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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바위 안에 있는 세상

by Yuneelif 2018. 6. 26.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루드라가 마치 도취되기라도 한 듯이 공간 속에서 춤추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주를 소멸시키는 바닷물이 하나의 형상을 띠고서 그 형상으로 춤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 보십시오. 내가 루드라의 춤을 지켜보고 있을 때, 나는 그의 뒤편에 있는 한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태양도 없는데 어떻게 그림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하고 나는 자문했습니다. 내가 이 현상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그 그림자(여성)는 루드라 앞으로 걸어 나왔는데, 그녀도 또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세 개의 눈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검은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말랐습니다. 그러나 몸집은 거대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는 불이 나왔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모습을 한 캄캄한 밤이나 무한한 공간처럼 보였습니다. 그녀의 팔들은 우주의 가장 먼 곳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야위어서 그녀의 신경을 볼 수 있었고, 야위고 키가 컸기 때문에,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마치 누군가가 그녀를 그 신경줄로 동여매어 놓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신들과 태양들과 악마들의 머리로 만들어진 화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뱀 귀고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녀에게 팔이 하나 있다가도, 잠시 뒤에는 팔이 여럿이 있는가 하면, 또 잠시 뒤에는 춤추는 마룻바닥에 그녀의 여러 팔들을 내던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그녀에게 입이 하나 있다가도, 잠시 뒤에는 입이 여럿이 있는가 하면, 또 잠시 뒤에는 입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때로는 그녀에게 발이 하나 있다가도, 잠시 뒤에는 발이 여럿이 있는가 하면, 또 잠시 뒤에는 발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고서 나는 그녀가 깔라라뜨리(죽음의 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현들은 그녀를 깔리나 혹은 바가바따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불구덩이 같은 눈을 세 개 가지고 있었으며, 높은 광대뼈와 턱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별을 공중에 꿴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번쩍이고 빛나는 손톱을 가진 거대한 팔들로 사방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녀의 호흡은 너무나 강력하여 가장 큰 산들조차도 그 숨결에 날아갈 정도였습니다.

그녀가 춤을 추고 있을 때, 그녀의 몸집은 어마어마하게 팽창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내가 이 춤을 목격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장난삼아 산들을 줄로 엮어서 화환을 만들었습니다. 삼계는 그녀 신체의 세 부분(상체, 중간, 하체)에서 거울이 되었습니다. 여러 도시들과 숲들과 산들 등은 그녀가 몸(목)에 걸고 있는 화환의 꽃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수족들에는 여러 도시들과 마을들, 사계절, 삼계, 열두 달, 낮과 밤이 있었습니다. 다르마와 아다르마는 그녀의 귀고리가 되었습니다. 베다들은 최고의 지식이라는 우유로 가득 채워진 그녀의 젖가슴이었습니다. 그녀는 각기 다른 수많은 무기들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여러 신들과 그 나머지 모든 것을 포함한 열네 종의 존재들은 그녀의 신체에 나 있는 털(머리카락)이었습니다. 자신의 도시들과 마을들을 가지고 있는 이 모든 존재들은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에 즐거워하며,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 전체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그녀 안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우주 전체가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그녀의 몸에 비춰졌습니다. 내가 지켜보고 있을 때도 그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가 하면, 또다시 나타났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 춤이 무엇이었을까요? 별이 떠 있는 창공은 회전하고 있었습니다. 신들도 회전하고 있었고, 신들과 악마들도 모기들처럼 회전하고 있었습니다. 회전하는 창공은 미끈하게 늘어뜨린 그녀의 옷처럼 보였습니다. 그녀가 춤추는 동안 그녀의 몸에 나 있는 털들에 지나지 않는 그 큰 나무들(칼빠 나무)이 회전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웠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천국과 지구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태양과 달, 낮과 밤은 그녀가 춤을 추고 있을 때, 말하자면 그녀의 손톱에 비춰졌습니다. 히말라야, 메루 등과 같은 큰 산들도 즐거워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또 하나의 우주적 소멸이 바야흐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여신은 모든 종류의 행운과 완벽한 지식과 희생을 나타내는, 세가닥으로 만들어진 신성한 실을 몸에 걸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회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콧구멍을 들락거리는 공기는 "훔 훔"하는 커다란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신에게 달린 수많은 팔들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주 전체의 공기도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두 눈(그리고 마음 또한)은 피로해지고 혼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몸에 있는 거울들이 춤으로 흔들렸을 때, 산들도 무너지기 시작했고 신들과 천인들도 쓰러지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궁전들도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몸 안에 있던 모든 움직일 수 없는 대상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여러 바다들이 산꼭대기에서 춤을 추었고, 산은 텅 빈 공간 속에서 춤을 추었다는 것입니다. 공간은 지면 아래에서 춤을 추었고, 꽃이 가득히 핀 정원들과 도시들이 있는 대륙들은 태양의 천체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말하자면 그 여신의 거울 안에서 지푸라기처럼 떠돌고 있었습니다. 물고기들이 신기루 속에서 헤엄쳐 다녔고, 도시들이 공간 속에서 보였는데, 그것은 또한 산들을 잡고 있는 듯 했습니다. 하늘과 우주 소멸 때의 구름들이 무너져 내린 산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깔라라뜨리의 몸 안에서는 낮과 밤, 창조와 소멸, 순수와 불순물이 발견되었습니다. 모든 신 등이 고녀의 춤으로 넘어졌지만,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무한한 의식 때문에 분명히 흔들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의식 속에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마치 작은 아이가 매 순간 주의력을 옮겨가듯이, 춤을 추면서 그녀는 매 순간 우주를 창조하고 소멸해 갔습니다. 그녀는 때로는 가까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멀리 있고, 때로는 너무 작다가도, 어떤 때는 우주만큼 거대합니다. 그러한 것은 우주를 창조하는 그녀의 힘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녀는 죽음의 신을 운반하는 이동 수단인 물소의 뿔들을 잡고서, '딤밤 딤밤 빠짜 빠짜 잠야'와 같은 소리에 반주를 맞추어 춤을 춥니다. 그녀는 두개골들로 만든 화환을 쓰고 있으며, 그녀의 머리에는 공작새의 깃털이 하나 꽂혀 있습니다. 그녀는 파괴의 신 루드라에게 절을 합니다. 그가 그대를 보호해 주기를!

라마는 물었다.

신이시여! 모든 것이 파괴되었을 때, 그녀는 어떻게 춤을 추며, 누구와 춤을 춥니까?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 그러한 모든 화환과 그 나머지 것들을 가질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이분은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니며, 또한 그들이 춤을 추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또한 그러한 어떤 형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제1원인이며, 모든 원인 중의 원인인 영원하고 무한한 의식만이 무한으로서, 평화로서, 그리고 단순히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 속에 충만해 있는 것으로 존재합니다. 신(쉬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우주 전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때, 신은 직접 바이라바의 모습이나 형상을 띠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는 무한한 공간만큼이나 형상이 없습니다. 무한한 의식은 그 타고난 본성 때문에 그 모든 영광 속에서 분명히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의식이 형상 없이 갑자기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조차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금이 어떠한 형상도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식은 어떻게 의식 없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그대는 어떤 형태도 없는 금을 볼 수 있습니까? 어떤 것이 그 자체의 본성을 표현하지 않고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사탕수수가 어떻게 그 당분을 잃을 수 있습니까? 만약 사탕수수가 그 당분을 상실하면, 그것은 더 이상 사탕수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탕수수의 수액도 달콤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의식을 상실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의식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본질 상태로 있어야만 합니다.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 무한한 의식은 언제나 순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의 빛으로 빛을 발합니다. 그것은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능합니다. 세상의 주기가 끝날 때, 그것은 직접 공간과 지면 등으로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의 참화와 전면적인 파괴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어떠한 실재도 없습니다.

탄생, 죽음, 마야, 망상, 지적 장님, 비실재성, 실재성, 지혜, 속박, 해방, 선과 악, 지식과 무지, 유형과 무형의 상태, 순간과 영원, 불안정과 부동, 그대와 나와 타인, 진실과 거짓, 영리함과 어리석음, 시간과 공간과 활동과 물질에 대한 관념, 형상과 광경과 그에 관련된 생각, 지성과 감각에서 나오는 활동, 그리고 모든 것에 충만해 있는 다섯 가지 모든 원소, 이 모든 것이 순수 의식입니다. 이 순수 의식은 그 본성을 버리지 않고, 이 모든 것이 되는 것처럼(마치 공간이 실제로는 잘게 잘려지지 않지만, 잘게 잘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꼭 같이) 보입니다. 이 무한한 의식만이 쉬바 신, 하리, 브람마, 달과 태양, 인드라와 바루나, 야마, 꾸베라 그리고 불인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다양성을 보지 않고, 하나의 무한한 의식만을 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쉬바 신으로 묘사했던 그 우주적 형상은 순수 의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춤추는 루드라였습니다. 그러한 형상은 없었으며, 또한 형상 없음도 없었습니다. 의식의 덩어리 속에서 이 모든 것이 경험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는 지고의 평화인 그 공간(평면)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묘사했던 모습으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나 이외에 아무도 그런 식으로 그것을 보지 않앗습니다.

세상 주기의 종말로서, 루드라로서, 그리고 바이라바로서 묘사된 그 모든 것은 단지 가공의 현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나에 의해서만 그러한 형태로 경험이 되었습니다. 의식의 덩어리만이 존재합니다. 그 의식이 어떤 형태(바이라바)로서 자각되면, 그것은 그 형태로서 보여지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그러한 형태를 띠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단어와 그 의미(대상)에 대한 이해는 의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이해를 꾸준히 사용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러한 표현이 나타내는 대상이 절대적으로 실재한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이라바(깔라라뜨리)도, 바이라바(루드라)도, 우주의 소멸조차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공의 현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실재는 무한한 의식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나는 그대에게 루드라의 형상과 형상 없음에 대한 의미를 묘사했습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그 춤의 의미를 설명해 주겠습니다.

의식은 그 자체 내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움직임이 없다면, 그것은 '비실재적'인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의식은 그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움직임 때문에 루드라로 나타난 것입니다. 움직임은 의식의 본질 자체이며, 그러므로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의식이 그 자체 내에서 움직이는 것은 루드라 신의 춤으로 경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움직임은 단지 순수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심리적인 조건화 때문에 내게 신의 춤으로 경험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춤은 순수 의식 내의 움직임이었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비실재적인 모든 것이 우주의 소멸 기간 중에 파괴되면, 의식은 어떻게 작가하게 되며 무엇을 자각하게 됩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물론, 의식은 다른 것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관찰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 의식의 본질 자체를 가리키는 말에 불과합니다. 꿈 속에서 도시 등이 꿈꾸는 사람의 의식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도 의식 자체 내에서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자체의 움직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나'와 '너' 등의 관념들은 물론이고, 한 순간, 한 시대, 한 세상의 주기 등의 관념들이 그 안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이원성도, 일원성도, 공도 없으며, 또한 의식(주체로서)도, 무의식도 없습니다. 순수한 침묵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조차도 없습니다.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의식 그 자체의 차원(공간)은 바이라바 혹은 쉬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 그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은 마음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그의 역동적인 에너지입니다. 공기는 그 움직임 속에서 보입니다(경험됩니다). 불은 그 열로 알 수 있습니다. 순수 의식은 순수하고 고요하며, 그래서 그것을 쉬바라고 합니다. 이 쉬바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의 모든 소망들을 성취시켜 주는 신의 역동적인 에너지이고, 그 소망들이 비전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이 에너지나 힘이나 마야가 의식입니다. '그녀'는 살아 있는 힘이고, 그래서 그녀는 지바라고 불립니다. 이러한 우주의 나타남이 무한한 의식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그녀는 쁘라끄르띠 혹은 자연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보이거나 경험되는 모든 것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녀는 끄리야 즉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악에 대해 큰 분노를 나타내기 때문에 찬디까라고 합니다. 그녀는 푸른 연꽃의 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우뜨빨라라고 합니다. 그녀는 항상 승리를 거두고 있기 때문에 자야라고 합니다. 완벽함이 그녀에게 있기 때문에 그녀는 싯다라고 합니다. 자야는 비자야뿐만 아니라 자얀띠라고도 하는데, 이 모두가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녀는 정복하기 어려운 대상이기 때문에 쁘라지따라고도 합니다. 그녀의 형태나 참된 본성을 우리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두르가라고 합니다. 그녀는 신성한 단음절인 옴(OM)의 본질 자체이기 때문에 우마라고도 합니다. 그녀의 이름이 모든 사람에 의해 칭송되기 때문에 가야뜨리라고도 불립니다. 또한 그녀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모태이기 때문에 사비뜨리라고도 합니다. 그녀는 만물에 대한 사람의 비전이 확대된 것이므로 사라스와띠라고 합니다. 그녀는 흰(노란 혹은 붉은) 색깔을 띠고 있기 때문에 가우리라고 합니다. 그녀는 잠자는 사람 안에서 그리고 옴(OM)이라는 소리에 의해 일어난 내면의 미묘한 진동들에 대한 명상으로 일깨워진 사람 안에서 광선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인두깔라(달빛)라고 합니다.

그녀와 쉬바는 공간을 그들의 진정한 형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몸은 푸른색을 띠고 있습니다. 공간은 그들의 살이고 뼈이며 모든 것입니다. 그들은 공간 속에서 공간으로 존재합니다. 각기 다른 몸짓 등을 동반한 그녀의 춤은 모든 존재의 창조와 쇠퇴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녀가 자신의 에너지를 움직임으로써 여러 세상들을 창조하기 때문에 그녀는 수족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깔리는 말하자면 그녀 자신의 수족들에 내재된 힘으로 만물에다 그들의 특성들을 부여해 줍니다. 그러나 결코 그녀의 수족들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그녀의 참된 본성도 묘사될 수 없습니다. 공간 내에서의 움직임이 우리에게 공기로 경험되는 것과 꼭 같이, 의식의 역동적인 에너지도 그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활동이나 움직임에 의해 경험됩니다. 그러나 움직임이나 활동은 의식의 특성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하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고요합니다. 의식 속에 움직임이 있다는 관념은 바로 무지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러한 의식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개개의 장소에 있는 그대로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하지 않고 있을 때, 그것을 쉬바 신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본질적으로 신입니다. 그 다음의 것들은 이러한 의식의 역동적인 에너지의 수족들로서, 그녀 안에서 관념들로서 창조된 것입니다. 즉, 이 모든 창조된 세상들, 모든 대륙과 바다를 가진 지구, 숲들과 산들, 경전들, 각기 다른 형태의 신성한 의식들, 다양한 형태의 무기들이 사용되는 전쟁들, 그리고 열네 개의 모든 세상이 바로 그것들인 것입니다.

라마는 말했다.

오, 현지시여! 이 역동적인 에너지의 몸 안에 있는 수족들이라고 하는 이러한 것들이 실재합니까, 아니면 실재하지 않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이 모든 것은 정말로 실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가 이러한 의식의 역동적인 에너지의 작용으로 생겨나, 의식에 의해 모두 경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거울이 밖에 존재하는 진짜 대상들을 비추어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의식도 그 자체 내에서 그 자체 내에 있는 것을 비춰 줍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재합니다. 가상의 도시 혹은 그 도시의 가공적인 현상도 꾸준한 명상 때문에 일어나든지 아니면 의식의 순수성 때문에 일어나든지 간에, 오직 의식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이러한 창조는 그것이 하나의 반사물이나 꿈 속의 대상 또는 공상으로 간주되든지 간주되지 않든지 간에, 실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나라는 진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나의 의견입니다. 만약 그대가 "그러나 이 환영적인 세상들은 나에게 실재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이의를 제기한다면, 먼 나라로 떠나가버린 그 세상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것들은 그것들이 간 그곳의 마을 주민들에게는 쓸모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와 꼭 같습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은 참나에게 실재하지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식 에너지의 장(場) 안에서 존재하는 이 모든 창조들과 그 피조물들은 자각력이 있는 참나에게는 실재하지만, 자각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현재, 과거 혹은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관념과 꿈들은 모두가 실재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참나인 참나가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먼 나라로 간 사람이 그곳의 경치들을 볼 수 있는 것과 꼭 같이, 그것들 모두도 적절한 의식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경험됩니다. 그러나 의식 에너지의 움직임은, 마치 수면의 방해를 받지 않는 것처럼, 진리를 바꾸지 못합니다. 삼계에 대한 지각이 단지 비실재적인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지각이 방해받았다든가 방해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등의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가상의 도시는 실제의 도시가 아니라 상상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창조도 무한한 의식의 에너지에서 일어나는 관념에 불과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렇게 일어나는 관념이 바로 이 창조입니다.

깔라라뜨리와 신의 관계는 움직임과 공기의 관계와 같습니다. 텅 빈 공간 속에서 공기가 마치 형태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말하자면 신의 의지나 소망을 성취시켜 주면서 무한한 의식 속에서 움직입니다. 그러한 에너지의 움직임이 전혀 없을 때, 신만이 존재합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공간 속에서 계속 춤을 추는 동안, 우연의 일치(까마귀와 야자열매)로 그녀는 신과 접촉하게 됩니다. 이러한 접촉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녀는 약해지며 야위고 투명해집니다. 그녀는 우주의 형상을 버리고 산이 됩니다. 다시 그녀는 작은 도시가 되고, 그 다음 아름다운 나무가 됩니다. 그 다음 그녀는 공간처럼 되고, 마지막으로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물처럼 신 자신의 형상이 됩니다. 그때 신은 둘째가 없는 하나로서 빛을 발합니다.

라마는 물었다.

그러나 거룩한 현자시여! 왜 신성한 어머니가 이와 같이 평온하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그것은 쁘라끄르띠, 자간마야 등으로 알려진 의식의 역동적인 에너지입니다. 그녀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에너지보다 더 우월한 것은 의식이라는 참나 자체, 즉 지고의 평화인 의식 그 자체입니다. 이 역동적인 에너지는 신의 소망이라는 운동량이 있는 한 작용하고 움직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신을 보지 못하는 한 춤을 춥니다.

의식과 에너지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이기 때문에, 그 에너지는 신과 접촉하게(알게) 되고, 그리고 직접 신이 됩니다. 쁘라끄르띠가 신과 접촉하게 되면, 그녀는 쁘라끄르띠의 신분(움직임이 되는 상태)을 버립니다. 그녀는 마치 강이 바다에 흡수되어 하나가 되듯이, 신과 하나로 통합됩니다. 에너지의 움직임은 의식에서 일어나는 관념의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마치 그림자가 없어질 때 사람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듯이 의식 속으로 자연스럽게 되돌아갑니다. 거룩한 사람은 진리를 발견하기 전에는 도둑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러한 어울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의식도 그 자체의 참나를 보기 전에는 이원성을 즐깁니다. 의식의 에너지는 그것이 니르바나의 영광을 보기 전에는 춤을 춥니다. 그 에너지가 의식을 바라볼 때, 그것은 순수 의식이 됩니다.

사람은 지고의 존재를 바라보기 전에만 탄생과 죽음이 있는 이 삼사라를 떠돌아다닙니다. 그 지고의 존재를 본 뒤에는 즉시 그 지고의 존재 속으로 잠겨 버립니다. 모든 슬픔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주는 그것을 누가 다시 버리겠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이제 나는 그대에게 하나의 분명한 형상을 가지고 우주의 공간에 서 있는 루드라 신이 어떻게 그 형상을 버리고 완전한 평온을 얻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루드라는 우주라고 하는 의식의 분리를 관찰하면서 서 있었습니다. 한 순간에 그는 말하자면 '그 분리를 삼켜 버렸습니다.' 그 다음 루드라는 마치 그가 직접 공간인 것처럼 공간과 하나가 되어 홀로 서 있었습니다. 잠시 뒤 그는 구름처럼 가벼워졌고, 그의 크기도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신과 같은 비전을 통해 그가 원자보다 더 작아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고의 평화가 되었습니다. 그는 절대적인 브람만 즉 순수 의식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 라마여! 이와 같이 나는 그 바위 속에서 이 우주의 창조와 유지 그리고 소멸을 보았습니다. 나는 이 모든 가공의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한 그 바위를 보며 깔라라뜨리의 수족들처럼 그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세상과 피조물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깨어 있는 지성의 눈이나, 혹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신성한 눈을 통해서만 보입니다. 만약 사람이 육안으로 마치 바위가 멀리 있는 것처럼 그 바위를 본다면, 오직 바위만이 보일 뿐 어떠한 세상 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본 뒤에 나는 나의 내면의 시선을 똑같은 바위의 다른 부분으로 돌렸습니다. 다시 한 번 나는 전 우주가 생겨나는 것과 그 우주의 나머지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의 모든 부분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보았습니다. 그와 꼭 같이, 나는 그 산에서 발견한 바로 그 많은 바위들 속에서도 무수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들 중 어떤 세상에서는 브람마가 그의 창조의 작업을 막 시작했는가 하면, 어떤 세상에서는 신들이 창조주의 마음에서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세상에서는 인간이 거주했는가 하면, 또 어떤 세상에서는 신이 하나도 없거나, 악마가 하나도 없는 곳도 있었습니다. 또 사띠야유가(황금시대)가 지배하는 세상이 있는가 하면, 깔리유가(철의 시대)가 지배하던 세상도 있었습니다. 또 사람이 노령과 죽음을 정복한 세상이 있는가 하면, 정의로운 삶을 가로막는 어떤 방해물도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은 세상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서 이 우주의 상태를 보았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짙은 어둠과 무지를 보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라바나와 싸우는 라마도 보았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시타를 유괴하는 라바나도 보았습니다. 어떤 세상은 신들이 통치했는가 하면, 어떤 세상은 악마들이 지배했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제가 이번 생에 몸을 받아 나오기 전에 라마로서 존재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그대와 나는 지금까지 이곳에 반복해서 태어났습니다. 물론 절대적인 실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대도 나도 이 세상도 여태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수면 위의 물결들 같습니다.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잘못된 지각과 기만적인 이해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얼마 동안 무한한 의식을 곰곰이 생각한 뒤, 나는 갑자기 마치 나무가 그 씨앗 속에 있는 것과 꼭 같이 이 모든 우주가 나 자신 속에, 나 자신의 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눈을 감고 잠을 잘 때, 그는 그의 내면의 비전이 만들어 낸 내면의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수면이 끝나면, 그는 깨어나고, 그의 비전은 다시 깨어 있는 상태의 세상 속으로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가슴 내에서 이 우주 속으로 들어갈 때 이우주는 경험됩니다.

나는 이미 순수한 공간 속에 이 우주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 우주의 다른 양상들을 보고 싶어서, 나 자신의 다른 부분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내면에 있던 지성의 빛이 그 '우주'를 향해 방향을 돌리자, 그 안에서 그 우주에 대한 경험이 일어났습니다. 오, 라마여! 그대가 잠을 자고 있는 상태에 있든, 아니면 깨어 있는 상태에 있든 간에, 그대가 그대 자신의 참나의 의식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그것이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식 덩어리라는 것을 압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순수한 공간 즉 텅 빔만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게념이 일어납니다. 그것의 압축은 붓디 즉 이성이라고 하고, 또 그것(붓디)의 압축은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소리의 순수한 원소와 또한 다른 순수한 원소들 즉 딴마뜨라(순수한 원소)들을 알거나 경험합니다. 이러한 경험들로부터 다양한 감각들이 일어납니다.

이 우주에는 어떤 질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질서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된 대상들의 본질과 특성들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난 적절한 관념을 통하여 그러한 특성들을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 우주를 관찰하고 있을 때, 나는 이미 원자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한 줄기 광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만 생각해도 나는 거칠어졋습니다. 이러한 둔함 속에 감각 경험들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보는 기관은 눈이 되었고, 내가 본 것은 장면(대상)이 되었으며, 이 경험의 결과는 봄이었습니다. 내가 보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시간(지속)이 되었고, 내가 보는 태도는 방법이나 순서가 되었으며, 내가 보는 '곳'은 모두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것들은 확신에 의해 창조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자면, 의식이 '그 눈을 뜰' 때, 다시 말해, 그 자체의 타고난 잠재력들을 알게 될 때, 딴마뜨라들이 일어났고, 그 다음 실제로 순수한 공이나 공간과 다름없는 모든 감각이 생겨났습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나는 "소리를 들어 볼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리로부터 또한 청각 기관이 생겨났습니다. 그 다음 촉각, 미각, 후각 등이 생겨났습니다. 비록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다섯 원소들과 다섯 감각들이 생겨날 때, 그것들에 상응하는 지식과 경험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들은 '형상'(실체)이 없었으며, 또한 환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그러한 관념들과 경험들을 명상하면서 서 있을 때, 내 존재의 상태는 그대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나'라는 것 즉 자아감으로 알려집니다. 자아감의 이러한 관념이 더욱 투박해지면, 그것은 붓디 즉 지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투박해지면, 그것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비록 내가 순수 의식이지만, 나는 미묘한 몸(아띠바히까)과 안따까라나(마음과 지성 등으로 구성된 내면의 도구)를 획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심지어 공기보다도 더 미묘하고 더 비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것이 생겨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상당한 기간 동안 이 같은 관념적인 존재로 계속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내가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대에게 존재하는 이러한 관념 때문에 나는 말이라고 하는 이러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대는 마치 잠자는 사람이 꿈 속에서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것을 듣습니다. 아이가 내뱉는 첫 소리가 옴(OM)입니다. 그러므로 옴은 소리들 가운데서도 으뜸의 소리로 간주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꿈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모든 것이 그대에게는 나의 언어처럼 보입니다.

나는 절대적인 브람만입니다. 나는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완전한 사람이며, 이 우주의 창조자이며, 모든 사람의 스승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생각들과 관념들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창조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정말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나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우주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본 이 모든 것은 단지 순수한 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순수한 경험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것(지구 등)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어떤 것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의식입니다. 브람만 속에는 어떤 세상도 없습니다. 그러나 브람만은 하나의 세상을 보거나 경험합니다. 이러한 지각은 하나의 사실이나 실재가 아니라, 단지 관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진리는 물질적인 대상만을 볼 수 있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대가 그대의 미묘한 눈으로 볼 때, 그대는 진리로서 그리고 순수한 브람만-니르바나로서 있는 그대로의 이 우주를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공간을 경험할 때 땅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나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 땅에서 나는 내가 무한한 의식이라는 작가을 버리지 않고 무수한 우주의 존재를 경험했습니다. 나는 그 땅 안에서(내 안에서) 가장 놀랄 만한 지상의 현상들과 사건들을 보았습니다. 사실상, 나는 '나'(땅)를 쟁기로 가는 농부도 경험했고, 불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와 시원하게 흐르는 빗물도 경험했습니다. 나는 로까로까 산(이 세상의 경계들)이 존재하는 무서운 공간이 되었고, 무수한 존재들의 활동과 움직임을 경험했습니다. 각기 다른 종류의 무구한 존재들, 예컨대 신들, 악마들, 인간들, 동물들 그리고 벌레들이 나를 채웠습니다. 나는 땅 위에 존재하는 산들과 숲들 등으로 가득 찼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땅의 의식 속에 있는 동안, 나는 모든 강 등을 가지고 있는 지구의 경험들을 경험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것을 경험했고, 여기에서 나는 춤추는 소녀들의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굶주린 사람들의 울음소리와 부유한 사람들의 기쁨, 가뭄과 지진, 전쟁과 파괴, 아름다운 새와 호수, 고통 받는 벌레들, 무성하게 자라는 숲, 그리고 명상하는 현자들이 있었습니다. 오, 라마여! 나의 이 흙으로 된 몸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일어났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이와 같이 당신이 땅에 대한 명상을 하고 있을 때, 그 땅은 실재한 것입니까? 아니면 단지 마음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었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진실로 이것은 정신적 작용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땅이 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정신 작용이 아니었으며, 또한 내가 실제로 땅이 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마음을 제쳐 놓고는 땅도 없는 것입니다. 그대가 어떤 것을 실재적이거나 비실재적인 것으로 생각하든지 간에, 그것은 단지 정신적 작용에 불과합니다. 나는 오직 무한한 순수 의식입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관념은 상깔빠 혹은 생각, 혹은 상상이라고 합니다. 그 관념이 마음이요, 그것이 땅이며, 그것이 이 세상이며, 그것이 창조주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공상의 도시가 하늘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그러한 관념 때문에 공간에 나타납니다.

내가 땅으로서 경험했던 것은 하나의 단순한 개념에 불과했고, 그러므로 정신적인 작용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계속적인 생각 때문에 그것은 지구인 것처럼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땅의 차원은 정신적인 작용입니다. 그것은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관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공입니다. 이러한 관념이 얼마 동안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으면, 그것은 분명히 그 마음의 상태를 버리고, 그것은 이처럼 견고하고 물질적이며 딱딱하고 단단한 땅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의 시작부터 견고하고 물질적인 존재로 간주되게 되었습니다. 꿈 속의 대상이 꿈꾸는 사람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이 현상계도 순수 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관념은 순수 의식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개념 그 자체도 없으며, 자신도 세상도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보일 때,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의 깊게 관찰되지 않으면, 세상은 생겨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수정이 색상을 반사시킬 의도도 없이 색상을 반사하는 것과 꼭 같이, 무한한 의식은 그 안에서 전 우주를 반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정신적인 것도 물질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 지구처럼 보이는 것은 오로지 순수 의식입니다. 지구라고 하는 상대적 혹은 실존적인 실재를 얻게 된 것은 삼계에 있는 무수한 존재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잘못된 관념 때문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이며, 그 모든 것은 이 모든 것 안에 있다.' 이러한 깨달음과 함께 나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따라서 나는 나의 가슴속에서 지구의 차원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보고 경험한 모든 것은 내 가슴속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 속에서 '나'와 다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나 우주가 있고, 어디에나 브람만이 있으며, 어디에나 공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구의 차원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물론 그것은 진실로 아무것도 없는 무(無)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 의식입니다. 꿈의 도시처럼, 그것은 사실상 실제로 창조된 적이 없습니다.

다양성도 없으며, 다양성 없음도 없습니다. 존재도 없으며, 존재 없음도 없습니다. '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언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우주는 경험되지만, 그것은 진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해,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면, 존재하는 것은 브람만뿐입니다. 그것이 꿈의 도시와 같을 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땅의 명상을 통하여 땅의 차원을 경험했듯이, 나는 또한 물의 명상(쁘리뜨비 다라나)을 통해 물의 차원을 경험했습니다. 물의 명상을 통하여 나는 물이 되었습니다. 비록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지만, 나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적절한 소리를 내면서 오랜 시간 동안 바다 속에 거주했습니다. 나는 초목과 덩굴식물의 몸 안에 거주했고, 그들 안에서 내 자신의 수로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살아 있는 존재들의 입 속윽로 들어가서 그들 몸 안의 중요한 기관들과 합류했습니다. 나는 강바닥을 따라 쉼 없이 흘렀고, 흘러가는 도중에 댐에서 쉬기도 했습니다. 나는 수증기가 되어 올라갔고 구름이 되어 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나의 친구인 번갯불과 얼마간 쉬었습니다.

나는 마치 무한한 의식이 모든 존재 속에 거주하듯이, 모든 존재들 속에 물의 원소로서 살았습니다. 혀끝의 수많은 미뢰와 접촉하면서, 나는 각기 다른 맛들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순수 지식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맛은 내가 경험한 것도 아니요, 몸이 경험한 것도 아니며, 다른 어떤 것이 경험한 것도 아닙니다. 그 경험은 경험의 대상으로서 내면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자체로 그것은 가짜입니다.

여러 꽅들이 개화하면, 나는 이슬이 되어 그들 위에 내려앉아, 벌들이 그들의 몫을 챙겨간 뒤에 남아 있던 모든 달콤함을 맛보았습니다. 나는 맛에 대한 자각, 즉 무의식처럼 보이지만 의식이 되어 열네 가지 부류의 존재들 속에 살았습니다. 작은 물방울이나 물보라의 형태들을 취하고서, 나는 바람이 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다니는 것을 즐겼습니다. 따라서 나는 물과 같은 그런 상태로 다양하고 재미있는 경험들을 했습니다. 나는 수백 개의 세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이 형태를 가지고 있든, 아니면 어떤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든 간에, 그것은 순수한 의식이며 무형의 공입니다. 오, 라마여! 그대도 무(無)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순수한 지고의 의식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 다음 나는 불의 원소를 명상함으로써 불의 원소가 되엇습니다. 불이나 빛은 주로 사뜨바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항상 빛을 냅니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왕이 도둑들을 그의 앞에서 도망가게 하듯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나는 모든 좋은 특성을 파괴하는 어둠의 불행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빛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그 자식들에게 형태를 부여하듯이, 빛은 모든 것에 형태를 부여합니다. 지옥에서는 빛이 최소한의 수준으로 빛나기 때문에 더 큰 어둠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빛만이 있으며, 항상 있습니다. 빛은 활동의 연꽃을 개화시키는 태양입니다.

나는 금 등에서는 좋은 색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남자들 속에서는 활력과 용기가 되었으며, 보석 속에서는 그들의 불처럼 번쩍번쩍 빛났으며, 비구름 속에서는 번갯불이 되었으며, 정열적인 여성 속에서는 그들의 눈에서 반짝이는 빛이 되었으며, 나는 사자의 힘이 되었습니다. 나는 신들 속에서는 악마들에 대한 증오가 되었으며, 악마들 속에서는 신들에 대한 증오가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존재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되었습니다. 나는 태양이 되는 경험뿐만 아니라, 달과 별, 보석, 불(우주 소멸의 불을 포함한), 번갯불 및 등불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내가 불이 되었을 때, 타다 남은 재는 나의 이빨이 되었고, 연기는 나의 머리카락이 되었으며, 연료는 나의 식량이 되었습니다. 나는 대장간에서는 쇠를 벌겋게 달구는 불이 되었고, 그 쇠를 내려쳤을 때는 나는 불꽃이 되어 튀었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오, 현자시여! 당신이 이와 같이 불의 원소가 되었을 때, 당신은 행복했습니까, 아니면 불행했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마치 사람이 잠을 잘 때 비록 그는 지각력이 있는 존재이지만 일시적으로 지각력이 없어지는 것처럼, 의식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것이 그 자체를 원소들(흙 등)로 생각할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의식이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지는 그러한 구분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흙, 물 그리고 불의 상태들에서 어떤 것을 경험했다하더라도, 나는 오직 브람만으로서만 경험했습니다. 만약 내가 사실상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면, 흙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내가 어떻게 경험할 수 있겠스니까? 지각력이 있는 사람은 "나는 잠자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는 지각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사람이 깨어나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되면, 몸의 물질성은 사라집니다. 미묘한 몸을 가지면, 그는 어디에서나 모든 것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미묘한 몸이 바로 순수한 지성입니다. 그 자신의 소망으로 이 지성을 사용하여 다른 상태로 들어가면, 그는 분명히 불행이나 슬픔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꿈 속에서 보거나 경험한 세상이 무지의 어둠에 싸여, 실재하지 않는 것과 꼭 같이, 경험하는 다른 원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상상하는 불꽃의 강물을 만지면, 그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원소들에 대해 경험하는 경우도 그와 같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 다음 나는 바유 다라나(자기 자신을 바람이라고 명상함)를 통하여 공기의 원소가 되었습니다. 나는 풀들과 나뭇잎들, 덩굴식물들과 밀짚에게 춤추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시원한 산들바람을 가볍게 불어 보내면서 나는 젊은 여인들의 사랑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나는 내가 뿜어내는 장기간에 걸친 더위와 허리케인과 회오리바람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쾌락의 동산에서는 달콤한 향기를 실어 보냈고, 지옥에서는 불꽃을 날려 보냈습니다. 나의 움직임은 너무나 빨라서 사람들은 마음과 바람이 같은 형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신성한 강가의 강물들과 함께 흘러갔는데, 그것이 힘들 수도 있었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과 피로를 덜어 줄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습니다. 나는 음파들을 전달해 줌으로써 공간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간의 소중한 친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존재의 가장 중요한 기관들 속에 살았습니다. 나는 불의 비밀들도 알았으며, 또한 불의 친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형체를 가진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생명의 숨결이 되어 그들의 몸이라는 기계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친구가 되는 동시에 그들의 적도 되었습니다.

비록 나는 모든 존재 앞에 서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주가 소멸되는 기간에도, 나는 거대한 산들을 들어 내 마음대로 던질 수 있었습니다. 나는 공기로서 다음의 여섯 가지 작용을 했습니다. 즉 하나의 덩어리로 모으고, 말리고, 떠받치거나 지지하고, 진동시키거나 움직임을 일으키고, 향기를 실어 나르고, 그리고 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몸들을 만들고 파괴하는 임무들에 헌신했습니다.

공기라는 원소가 되자, 나는 공기의 각 분자 내에서 하나의 우주 전체를 지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우주 속에서 마치 이 우주에서처럼 또다시 모든 원소 등을 보았습니다. 그것들은 실재하는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우주적 공이나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한 세상들에서도 신들과 행성들이 있었고, 산들과 바다들이 있었으며, 출생과 노령과 죽음이라는 가상의 개념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껏 그러한 모든 세상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천인들과 현자들 같은 무수한 종류의 존재들이 그토록 많은 수의 파리들과 모기들처럼 내 몸에 의지해 있었습니다. 나의 허락을 받고 그들은 다양한 형태들과 색상들을 획득했습니다. 내가 그것들과 접촉할 때, 그것들은 무한한 기쁨을 얻었으나, 그것들은 나를 볼 수 없었습니다.

지옥들은 나의 발이고, 지구는 나의 복부이며, 그리고 천국들은 나의 머리였지만, 그때도 나는 나의 원자 구성 원소인 본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사방으로 퍼져 나갔으며, 모든 일을 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의 참나였습니다.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순수한 공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것이 되는 경험과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경험을, 다시 말해, 형태가 있는 경험은 물론이고, 형태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경험을 했는데, 그 동안 나는 줄곧 이 모든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의식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경험했던 우주와 같은 그런 우주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마치 사람이 꿈 속에서 무수한 대상들을 꿈꾸는 것처럼, 나는 모든 원자들 내에서 수많은 우주들을 경험했고, 그 수많은 우주의 원자들 내에서 또다시 수많은 우주들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직접 이 모든 우주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내가 모든 것의 참나이고, 이 모든 것에 충만해 있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그렇게 둘러싸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마치 '불 속에 열이 있는' 것처럼(불 속의 열이란 비록 세 단어로 되어 있지만, 단지 하나의 사실을 나타낼 뿐이다)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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