나는 그대에게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말해 주겠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금욕 생활을 한 고행자입니다. 그대는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 진리를 들을 때, 그대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대와 나는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몇 년 뒤에, 여기에는 큰 기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 그대의 모든 친척은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악한 왕들은 서로 전쟁을 일으키고 나머지 모두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슬픔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고, 또한 모든 것에 애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 이 나무 밑에서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적당한 때에 멋진 숲이 여기에 자라날 것입니다. 그 숲은 정말로 천국에서나 많이 볼 수 있는 그런 쾌락의 동산을 닮았을 것입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고행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상당히 오랫동안 거기 그 숲 속에서 금욕 생활을 할 것입니다. 어느 날, 그곳으로 한 사냥꾼이 사냥감을 찾아 올 것입니다. 그대는 담화를 하고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그에게 깨우침을 줄 것입니다. 그도 또한 이 세상과 관계를 끊고, 똑같은 숲 속에서 금욕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참나 지식을 찾는 과정에서 꿈에 관하여 그대에게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대는 참나 지식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대는 그의 구루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를 사냥꾼의 구루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대에게 나 자신과 그대, 그리고 장차 그대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듣고 대경실색했습니다. 고행자는 같은 집에서 계속 머물렀고,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열심히 그를 숭배하며 섬겼습니다. 나는 다양한 경험들을 하면서 꼼짝하지 않고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또한 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마음의 동요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입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 세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와 같은 객관적인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히 하나의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창공, 땅, 공기, 공간, 산, 강 그리고 방향은 모두가 한낱 분할할 수 없는 공간과 같은 동일한 의식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그 의식 속에서 관념들로서 존재합니다. 본질적으로, 그 속에서는 어떤 분리나 모순도 없습니다. 이것들은 산도 아니고, 땅도 아니며, 공간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순수한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불과합니다.

원인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는데, 이 몸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망상이라고 한다면, 또 그 망상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망상을 보는 자는 누구이며, 그것을 생각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내가 경험자로서 가슴속에서 살았던 그 사람과 나는 이미 다 같이 잿더미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활동과 행위자와 도구가 없는 순수 의식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심지어 무한한 의식의 현상조차도 아닌 순수 의식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이 현상을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와 같이 나는 어떠한 마음의 동요도 없이, 도움이나 의존도 없이, 그리고 자만도 없이 이 객관적인 세상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나는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적절한 시기에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일은 일어납니다. 하늘과 땅과 바람 등은 하나의 참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원소들은 의식의 몸입니다. 나는 평화로우며, 경전들의 지시와 금지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심지어 안과 밖의 구분도 없습니다. 내가 이처럼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는 우연히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따라서 나는 지금까지 꿈과 우리와 이 우주에 대하여 그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평화에 안주하십시오. 니르바나는 저절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냥꾼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실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겠습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이 모든 존재들은 서로에게는 실재합니다. 그들이 서로를 자각하는 정도까지는 그들은 서로를 경험합니다. 그대는 이 모든 말을 들었지만, 진리에 안주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서만 이 진리는 충분히 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불의 신은 말했습니다.

그 현자의 가르침을 듣고 난 뒤, 사냥꾼은 바로 거기 그 숲 속에서 초상화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가르침을 꾸준히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가슴은 지고의 상태에 충분히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파도 마루 위에 있는 것처럼 혹은 회전하는 기계 장치 위에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악어의 공격을 받아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것처럼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의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이것이 니르바나인가?" 혹은 '아마 이것이 니르바나가 아닐지도 몰라. 다른 어떤 것이 니르바나일거야."라고 스스로 질문하거나 의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도 생각했습니다. "이 현상계가 무지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현자의 가르침은 나의 가슴속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어. 그러므로 나는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해. 금욕 생활을 통해 미묘한 몸을 얻은 뒤에, 나는 심지어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멀고 먼 곳까지 가야 해." 그렇게 그는 아직도 자신이 완전히 무지하며, 현자의 가르침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이 아직 흡수되지 않았고, 또한 그것이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냥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현자를 따라 강도 높은 고행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행자에게 어울리는 삶의 양식을 받아들인 뒤에, 수천 년 동안 금욕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시 현자에게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참나에 안주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준 지혜는 마치 고목의 둥치에 잠재해 있던 약한 불씨처럼 그대의 가슴속에서 약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지를 태워 없앨 수 없었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가르침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았고, 또 그 가르침이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에게 확고히 안주해 있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대가 그 가르침을 그대의 것으로 만들어 그것이 활성화될 때, 그대가 신에게 안주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그대에게 미래의 사건들을 기술할 터이니,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그대가 참나 지식을 얻는 일에 착수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아직도 건전한 지혜의 발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시계의 진자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대는 이 현상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고, 꾀하고 있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 현상계의 크기를 알고 싶어 합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대는 고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세상의 여러 주기에 걸쳐서 그러한 고행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이 그대의 고행에 만족하여 그대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신이시여! 저는 이 모든 우주가 무지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 안에서 저는 참나의 순수하고 투명한 지식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현상계의 끝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이 너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저는 다음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신에게 간청합니다."

"제가 오직 죽고 싶을 때만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제 몸이 모든 병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십시오. 제가 가루다처럼 빠른 속도를 갖게 해 주십시오. 아무런 장애 없이 공 간을 가로질러 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제 몸이 한 시간에 일 마일씩 자라나 곧 이 세상보다 더 크게 자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이 우주의 크기를 이해할 것입니다."

신은 부탁을 들어주고 나서 시야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신이 떠나간 뒤에, 그대는 고행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대의 몸은 이때쯤은 해골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몸은 그 은혜 때문에 이제 광채를 얻을 것입니다. 그대는 나에게 고개 숙여 절할 것이고, 곧 그대의 몸은 신성해질 것입니다. 그 몸은 가루다보다도 더 빨리 '날아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그 몸은 그 안에 있는 천체들을 확대시키고, 또 포함시킬 것입니다. 그 팽창하는 몸 속에서 그대는 바다의 파도들만큼이나 많은 무수한 우주들을 볼 것입니다. 태초에 이 모든 우주들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났듯이, 그때에도 꼭 그와 같이 이 우주들은 그대의 시력 범위 내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이 모든 것이 무지한 사람의 눈에는 비실재적이고 다양한 것과 꼭 같이, 그들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에게 실재하며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번갈아 가며 일어났다가 사라져 가는 이 무수한 우주들을 보면서, 그대는 기나긴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대는 이 무한한 지성에 대한 찬탄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몸을 알게 되고, 그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거대하고 무거운 이 불행한 몸은 무엇인가? 그 몸은 비할 데 없는 크기로 자라나 버렸구나. 왜냐하면 그 몸으로 나는 전 우주를 채웠기 때문이다. 이 다음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말 모르겠다. 나에게는 이 무지와 현상계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브람만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없이는 그 크기를 전혀 측정할 수 없구나. 나는 이 몸을 버려야겠다. 왜냐하면 그 몸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이 몸은 거대하여 의지할 곳이 없다. 그리고 내가 그 몸의 도움을 받고서는 깨달음을 얻은 현자들과 함께 있을 수도 없다.'

이렇게 결심을 한 뒤에 그대는 그대의 몸을 버릴 것입니다. 오직 생명력(쁘라나)만을 부여받은 그대의 지바는 공기보다 훨씬 더 미묘해질 것입니다. 지바에 의해 버려진 몸은 크기가 축소되어 그 순전한 크기와 무게로 지구 등에 떨어져 박살날 것입니다. '건조'라고 알려진 여신이 그 몸을 다 먹어 치울 것이고, 따라서 지구는 정화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그대에게 어떤 미래가 그대에게 계속될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사냥꾼은 물었습니다.

신이시여! 진정한 이익이 조금도 없는데도 내가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슬픔은 어마어마합니다. 이 운명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은 어느 때고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서 바뀔 수도 없습니다. 오른팔은 오른팔이며, 왼팔은 왼팔입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습니다. 머리와 발을 서로 바꿔 놓을 수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합니다. 심지어 점성학도 단지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예언해 줄 수 있을 뿐이며, 필연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일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나 지식을 갖춘 현자들은 마치 깊은 수면에 든 것처럼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비록 몸이 타서 없어진다 해도, 내면의 의식을 조금도 왜곡시키지 않고, 과거 활동들의 결과를 경험합니다. 그들은 모든 업(까르마)을 극복합니다.

사냥꾼은 물었습니다.

신이시여! 그 후에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날지 말씀해 주십시오.

현자는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그대가 꿈 속에서 이 세상을 보듯이, 그대의 지바는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은 그 자신을 왕으로서 간주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널리 존경받는 신두라는 이름의 왕이다. 나의 아버지가 숲 속으로 은거했기 때문에, 나는 불과 여덟 살의 나이에 왕이 되었다. 나의 왕국의 국경 너머에는 정복하기 어려운 비두라타라는 막강한 왕이 또 하나의 왕국을 통치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모든 왕실의 쾌락을 즐기면서 백 년이 넘도록 이 왕국을 다스려 왔다. 아! 그런데 나의 왕국이 비두라타 왕의 침공을 받고 말았구나.'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대와 비두라타 왕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대는 비두라타를 죽일 것입니다. 그 다음 그대는 온 세상의 왕이 될 것입니다. 대신들에 둘러싸여 그대는 다음 대화를 하게 될 것입니다.

대신이 그대에게 말할 것입니다.

오, 폐하! 왕께서 비두라타 왕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부유하고 강력하다. 그런데 왜 그대는 내가 비두라타 왕을 정복한 것을 놀라운 일로 여기는가?

대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에게는 릴라라는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는 고행과 헌신을 통하여 사라스와띠 여신의 비위를 맞추었고, 그 여신은 릴라를 그녀의 양녀로 삼아 그녀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폐하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비두라타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왜 비두라타가 여신의 도움을 받아서 나를 물리치려고 하지 않았을까?

대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실은 그는 삼사라에 대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도했고, 그 결과 그는 사실상 폐하로부터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대는 말할 것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나는 그 여신을 숭배하고, 해방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가?

대신은 말할 것입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서 빛나는 지혜입니다. 그녀가 모든 사람에게 있는 지성의 정수(라사)이기 때문에, 그녀는 사라스와띠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즉시 들어줍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사람의 참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기도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폐하께서는 아직까지 해방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폐하께서는 적의 멸망을 빌었을 뿐입니다.

그대는 말할 것입니다.

왜 내가 해방을 간절히 빌지 않았을까? 그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내 자신의 가슴속에서도 사는데, 왜 그녀는 내가 해방을 위해 기도하도록 나에게 영감을 불어넣지 않았을까?

대신은 말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폐하의 가슴속에는 적의 멸망을 바라는 불순한 습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해방을 빈 것이 아니라, 적의 파멸을 빈 것이었습니다. 찌따(마음, 가슴)가 무엇이든지 간에, 존재는 바로 그 찌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어린아이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의 가슴 속에서 무엇을 알고 있든지, 그리고 그의 가슴속에서 어떤 것을 거듭 경험하므로 그 결과 그것이 습성이 되든지 간에, 그것은 좋든 좋지 않든지 간에, 구체화됩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사악한 사고 습성에 젖어 들었다니 나는 과거 생에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대신은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폐하께 그 비밀을 털어놓겠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나'와 '너' 등으로서 존재하지만, 브람만이라고 알려져 있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 브람만이 그 자체의 자각 대상이 되었고, 그러므로 그것은 지바가 되었고, 그 다음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 미묘한 심리적이거나 혹은 에테르 같은 몸이 응축되어 물질적인 신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형상이 없지만 마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만이 이 세상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없습니다. 사뜨바(마음의 가장 순수한 형태)만이 원래 브람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극도로 농도가 짙고 활기가 없는 상태(따마사-따마사)가 되었습니다.

그대는 말할 것입니다.

이 따마사 따마사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지고의 상태에서 일어났는가?

대신은 말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살아 있는 존재들은 다양한 수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말하자면, 미묘한 참나 즉 의식은 그 수족으로서 미묘한 에테르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직접 그 자신이 흙과 같은 물질적인 원소들을 가진 거친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는 꿈 속에서처럼 똑같은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이 현상계에서 그 자체의 관념들의 도움을 받아 작용을 합니다. 폐하 자신계서도 에테르의 몸 속에서 '이것은 가장 농도가 짗은 어둠이다.'라는 관념을 가지게 되면, 그 결과 그 관념이 태어납니다. 이 모든 다양성들은 브람만 속에 존재합니다. 비록 그 브람만이 절대적으로 순수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브람만 안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관념이 지바가 될 때, 그것은 말하자면 붓디(지성)에 의해서 완벽한 순수성(사뜨비까-사뜨비까)으로 경험됩니다. 그것이 생명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서, 만약 그것이 모든 고귀한 특성들을 갖추게 되면, 그것은 단순히 사뜨바적인 탄생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고, 다양한 쾌락들에 노출되지만, 해방을 지향하는 탄생은 라자사 라자사라고 합니다. 그 탄생이 생명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고, 거기에 고귀한 특성들이 없으면, 그것은 단순한 라자사라고 합니다. 그 존재가 생명의 흐름 속에서 매우 오랫동안 있으면서, 그냥 방향을 해방 쪽으로 돌렸을 때, 그것은 따마사 따마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을 지향하는 일련의 여러 탄생들 중의 하나인 보통의 탄생은 단순한 따마사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의 탄생들에도 매우 많은 분류가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따마사 따마사 계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수많은 윤회를 하셨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저는 그 윤회들을 알고 있지만, 폐하께서는 모르고 계십니다. 이 모든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폐하께서는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렇게 조건화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해방시킨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대는 말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러한 과거 생의 결과를 극복할 수 있는가?

대신은 말할 것입니다.

아무런 동요 없이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제의 사악한 행동은 오늘의 고귀한 행위에 의해 좋은 행동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선하도록 애를 쓸 것이며, 지금 당장 선을 행하십시오. 사람은 자신이 얻고 싶은 바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면 그가 그것을 얻게 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대신의 충고를 들은 뒤에, 신두 왕은 즉시 왕국을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는 성현들 밑에서 위안을 찾을 것입니다. 성현들과 가까이 지냄으로써 그는 최고의 지혜를 얻고, 또한 해방을 얻을 것입니다.

불의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사냥꾼은 이 모든 이야기를 현자로부터 듣고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냥꾼과 현자는 계속 고행을 했습니다. 얼마 뒤에 현자는 니르바나를 얻었고, 그의 몸을 버렸습니다.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나서, 창조주 브람마가 그 사냥꾼 앞에 나타나서 그의 청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사냥꾼은 비록 현자의 예언을 기억했지만, 자기 자신의 정신적 조건화가 가하는 자연적인 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요청하도록 정해져 있었던 바로 그 청탁을 했습니다.

그 청탁의 결과, 사냥꾼의 몸은 우주의 크가만큼 팽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지의 한계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놀라움과 동시에 불안해졌습니다. 쁘라나를 포기하는 신비적인 과정을 통하여 그는 몸을 버렸고, 그러자 몸은 공간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직접 공간 속에서 남아, 자기 자신이 신두 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몸은 이 우주의 어떤 현상계 위에 나타났고, 그것은 털 뭉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구 전체를 덮을 만큼 커 보였습니다.

오, 비빠슈찌뜨 왕이시여! 이와 같이 나는 그대에게 지금까지 그 몸의 정체를 묘사했습니다. 그 몸이 떨어진 그 세상의 나타남은 우리에게 세상처럼 보입니다. 여신의 말라 버린 몸이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찬디까 여신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여신이 그 몸의 피를 다 먹고 난 뒤였습니다. 그 시체의 살은 땅의 원소가 되었습니다. 적당한 때에 이 세상은 지구와 같은 그 현재의 본질을 얻었습니다. 다시 한 번 지구는 살아 있는 존재들과 숲들, 마을들 그리고 도시들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지구는 다시 한 번 단단하고 견고해졌습니다. 오, 착한 사람이여, 그대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십시오. 나는 나의 도움으로 신성한 의식을 올리고 싶어 하는 신들의 왕인 인드라로부터 천국에 오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나는 거기로 가겠습니다.

바사(비빠슈찌뜨)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에 불의 신은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심리적인 조건화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해야만 했던 것을 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다시 한 번, 나는 무한한 우주 속에서 무수한 세상들과 우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 어떤 것들은 우산처럼 생겼고, 어떤 것들은 동물처럼 생겼으며, 어떤 것은 나무로 가득 차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들은 바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지의 끝에는 즉 무지의 한계점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풀이 죽어 실망했습니다. 그 후 곧 나는 고행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인드라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비빠슈찌뜨여! 우주 속에서 그대와 나는 사슴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에 내 마음속에 있었던 어떤 천국에 대한 망념 때문에 나는 천국을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나는 인드라에게 "오, 천국의 왕이시여! 나는 이 삼사라에 싫증이 났습니다. 제발 빨리 이 삼사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인드라는 비빠슈찌뜨에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의식은 사슴의 종(種)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슴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그 탄생을 봅니다. 사심으로서 그대는 그 큰 집회에 도착할 것이고, 거기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그대가 지혜의 불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인간의 형태를 얻게 될 것이고, 또한 그대의 가슴속에서 영적인 개안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무지를 버리고, 움직임이 없는 바람처럼 완전한 평화를 다시 얻을 것입니다.

비빠슈찌뜨(바사)는 계속 말했습니다.

인드라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사슴이다.'라는 자각이 나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사슴으로 여러 숲 속을 떠돌아다녔습니다. 한번은 사냥꾼이 나를 추적했을 때, 나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사로잡은 뒤 집으로 대려갔습니다. 그는 며칠 동안 나를 거기에 잡아 두고 있다가, 내가 당신의 애완동물이 되도록 나를 당신에게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오, 라마여! 이와 같이 나는 그대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이야기는 분명히 이 삼사라의 환영 같은 본질을 예시해 줍니다. 이러한 무지는 사방으로 무수한 가지가 나 있어 끝이 없습니다. 그 무지는 참나 지식 이외의 어떤 수단에 의해서도 끝날 수 없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당신의 형태가 당신의 상깔빠에서 일어났을 때,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볼 수 있었습니까?

비빠슈찌뜨(바사)는 계속 말했습니다.

한번은 인드라가 신성한 의식을 성공적으로 끝낸 것에 자만심을 가득 안고서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가다가, 명상에 잠겨 있는 현자 두르바사의 몸을 찼습니다. 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저주의 말을 던졌습니다. "오, 인드라여! 지금 그대가 가고 있는 그 땅은 곧 아무것도 없는 무로 변할 것입니다. 그대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나를 발길로 찼기 때문에 그대는 머지않아 바로 그 땅으로 가서, 비빠슈찌뜨가 사슴으로 거기에 사는 한, 그대도 사슴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사슴이 되었습니다. 물론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대상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대상만큼이나 비실재적인 것입니다. 또한 무한한 의식인 브람만이 이 모든 것이고, 또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 그 브람만 속에서 그리고 그 브람만에게 불가능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전능하다는 근거에서 볼 때, 두 개의 가상적인 대상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되거나 혹은 서로를 몰라보게 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림자가 있는 곳에는 빛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빛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한한 의식 속에서는 끝없는 무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합니다. 사람을 당혹케 하고 마음의 망상을 일으키는 이 마야는 이상하고도 경이롭습니다. 그래서 그 마야 속에서는 명제와 반대명제가 충돌이나 모순이 전혀 없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브람만에 관한 진리는 그러하므로 브람만은 그 자체 내에서 이러한 무지를 시작이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시작이 없는 것으로서 모두 경험합니다.

만약 삼계가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이 단지 물질화된 것이 아니라면, 우주가 주기적으로 소멸된 뒤에도 그 의식이 어떻게 삼계를 창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우주는 단지 무한한 의식의 움직임과 그 결과로서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비빠슈찌뜨(바사)는 계속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순숳산 지혜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모든 것이 즉시 이해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현상계는 '나는 무지하다.'라는 관념을 지니고 있는 무한한 의식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무지마저도 오로지 무한한 의식 때문에 일어납니다.

아무도 여기서 죽지 않으며, 또한 태어나지도 않습니다. 즉 이들 두 관념은 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마치 죽음과 탄생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그리고 진실로, 최종적인 종말로서 죽음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대단히 환영할 만한 행복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만약 죽은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가 항상 살아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어떤 죽음도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어떤 탄생도 없습니다. 그 두 개의 사건은 의식이 움직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비실재적입니다. 만약 그것들이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그것들은 실재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생각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식이 전혀 없는 어떤 생명이 존재하는 지를 알려 주십시오. 그 순수 의식 속에서는 어떤 슬픔이나 죽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슬픔을 경험하고, 누가 죽는 것입니까? 소용돌이와 물의 관계는 몸과 지고의 진리의 관계와 같습니다. 현상 속에는 실재가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은 그 자체의 실체가 없는 단지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구분이나 구별 혹은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의식은 모순들로 가득 찬 이 우주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대단히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 모든 모순을 안고 있는 이 현상계가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 무한하고 분할할 수 없는 의식만이 여기에서는 이것으로서, 저기에서는 또 다른 것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다양성도, 이원성조차도 없습니다. 어떤 모순도 없으며, 또한 모순 아님도 없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실재하는 것도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를 완전한 침묵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객관적인 우주로 보인 것이 사실은 지고의 브람만입니다. 그 브람만만이 여기에서 이들 다양한 대상들로서 나타나는 다양한 관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을 지니고 있는 브람만 속에는 어떤 구분도 없스빈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분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공간은 어느 모로 보나 완전히 '죽은' 지바들의 세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 모순이나 충돌이 조금도 없이 모두가 공존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보지 못합니다. 이 모든 지각의 대상들은 단지 순수한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식만이 모든 것을 지각하거나 관찰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의식은 마치 사람이 꿈 속에서 어떤 대상을 보듯이, 공간 속에 있는 이런 대상들을 지각합니다. 비록 이러한 의식이 완전히 깨어 있고 밝아 있을지 몰라도, 그 대상은 마치 어둠이 여명까지 계속되는 것처럼, 계속 존재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현상계가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 간에, 진리를 깨달으면 큰 평화가 있습니다. 잔물결들과 물보라가 바다 수면 위로 일어나서 잠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다음 순간 다시 바다 속으로 흡수되어 하나가 되듯이, 이 세상도 브람만 속에서 일어났다가 그 다음 순간에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브람만만이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발미끼는 말했다.

다샤라타 왕은 비빠슈찌뜨(바사)의 부양을 위해 충분한 식량을 준비했다. 그때 또 하루가 끝이 났다. 다음 날, 그 집회의 구성원들은 다시 모였고,

현자는 계속 말했다.

확실히, 여기서 보이는 것은 무지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비빠슈찌뜨가 그 무지의 한계나 그 범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는 한, 그것은 무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무지의 실재를 볼 때, '신기루 속의 물'은 결코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대는 직접 이 모든 것을 그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이 비빠슈찌뜨(바사)의 입을 통해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가 우리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도 역시 여러분 모두처럼 깨달음을 얻게 될(밝아질) 것입니다.

브람만이 무지의 자각을 붙들고 있을 때, 이 무지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망상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무지가 브람만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그것이 브람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구분은 사라집니다.

이 무지가 비록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가장 매혹적인 대상들을 일으킵니다. 꿈의 범위를 탐색하고자 하는 사람은 곧 그 꿈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무지에서 일어나는 이 현상계의 범위를 탐색하는 사람도 또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개념들 때문에 구체화된 대상들이었지만, 그러한 개념들을 지각하고 있는 사람(그는 그 후 곧 다른 개념들을 지니게 됨)에 의해 버려진 그 대상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싯다들의 세상들로서 공간 속에 존재합니다. 이들 세상들은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피조물들이 거기에 삽니다. 그러나 브람만 이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도 역시 오직 브람만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의 시초에는 어떤 원인도 없었고, 그러므로 전혀 우주가 없었습니다. 무한한 의식은 무한한 개념들을 지니게 되고, 이들은 그 개념들이 일어나는 곳에서 구체화됩니다. 이것에 대하여 무엇이 그토록 이상합니까? 지금도 그대와 나머지 모든 사람은 비상한 집중력을 부여받은 강렬한 개념들의 존재에 의해 창조된 현상들입니다.

두 가지 것, 즉 이 세상과 천국 같은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이 둘 다를 획득합니다. 어떤 싯다들은 지옥도 실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 지옥은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존재하는 것으로 확고히 믿어지는 것은 그 사람에 의해 신체적으로 경험됩니다. 왜냐하면 몸은 오로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지바가 하나의 몸을 떠날 때 어떤 특별한 상태를 버립니다. 그 다음 그것은 다른 상태의 개념을 지니게 됩니다. 그 개념이 좋다면, 그것은 좋은 세상을 경험하고, 만약 그 개념이 사악하다면 그것은 나쁜 세상을 경험합니다. 만약 그것이 싯다들의 세상을 생각하면, 그것은 그 세상을 경험합니다. 또 그 생각이 불순하다면, 그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지옥을 경험합니다.

지옥에서 지바는 화살에 찔리거나, 가슴이 바위에 눌린다거나, 빨갛게 단 기둥을 안는다든가, 화형을 당한다거나, 굶주림으로 서로의 몸을 뜯어먹는다든가, 피와 고름의 강물 속에서 수영한다든가, '그 사악한 행동이 이 사악한 경험을 가져오게 했다.'는 것을 느끼는 등 다양한 고통들과 재난들을 경험합니다.

라마는 물었다.

우리가 방금 들었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현자와 사냥꾼이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겪게 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결정하는 것이 사물의 본질 자체입니까? 아니면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현상의 그러한 소용돌이들은 무한한 의식의 바다 속에서 언제나 저절로 계속 일어납니다. 일단의 소용돌이 같은 현상들은 또 다른 것이 나타나서 그것을 대신할 때까지는 계속 남아 있습니다. 이들 현상들 가운데 어떤 것은 영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래 계속되고, 나머지 것들은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움직임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 움직임이 공기와 피할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이 현상도 항상 무한한 의식 속에 존재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그것을 순수 의식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무지한 사람들은 그것을 세상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도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겠습니까? 이 우주는 무한한 의식 혹은 신 속에서 자각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과 절망은 모두 거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 현명한 분들이시여! 본래의 그대 자신이 되십시오.

무한한 의식 그 자체는 그 안에서 일어난 움직임을 이 세상이라 여깁니다. 그 속에 흙과 기타 그러한 원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빛을 내는 것은 무한한 의식의 빛입니다. 그 밖에 다른 빛은 없습니다. 브람만만이 영원히 브람만 속에 있습니다. 우주 전체는 의식의 충만으로 채워져 있고, 그것이 창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어떤 모순이나 이원성도 없습니다.

그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할 때, 끝나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치 꿈 속에서 경험된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도 비록 물질적 실체로서 보이지만, 물질적인 실체로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꿈으로서 빛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의식이듯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객관적인 세상으로서 빛나는 것도 같은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꿈과 깨어 있는 상태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꿈 속에서 깨어난 사람은 "내가 꿈 속에서 본 것은 저것과 같지 않고 이것과 같아."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뒤에도 역시 사람은 "내가 죽기 전에 보았던 것은 저것과 같지 않고 이것과 같아."라고 생각합니다. 꿈은 짧고, 인생은 길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의 경험은 두 가지 경우에 똑같습니다. 한 번의 일생 동안 수백 번의 꿈을 경험하듯이, 니르바나에 도달할 때까지 수백 번의 깨어 있는 상태를 경험합니다. 마치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꿈을 기억하고 있듯이, 어떤 사람들도 그들의 과거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둘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을 때,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무지는 무엇입니까? 무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속박이란 무엇입니까? 제발,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을 속박하지 마십시오! 하나의 순수하며 형상이 없는 의식을 제외한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계가 그 의식 속에서 일어날 때도, 의식은 현상계에 의하여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해방도 없습니다. 의식 속에는 어떤 무지도 없고, 순수 의식 속에는 어떤 개념도 없습니다. 공간만이 공간입니다. 깊은 수면 속에서도 '자각하고' 있는 그것만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물론, 꿈 속에서도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순수 의식입니다. 다양성의 자각에 원인이 되는 것도 오로지 그 의식뿐입니다. 우주 그 자체는 일원성과 다양성 그 둘 다인 지고의 브람만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세상은 무한한 의식이 물질화된 것입니다. 의식은 의식 그 자체로서의 그 모든 대상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형태와 그것을 보는 것과 거기에 대한 생각은 모두가 동일한 순수 의식이며,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꿈 속의 대상들의 다양성은 다양성이 아니라 꿈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상태 중에 무한한 의식 속에서 보인 다양성도 무한한 공간(의식)이며, 어떤 다양성도 없습니다. 다양성의 현상을 가지는 것은 분할할 수 없는 의식입니다.

이러한 의식의 실재는 현자들과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각각 달리 경험됩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비실재적이면서 또한 실재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관점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상대 쪽이 보는 것을 이쪽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보는 것을 서로에게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우주는 사람이 보고 자각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기 자신 내부에 있습니다. 이러한 내면의 경험이 지속될 때, 이 우주도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냐면의 경험)이 바뀔 때, 우주도 또한 바뀐다고 합니다.

꿈 속에서 대상들은 정말로 비물질적이고 미묘합니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우주 속에 있는 대상들도 진실로 미묘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도 견고하고 지각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몸은 하나의 망상이며, 그 자체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령처럼 그 몸은 하나의 실체로서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심리적이거나 신체적인 조건화도 바람이 불 때 들리는 소리(전혀 거기에 없지만 들린다)처럼 하나의 현상입니다.

여기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거나 생각되는 모든 것은 순수 의식뿐입니다.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 생겨났어야 할 만한 어떤 이유도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평화롭다. 나는 무한한 공간과 같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대가 지바라는 개념을 버리십시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없다면, 그 밖의 다른 어떤 구원 수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의 친구이며, 또한 자지 자신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젊을 때 순수하고 올바른 이해 즉 붓디의 도움을 받아 해방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지금 당장 그렇게 하십시오. 늙고 노쇠해지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노령 그 자체가 부담입니다. 그대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과 노년기는 둘 다 소용없습니다. 그대가 현명한 사람으로 현명하게 살고자 한다면, 청년기만이 적기입니다. 삶이 너무나 일시적인 이 삼사라에 들어왔으므로, 신성한 경전들과 성현들을 가까이 함으로써 누구나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닫게 되면, 객관적인 우주는 비록 계속해서 보이고,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그대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라마는 물었다.

감각들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고는 무지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감각들을 제어하는 지를 부디 알려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말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자신의 노력으로 쉽게 감각들을 제어하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아(혹은 개별성)는 정말로 오로지 순수한 의식뿐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지바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지바가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은 즉시 그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나 감각들에 대한 통제력을 얻고자 하는 시도는 그 자기 자각 쪽으로 지향되어야 합니다. 마음(찌따)이 사령관이고, 감각들은 군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통제는 감각들에 대한 통제(혹은 승리)입니다. 만약 두 발이 가죽 신발로 감싸여 있다면, 세상 전체는 가죽으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각이 자신의 가슴까지 올라와서 순수 의식 속에 확고히 정착해 있을 때, 마음은 자연스럽고도 아무 노력 없이 평온해집니다. 마음은 고행들과 순례들과 의식들과 같은 다른 수단들을 통해서는 평온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참나의 자각이 그 경험을 자각하게 되면, 그때 그 경험은 의식에다 인상이나 기억을 남기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즉시 '잊혀'집니다. 심지어 이것을 하려고 시도할 때조차, 참나 지식이라는 지고의 상태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대가 자신의 적절한 활동을 적절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그것만이 그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런 만족스런 상태에 뿌리를 내리십시오. 반드시 이행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이행하고, 피해야 할 것을 피하면서 평화와 만족 상태에 있는 그런 사람이 자기를 정복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관찰하거나 지켜보는 것을 즐기고, 외부의 사건들과 관찰에는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의 마음은 편안합니다. 자각이 이와 같이 자기 자신 내부에 확고히 붙들려 있을 때, 마음은 그 보통의 불안함을 버리고 지혜를 향하여 흘러갑니다. 현명한 사람은 감각들에 대한 승리를 얻고, 바사나들 즉 정신적 조건화의 파도들 속에 빠져 죽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그러면 삼사라 즉 현상계의 환영은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모든 슬픔도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이 세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생각 너머에 있고, 그러므로 결코 지각이나 경험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순수 의식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도대체 속박이란 무엇이며, 해방이란 무엇입니까? 건조된 물은 흐르지 않습니다. 원인이 없는 경험은 심리적인 분리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경험이란 것은 '나'와 '너' 등과 같은 여러 다른 형태들을 띠고,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는 곳에서 다양성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과 같습니다.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그것은 순수 의식입니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나는 행위자나 행위나 도구 그 어떤 것도 아니라 순수 의식이며, 그리고 세상도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는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있을 때, 참나 지식이 있다는 것이 알려집니다. 세상은 본질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정체를 밝혀 주는 참나 지식은 지고의 진리입니다.

여러 개의 수족들을 가진 어떤 존재의 경우에, 그 존재는 여러 개의 수족들과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브람만도 지바 등으로 알려진 무수한 수족들과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상은 단지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의식은 영원히 바뀌지 않고 존재하는 무한한 평화입니다. 마치 이것들이 서로 다르기라도 하듯이 그것들을 조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무한한 의식 속에 무한한 개념들이 있습니다. 이때 후자인 무한한 개념들을 '무지'라고 부릅니다. 그 밖의 다른 어떤 무지도 여기에는 없습니다.

지바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꿈의 상태로, 또 꿈의 상태에서 깨어 있는 상태로 번갈아 가며 변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깨어 있든지 잠을 자고 있든지 간에 변함이 없습니다. 깊은 수면과 뚜리야(제4의 상태)라는 두 상태는 깨어 있는 상태와 꿈의 상태 모두의 토대를 이루는 실재입니다. 후자의 둘(깨어 있는 상태와 꿈의 상태)은 동일하며, 실제로 다른 모든 것을 아는 것은 뚜리야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깨어 있는 상태와 꿈의 상태와 깊은 수면 상태가 단지 뚜리야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뚜리야 속에서는 어떤 무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 속에 다양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비이원적입니다. 이원성과 비잉원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단지 유치하고 무지한 사람들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이원성과 비이원성에 입각한 그러한 논의가 없이는 우리의 의식에서 무지를 없애기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그대의 친한 친구로서 이 모든 것을 다룬 것은 오로지 그러한 정신에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를 깨우쳐 줍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이 진리를 끊임없이 명상할 때, 그들은 깨달음(붓디 요가)을 얻고, 그 깨달음에 의해서 지고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주석: 이들 두 행의 시구는 또한「기타」를 닮았지만, 두 번째 행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고, 그 변화로 인해 학생이 준비가 될 때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S.V.)

지고의 상태는 노력 없이는 얻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그대의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다른 예들을 들면서 되풀이하여 그것들을 설명해 왔습니다. 따라서 심지어 무지한 사람마저도 거듭 설명된 이 진리를 맛보게 된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한 번 읽은 후에, "나는 이것을 알고 있고,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바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경전을 공부함으로써 얻어진 지식을 다른 경전을 공부함으로써도 얻어지지 않습니다. 이 경전은 그대에게 행동의 능률과 지혜의 완벽, 둘 다를 모두 줍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무한한 의식(태양의 천체에 비유될 수 있는) 속에서는 지바라고 하는 무수히 많은 빛의 입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 안에 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러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수가 깨달음을 얻으면 다수는 그것의 다양성을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다수)이 하나로서 기술될 때, 그것은 이전에 있었던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조건과 상태들 속에서 동일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현자의 의식이나 자각의 내용입니다. 그것만이 존재합니다. 그 밖의 어떤 것도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무지의 대상을 이해하는 것은 오로지 그 의식의 도움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지한 사람들이 그들의 무지 속에서 지각하는 '나', '너' 혹은 대상조차도 모릅니다.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나 '그는 무지하다.'나 '이것이 진리다.'와 같은 느낌들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창조물로 알려진 이것은 결코 창조된 적이 없으며, 또한 생겨난 적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브람만이요, 브람만은 여기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무지한 사람들이나 존재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창조주 브람마이다.'와 같은 개념들이 떠다니는 오직 무한한 공간만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상태에 존재하고 있는 의식은 꿈의 상태로 들어가서 꿈이 됩니다. 꿈 속에서 깨어 있는 꿈 의식은 꿈 속에서 깨어 있음의 상태를 얻습니다. 꿈의 상태는 깨어 있음의 상태에 들어가고, 깨어 있음의 상태는 꿈을 버리고 깨어납니다. 깨어 있는 상태가 꿈의 상태로 들어갈 때, 꿈꾸는 사람은 말하자면 깨어납니다. 꿈꾸는 사람은 깨어 있는 상태를 하나의 꿈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꿈에 대한 의식은 진짜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확실히, 꿈을 꾸는 사람에게 참된 깨어 있는 상태는 다른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꿈입니다.

깨어 있는 상태와 관련하여 볼 때, 꿈은 단명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꿈꾸는 사람은 깨어 있는 상태가 짧다고 여깁니다. 이 둘 사이에는 전혀 차이가 없으며,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자각이 그칠 때, 깨어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 모두 사라집니다. 공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꿈 속에서나 혹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다른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다가, 죽음의 의식이 일어날 때 비로소 그것을 경험합니다. 꿈이 의식 속에서 일어나서 삼계를 창조하듯이, 마찬가지로 이 세상도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납니다. 꿈의 세상이 순수한 공이듯이,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상태의 세상도 현상이 일어나는 유일한 장소인 무한한 의식을 제외하고는 공입니다. 이 세상은 의식에 내재된 힘 때문에 의식 속에 나타나는 환영입니다. 의식만이 물, 흙, 공간 및 벽으로서 빛납니다. 그 안에서 붙잡거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참나 혹은 무한한 의식은 '참나' 혹은 '지식'과 같은 말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 그런 말들과는 아무 관계없는 가장 분명한 진리입니다. 최초의 창조가 시작되면서부터 이 무한한 의식만이 이 창조의 개념과 함께 존재합니다. 현자들과 학자들은 참나 지식에는 개념이나, 물질적 대상들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참나입니다. 지식 없음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지식(범주)도 여기에서는 알려진 적이 없습니다. 지식과 지식 없음(무지)은 상응하는 실체들이 없는 두 개의 개념입니다. 알아야 하거나 알지 말아야 할 무엇이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있는 것에 대한 지식, 이것은 이것이라는 지식, 그리고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지식, 이 모든 것은 의식 안에서 일어납니다. 참나에 대한 지식,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식, 지식의 부재, 진리는 현상 이외의 다른 것이라는 지식, 이 모든 것도 단지 무한한 의식의 유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참나 지식이 밖으로 나타난 것들이거나 확대된 것들입니다.

참나 지식에 대한 사실은 '참나 지식'이라는 용어가 버려진 뒤에도 존재합니다. 참나 지식만이 존재합니다. 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거대한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바위의 사면이 푸른 하늘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음매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떤 분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견고하고 분할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명입니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것입니다. 그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비물질적이지만 견고합니다. 그 안에는 지바로서 그 자체에게 알려진 수많은 인상들이나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각력이 있고, 또 지각력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부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형상들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은, 신들과 악마들과 인간들이라고 알려진 이들 인상들이 있습니다. 나는 바위 속에 존재하는 이들 인상들을 보앙 ㅘㅆ습니다. 그대도 보고 싶다면 그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그 바위가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그 내부를 볼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말했다.

정말로 아무도 그 바위를 깰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바위 내부에 하나의 인상으로 있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그대에게 설명했던 것은 지고의 실재나 참나입니다. 우리는 그 분할할 수 없는 무한한 의식의 통합적인 부분들입니다. 이 공간과 바람과 기타 원소들, 이 모든 행동과 활동들, 이 모든 조건화들과 기산 감각, 즉 이 모든 것이 그 존재의 수족들입니다. 흙, 물, 불, 공기, 공간, 마음, 붓디와 자아감은 그 지고의 참나의 수족들입니다. 이 무한한 의식 이외의 다른 무엇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대상들은 순수 의식의 덩어리인 순수한 자각이나 경험에 불과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참나 지식이나, 지식 없음이나, 비실재적인 것에 대한 지식 등은 말들이나 관점들에 불과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의 눈에는 그것들이 전혀 실재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나에게 보이는 순수 의식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참나다.', '이것은 지식이다.'와 같은 것들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그릇된 개념들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말들을 버리고, 그 말들이 가리키는 진리의 경험에 자리를 잡으십시오.

비록 그것 안에서는 무수한 활동들이 계속 진행되지만, 그것은 완전히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비록 그것이 무수한 최상급들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아무런 동요 없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은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비록 그것은 다섯 원소로 된 물질 그 자체이지만, 그것은 공간과 같은 그들 원소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은 모든 대상이 거주하는 곳이지만, 그것은 순수 의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비록 그것은 꿈의 도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라마는 말했다.

마치 깨어 있는 상태와 꿈의 상태 모두에서 기억이 지각의 뿌리에 있듯이, 외부의 대상들이 실재한다는 느낌을 일으키는 것도 오로지 기억뿐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우주 속에서 다양한 대상들이 나타나는 현상은 무한한 의식이 그것 자체를 자각하게 될 때, 아주 우연의 일치로(마치 까마귀가 야자열매에 내려앉을 때, 그 익은 야자열매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 자체를 명상할 때마다, 그리고 명상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것은 어떤 원인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곧장 그렇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깨어 있는 상태이다.', '이것은 꿈이다.', '이것은 수면이다.' 그리고 '이것은 뚜리야다.'와 같은 개념들은 그것들이 의식이기 때문에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사실, 꿈도, 깨어 있는 상태도, 수면도, 뚜리야도, 그 너머의 어떤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순수한 평온과 침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언제나 깨어 있는 상태나 꿈, 깊은 수면 혹은 뚜리야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생각되는 바대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타나고 나타나지 않는 것, 즉 지식이나 무지는 마치 공기의 움직임이나 정지처럼 본래 갖추어져 있는 두 가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상태들 등에서는 어떤 구별도 없습니다. 또한 기억이나 욕망이라고 할려진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한된 비전입니다. 그것이 오로지 외부의 대상으로서 빛나는 내면의 경험일 때, 객관성이나 기억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억은 오로지 경험에서부터 일어날 수 있고, 경험은 오직 그 대상이 실재할 때만 가능합니다. 무한한 의식이 개념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나중에 흙 등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러한 의식은 그것이 원하는 대로 빛나게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실재하지도 얺고 또한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어떤 것도 아니며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 그 자체는 밖에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대상의 개념으로서 가슴속에 있습니다. 무엇이 '내부'나 '외부'에 있습니까? 그것을 옴(OM)이라고 생각하고 평화에 안주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마치 나무가 마음의 활동이나 의지의 작용(의도)도 없이, 다양한 아름다운 가지들을 만들어 내듯이, 마찬가지로 태어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은 무한한 의식도 다양하고 다채로운 현상계(우주)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공간과 같습니다. 마치 바다가 정신적 활동이나 의도도 없이 소용돌이들을 일으키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이 의식은 온작 종류의 경험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모든 것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경험들에게 똑같은 의식은 '마음', '붓디', '자아감' 등과 같은 다양한 '이름'들을 부여합니다. 또 정신적 활동이나 의도도 없이 무한한 의식은 붓디 등의 모든 잇따라 일어남과 함께 그 자체 내에서 어떤 대상의 개념을 낳았습니다. 대상들에 대한 근본적인 특성을 포함하고 있는 세상의 질서(니야띠)마저도 어떤 의도나 정신적 활동이 전혀 없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더욱이, 그것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즉 나무는 줄기와 가지들과 잎들과 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분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말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한한 의식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 구분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말뿐입니다. 만약 그대가 "그렇다면 대상들에 대한 이 무익한 경험들이 왜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긴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대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혹은 숨겨진 것에 의지하겠습니까? 마치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것은 나무다.'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듯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도 공간 등의 이미지들이 존재합니다. 마치 공간(거리)이 공간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이고, 움직임이 공기와 하나이듯이, 마찬가지로 지성(붓디) 등도 지고의 존재나 무한한 의식과 하나입니다. 이 세상은 무한한 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태초부터 마치 꿈 속에서처럼 무한한 의식 속에서 나타납니다. 더욱이 이러한 현상에는 어떤 원인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한한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날마다 일어나는 보편적인 경험인 꿈과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탐구해야 합니다. 꿈 속의 본질이나 실재는 그것을 창조하고 또 그것이 그 안에서 존재하는 그런 순수 지성이나 의식이 아니고서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은 무한한 의식 속에서 하나의 '기억'으로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나 원인도 없이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까마귀가 야자열매에 앉을 때 익은 야자열매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꿈이나 개념화 등은 나중에 일어납니다. 일단 이 세상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 어떠한 원인도 없이 일어났다면, 그것의 '존재'는 나중에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 세상이 창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이 전혀 창조되지 않았기에, 확실히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한한 의식의 순수한 공간 속에서, 이 무수한 현상계들이 존재합니다. 비록 그것들은 모두가 본질적으로 그 본성에 있어서는 공이지만, 그것들은 생겨났다가 소멸합니다. 그것들은 비록 본질적으로는 공이지만, 서로에게 반응하고, 그럼으로써 이 현상계를 창조합니다. 이 세상은 공입니다. 그리고 공은 성장하고, 공만이 사라집니다. 공에는 '자기'가 없기 때문에 공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우주의 창조와 그것의 소멸은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오직 기만적인 개념들에 불과합니다. 창조의 개념이 오랫동안 계속 남아 있게 되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주의 객관적인 현상은, 마치 깊은 수면의 기간이 지나면 꿈이 일어나듯이, 자연발생적으로 우주적 존재 속에 나타납니다. 의식만이 이 우주로서 빛납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의식의 몸입니다. 이후에 의식 자체는 그 자체 내에서 기억과 심리적 범주들, 땅이나 기타 원소들에 대한 개념들을 일으킵니다.

라마는 물었다.

신이시여! 기억들이란 붓디에 남아 있는 인상들입니다. 만약 그러한 인상들과, 따라서 기억들이 없다면, 어떻게 어떤 것이 생겨날 수 있고, 혹은 개념들마저도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내가 곧 그대의 의심을 몰아내고 비이원성을 확립시켜 주겠습니다. 이 현상계는 나무에서 아직 조각되지 않은 조각상과도 같습니다. 한 조각상이 실제로 나무에서 조각되어 나올 때만 실제로 그것은 조각상이 됩니다. 그러나 무한한 의식은 비이원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지각력이 없는 목재에서 조각상은 그것이 실제로 조각될 때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식은 의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현상계는 그 자체 내에서 빛납니다. 실제로 의식이 의식 아닌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도 거기에서 조각되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 세상으로서 빛납니다.

우주의 시초에, 의식은 잠재적인 개념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을 나타냅니다. 그러한 개념들은 또한 의식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꿈 속에서처럼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슴 그 자체의 공간 내에서, 의식은 '이것은 브람만의 개념이다.', '이것은 지바의 개념이다.', '이것은 자아감, 붓디, 마음, 시간 그리고 공간이다.', '나는 아무개이다.', '이것은 활동이다.', '이것은 원소들이다.', '이들은 감각이다.', '이것은 미묘한(뿌르야스따까) 몸이다.', '저것은 거친 신체적 몸이다.', '나는 창조주 브람마이고, 쉬바이고, 비슈누이고, 태양이다.', '이것은 안쪽이고, 저것은 바깥쪽이다.', '이것은 창조이고, 이것은 세상이다.' 등과 같은 다양한 개념들을 일으킵니다. 그러한 개념들은 의식 그 자체 내에서 일어납니다. 신체적이거나 물질적인 실체도 없고, 기억도 없으며, 이원성도 없습니다.

아무런 원인도 없이 이 현상계는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의식에 의해 의식 자체 내에서 경험됩니다. 그 자체를 이 세상으로서 생각하고 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연루된 어떤 기억도, 꿈도, 시간 등도 없습니다. 내부에서는 의식의 덩어리인 이것이 밖에서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밖도 없으며, 또한 지고의 실재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한한 브람만이 실재하듯이, 마찬가지로 이렇게 관찰된 객관적인 우주도 또한 실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기쁨이 기쁨으로 보이지 않고, 슬픔이 슬픔으로 보이지 않는 이는 해방된 사람입니다. 심지어 기쁨에 관여할 때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이는 해방된 사람입니다. 객관적인 세상뿐만 아니라, 순수 의식 그 자체도 향유하는 이는 해방된 사람입니다.

라마는 물었다.

해방된 사람이 기쁨 속에서 기쁨을, 슬픔 속에서 슬픔을 찾지 못하면, 그는 틀림없이 지각력이 없고 감수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의 자각이 의식 속에 완전히 몰입해 있기 때문에, 만약 그가 기쁨을 경험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기쁨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는 의식 속에 안주해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의심은 녹아 없어졌으며, 이 세상의 모든 대상과 접촉할 때 그는 지혜의 향기를 풍깁니다. 비록 그가 매 순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하면서 세상 속에서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세상도 그에게는 그 '맛'을 잃었습니다.

이와 같이 해방된 사람들이 참나 혹은 의식 속에 안주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비록 활동을 하고 있더라도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은 그들이 지각력이 없는 것도, 감수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들에게 지각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현상계를 마치 하나의 긴 꿈인 것처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밤과 같이 완전히 깜깜해 보이는 그런 진리나 지고의 평화에 의지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그들에게 지각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지한 자들의 세상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언제나 참나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각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슬픔을 초월한 것입니다.

이 삼사라를 떠돌면서 온갖 종류의 쾌락과 고통을 경험한 뒤에, 지바는 성현과 접촉하여 이 삼사라의 바다를 건널 행운을 갖게 됩니다. 그는 침대 없이도 아주 평화롭게 잠을 잡니다. 비록 여기서 격한 활동에 관여하고 있지만, 그는 깊은 수면 같은 평화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 '수면'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을 보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진실로 취해 있습니다. 그는 깊은 수면 같은 희열을 즐깁니다. 그는 그의 마음에서부터 세상의 개념을 몰아낸 뒤 충만함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넥타를 마셨으며 이제 평화롭습니다. 그의 기쁨은 쾌락과 관계없습니다. 그는 이미 탐욕에서 등을 돌렸습니다. 그는 모든 원자 속에는 우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그는 다양하고 강한 활동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현상계가 꿈과 똑같은 실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깊은 수면 같은 평화와 희열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의식은 공간보다도 더 광대합니다. 최고의 자기 노력으로 그는 참나 지식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는 마치 순수한 공간 속에서 하나의 긴 꿈을 보고 있는 것처럼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가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완전하게 깨어 있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비록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최대의 기쁨을 즐깁니다. 그는 가장 높은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신이시여! 그가 함께 즐기고 있는 그 현자의 친구는 누구이며, 그의 즐거움이나 기쁨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그는 그러한 쾌락들을 즐깁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그 현자의 친구는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일어나고, 어떤 분리나 충돌도 없는 그러한 그 자신의 활동입니다. 아버지처럼 그것은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열정을 줍니다. 아내처럼 그것은 그를 억제하고, 그를 제지하며, 그를 안내합니다. 그것은 최악의 재난이 닥쳐와도 그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포기의 정신을 촉진시킵니다. 그것은 분노와 증오를 그들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에, 그것은 감로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고통과 어려움의 가장 빽빽한 밀림 속에서도 그의 친구이며 조력자입니다. 그것은 소중한 믿음의 보석들을 담고 있는 보물 상자입니다. 그것은 글르 악에서 구하며, 아버지처럼 언제나 그를 열심히 보호해 줍니다.

그것(자기 자신의 활동)은 그에게 모든 형태의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온갖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그것은 그의 몸의 건강을 증진합니다. 그것은 그에게 '이것은 해야 한다.'와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를 알려 줍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대상들과 경험들을 열심히 가져다주고, 바람직하지 않은 대상들과 경험들을 막아 줍니다. 그것은 말씨를 부드럽고 유쾨하게 만들며, 활동도 부드럽고 달콤하며, 유용하고 예쁘며, 이기적인 욕망이나 정열이 없고, 지고의 참나 지식을 획득하는 데도 도움이 되게 합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와 선을 보호하는 일에 헌신합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질병들을 예방해 줍니다. 그것은 학자들과 건전한 토론을 함으로써 그들의 행복을 증진시킵니다. 동등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원성을 닮은 것이 그냥 있습니다. 삶에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어떠하든 간에, 그것(자기 자신의 활동)은 자기 희생, 자선, 엄격한 생활 그리고 순례에 헌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과 음료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아들, 아내, 브람마나, 하인 그리고 친척들과 건전한 관계를 확립합니다. 현자는 바로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해 그러한 진정한 친구나, 그 친구의 배우자와 함께 지내는 것을 즐깁니다. 그 친구는 바로 자기 자신의 활동입니다.

이 친구(자기 자신의 활동)에게는 목욕(몸의 청결), 자선, 엄격한 생활, 그리고 명상이라고 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모든 존재의 안녕과 행복을 증진시킵니다. 행복의 정신(혹은 행복한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럽고도 수월하게 행복을 듬뿍 쏟아 주는 그의 아내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사마따(마음의 평온이나 침착)입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자연스러운 활동)이 정의롭거나 적절한 활동을 수행하도록 격려해 줍니다.

그녀에게는 마이뜨리(다정함)라고 하는 또 한 명의 성실한 친구가 있습니다.

모든 친구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친구와 그의 아내, 기타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즐기는 현자는 기쁨이나 쾌락의 상황에 처할 때 기뻐할 필요가 전혀 없고, 또 불쾌한 상황들에 처해 있을 때도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증오하지도 않으며, 화내지도 앟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비록 끊임없이 이 세상의 활동들에 관여하고 있지만, 그는 니르바나의 상태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는 쓸제없는 논쟁에서 입을 다물며, 쓸제없는 이야기는 듣지도 않으며, 정의롭지 못한 활동들과 관련해서는 시체와 같습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활동들에는 대단히 생기를 띠며, 경사로운 것을 폭로하는 데 총명하며, 한순간에 그는 최대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이 모든 것이 현자에게는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이러한 특성들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여기에서 이 세상으로서 빛나는 것은 오직 무한한 의식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세상도, 공(空)도, 심지어 의식도 아닙니다. 오직 이 정도만큼은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은 실제로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공간보다도 더 미묘하기 때문에, 그것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의식의 몸이 있고, 그 몸은 지각의 대상으로서 경험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에는 어떤 원인도 없고, 그러므로 그것이 일어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이 존재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외부의 우주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으며, 심지어 그 우주의 원자 하나조차 존재한다고 가정할 어떤 논거도 없습니다. 만약 무언가가 여기에서 외부의 우주로서 보인다면, 사실, 그것은 무한한 의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곤히 잠자는 사람이 수면을 버리지 않고 계속 꿈을 꾸듯이, 순수하고 분할할 수 없는 이 의식도 마찬가지로 그 자체 내에서 의식으로서의 그 자체의 본질을 버리지 않고, 객관적 우주의 개념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흙 등과 같은 원소로서 알려진 어떤 물질성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보는 것을 형상이라고 느끼든 형상이 아니라고 느끼든지 간에,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무한한 브람만이라는 것입니다. 그 브람만만이 이 모든 것으로서 빛납니다. 꿈꾸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날 때, 꿈 속의 산이 순수한 공(空)으로서 깨달아지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런 모든 형태도 사람이 깨달음을 얻으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깨달아집니다.

이 세상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분할할 수 없는 지고의 브람만입니다. 비록 우리가 고도로 지성적이지만, 우리는 깨닫지 못함(무지)이 어떤 것인지를 모릅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모든 존재의 필수적인 본질인 의식의 덩어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참나의 지고의 상태입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의식의 덩어리로서, 모든 것이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는 그 무한한 공간이 있습니다. 그 의식의 덩어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만이 실재하면서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이 모든 것입니다. 소용돌이들이 바다에 있듯이, 형태들과 지각과 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거기에 상응하는 개념들도 모두가 순수 의식입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무한한 의식이 있습니다. 조금도 가감이 없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만이 존재하고 어떤 세상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심지어 애착과 혐오, 존재와 비존재도 의식의 참된 본성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 자체의 수족들이 됩니다. 두 개의 '끝' 사이에 순수 의식이 있습니다. '끝'은 단지 개념에 지나지 않고, 중간이 실재와 관계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간의 실재, 그것은 무한한 참나 혹은 의식의 필수적인 본성입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존재하는 그 의식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은 '세상'입니다.

맨 처음부터 이 세상은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허구입니다. 비록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 세상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비록 지고의 브람만만이 존재하지만 지고의 브람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유감스럽고도 비극적인 일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브람만이나 무한한 의식이 아닌 것을 찾으러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아! 이 세상은 사람들이 비실재적인 세상(자각의 대상)을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상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제로 똑같은 브람만에 도달합니다. 귀중한 보석의 광채는 보석이 창조해 낸 것도 아니요, 또한 그 광채가 그 보석과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상계도 순수 의식인 참나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태양은 지고의 의식 상태에서 빛납니다. 그래서 태앙은 그 참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양도, 달도 참나를 비추거나 밝혀서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태양과 달이 직접 빛을 내고, 따라서 지각의 대상들을 비추고 보여 주는 것은 그 의식이 본래 갖추고 있는 힘 때문입니다.

그 의식은 형태가 있기도 하고, 형태가 없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히 말과 무의미한 개념들에 불과합니다. 태양 광선을 구성하고 있는 빛의 입자들은 태양과 전혀 다르지 않은, 태양의 광선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빛난다고 말하는 것은 옳고, 또한 그들이 빛을 내자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옳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태양과 달이 빛난다고 말하는 것도 옳고, 또한 그들이 빛을 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옳습니다. 태양과 기타 모든 발광체들이 무한한 의식 때문에 빛을 내므로, 그것이 빛을 내지 않는다거나 혹은 그것들이 빛을 내지 않는다고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지고의 상태는 모든 관념을 초월해 있고, 심지어 '의식의 덩어리'나 '공'(空)의 관념들조차 초월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고의 상태에는 모든 것이 없지만, 또한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흙 등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반면에, 그 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안에 무한한 지바들이 있지만, 그들은 의식과 관계없는 지바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나 아무것도 없는 '무' 등도 실재나 무한한 의식과는 거리가 먼 관념들입니다.

비이원적이고, 영원하며, 만물에 충만해 있는 순수 의식은 존재하며, 또 '세상'이라고 합니다. 대상으로 있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없어질 때, 그 뒤에 남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무한한 경험들로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그의식 자체입니다. 의식의 깨어 있는 상태가 두리야(초월적) 상태와 가지는 관계는, 꿈의 상태가 깊은 수면 상태와 가지는 관계와 꼭 같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 이 모든 상태들은 단지 의식의 한 뚜리야 상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조에 대한 이론들이나, 참나 혹은 의식이 물질로 변형되는 데 대한 이론들은 스승이 제자를 가르칠 때 사용하는 표현들입니다. 이 모든 것에는 조금도 진실이 없습니다. 꿈을 꿈이라고 깨달을 때 기쁨이 있지만,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불행한 사건을 꿈꿀 때 불행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현자는 비록 그가 다양한 활동들에 관여하고 있을 때라도 진리를 깨달은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다양성 속에서 그는 일원성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불쾌한 상황들 속에서도 그는 기뻐합니다. 비록 그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는 실제로 이 세상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무엇을 얻어야 하겠습니까? 얼음이 늘 차갑듯이, 현자도 어떤 것을 열망하거나 버리지 않고, 그에게 자연스러운 것을 행하며, 자연스러운 삶을 영위해 가고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의 특성은 자기 본래의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창조주는 물질성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오로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몸도, 감각들도, 바사나 즉 정신적 조건화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전 세상 주기가 끝날 때에 이미 해방을 얻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떤 기억도 없습니다. 기억이 전혀 없을 때, 형체를 부여받을 어떤 원인도 없습니다. 창조주에게 그러한 기억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심지어 거기에도 꿈의 도시처럼 물질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논의를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해방된 사람들에게는 기억이 불가능합니다.

라마는 물었다.

신이시여! 왜 그들에게 기억이 없는지, 그리고 기억이 없을 때 구나(창조의 건축용 블록)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기억은 오직 객관적인 우주와 관련하여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것은 인과 관계의 맥락을 제공합니다. 자각 그 자체의 그러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때, 기억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일어나거나 존재하겠습니까? 사실 이 모든 것이 실제로는 브람만 즉 무한한 의식이고 보면, 기억이 들어설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일어나는 사물들에 대한 묵상은 스므르띠(회상)로 여겨집니다. 물론 그러한 사물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스므르띠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무한한 의식은 모든 존재들의 실재이기 때문에 사물들에 대한 그러한 묵상은, 말하자면, 의식 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스므르띠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보통의 무지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움직임도 역시 스므르띠라고 합니다. 그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그것은 외적으로 물질로서 보입니다. 의식이 그 자체의 본성에 의해 무엇을 경험하든지, 그것은 스므르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경험은 어떠한 인과적 관계(까마귀가 우연히 야자열매에 앉자, 익은 야자열매가 떨어지듯이)도 없이 의식의 수족들로서 저절로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것들이 기억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우연히 일치하는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모든 사건들에 적용됩니다.

기억과 관련되는 지각의 대상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있을 때, 왜 우리는 이와 같이 우연적인 기억을 탐구해야 합니까? 그 지각의 대상들이란 오직 무지한 사람들의 눈에만 존재합니다. 나는 그러한 무지한 사람들을 위하여 해방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깨어났지만, 거기에 대하여 약간의 의심을 가진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의도된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볼 수 없는 무지한 사람들과 결코 교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의식에 의해 경험되고 그 경험이 반복될 때는, 정신적인 인상(삼스까라)이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현상계가 창조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한한 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형태도, 어떤 기억도 그것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원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떤 속박도 없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편재하고 있는 의식이 어떻게 몸과 동일시합니까? 의식은 어떻게 바위들과 숲과 동일시합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형체를 가진 존재가 그 자신을 손과 동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의식도 그 몸과 동일시합니다. 몸이 손톱이나 머리카락과 동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재하는 참나도 자기 자신을 바위들과 숲 등과 동일시합니다. 꿈 속에서 바위들과 숲이 되는 것은 오로지 순수 의식이듯이, 이들 개념들도 우주의 처음 시작부터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개인의 몸에 지각력이 있는 부분과 지각력이 없는 부분들이 있듯이, 무한한 의식의 우주적 몸에서도 마찬가지로 지각력이 있는 대상과 지각력이 없는 대상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형태들은 전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분명히 보일 때, 마치 깨어나는 순간 꿈이 사라지듯이 그것들은 사라집니다. 이 모든 것은 순수 의식입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도, 지각의 대상도 없습니다.

수천 번의 세상 주기들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파도들이 바다와 다르지 않듯이, 그 주기들은 무한한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파도들이 아니라 바다이다.' 이와 같이 진리를 깨달을 때, 파도라는 생각은 사라집니다. 현상계도 바다인 브람만과 관련하여 파도와 같습니다. 이 현상계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브람만 속에 내재된 에너지가 나타나는 두 가지 방법입니다.

꿈 속에서처럼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마음, 창조주 브람마, 만물의 조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존재는 이름도 형상도 없고,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 안에서 '나'와 '너' 등이 개념들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그것들도 창조주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관념이 일어나는 순수 의식은 만물의 증조부입니다. 바다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파도들이 단지 바다이고, 또 그 바다와 다르지 않듯이, 이 모든 세상과 그 소멸도 무한한 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움직임은 자장과 중력을 부여받은 우주적 인격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세상은 꿈과 같이 그에게서 일어납니다. 세상은 하나의 꿈입니다. 깨어 있는 상태도 하나의 꿈입니다. 이 세상 혹은 현상계가 분명히 보이고 경험되고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개념들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만이 우주적 개별성으로서 존재합니다. 의식 자체는 그 안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개념들을 경험합니다. 모든 꿈 속의 대상들처럼 나타나는 것은 온통 의식으로 충만되어 있는 그 우주적 인격체입니다. 자기가 연기하고 있다고 꿈꾸고 있는 배우가 관객을 즐겁게 하면서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자기 자신을 보듯이, 이 의식도 이 현상계에 대한 그 자신의 경험을 알게 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우주가 시작될 때 이 우주로서 빛나는 것은 오로지 의식뿐입니다. 그러므로 삼계는 브람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브람만은 바다와 같습니다. 그 속에서 세상들은 파도들과 같고, 경험은 물입니다. 이 우주 이후에도, 순수한 절대적인 희열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이원성이나 비이원성, 아니면 그 밖의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깊은 수면과 꿈은 모두가 수면 중에 번갈아 일어나는 상태들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우주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도 무한한 의식 속에서 번갈아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현명한 사람이 이 세상이 꿈의 도시와 같다고 깨달을 때, 그의 희망은 그곳에 집중되지 않습니다. 백일몽을 꾸는 사람도 매우 다양한 비전들과 희망들을 꿈꿉니다. 비록 그러한 백일몽 속에도 어떤 실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이 현상계에 대한 다른 어떤 설명을 찾고 있다면, 왜 그대는 망상이나 정신착란 상태의 생각들과 환각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마음이 조금도 변화를 겪지 못하도록 하는 명상 수행은 지고의 활발하지 못함만큼이나 좋습니다. 반면에, 그러한 변화들이 마음속에 존재할 때, 그것은 다양성이나 삼사라가 들어앉을 자리가 됩니다. 이러한 명상에 의해서는 평온의 상태가 얻어지지 않습니다. 강제적으로 마음이 모든 변화들을 하지 못하게 할 때 해방이 얻어진다고 한다면, 왜 꿈 속에서는 그것이 얻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우주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만, 해방을 가져오는 진정한 참나 지식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해방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절대적이어서, 진실로 니르비깔빠 사마디입니다. 그 속에서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참나 지식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영원한 수면, 뚜리야, 니르바나 그리고 목샤라고도 합니다.

디야나 즉 묵상이나 명상은 완벽한 일깨움 즉 깨달음입니다. 객관적인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곧 완벽한 일깨움입니다. 그것은 활발하지 못함의 상태나 깊은 수면, 니르비깔빠 사마디나 사비깔빠 사마디와도 닮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상태도 아닙니다. 그 속에서는 우주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소멸됩니다. 그 속에서는 일원성과 다양성, 그것들의 혼합, 그것들의 비존재에 대한 관념들도 전혀 없습니다. 그 속에서는 지고의 평화가 있습니다.

그 완벽한 일깨움은 순례나 자선, 지식의 획득, 명상이나 요가의 수련, 엄격한 생활(고행)이나 종교적 의식들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밤낮 끊임없이 이 경전을 주의 깊게 탐구함으로써 얻어집니다. 경전 공부를 제외한 앞의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환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천국이나 다른 그러한 보상들을 가져다줍니다. 망상이 사라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경전을 세밀하게 공부하고 탐구한 사람에게 참나 지식이 일어날 때뿐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시초에는 이 세상도 다른 세상도 무한한 의식 속에서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꿈 속에서 어떤 여인을 포옹하는 경험처럼,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경험이 의식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오직 꿈꾸는 사람만이 꿈 속에 존재합니다. 오직 무한한 의식만이 비실재적인 경험 속에 존재합니다. 이 세상처럼 보이는 것은 이와 같이 언제나 순수한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순수한 의식 속에서 어떻게 분순한 것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경험도 또한 순수합니다. 그것 자체가 꿈 속의 도시나 꿈의 세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우주가 맨 처음 시작될 때 어떤 흙 등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땅과 물리적 원소들, 마음과 기타 심리적 범주들(이들은 단지 의식 속에 있는 개념들에 지나지 않음)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무한한 의식 속의 에너지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이러한 에너지의 움직임은 어떤 마음의 활동이나 의도도 없이 일어나는 공기 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움직임과 같습니다.

의식은 의식 속에서 그 자신의 몸이나 물질로 나타납니다. 마음 그 자체는 꿈 속에서처럼 지각의 대상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어떤 원인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원성도 없고, 어떤 의식의 분리도 없습니다. 지고의 브람만은 모든 형태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것이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바로 이 현상계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다양성이 꿈 속의 사람에게 일어나듯이, 다양성의 이 현상계도 하나의 무한한 브람만 속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이 바로 창조주 브람마입니다. 그것은 이 우주의 바로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모든 것을 행하며,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이 모든 것을 철저히 탐구할 때, 순수한 의식만이 존재하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습니다. 탐구의 끝에서는 완전한 침묵만이 남아 있습니다. 비록 모든 활동에 관여하고 있지만, 그것은 마치 벙어리인 양 공간처럼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무한의 지식을 얻고 완전한 침묵에 잠깁니다. 그는 사람들 중에 최고입니다.

창조주 브람마는 그렇게 할 의도도 없이 이 현상계를 일으킵니다. 무한한 의식은 만약 그 의식의 '눈을 감으면', 그 의식 자체가 되고, 만약 그 '눈을 뜨면', 이 세상이 됩니다. 그러나 그 무한한 의식은 이 두 상태에서 늘 그 자체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며, 실재하기도 하고 실재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 두 상태는 끊임없이 번갈아 일어납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가 없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고의 평화로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아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공간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또한 현상계가 비록 이따금 그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와 같다고 아십시오. 객관적인 우주는 비록 현재 분명히 경험되고 있지만, 결코 일어난 적이 없으며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의식의 에너지나 힘이 만들어 낸 신비한 결과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경험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지 간에, 그때 그 자리에서 곧장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사람이 끊임없이 어떤 것을 묵상하면, 무엇이 끊임없이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으면, 그리고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다해 어떤 것에 헌신하면, 그는 그것을 실재하고 분명한 것으로 알게 됩니다. 마음이 브람만의 의식에 함빡 젖어들게 되면, 마음은 그 의식이 됩니다. 마음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마음은 그것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지고의 실재나 무한한 의식 속에 안주할 때, 그는 활동 그 자체를 위한 활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올바른 활동에 관여합니다.

이 객관적인 우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 혹은 그 우주의 존재를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을 때, 누가 활동의 행위자이며 누가 그 경험을 즐기는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통 창조주 브람마나 각성된 지성인 붓디 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절대적으로 순수한, 무한한 의식입니다. 하늘의 평화는 순수한 공(空)입니다. 이 모든 것에 이원성이 나타나는 것은 환영과 같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양성은 무의미한 관념입니다. 깊은 수면 상태 이후에 꿈의 상태로 들어가듯이, 같은 무한한 의식도 절대적인 정지 상태에서부터 창조의 상태로 나아갑니다. 그 안에는 이원성이나 일원성이 없습니다. 무한한 의식은 그 자체 의식의 공간 내에서 이 우주를 자각합니다.

꿈 속에서 명확한 차례나 순서 혹은 인과적 관계가 전혀 없듯이, 이 현상계에서도 비록 명확한 인과적 관계나 순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없습니다. 꿈 속에서는 어떤 구분도 없습니다. 또한 지각의 대상들 속에서도 어떤 구분도 없습니다. 이 우주나 세상으로서 그대 앞에 나타나는 것은 바로 똑같은 브람만 즉 무한한 의식입니다. 꿈 속에서는 꿈 속에 보이는 사물들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습니다. 또한 삼스까라(마음의 인상)도 심지어 기억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꿈꾸는 사람은 '나는 이것을 전에 본 적이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이 세 가지 고려 사항들이 없어지면, 무지한 사람이 기억과 동일시하는 것인 바로 무한한 의식만이 있습니다.

긍정과 부정, 지시와 금지는 비록 지고의 존재 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현기증을 느낄 때, 비록 그 현기증이 그에게 있지만, 그는 이 세상이 자기 주변에서 돌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심지어 이것을 알고, 또 객관적 우주가 망상이나 환영이라는 것을 알 때조차도, 그것은 꾸준한 수련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환영은 이 경전을 열심히 연구함으로써만 사라집니다. 그 밖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세 가지(마음, 자각의 대상들과 몸)가 평온의 정지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참나 지식이나 깨달음에 의한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 세 가지가 무지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경전을 단순히 연구함으로써 그 무지는 없어집니다. 이 경전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공부하는 학생을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경전을 처음 공부할 때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좀 더 공부하게 되면 그것은 분명해집니다. 이 경전은 망상을 없애 주고, 일상생활 그 자체가 지고의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매일 이 경전의 적은 일부분이라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 경전이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권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참나 지식과 궁극적인 해방을 다루는 다른 경전의 연구에도 의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라마는 물었다.

이와 같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났다가 소멸되는 무수한 우주들이 있을 때, 왜 당신은 나에게 그것들의 본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이 세상이 하나의 긴 꿈이라는 것을 그대가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방법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대는 이미 한 단어와 그 의미 사이, 혹은 단어와 그 단어가 나타내는 대상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상계와 가상의 우주에 대한 이 모든 논의가 무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실례가 우리로 하여금 단어와 거기에 부합되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영적인 진리를 명확히 깨닫게 해 주는 그 목적에 가장 잘 합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그것만이 우리를 일상생활에서 안내해 줄 하나의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고 난 뒤에, 시간의 세 기간(과거, 현재, 미래)들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면, 그대는 이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존재물의 모든 원자 속에는 무수한 우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누가 감히 그 우주의 수를 헤아릴 힘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이와 관련하여, 나는 창조주이신 나의 아버지 브람마께서 옛날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내가 그 이야기를 그대에세 곧 들려줄 터이니, 잘 들어 보십시오. 나는 나의 아버지 브람마에게 "이 현상계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에 존재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브람마는 말했습니다.

오, 현자여! 이 우주로서 나타나는 이 모든 것은 단지 무한한 의식인 브람만에 불과합니다. 현자들은 이것이 무한한, 순수 사뜨바(절대적인 지성)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은 그것을 물질적인 우주로서 보고 있습니다. 나는 이 브람만다(우주의 알)에 관한 다음의 이야기를 가지고 이 진리를 예시해 보겠습니다.

이 무한한 공간 속에는 그 공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무한한 참나가 있습니다. 그 참나는 그 자체 내에서 그 자체를 살아 있는 제한된 실체인 지바로서 자각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때고 무한한 공간으로서 그 자체의 필수적인 본성을 버리지 않고, 비록 그 몸을 위하여 여전히 공간과 함께 있지만, 그것은 그 자체를 '나는 ……이다'(I am) 혹은 자아감으로서 생각했습니다. 이 '나는 ……이다'가 '나는 붓디 즉 지성이다.'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다음 그것은 그 자체를 붓디로서 보았는데, 이 붓디는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가를 결정해 주지만, 조건화된 지각의 기본적인 환영을 따라갑니다. 이후에, 그것은 '나는 마음이다.'라는 생각을 품고, 여러 개념들이나 다양하고 그릇된 생각에 연루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은 그 후 곧 오감들의 존재라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으며, 오감들은 비록 무형이지만, 꿈 속에서 본 산들처럼 투박하고 물질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은 다양한 피조물들이 그들 사이에 온갖 종류의 관계를 맺으며, 모두가 시간의 지배를 받는, 그런 삼계로 구성된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마치 사람이 거울에서 다양한 대상들을 보듯이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보는 모든 것은 매혹적이고 다채로웠습니다. 모든 원자 구성 원소의 미립자 속에는 그러한 우주들이 존재합니다. 무지는 이 모든 것을 무지로서 그리고 또 무한한 세상으로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브람만으로 깨달을 때, 그것은 바로 순수한 브람만이 됩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실제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한낱 꿈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각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무엇을 지각하며, 무한한 존재에게 어떻게 이원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마는 물었다.

현상계는 원인도 없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원인도 없이 생겨난 그러한 사건들이 왜 지금도 계속 일어나지 않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어떤 생각을 지니게 되면, 그 사람은 그것을 진실이라고 지각합니다. 브람만 속에서는 원인 작용과 원인 작용 없음이 모두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브람만은 전능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존재의 경우, 지성적인 몸도 역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가지고 있습니다. 브람만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경험되면, 틀림없이 그것의 원인이 되는 잘못된 원인 작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무한한 의식만이 모든 곳에서 빛날 때, 그 속에서 원인은 무엇이며,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라마는 물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의 경우에는  인과적 관계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또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겠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는 무지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논의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겠습니까?

원인이 있어 생긴 것들도 있지만, 원인을 가지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관점에 달려 있습니다. 합당하다고 간주하는 것만을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우주에는 원인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신 등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믿음은 말장난입니다. 꿈의 경험이 예시해 주듯이, 이 진리를 예시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꿈과 같은 이 우주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면, 큰 망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이해하면, 망상은 사라집니다. 이 우주와 관련하여 제기된 사변적인 추론은 무지와 어리석음입니다. 불은 그에게 자연스러운 열의 '원인'입니까? 몸의 구성 요소는 사실상 무형의 에테르 같은 물질입니다. 그러므로 신체에는 어떤 참된 원인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존재하지 않는 이 우주를 경험하는 몸의 원인은 무엇일 수 있습니까?

비록 하나의 원인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자연(그것이 무엇이든지)에게 자연스럽습니다. 심지어 여기서 사용된 '자연'(自然)이라는 단어도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대상과 거기에 가정된 원인들은 무지한 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자들은 모든 결과가 원인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강도당하는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는 어떤 슬픔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깨달을 때는 삶이 슬픔에서 해방됩니다.

우선 이 우주에 어떤 원인도 없었기 때문에, 이 우주가 결코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그것은 생겨났으며, 마치 꿈의 대상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 존재하듯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브람만뿐이며, 브람만 속에서 빛납니다. 수면과 꿈이 둘 다 한 꿈의 두 양상이듯이, 마찬가지로 이 우주와 그 소멸도 하나의 분할할 수 없는 무한한 의식의  두 양상입니다.

라마는 말했다.

신이시여! 이 세상에는 분할할 수 있는 물질도 있고, 분할할 수 없는 물질도 있습니다. 분할할 수 있는 물질은 서로 충돌하며,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은 서로 그렇게 충돌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달을 봅니다. 그때 말하자면 시력은 달을 분할하거나 달과 접촉하지 않고서도 달을 알아차립니다…… 나는 일깨움이 없는 사람의 관점에서 다음 질문을 던집니다. 몸 속으로 생명의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누가 관장하고 있습니까? 몸은 견고하여 저항합니다. 미묘한 힘이면서도, 그 자체로서는 어떤 저항력도 없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그 힘은 무엇입니까? 미묘하고 저항력이 전혀 없는 그것이 견고하고 저항하는 물질에 작용할 수 있다면, 왜 사람은 생각의 힘만으로도 산을 움직일 수 없습니까?

바시슈타는 말했다.

생명의 호흡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몸에 들어왔다가 몸을 떠납니다. 그렇게 호흡할 때, 가슴에 머물고 있는 미묘한 신경의 힘은 대장장이의 풀무처럼 팽창하고 수축합니다.

라마는 말했다.

대장장이의 풀무의 경우에는 그 풀무를 작동시키는 사람이 대장장이입니다. 이와 같이 가슴속에 있는 나디를 팽창시키고 수축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시슈타는 말했다.

대장장이가 이 세상에서 풀무를 팽창시키고 수축시키듯이, 모든 내부의 기관들을 체내에서 움직이게 만드는 내면의 의식이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움직입니다.

라마는 다시 물었다.

그러나 몸과 그 모든 구성 요소들은 단단합니다. 어떻게 미묘한 의식이 그것들을 움직입니까? 왜냐하면 단단한 것과 미묘한 것 사이에 어떤 접촉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말했다.

의심의 나무를 통째로 뿌리째 뽑아 버리는 다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 세상에는 단단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물은 어디에서든지 영원히 미묘하고 저항력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순수 의식으로서, 그 순수 의식은 마치 사람이 꿈 속의 대상들을 경험하듯이 겉으로 단단해 보이는 이 무질들을 경험합니다. 흙, 물, 바람, 공간, 산과 바다 등은 모두가 오직 미묘한 의식일 따름입니다. 마음과 나머지 모든 내면의 도구들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그대에게 옛날의 성현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미 같은 이야기를 다른 정황 속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잘 들어 보면, 그대는 여기서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이 순수 의식이지,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옛날에 인두라는 이름의 브람마나가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열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인두는 죽었고, 그의 아내도 그를 따라 저승으로 갔습니다. 자식들은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처럼 살 수 있게 해 줄 최고의 명상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망을 좇아 숲 속으로 들어가, 열성적으로 명상과 고행을 했습니다. 그들은 동상이나 그림처럼 있었습니다. 그들의 몸은 말라 죽어 갔고, 남은 것은 육식 동물이 다 먹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나는 창조주 브람마이다.', '나는 세상이다.' 혹은 '나는 전 우주이다.'와 같은 깊은 명상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들 열 명의 마음들은 형체가 없었지만 그러한 명상에 완전히 잠겨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들은 그들이 명상한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우주로서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입니다.

이 우주는 순수 의식입니다. 땅이나 산조차도 순수 의식입니다. 그 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두의 자식들의 마음들이 여기서 우주로 나타나게 되었듯이, 창조주 브람마 그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우주나 세상의 개념도 마찬가지로 이 우주로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원소들과 땅과 산들은 모두가 순수 의식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의식이라고 하는 도공은 그 자신의 몸(의식)이라는 녹로와 역시 그 자신의 몸인 점토의 도움을 받아서 이 우주를 만듭니다. 이 모든 피조물과 물질들이 의식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이 우주와 의식의 관계는 광채와 보석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브람만입니다. 이것은 확실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진리를 명확히 알게 될 때, 슬픔은 즉시 사라집니다. 이 진리를 모른다면, 슬픔은 확고하고 흔들림 없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사악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이 진리를 모릅니다. 그들의 눈에는 이 삼사라가 견고한 실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진리를 전혀 자각하지 못합니다. 어떤 형태도 없습니다. 존재도, 비존재도, 탄생도, 죽음도 없습니다. 실재라고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절대적인 평화인 지고의 존재는 이 우주를 그 자체 내에서 지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무한한 의식인 브람만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독자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그릇된 개념을 만들어 냅니까? 그것이 해방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수천 개의 눈과 기타 수족들을 가집니다. 그러나 해방된 상태에서는 그것은 전부이며, 평화이며, 평온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이제 그만 하겠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모든 삼계는 오직 순수 의식입니다. 그것들은 무조건적인 마음(사뜨바)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이 삼계에서 생생하게 마음에 떠올리는 원소들과 피조물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이 진실이라면, 단단한 몸 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자각되는 모든 것은 진실로 비(非)고체이며, 극도로 미묘한 의식입니다. 의식만이 의식 속에 존재합니다. 평화는 평화 속에 있습니다. 공간은 공간 속에 존재합니다. 지혜만이 지혜 속에 존재합니다.

몸이 어디에 있으며, 수족들은 어디에 있고, 내장의 기관들과 해골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몸은 공간과 같은 순수 의식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비록 이 몸이 고체로 보이지만 미묘합니다. 팔들도 의식입니다. 머리와 모든 감각 기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이 미묘하여, 단단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꿈과 같이, 무한한 공간 즉 브람만 속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한한 의식의 본성 그 자체 때문에, 그것은 이 우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인이 있기도 하고 원인이 없기도 합니다. 물론 원인이 없다면 어떤 결과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의식 속에서 구성하는 모든 것을 또한 자신이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꿈 속에서 모든 사물이 모든 방식으로 어디에서든지 나타나듯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이 세상은 모든 방식으로 어디에서든지 나타납니다.

인두의 자식들이 그들의 생각하는 힘 때문에 이 우주가 되었듯이, 하나는 다수가 됩니다. 또 비슈누 신의 헌신자들이 비슈누 신과 하나가 되듯이, 다수는 하나가 됩니다. 강은 다수이지만 바다는 하나입니다. 계절들과 해들도 다른 이름들로 불릴 수 있지만, 시간은 하나입니다. 이 몸도 또한 순수 의식이고, 그래서 그것은 꿈의 대상처럼 의식 속에 존재합니다. 또 꿈의 대상처럼, 그것은 비록 그 형태가 하나의 실체로서 명백하게 경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형태가 없습니다.

한 번의 수면이라도 어떤 때는 꿈의 경험으로서 간주되고, 또 다른 때는 꿈이 없는 깊은 수면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수면은 하나이고 분할될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의식도 그 의식 속에서 대상들에 대한  자각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으로서 경험되는 것은 오직 순수 의식뿐입니다. 보는 사람(경험자)과 대상(경험)과 보는 행위(경험하기)는 모두가 진실로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이 의식 속에 나타난 이 세상의 모습은 의식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하나의 환영입니다. 그것은 마치 악몽의 진실을 깨달을 때 악몽이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지 않듯이, 그 진리를 깨달으면 사라집니다. 여기서 우주의 무한한 대상들로서 나타나는 것은 하나의 무한한 의식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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