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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익슈바꾸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6. 26.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마누의 가르침을 받은 익슈바꾸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오, 라마여!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이십시오.

라마는 물었다.

그러한 것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본성이라면, 거기에는 무엇이 그토록 비상하고 경이롭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 공중을 날 수 있는 능력과 같은 영적인 힘들을 얻은 것에도 뭐가 그토록 비상하고 놀랍겠습니까? 무지한 사람의 본성 속에는 침착성이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특성은 마음이 순수하고, 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특징에 의해 특징지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혼란과 망상이 전혀 없습니다. 삼사라는 끝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성욕과 노여움, 슬픔과 망상, 탐욕과 그러한 불행을 초래하는 속성들이 크게 약화되어 있습니다.

신은 개별성(지바)을 취합니다. 원소들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우주 속에서 일어납니다. 신으로부터 나온 개인은 마치 원소(대상)들이 신에 의해 창조되기라도 한 듯이 그 원소들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모든 지바들이 일어나서 어떤 분명한 이유도 없이 작용을 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들 자신의 개별적인 활동이 그 다음 그들이 경험하는 쾌락과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자기 자신의 이해의 한계가 개인 활동의 원인입니다.

사람의 제한된 이해력과 그 자신의 개념들이 굴레의 원인이고, 해방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개념(상깔빠)을 버리십시오. 만약 그대가 여기에서 그 어떤 것에라도 집착을 가지게 되면, 그대는 속박당합니다. 반면에 만약 그대가 모든 것에 집착을 끊으면, 그대는 자유롭습니다. 그대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즐기든 간에, 그대는 정말로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즐기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아시고 자유를 누리십시오.

이 모든 개념은 마음속에 존재합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제압하십시오. 노련한 세탁업자는 더러움을 가지고 더러움을 씻어 냅니다. 가시는 다른 가시에 의해 제거됩니다. 독은 독을 해독합니다. 지바는 짙은 것, 미묘한 것, 지고의 것이란 세 가지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육신은 짙은 형태입니다. 개념들을과 조건화들을 가진 마음은 미묘한 몸입니다. 이 둘을 버리고, 실재인 지고의 것 즉 순수하고 변화되지 않는 의식에 의지하십시오. 이것이 우주적인 존재입니다. 앞의 두 개를 확실히 버린 뒤에, 그 우주적 존재에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라마는 물었다.

깨어 있을 때나 꿈을 꿀 때나 깊은 수면에 들었을 때, 우리에게 인지되지도 않고 늘 작용하고 있는 뚜리야의 상태를 부디 설명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자아감이나 자아의식이 없으며, 그리고 자유로운 그 순수하고 평온한 상태를 뚜리야(제4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것은 해방된 현자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단절 없는 목격자의 의식입니다. 그것은 생각의 움직임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 깨어 있는 상태나 꿈꾸고 있는 상태와는 다릅니다. 또한 그것은 둔함과 무지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깊은 수면의 상태와도 다릅니다. 자아감을 버리면 뚜리야가 나타나는 완벽한 균형의 상태가 일어납니다.

우화 하나를 들려주겠습니다. 그것을 들으면 비록 그대가 이미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대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숲 속에 위대한 현자가 살았습니다. 이 비범한 현자를 보고 사냥꾼은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 현자시여! 내 화살을 맞고 부상 당한 사슴 한 마리가 이쪽으로 왔습니다. 그 사슴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를 알려 주십시오." 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숲 속에 사는 신성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은 평화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아감이 없습니다. 감각들의 활동을 가능하게 해 주는 자아감과 마음이 이미 멈추었습니다. 나는 깨어 있는 것과 꿈과 깊은 수면을 모릅니다. 나는 뚜리야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으면 볼 수 있는 대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냥꾼은 그 현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길을 따라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나는 그대에게 뚜리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해 주렵니다. 뚜리야는 변화되지 않는 의식으로, 그것만이 존재합니다. 깨어 있음과 꿈과 수면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것들이 멈추면, 마음은 소멸됩니다. 사뜨바만이 남게 됩니다. 요기들은 바로 거기에 도달하기를 갈망합니다.

이것이 모든 경전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떤 아비디야(무지)도 없고, 마야(환영)도 없습니다. 브람만만이 존재합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공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을 순수 의식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끼리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개념을 버리십시오. 마음을 크게 '약화'시키고 지성을 평화롭게 하면서, 생각의 움직임이 없는 니르바나에 조용히 머물러 계십시오. 마치 그대가 귀머거리요, 벙어리요, 장님인 것처럼 참나에 조용히 머물러 계십시오. 안으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밖으로는 적절한 활동을 하십시오. 마음의 존재만이 행복이요, 마음의 존재만이 불행입니다. 마음을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이 모든 것이 사라지게 하십시오. 매력적인 것과 매력이 없는 것에 어떤 영향도 받지 마십시오. 바로 이런 정도의 자기 노력을 기울이면, 이 삼사라는 반드시 극복됩니다. 쾌락과 고통을 의식하지 않고, 심지어 그 둘 사이에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그대는 슬픔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정도의 적은 자기 노력만 기울여도, 그대는 무한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라마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사람은 어떻게 요가의 일곱 상태를 밟아 갑니까? 그리고 이 일곱 상태의 특징들은 무엇입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인간은 세상을 수용하든지(쁘라브르따), 아니면 세상을 부정하든지(니브르따)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자는 "이 해방이라는 게 도대체 무얼까? 나에게는 이 삼사라와 그 안에서의 삶이 더 낫다."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세속적인 의무들을 행해 갑니다. 아주 많은 윤회를 거듭한 뒤에, 그는 지혜를 얻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활동들이 무의미한 반복임을 깨닫고, 그러한 활동들에 인생을 허비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상의 활동들에서 물러나 보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는 니브르따로 간주됩니다.

"내가 어떻게 초연을 길러 이 삼사라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이와 같이 그는 끊임없이 탐구합니다. 하루하루 이러한 생각 자체가 그에게 초연을 일으키고, 그의 가슴에서는 평화와 기쁨이 일어납니다. 그는 시장의 활동들에는 관심이 없지만,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활동들에는 관여합니다. 그는 죄짓기를 두려워합니다. 그의 말씨는 때에 적합하여, 부드럽고 진실하며 감미롭습니다. 그는 첫 번째 요가 부미까(요가의 상태)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분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합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경전들을 발견할 때마다 경전들을 수집하여 연구합니다. 그의 변함없는 탐구는 삼사라의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런 사람만이 구도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 그는 비차라, 즉 탐구라는 두 번째 요가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는 경전들과 영적인 수행에 아주 정통한 성현들과의 교제에 열심히 의지합니다. 그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압니다. 그는 허영, 질투, 망상 그리고 탐욕과 같은 죄악을 버립니다. 그는 스승들로부터 요가의 모든 비밀을 배웁니다.1

그 후 그는 쉽게 아삼상가, 즉 무집착 또는 자유라고 하는 세 번째 요가의 상태로 올라갑니다. 그는 세상과 떨어져서 숲 속을 떠돌아다니며, 마음을 조용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경전들에 충실하고 덕행을 견지함으로써 그는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이러한 무집착이나 자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보통의 유형과 상위의 유형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 유형의 자유를 실천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느낍니다. "나는 행위자도 아니요, 향락자도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신의 보호 아래 과거의 업 때문에 일어난다. 고통이 있든 쾌락이 있든, 행운이 있든 불운이 있든 간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만남과 헤어짐은 물론, 정신적 고통과 신체적 질병을 포함한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시간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는 진리를 탐구합니다. 그는 보통의 무집착이나 자유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러한 요가의 방법을 부지런히 실천하고, 거룩한 성현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죄악의 무리들을 피할 때, 진리는 명백히 드러납니다. 이렇게 이 삼사라의 바다 너머에 있는 유일한 본질 즉 진리인 지고의 것을 깨달을 때, 그는 "나는 행위자가 아니다. 신만이 행위자이다. 과거에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허망하고 무의미한 말들을 버리고 내면의 마음에서 침묵을 지킵니다. 이것이 상위의 무집착 또는 자유입니다. 그는 위와 아래의, 내부와 바깥의, 유형과 무형의, 지각력이 있고 지각력이 없는, 모든 의존 관계를 버렸습니다. 그는 지지대도 없는 무한한 공간 그 자체처럼 빛납니다. 이것이 상위의 자유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평화와 만족, 미덕과 순수, 지혜와 참나 탐구를 즐깁니다.

요가의 첫 번째 단계는 덕행으로 가득 찬 순수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말하자면 우연의 일치로 나타납니다. 거기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대단한 열의와 근면과 노력으로 그것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탐구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탐구를 부지런히 실천함으로써, 그는 자유라는 세 번째 단계로 올라갑니다.

라마는 물었다.

사악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 삼사라의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 성현들과의 교제를 즐기지 않는 무지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또한 요가의 첫 번째나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상태에 있을 동안에 그 사람이 죽게 되면, 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바시슈타는 말했다.

수많은 생을 거듭한 뒤에, 무지한 사람은 우연의 일치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이 삼사라를 경험합니다. 그의 가슴속에서 공평성이 일어나면, 삼사라는 물러갑니다.이러한 요가를 불완전하게라도 수행하기만 하면, 과거 죄악의 효과는 소멸됩니다. 수행 중에 몸을 버리게 되면, 그는 천국에 올라가 있다가 수행하기 좋은 때가 되면 다시 태어납니다. 매우 빨리 그는 요가의 사다리를 다시 올라갑니다.

이 세 가지 상태는 '깨어 있는 상태'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서는 의식의 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숭배 받을 만한 사람이라야 됩니다. 만약 무지한 사람이 그를 본다면, 그는 영감을 받습니다. 올바른 활동들을 하고 약을 피하는 사람은 숭배 받을 만합니다(아르야). 이 숭배 받을 만한 신성함은 씨앗 상태로 요가의 첫 번째 상태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두 번째 상태에서 발아하고, 세 번째 상태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와 같이 숭배 받을 만한 사람의 지위를 얻은 뒤에 죽는 사람과, 고상한 생각을 분명하게 함양했던 사람은 오랫동안 천국의 기쁨을 누리다가, 요기로서 다시 태어납니다. 요가의 첫 번째 세 가지 상태를 부지런히 수행함으로써 무지는 소멸되고, 지혜의 빛은 가슴속에서 일어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요가의 네 번째 상태에서, 요기들은 구분이 전혀 없는 마음으로 만물 속에서 하나를 봅니다. 구분은 사라졌고 하나만이 간단없이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이 마치 꿈인 것처럼 그것을 바라봅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오직 구분되지 않은 실재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깊은 수면에 비유됩니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비록 그가 다양한 외부의 활동들을 하더라도 그 자신의 내부에 안주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한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나아간 뒤에, 그는 뚜리야라고 하는 여섯 번째 상태에 도달합니다. 이때 그는 "나는 실재하지도 않고,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자아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원성과 일원성을 초월해 있다. 모든 의심들이 멈추었다."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등불의 그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기름 없는 등불인 니르바나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등불이 단지 그려진 그림에 불과하듯이, 그는 기름 없는 등불과 같습니다. 그는 안도 비어 있고 바깥도 비어 있어, 마치 텅 빈 배처럼 비어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안도 가득 차 있고 바깥도 가득 차 있어, 바다에 잠긴 가득 찬 배처럼 차 있습니다.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몸에서 분리된 해방된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다양하게 묘사되어 왔습니다.

이 일곱 가지 상태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슬픔에 이르지 않습니다. 숲을 황폐화시키면서 숲 속을 떠돌아다니는 무서운 코끼리 한 마리가 있습니다. 만약 그 코끼리를 죽이면, 인간은 이 모든 일곱 가지 상태에 성공적으로 도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욕망이 바로 그 코끼리입니다. 그것은 육체라는 숲 속을 떠돌아다닙니다. 그것은 관능성에 의해 미치게 됩니다. 그것은 조건화와 경향성(바사나) 때문에 불안합니다. 이 코끼리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몸)을 파멸시킵니다. 그것은 욕망, 바사나(경향성 혹은 마음의 조건화), 마음, 생각, 느낌, 애착 등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임을 깨닫는 데서 나오는 용기나 결의의 무기에 의해 살해되어야 합니다.

오로지 대상적인 존재를 믿는 한, 욕망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존재한다.'는 느낌, 이것은 오로지 삼사라입니다. 그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 목샤(해방)입니다. 이것이 냐나 즉 지혜의 본질입니다. '대상'의 자각은 욕망을 일으킵니다. 대상을 작가하지 못할 때, 욕망은 끝납니다. 욕망이 끝날 때, 지바는 그 자기 한계를 버립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람은 지금까지 경험하고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립니다. 나는 생각이 없고 개념이 없는 상태가 최고라고 두 팔을 들어 선언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보다 무한하게 낫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요가입니다. 그 상태에 머물러, 적절한 활동들을 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나'와 '나의 것'이란 생각들이 지속되는 한, 슬픔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멈출 때 슬픔도 멈춥니다. 이것을 알고서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2

발미끼는 바라드바자에게 말했다.

라마는 이러한 최고의 지혜의 진수를 듣고 압도당한 나머지, 잠시 동안 희열의 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질문도 하지 않았고, 대답을 요청하여 그 대답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는 참나 지식의 최고 상태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라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오, 신이시여! 이와 같이 라마가 최고의 상태에 도달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말로 기쁩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무지하며 사악한 기질을 가진 우리가 브람마와 같은 신들조차 도달하기 어려운 그 상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습니까?

발미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라마와 바시슈타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전부 다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을 잘 생각해 보라. 왜냐하면 그것이 또한 내가 그대에게 주는 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의식 속에는 세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구분이 없다. 내가 그대에게 보여 준 비밀들을 실천함으로써 구분의 개념에서 벗어나라. 깨어 있는 상태와 잠자는 상태는 모두 이 세상의 일부분이다. 깨달음의 특징은 순수한 내면의 빛이다. 이 세상은 무에서 나와 무로 사라지며, 그 본질 자체는 공이며, 그것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시작도 없는 그릇된 자기 한계 때문에, 이 세상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무수한 혼란을 일으킨다. 그대는 그 무한한 의식에 대한 진리를 반복적으로 자주 회상하지 않고 자기 한계라는 독약을 먹고 그 결과 심리적인 조건화를 받고 있기 때문에,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망상은 그대가 깨달음을 얻은 현자의 곁에 다가가서, 그들로부터 올바른 지식을 얻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사랑하는 이여! 처음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끝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은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현상계는 꿈과 같다. 그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유일한 실재는 무한한 의식이다. 삼사라나 무지의 바다에서는 시작도 없는 자기 한계의 가능성 때문에 '나'라는 개념이 일어난다. 그 후 곧 생각의 움직임이 '나의 것', '애착', '혐오' 등과 같은 다른 개념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개념들이 일단 의식 속에 뿌리를 내리면, 끝없는 불행과 슬픔의 제물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다양성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내면의 평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누가 살고 있고, 누가 죽었으며, 누가 왔는가? 왜 그대는 이러한 그릇된 개념들 속에 빠져 헤매고 있는가? 하나의 참나만이 실재하면, '또 다른 것'이 들어설 여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브람만이 이 세상처럼 보인다는 (밧줄이 뱀으로 보이는 것처럼) 이론은 단지 유치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다른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진리 속에 영원히 안주하고 있다.

발미끼는 계속 말했다.

은둔을 싫어하는 무지한 사람들은 슬픔에 잠겨, 이따금 미소를 지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행복하여 언제나 미소를 짓는다. 진리나 참나는 미묘하므로, 그것은 무지에 가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지어 그대가 이 세상의 원자 같은 실체를 믿는다 하더라도, 참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슬퍼하는가? 실재하지 않는 것(무지 등)은 어느 때고 생겨나지 않으며, 또한 실재나 참나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 때문에 혼란이 일어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전 우주의 스승이신 신을 숭배하라. 그대의 사악한 업은 그대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고, 그대를 속박하는 올가미가 되어 버렸다. 그대의 마음이 마음 없음(사뜨바)의 상태가 될 때까지, 이름과 형상에 대한 숭배를 받아들여라. 그 후에 그대는 절대자에 대한 명상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 다음 잠시 동안이나마 내면의 빛으로 참나와 함께 내면의 참나를 바라보라.

지고의 것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노력과 올바른 활동을 통하여 신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다. 과거의 습관과 경향성은 매우 강하다. 그러므로 단순한 자기 노력으로는 불충분하다. 심지어 신들도 필연적인 것(운명)을 무시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생각과 표현 너머에 있는 이 세상의 질서(니야띠)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영웅은 수많은 환생들을 거친 후에도 깨달음은 확실히 온다고 확고히 믿고 있다. 사악한 행동들로 이 삼사라에 속박이 되며, 올바른 행동으로 해방을 얻는다. 현재의 올바른 행동으로 과거의 나쁜 행동의 효과는 약화된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모든 행동을 브람만에게 내맡기면, 그대는 결코 두 번 다시 이 삼사라의 수레바퀴를 타고 돌지는 않을 것이다.

보라, 이 세상의 무지한 사람들은 시간이란 감독에 의해 이 세상에서 각기 다른 역할들을 맡도록 되어 있다. 시간은 창조하고, 보존하고, 파괴한다. 왜 그대는 재산 등을 잃으면 동요하게 되는가? 그리고 왜 그대는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하는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서, 이 우주의 춤을 목격하라. 신과 신성한 브람마나들과 구루에게 헌신하는 사람들과, 경전의 교의를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은 지고의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는다.

바라드바자는 말했다.

신이시여! 나는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았습니다. 나는 포기보다 더 훌륭한 친구가 없고, 삼사라보다 더 큰 적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거룩한 현자이신 바시슈타가 주신 가르침의 핵심을 당신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습니다.

발미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 바라드바자여! 이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단순히 내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두 번 다시 이 삼사라에 빠져 죽지 않을 것이다.

발미끼는 계속 말했다.

금지된 이기적인 행동을 버리고, 또한 감각들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쾌락을 버린 뒤에, 마음을 잘 통제하면서 내면이 평화로워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 그 다음 그는 마음의 평정에 도움이 되는 편안한 자세로 부드러운 자리에 앉아야 한다. 그 다음 그는 마음과 감각들의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 그 다음 그는 마음이 완벽한 평화를 얻을 때까지 옴(OM)을 반복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마음의 정화 등을 위해 쁘라나야마를 수행하라. 부드럽고 서서히 외부의 대상들과의 접촉으로부터 감각들을 거두어들여라. 몸과 감각들과 마음과 붓디(지성)의 근원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세밀히 조사하고, 그것들이 그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라. 첫째로 나타난 우주적 존재(비라뜨)에 조용히 머물러 있어라. 이후, 나타나지 않은 것에 조용히 머물고, 그 다음에는 만물의 지고의 원인에 안주하라.

이것은 어떻게 이 모든 요소들이 그들의 근원으로 돌아가는지를 보여 준다. 물질적인 몸(살 등)은 흙의 요소이므로 땅으로 돌아간다. 피 등은 액체이므로 물의 원소로 돌아간다. 몸 안의 불(열)과 빛은 불의 원소에 속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의 원소로 돌아간다. 공기는 우주의 공기에게 바쳐진다. 공간은 공간에 흡수되어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감각들도 그들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청각은 공간으로 돌아가고, 촉각은 공기로, 시각은 태양으로, 미각은 물로 각각 돌아간다. 생명의 호흡은 공기 속으로 돌아가고, 언어의 힘은 불로, 손은 인드라에게, 이동의 힘은 비슈누에게, 생식기는 까슈야파빠에게, 배설 기관은 미뜨라에게, 마음은 달에게, 그리고 붓디는 브람만에게 각각 돌아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자기 자신('나')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각각의 신체 기관을 주재하는 신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것들 모두가 그것들의 근원으로 돌아갔으므로, 그대 자신을 우주적 존재(비라뜨)로 보라. 양성을 다 구비한 자(의식 에너지)로서 우주의 가슴속에 내재해 있는 신이 그 지지자이다.

이 우주에 있는 흙, 물, 불, 공기, 공간은 그 하나하나가 그 앞의 것보다 두 배나 더 크다. 흙은 물에 옹해되고, 물은 불에, 불은 공기에, 그리고 공기는 공간에 용해된다. 공간은 만물의 원인인 우주적 공간 속으로 흡수되어 하나가 된다. 요기는 잠시 동안 그의 미묘한 몸 속에 머물면서 모든 자기 한계를 버린 뒤에, '나는 만물의 참나'라고 느낀다. 이 우주가 의지해 있고 이름과 형상이 없는 그것을 가리켜 어떤 사람들은 쁘라끄르띠(물질)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야(환영)라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원자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한다. 그것은 또한 아비디야(무지)라고도 한다. 그들 모두가 논쟁으로 혼란스럽다. 이 점에 있어서, 만물은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그것들은 거기에서 일어나 이 세상의 순환 주기 동안 그러한 것으로 존재한다. 그것들은 에테르와 공기와 불과 물과 흙이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이다. 우주의 소멸은 그 역순으로 일어난다. 뚜리야는 세 가지 상태(깨어 있고, 꿈꾸고, 잠자는)를 버림으로써 얻어진다. 명상 속에서는 미묘한 몸마저 지고의 존재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바라드바자는 말했다.

신이시여! 저는 이제 미묘한 몸을 벗어나, 희열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저는 지고의 참나이며, 스스로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개의 힘을 소유하고 있는 분할할 수 없는 참나입니다. 마치 불 속으로 던져진 불이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불이 되고, 또 바다 속으로 던져진 지푸라기 등이 소금이 되는 것과 꼭 같이, 지각력이 없는 이 세상도 그것이 무한한 의식 속으로 바쳐질 때 그 무한한 의식과 하나가 됩니다. 마치 바다 속으로 던져진 소금 인형이 그 이름과 형상을 버리고 바다와 하나가 되는 것과 꼭 같이, 또 물이 물과 혼합되고, 버터기름이 버터기름과 혼합되듯이, 그와 꼭 마찬가지로 저도 이 무한한 의식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나는 영원하고 편재하며,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분할할 수 없고 움직임도 없으며, 모임과 흩어짐이 없지만 그 생각이 유형화되며, 장점과 단점이 없으며, 이 우주의 근원이기도 하며, 그리고 두 번째가 없는 오로지 하나인 최고의 빛인 그 지고의 브람만입니다.' 이와 같이 명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은 그 동요를 멈추게 됩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멈추면, 참나는 그 자체의 빛으로 빛을 발합니다. 그 빛을 받으면 모든 슬픔은 끝나며, 참나 그 자체가 경험하는 희열이 있습니다. '참나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라는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자각이 있습니다.

발미끼는 말했다.

사랑하는 친구여! 삼사라라고 알려진 이 망상이 끝나기를 바란다면, 모든 행동을 포기하고 브람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바라드바자는 말했다.

오, 구루시여! 깨달음에 관한 당신의 이야기가 저를 완전히 깨어나게 했습니다. 저의 지성은 순수하고, 현상계는 제 앞에 전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참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들에게는 해야 할 어떤 임무라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런 임무도 없는 것입니까?

발미끼는 말했다.

해방을 바라는 사람들은 결함이 없는 그런 행동만을 해야 하며, 이기적이고 사악한 행동들을 그만둬야 한다. 마음의 속성들을 버릴 때, 마음은 무한한 절대자의 속성을 띠게 된다. 지바가 해방을 얻는 경우는 사람이 '나는 몸과 마음과 감각들을 초월한 그것이다.'라고 명상할 때이며, 고통과 쾌락의 개념들이 없고 '나는 행위자이다.'라든가 '나는 향락자이다.'라는 생각들이 없을 때이며, 모든 존재들이 참나 안에 있고 참나가 모든 존재들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이며, 그리고 깨어 있고, 꿈꾸고, 깊은 잠에 든 상태들을 버리고 초월적인 의식에 머물러 있을 때이다. 그것이 무한한 의식인 희열의 상태이다. 평화로 가득 찬 그 감로의 바다에 몰입하라. 다양성의 바다에 빠져 익사하지 말라.

이와 같이 나는 지금까지 그대에게 현자 바시슈타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수행을 통해 마음을 안전시켜라. 지혜와 요가의 길을 따라가라. 그러면 그대는 모든 것을 깨달을 것이다.

발미끼는 계속 말했다.

라마가 완전히 참나 속에 몰두해 있는 것을 보고서, 비슈바미뜨라는 현자 바시슈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창조주의 아들이여! 오, 거룩한 현자시여! 당신은 정말로 위대합니다. 당신은 이러한 샥띠 빠따(영적 에너지의 직접적인 전달)를 통해 구루임을 증명했습니다. 한 번 쳐다 보거나, 한 번 만져 보거나, 아니면 대화나 은총으로써 제자의 마음속에 신의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구루입니다. 그러나 제자의 지성이 깨어나는 것은 그 제자가 세 가지 불순물을 버리고 예리한 지성을 얻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오, 현자시여! 라마가 몸을 의식할 수 있는 상태로 되돌려 주십시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삼계의 행복과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모인 모든 현자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라마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바시슈타는 비슈바미뜨라에게 "부디, 라마가 진실로 어떤 분인지를 그들에게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비슈바미뜨라는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마는 신의 최고의 인격입니다. 그는 창조주요, 보호자이며, 구원자입니다. 그는 신이며, 모두의 친구입니다. 그는 다양한 모습으로 현현하여, 때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서, 때로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인 것처럼 모습을 드러냅니다. 진실로 그는 실들의 신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들은 그의 부분적인 나타남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마 신을 아들로 둔 이 다샤라타 왕에게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라마의 손에 머리가 떨어질 라바나에게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오, 현자 바시슈타여! 부디 그를 육신의 의식 상태로 되돌려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라마에게 "오, 라마여! 지금은 쉴 때가 아닙니다. 일어나시어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십시오. 사람들이 아직도 속박 당하고 있을 때, 요기가 참나에 완전히 흡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라마는 이 말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있었다. 그러자 바시슈타는 라마의 수슘나 나디를 통해 그의 가슴속으로 들어갔다. 라마에게 쁘라나의 움직임이 있었고 마음은 작용하기 시작했다. 내면의 빛의 형상을 하고 있던 지바는 몸의 모든 나디에 그 광채를 뿌렸다. 라마는 조금 눈을 뜨고, 자기 앞에 있는 바시슈타를 바라보았다. 라마는 바시슈타에게 "내가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아야 할 일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씀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라마는 그의 머리를 현자의 발치에 가져다 놓고, "여러분 모두 경청하십시오. 참나 지식보다 더 나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루보다 더 나은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곳에 모인 모든 현자들과 천인들은 라마에게 꽃을 뿌려 주며, 그에게 축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집회에서 떠나갔다.

오, 바라드바자여! 나는 이와 같이 지금까지 그대에게 라마의 이야기를 했다. 이 요가의 수행을 통하여, 최고의 희열의 상태에 도달하라. 라마와 바시슈타 간의 이 대화를 언제나 귀담아 듣는 사람은 그의 삶이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해방을 얻고 브람만의 짓기을 얻게 될 것이다.

라마는 물었다.

사람이 행동을 버리고 행동을 수행할 의지마저 버리면, 몸은 약해집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사람이 그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정신적 조건화와 개념들을 버리는 것은 오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지, 죽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깔빠나(개념 혹은 정신적 활동)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단지 자아감입니다. 그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자아감은 버려집니다. 외부의 대상에 의해 자기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개념이 깔빠나인 것입니다. 그 개념이 공이나 공간의 특성을 띨 때, 그 개념은 버려집니다. 기억은 깔빠나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합니다. 기억은 지금까지 경험되지 않은 것은 물론, 경험된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않을 것을 '기억하는' 일을 버리고, 반쯤 깨어 있는 아기처럼 참나에 자리 잡소 계십시오.

마치 도공의 녹로가 과거의 여세 때문에 계속 회전하듯이, 순수한 사뜨바로 이미 번해 버린 그 마음을 작용시키지 말고, 또한 어떤 개념들도 마음에 지니지 말고, 계속 여기 참나 상태로 살면서 활동하십시오. 나는 두 팔을 치켜들고서 "개념들을 버리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사람들은 왜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까? 망상은 정말로 대단히 강력합니다. 그 망상의 세력 및에 있을 때는, 자기 손바닥에 비차라(참나 탐구)라는 보석을 쥐고 있는 사람도 그의 망상을 버리지 못 합니다. 이것만이 최고의 선입니다. 즉 대상들을 전혀 자각하지 않고, 개념들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고의 선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참나 속에 평화롭게 안주한다면, 그대는 의외로 황제의 지위마저 풀잎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장소로 가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의 발은 어떠한 마음의 활동 없이도 작용을 합니다. 그러한 두 발처럼 움직이십시오. 그리고 지금 여기서 활동을 하십시오. 보상, 즉 행동의 결과들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즐거움이나 이익을 얻겠다는 동기도 없이 지금 여기서 활동하십시오. 그러면 감각의 대상들은 매력이 없어지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존재할 것입니다. 대상들과의 접촉으로 쾌감이 일어날 때라도, 그 감각들이 그대를 내면의 참나에게로 나아가게 하십시오. 행동의 결과들을 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행동하지 않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아니면 상황에 따라 그 둘 다에 헌신하든지, 아니면 그 어느 것에도 헌신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속박하는 것은, 하려고 하는 의지이거나 혹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의지가 없는 것이 해방입니다. 사실상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의 지성이 이 어떤 것도 알아차리게 하지 마십시오. 영원히 진실로의 그대의 본질 그대로 계십시오.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자각이 슬픔의 근원이요, 그 자각이 없는 상태가 해방입니다. 그대의 흥미를 끄는 일을 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마치 점토로 만들어진 군대가 점토 조각상에 지나지 않는 것과 꼭 같이, 이 우주 전체도 비이원적인 순수한 참나입니다. 이러한 비이원적인 참나만이 존재하므로, 대상이 도대체 무엇이며, 그 대상은 누구에 의해 지각된다는 말입니까? 그 지고의 참나를 제외하고는, '나'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마는 말했다.

그렇다면, 신이시여! 왜 사악한 행동은 버려야 하고, 좋은 행동에 헌신해야 합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그러나 오, 라마여! 우선 행동이 무엇인지를 나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행동은 어떻게 일어나며, 그 행동의 근원은 무엇이며, 그 근원은 어떻게 파괴해야 합니까?

라마는 말했다.

신이시여! 확실히, 파괴해야 할 것은 완전히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뿌리 자체마저 없어져야 합니다. 몸이 지속하는 한, 행동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현상계라는 이 삼사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몸의 사지(행동 기관)들로부터 행동이 일어납니다. 바사나나 마음의 습관은 행위 기관들의 씨앗과 같습니다. 감각들을 통해 작용하는 이 마음의 습관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감각들도 마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또 마음은 제한된 의식인 지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리고 이는 다시 만물의 뿌리인 제한 없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브람만이 이 제한 없는 것의 뿌리이며, 브람만에게는 뿌리가 전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행동은, 그 자체를 객관화시킴으로써 행동을 일으키는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지고의 상태입니다.

바시슈타는 말했다.

그러한 경우에, 오, 라마여!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몸을 받은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든지 혹은 무지하든지 간에, 그 몸이 계속 살아 있는 한 마음은 계속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바(개별성)라고 알려진 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내가 한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적절한 활동을 해야 합니다. 내면의 지성이 깨어나면, 이 세상에 대한 지각은 사라지고 심리적인 자유나 무집착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해방이라고 합니다. 객관적이거나 제한적인 자각을 버릴 때, 브람만이라고 알려진 평화가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지각이나 자각을 활동이라 하며, 그 활동은 이 삼사라 즉 현상계로 확대됩니다. 그러한 자각이 없어지는 것을 해방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몸이 살아 있는 한, 활동을 버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버림은 오히려 활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가치가 있는 것은 버려질 수 없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기를 멈출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자각(경험)이 무자각이나 무경험이 될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사실, 존재하는 것은 계속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험과 무경험도 또한 그렇게 간단하며, 또 쉽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단어와 그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거짓과 망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슬픔을 일으킵니다. '경험'에 대한 이 자각을 버리고, 최고의 지혜에 대한 자각 안에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후자가 바로 니르바나입니다.

좋고 나쁜 행동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좋고 나쁜 행동들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행동의 뿌리가 소멸될 때까지 그 뿌리를 탐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치 흙에서 나온 모든 것이 흙과 다르지 않은 것과 꼭 같이, 의식에서 나온 모든 것도 의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동성은 액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브람만 안에서는 마음과 의식 사이에서조차 어떤 구분도 없습니다. 자각이라고 알려진 활동은 그의식 속에서 어떤 원인도 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행동의 뿌리는 자아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몸에 있습니다. 자아감에 대한 이해가 버려지면, 그 자아감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행동의 뿌리도 소멸됩니다. 이와 같이 행동이 없어져 버린 사람들은 포기하거나 소유하려고 열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질 자체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은 자연발생적입니다. 사실상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마치 홍수에 떠밀려 내려간 대상들이 아무 의지력도 없이 이동해 가듯이, 그들도 단순히 그들의 행동 기관들과 함께 작용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그 조건화를 버릴 때 대상들도 그 유혹을 잃게 됩니다.

오로지 이러한 이해나 지성의 각성만이 행동을 없애는 길입니다. '하는 것'과 '그만두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행동의 포기'라는 말로 알려진 것은 행동과 경험의 자각을 멈추는 일이요, 조건화를 버림으로써 평화와 균형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버리지 않음(혹은 잘못된 버림)이 버림(포기)으로오인될 때, 무지한 동물과 같이 존재하는 망상에 빠진 사람들은 활동의 포기라는 악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행동의 포기에 대한 진리를 바르게 이해한 사람들은 활동이나 활동하지 않음과는 전혀 관계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집에 살거나 숲 속에 사는 것에 관계없이 지고의 평화를 즐깁니다. 평화로운 사람에게 집은 숲과 같으며, 불안한 사람에게는 심지어 숲도 혼잡한 도시와 같습니다. 평화로운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이 세상 전체는 평화로운 숲과 같습니다. 수많은 생각들로 불안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온통 슬픔의 바다인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자아감이 조용해지면, 현상계는 사라집니다. 그러면 마치 기름 없는 등불이 꺼지는 것과 꼭 같이, 객관적인 지각도 자연스럽게 버려집니다. 포기한다는 것은 활동의 포기가 아닙니다. 진정한 포기는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해라는 등불이 자아감이나 소유욕이라는 연료의 공급을 받지 않을 때,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은 참나 지식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아감과 나의 것이라는 소유욕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포기도, 지혜도, 평화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라는 개념 대신에 '자아감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해를 함으로써, 아무 장애 없이 나라는 개념을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것을 의심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는 이것이다.' 혹은 '나는 이것이 아니다.'와 같은 이 모든 개념은 의식과 별개가 아닙니다. 의식은 공간이나 공과 같습니다. 어떻게 그 속에 망상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도 없고, 망상에 빠진 자도 없으며, 혼란도 없고 혼란에 빠진 자도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 이유는 진리를 명확히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보십시오. 평화롭게 고요 속에 머물러 계십시오. 이것이 바로 니르바나입니다.

그대가 자아감의 개념을 마음에 지니게 되는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그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또한 그 자아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이 삼사라의 바다를 넘어서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본성을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은 최고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런 사람이 영웅인 것입니다. 여섯 개의 적(성욕, 분노, 탐욕 등)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인간의 옷을 입은 당나귀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개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인간(뿌루샤)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한 대상에 대한 지각이 그대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 '나는 이것이 아니야.'라는 이해를 하면서 그것을 대면하십시오. 그러면 그러한 무지한 지각은 즉시 사라질 것입니다. 사실상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혼란이나 망상에 빠진 이해를 없애는 것만이 필요합니다. 이 망상이 반복적으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 망상은 사라진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그대의 마음속에 일어나든지 간에, 마치 바람 때문에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과 꼭 같이,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생각의 지지물을 없애 버리십시오.

탐욕과 수치와 허영과 망상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이 경전을 읽어도 어떠한 이득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경전을 읽는 것이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바람 때문에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과 꼭 같이, 자아감도 참나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자아감은 참나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자아감은 실재 즉 바탕인 참나 때문에 빛을 발합니다. 참나는 어느 때나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참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있다거나 없다고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고의 참나는 지고의 참나 속에 존재하고, 무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 속에 존재하며, 그리고 평화는 평화 속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전부이며, 그 밖의 '나'나 '세상'이나 '마음' 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니르바나(해방)는 비르바나입니다. 평화 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신(神) 속에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니르바나는 또한 공간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아니르바나(무해방)이기도 합니다. 자아감의 비실재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일어나면, 무기나 질병 등의 공격을 견디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상계(자아감인)의 씨앗이 소멸되면, 현상계도 그 씨앗과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거울이 습기를 만나면 흐릿해지는 것과 꼭 같이, 참나도 비실재적인 자아감을 만나면 가려지게 됩니다. 이 자아감이 이 현상계의 기타 모든 것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 자아감이 사라지면, 마치 태양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말끔히 걷히면 그 태양이 빛을 발하는 것과 꼭 같이, 참나도 그 자체의 빛에 의해 빛을 발합니다. 바다 속으로 던져진 대상이 바다 속에서 용해되듯이, 참나 속으로 들어간 자아감도 그 참나 속에서 용해되어 사라집니다.

자아감이 존속하는 한, 동일한 브람만 즉 무한한 의식이라도 그것은 다양한 이름들을 가진 다양한 대상들로서 빛을 발합니다. 그러다가 자아감이 조용해지면, 브람만은 무한한 순수 의식으로서 빛을 발합니다. 자아감이 이 우주를 만든 씨앗입니다. 그 씨앗을 기름으로 튀기면, '세상'이나 '속박' 혹은 '자아감'과 같은 말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항아리가 깨어지면 오직 점토만이 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아감이 사라지면 다양성도 사라집니다. 이 세상의 대상들이 태양이 떠오르면 지각되는 것과 꼭 같이, 현상계의 다양성도 자아감이 떠오름과 동시에 일어납니다. 오, 라마여! 나는 자아감의 비실재성에 대한 깨달음인 참나 지식 이외의 어떤 대안도 볼 수 없습니다. 그 밖의 어떤 것도 그대의 진정한 행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개별화된 자아감을 버리고, 그대의 참나를 우주 전체로 바라보십시오. 그 다음 그 우주 전체가 참나 즉 브람만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세상의 관념들이 불러일으킨 모든 동요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이 자아감을 정복하지 못한 사람은 지고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이 순수하면, 마치 한 방울의 기름이 깨끗한 천 속으로 스며들듯이, 영적인 이해에 대한 가르침이 그 가슴속으로 스며들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그대에게 옛날 성현의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겠습니다. 옛날 옛적에, 나는 부순다에게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무지하고 망상에 빠져 있다고 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순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한 천인(天人)이 언덕 마루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지했고 감각적인 쾌락에 전념했지만, 그는 매우 긴 수명을 보장해 주는 그런 올바른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탄생이나 죽음이 없는 그러한 상태에 도달해야겠다는 이해력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결심한 뒤에, 그는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천인은 나에게 적절한 경의를 표한 뒤에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오, 신이시여! 이 감각들은 그들을 충족시키려는 갈구 때문에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각들이 바로 끝없는 고통과 괴로움의 근원입니다. 나는 이것을 깨달았으므로, 당신을 찾아 이렇게 왔습니다."

천인은 계속 말했습니다.

부디 무한하고 성장과 쇠락이 없으며, 그리고 순수하고 시작도 없으며 끝도 없는 그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말하자면, 잠을 자고 있었던 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이제야 비로소 참나의 은총으로 깨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무시무시한 망상의 불길로부터 나를 구해 주십시오.

존재들은 이곳에서 태어나 생명을 다한 뒤에는 죽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르마를 얻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니요, 해방을 얻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망상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쾌락의 중심지는 이러한 망상을 오로지 강화시킬 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즐기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천국의 모든 쾌락을 보고 즐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쾌락들에 대한 욕망이 식별력이라는 불길에 의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이라는 감각들이 일으킨 폐해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반복되는 쾌락들을 어떻게 다루면 되겠습니까? 오감들을 즐기면서 천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진정 만족하는 이는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온갖 쾌락들과 더불어 이 세상을 다스린다 한들, 거기에 특별히 만족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소멸과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디 내가 얻어야 할 것이 있다면, 내가 영원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제 나는 여기에서의 괴로움을 증대시키기만 하는 이 감각적 경험들의 유독한 본성을 명확히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각들이라는 이 막강한 군대와 싸움을 할 결의가 되어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세상에서 진정한 영웅입니다. 이 군대의 사령관은 자아감입니다. 그 군대는 감각적 경험들이라는 기병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는 이 육신이라는 도시로 완전히 포위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거룩한 성현들마저 이 감각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하는 자만이 진정 위대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살로 된 자동 장치(기계)에 불과합니다.

감각적 욕망이라고 알려진 이 질병의 치료제로는 쾌락에 대한 욕구를 단호히 버리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치료제도 없습니다. 어떠한 약도, 어떠한 순례도, 어떠한 만뜨라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강도들이 밀림에 매복하여 혼자 여행하는 사람을 습격하듯이, 나도 지금까지 이 감각들로부터 매복 기습을 당해 왔습니다. 감각들은 불결하며, 큰 재앙을 초래합니다. 그것들이 탐욕을 일으킵니다. 그 감각들을 극복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감각들이 있으므로 윤회하여 다시 태어납니다. 감각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적이요, 어리석은 사람들의 친구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주 찾지만, 고상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악귀처럼 무지의 어둠 속을 마음대로 떠돌아다닙니다. 그것들은 실속이 없고 무기치하며, 마른 대나무와 같아서 태우기에 적합할 뿐입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간절히 기원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유일한 안식처입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을 구원해 주는 구세주입니다. 부디, 깨우침을 주시는 당신의 말씀으로 이 무서운 삼사라의 바다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 세상에서 당신과 같은 현자들에게 헌신하는 것은 슬픔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부순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천인이여! 그대가 영적으로 깨어 있고 또한 그대 자신을 향상시키고 싶어 하니, 그대는 정말로 복을 받았습니다. 그대의 지성은 완전히 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가 쉽게 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느낍니다. 이제 내가 말하려고 하는 내용을 잘 들으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라든가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대의 참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이런 것을 찾으려고 할 때 그대는 그것들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도, '너'도, '이 세상'도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때, 그것은 슬픔이 아닌 행복에 도움이 됩니다. 무지가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상당히 오랜 탐구를 한 뒤에도 우리는 현상계가 무지에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무지가 현상계에서 나온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 둘은 실제로 똑같은 것의 두 면에 불과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무한한 의식 즉 브람만입니다. 그래서 현상계는 '그것이 있다.' 혹은 '그것이 없다.'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이 현상계를 만든 씨앗은 자아감입니다. 왜냐하면 현상계라는 이 나무는 자아감으로부터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감각들과 그것들이 대상들, 다양한 형태의 조건화, 산이나 바다 등이 있는 지구와 천국, 시간의 구분들, 그리고 모든 이름과 형상들은 현상계라는 이 나무의 각기 다른 부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씨앗이 불타 없어지면, 그것은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씨앗을 어떻게 태워 없앨 수 있을까요? 그대가 자아감의 본질을 탐구하면, 그대는 그것이 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의 불로 그 자아감은 태워 없앨 수 있습니다. 자아감의 개념을 마음에 가짐으로써, 현상계는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현상계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잘못된 개념을 버릴 때, 자아감은 사라지고 참나 지식이 일어납니다.

이 현상계가 처음 시작할 때, 자아감은 하나의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아감의 존재와, '나'와 '너'라는 실재와, 이원성이나 비이원성을 믿을 수 있습니까? 진리를 깨달으려고 진지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스승으로부터 그 진리를 충분히 전수받고 경전들을 통하여 그 진리를 연구한 뒤에는 쉽게 이 참나 지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개념이나 생각(상깔빠)들이 확대된 것입니다. 그것은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바탕에 의식이 깔려 있는 하나의 시각적인 환영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재하기도 하고, 또한 실재하지 않기도 하는 것으로 여거집니다. 팔찌의 경우에 금이 진리이며, 팔찌는 단지 하나의 관념이나 개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라는 환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모두 그 관념의 변화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이나 천국의 즐거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그의 마지막 환생이 됩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오, 천인이여! 이 현상계의 대상들을 보고서, 무한한 의식이 그것들로 현현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순수한 참나에 안주해 계십시오. 둔함은 의식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비록 그러한 둔함이 의식과 상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똑같은 바람이라도 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불을 끌 수도 있는 바람이 있는 것과 꼭 같이, 의식도 동일한 의식이지만 둔함은 물론이고 의식도 촉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의식이나 그대의 각성된 지성으로 하여금 자아감('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대의 의식은 대상을 만들어 내지 않고, 절대적인 의식에 흠수되어 하나가 됩니다. 바로 그것이 비할 데 없는 브람만인 것입니다.

이 우주 전체가 이러한 무한하고 나누어지지 않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를 깨닫고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사람이 이 세상의 다양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무지 때문에 두 눈이 멀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모든 다양한 대상들은 시각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이 공간 속에서 나무를 본 만큼 실제적입니다.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이 우주는 마치 물 속에 비친 불이 그 불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과 꼭 같이 그 무한한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와 꼭 같이 지식과 무지 사이에도 진정한 구별이 전혀 없습니다. 브람만은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둔함이나 무의식은 의식에서 나타납니다. 이 둔함은 마치 앞으로 일어날 파도들과 물결들이 잔잔한 수면 위에 존재하는 것과 꼭 같이 브람만 속에 하나의 잠재력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에는 물결들을 일으킬 힘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브람만도 이 세상을 '창조'할 어떤 동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원인이 없을 때는 세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것은 신기루와 같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브람만만이 존재합니다. 브람만은 평화이며,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브람만은 그 어떤 것을 창조하지도 않습니다.

오, 천인이여! 그대는 공간처럼 나누어지지도 않고 나눌 수도 없는 하나밖에 없는 그 브람만입니다. 그대는 아는 자입니다. 그대가 무엇을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의심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대가 태어나지도 않은 무한한 의식임을 깨달을 때, 모든 무지와 어리석음은 사라지고, 이 현상계도 사라집니다. 지고의 브람만(그것은 무한하므로 어디에서든지 존재한다)이 존재하는 곳이면, 그 어디에서든지 이 현상계는 나타납니다. 풀잎 하나, 나무, 물, 그리고 이 우주의 만물 속에 똑같은 브람만 즉 무한한 의식이 존재합니다. 브람만의 본질은 설명할 수 없고, 정의를 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 속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브람만의 본질을 말한다는 것조차 적절하지 못합니다. 이 자아감이 사라질 때 경험되는 그것은 자아감의 본질을 탐구할 때 그 자아감이 활개를 치는 그런 사람이 도달하는 브람만과 꼭 같습니다. 그 후 곧 그것은 의식 속으로 용해됩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날카로운 무기나 발가벗은 여자와 접촉을 해도 똑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은 지고의 상태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대상들과 접촉을 해도 똑같은 반응이 나오는 그런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영적인 수행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참나를 아는 자는 마음의 병이나 심리적인 고통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마치 독약을 삼켰을 때 그 독약이 독약으로서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 신체적인 병을 일으키는 것과 꼭 같이, 참나도 참나 즉 나누어지지 않는 의식으로서의 그 본질을 버리지 않고 지바가 됩니다. 그와 꼭 같이, 의식도 무의식이나 둔함의 성질을 띱니다. 어떤 것이 사실은 브람만과 전혀 다르지 않지만, 브람만 안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독약도 계속 독약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체에 유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참나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생겨나고 죽습니다.

사람의 지성이 대상적 지각에 빠져들지 않을 때만, 그는 마치 이 삼사라의 바다가 송아지의 발자국인 양 그 바다를 건널 수 있습니다. 이때 그것은 신의 도움이나 다른 어떤 수단들에 의해서도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편재하는 참나와 만물에 내재해 있는 그 참나 안에서, 어떻게 마음이나 자아감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언제 어디서나 어느 누구에게도 선이나 악도 없으며, 쾌락이나 고통도 없으며, 불운이나 행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행위자가 아니며, 어느 누구도 어떤 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아감이 참나에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공간(거리)이 공간에서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감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며, 실재하지 않습니다. 공간에도 오직 공간성만이 있습니다. 그와 꼭 같이 의식만이 의식 속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나는 자아감('나')이라고 하는 그것이 아니기도 하고, 또한 그것이 아닌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식은 매우 미묘하기 때문에, 모든 원자 속에 산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미묘한 이 의식은 '나'라든가 '이것'이라는 개념들을 가지게 되고, 이 개념들은 각각의 물질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소용돌이 등이 개념상 물의 형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자아감과 우주 등도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개념들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개념들을 멈추는 일이 우주의 소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모든 세상 등은 개념들로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지, 더 이상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의식은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어떤 변화도 받지 않습니다. 의식 안에서는 쾌락이나 고통의 경험도 없으며, 또한 그 안에서는 '나는 이것이다.'와 같은 개념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의식은 용기나 쾌락, 행운, 두려움, 기억, 명성 혹은 광채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참나 안에서 자각되지 않는 것은 마치 뱀의 발이 어둠 속에서 자각되지 않는 것과 꼭 같습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브람만으로부터 다량의 감로가 쏟아지고, 이것이 창조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우주는 비실재적이며,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신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소용돌이로 보이는 것이 물인 것과 같이, 그리고 멀리서 보이는 연기가 구름의 모습을 하고 있듯이, 의식이 그 자체를 알고서 하나의 개념(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을 일으키게 될 때 그 둘(의식과 개념) 사이에서 창조라는 제3의 요인이 생깁니다. 이 창조는 바나나 나무가 기둥이나 수정에 반사된 것처럼 하나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비실재적인 것에 들어 있는 실재의 개념을 올바르게 탐구하면, 현상은 사라집니다.

이 현상계는 화폭에 그려진 제국과 같습니다. 마치 다양한 색깔들을 사용함으로써 화폭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이 현상계도 다양한 감각들의 경험이 있을 때 매력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실재적인 바로 이러한 현상은 보는 사람 즉 자아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치 유동성이 물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지고의 참나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의식의 빛이 참나입니다. 이 창조가 생겨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참나 안에서 '나'라는 개념이 일어날 때입니다. 이 개념이 없다면 창조물도 창조주도 없습니다. 이동이 물에 내재된 본성이지만, 물이 그 자체(물은 있는 그대로 있다. 즉 흐르는 물)와 관련해서는 어떤 흐름도 없스빈다. 그와 꼭 같이 의식은 공간처럼 광대하고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은 그 자체 내의 어떤 공간도 알지 못합니다. 똑같은 물이라도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보면, 이동의 개념이 일어납니다. 그와 꼭 같이 시간과 공간과 관련하여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자각이 우주의 개념을 일으킵니다. (시간과 공간이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러한 우주는 불가능하며, 의식과 물의 비교도 적절하지 않다.) 마음이나 자아감, 지성 등의 이름들로 그대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다만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시오. 이러한 무지는 자신의 노력으로 사라집니다. 이러한 무지의 절반은 성현들과 함께 있어도 없어지며, 그 무지의 4분의 1은 경전을 공부함으로써 소멸되며, 나머지 4분의 1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없어집니다.

(라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명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어울려 지내야 합니다. 현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이 우주에 대한 진리를 탐구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성현을 찾아 그를 숭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현을 찾는 바로 그 순간, 무지의 절반이 그와 함께 있음으로써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4분의 1은 경전의 연구를 통해 사라지며, 마지막 남은 부분은 자신의 노력으로 없어집니다. 성현과 함께 있으면 쾌락에 대한 욕망도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의 노력으로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면 무지는 사라집니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혹은 차례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마음속에 떠올린 공간 속의 대저택에는 실제 기둥의 지지물이 필요 없습니다. 그와 꼭 같이 가앗이나 가공의 현상계도 실제의 시간과 공간에 의존해 있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과 현상계 모두가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현상계는 대단히 미묘하므로, 그것은 단순히 마음의 활동이나 생각의 움직임만으로도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그것은 공기 속의 향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현상계는 공기 속의 그러한 향기와는 달리, 그것을 상상하는 마음에 의해서만 경험됩니다. 반면에 향기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경험될 수 있습니다. 마치 꿈이 꿈꾸는 사람에 의해서만 경험되듯이, 이 창조도 오직 마음속에서 그 우주를 일으키는 그런 사람에 의해서만 경험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들의 왕인 인드라가 어떻게 원자 구성 원소의 입자 내부에 들어가 자기 자신을 숨겼는지를 전해 주는 옛날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언제쯤인가 어딘가에서 사람의 소망을 들어주는 가상의 어떤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뭇가지 하나에 이 우주라는 과일이 하나 달렸습니다. 이 과일은 독특하여 다른 모든 과일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과일 속에 들어 있는 벌레들처럼, 이 과일에는 신과 악마 등 모든 종류의 존재들이 다 살았습니다. 거기에는 천국과 하계는 물론, 지구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의 크기는 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한한 의식이 나타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력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경험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성으로 빛을 발했으며, 그 중심부에는 자아감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가장 우둔한 사람과 무지한 사람에서부터 깨달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신들의 왕인 인드라도 그 과일에서 살았습니다. 한번은 비슈누 신과 다른 신들이 은둔해 있을 때, 이 인드라 신은 강력한 악마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악마들의 추적을 받으면서, 인드라 신은 열 가지 방향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악마들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악마들의 주의가 잠깐 동안 분산되는 사이, 인드라 신은 그 상황을 이요하여, 미묘하고 아주 작은 형상(그가 거대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가 미묘하고 매우 작다는 생각을 가짐으로써)을 취하여, 원자 구성 원소의 입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입자 속에서 그는 휴식과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는 악마들과의 전쟁도 잊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스스로 마음에 궁전을 떠올렸고, 그 다음 도시를, 그 다음에는 다른 도시와 숲을 가진 나라 전체를 떠올렸으며,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안에서 온 세상을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천국과 지옥을 가진 우주 전체를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천국의 왕인 인드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한 아들이 태어났고, 그는 그에게 쿤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이 인드라 신은 그의 몸을 버리고, 기름 없는 등불처럼 니르바나에 도달했습니다.

쿤다가 인드라가 되어 삼계를 다스렸습니다. 그도 또한 용기와 광채가 서로 필적할 만한 아들 하나를 두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자손은 번성했고, 오늘날에도 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천국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 원자 구성 원소의 미립자 속에도 그러한 많은 왕들이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그 집안에서 또 한 사람이 태어났고, 그는 천국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탄생과 죽음의 순환 주기를 끝내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신들의 스승(브리하스빠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는 그가 직접 구하지 않았는데도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활동들을 해 나갔습니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의식을 올렸으며, 심지어 악마들과도 싸웠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나는 절대자 브람만에 대한 실재를 자각해야 한다."는 하나의 소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깊은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외딴 속에 은둔하면서, 그 자신 안에서 평화를 누렸습니다. 거기서 그는 지고의 참나 즉 브람만을 보았습니다. 그 브람만은 전능하며, 만물에 가득 차 있는 전부이며, 모든 것이고, 언제 어디에서나 편재하며, 모든 발과 손이 자기의 것입니다. 또한 그 브람만의 눈과 머리와 얼굴은 모든 것이며, 또한 그 브람만에게는 오감이 없지만 그는 모든 감각들의 정수 그 자체이며, 또한 브람만은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지만 완전히 자유로우며(집착이 없으며), 또한 동시에 모든 특성이 없으면서 또한 모든 특성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모든 피조물(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의 내부와 외부에 있으며, 또한 그 브람만은 멀리에도 있고 가까이에도 있지만, 그것이 매우 미묘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태양과 달이며, 도처에 있는 흙의 원소이며, 산과 바다에 있는 실재이며, 또한 모든 것의 본질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 브람만은 이 우주와 세상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해방된 참나이며, 원래의 의식입니다. 비록 그가 전부이지만,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인드라)는 항아리와 천, 나무, 원숭이, 사람, 하늘, 산, 물, 불과 공기 안에서 각기 다른 모습들로 나타나면서 다양한 기증들을 수행하는 브람만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것이 이 현상계의 실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순수하고 정화된 의식으로 브람만을 깊이 생각하면서, 이 인드라는 명상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인드라는 브람만이 자기에게 있는 천상의 최고 정치권력임을 깨닫고서, 이 우주를 통치했습니다.

이 인드라가 그 원자 구성 원소의 미립자 속에 머물고 있는 동안 우주 전체를 다스린 것과 꼭 같이, 지금까지 무수한 인드라와 우주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직가된 대상을 실체가 있는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경험하는 한, 이 현상계는 계속 흘러갑니다. 이 마야(현상계)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올 때까지는 끊임없이 현상이 변화하면서 계속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올 때 마야는 작용을 멈출 것입니다. 이 마야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을 하든,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자아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아감에 대한 진리가 탐구되어 이해되는 순간, 즉시 이 마야는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실재 즉 무한한 의식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전혀 없으며, 분명한 실체에 대한 최소한의 흔적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실재로서 오로지 무한하고 절대적인 의식을 가진, 순수한 공(空)입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마치 인드라가 원자 구성 원소의 바로 중심부에서 그러한 우주에 대한 개념을 가슴에 지니게 되면서 우주 전체가 생겨났듯이, 자아감이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세상은 나타납니다. 그 자아감은 하늘의 푸른색에 필적할 만한 이 세상의 환영을 만들어 낸 첫 번째 원인입니다.

이 현상계라는 나무는 잠재되어 있는 경향성이나 개념들 때문에 브람만이라고 알려진 언덕의 공간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 나무의 씨앗은 자아감입니다. 별은 그 나무의 곷입니다. 강은 그 나무의 엽맥(葉脈)입니다. 산은 그 나무의 잎입니다. 개념들과 한계들의 본질 자체는 그 나무의 열매입니다. 이 세상은 그 존재의 개념이 단지 확대된 것에 불과합니다.

이 현상계는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와 같습니다. 이 바다에서는 수많은 세상이 잔물결과 파도들처럼 나타납니다. 그것은 참나 지식을 막고, 결과적으로 해방을 방해하는 망상 때문에 확대됩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존재들이 보여 주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파노라마 때문에 매력적이고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오, 천인이여! 이 우주는 또한 바람의 움직임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자아감은 바람이고, 그 움직임은 세상입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바람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또 향기가 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이 자아감도 이 세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자아감'이란 의미 자체 속에 존재하며, 또 자아감은 '세상'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 속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상호 의존적 관계에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각성된 지성으로 자아감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는 그의 의식으로부터 현상계라고 하는 불순물을 깨끗이 정화할 수 있습니다.

오, 천인이여! 사실상 자아감과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그리고 실체도 없이 아무튼 신비스럽게 나타났습니다. 오직 브람만만이 모든 것에 고루 스며들어 있습니다. 자아감은 가짜입니다. 자아감 그 자체가 가짜이기 때문에, 자아감에게 실재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세상도 또한 비실재적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비실재적인 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평화로서 영원합니다. 그대는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천인에게 이것을 말해 주자, 그는 깊은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지고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바시슈타는 라마에게 "만약 가르침이 조건이 맞는 사람의 가슴에 떨어지면, 그 가르침은 그 지성 속에서 확대됩니다. 그러나 조건이 맞지 않는 가슴에 떨어지면 그것은 거기에 머물지 못합니다. 자아감으로부터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이것은 현상계로 확대됩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오, 현자시여!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가끔 무지한 사람조차 이 천인처럼 불멸의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불멸은 실재에 대한 지식이 있을 때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밖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이 후 나는 다른 현자들이 회의차 모여 있던 장소로 돌아갔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그대에게 쉽게 해방을 얻은 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부순다로부터 들은 뒤로 벌써 열한 번의 세상 순환 주기가 지나갔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달콤하고 쓴 행복과 불행(혹은 선과 악)의 열매들을 맺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나무는 자아감이 가짜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곧 사라집니다. 자아감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그럼으로써 완벽한 평정 상태를 얻는 사람은 두 번 다시 슬픔을 겪지 않습니다. 참나 지식이 자아감의 무지한 개념을 없애 버릴 때, 그때까지 확실한 실재라고 생각되었던 자아감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모릅니다. 또한 확실한 실재라고 여겨졌던 몸의 원동력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잎사귀(몸)는 땅으로부터 습기(자아감)를 끌어들이지만, 태양(자아감이 가짜라는 것을 아는 참나 지식)은 그 습기를 증발시켜 미묘한 수증기(브람만)로 바꾸고 맙니다. 그러나 참나 지식이 없을 때는, 자아감의 씨앗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나무로 확대됩니다. 왜냐하면 그 씨앗 속에는 그 모든 무수한 가지들과 잎들과 꽃들과 열매들을 가진 나무 전체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우주 전체가 그 자아감 속에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조차도 이 모든 것을 종식시키지 못합니다. 실재의 개념이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옮겨질 때, 그것이 죽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바로 그대 앞에 있는 무수한 존재들 내에 존재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의 무수히 많은 창조물들을 바라보십시오. 마음은 쁘라나 즉 생명력 내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마음속에 존재합니다. 죽을 때에 이 쁘라나는 몸을 떠나서 공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우주의 공기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자신들의 모든 개념(세상)을 그들 내부에 숨긴 채 우주 전체를 채우고 있는 이 쁘라나(지바)들을 바라보십시오. 나는 지금 여기 내 앞에서 나의 지성이란 내면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습니다.

우주 전체의 공기는 죽은 사람들의 쁘라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쁘라나들 속에는 마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마음속에서 씨앗들 속의 기름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생명력(쁘라나)이 공간 속에서 바람을 따라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이 모든 세상도 마치 꽃의 향기가 공기를 따라 떠돌아다니듯이, 마음속에서 떠돌아다닙니다. 오, 라마여! 이런 것들은 이 육안이 아닌 지성의 눈에 의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심지어 공간보다 더 미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개념들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것들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돌아다니거나 이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개의 지바(쁘라나와 마음과 개념이 결합하여 구성되어 있는)에게는 그것이 스스로 창조한 세상 실체를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살이 빠른 강물의 강둑에 있는 대상들이 그 물 속에 반사되어 보일 때, 이 대상들은 실제로는 전혀 흔들리고 있지 않지만 흔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와 꼭 같이 지바들 내부에 있는 이 세상들도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의식인 참나 안에서는, 마치 항아리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질 때 그 항아리 안에 있던 공간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않는 것과 꼭 같이, 그러한 움직임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잘 못 믿는 망상 때문에 단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오로지 브람만이며, 그것은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세상이 우주의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거진다 하더라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그것이 그러한 것으로 경험되지 않습니다. 보트를 타고 있는 승객들은 보트와 함께 이동하지만,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른 보트가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유능한 화가가 그의 그림이나 조각에서 거리감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원자 구성 원소의 미립자 안에서도 마음은 무한한 거리의 갸념을 지니게 됩니다. 또 대상들의 작기와 크기에 대해서도 경험의 왜곡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승과 저승이 모두 가짜이지만, 이승과 저승에 대한 비실재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부터 '이것은 바람직하다.'나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와 같은 잘못된 개념들이 나타납니다.

지각력이 있는 존재는 자신의 내면의 지성으로 그 자신의 내부에 자신의 수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지바(이 경우에는 우주적 존재)는 그 자체 내에 다양성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각합니다. 무한한 의식은 공간처럼 태어나지도 않았고 분할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세상은, 말하자면, 그 무한한 의식의 수족들과 같습니다. 지각력이 있는 쇠로 된 공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 내에 칼, 바늘 따위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꼭 같이 지바도 비록 그것이 망상이나 잘못된 자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 자체 애네 삼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거나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각력이 없는 씨앗 속에도, 비록 그렇게 다양한 대상들로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모든 수많은 가지와 잎들과 꽃들과 열매들을 가진 나무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이 모든 세상도 비록 그 자체로서가 아닌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이긴 하지만 브람만 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거울(그대가 거울을 지각력이 있거나 혹은 없는 것으로 간주하든 말든) 속에도 도시가 비칩니다(비록 그대가 거울 속에 그러한 비친 영상이 없다고 사실 그대로 말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그것은 보여지기도 하고, 또한 보여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이 삼계와 브람만 간의 관계입니다. 이 세상이라고 알려진 것은 시간과 공간과 이동과 물질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것들의 상호 의존 관계 때문에 자아감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세상으로 보이는 것은 그 자체의 참된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변화도 받지 않은 채, 그냥 세상처럼 보이는 지고의 참나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분명한 현상들은 마음속에서 개념들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의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상들은 마음에서 개념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음 그 자체도 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상은 가짜이지 진짜가 아닙니다. 관념들이나 개념들(상깔빠), 잡재된 조건화(바사나), 그리고 살아 있는 존재(지바)는 무한한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경험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무한한 의식인 하나의 실재로서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비실재적입니다. 그러므로 비실재적인 개념이 없어지면, 해방 즉 목샤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들 세상이 공기 속에서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닌다고 진실로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무한한 의식을 그들의 바탕과 유일한 실재로 깔고 있기 때문에 단지 그릇된 개념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라마는 물었다.

오, 현자시여! 지바의 형상과 본성과 소재지는 물론, 지바가 맺고 있는 지고의 참나와의 관계를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그것이 그 자체에 대해 지니는 개념 때문에 그 스스로를 대상으로 알게 될 때, 지바로서 알려지는 그것은 무한한 의식입니다. 그것은 또한 찌뜨 즉 순수 의식이라고도 합니다. 이 지바는 미립자도 아니요, 투박하거나 물질적이지도 않으며, 비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밖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편재하는 순수 의식이 그것 자신의 존재를 경험할 때, 그것을 지바라고 합니다. 그것은 원자보다 더미세하며, 가장 큰 것보다 더 큽니다. 그것은 전부이며, 또한 순수 의식입니다. 현자들은 그것을 지바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경험되는 모든 대상은 그 지바가 그렇게 경험한 지바 자체의 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바가 매순간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지바는 그때 거기에서 경험합니다. 이렇게 경험하는 것은 마치 움직임이 바람의 본성이듯이, 지바의 본성 자체입니다. 그러한 경험하기가 그치면, 지바는 브람만이 됩니다.

의식으로서의 그것의 본성 때문에 지바가 자아감의 개념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 운동 그리고 물질을 만들고, 몸 안에서 그리고 몸을 통하여 작용을 합니다. 그 다음 그것은 마치 사람이 꿈에서 자신의 죽음을 꿈꾸듯이, 그 자체 내의 이 모든 비실재적인 것들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자각합니다. 자신의 참된 본질을 잊은 채 그 다음 그 지바는 그 자신이 만든 그릇된 개념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것은 오감과의 우연적인 관계를 맺고서, 그러한 오감의 경험이 마치 그 자체의 경험인 양, 오감의 작용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이들 다섯 가지 능력들을 갖고 있어서, 뿌루샤(내재적인 존재)와 비라뜨(우주적인 인격)로서 빛을 발합니다. 이것읁 아직도 미묘한 정신적인 존재이며, 또한 지고의 존재에서 나온 최초의 것입니다.

이러한 인격은 저절로 나타나서 자라고, 쇠퇴하고, 팽창하고, 수축하다가 사라집니다. 그는 마음(개념이나 생각)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미묘하기 때문에 뿌르야스따까(여덟 개의 도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미묘한 존재는 작고 동시에 크며, 분명하고 동시에 불분명하며, 그리고 모든 것의 안과 바깥에 고루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의 수족은 여덟 개입니다. 즉 다섯 개의 감각과 여섯 번째로 마음과, 자아감과 그리고 비존재와 함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모든 베다들이 그에 의해 지금까지 시로 찬미되었으며, 활동의 양식이나 규칙들도 그에 의해 마련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날까지도 득세하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높고, 그의 발은 하계이며, 공간은 그의 복부이며, 모든 세상은 그의 옆구리이며, 물은 그의 혈액이고, 산들과 땅은 그의 살이며, 강들은 그의 혈관이고, 방향들은 그의 팔이며, 별들은 그의 머리카락이고, 우주의 바람은 그의 쁘라나이며, 그의 생명의 불꽃은 달이며, 그리고 그의 마음은 모든 개념의 집합체입니다. 그의 참나는 지고의 참나입니다.

이 우주적 인격이나 혹은 지바로부터 다른 지바들이 생겨나 삼계의 도처에 두루 배분되어 있습니다. 브람마, 비슈누, 루드라, 그리고 다른 신들도 그것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그 생각의 형상들이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신이요, 악마요, 천인입니다. 지바는 의식에서 생겨났으므로, 의식은 곧 그것이 머무는 소재지입니다. 수천 명의 이러한 비라뜨들이 지금까지 나타났고, 앞으로도 나타날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우주적 인격 자체가 개념(혹은 관념, 생각 등)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에 품는 모든 생각은 우주의 공간에서 다섯 원소들로 된 몸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창조된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개념들이 확장된 것으로 현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 우주적 인격이 이 모든 현상계를 만든 근본 원인입니다. 그래서 결과도 원인도 똑같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 모든 다양한 피조물들(벌레에서부터 루드라 신에 이르기까지)은 마치 거대한 나무가 작은 씨앗에서 자라난 것처럼 원래의 개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우주가 미세한 원자 구성 원소인 양자와 전자 등에서 확장되었지만, 그 확장이나 진화는 둔함이 아닌 지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나타나게 된 것처럼, 그와 꼭 같이 모든 사물도 가장 미세한 원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큰 것도 없으며 미세한 것도 없습니다. 참나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개념은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마음은 달의 원소로 생겨납니다. 그래서 달은 마음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지바는 다른 지바를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지바가 정액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그것이 그 자체와는 별개인 것처럼 경험하는 참나의희열이 숨겨져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어떤 분명한 이유도 없이 그것은 다섯 개의 원소들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바는 계속 지바로서 존재하며, 이들 원소들에 의해 실제로는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들 원소들의 안과 바깥에 존재하며, 그들의 구조가 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원소들과 동일시함으로 인해 시야가 가리어져 있어, 그것은 마치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이 앞길을 보지 못하는 것과 꼭 같이 자신의 참된 본성을 보지 못합니다. 해방 즉 목샤는 이 무지의 파괴이며, 또한 지바가 이들 원소들이나 자아감과는 독립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 라마여! 사람은 냐니(지혜를 가진 사람이나 직접적인 경험을 하는 사람)가 되려고 노력해야지, 냐나반두 즉 가짜 냐니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가짜 냐니일까요? 예술을 공부하는 어떤 조각가가 만족이나 이익을 위하여 공부를 하는 것처럼 만족이나 이익을 위해 경전을 공부하거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가짜 냐니입니다. 경전에 대한 그의 지식이 그의 일상생활에 반영되어 있질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안녕과 물질적인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경전의 지식을 이요하는 데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지한 사람이 그러한 가짜 냐니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냐나 즉 지혜가 참나 지식입니다. 다른 형태의 지식은 참나 지식의 창백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직하게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만큼 일을 해야 합니다. 생명력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먹어야 합니다. 오직 지식을 획득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자신을 슬픔에서 해방시켜 주는 그것을 탐구하고 알아야 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활동의 결과들을 모르는 혹은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 냐니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참나 지식에 자리를 잡고, 개별화된 마음과 그것의 대상들을 모두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인 조건화가 완전히 제거된 사람이 냐니입니다. 그의 지성에는 왜곡이 없습니다. 그의 지식은 다시 태어남을 초래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그는 먹고 입는 단순한 활동을 하며, 또한 욕망이나 정신적 활동이 없는 그런 자연발생적이고 적절한 활동을 합니다. 그를 일러 빤디따라고 합니다.

다양한 피조물들은 태어날 목적이나 계속 존재할 목적을 지니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참된 실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제 않습니다. 이러한 비실재적인 우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나중에 인과 관계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신기루는 그것이 나타나야 할 어떤 목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시각적 환영들이 나타난 이유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불임 여성 아들의 손자 어깨 위에 목말을 타려고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시각적 환영들이나 가공의 현상들이 나타난 유일한 원인은 지각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조사해 보면 그것들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올바르게 탐구하고 지각할 때, 그것들은 지고의 참나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마음을 통하여 그것들을 지각할 때는, 제한적인 지바가 일어납니다. 이 지바가 올바르게 탐구되고 조사될 때, 그 지바는 사실상 지고의 참나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그것을 파악할 때, 그것은 온갖 종류의 변화, 탄생, 쇠퇴 등의 지배를 받는 지바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주적 존재를 직접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두 눈이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다양성을 지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작용을 하고 있는 중이라도, 그 마음속에는 생각의 무질서한 움직임이나 혹은 각기 상이한 방향들로 나아가는 움직임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생각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무심입니다. 그들의 활동에도 마치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는 마른 낙엽처럼 의지의 작용이 전혀 없습니다.

심리적인 조건화에 속박되어 있는 무지한 바보는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경전에서 요구한 활동을 찬양합니다. 그의 감각들은 그 대상들을 약탈합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감각들을 억제하고, 참나에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형상 없는 금도 없고, 또한 전혀 나타남이 없는 브람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해방은 창조나 나타남의 개념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세상 주기가 끝나는 소멸 기간 동안에는 완전한 하나의 어둠이 전 우주를 감쌉니다. 그와 꼭 같이 현명한 사람들의 눈에는 이 우주 전체가 브람만이라는 하나의 실재로 들러싸여 있습니다. 바다는 그 자체 내의 다양성과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동질적인 단위입니다. 이 모든 다양성과 움직임을 포함하고 있는 단 하나의 브람만밖에는 없습니다. 자아감 안에는 이 세상이 있고, 이 창조 안에는 자아감이 있습니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지바는 어떤 이유나 동기도 없이 그 자체 내에 있는 이 창조를 봅니다. 팔찌는 금입니다. 즉 팔찌가 팔찌로서 보이지 않을 때, 팔찌는 사라지고 금만이 남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보는 사람은 살고 있지만 살지 않으며, 죽어 가지만 죽지 않고,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활동들은 전혀 의지의 작용이 없는 신체의 작용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모든 몸 속에는 지바가 눈송이처럼 존재하는데, 분명히 무겁고 큰 존재들에게는 무겁고 큰 눈송이처럼 존재하고, 작은 존재들에게는 가볍고 미묘한 눈송이처럼 존재합니다. '나'라는 것은 그것이 잉태되는 순간 삼각관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자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비록 몸이 비실재적이고 단지 실재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지만, 자기 스스로를 몸으로 생각합니다. 까르마의 덮개인 그 삼각관계에서, 바로 정액의 본질 그대로 되어 있는 지바는 마치 향기가 꽃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 몸 안에 존재합니다. 태양의 광선이 지구의 도처로 퍼져 나가듯이, 정액 속에 있으면서 삼각관계에 들어선 이 지바도 몸의 도처로 뻗어 갑니다.

비록 이 지바가 안이나 바깥 어디에도 있지만, 그것은 이 생명 에너지(정액)와 특별히 동일한 신분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 생명 에너지는 그 지바의 특별한 거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들의 바로 가슴속에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그 지바가 존재들 속에 살아가는 동안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것이 경험하는 경험 자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 속의 모든 생각의 움직임을 버리고 무심의 상태가 될 때까지 그것은 평화를 얻지 못하며, 계속해서 '나는 이것이다.'라는 그릇된 개념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비록 그대가 여전히 생각들과 감정들을 계속 가질지라도, '나'라는 것이나 자아감이 그대에게서 사라지면, 그대는 공간처럼 남게 될 것이고, 그러면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마치 그들이 조각상들인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서 기능하고 있는 참나 지식을 갖춘 현자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그들의 의식에 전혀 방해를 일으키지 못하지만, 그들의 활동 기관들은 여기에서 작용합니다. 여기에서 공간(거기에서 계속되는 활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속박을 벗어났으며 해방을 얻었습니다.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늘 슬픔이 떠나지 않습니다. 입는 모든 옷과 먹는 모든 음식, 그리고 그에게 제공되는 모든 쉬는 장소에 행복해 하는 사람은 황제처럼 빛을 발합니다. 비록 그가 제한된 삶을 영위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는 어떤 제한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면으로 자유롭고, 공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애써 노력하지 않고, 마치 깊은 수면에 들어 있는 사람처럼 움직입니다. 실제로 현자(진리를 아는 사람)에게는 제한된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무지한 사람과 현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제한적인 마음에게 이 세상이라고 보이는 것이 제한이 없는 마음에게는 브람만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존재하다가 소멸하고, 다시 태어납니다. 그러나 오, 라마여! 그대는 탄생도 죽음도 없는 바로 그것입니다. 일단 참나 지식이 그대에게 일어나면, 마치 불탄 씨앗이 식물을 생기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현상계가 그대에게 어떤 인상을 주기에는 무력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활동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참나 속에 조용히 머물러 있습니다. 오로지 쾌락에 대한 욕구가 완전히 사라진 그런 사람만이 지고의 평화를 경험하지, 그 밖의 수단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람은 지고의 평화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욕망이나 정신적 채색을 모두 없애고 그리고 정신적 조건화를 벗어나, 마치 망끼가 그랬듯이, 일아나서 지고의 상태로 나아가십시오.

그대의 선조인 아자라는 분이 옛날 나를 종교 의식에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 의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공중에서 내려갈 때, 난느 먼지투성이의 무더운 밀림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그 밀림을 뚫고 나아가려고 했을 때, 나는 한 나그네가 "아, 슬프다! 이 태양이 모든 것을 불태워 죽이듯이, 사악한 자와 함께 지내는 것은 오닉 슬픔과 죄악을 낳을 뿐이구나. 내가 저쪽 마을로 가서, 그동안 쌓인 피로나 좀 풀어 보자."라며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가 다음 마을로 막 들어서려 할 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바른 길을 찾지 못한 나그네여! 어서 오십시오. 그대가 소금물을 마시면 갈증을 풀긴느커녕 그대의 갈증이 더해지듯이, 무지한 사람들이 사는 이곳에서는 영원한 만족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아무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그릇된 길로 빠져 듭니다. 그들은 참나 탐구도 하지 않으며, 또한 사악한 활동과 관계를 끊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기계처럼 움직입니다.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어두운 둥굴에 있는 뱀이 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아니면 바위 속의 벌레가 된느 편이 더 낫습니다.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보다는 사막(신기루)에서 절름발이 사슴이 되는 편이 더 낫습니다.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 순간적인 만족은 있을지 몰라도, 참나는 파괴됩니다.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유해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황제처럼 빛을 발합니다. 당신은 신의 감로를 마셨습니까?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지만, 나무랄 데 없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 현자시여!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이며, 이 지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초월적인 당신의 이 형상은 무엇입니까? 그대에게는 모든 욕망과 희망이 없지만, 욕망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의식 속에는 각기 상이한 관념들이나 개념들이 당신의 소망에 따라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우주 전체는 과일 속의 씨앗처럼 당신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나는 망끼라는 이름을 가진 순례자입니다. 나는 먼 곳까지 돌아다녀서, 이제 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힘이 없습니다. 신이시여! 위대한 현자들은 처음 보자마자 우정을 깊게 하려고 합니다. 난느 이 세상의 환영을 극복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부디 나에게 깨달음을 주십시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순례자여! 나는 바시슈타라고 합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그대는 정말로 해방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그대는 지금까지 (참나 탐구의 특징을 갖춘) 현자를 찾아왔고, 그러므로 그대는 이 현상계의 피안에 거의 다다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대 마음속에는 공평성이 일어났고, 평화가 있습니다. 진리를 감추고 있는 그 장막을 거둘 때, 진리는 스스로 빛을 발합니다. 그대가 알고 싶은 바를 말해 주십시오. 그대는 어떻게 이 세상의 환영을 파괴시키려고 합니까?"

망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이시여! 나는 지금까지 나의 의심들을 없애 줄 수 있는 사람을 온갖 곳으로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그러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늘 나는 당신으로부터 존재들 가운데서도 운이 가장 좋은 사람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최고의 축복을 얻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생겨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슬픔이 반복적으로 경험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 슬픔으로 끝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슬픔을 초래하는 기쁨보다 차라리 슬픔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쾌락과 고통의 경험을 반복해서 겪다 보니, 나의 마음은 그릇된 개념들로 가득 찼으며, 그 때문에 각성된 지성이라는 내면의 빛이 비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지한 삶에서 태어난 잠재된 경향성들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은 단지 나를 사악한 생활과 활동으로 이끌어 갈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나는 나의 생애를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쾌락에 대한 이 욕망은 결코 실현되지 않으며, 결코 만족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비록 그 욕망의 모든 열망들은 실패로 끝나지만, 그 욕망 자체는 끝나지 않습니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말라 떨어집니다. 그러나 쾌락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또한 가슴속에서 일어나 나에게 끔찍한 불행을 주는 불안들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많은 축복을 받아 성공을 누리는 사람마저도 불행한 생활 상태로 떨어집니다. 그러한 성공은 흔히 부주의한 사람을 슬픔의 함정에 가두어 버리는 미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내 가슴이 사악한 경향성들과 불안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들은 내가 단지 감각의 만족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나에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아직 죽음에 정복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 파괴적인 과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자아감이 무성하게 자라는 내 무지라는 어둠은 경전들의 연구에 의해서나, 깨달음을 얻은 존재들과의 교제라는 달빛에 의해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 속에 있는 무지의 코끼리는 아직도 지식의 사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내 까르마의 풀은 그것을 태워 없애 주는 불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참나 탐구의 태양은 정신적 조건화란 어둠을 몰아내기 위하여 아직 내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오, 현자시여!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여전히 나에게는 참된 실체나 물질인 것처럼 보입니다. 나의 감각들이 나를 갉아 먹고 있습니다. 심지어 경전들의 지식조차 진리를 가리고 있는 기존의 베일을 걷어 내는 데 나를 도와 주기는 커녕 베일 하나를 더 입혀 준느 것 같습니다.

따라서 나는 무지와 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신이시여! 진실로 나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경험과 생각하기(개념 등을 마음에 품는 것), 정신적 조건화와 상상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오직 정신적인 고통만 낳을 뿐입니다. 삶의 모든 슬픔과 불행은 감각적 경험과 생각하기에 뿌리를 내리고 의지해 있습니다. 이러한 삶 혹은 삼사라의 길은 정신적 조건화나 잠재된 경향성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꼬불꼬불하게 뒤틀려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 삼사라가 그의 정신적 조건화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집니다.

공간 속에는 순수한 공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과 꼭 같이, 순수 의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순수 의식 이외의 경험자라고 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무지이며, 그 무지의 확장이 이 삼사라(현상계)입니다. 관찰이 없을 때에 나타나는 것은 관찰이란 빛을 그곳으로 돌리면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참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이 경험 주체의 가짜의 나는 그 참된 본질이 조사되는 순간 사라집니다.

대상적인 의식이 만들어 낸 구분도 의식이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라집니다. 항아리는 점토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아리는 단지 점토의 변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상도 의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 대상은 '의식의 대상들'로서 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을 통해 알려진 것은 그 지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미지의 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의식은 주어, 술어(아는 것), 그리고 목적어에 들어 있는 공통 인수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의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이해(즉,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물질에 대한)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무와 돌조차 의식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이해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순수 의식입니다. 그 대상들(나무와 밀랍 같은)이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대상은 관찰자의 관점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개의 대상을 모두 보고 있는 것은 똑같은 관찰자이고, 다양성을 지각하는 자아감은 구분을 일으키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감은 속박이요, 그것을 없애는 것이 해방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어려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복시 시각 장애의 경우 하나의 달이 두 개로 보이는 현상이 일어난 것과 꼭 같이 그 구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경우에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틀렸습니다. 의식과 둔함은 서로 관련될 수 없습니다. 의식은 무의식이 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것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식뿐입니다. 그러면 마치 바위가 언덕 위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지듯이, 한계(限界)가 물질성의 개념 안으로 다시 들어오게 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현상계의 환영에 빠지면, 당장 그는 마치 곤충들이 비 온 뒤에 일어나듯이, 원래의 환영에서 일어나는 다른 무수한 환영들의 먹이가 됩니다. 마음은 봄철의 숲과 같습니다. 그 마음은 매우 많은 개념들과 관념들의 나무로 너무나 빽빽이 들어서서, 짙은 어둠이 그 속에 널리 퍼지게 됩니다. 자기 한계나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수많은 즐거움과 고통의 경험을 겪게 됩니다.

현자와 달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그 둘은 모두 기쁨의 빛을 냅니다. 그들은 평화롭고, 차분하고, 조용하며, 불멸의 감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지한 자와 아이 사이에도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동기는 변덕들과 공상들이며, 그들은 과거나 미래의 것을 고려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에게는 올바른 활동이 전혀 없습니다.

창조주에서 가장 작은 곤충에 이르기까지, 만약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면, 어떤 누구도 지고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길 위의 장애물들이 그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방해를 줄 수 없는 것처럼, 속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단순히 조사만 해 보는 사람에게도 속박은 사라집니다. 유령들도 정신 차리고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붙어 다니지 않습니다. 그대가 두 눈을 감으면, 외부 세상의 모습은 없어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약 그대가 그대의 의식으로부터 이 세상의 개념을 없애 버린다면, 순수 의식만이 남게 됩니다. 지금도 이 순수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이 세상은 단지 그 의식이 조금 동요함으로써 생겨난 비실재적인 현상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은 우주적 마음이 만들어 낸 창조물입니다. 이러한 우주적 마음은 단순히 그러한 세상에 대한 개념을 품은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우주적 마음에는 물질적인 창조를 위한 물질적인 요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브람만이라는 화폭 위에 물감이나 도구도 없이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정말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 창조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행복하다.'라는 개념이 행복을 경험하고, '나는 불행하다.'라는 개념이 불행을 경험합니다. 이 모든 개념은 순수 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념들로서 그 개념들은 가짜입니다. 참나나 무한한 의식에는 한계나 조건화가 업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어떤 동요나 움직임도 전혀 없습니다. 참나 속에서는 어떤 욕망이나 애착(의존)도 없으므로, 불안이나 움직임도 전혀 없습니다. 의존만이 속박입니다. 의존하지 않음이 자유요, 해방입니다. '모든 것', '무한', '충만' 등이 가리키는 것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사람은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육신이 꿈 속에서 본 몸만큼이나 비실재적일 때, 현명한 사람은 그 몸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현자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나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 참나에 조용히 머물러 있습니다. 그의 모든 욕망은 실현됩니다. 오, 라마여! 망끼는 이 모든 말을 듣고서, 그의 망상을 버린 뒤에 깊은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고도 적절한 활동(필연적인 활동; 축어적 의미는, 강물에 빠진 사람의 활동)을 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참나 속에는 일원성과 다양성이 있습니다만, 서로 대립해 있는 일원성이나 다양성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속에서 다양성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참나만이 존재하며, 그것도 공간처럼 미묘하고 편재하는 상태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몸의 탄생이나 죽음으로도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몸이다.'라는 것은 진리가 아닌 망상입니다. 그대는 순수한 참나 혹은 나누어지지 않는 의식입니다. 주어(관찰자), 목적어(관찰 대상), 그리고 술부(관찰 행위)는 단지 마음의 변형에 불과합니다. 진리나 참나는 이러한 구분으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명상(디야나) 너머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의 브람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환영이 어떻게 일어나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실재로서나 혹은 환영으로서)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느낌은 나의 가르침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대가 속박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행운과 역경 속에서도 자아감이나 욕망이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십시오.

라마는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까르마 혹은 신의 뜻(운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진리를 듣고 싶습니다.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신의 의지(운명-다이밤)와 까르마는 단지 개념들일 뿐입니다. 사실은, 그것들은 의식의 움직임입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있을 때, 현상계는 일어납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그치면, 현상계도 사라집니다. 그러한 움직임과 의식 사이에는 조금도 구별이 없습니다. 사람과 그의 까르마(활동) 사이에는 조금도 구별이 없습니다. 피조물을 알 수 있는 기준은 그것의 특징적인 활동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은 그 피조물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그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다이바), '업'(까르마) 그리고 '사람'(나라)과 같은 말들이나 개념들은 단지 의식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표현에 불과합니다.

의식 속에서의 자기 한계와 더불어, 이러한 의식의 움직임은 모든 것의 씨앗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의식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원인이나 씨앗은 전혀 없습니다. 씨앗과 싹 사이에도 어떤 구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몸 등)은 단지 의식의 움직임일 뿐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전능하다는 것은 명백하므로, 그러한 움직임은 움직일 수 있거나 움직일 수 없는, 지각력이 있거나 지각력이 없는, 그런 여러 신과 악마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을 밖으로 현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그의 활동들(까르마)이 별개의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동물입니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 세상으로 싹을 틔우는 씨앗은 자기 한계 내지 의식의 조건화입니다. 무집착이나 자유의 불로 그 씨앗을 태워 버리십시오. 의지 작용이 없는 활동(활동 속에서의 활동 없음)이 무집착 내지 자유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 조건화(바사나)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이 무집착 내지 자유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주야를 얻으십시오. 바사나의 씨앗을 소멸할 수 있는 그 방법들이 최고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자기 노력 이외의 어떤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모든 장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순수 의식으로 간주하고, 그대는 내면을 주시하면서 살아가십시오. 슬픔이나 불운 속에서도, 심한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그대 내부에서는 슬픔이 없는 상태로 남아 계십시오. 그러나 예의범절에 따라, 그리고 그 지방의 예법에 따라, 심지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면서까지, 그리고 겉으로는 즐거움과 아픔을 경험하면서, 마치 슬픔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그대의 아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축제 따위에 참가할 때에도, 마치 그대가 정신적 조건화를 받고 있는 듯 기쁨을 표헌하십시오. 장례식이나 심지어 전쟁에도 마치 제한된 이해력을 가진 무지한 사람처럼 참가하십시오. 부를 얻고 그대의 적을 파괴할 때도, 마치 제한된 이해력을 가진 무지한 사람들이 하듯이 하십시오.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자비심을 가지십시오. 성현들에 대해서는 숭배를 올리십시오. 행복으로 기뻐하고, 슬픔으로 마음 아파하십시오. 영웅 중의 영웅이 되십시오. 그대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참나의 희열 속에서 헤엄치며, 그대의 감정과 지성이 평화로워지면 그대는 그대가 하고 있는 일도 하고 있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그대가 참나에 조용히 머물면, 가장 날카로운 무기마저 그대(참나 지식)를 절단할 수 없습니다. 이 참나 지식은 무기들에 의해 절단되지도 않고, 불길로 태워 없어지지도 않으며, 비에 젖거나 바람에 마르지도 않습니다. 참나에는 노령과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참나 지식의 기둥에 매달리십시오. 이와 같이 참나 지식에 뿌리를 내리면, 비록 외적으로는 그대가 활동을 하고 있지만, 다시는 자기 한계나 바사나의 잘못 속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치 깊은 수면 상태에 빠져 있기라도 하듯이 내면에 조용히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적극적인 삶을 영위하십시오.

구분의 모든 개념을 버리십시오. 그대의 자각을 조금만 밖으로 확장하면서 참나 지식에 조용히 머물러 계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대가 외적인 활동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리고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거나 그 무언가를 버리든 간에, 마치 깊은 수면에 들어 있는 것처럼 그대는 완전한 휴식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대는 깨어 있는 상태와 깊은 수면의 상태 사이에 어떠한 구분도 없음을 깨닫기에, 모든 부조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시작도 끝도 없는 참나 자각의 수련을 통하여, 그대는 점차 어떠한 이원성도 없고 모든 물질성을 초월해 있는 그 지고의 의식 상태에 도달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지고의 평화 이외의 그 어떤 일원성이나 다양성도 없습니다.

라마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오, 현자시여! 만약 그러한 것이 자아감에 관한 진리라면, 당신은 어떻게 바시슈타란 존재로 여기에 나타날 수 있습니까? (라마가 이 말을 할 때, 바시슈타는 완전한 침묵에 들었다. 좌중의 사람들은 걱정이 되었다. 이를 보고, 라마는 다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오, 현자시여! 왜 당신은 침묵을 지킵니까? 거룩한 현자가 대답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침묵을 지킨 것은 내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침묵이 그대의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두 가지 유형의 질문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은 자와 무지한 자입니다. 무지한 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무지한 자의 관점에서 대답해야 하며, 현자의 질문에는 현자의 관점에서 대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대는 무지했으며, 그런 까닭으로 그대는 오직 지적인 대답만을 받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이제 그대는 진리를 알고 있으며, 지고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지적이고 논리적인 대답들은 더 이상 그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 라마여! 모든 말로 된 진술들은 그 진술이 장황하든 간단하든, 그 진술의 취지가 미묘하든 초월적이든 간에, 모두가 논리와 이원성과 구분에 의해 제한되어 있습니다.

나의 소중한 분이시여! 그러한 오염된 대답들은 그대가 들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말들은 순수하고 물들지 않은 진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순수한 진리는 오직 완전한 침묵으로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질문과 정신적인 활동이 전혀 없는 그 침묵이 바로 지고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침묵만이 그대와 같은 현자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었습니다. 또, 모든 표현은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의 본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지고의 상태인 비이원적이고 분할할 수 없는 순수 의식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 내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불완전한 상태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무한한 것을 정신적 활동에서 나오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라마는 말했다.

모든 표현이 이원성과 한계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겠습니다. 이를 충분히 참작하시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대상적인 경험이 전혀 없고, 모든 정신적 활동이나 생각을 초월 해 있는, 순수한 공간과 같은 의식입니다. 나는 순수하고 무한한 의식입니다. 그대도 이와 꼭 같습니다. 이 세상 전부도 또한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순수하고 분할할 수 없는 의식입니다. 나는 순수 의식이지,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 순수 의식 이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설명할 방법을 모릅니다. 바로 우리가 자신의 참나를 표현하려고 노력할 때, 비록 그러한 시도가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아감과 그 나머지 모든 것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지고의 상태라고 부르며, 그 상태에서는 비록 사람이 살아 있지만 마치 죽은 것처럼 활동합니다.

자아감이 이러한 해방을 추구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아감은 결코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의식이 무한한 의식을 깨달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그것은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이 그림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식의 동요나 움직임이 있든 없든 간에, 바위처럼 확고부동하게 서 있는 그것이 니르바나(해방이나 자유)입니다. 그는 아무런 '다른 것'을 절대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욕망과 갈망에서 벗어났습니다. 그에게는 '나'나 '너'나 혹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오로지alone는 모든 것all이 하나one라는 뜻) 그것만이 존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무한한 의식이 그 자체를 자각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는 삼사라와 속박입니다. 무한한 의식이 그것 자신을 자각하지 않는 듯 그것 자신으로 남아 있을 때, 그것은 목샤 즉 해방입니다. 마음이나 지성 등은 순수 의식의 변형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순히 말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나누어지지 않는 순수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만물의 안과 밖에 고루 스며들어 있는 순수 의식만이 존재할 때, 구분의 개념이 어떻게 일어나겠으며, 또 어디에서 일어나겠습니까?

순수 의식과 완전한 공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자기 한계의 개념(정신적 조건화)이 사라지면, 나는 순수한 (공간의) 의식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가 단지 하나의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한한 것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참나 작가은 있지만, 이러한 이해가 일어날 때, 그것마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공이 궁극적인 진리처럼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무지는 숨겨진 지혜를 가리킵니다. 지혜는 그 무지를 소멸시키고, 궁극적으로 그것도 정지시킵니다. 그것이 지고의 상태입니다. 현명한 무니(내면의 침묵을 지키는 사람)는 참나 지식에 의해 마나바(깨달은 자)가 됩니다. 혹은, 깨달은 자가 무니가 됩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무지한 사람은 동물들이나 나무들이 됩니다. '나는 브람만이다.'나 '이것은 세상이다.'라는 것은 잘못된 개념들입니다. 그것들을 탐구하거나 조사해 보면, 그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빛이 어둠을 찾아갈 때, 어둠은 사라집니다. 올바른 이해력을 가진 평화로운 사람은 모든 감각을 소유하고 있지만, 잘못된 개념들로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감각의 경험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깊은 잠에 든 것처럼 살아갑니다.

모든 꿈은 깊은 수면으로 끝납니다. 마찬가지로, 깊은 수면은 사마디로 끝납니다. 지각의 모든 대상들은 지식으로 통합되고, 그러면 모든 것은 하나의 참나로서 보입니다. 이 모든 대상들이 오직 제한된 마음의 상태에서만 경험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참나가 제한이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즉시 깨닫게 됩니다. 조건 지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행위자나 즐기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어느 누구에게 어떤 슬픔이나 즐거움, 미덕이나 죄나 손실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순수한 공입니다. 자아감과 나의 것이라는 개념마저 공입니다. 모든 현상이 환영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의지 작용이 없는 활동을 하거나, 완전한 침묵(통나무 같은 침묵)을 지킵니다. 그런 사람이 브람만입니다. 몸을 가진 존재가 지고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 밖의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나'라는 개념은 완전한 무지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니르바나 즉 해방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지라는 이 어둠의 도움을 받아서 진리의 빛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지 않겠습니까! 자아감을 면밀히 조사하면, 그것의 한계와 제한적인 성격 혹은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 자아감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 아닌, 무지한 사람의 경우에만 있습니다. 반면에, 진리를 아는 사람은 이미 자아 개념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에, 최소한의 걱정이나 슬픔도 없이 형체가 있거나 형체가 없는 상태로 존재합니다. 화폭 위에 그려진 전투 속에서는 파괴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이 내면의 평온한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활동은 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해방된 현자의 경우에, 제한된 행동이 나타나는 것조차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관상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불에 타서 재가 되었지만 그 형태와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가스등의 불꽃 덮개의 경우처럼, 해방된 현자의 성격은 성격 아님이요, 그의 마음은 마음 아님이며, 그의 조건화는 진실로 조건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브람만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밖으로는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해방된 사람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코끼리와 이륜전차는 단지 구름일 뿐이며, 구름이 만들어 낸 모양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들도 지고의 참나 혹은 브람만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슬픔의 원인은 실재에 대한 오해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비실재적인 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사실은 무지한 사람이 실제로는 무한한 의식이지만, 자아감 때문에 자아감 내에서 이 세상의 존재를 경험합니다. 마치 불붙은 나무토막을 빙빙 돌릴 때, 유일한 실재는 나무 끝에 있는 단 한 개의 불꽃이지만, 그것이 공간 속에서 가상의 형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과 꼭 같이, 이 모든 다양한 형상들도 하나의 분할할 수 없는 브람만 내지 무한한 의식이 빚어 낸 나타난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시작과 끝, 올라감과 내려감, 공간과 시간)을 그냥 원하는 대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사람은 마땅히 내면의 평화에 조용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물은 물 위로 짐을 실어 나르는 배의 무게도 견딜 수 있고, 따라서 그 자체(물)가 만든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자동력이 없는 세상 자체도 사람으로 하여금 이 명백하게 나타난 현상계를 건너갈 수 있도록 합니다.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은 또한 생각에 의해서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두령움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십시오. 왜냐하념 우리가 몸과 마음 등을 면밀히 조사하면, '나'라고 하는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기때문입니다. 쾌락을 좇지 말고, 참나 탐구에 열중하며, 자기 노력에 헌신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무한한 의식은 그것 자신을 만물 속에 무한하고 절대적인 의식으로서 비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만이 진실로 만물 속에서 경험됩니다. 그러나 한 대상에 대한 개념이 일어나고, 그 개념이 반복적으로 확인될 때, 이 의식은 비록 자기 자신의 내부이기는 하지만, 꿈 속에서 대상으로 보이는 그런 꿈 속의 대상들처럼, 대상들로서 나타납니다. 꿈 속의 한 대상이 사라질 때,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이나 '내'가 없어질 때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 세상과 자아감을 비난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누가 하나의 환각을 칭찬하거나 비난하겠습니까? 여기에서는 탐구만이 적절합니다.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 진리에 확실히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이 현상계는 단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참나 탐구를 하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 다음에 남는 것이 브람만입니다. 이 현상계의 실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임 여성의 아들의 말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개인의 개별성은 바사나 즉 정신적인 조건화이며, 그것은 참나 탐구를 하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무지의 상태에서 그것을 관찰하지 못하면, 이 현상계는 일어나게 됩니다.

이 몸은 다섯 원소들의 순열과 조합의 결과이며, 스스로 움직이는 힘이 없습니다. 심지어 마음과 지성과 자아감조차도 똑같은 원소들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과 지성과 자아감의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물질성을 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건 지어지지 않은 순수한 존재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해방입니다.

'객체'는 '주체' 속에서 일어나지만, 어떤 독립된 존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한적인 상태나 존재'도 단지 개념에 지나지 않을 뿐,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나 탐구를 하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개념을 거부하고 다시는 그 개념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개념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주체(보는 사람)도 없고 경험자도 없으며, 실재적인 것도 비실재적인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지고의 평화만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평화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은 비록 활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없습니다. 혹은 그는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절대적인 의식을 제한하는 모든 개념을 벗어나면, 어떻게 현자가 이원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겠습니까? 사랑과 증오와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지고의 평화에 확고히 자리를 잡은 채 불변의 참나로서 존재합니다.

'주체' 속에서 일어나는 '대상'의 개념은 주체에 의하여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서 그때 경험됩니다. 사실상, 그 둘(꿈꾸는 사람과 깨어 있는 상태의 사람)은 두 개의 컵 속에 있는 우유처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인 것입니다. 지고의 참나는 아무런 개념이 없습니다. 개념들은 대상들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그 개념들이 버려지면 대상들은 사라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무한한 의식 속에 움직임이 있을 때, '나'와 '세상'에 대한 개념들이 일어납니다. 만약 이 개념들이 참나나 무한한 의식과 사실상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개념들은 본질적으로 무해합니다. 그러나 그 개념들이 본질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이 세상도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면, 큰 불행이 있습니다.

심지어 조건 지어지지 않은 의식 내의 이러한 움직임조차 참된 실체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비실재적인 것이라면, 그러한 움직임 때문에 일어나는 개념들은 얼마나 더 비실재적이겠습니까? 그것은 불임 여성의 아들이 춤추는 것만큼이나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움직임은 무지에서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무지입니다. 올바른 이해의 빛을 받으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자아감도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될 때 일어납니다. 그 개념이 거부되면, 자아감도 사라집니다. 이것을 디야나(명상)와 사마디(초의식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것은 조건 지어지지 않은 의식입니다. 부디, 이원성이나 비이원성 등의 그물에 걸려들지 마십시오. 그러한 모든 논의와 논쟁은 오직 슬픔과 절망을 초래할 뿐입니다. 비실재적인 것이나 영원하지 않은 것을 추구할 때, 슬픔이 있습니다. 의식의 조건화가 사라지면, 마치 수면 속에서 슬픔이 없는 것처럼 어떤 슬픔도 없습니다. 조건화를 버리는 의식은 그 의식의 절대적인 본성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해방입니다.

내 가르침의 도움을 받아, 만약 그대가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대의 이해는 확고부동합니다. 이 세상과 '나'라는 것은 오직 개념들로서 존재할 뿐, 사실이나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난느 누구인가?'나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는가?'라는 길문을 하게 되면, 그러한 개념들은 사라집니다.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니르바나 즉 해방입니다. 이 깨달음의 빛은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가르친,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지바나 개인의 개별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삶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대가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지내면, 그들의 참나 지식의 빛은 자아감을 포함한 무지의 어둠과 그에 따른 것들을 몰아내 줍니다. 그러므로 계속 그들과 함께 지내십시오.

진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때는 공개적으로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 다른 사람들이 각기 상이한 관점들을 표현할 때, 그대의 이해는 방해받거나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은밀하게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명상합니다. 이러한 명상이 의식에 그림자를 던지는 관념들과 개념들의 구름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사람이 스스로의 노력과 성현들의 도움을 받아서 지혜를 얻고 나면, 이 현상계는 그의 의식 속에서 더 이상 확장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식 안에서 개념들이 일어나고, 다시 그 반대 개념이 일어나면, 전자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모든 개념이나 관념들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 해방이며, 이러한 버림은 쾌락의 추구가 버려질 때 가능합니다. 말들이 타인에 의해 발설되었든 아니면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든 간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말들과 그 의미들의 연상을 단호히 거부하는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점차 개념들과 관념들이 나타나거나 확장되지 않습니다.

자아감을 버리는 것이 무지를 끝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방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해방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간에, 마음이 이 세상을 이해하거나 자각하게 되면 슬픔이 초래됩니다. 반대로 마음이 이 세상을 전혀 자각하지 않을 때, 희열이 찾아옵니다. 모든 몸을 가진 존재들에게는 두 가지 형태의 질병이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현세와 관련이 있고, 두 번째 것은 내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현세의 삶과 관련이 있는 질병들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치료법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내세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떤 치료법도 없습니다. 사람은 내세에서 그들을 치로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치료법들이 내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 이 세상에서 무지라고 하는 이 무서운 질병의 치료약을 찾을 수 없다면, 그는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분명히 치료약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그대 삶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을 헛되이 찾으려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참나 지식을 통해서 내세와 관련된 문지들을 없애십시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삶은 매 순간 죽음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대가 쾌락의 수렁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대는 기타 어떤 치료법도 찾을 수 없습니다. 쾌락을 즐기는 바보는 슬픔과 불행을 자초합니다. 성년기의 힘이 유년기의 에너지 속에 나타나 있듯이, 완벽한 경지(니르바나)의 도달은 자기 수양이나 쾌락 추구의 포기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지와 함께 시작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의 인생의 강물은 조화롭게 흘러가지만, 무지한 사람의 인생의 강물은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바다의 수면 위에서 이는 물거품들처럼 여러 우주가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조건 지어지지 않은 존재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브람만은 설명이 불가능하며, 생각할 수 있는 '본질'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나타남이 우주의 본질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우주, 세상, 의식의 움직임 등은 내용이 없는 말들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관념들이 버려질 때, '세상'과 '나'란 것도 끝나며, 순수하고 영원한 의식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 절대적인 의식만이 존재하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대상의 본질조차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개념(다양한 대상의 본질에 대한)은 망상의 곁가지들인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인생에서 행복이나 불행으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그렇게 완전히 소멸이 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것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경전의 가르침들이 전하는 핵심입니다. 욕망들을 가진 사람은 즐겁고 불쾌한 경험을 겪습니다. 만약 이러한 경험들의 질병을 없애기를 바란다면, 해야 할 유일한 방법은 욕망들을 없애는 일입니다.

지고의 참나 속에는 '나'와 '세상'이 존재한다는 어떤 망상도 없습니다. 과염 누가 이런 표현들을 만들어, 지고의 평화인 순수한 공 위에다덧씌웠을까요? '나'도 '세상'도 '브람만'조차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말뿐입니다. 유일한 실재는 지고의 평화입니다. 이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어떤 구분도 없으며, 어떤 행위자나 경험자도 없습니다.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여러 정의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참나와 참나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마치 나란히 잠을 자는 두 사람의 꿈에 대한 경험이 똑같지 않고, 한 사람이 상대방의 꿈을 모르는 것과 꼭 같이, 자신의 이해와 내면의 경험은 개인적이고 독특한 것입니다.

이 우주 속의 모든 것을 자각하는 것이 참나로서의 의식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바로 그 의식입니다. 나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다수로서 보이는 것은 실제로 하나의 참나입니다. 그러나 무지 때문에, 그리고 참나의 극단적인 미묘함 때문에, 이것은 그런 것으로서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상 우주는 아무런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형상이 있는 것처럼 그 자체 내에서 이 우주를 보는 것은 바로 참나입니다. 지각력이 있거나 지각력이 없는 것 등과 같은 모든 구별도 비록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구도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의도된 것입니다.

'나'라는 개념은 우연히(야자나무에 내려앉은 까마귀와 아무 인과 관계도 없이 떨어지는 야자열매처럼) 브람만 안에서 일어납니다. 진실로, 나는 브람만입니다. 세상도 브람만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은 전능하기 때문에, 어떤 것들은 지각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어떤 것들은 지각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브람만 안에서는 그러한 구분들이 전혀 없습니다. 이 우주는 신의 수족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인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브람만 안에서는 그 본성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원적인 경험은 속박이고, 그 이원적인 경험의 포기는 해방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포기하면, 보는 사람(주체)과 보이는 대상(객체), 즉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모든 구분은 사라집니다. 의식 속에서의 움직임은 우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가짜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질 때, 니르바나가 있습니다. 브람만은 절대적이고 변화가 없습니다. 우주 전체가 어떠한 구분도 없는 절대적인 브람만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무한한 의식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우주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대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든지 간에, 절대적인 참나 속에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무지의 특징은 그것을 탐구하거나 조사하면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그것이 보여지거나 관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식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의식 속에서 어떤 구분도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브람만만이 세상인 것처럼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가 양분된 것처럼, 순수한 것이 분순한 것처럼, 충만한 것이 텅 빈 것처럼, 텅 빈 것이 충만한 것처럼, 움직임이 부동인 것처럼, 부동이 움직임인 것처럼, 무변화가 변화된 것처럼, 고요한 것이 불안정한 것처럼,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의식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참나가 대상인 것처럼,  참나 아님이 참나인 것처럼, 영원한 것이 소멸되기 쉬운 것처럼, 알 수 없는 것이 알 수 있는 것처럼, 분명한 것이 어둠에 가리어 있는 것처럼 존재합니다. 그기로 그것이 모든 존재이지만, 그것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무한한 것은 조건 지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별히 어디에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 무한함 속에는 행위자, 활동, 수단 그리고 원인과 같은 구분이 없습니다. 그 무한함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으로서 존재합니다. 그것은 볼 수 없지만, 늘 그대 앞에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의식과 둔함 사이의 구별도 없습니다. 나는 존재하며, 나는 심지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나입니다.

이 모든 우주들은 무한한 의식 속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그 의식 속에서는 그러한 현상이나 구분이 가능하지 않지만……. 그것은 마치 이 의식이 그 자체를 보고 싶어 하여, 그러한 어떤 의도도 없이 자기 자신을 비춰 주는 그 자신의 거울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순수한 존재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그 자체의 반영인 우주가 됩니다. 무한한 의식 그 자체가 세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물체들이나 물질적인 피조물이 그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것들은 그 안에서 빛나며, 그리고 그것들은 그 안으로 흡수됩니다. 이 세상 전체가 하나의 그림이며, 이 의식 자체가 이 세상이란 그림이 그려지는 순수한 무색의 물감입니다. 대상들은 창조와 파괴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식은 영원하며 절대적입니다. 수천 개의 세상들이 이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평화로운 상태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는 마치 거울이 그 안에 보이는 많은 반사물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것처럼, 창조할 어떤 의도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무한한 의식은 지금 이 세상과 앞으로 다가올 세상의 현상을 일으키는 의도나 의지 작용이 전혀 없는 원인입니다. 그것이 눈을 뜰 때 여러 세상들은 나타나고, 그것이 눈을 감으면 여러 세상들은 사라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어린아이의 환각을 내가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그 아이에게는 생생한 것처럼, 나의 의식 안에서는 어떤 우주도 없습니다. 형상들과 비전들과 또 그것들을 이해하는 지성이 순수 의식이기 때문에, 오직 그것만이 존재하지, 우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아감 등을 자각하지 못하지만, 순수 의식이나 절대적인 평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의 이러한 말조차 순수 의식이며, 이 대화가 그대 자신의 의식 차원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어떤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 바로  그것이 지고의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전혀 없는 현자는 마치 목석처럼 이곳에서 활동합니다. 그는 안과 밖에서 공히 순수한 공(空)을 경험합니다. 그에게 이 세상은 텅 빈 갈대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그의 가슴이 우주적 존재만을 즐기는 그런 사람은 평화로우며, 또한 이 삼사라의 바다를 물리친 것입니다. 욕망을 다 물리치고, 또 잠재된 경향성들이나 정신적 조건화들을 다 버린 뒤에, 해야 할 말을 하고, 만져야 할 것을 만지고, 다양한 풍미들을 맛보고, 다양한 장면들을 보고, 그리고 다양한 향기들을 맡으십시오.

이와 같이 경험의 대상들 속에는 어떤 본질도 없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만 사람은 욕망의 질병을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슬픔이고, 그 욕망이 없어지는 것은 지고의 기쁨입니다. 심지어 지옥과 천국에서도 그들에 비견할 만한 슬픔이나 기쁨이 없습니다. 마음은 욕망이고, 욕망이 없어지는 것은 목샤(해방)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모든 경전의 진수인 것입니다. 만약 이 욕망이 자기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강력하여 다른 어떤 피료법도 소용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그대가 욕망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면, 단계적으로 그 욕망을 해결하십시오. 방랑자는 자기 앞에 펼쳐진 먼 길을 보고도 절망하지 않고, 한 번에 한 발자국씩 내딛습니다. 욕망만이 삼사라 즉 현상계입니다. 왜냐하면 삼사라는 자신의 욕망이 확장되거나 투영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극복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무익합니다. 왜 사람은 경전들을 헛되이 공부하고, 스승들의 가르침을 헛되이 듣습니까? 욕망을 없애지 않고는 어떤 사마디도 없습니다! 만약 그 자신의 지혜로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면, 경전을 공부하거나 스승의 가르침을 듣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단 욕망으로 야기된 이 불안함이 억제되기만 하면, 참나 지식을 얻는 데는 노력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탄생과 노령과 죽음의 씨앗인 욕망을 극복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욕망이 일어날 때 속박도 같이 일어나며, 옥망이 그치면 속박도 같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욕망의 씨앗을 가슴속에서 평화와 평정과 자제력의 불로 태워 없애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요가는 욕망의 독소를 없애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다루었으나, 그것이 분명해질 수 있도록 다시 그대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대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어 할지라도, 참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바랍니까? 의식은 공간처럼 미묘하고 분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 자체가 이 세상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또 무엇을 바랍니까? 그대가 바랄 수 있는 어떤 대상도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어떤 대상의) 획득과 그것의 소유자 사이에 구별이나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비실재적인 물질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검은 달을 얻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얻는 것과 그것의 소유자를 명확히 이해하면, 우리는 그것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보는 사람과 봄과 보이는 것 사이에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질 때, 자아감 등은 참나 즉 의식 속으로 통합됩니다. 니르바나 즉 해방의 상태에서는 보는 사람도, 봄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보는 사람과 봄과 보이는 것이 있을 때는 어떤 니르바나도 없습니다. 가공의 대상들의 모습은 아무런 실재적인 소용이 없습니다. 예컨대 은처럼 보이는 조개껍질은 전혀 현금가가 없습니다. 그대가 가공의 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대는 불행을 불러들입니다. 반면에 그것의 비실재성을 깨달으면 큰 행복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두 개의 물건 사이에 인과 관계조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의식 하나만이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것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말들에 불과합니다. 물의 유동성이나 공기의 움직임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어떤 슬픔이나 행복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전체가 신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의식 이외의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욕망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라마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브람만 즉 무한한 의식이라면, 욕망 또한 그 무한한 의식이라는 것이 틀림없지요! 그렇다면 경전에서 하라, 하지 말라고 할 정당한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단 진리를 깨달으면, 욕망은 브람만이 되고,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 라마여! 그러나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그 순간에 어둠이 사라지듯이, 참나 지식이나 진리에 대한 지식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욕망은 사라집니다. 참나 지식의 태양이 떠오를 때, 이원성의 의미는 바사나 즉 정신적 조건화와 더불어 사라집니다. 욕망이 어떻게 그 상태에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참나 지식을 갖춘 사람에게는 대상들에 대한 혐오나 애착이나 그것들에 대한 욕망도 없습니다. 대상들에 대한 기호가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참나 지식을 갖춘 사람이 조금이라도 욕망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우연적이고 원인이 없으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요청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한 욕망이 브람만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큼은 확실합니다. 즉, 현명한 사람에게는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하라, 하지 말라고 하는 지시와 금지 사항들은 참나 지식을 갖춘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욕망이 사라져 버린 사람에게 어떤 지시를 내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상, 이런 것들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우리가 식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표시들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는 욕망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그는 모든 사람의 행복과 기쁨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대상들에는 본질이 없음이 이해되고 쾌락에 대한 기호마저 전혀 없을 때, 욕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해방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일원성과 이원성의 개념들을 초월할 때, 그는 욕망과 욕망 아님을 똑같고 신성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는 동요가 없으며, 평화롭게 신 안에 안주합니다. 그는 어떤 일을 행함에도 관심이 없고, 그가 어떤 일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즉 욕망이나 욕망 없음, 진리나 허위, 참나나 다른 것, 삶이나 죽음, 그 어느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어떤 욕망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욕망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브람만입니다.

기쁨이나 슬픔이 없고, 평화에 안주하며, 내면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깨달음을 얻은 자입니다. 그는 슬픔조차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진리의 개달음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을 때, 공간은 공간에 의존하고, 평화는 평화에, 행운은 행운에, 공은 공에, 그리고 이 세상은 브람만에 각각 의존합니다. 가짜 자아의식은사라집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확실히 다른 어떤 사람의 상상 속에 나타나는 도시와 같습니다. 그것은 가공의 현상입니다. 자아감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실재적인 것입니다. 이 현상계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요, 실재하지 않는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욕망이나 욕망 아님에 의해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바로 그의 경우에는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의식 그 자체를 알고자 하여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 자체가 바로 삼사라이고 또한 욕망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방입니다. 이러한 것이 욕망이라는 것을 알아 욕망을 버리십시오.

그러나 진실로, 욕망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우주가 있든지 우주의 소멸이 있든지 간에, 여기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어떤 것의 손실이 없습니다. 욕망과 욕망 아님, 진리와 허위, 존재와 존재 아님, 행복과 슬픔, 이 모든 것은 공간에서 일어나지만, 그 어떤 것도 일으키지 못하는 개념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욕망이 나날이 약화되어 가는 그런 사람은 해방될 수 있는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치료법도 욕망이 가슴속에 일으킨 그 무서운 고통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욕망을 제거하는 데는 참나 지식이나 진리에 대한 지식 이외의 어떤 치료법도 효과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치료법 자체가 허위(자아감 등과 같은)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그런 치료법의 도움으로 욕망을 해결한다는 것은 무익합니다.

의식은 자아감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물질이 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마음과 몸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이기 때문에, 그것은 의식으로서의 그 실재를 버리지 않고 그 자체(이제는 몸으로서이지만)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이 세상이나 몸 등의)는 질실도 아니요, 허위도 아닙니다.

땅은 비어 있습니다. 산은 비어 있습니다. 견고한 물질들은 비어 있습니다. 여러 세상도 비어 있습니다. 움직임도 비어 있고, 심지어 이 우주의 경험도 비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현상계는 나타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무한한 의식의 이 바다 속에서, 여러 세상들은 비록 다른 것처럼 보일지라도 전혀 다르지 않은 파도들이나 물결들과 같습니다. 이것들은 아무런 이유나 원인도 없이 일어나지만, 사실은 일어나지도 않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무한한 의식 속에서 그 자체 이외의 다른 대상이 조금이라도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요기들이나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존재들은 눈 깜깍할 사이에 의식이라는 마법의 물약으로 이 세상 전체를 공으로 만들 수 있고, 또한 그 공을 이 세상으로 다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들 싯다(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존재)들이 우주 속에 창조한 그러한 세상들과 피조물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단지 순수한 무한한 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요기들은 심지어 그러한 하나의 우주에서 또 다른 우주로 여행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우주는 향기와 꽃처럼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다르게 보입니다. 무한한 의식 속에 그들이 나타나는 것은 환영입니다. 각 관찰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개념들에 의하여 그것들이 이해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러한 개념들에 일치하여 경험됩니다. 요기들의 경우에, 이러한 개념들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릴르 보고, 그들의 말은 진리에 가깝습니다. 나머지 사람의 경우에는, 그들의 말은 그들 자신의 개념들이나 정신적 조건화로 채색이 되어 있습니다.

오, 라마여! 시간은 여러 세상들을 움직이게 하고, 그 세상들 속에서 허구적인 '나'와 '너', '그들,' '거기,' '따라서' 등이 생겨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무한한 순수 의식이며, 그것은 창조되지 않았고 소멸되지도 않는 지고의 평화입니다. 이것이 신이며, 참나입니다. 욕망이나 그 밖의 모든 것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서 일어나겠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의식은 마치 의식이 그 자신의 대상인 것처럼, 그 자신 속에서 그 자신의 참나를 봅니다. 창조는 브람만이 만든 창조와 사람의 마음이 만든 창조라는 두 개의 창조로 되어 있다고 간주되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그 둘이 모두 참나 즉 무한한 의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의식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의식 속에 내재된 자각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관적인 이상주의와 절대적인 이상주의 사이에 어떤 차이도 볼 수 없습니다.

이 모든 다양한 대상들은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나며, 무한한 의식 안에서 존재하고, 또한 그 무한한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진리 때문에 이들 다양한 대상들에 대한 경험이 일어납니다. 경험의 주체와 객체가 모두 의식이기 때문에, 객체는 마치 물이 물과 하나가 되듯이 주체 속으로 흡수됩니다. 그럼으로써 경험이 일어납니다. 만약 이것이 그렇지 않다면, 두 나무 조각들 사이에서처럼 전혀 경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객체 속에는 다양한 원소들(흙, 물 등)이 존재합니다. 주체 속에는 생명력, 마음, 지바 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순수 의식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의식에서 일어나는 표면적인 현상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실상 실재하지 않습니다. 비실재적인 것은 본질이 없기 때문에, 실재나 무한한 의식이나 브람만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대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이 깨어나면서 그가 꿈 속에서 본 대상들이 없어질 때, 그대가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아감을  초월한 사람에게는 우주 전체가 풀잎 하나보다 가치가 적어 보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 삼계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유혹받지 않으며, 심지어 신들의 지위조차 그에게는 머리카락 한 올보다 가치가 더 적습니다. 그에게 이원성이나 다양성은 실재하지 않는 가짜입니다.

이와 같이 현명한 사람의 눈에 우주 전체가 공으로 보일 때, 그의 가슴속에 어떻게 욕망이 일어나겠습니까? 그에게는 심지어 삶과 죽음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자세히 조사해 보면, 심지어 몸 등도 실재하지 않는 가짜로 보입니다. 이 몸과 세상에 대한 개념들이 없어짐과 더불어 마음마저 사라질 때는 참나 즉 무한한 의식만이 남습니다.

자아감은 진리의 본질에 대한 그러한 조사가 없을 때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그 진리의 본질을 조사하면, 자아감은 일어나지 않고 무한한 순수 의식만 남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객관화로부터 벗어납니다. 일상생활이 신성한 삶으로 바뀝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무엇을 즐기든, 그 모든 것이 신성해집니다. 욕망이 없고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채, 참나 지식에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다른 어떤 동기도 없기 때문에, 경전들이 그대의 행동의 안내자가 되도록 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무지의 장막이 모두 찢겨지고, 어떤 욕망도 없는 그런 사람은 순수한 지성의 빛으로 빛을 발합니다. 그의 모든 의심은 사라지고, 그는 사방에 빛을 뿌립니다. 의심이 없고 독립적인(모든 의존에서 벗어난) 그런 사람과 접촉하는 사람도 역시 정화되고 빛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대상들이 실재한다는 개념은 오직 무지할 때만 일어납니다. 대상들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대상들에 대한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심지어 '우주'와 '해방'조차도 의미 없는 말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의식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도 '그것'도 이해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슬픔을 포함한 자아감과 거기에 딸린 나머지 모든 것들을 자각하지 못할 때 얻어집니다. 깊은 수면 상태에서는 꿈들도 없습니다. 그리고 깊은 꿈을 꾸는 동안에는 수면 상태가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자아감이나 슬픔(현상계의 개념에서 나온)에 대한 자각과, 평화(니르바나에서 나온)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개념에 불과합니다. 진실로, 우주도 니르바나도, 수면도 꿈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부될 때,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혼란이나 망상은 실재하지 않으며, 실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사를 해 보고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사를 통해 여실히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입니다. 그것만이 존재하지, 그 안에 어떤 다양성도 없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으로부터 멀어질 때, 큰 슬픔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참나에 안주할 때는 큰 평화와 자제력이 나타납니다.

원소들(감각들, 마음 등)은 그들의 다른 상대(빛, 공간 따위)의 도움이 있어야만 작용합니다. 참나 즉 무한한 의식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활동들에 개입하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나 지식을 자기고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하나의 우주 의식에 대한 순수한 자각이 있으며, 이 세상의 활동조차 마치 움직임이 바람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 순수 의식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나의 몸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나의 밝은 지성의 빛에는, 그들의 신체적인 존재가 마치 잠자는 사람에게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비실재적입니다. 나와 그들의 관계는 브람만 속에 존재하는 브람만의 관계입니다. 그들의 비전이 무엇이든 간에, 그렇게 놔두십시오.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에 브람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조차도 분명히 그대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아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해방에 대한 욕망도 없습니다. 해방이나 부 등도 '나는 존재하지 않고, 또한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깨달음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외부의 형상들과 내면의 심리적 상태들을 아는 그것이 참나(스와루빰)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나 아닌 것이 약화되고 참나의 본성이 확대될 때, 그때 일어나는 빛 속에서는 이 세상은 단순한 하나의 경험으로서 이해됩니다. 사람이 참나에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 이 현상계는 마치 깊은 수면 상태에서의 꿈처럼 사라집니다.

쾌락들은 무서운 질병이고, 친척들은 속박이며, 부(아르타)가 불행의 근원임을 안다면, 마땅히 참나에 안주해야 합니다. 참나 아닌 것이 삼사라이며, 참나에 안주하는 것이 지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의 공(空)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나는 자아도 아니요, 대상들도 아니며, 현상계도 아닙니다. 나는 지고의 평화인 브람만입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대만이 '그대'를 자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지고의 평화만을 봅니다. 브람만의 의식은 마치 꿈꾸는 사람이 수면의 상태를 모르고, 잠자는 사람이 꿈의 상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과 꼭 같이, 이 세상의 의식을 알지 못하며, 이 세상의 의식 또한 브람만의 의식을 알지 못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브람만과 이 세상을 모두 깨어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들로 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압니다.

햇빛이 있는 곳에 밝음이 있다는 것이 확실한 만큼이나 분명하게, 세상의 대상들에 본질이 없음을 경험할 때 영적인 각성이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유일한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우주 의식의 궁극적 본질이 존재의 모든 원자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잴 수 없는 것을 재거나 무한한 것을 셀 수 있겠습니까? 오, 라마여! 그대가 그대 앞에서 보는 이 즐거운 우주의 춤은 단지 무한한 의식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잠자는 사람이 깊은 잠에 들지 않을 때, 그는 꿈의 작용이 일어나는 장(場)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참나 지식이 없을 때, 그 자신은 이 현상계를 만드는 씨앗이 됩니다. 심리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이 자신을 깊이 명상하며,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십시오.

영적으로 깨어난 사람이 깊은 수면의 상태와 비슷한,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갈 때, 그가 있는 그 상태를 스바바바(참나 본성)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가 되면, 해방으로 나아갑니다. 브람만에 자리를 잡아, 브람만과 이 '세상' 사이의 차별을 보지 않는 사람은 주체와 객체와 술부 사이에 어떤 구분도 일으키지 않으며, 그러므로 행위자의 느낌이 없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의 두 눈에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원성도 다양성도 없습니다.

가상의 도시는 도시가 아니라 상상입니다. 이 현상계도 세상이 아니라 현상입니다. 실재는 무한한 의식 즉 브람만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현상계는 무지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지혜가 무지를 없애 줍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재 그 자체에게는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실재는 일어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실재는 분할할 수 업슨 무한한 의식이며,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 자체 내에서 분리를 함으로써 그 자체를 그 자신의 대상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분을 일으키고, 무지인 불완전한 지식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자각이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신 사이의 구별은 말뿐인 가짜입니다. 분할할 수 없는 무한한 의식 속에서는 그러한 구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가공의 개념들 때문에, 언제 어디선가 금이 팔찌로 변해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와 꼭 같이, 창조가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이원성마저 존재하지 않는데도, 창조주와 이 창조 사이의 인과 관계를 조사한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존재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즉, 분할할 수 없는 의식으로서) 이해될 때, 이 현상계는 없어집니다. 여기에서 지성을 갖춘 존재로서 활동하면서, 이 진리의 깨달음에 바위처럼 확고히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그대의 지혜를 포함한 그대의 모든 자연스러운 활동이나 경험들과 더불어 지고의 신인 참나를 숭배하십시오. 이것들과 함께 숭배를 받는 참나는 즉시 그대에게 영적인 깨달음의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이에 비해, 루드라나 비슈누 같은 신들을 숭배하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신이신 참나가 자제력과 삿상(현자들과의 교제)과 더불어 참나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숭배를 받을 때, 그것은 즉시 목샤 즉 궁극적인 해방을 줍니다.

실재를 지각하는 것이 최고의 숭배입니다. 신이 참나로서 존재할 때, 오직 바보만이 다른 것들을 숭배합니다. 신들에 대한 숭배와 순례와 금욕 생활 등도 지혜 즉 비베까와 함께 이루어지면 축복을 준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지혜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비베까 그 자체와 함께 참나를 숭배하는 것이 족하지 않을까요? 이 지혜를 가지고 몸의 의식을 제거하고, 또한 그와 더불어 수치, 공포, 절망, 쾌락 그리고 고통을 없애십시오. 지혜는 의식을 참나로서 드러냅니다. 그러나 몸 등과 같은 대상들이 없을 때, 이 의식은 형언할 수 없는 지고의 평화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면서, 경전들로부터 얻은 지식에 만족하여 안주하는 것은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의 헛된 상상과 같습니다. 대상들의 비실재성이 이해되고, 의식이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이해될 때, 설명이 불가능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무지의 열병이 없는 사람과, 참나의 지식 때문에 가슴이 고요하고 침착한 사람의 특징은 쾌락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에 지나지 않는 지식과 지혜에 대해서, 그리고 해당되는 진리도 없이 그 말들이 가리키는 개념들에 대해서도 이제 그만 이야기합시다. 니르바나나 해방이란 자아감을 경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그가 꿈 속에서 본 대상들에서 더 이상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현상계의 대상들로부터 더 이상 어떤 만족도 얻지 못합니다. 마치 흡혈귀나 악귀들이 어두운 숲 속에서 나타나듯이, 이 모든 14계도 무지와 망상의어둠 속에서 나타납니다. 진리를 조사해 보면, 악귀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14계에 대한 진리도 조사해 보면, 그들은 순수 의식으로 보입니다. 대상들은 분명히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대상들에는 주체인 의식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식이 주체라고 생각될 수 있는 관련된 아무런 객체가 없기 때문에, 의식도 또한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순수 의식으로서 계십시오. 참나 지식의 진수를 마시십시오. 니르바나 즉 해방의 동산에서 모든 의심이 없는 상태로 쉬십시오. 오, 그대들이여! 왜 그대들은 본질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삼사라의 숲을 떠돌아다니고 있습니까? 오,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여! 이 세상에서 희망과 행복에 대한 욕망이라고 하는 이 신기루를 쫓아가지 마십시오. 쾌락들이란 정체를 숨기고 있는 고통입니다. 왜 그대는 그 쾌락이 그대 자신을 파멸시키는 원천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이 가공의 현상계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이 망상을 똑바로 보고, 그것을 탐구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시작도 끝도 없는 그대 자신의 참나에 안주할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이 삼사라를 실재하는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그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을 물리치고 난 뒤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 사실상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이름도 없습니다. 사자와 같이 무지의 우리를 부수고 나와, 모든 것을 초월하십시오. '나'와 '나의 것'이란 개념들을 버리는 것이 해방입니다. 그 밖의 어떤 것도 해방이 아닙니다. 해방은 평화입니다. 해방은 모든 조건화의 소멸입니다. 해방은 모든 종류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 세상은 무지한 사람과 현명한 사람에게 똑같은 빛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참나 지식을 얻은 사람에게 이 세상은 삼사라로서 보이지 않고, 하나의 무한한 분할할 수 없는 의식으로서 보입니다. 참나 지식을 갖춘 사람은 무지한 사람의 눈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깨어 있습니다. 또 무지한 사람에게 실재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마치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이 그의 꿈 속에서 이 세상을 '보고,' 깊은 수면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꼭 같이 이 세상을 경험합니다. 그의 가슴과 마음은 욕망의 불이 꺼졌으므로 서늘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의 마음은 애착이 없기 때문에, 심지어 그가 '명상 수행'을 하고 있지 않을 때도, 마치 웅덩이의 물이 배수구가 없을 때 아무 동요 없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완벽한 평정의 상태에 있습니다.

대상은 밖으로 드러난 마음의 활동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활동은 대상이 지성에다 새긴 인상입니다. 마치 똑같은 물이라도 그것이 바다에 이를 때까지 각기 다른 이름들과 다른 강물들에서 흘러가듯이, 똑같은 의식도 다양한 대상들이면서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대상과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 둘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그들 모두가 없어집니다. 그들 모두는 본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없어지면 평화가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것들을 버립니다. 그렇다고 그가 잃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상'과 '마음'은 서로 상응하는 실체가 없는 단지 말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정말로 무한한 의식뿐입니다.

참나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무지한 사람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시간, 공간, 물질 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용감한 사람의 눈에는 어떤 악귀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현명한 사람의 눈에는 어떤 세상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에게는 진리를 아는 사람조차 무지하게 보입니다.

오, 라마여! 물질과 마음의 개념들에 연루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대 자신의 참나 속에 안주하십시오. 나무의 다양한 부분들로 자라나는 씨앗처럼, 이들 표면상의 '형상들'을 취하는 것은 오로지 의식뿐입니다. 이들 대상이 떨어져 나간 뒤 남는 것(의식)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것을 제한시키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마음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둘 다 가짜입니다. 그대는 이 가짜의 현상에 현혹되어 있습니다. 참나 지식이 이 망상을 없애 줄 것입니다. 참나 지식과 현상계의 없어짐, 이 두 가지가 지혜(보담 즉 개어남)의 특징입니다. 욕망이 소멸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자아감은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뿌리에서부터 모든 가지들과 잎들과 꽃들과 열매들에 이르는 나무 전체가 오직 단 하나의 동일한 나무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분할할 수도 없고 변화될 수도 없는 의식만이 전부입니다. 마치 버터기름이 그 속성상 돌(그것을 얼릴 때)처럼 굳어지듯이, 의식도 '얼려'지면 물질로 바뀝니다. 그러나 무한하고 변화되지 않는 절대적인 의식 속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정신적 조건화란 것도 단지 가짜 개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참나 지식을 가지고 있고, 망상과 자아감이 없는 사람의 가슴속에서는 그것이 녹아 없어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제 나는 현자의 가슴이라고 하는 숲 속에서 자라는 사마다나(평온)의 나무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그 나무의 씨앗은 이것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든, 아니면 슬픔을 경험하고서 생겨났든 간에, 이 '세상'을 등지는 것입니다. 마음은 밭입니다. 그 밭은 바른 활동에 의해 경작이 되고, 바른 느낌에 의해 밤낮 물을 공급 받으며, 쁘라나야마의 수련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 받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이 밭에는 사람이 지혜라고 하는 숲 속에 혼자 있을 때, 사마디(세상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라고 하는 씨앗이 저절로 떨어집니다. 현명한 사람은 지성적인 방법으로 이 명상의 씨앗에 계속 물을 주고 영양분을 공급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진정으로 빌어 주는, 순수하고 다정한 현자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 다음 그는 완전한 내면의 텅 빔을 가져다주고, 또한 감로와 같은 순수하고 시원한 지혜로 가득 차 있는 경전들의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명상함으로써 사마디나 명상의 시앗에 물을 주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의 밭에 떨어진 명상이나 사마디의 귀중한 씨앗을 안다면, 현명한 사람은 고행이나 자선 사업 등을 통하여 그 씨앗을 정성들여 소중히 여기고, 영양분을 주어야 합니다.

이 씨앗이 싹트기 시작할 때, 그것은 평화와 만족에 의해 더욱 보호 받아야 합니다. 동시에 만족의 도움을 받아서 욕망, 가족에 대한 애착, 자만, 탐욕 등의 새들로부터 그 씨앗을 보호해야 합니다. 올바르고 사랑스러운 행동의 빗자루로 불안(라자스적인 불안)의 먼지를 쓸어 내야 하는데 반해, 무지(따마스적인 무지)의 어둠은 올바른 이해의 빛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부의 자만이라고 하는 번개와, 쾌락의 추구라고 하는 천둥이 그 밭을 강타하고 황폐화시킵니다. 이런 것들은 관용과 자비, 자빠, 고행, 자제력, 그리고 쁘라나바(OM)의 의미에 대한 명상과 같은 삼지창으로 막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 씨앗을 보호한다면, 이 씨앗은 지혜로 자라납니다. 그 지혜와 더불어 마음의 밭 전체가 아름답게 빛을 발합니다. 싹은 두 개의 잎으로 자랍니다. 하나는 경전들에 대한 연구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삿상(현자들과의 교제)입니다. 곧 그것은 공평성이나 마음의 무색이라는 수액과 함께 만족이라는 껍질을 길러 냅니다. 그것은 경전의 지혜라는 비를 맞고, 곧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그 다음 그 나무는 라가 드베사(애착과 혐오)라고 하는 원숭이들이 흔들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다음 그 나무에서는 아주 멀리까지 뻗어 가는 순수한 지식이라는 가지들이 생겨납니다. 명확한 비전, 진실, 용기, 구름이 끼지 않는 이해, 평정, 평화, 다정함, 자비, 명성 등은 사람이 디야나 즉 명상에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 생겨나는 그 나무의 다른 가지들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명상의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그 그늘 속에서 모든 욕망과 갈망들은 종말을 고하고, 모든 타는 듯한 강렬한 고통은 사라집니다. 명상은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마음을 촉진시키는 자제력의 그늘을 확대시킵니다.

무수한 관념들과 개념들과 편견들의 황무지를 떠돌아다니다가 올바른 길을 찾은 마음이라는 사슴이 이 나무 아래에 피신해 있습니다. 이 사슴은 그 가죽 즉 외피를 탐내는 많은 적들의 추격을 받고 있습니다. 사슴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몸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자신을 숨깁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으로 사슴의 에너지는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삼사라의 숲 속을 이리저리 달리고, 바사나 즉 잠재된 경향성이라는 바람에 시달리면서, 자아감의 열기에 그을린 채, 사슴은 끝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슴은 그것이 얻는 것에 쉽게 만족하지 못합니다. 사슴의 욕구는 늘어나고, 그것은 그러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더 멀리까지 계속 갑니다. 그것은 아내와 자식 등이라는 많은 쾌락 중심들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들을 돌보느라 자신의 힘을 다 써 버립니다. 그것은 부 등의 그물에 걸려,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칩니다. 이러한 발버둥 속에서 그것은 거듭해서 넘어지고 상처를 입습니다. 갈망의 물결에 밀려 떠내려가면, 그것은 아주 멀리까지 떠내려갑니다. 무수한 병들이 끊이지 않고 그를 추격합니다. 그것은 또한 상이한 감각적 경험들의 덮에 걸려 있습니다. 그것은 번갈아 천국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로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적 변화들과 사악한 특성들이라고 하는 돌들과 바위들에 맞아 박살이 나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그것은 그 자체의 지성으로 다양한 행동 규범들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들은 아무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참나 즉 무한한 의식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이 사슴은 세속적인 쾌락과 그러한 쾌락에 대한 욕구라고 하는 뱀이 토해 내는 유독한 독기를 마시고 감각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분노의 불길로 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안과 걱정에 의해 말라 붙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이라 알려져 있는 호랑이의 추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착의 함정에 떨어집니다. 그 가슴은 자신의 자만심의 좌절로 망가졌습니다.

어떤 단계에 으리자, 사슴은 이 모든 것을 등지고, 이미 설명한 어떤 나무(명상의 나무)의 보호를 찾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것은 밝게 빛을 발합니다. 지고의 평화나 희열은 조건화가 없는 의식의 상태 이외의 다른 어떤 조건에서도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직 사마디 즉 명상이라고 하는 나무의 그늘에서만 얻어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휴식을 얻은 뒤에, 사슴(마음)은 거기에서 기뻐하며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 뒤에, 명상 즉 사마디라고 하는 나무는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그 열매는 지고의 참나가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마음이란 사슴은 자기 위에 있는 명상의 나무에 달려 있는 그 열매를 바라봅니다. 그 후 곧 그것은 다른 모든 일을 버리고, 그것의 열매들을 맛보기 위하여 그 나무로 올라갑니다. 나무에 올라간 뒤에, 마음이란 사슴은 세속적인 사고 양식들을 버리고, 다시는 더 비천한 삶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이 마음이란 사슴도 명상의 나무에 올라갈 수 있도록 이전의 습관들을 버립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사슴은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런 바보로 남아 있었지?"라며 큰 소리로 웃습니다. 탐욕 등을 버리고서 사슴은 황제처럼 그 나무 위에서 쉬고 있습니다.

나날이 사슴의 갈망이 줄어듭니다. 사슴은 구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손에 들어오는 것을 피하지 않고, 또한 노력 없이 쉽게 얻지 못하는 것을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사슴은 무한한 의식 즉 절대적인 존재를 다루는 경전들의 지식으로 자신을 에워쌉니다. 사슴은 속으로 자신이 과거에 무지했던 상태들을 자각하고 웃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 자식 등을 보고, 마치 그들이 전생의 친척들이거나 아니면 꿈 속에서 본 사람인 양 그들을 보고 웃습니다. 애착과 혐오, 두려움과 허영, 자만과 망상에 기초를 둔 모든 활동이 사슴에게는 마치 모두가 연극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의 덧없는 경험들을 볼 때, 그것들이 미치광이의 경험들과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경멸조로 웃습니다.

그렇게 특별한 상태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마음이란 사슴)은 아내, 자식 등에 대하여 어떠한 불안이나 걱정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은 시각으로 유일한 본질(무한한 것) 속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실재)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비전을 완전히 집중시킨 채, 그것은 사마디의 나무로 올라갑니다. 그것은 심지어 이전에 불운들이라고 여겼던 것마저 즐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막 깨어난 것처럼 필요한 활동을 하다가, 그 후에 다시 명상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것은 언제나 사마디 상태에 들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아감이 완전히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또한 다른 것들처럼 숨을 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아감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구하지 않았는데도 쾌락들이 그것을 찾는 그러한 경우에도, 그 사슴은 전혀 강한 흥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자연스럽게 모든 쾌락에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만합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활동들과 추구들에는 무감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은 목샤 즉 해방이란 최고의 열매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것은 붓디 즉 지성조차 버리고 절대적인 의식 속으로 들어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러한 것이 대상들의 존재에 대한 개념들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순수한 참나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지고의 성취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구분을 버릴 때, 분할할 수 없는 것만이 남게 됩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하나이며,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이것이 브람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와 아내와 세속적인 대상들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 사람은 그 지고의 참나에 안주합니다. 심지어 마음과 무한한 의식 사이의 구분마저 떨어져 나가면, 모든 구분은 사라져 무(無)가 됩니다. 이후에 마치 조각되지 않은 석상이 대리석 석판으로 존재하듯이 지고의 존재로 존재합니다.

무지한 사람은 명상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가 그렇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란 이미 참나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각의 대상들에 사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지만, 이것이 무지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합니다. 대상에 대한 작가이 영원한 순수 의식으로 보일 때, 그것은 사마다나 즉 평온의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가 통합되면, 마음은 사마다나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참나에 안주한다는 것은 참나가 대상에 사심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무지는 참나가 대상들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확실히 그러한 움직임은 무지한 사람의 경우에만 일어납니다. 감로의 맛을 본 사람은 아무도 쓴 것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자의 경우에, 명상은 자연스럽고 노력 없이 저절로 됩니다. 강렬한 욕망이 전혀 없을 때, 참나는 결코 버려지지 않습니다. 혹은 마음이 확장되어 우주 전체를 포함하면, 또다시 참나는 버려지지 않습니다. 이 정도는 확실합니다. 즉, 참나 지식을 얻을 때까지는 사마디를 얻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디에 자리 잡은 사람은 인간의 형상을 한 브람만입니다. 그에게 경의를 포하십시오.

대상들에 관심이 없을 때, 심지어 신들조차도 그 사람의 명상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명상을 계발해야 합니다. 여기에 이르는 방법으로는 첫째가 경전들이고, 둘째는 성현들과의 교제이며, 셋째는 명상입니다. 무지는 불완전한 지식으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불이 그려진 그림 가까이에 앉는다고 해서 추위가 경감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이 세상을 물질적인 실재로서 보지만, 현명한 사람은 이 세상을 의식으로 봅니다. 현자에게는 자아감도 이 세상도 없습니다. 그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비전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에게 이 세상은 마른 장작과 돌이 있는 세상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이 세상을 하나의 참나로서 보지만, 무지한 사람은 이 세상을  하나의 참나로서 보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끝없는 논쟁들에 열중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만물에 대하여 우호적입니다. 뚜리야 혹은 사마디는 깨어 있거나 꿈꾸거나 잠자는 상태에서 시종 존재하는 것인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조건화라고는 오로지 마음뿐이지만, 그 마음도 탐구를 하면 사라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지고의 진리라는 열매를 얻어 해방된 상태가 되면, 심지어 자각도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지고의 진리 속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사슴이란 생각도 마치 연료 없는 등불처럼 사라집니다. 지고의 진리만이 남게 됩니다. 명상의 열매 즉 참나 지식을 얻은 마음은 벼락(바즈라)처럼 확고부동합니다. 마음의 특징인 움직임이나 불안함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위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밝은 빛만이 아무 방해나 구분 없이 순수 으식으로서 남게 됩니다.

그 상태에 이르면, 모든 욕망이 아무 노력 없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노력 없는 명상만이 남게 됩니다. 브람만을 깨달을 때까지는 참나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참나 등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명상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고의 진리를 깨달으면, 마음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쁨과 절망은 물론이고, 바사나 즉 정신적 조건화나 까르마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기는 산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명상이나 사마디(바즈라 사마다나)에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은 채, 계속적이고도 부단한 명상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요기가 쾌락에 관심이 없고, 그의 감각들이 아주 평화롭게 통제되며, 그가 즐겁게 참나에 안주하며, 그의 모든 마음의 변화들이 없어졌을 때, 그가 사마디의 이름을 걸고 해야 할 일이 그 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음의 조건화가 없기 때문에, 요기가 이 세상을 관찰의 대상으로서 알지 못할 때, 그는 마치 어떤 다른 힘에 강요받기라도 한 듯이, 바즈라 사마디(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명상)에 머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거기에서 조금도 다른 곳으로 빗나가지 않습니다. 마음이 진리를 알았으므로 세속적인 대상들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평화로워지면, 그것이 바로 사마디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쾌락을 확고부동하게 물리치는 것이 명상입니다. 그것이 결실을 맺으면, 그것은 바즈라 사라(조금도 흔들리지 않는)입니다. 이것은 또한 완벽한 지식의 상태이기 때문에, 니르바나 혹은 희열의 상태라고도 합니다.

쾌락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다면, 명상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욕망이 존재하지 않으면, 명상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완벽한 지식이 있고, 동시에 쾌락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절대적인 의식(니르비깔바 사마디)이 자연스럽고도 수월하게 따라 옵니다. 쾌락에 대한 강한 욕망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완벽하게 깨달음을 얻은 사람(삼붓다)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완벽한 깨달음은 쾌락의 추구를 완전히 외면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참나에 의지하는 사람은 조금도 욕망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쾌락적인 경험에 대한 욕망은 오직 참나로부터 멀어지는 움직임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경전이나 자빠 등에 대한 연구가 끝날 때에, 사람은 사마디에 들어 갑니다. 그리고 사마디의 수련 후에도 경전을 연구하거나 자빠 등을 해야 합니다. 오, 라마여! 언제나 니르바나 상태에 머물러 계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세속적인 삶의 고통들과 시련들로 헤매며 떠돌아다니다가, '이 모든 일에 싫증을' 느낄 때, 그는 이 모든 것을 벗어나는 피난처를 구합니다. 나는 이제 그대에게 그러한 사람이 휴식과 평화에 도달하는 점진적인 단계들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직접적인 원인 때문이든지, 아니면 그런 이유도 없이, 그는 세속적인 일(쾌락과 부의 추구)들을 외면하고, 현자의 은신처를 찾습니다. 그는 나쁜 친구들을 매우 멀리하며 피합니다.

성현들과의 교제로 흘러나오는 축복은 다른 어떤 축복에도 견줄 수 없습니다. 성현의 성품은 침착하고 평화롭습니다. 그의 품행과 활동들은 순수합니다. 그러므로 성현과 함께 있으면 그를 찾는 누구에게나 평화와 미덕이 증진됩니다. 성현과 함께 있을 때 사람은 두려움을 잊어버립니다. 사악한 성질도 사라지고, 사람은 순수해집니다. 신들과 천사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랑과 애정마저 성현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무한한 사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른 행동을 행할 때, 그의 지성은 평화에 의지하며, 완벽한 거울처럼 진리를 비춰 줍니다. 바로 그때 경전의 말씀들이 전하는 의미가 충분히 명확해집니다. 현자는 지혜와 미덕의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 무지의 우리를 벗어나고자 할 때, 그는 쾌락을 피해 절대적인 희열을 향해 도망칩니다.

쾌락들을 좇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현자들도 그 쾌락을 물리치지만, 그것은 그의 가슴속에 약간의 불안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그가 즐거운 상황들에 처해 있지 않을 때 그는 최고로 행복합니다. 현자들이나 요기들과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은 그러한 현명한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그들이 그에게 주는 영적인 힘이나 지식의 선물마저도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그는 경전들의 진리 속으로 빠져듭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이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모든 이기적인 행동과 부나 쾌락을 얻으려는 노력을 점차 버립니다. 그는 자기희생적인 자선 사업에 모든 것을 나누어 줍니다. 오, 라마여! 지옥조차도 이기적인 활동이 일으키는 괴로움만큼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부는 끝없는 불행의 근원이요, 행운은 영원한 불운이며, 쾌락의 즐거움은 영속적인 질병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왜곡된 지성에 의하여 오해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만족만이 최고의 약이요, 최고의 강장제이며, 최대의 행운입니다. 만족해 하는 가슴은 깨달음을 얻을 준지가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세속적인 것을 피하십시오. 그 다음 삿상에 의존하고, 경전들의 진리를 탐구하고, 쾌락에 대한 무관심을 계발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최고의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마음이 초연과 성현들과의 교제에 자리를 잡고 있고, 경전들의 연구를 통해 쾌락의 추구에 대한 무관심이 일어나면, 부를 더 이상 동경하지도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조차도 마른 똥처럼 취급합니다. 그는 친척들과 친구들을 같은 순례자로서 취급하며, 적절한 시기에 그들에게 적절하게 봉사합니다. 그는 은둔 생활이나 정원들, 성지들, 도는 자신의 집, 친구들과의 놀이나 장난, 경전의 토론 등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고의 상태에 안주해 있습니다. 지고의 상태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의 오락은 무지에 의해 생긴 것이고, 이 무지는 가짜이며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나에 확고히 자리 잡고서, 조각상처럼 마음이 혼란되지 않는 사람은 감각의 대상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와 '세상', 시간과 공간, 지식이나 공, 이것들은 비록 계속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진리를 아는 사람에 의해서는 경험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한 그 태양에게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개성에는 라자스(불안한 활동이나 불순물)가 전혀 없고, 그는 심지어 사뜨바나 순수를 초월했으며, 또한 무지의 어둠이 그에게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구분을 초월했으며, 그의 마음이 마음 없음의 상태가 되어 버린 그런 사람의 상태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밤낮 그의 숭배를 받고 있는 신은 그에게 니르바나라는 지고의 상태를 줍니다.

신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요, 접근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밝은 참나가 바로 신입니다. 그로부터 모든 사물이 비롯되며, 또 그에게로 그것들은 돌아갑니다. 이곳에 있는 만물들은 그들 자신의 다양한 방법으로 언제나 글르 숭배하고 경배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그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숭배를 받고 있음으로써, 참나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참나는 사람의 내면적 각성이나 깨달음을 위해 전령을 보냅니다.

이와 같이 참나가 보낸 전령이 비베까 즉 지혜입니다. 그것은 가슴의 동굴 속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무지의 조건화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점진적인 각성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이 지혜입니다. 이와 같이 깨어난 이가 내면의 참나이고, 그것이 옴(OM)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고의 참나입니다. 그는 편재하는 존재입니다. 말하자면, 우주가 그의 몸입니다. 모든 머리와 눈과 손 등이 그의 것입니다. 그는 자빠와 자선 사업, 의식적인 숭배, 경전의 연구, 그리고 그러한 수행들을 기뻐합니다. 이 참나가 지혜 즉 비베까의 도움으로 깨어나면서, 내면의 열림이 있을 때, 마음은 사라지고, 지바도 또한 사라집니다. 이 끔찍한 삼사라의 바다에서, 지혜(비베까)만이 이 삼사라의 바다를 건너게 해 줄 수 있는 배입니다.

참나는 우리가 이전에 채택하여 사용한 다양한(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형태의 숭배들에 대해서도 대단히 기뻐합니다. 참나는 우리에게 비베까라는 순수한 전령을 줍니다. 성현들과의 교제, 경전의 진리에 대한 연구 그리고 깨달음을 통하여, 그것은 지바가 순수하고 근본적인 일원성(oneness)의 상태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비베까 즉 지혜가 강화되고 굳어지면, 그리고 조건화의 불순물이 깨끗이 씻겨 나가면, 신성한 사람은 특별한 광채로 빛이 납니다. 내면의 개념과 세상에 대한 외면의 자각이 모두 그에게서 사라집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 모든 것이 가짜인 무지에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단지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참나 아닌 것도 아니요, 또한 거칠고 물질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원소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도 공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브람만만이 펼쳐져 있고, 브람만만이 빛을 발합니다.

이 세상은 물질이 아닙니다. 공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도 헛된 것입니다.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지성은 서로 모순되는 진술로 난처한 처지에 빠지지만, 진리가 적절한 방법에 의해 탐구되면, 그것은 이해됩니다. 지성이 깨어 있는 사람을 가리켜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비이원적인 의식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는 이 세상을 '세상'으로서 자각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계가 나타나는 것은 오직 무한한 이식이 그 자체를 하나의 대상으로서 볼 때입니다. 차라리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것이 일어나면, 그것은 외면화되고 구체화됩니다. 물질을 자각하는 것이 마음이며, 그리고 마음은 그 자신을 몸에 속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개념과 말뿐인 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별은 관념적이고 가상적인 것입니다. 의식인 참나는 지금까지 하나의 대상이나 물질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나 지식에 자리를 잡으면, '의식'이나 '무의식'조차도 무의미한 말이 되어 버립니다.

물질적인 몸은 미묘한 정신적인 몸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지속적인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혼란스럽다. 나는 미쳤다."라고 끊임없이 생각함으로써 사람은 정말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았다."라고 깨달음으로써 사람은 다시 마음의 균형을 회복하게 됩니다. 꿈을 꿈이라고 깨닫고 나면, 그 꿈에 속지 않습니다. 마치 미묘한 몸이 지속적인 생각 때문에 거칠고 물질적인 몸이 되는 것과 꼭 같이, 올바른 지식만 있으면 그 과정이 역전될 수도 있습니다. 지속적인 올바른 명상을 통하여 미묘한 몸마저 지바로서의 그 실제의 상태로 나아가게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브람만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이 둘 모두(물질과 마음, 거친 것과 미묘한 것)가 하나의 무한한 의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리고 그렇게 깨달을 때까지, 현명한 구도자는 그것들을 정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또한 그것들의 참된 본성을 탐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참나 지식에 자리 잡은 사람은 최악의 재앙이 닥쳐와도, 예컨대, 유황불이 쏟아져 내리거나, 지구가 소멸되어 엷은 공기 속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대홍수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더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최고의 초연을 갖춘 사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사마디(바즈라 사마디)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초연에서 나오는 내면의 평화는 고행 등에서 일어나는 평화와는 견줄 수가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여러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이 모든 다양한 존재들은 다음 범주들 가운데 하나에 속합니다. 즉, 그들 가운데는 꿈 속의 깨어 있는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 있는가 하면, 개념상 쌔어 있는 상태에 있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또 순수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깨어 있는 상태에 있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또 투박하게 깨어 있는 상태의 존재들이 있는가 하면, 깨어 있는 꿈 상태에 있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음이 줄어드는 상태로 존재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오, 라마여! 이전의 어떤 세상 순환 주기 때에 이 우주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는, 비록 살아 있지만 깊은 수면 상태에 들어 있는 존재들도 일부 있었습니다. 그들이 꿈꾸는 그 꿈들이 이 우주로서 나타납니다. 그들이 이른바 꿈 속의 깨어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들의 꿈의 대상들입니다. 그들의 꿈이 대단히 긴 꿈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꿈은 우리에게 진짜 깨어 있는 상태로 보입니다. 그리고 꿈꾸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통해 계속 지바로 남아 있습니다. 편재하는 것은 편재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원래 꿈꾸는 사람들의 꿈에 나오는 꿈의 대상들로서 존재합니다.

이 꿈의 세상에서 만약 망상을 물리치면, 그는 해방을 얻습니다.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념에 따라, 자기 자신을 다른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관념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계는 그들에 의해서 경험됩니다.

이전의 어떤 세상 순환 주기 때에, 어떤 곳에서는 다양한 피조물을 만드는 원인이 되는 여러 상이한 개념들을 지니면서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존재들도 일부 있었습니다. 이들은 개념상의 깨어 있는 상태에 속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일으키는 개념들의 지속성 때문에 그 개념의 지속성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개념들이 없어졌을 때조차 그들은 그들 자신의 과거 개념들 때문에 계속 존재 합니다.

수면이나 꿈도 없었던 태초에 브람마의 확장된 의식 속에서 일어난 존재들은 이른바 순수하게 깨어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몸을 받으면서 계속 존재해 갈 때도, 그들은 정말로 오랫동안 혹은 계속적인 깨어 있는 상태로 존재합니다. 그들이 의식이 짙은 상태, 즉 무의식 상태로 존재할 때, 그들은 거친 깨어 있는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경전의 해설들에 귀를 기울인 뒤에, 깨어 있는 상태를 꿈으로 간주하는 존재들은 깨어 있는 꿈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깨어나서 지고의 상태에 안주할 때,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그들이 보는 세상에 대한 자각은 그 투박함이 줄어들며, 그렇게 깨어 있음이 줄어드는 상태에 있는 이들은 뚜리야, 즉 의식의 네 번째 상태에 도달합니다.

이상이 다양한 존재들이 존재하는 일곱 가지 상태들입니다. 사실상 일곱 바다가 하나의 물 덩어리에 불과하듯이, 이 모든 것도 의식이란 하나의 바다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신이시여! 순수하게 깨어 있는 상태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그리고 어떠한 원인이나 동기도 전혀 없이 어떻게 그들은 그러한 상태로 존재합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 라마여! 원인이 없이는 어떤 결과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깨어 있는 상태는 일어나지 않으며, 또한 이 분명한 우주의 나머지 모두도 전혀 존재 속으로 오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설명은 가르침에 부수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라마는 다시 물었다.

몸이나 마음 등을 창조한 자는 누구이며, 우정이나 좋아함 등의 굴레로 이 모든 존재들을 누가 현혹시키고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 라마여! 언제라도 아무도 이 몸을 창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아무도 존재들을 현혹하지 않습니다. 의식은 시작도 없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만이 이 모든 다양한 존재들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 의식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현상 또한 마치 씨앗에서 싹이 나듯이, 그 자체 내에서 일어납니다. 이 우주는 마치 조각상이 대리석 석판에 존재하듯이, 의식 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안이나 바깥, 그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 의식은 마치 꽃의 향기가 퍼져 나가듯이, 시간과 공간 때문에 이 현상계로서 펼쳐집니다. '현세' 자체가 '내세'입니다. 내세를 창조하는 정신적 조건화를 버리십시오. 내세에 대한 개념이 이미 사라졌는데, 그러한 개념이 도대체 어디에서 일어나겠습니까?

참나만이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들과 다른 그러한 관념들이 없이 실재합니다. 참나는 공(空)이 아닙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자아감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지고의 상태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런 사람들뿐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14세계도 그 자신의 수족입니다. 그의 눈에는 꿈의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 간의 구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계가 순수 의식으로 보여지면, 그것은 꿈과 같은 것이 됩니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이 하나(재)가 되듯이, 모든 상태들과 현상계도 지혜의 불길에 의해 하나로 바뀝니다.

의식만이 이 거친 우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물질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사라집니다. 그것과 더불어 그러한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내면의 평화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참나가 이 세상도 아니고 공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모든 것은 진실로 있는 그대로 남게 됩니다. 참나를 깨달은 현자는 이 삼사라를 건너, 모든 까르마의 종말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관념은 무지한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이는 마치 한 나무의 '마음' 속에서 그 다양한 가지들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는 것과 꼭 같습니다. 아비디야 즉 '무지'란 이름으로 통하고 있는 이 객관적인 세상에 대한 가공의 이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기루 속에 보이는 물(내용 없는 소리)만큼이나 비실재적입니다. 그러나 단지 명확한 이해를 위하여, 이 무지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잘 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그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이해할 것입니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이 세상의 주기가 끝날 때에는 소멸됩니다. 아무도 이 완전한 소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브람만만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마약이 유발시킨 경험과는 다릅니다. 즉 우리는 이 몸이 꿈 속에서 본 한 대상과 같고, 의식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 현상계는 반복적으로 소멸됩니다. 무엇이 소멸되었으며, 또 그 소멸된 것이 어떻게 반복적으로 생겨날까요? 이 모든 대상이 공간 속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면, 그것들은 우주가 소멸되더라도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전해야만 합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 현상계를 만든 원인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만이 존재합니다. 한 나무의 수많은 가지들과 잎들과 꽃들과 열매들은 단지 단 하나의 씨앗이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과 관계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습니다. 씨앗만이 실재합니다. 진리를 탐구해 보면, 우리는 하나의 의식만이 진리로서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세상의 주기가 끝날 때, 이 모든 지각의 대상들은 사라집니다. 의식인 하나의 참나만이 남게 되고, 이것은 생각이나 설명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참나 지식을 가진 현자들만이 이것을 경험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지 이러한 말을 읽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도 마음도 아니며, 존재도 존재 아님도 아니고, 의식도 무의식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와 같이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그것을 뵤사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경전들이 그렇게 행 ㅘㅆ기 때문입니다. 내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은 순수한 지고의 평화입니다. 이 속에는 잘려지지 않은 대리석 속에 조각상이 잠재해 있는 것처럼, 무수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고의 참나는 다양하기도 하고 동시에 다양하지 않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한 의심이 그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바로 그대에게 직접적인 참나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에 대한 지각은 참나 속에서 일어나는 구분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나는 시간, 공간 등으로 나누어지는 구분이 전혀 없습니다. 마치 바다가 파도들의 바탕 자체이며 나누어지지 않는 실재인 것처럼, 참나도 시간이나 공간 등의 바탕 자체이자, 나누어지지 않는 실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재는 나누어지지도 않으면서 나누어지는 것이며,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리석 속의 조각되지 않은 조각상은 그 돌로부터 조각이 될 수 있지만, 무한한 의식으로부터 이 세상을 조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나누어지지 않았지만 나누어진 그것은 비록 실제로는 전체와 전혀 다르지 않지만, 단지 전체와 다르게 보일 뿐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실재는 무한한 나누어지지 않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의식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브람마, 비슈누, 루드라 등의 이름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습니다. 원인이나 이유도 없는 우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없으며, 또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완벽한 고요 상태에 머물 때, 있는 것이 실재입니다. 그 실재 안에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현상계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어떻게 생겨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우주의 모습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브람만만이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주(창조)는 단지 말뿐이며 이름에 불과합니다. 실재는 브람만입니다.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은 브람만 속에 브람만으로 존재하는 이름들에 불과합니다.

바다, 산, 구름, 땅 등은 모두가 태어나지도 창조되지도 않았습니다. 이 우주는 브람만 속에서 대(大)침묵(까슈타 모우나, 통나무의 침묵)으로 존재합니다. 보는 사람은 그 자신의 본질적인 속성 때문에 봄(seeing)으로서 보이는 것 속에 존재합니다. 행위자는 행위로서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것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는 아는 사람도, 행위자도 없으며, 둔함도 경험자도 없으며, 공이나 물질도 없습니다. 삶과 죽음, 진실과 허위, 선과 악, 이 모든 것이 바다의 파도들처럼 하나의 본질로 되어 있습니다. 보는 사람(주체)과 장면(객체) 사이의 구분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이 우주의 원인은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 이유나 원인도 없이 빛나는 그것은 확실히 환영으로서 존재하는 것 이외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창조자와 창조물과의 관계도 없이 그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빛을 냅니다.

라마는 물었다.

사람은 반얀 나무 전체가 그 나무의 씨앗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와 꼭 같이 이 세상도 브람만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왜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러한 씨앗이 존재하고 또한 서로 협력하는 원인들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우주(창조)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주가 소멸하는 동안 원소들이 없어질 때, 그 씨앗의 형상은 어디에 있고, 그 협력적인 원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한하고 분할할 수 없는 의식만이 진리일 때, 심지어 원자 구성 요소인 미립자마저 존재할 영역이 전혀 없는데, 더군다나 이 우주를 만든 씨앗은 더욱 존재할 영역이 없습니다. 그 지고의 존재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 자체가 바로 이 우주입니다. 하나의 무한한 의식은 그 자체를 가짜 속에서는 가짜로서, 순수 의식 속에서는 순수 의식으로서 생각합니다. 마치 공간(거리)이 공간 속에 존재하듯이, 이 모든 것은 브람만 속에 존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바로 처음부터 우주가 나타날 원인도 동기도 없었기 때문에, 존재도 존재 아님도 없으며, 거친 물질도 미묘한 마음도 없으며, 움직이는 대상들도 움직이지 않는 대상들도 없습니다. 의식은 형상이 없으며, 이름과 형상이 있는 이 세상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동일하고, 오직 형상을 가진 것만이 다른 형상을 창조하거나 다른 어떤 형상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나는 나누어지지 않는 의식 내에서 이 모든 다양한 대상들을 상상하며, 항상 참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 의식이 마치 그 자체 내에서인 듯 그 무엇을 경험하더라도, 그것이 그리고 그것만이 세상이나 이 우주로 '불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일어나기 전에 (이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매우 평화롭고 동질의 것으로 된 오직 하나의 브람만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무한한 의식은 무한한 의식이고, 물은 물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가 의식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게 창조된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꿈꾸는 세상이 자신의 의식 속에서는 가공의 현상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은 의식 속에서 의식으로서 나타납니다.

최초의 창조에서, 분할되지 않은 의식의 꿈은 깨어 있는 상태(깨어 있는 상태에서 경험되는 세상)라고 합니다. 그 무지에서 나타나는 존재들의 의식 속에 떠오르는 꿈은 꿈의 상태라고 합니다. 이러한 환영적인 꿈은 끊임없는 반복에 의해 이 세상의 질서 속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강은 물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주도 무한한 의식의 환영입니다.

자기의 완전한 소멸 때문에, '죽음'이 희열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공간과 같은)의 상태입니다. 이 삼사라의 비전이 또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사악한 활동들로 인한 두려움이 있다면, 그 결과는 여기서나 '거기'에서나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구분에 대한 지각이 없어지면, 일원성의 비전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해방입니다. 그때는 이 세상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간에, 대상들이 없다는 데 대한 완전한 이해와 나눌 수 없는 무한한 것에 대한 경험이 모두 있습니다. 이처럼 객체와 주체를 깨닫지 못할 때 큰 평화가 있습니다. 물론 지고의 참나에서는 속박이나 해방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니르바나를 얻습니다. 가벼운 의식의 움직임에 불과한 이 현상계 자체도 그에 의해서는 니르바나로서 또한 실현됩니다. 그는 이 세상이 다양성이 아니라 순수한 브람만뿐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순수한 공은 의식인 이 공간에 언제 어디서나 어떤 방법으로든 존재하고 있습니다. 의식은 이 세상의 모습으로 여기저기에 존재합니다. 그 어디에도 무의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오직 순수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물질로서 나타나는 그것도 오직 순수 의식입니다. 오, 라마여! 이와 관련하여, 내가 직접 목격한 바위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옛날에, 나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활동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곳에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상태로 끊임없이 명상을 하고 싶었습니다. 외딴 장소로 가서 나는 다음과 같이 명상했습니다.

'이 세상 전체는 아무 가치나 가격도 없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으며, 나는 누구인가? 그에 대한 바른 해답을 찾기 위하여, 나는 심지어 악마들과 신들의 손길도 닿지 않는 완전히 외부와 격리된 그런 곳으로 가서, 주의 산만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명상을 해야만 한다. 심지어 동굴도 주의 산만의 방해가 없는 곳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굴 속에는 바람의 움직이는 소리가 울리고, 기어 다니는 벌레 등도 많기 때문이다. 호수도 천인들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놀이터로 자주 사용되고, 그러므로 거기에도 마음을 혼란시키는 것이 많다.' 이와 같이 나는 지상의 모든 장소들을 검토한 뒤에, 우주 공간 속으로 가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나는 구름이나 천인들과 악마들, 천인들의 몸들과 죽은 영혼들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는 자연의 원소들마저 미칠 수 없는 아주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갔습니다. 그 텅 빈 장소에 나는 은자의 집이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도 그 집에 접근할 수 없게 했습니다. 나는 연꽃 자세로 앉아 마음을 고요하게 했습니다. 나는 백 년 동안 사마디에 들어가 앉아 있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규칙에 따라, 나의 상상의 소망들은 구체화되어 내 앞에 펼쳐졌습니다. 백 년이란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인 것처럼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완벽하게 집중되면, 시간의 흐름을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이 끝나자, 나의 마음은 확장되어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너'와 같은 모든 악귀들이 내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여러 생명력의 도움을 받아 서서히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즉시 욕망이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나는 그 욕망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떻게 나에게 들어왔는지를 모릅니다.

라마가 물었다.

오, 현자시여! 니르바나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도, 어떻게 이처럼 자아감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이든지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든지 간에, 자아감이 없이는 몸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축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은 지지물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나는 이제 그것을 그대에게 설명해 주겠습니다.

무지라고 하는 작은 소년은 자신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아감이란 이 악귀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무지는 또한 전혀 실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조사하면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둠도 등불의 도움을 받아 어둠을 보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라는 이 악귀를 찾을 때도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사가 없으면 그래서 그것이 당연시되고 또한 그 영향력 하에 있을 때는, 그것은 확장되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 세상은 무지한 사람에게만 실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무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감각들 너머에 있는 그것(무한한 의식이나 브람만)은 마음과 감각들의 대상인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씨앗도 원인도 될 수 없습니다. 씨앗이 없는데, 어떻게 싹이 틀 수 있습니까?

이 무한한 의식 속에서, 창조된 우주처럼 보이는 것은 단순히 상상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의식만이 이슈와라 즉 신이며, 또한 이 우주적 인격체입니다. 이 창조는 모든 사람의 일상 경험인 자신의 꿈의 세상과 같습니다. 꿈꾸는 사람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꿈의 대상들은 지성과 그 나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주라고 알려진 이 무(無)우주도 마치 그것이 창조된 것인 양, 독립된 존재와 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 자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브람만이 브람만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브람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관념은 마치 그것이 경험의 대상인 양, 브람만에 의해 경험되고 있습니다. 그 브람만 자체가 이 모든 것을 '우주'라고 상상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경험자와 경험 대상과 경험은 하나이며 분할할 수 없습니다. 그와 꼭 같이, 브람만과 우주의 관념과 우주도 오직 하나의 브람만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자아감이나 '나'라는 잘못된 관념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나는 지금까지 올바르게 이해하면 사라지는 자아감이라는 이 유령을 없애는 방법을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아감은 나에게 명확하게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감이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불을 그린 그림처럼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나는 자아감을 버린 것입니다. 나는 공간 속에 있지만 공간 밖에 있는 것처럼 존재하고, 이 우주 속에 있지만 우주 밖에 있는 듯이 존재합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나의 시야에 다른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기도 하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내가 그대에게 이야기해 주려는 바위에 대한 이야기에서, 바위 속 내부에도 수천 개의 우주가 있다는 것이 명확해질 것입니다. 이 물질적인 우주 속에도 마찬가지로 무수한 우주들이 있습니다. 사실상, 모든 원소나 대상 속에는 무수한 피조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실재하는 물질이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눌 수 없는 무한한 의식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태초부터 일찍이 창조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브람만만이 브람만 속에서 공간, 공기, 불, 물, 흙, 산 등으로서 존재합니다. 브람만과 우주 사이에는 어떠한 구분도 이원성도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아무 의미가 없는 두 개의 말들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일원성이나 이원성도 의미 없는 말들에 불과합니다. 일원성과 다양성의 관념들을 일으키는 그것이 또한 브람만과 우주라는 관념들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관념들이 없어졌을 때, 비록 활동에 관여하더라도 큰 내면의 평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니르바나입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우주는 하늘(형상과 색이 있는 것 같지만 공허한)과 같습니다. 마치 그대가 꿈이 만든 세상들과 사건들을 바라보듯이, 그대와 나, 산, 신, 악마 등으로 구성된 이 우주 전체를 바라보십시오.

백 년 동안 사마디에 잠겨 있다가, 나는 다시 몸의 의식으로 돌아와서 한숨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에 있었기에, 거기에서 그렇게나 내 가까이에 어떤 사람이나 심지어 벌이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나는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더 조사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다시 사마디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마음과 감각들을 고요하게 했습니다. 나는 무한한 의식 속으로 흡수되었습니다. 나는 그 의식 속에 무수한 우주들의 이미지가 반영된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어디든지 가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수많은 피조물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것들은 생겨나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소멸해 가고 있었으며, 그것들 모두가 각기 다른 대기(다섯에서 서른여섯 층에 이르는 대기)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하나하나에는 각기 다른 원소들이 들어 있었고, 거기에는 성질들과 문화들이 다르고 진화의 단계들이 각기 다른 다양한 종류의 존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그들 내부에 다른 우주들도 가지고 있었고, 또 어떤 것들에는 존재할 수 있다고 그대가 믿지 못하는 그런 생물들도 있었고, 또 어떤 것들에는 분명한 자연의 이치가 있었지만, 어떤 것들에는 완전한 무질서가 있었으며, 또 어떤 것들에는 빛도, 시간 의식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하나의 나눌 수 없는 무한한 의식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들은 무지가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는 모기의 수만큼이나 많은 신들과 악마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러한 우주들을 지고의 창조주가 만든 창조물들로 여기든 아니면 그릇된 관념들로 여기든 간에, 그것들은 사실상 무한한 의식으로서 무한한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으며, 그 의식과 독립해서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것들은 경전들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스스로 움직이는 힘이 없는 실체처럼 쉬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는 이 모든 무한한 피조물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결국 나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주의를 돌렸습니다. 난느 광채를 발하며 공간의 사방을 밝게 비추는 한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매우 교양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살며시 나에게 다가와 달콤한 목소리로 "오, 현자시여! 그대는 진실로 성욕, 분노, 탐욕과 같은 악을 정못했습니다. 그대의 마음은 완전히 자유롭고 집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방에서부터 그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그 소리의 진원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 여성과 더 이상 어떤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고서, 계속 나아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 나는 많은 우주들을 보았으며, 그것들의 다양성이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나는 우주의 크기를 알기 위하여 더욱더 돌아다니고 싶었습니다. 얼마 후에, 나는 그것이 망상임을 알고 그 생각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한한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즉시 이 모든 다양성의 지각이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순수 의식만이 있었고, 그 밖의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상상이나 관념이나 망상, 아니면 가공의 지각인 것입니다.

전 우주가 이러한 무지나 망상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하나의 창조물 즉 하나의 우주에 살고 있는 거주민들은 다른 창조물 즉 우주의 존재를 심지어 알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 다양한 세상들은 마치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꿈에서 토해 내는 함성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 세상의 관념들이나 그 생물들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나는 이들 여러 우주 속에서 수천의 브람마들과 비슈누들과 루드라들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의식 속에 있고, 이 모든 것은 의식이며, 그리고 의식만이 이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으로서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라마여! 그대가 무언가를 보고서, "그것은 여차여차한 것이다."라고 말할 때, 실제로 의식만이 그자체로 존재하고, 이름이나 형상은 전혀 거기에 존재하지 않지만, 이식은 거기에서 여차여차한 것으로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의 공간이나 차원만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세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지각(우리가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이라고 부르는)은 단지 무지나 망상일 뿐입니다. 반면에 나는 이식의 공간이나 차원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또한 밝은 지성을 통하여 이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 즉 이 모든 것이 순수하고 나눌 수 없는 무한한 의식이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다양성에 대한 지각이 꾸준히 지속됨으로 인하여, 나는 그 속에서 무수한 바시슈타들과 무수한 시대들과 세상순환 주기들과, 라마가 번성했던 수많은 시대를 보았습니다. 다양성에 대한 지각이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나타납니다. 진리의 깨달음이 있을 때, 이 모든 것은 순수하고 나눌 수 없는 무한한 의식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무한 속에는 '이것이 세상 즉 우주다.'라고 일컬을 수 있는 어떤 이름이나 형상도 없습니다. 브람만만이 브람만으로서 존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브람만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브람만의 빛이 그렇게 할 의도도 없이 분명히 밖으로 드러내 주는 현상들입니다. 이 때문에 경험의 큰 다양성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의식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에 따라, 어떤 우주들에서는 달빛이 뜨겁고 햇빛이 차갑습니다. 또 어둠 속에서 볼 수 있고 일광 속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선이 파괴적이고, 악이 건설적입니다. 독은 건강을 증진시키고, 감로는 사람을 죽입니다. 또 어떤 우주들에서는 여성이 아무도 없으며, 그러므로 성욕도 전혀 없으며, 또 어떤 우주들에서는 사람들이 무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우주들에서는 사람들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감각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어떤 우주들에서는 그 지역 조건에 맞게 적응된 생물들이 살고 있지만, 오직 한두 개의 원소들만이 존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의식 속에서 의식을 통하여 의식으로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라마는 물었다.

우주가 소멸되는 동안 세상의 주기가 끝날 때에 모든 것이 해방을 얻는데, 그 다음 우주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하였다.

오, 라마여! 브람만은 형언할 수 없는 우주 의식의 덩어리입니다. 이 창조는 바로 그 의식의 가슴이므로 그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제로가 아니라 신비스럽게 창조로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것의 창조가 가짜이기 때문에, 그것이 언젠가 소멸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의 소멸 등도 말하자면 브람만의 수족들입니다. 그러한 구분들은 오로지 무지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고 소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또한 생겨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고의 진리나 의식은 무기나 불이나 바람, 그리고 물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진리의 가슴인 이 우주는 또한 그 진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존재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은 거기에 적합한 관념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과 더불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세상 주기'나 '우주의 소멸' 등과 같은 말 조차도 내용 없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유령은 유령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서만 존재하거나 사라집니다. 탄생, 죽음, 고통, 쾌락, 형상, 무형 등으로서 보이는 것은 모두가 한 존재물의 수족들입니다. 마치 한 나무가 여러 부분들로 나누어지는 구분이 없는 것처럼, 그것들 사이에서도 구분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 분명한 구분들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브람만 속에는 지식도 무지도 없습니다. 그것은 속박과 해방을 초월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해방입니다.

라마는 물었다.

당신은 당신이 있었던 한 곳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습니까? 아니면 공간 속을 떠돌아다녔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나는 그때 이미 무한한 의식을 얻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오고 감도 없습니다. 나는 한 곳에 머물지도 않았으며, 여러 곳으로 떠돌아다니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목격한 것의 형상을 이미 띠고 있었던 그 참나 내부에서 이 모든 것을 목격했습니다. 마치 그대가 두 눈을 감고서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대의 신체를 볼 수 있듯이, 그렇게 나는 의식이란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꿈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꿈 속에서 경험되는 모든 것도 의식의 순수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깨달음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모든 개달음을 얻은 존재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나는 주체, 객체 그리고 관찰의 구분이 없이 그들 모두를 나 자신의 참나로서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의식만이 분할할 수 없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도 공간의 몸을 가지고, 공간 속에 나와 함께 서 있었습니다. 나는 앞서 그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녀는 공간의 몸을 부여받았지만, 마치 사람이 꿈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듯이, 세련된 목소리와 말씨로 나(역시 공간의 몸을 가지고 있었던)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대는 내면의 감각들이 있다고 주장할 어떤 종류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내면의 감각들과 같은 몸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나의 경우에도, 그대의 경우에도, 그녀의 경우에도, 그 밖의 모든 것에도 사실입니다. 마치 사람이 꿈 속에서 전투를 경험하듯이, 사람들은 이 우주 속에서 사건들을 경험할 때 마치 그 사건들이 진짜인 것처럼 경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실례들을 들어도 부족하며, 진리는 말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꿈을 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당신이 그 꿈을 보는 것처럼 봅니다."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대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즉, 진리는 그대가 꿈 속에서 보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이 우주도 오직 브람만이라는 것입니다.

꿈의 상태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우주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깨어 있는 상태 바로 앞에 있던 그 경험이 꿈입니다. 이 세상이 처음 창조될 때에 일어났던 그 경험이나 지식이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경험은 하나의 긴 꿈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공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실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순수 의식입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꿈을 보는 목격자 내지 관찰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한한 의식도 우주라고 하는 긴 꿈을 보는 관찰자입니다. 마치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의식인 것처럼, 그 중간에 있는 것(관찰)도 또한 순수하고 나눌 수 없는 무변화의 브람만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 우주가 어떻게 단단하고 실재가 있거나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겠습니까? 그대처럼 형체를 가진(형상을 가진) 존재들의 꿈조차도 비물질적인 것입니다.  형상도 없는 무한한 의식의 긴 꿈이 어떻게 형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창조되지 않은 브람만입니다.

라마는 물었다.

오, 현자시여! 그 형상도 없는 여자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었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물론, 공간의 몸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귀로 들을 수 있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대가 꿈 속에서 나누는 대화도 그대 옆에서 잠자는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에서 본 것은 오로지 순수 의식에 바탕을 둔 하나의 환영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깨어 있을 때 경험하는 것이 꿈에서 경험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의식의 작용에 불과합니다. 즉, 그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은 견고한 실재의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 경험의 씨앗들이 의식 속에 있고, 그것들은 과거의 경험과 때로는 동일하고 때로는 다소 다른 그런 새로운 경험들을 싹틔웁니다. 이와 같이 그 씨앗들에서 싹터 나온 세상들은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이 꿈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악마들은 신에 의해 살해당하지만, 악마들은 여전히 그들의 꿈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해방을 얻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지각력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무지각해지지 않고 자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꿈의 세상에서 공간의 몸으로 살아갑니다. 소위 인간의 경우도 꼭 그와 같습니다. 그들의 세상, 그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정신 작용은 우리의 것과 같고,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꿈의 대상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들 자신의 동포들도 비록 꿈의 대상이지만, 그들에 의해서 실재하는 실체로서 간주됩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모든 꿈 속에 나타나는 대상들도 나에게 실재합니다.

무한한 의식의 본성 때문에, 이 꿈의 세상들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역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들의 실재는 유일한 실재인 브람만입니다. 모든 것은 언제 어디서나 분할할 수 없는 순수 의식으로서 존재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이며, 그러므로 파괴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한한 의식의 영원한 공간(차원) 속에, 다시 말해, 무한한 것의 무한한 활동 속에 무한한 마음들이 있고, 그 마음속에 무한한 세상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세상의 하나하나 속에는 대륙과 산들이 있고, 또 그들나름의 시간 규모와 수명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집과 마을과 도시들이 있습니다. 이 지바들이 수명의 종말에 도달할 때, 만약 그들이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꿈의 세상들을 만들면서 무한한 공간 속에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그 꿈의 세상들 속에는 마음이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고, 또 그 마음속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들이 무한히 있습니다.

이 가공의 현상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그것은 브람만이고, 오로지 브람만일 뿐입니다. 오, 라마여! 이 모든 다양한 대상들 속에도 오직 순수 의식만이 있습니다. 의식만이 이 우주입니다. 그렇다면 무지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세상들이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누구냐는 바시슈타의 질문을 받고, 천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 현자시여! 이 거대한 우주의 한 모퉁이에 그대가 사는 세상이 있습니다. 이 우주의 경계 너머에는 로까로까 산맥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그 지역에는 기후와 원소에 대한 모든 형태의 순열과 조합이 있습니다. (경전의 묘사는 정교하고 재미있다. S.V.) 그곳 어딘가에는 인간만이 거주하며, 그 밖의 곳에는 신들이 거주합니다. 그곳에는 매우 장수하는 존재들은 물론, 악귀들도 있습니다. 또 그곳에는 스스로 빛을 내는 장소들과 완전한 암흑의 장소들도 있고, 기름진 들판과 사막들이 있으며, 인구 밀집 지역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들도 있습니다.

나는 그 산맥의 동북쪽 사면에 위치한 견고한 바위 속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나는 숙명적으로 이 바위 속에서 반드시 살아야만 합니다. 따라서 나는 무수한 겁에 걸쳐서 그 바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나의 남편도 여기서 살도록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강한 욕망(까마)과 서로에 대한 강한 애착 때문에 해방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친척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속박 상태에 있는 나의 남편은 태생이 브람마나 출신입니다. 그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세기 동안 그의 자리에 계속 낮아 왔지만, 그는 거기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독신주의자(브람마차리)로서 교육을 받았지만 나태합니다. 그는 쾌락에 대한 갈망으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과 떨어져서 살아갑니다. 나는 그의 아내이지만,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순간도 그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왜 내가 그의 아내가 되었는지를 말해 주겠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그는 내면적으로 불완전하게 깨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영적인 탐구를 도와 줄 사람을 그의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난느 그의 소망으로 태어났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정신적 아내가 될 정신적인 존재였습니다. 나는 그러한 존재로 자라나 젊은 여성이 되었습니다. 나는 즐겁게 좋은 음악을 듣고, 또 여러 가지 방식들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의 남편뿐만 아니라, 내 남편 속에 있는 모든 삼계도 부양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내 몸이 아름다움과 젊음의 여러 조짐으로 피어나고 있었지만, 나의 남편은 오랜 기간 동안 깊은 수면 상태에 있든지, 아니면 종교적인 활동들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비록 나는 지금까지 항상 우리 결혼의 완성을 강렬하게 갈구하고 있지만, 그는 아직 신방에 들어 결혼을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난느 욕망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나의 시종들은 나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모든 노력들은 오히려 나의 고뇌만 더해 줄 뿐입니다. 나는 욕망으로 불타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오, 현자시여! 이곳 사방에 아름다운 꽃들과 차가운 눈이 널려 있지만, 내가 욕망의 불로 타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것들이 쓸모없는 잿더미로 보입니다. 나는 나의 기쁨을 더해 주기 위해 마련된 꽃들과 화환들로 장식된 침대에 누워 있어도, 무미건조함과 공허함만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나의 젊음은 헛되이 소모되어 가고 있습니다.

천인은 계속 말했다.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내가 남편에 대해 가졌던 똑같은 애착과 애정이 무집착과 공평성으로 바뀌었습니다. 내 남편은 이미 늙었고, 그는 오직 은둔 생활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모든 애착과 관능적인 쾌락에 대한 기호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삶 자체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성품이 자기 자신의 가슴을 따르지 않는 남편보다는 어린 과부나, 심지어 죽음이나 질병, 혹은 심지어 최악의 불운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한 여자의 일생에서 최대의 축복과 기쁨은 인생을 즐길 줄 알고, 행동과 품행이 달콤하고 상냥한 그런 젊은 남편을 얻는 것입니다.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남편을 둔 여자는 좌절을 맛봅니다. 계발되지 않은 지성은 파괴적입니다. 부가 사악한 무리들의 손아귀에 넘어가도 불행입니다. 자신의 창피스러운 일이 매춘부로 말미암아 없어졌을 때, 큰 해가 있습니다. 남편을 따르는 여자가 부인입니다. 좋은 사람을 찾는 것이 부입니다. 달콤하고 제한이 없으며, 고귀하고 동등한 비전을 부여받은 그것만이 지성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좋아하면, 육신의 질병도, 마음의 질병도, 큰 불행이나 자연의 참사도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지 못합니다. 나쁜 성격의 남편을 둔 여자나, 남편이 없는 여자에게 이 세상이라는 쾌락의 동산은 불타는 사막과 같습니다. 여자란 이런저런 이유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지만, 그녀의 남편은 버릴 수 없습니다.

오, 현자시여! 당신은 숱한 세월에 걸쳐서 내가 어떤 불행을 감내해 왔는지를 직접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도 초연을 계발해 왔습니다. 이제는 나에게 하나의 욕망밖에는 없습니다. 즉, 내가 니르바나를 얻을 수 있도록 당신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욕망이 좌절된 사람과,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과, 그리고 서서히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삶보다 더 낫습니다. 내 남편도 니르바나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는 마음으로 마음을 제어하려고 노력합니다. 신이시여! 최고의 지혜가 담긴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 두 사람에게 참나 지식을 일깨워 주십시오.

나의 남편이 나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초연을 계발했습니다. 정신적 조건화가 약화되어 갔고, 나는 요가 수행을 했습니다. 그 수행은 내가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공간 제어 능력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 후 나는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줄 그런 집중력을 수련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의 세상을 벗어나 멀리 날아 왔을 때, 나는 로까로까 산에서 전에 본 적이 없는 바위 하나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전에 이것을 보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내 남편과 나는 이제 참나 지식을 얻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청탁을 들어주시기를 당신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성현들은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존재들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당신과 같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나는 당신의 발치에 엎드려 당신의 보호를 구합니다.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 바위 속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는 바시슈타의 질문을 받고서, 천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현자시여! 그 바위 속에 있는 우리의 세상은 바로 여기에 있는 당신의 세상과 꼭 같습니다. 우리의 세상에서도 천국과 지옥, 신과 악마, 태양과 달, 하늘과 별, 움직일 수 있거나 또 움직일 수 없는 생물, 언덕과 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존재라고 알려진 미세한 입자들이 있습니다. 자, 그 바위를 찾아가서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현자들은 항상 경이로운 일들에 관심이 많으니까요. (이 지구는 또한 거대한 우주 속에 있는 하나의 조약돌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ㅡS.V.)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우주를 가로질러 로까로까 산에 당도하여, 그 바위를 보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단지 바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그 바위 속에는 어떤 세상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신과 악마, 산과 바다가 있는 그대의 세상, 즉 그대가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한 그 세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천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진실로, 나는 이제 비로소 내가 전에 바위 속에서 보았던 것이 단지 나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내가 그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을 반복적으로 바위에 투영하여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제 그런 경험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당신의 경우에는 이원성의 의식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그릇된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경우에도, 오래 지속되었던 환영이 올바른 지각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도 그 세상이 분명히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현재의 깨달음이 과거의 가공적인 관념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후자는 희미해졌습니다.

오, 현자시여! 이것이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즉 바람직한 하나의 대의명분에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올바른 노력을 배워야 하며, 그러한 올바른 행동을 반복적으로 해야 합니다. 올바른 노력(아비야사)에 의해 무지는 사라지며, 무지한 사람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쓴 것가지도 맛있게 즐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올바른 노력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이방인이 친구가 되는 것은 반복적인 노력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이 자기 자신과 멀어지게 되었을 때, 그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도 그러한 반복적인 명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묘한 몸이 신체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은 반복을 통해서입니다.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집니다. 잘못된 관계들도 역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지속적인 노력을 통하여 바라는 대상을 자기에게 가까이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이 있어야 그는 아무 장애 없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을 아비야사라고 합니다. 그것만이 인간의 최대의 목표(뿌루샤르타)이며, 그 밖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로지 지속적이고 확고한 스스로의 노력과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완벽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 밖의 다른 어떤 수단들에 의해서도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나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아비야사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천인이 이와 같이 말했을 때, 나는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사마디 즉 깊은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모든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개념을 버리고 순수한 의식의 비전에 매달렸습니다. 나는 말하자면 무한한 의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고로 순수한 우주적 비전을 얻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 때문에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것에 대한 망상은 나에게서 사라졌습니다. 그 망상 대신에 일어나지도 지지도 않는 커다란 의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공간도 바위도 보지 못하는 그런 의식이 나타났지만, 나는 오로지 무한한 것만을 알았습니다. 이전에 보았던 모든 것이 단지 하나의 참나였으며, 이제 비로소 나는 참나만이 옛날 내가 보고 경험한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애 바위로 보였던 것은 단지 무한한 의식(찌다까샤)의 공간뿐이었습니다.

인간은 한낱 다른 사람의 꿈의 대상에 불과하며, 그는 자신이 사람이라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 즉 브람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최악의 망상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마저도 알맞은 때에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앞서 바위라고 보았던 그것이 순수 의식의 덩어리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땅이나 물질 같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원소들이나 존재들의 참나는 브람만의 몸입니다. 그 개념만이 이제 하나의 관념이나 상상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관념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주적인 미묘한 몸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으로 일어나는 관념이나 생각이 지바의 몸입니다. 그 무지한 생각 즉 '나'라는 생각은 이제 마음이 명백한 실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나 목적도 없이, 마음이 명백한 실재(쁘라띠약샤)라는 이 관념들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의식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이 됩니다. 이제 분명한 실재라고 하는 것(몸 등)은 분명한 비실재입니다. 역설적으로, 분명한 것이 비실재적이고, 비실재적인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한 것이 환영의 신비로운 힘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진리 가운데서도 미묘한 몸이 그 첫 번째 진리입니다. 진리는 편재하며, 물질은 비록 경험될 수 있지만 단지 환영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금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팔찌라고 말할지 몰라도, 금으로 된 '팔찌'가 금의 가공적인 현상인 것과 꼭 같습니다. 미묘한 우주적 몸(아띠바히까)은 물질이 아닙니다. 지바가 이러한 환영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은 이해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몸은 조사를 해 보면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묘한 몸은 두 개의 세상(현세와 내세)에서조차 무변화로 존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거친 신체적인 몸은 마치 물이 신기루 속에 존재하듯이, 아띠바히까 즉 미묘한 몸 속에 존재합니다. 몸에 대한 그릇된 지각 때문에 마치 통나무가 사람으로여겨지듯이, 이 물질적인 몸도 하나의 실체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환영이란 것이 비실재적인 것을 실재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실재적인 것을 비실재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니, 그것이 얼마나 신비스럽고 강력한 것입니까? 이 환영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존재들의 활동과 행동은 주로 요기들의 비전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으며, 적게는 마음의 지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자를 버리고 물질의 실재에 매달리는 사람은 그의 갈증을 풀기 위하여 신기루 속의 물을 마시려고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은 고통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변하지 않으며,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경험의 도움을 받아 진리를 탐구하십시오. 직접적인 경험으로 근본적인 진리르 바라보십시오. 이 경험을 버리고 가공의 '실재들'을 좇는 사람은 바보나 다름없습니다.

미묘한 무형의 몸만이 실재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는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몸에 대한 지각이 비실재적이며 가공적인 것입니다. 후자(비실재적인 것)는 오직 관념적이고 창조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실재하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까? 그대가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이 가공적이고 비실재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때, 그대는 그 밖의 어떤 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비실재적인 것에 의해 증명된 것이 어떻게 실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것이 첫 번째의 으뜸가는 증거(쁘라띠약샤 즉 직접적인 경험)라면, 추론에다 어떤 가치를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들 방법(직접적인 감각 경험과 추론과 과학적인 조사)에 의하여 증명되었다고 하는 객관적인 우주의 존재는 가짜이며 비실재적인 것입니다. 이원성이나 다양성도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의식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만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꿈 속에서 본 대상이 비실재적인 것과 꼭 같이, 우리가 바위라고 본 것도 비실재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순수 의식일 뿐입니다. 이 산과 이 우주와 이 세상 그리고 '나'가 모두 하나의 무한한 나눌 수 없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깨달음(각성)을 얻은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무지가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라는 잘못된 느낌 때문입니다. 나눌 수 없는 무한한 의식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의 깨달음을 버리고, 다른 형태의 경험에 매달리는 사람은 분명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 다음 그 천인은 바위 속의 세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도 그녀와 함께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녀는 그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창조주 앞에 앉았습니다. 그 다음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이분이 나의 남편입니다. 그는 나를 그의 아내로 두기 위하여 나를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신방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와 나, 두 사람은 늙었습니다. 나는 초연을 얻었습니다. 그도 그의 명상에서 조금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삼사라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삼사라의 근본 원인에 대하여 우리 두 사람에게 부디 깨우침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난 뒤, 그녀는 창조주인 그녀의 남편을 평상시의 의식으로 '깨워', 그에게 "신이시여! 우리의 거처에 도착한 이 현자를 바라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귀한 손님입니다. 그는 다른 세상의 창조주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이 귀빈을 존중하고 숭배하는 것이 세대주로서 우리가 할 의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세상(바위)의 창조주는 두 눈을 떴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족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수족들은 사실상 그 의식 속에서 일어난, 다른 '창조된' 존재들이었습니다. 즉시 그의 앞에는 신들과 악마들, 인간들 등 각기 다른 종류의 존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나와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는 나를 반가이 맞이하면서 보석으로 장식된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나도 답례를 하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천상의 음악과 또한 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적절히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두 번째 브람마에게 물었습니다. "신이시여! 이 천인께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고, 그녀는 나에게 여러분 두 분께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말씀이 맞고 적절한지요? 왜냐하면 당신이 바로 만물의 신이시며, 최고의 지혜를 가진 지배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그녀를 당신의 아내로 창조하였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그녀를 무시하고, 또 결혼은 했지만 신방에 들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위 속의 창조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당신에게 그간의 모든 일을 말씀드릴 테니, 잘 들어 주십시오. 태어남도 없고 평온한 오직 하나의 의식만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나 진동, 잔물결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것이 나의 본질입니다. 나는 순수한 공간의 본질 그대로입니다. 나는 참나 속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이유나 물질도 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참나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나는 전혀 창조된 것이 아니며, 어떤 것도 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당신과 나로 보이는 것과 우리 사이에 이 대화로 보이는 것은 마치 바다에서 두 개의 파도가 충돌하면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바다의 파도와 같고, 무한한 의식의 바다와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관념들에 불과합니다. 그것과 다른 것처럼 보이는  여기에 있는 이 여인도 결코 창조된 적이 없으며, 생겨나지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하나의 관념이나 개념, 생각의 한 파장이나 심리적인 조건화에 불과합니다. 이 몸은 나에게 존재한 자아감의 흔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하자면 이 자아감을 주재하는 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나의 아내도 아니요, 또한 아내로서 창조되지도 않았습니다.

그 다른 세상의 브람마는 계속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무한한 의식의 차원이나 공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의 소멸을 신호로 알리는 이 같은 소멸을 지금까지 분명하게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초연성이 있습니다. 내가 우주적 마음을 버리고 무한한 의식 속으로 통합될 때, 모든 바사나들(관념들 등)이 없어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몸으로 나타난 바사나인 이 여자도 초연을 얻게 되어 나를 따라온 것입니다.

이제 세상의 주기가 끝나고 그와 더불어 신들도 종말을 고합니다. 이는 또한 우주의 소멸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정신적 조건화(바사나)가 끝나는 것이며, 또한 몸이 공간으로 완전히 변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바사나는 바야흐로 소멸되려고 합니다. 해방의 욕망은 분명한 이유도 없이 바사나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바사나는 자신의 소멸을 맞게 됩니다. 그녀는 명상 등의 수행을 했지만, 참나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당신(깨달음을 얻은 현자)이 사는 세상을 본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내가 창조한 이 세상의 주춧돌도 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주춧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이 다양성의 지각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을 때입니다. 마음이 그러한 지각에 묶여 있는 동안은 그럴 수 없습니다. 마치 이 바위 속에서처럼, 언제나 이 모든 대상과 원소들 속에는 수많은 세상들이 있고, 또 그 수많은 세상들 속에 무수한 세상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세상'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의 환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의 참된 본질을 이해한 사람에게는 이 가공적인 '세상'의 모습이 사라지지만, 그 밖의 사람들의 눈에는 그 세상이 계속 존재합니다.

그녀(바사나)는 이전에 집중이나 명상 등의 수행을 통하여 초연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 다음 참나 지식을 얻기 위하여 그녀는 당신을 찾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통과할 수 없는 환영의 힘 즉 마야로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이 무한한 의식의 힘입니다. 이 힘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 물질, 운동, 마음, 지성 등은 이 바위의 부분들처럼 의식의 부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한한 의식만이 의식의 바위로 존재합니다. 그 무한한 의식의 수족들이 여러 세상들입니다. 이 의식의 덩어리가 그 스스로를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변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의식의 덩어리는 형상도 없지만, 바위의 형상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강이 전혀 없습니다. 회전하는 바퀴도 없으며, 또한 변화와 변형을 겪는 물질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한한 의식(찌담바람)의 차원이나 공간에 나타나는 현상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우주의 공간 속에 집이라는  공간과 항아리라는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꼭 같이, 비록 공간이 나눌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 집 안에 공간이 존재한다고 해서 전체의 공간이 줄어드는 것도 확실히 아니지만, 이 모든 '세상'도 나눌 수 없고, 그럼으로써 조금도 줄어들 수 없는 그 무한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말을 하고 난 뒤, 바위 속의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는 마지막 깊은 명상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옴(OM)이라고 말하고는, 그 조음의 마지막 단계에 대해 명상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완전히 고요했습니다. 그는 마치 그림처럼 있었습니다. 바사나(여인의 모습을 한 심리적 조건화를 가진 몸)도 창조주를 뒤따라 깊은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공간과 같은 형상이 되었습니다. 나도 또한 깊은 명상에 들어가서, 편재하는 무한한 의식이 된 뒤에 이 모든 것을 목격했습니다.

창조주의 우주적 마음속에 있던 관념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바로 그 순간에 산들과 대륙들과 바다들로 된 지구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풀과 나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구도 창조주라는 우주적 인격체의 수족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주적 인격체가 지구로부터 그의 자각을 거두어들일 때 지구는, 마치 마비 상태에서 수족에 대한 우리의 자각이 철수할 때 그 수족이 약화되면서 소멸되어 가는 것과 꼭 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지구는 수많은 자연 재해들을 입게 되었습니다. 악인들은 불에 타 죽으며 지옥으로 갔습니다. 지구는 그 모든 매력과 비옥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여지들은 음란해졌으며, 남자들은 자존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짙은 먼지 폭풍이 일어나 태양을 가리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리석음 때문에 스스로 지배당하던, 상반되는 쌍들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홍수와 시근, 전쟁과 역병 때문에 많은 인간이 죽어 갔습니다. 수많은 고통 때문에 사람들은 교양이 없는 미개인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난 그 갑작스러움 때문에 지구의 고귀한 사람들이 죽어갔으며, 사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물이 부족하여 사람들은 깊은 우물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 난잡한 결합이 있었고, 사회적 질서가 붕괴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장사를 하면서 살았갔습니다. 여자들은 자기 머리카락의 아름다움을 과시함으로써 살아(생계를 유지해)갔습니다. 왕들은 '힘이 정의다.'라는 금언을 따랐습니다. 어디에서나 무법이 횡행했습니다. 지도자들은 독한 술을 퍼 마시는 데 모든 시간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학자들과 성현들을 괴롭히며 고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연스러웠던 생활 방식이나 믿음을 버리고 다른 것들에 의존했습니다. 학식 있는 사람들도 폭력과 공격성에 쉽게 빠졌습니다. 사원은 약탈당했습니다. 성현들조차 나태함 때문에 종교적 의식들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도시들이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불길로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계절들도 변덕을 부렸습니다. 이와 같이 흙의 원소가 그 파멸에 이르렀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무한한 의식 속에 자신을 통합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일단 원소가 무한한 의식 속으로 흡수되어, 그 한계를 초월하고 난 뒤에, 물의 원소가 그 자체의 소멸을 향해 갔습니다. 물이 동요되자 물은 그 자체의 본래 경계를 넘어섰고, 바다들도 그 경계를 넘어 사방으로 넘쳐흘렀습니다. 무서운 소리를 일으키면서 파도들이 숲을 강타하며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거대한 파도들은 공간의 구름들과 섞여서 하나의 거대한 물덩이를 이루었습니다. 모든 산이 물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수생 생물들이 놀라 허둥지둥 날뛰며 재난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파도들이 산의 동굴들을 파괴시킬 때, 사자들이 동굴에서 나와 다른 짐승들을 죽였고, 결국은 그들도 파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일으킨 혼란은 심지어 태양의 영역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마치 여러 바다들이 신들의 영역을 직접 침략하여 그들을 점령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높은 파도들의 힘으로 숲들과 산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우주 전체가 커다란 나무숲과 산이 것처럼 보였습니다. 큰 산들도 바다의 파도들 속에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단계에서는 마치 산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높은 파도들에 산들이 씻겨 나가자, 그 땅 속에 묻혀 있던 보석과 준보석들이 산허리에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천인의 몸들마저도 이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구의 산들이 큰 소리를 일으키면서 몇몇 천인들의 몸 위로 떨어졌습니다. 심지어 우주적 파괴의 불길도 이 높은 파도에 진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어떤 단계에서는 지상의 코끼리들과 바다의 코끼리들 사이에 무시무시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지상의 대상들이 그 바다 속으로 잠겨 가고 있을 그 당시에, 단 하나의 바다만이 초자연적인 광채를 뿜으며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것은 마치 우주 자체가 우주 소멸의 파도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빛과 보석을 가지고 있는 창공이 홍수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불꽃들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렸습니다. 창조주가 이미 자기가 실현시킨 세상을 거두어들였으므로, 악마들과 다른 것들이 마음대로 날뛰며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파괴를 해 나갔습니다. 모든 신(자연 원소들 사이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관장하고 있는 신들인, 인드라 등)이 악마들에게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혼돈이 있었습니다. 쉬바 신 등의 거처들도 흔들리고 방해를 받았습니다. 별들과 행성들이 서로 충돌하고, 우주의 소멸이 있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창조주 브람마가 그의 쁘라나(생명력)를 거두어들이자, 우주 속을 이동하던 공기가 공간 속의 이동이라는 본래의 작용을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밖의 무엇이 원소들과 기타 존재들의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모든 천체들을 붙들고 있던 힘이 없어지자, 마치 나무에서 꽃이 떨어지듯이 별들이 그들의 궤도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생명력이 없어지면서 시간과 공간의 연속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우주 공간을 돌고 있던 위성들도 붕괴되었습니다. 심지어 싯다들과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존재들의 길마저 흔적도 없이 지워졌습니다. 이들 싯다들은 마치 솜 조각처럼 우주에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인드라(신들의 왕)와 그의 천국조차 떨어져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의식은 순수하며, 우주적 인격체도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우주적 인격체 즉 브람마가 어떻게 지구, 천국 그리고 지옥 같은 수족들을 얻게 되었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처음에는 존재나 비존재라고 말할 수 없는 순수 의식만이 있었습니다. 그 자체 안에서 그것은 그 자체를 자각의 대상으로서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주체로서의 입장을 버리지 않고, 그것은 또한 객체가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지바이며, 그 지바로부터 마음 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수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순수 의식이기도 한 마음이 '나는 공간이다.'라고 생각할 때, 비록 그러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은 공간을 경험합니다. 참나 혹은 순수 의식은 청 비어 있는 무형의 것입니다. 물질적인 우주에 대한 관념이 있는 한, 의식은 그 우주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경험합니다. 반대로, 의식이 이 우주를 없애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은 이 우주를 없애 버리며, 그러면 우주는 끝나 버립니다.

관념들을 일으키고 모든 종류의 경험을 일으키는 바사나 즉 정신적 조건화는 진리에 대한 비전이나 실재에 대한 이해가 일어나면 사라지게 됩니다. 자아감이 없어지며, 그러므로 하나만이 남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 후에는 해방 즉 목샤만이 남게 됩니다.

이것이 브람마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우주적인 인격체인 브람마의 몸으로 존재하는 경위가 됩니다. 그 우주적 인격체에서 일어나는 관념은 이 우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순수한 공입니다. 사실상, 세상과 같은 그런 것은 없으며, 또한 '너'와 '나'로 간주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순수하고 나눌 수 없는 의식 속에서 이 세상은 무엇이고,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 세상이 창조되었으며, 또 어떤 물질들이나 상호 협력적인 원인들로 창조되었을까요? 그 세상은 나타나 있지만, 가공의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의식과 동일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것과 다른 것도 아닙니다. 일원성도 다양성도 없습니다. 분할할 수 없는 무한한 의식만이 실재입니다. 그러므로 개개의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고도 적절하게 활동하면서, 모든 조건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십시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당신께서 지금까지 저에게 말씀해 주신 모든 것을 명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시면 영생불멸하는 넥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창조의 경험을 설명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소위 우주의 소멸 기간 중에는, 지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소멸됩니다. 그래도 남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겨자 씨앗에 비교하면, 메루 산은 거대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무한한 의식에 비교하면, 이 우주도 겨자 씨앗과 같이 작습니다. 산들 중에서도 가장 큰 산에 비교하면, 원자 구성 요소의 미립자는 너무나 작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우주와 그 영원한 무한한 의식을 비교해 보는 차원도 꼭 그와 같습니다. 현상계의 모든 것이 없어지는 그 우주의 소멸 기간 중에 영원한 무한한 의식만이 남아서, 우주적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 구성 원소의 미립자를 압니다. 그것은 그들(그들이 실재하지 않지만)을 마치 꿈 속에서 보는 것처럼 봅니다. 그 다음 그것은 그 자체를 '브람만'이라고 상상합니다. 그것은 심지어 그 자체를 무한한 의식이라고도 상상합니다.의식이 그 자체를 의식이라는 원자의 입자로 간주할 때, 그것은 대상이 된 원자의 입자를 분명히 보고 있기 때문에 주체로서 존재합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꿈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의식은 그 자체의 비분리성을 버리지 않고도 그 자체를 주체와 객체로 분명히 양극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 자연스럽게 발생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 활동, 물질, 보는 사람(주체), 봄, 그리고 보이는 것(객체)이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억제하거나 방해하는 힘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의식의 미립자들이 빛을 낼 때, 공간도 거기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것이 일어나면 시간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방식은 활동이 됩니다. 존재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모든 것은 물질입니다. 그 경험자는 주체가 되고, 이 물질을 경험하거나 보는 것은 봄이 됩니다. 그리고 이 보거나 경험하는 것의 원인이 되는 것은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분명히 모두가 가짜이지만, 생겨납니다. 공간만이 어떤 특별한 인과적 순서나 원칙이 없이 공간 속에서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이 의식이 빛을 내는 물질은 몸입니다. 그것이 보는 수단이 되는 것은 눈입니다. 다른 감각 기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의식이 이름이나 형상도 없이 빛을 내는 상태는 오로지 공간이나 공의 본질 그대로인 딴마뜨라(순수한 원소)라고 합니다. 의식 자체의 입자에서 나오는 이 광채는 거칠어져서, 몸이라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 몸 안에서 다섯 가지의 감각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붓디 즉 지성입니다. 생각과 함께 마음이 일어나며, 그 마음속에 자아감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의식의 입자가 공간을 이동하면, 그것은 앞서 '여기에서' 했던 것을 '거기에서' 합니다. 따라서 '위', '아래', 방향과 같은 공간적 구별뿐만 아니라, 시간의 순서도 일어납니다. 비록 그것은 공간이나 공의 본질 그대로이지만, 시간과 공간, 활동, 물질, 그리고 말들의 의미에 대한 자각 등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띠바히까(미묘한) 몸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자체에 대한 계속적인 자각을 통하여 물질적인 몸으로 압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식은 진실로 담길 수 없는 공간과 같은 것이지만, 형체를 지니게 됩니다. 그 속에서 '머리'나 '발'이라는 생각들이 일어나고, 그 몸은 이것들을 존재하는 기관들로 보게 됩니다. 신체의 다른 수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의식이 명령과 그 나머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거절하면서, 그 자체를 존재와 비존재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러한 관념들이 실재하는 것처럼 그들을 봅니다. 그와 꼭 같이 그것은 창조주 브람마가 됩니다. 또한 그와 꼭 같이 그것은 하리나 비슈누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루드라나 쉬바 상태에 도달하거나 표면상 그들이 됩니다. 그와 꼭 같이 그것은 겉으로 벌레가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되지 않았습니다. 즉 그것은 있는 그대로 그 자신이며, 공 속의 순수한 공이며, 의식 속의 의식입니다.

그것은 삼계의 모든 몸의 씨앗입니다. 그것은 해방의 문턱을 막고 있는 삼사라(세상의 환영)의 씨앗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며, 시간과 활동의 지도자입니다. 그것은 비록 태어나지 않았지만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최초의 인격체입니다. 그것은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잡힐 수 없습니다. 비록 실제로는 말없이 잠자고 있지만 꿈 속에서 사자와 싸우고 있는 사람이 그 꿈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과 꼭 같이, 이 모든 관념을 가지고 있는 무한한 의식은 그 자체 내에서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사방으로 수백만 마일이나 뻗어 가는 우주는 가장 작은 원자 구성 원소의 미립자 속에도 존재하며, 삼계도 무한한 의식과 비교하면 한 올의 머리카락 속에 존재합니다.

창조주 브람마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며, 또한 자신의 몸이기도 한 이 우주를 관장하고 있지만, 그조차도 한 원자 속에 존재합니다. 사실상, 근느 꿈 속에서 보이는 산들과 같이 조금도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주적 인격체는 비라뜨라고도 하지만, 스바얌뷰 브람마(스스로 태어난 창조주)라고도 합니다. 오, 라마여! 그러나 실제로 그는 단지 순수 의식에 불과합니다. 이 의식이 움직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그러한 움직임이나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쁘라나와 아빠나이며, 그것들이 소용돌이치는 움직임은 우주에서 바람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들이 바로 우주의 가슴입니다. 말하자면, 이 쁘라나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바람인 바따, 열인 삐따, 그리고 습기인 슐레슈마라고 하는 것(인체의 세 가지 체액)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상당하는 우주적 존재는 바람과 태양과 달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우주적 인격체(비라뜨)는 두 가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상위의 몸으로, 그것은 시작이나 끝이나 중간이 없는 순수 의식입니다. 다른 하나의 몸은 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암탉처럼) 밖에서부터 (계란과 같은) 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계란을 두 쪽으로 나누었습니다. 즉 그는 위쪽 부분을 하늘이나 천국이라 부르고, 아래쪽 부분을 지상이라 불렀습니다. 위쪽 부분은 비라뜨의 머리라는 것이며, 아래쪽 부분은 그의 발이며, 그리고 중간 부분(대기권)은 그의 등이나 엉덩이입니다. 위쪽 부분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푸른 텅 빈 하늘로 보입니다.

창공은 비라뜨의 입천장이며, 별들은 핏방울입니다. 몸을 가로지르는 '공기의 미립자들'은 신들과 악마들과 인간들입니다. 인체 내의 세균들과 바이러스들은 유령들과 악귀들입니다. 인체의 구멍들은 다른 세상들입니다. 그의 허리는 바다들입니다. 나디들은 강이고, 잠부드비빠라고 하는 대륙은 그의 심장입니다. 텅 빈 공간은 그의 복부입니다. 산은 그의 간과 비장입니다. 구름들은 그의 살입니다. 태양과 달은 그의 눈입니다. 브람마의 세상은 그의 얼굴입니다. 체세포(소마)는 그의 에너지입니다. 눈에 덮인 산은 그의 점액이며, 지하의 불은 그의 담즙이고, 바람은 그의 쁘라나와 아빠나입니다. 모든 나무들과 뱀들은 그의 머리카락입니다.

그가 바로 우주적 마음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마음이 없습니다. 무한한 참나만이 순수 의식인 경험이 되기 때문에, 그것과 별도로 떨어진 경험자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모든 감각의 경험자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떤 인드리야들 즉 감각들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각들에 대한 구별은 단지 관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드리야들과 마음의 관계가 수족과 인체의 관계와 같다는 개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별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인체와 수족들도 하나의 단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은 그에게서 시작합니다. 그로 인하여 이 세상이 실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그가 없다면, 이 세상도 없습니다. 이 세상(우주), 창조주 브람마, 그리고 비라뜨(우주적 인격체)는 모두 말의 멋진 수사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순수하고 무한한 의식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이 우주적 인격체가 단순한 관념이라면, 그는 어떻게 그 몸 안에 존재합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그대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그대가 그대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지바가 모든 존재의 몸에 존재하고, 거울 속에 비친 영상이 존재하는 것과 꼭 같이, 이 우주적 인격체도 그 자신의 우주적 몸 안에 존재합니다. 비록 그가 이 모든 수족 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어떤 구분도 없으며, 그래서 그는 구분되지 않은 완전하고 순수하며 무한한 의식으로서 바위가 존재하듯이 존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창조주 브람마가 이와 같이 명상하고 있을 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나는 사방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이 특별한 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태양이 마치 지하의 불처럼 땅 속에서 올라왔습니다. 모두 열한 개의 태양이 있었고, 쉬바 신의 세 개의 눈 같은 세 개의 위성이 모여 열두 번째 태양을 이루었습니다. 그곳의 날씨는 너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떠나 먼 곳으로 갔습니다. 창공 전체가 이들 태양이 내는 빛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어디에서나 '따다닥' 또는 '타다닥' 불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들은 어디서나 열기 때문에 말라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수생 생물조차 거기에서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파멸은 방대하고 완전했습니다. 산들이 불타는 도시에 무너지면서 그 도시들을 갈아 으깨고 말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슬퍼했습니다. 머리의 정수리를 통해 생명력을 떠나가게 할 수 있었던 다른 사람(요기)들은 불멸을 얻었습니다. 지구는 위와 아래에서부터 일어나는 불로 초토화되었습니다.

온 세상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존재들은 루드라의 눈에서 나오는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나 '훨훨' 불타는 소리가 났고, 그것은 마치 여자 악마들이 서로에게 끊임없이 불길을 던지는 장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유성들이 산꼭대기에 떨어지면서 죽음과 파멸의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땅 속에서 올라온 불은 지구를 천국이나 우주 전체와 연결시켜 주는 것 같았습니다. 단단한 금으로 만들어진 수메루 산도 녹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갇힌 산(히말라야)도 녹아 없어졌습니다. 오직 말라야 산만이 아무 해를 입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자신이 고통을 받을 때조차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켜 주려고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가슴처럼, 그 산은 마치 백단향 나무가 그것을 태우는 사람에게마저 그 향기를 주듯이 기쁨과 평화를 널리 확대시키면서 서 있었습니다.

오직 두 개의 대상만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즉 만물에 고루 퍼져 있는 공간과 순수한 금은 파괴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사뜨바(순수)만이 믿을 만하고 바람직하지, 라자스(활동이나 불순물)와 따마스(둔한, 우둔)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밖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난 뒤에는 심지어 재조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지와 그 결과들이 현자의 지혜의 불길로 파괴될 때, 과거의 무지의 '재'조차 남지 않고 오직 절대적인 순수만이 남아 있는 것과 꼭 같습니다. 얼마 동안 이 불길은 루드라 신이 거처하는 까일라사까지는 다다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가 다시 불타는 눈길을 그곳으로 돌리자, 그것도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미래의 세대가 있다면, 그들은 "아마도 예전에 하나의 세상, 하나의 우주, 하나의 창조물이 있지 않았을까."라며 궁금해할지 모르겠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 다음 무시무시한 파멸의 바람들이 일어났는데, 그것들은 너무 사납게 불어 산들과 바다들이 마구 흔들리며, 그들의 자연스러운 활동을 잃어버렸고, 심지어 지옥마저 그 훨씬 아래에 있는 어떤 곳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 우주가 말라 버리고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이후 성난 악마처럼 거대한 구름이 일어나며 무서운 굉음을 일으켰습니다. 그 소리는 창조주 브람마가 우주 창조의 원인이 된 황금의 알을 깰 때 났던 소리와 같았습니다. 그 소리에 여러 세상들과 바다들이 붕괴되면서 나는 소리가 더해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버렸습니다. 그 소리는 창조된 우주 전체를 가득 채웠고, 지구를 천국과 지옥과 합쳐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우주가 소멸될 때 나는 소리였습니다.

나는 그 구름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이 구름이 우주 파멸의 불길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나는 사방에서 견석과 천둥을 수반한 번개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나는 위에서는 차가운 어떤 것이, 아래에서는 매우 뜨겁게 불타는 어떤 것이 느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구름은 너무나 높이 있었기 때문에 볼 수도 없었고, 또한 불길이 거기에 닿을 수도 없었습니다.

불길들이 여러 세상들을 다 태워 버린 뒤에 순수한 불꽃이 되어 특별한 광채를 내며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파멸의 구름이 내려오자, 그것은 가장 밝게 빛나는 번갯불로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일곱 대양의 바닷물은 오직 그 구름의 한 모퉁이에 있는 매우 작은 일부와 같았습니다. 마치 이 바닷물들이 하늘로 올라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열두 개의 태양은 그 구름 속에 있는 소용돌이였고, 수생 생물들은 그 속을 움직이는 번갯불이었습니다.

비가 내렸습니다. 빗방울 하나하나는 모두가 벼락과 같았습니다. 이 빗방울들이 우주 전체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것들은 엄청난 힘으로 떨어져 내렸기 때문에, 우주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파괴시켰습니다. 하늘 전체가 하나의 물 덩어리였습니다. 비가 불을 꺼 버리면서 지면에 닿았습니다.

이 바상하고 초자연적인 비의 바닷물들이 아직도 불타고 있는 불길들과 혼합되었습니다. 그 둘은 서로를 이기거나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어울리지 않는 적(그것들의 용맹성이 대등하여 그것들의 싸움은 끝이 없고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똑같은 큰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충돌은 목격하기에 너무나 무시무시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때 우주 전체는 파괴의 잿더미로 덮여 있었습니다. 이 잿더미는 무서운 바람에 의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비는 어디에서나 더욱 무서운 굉음을 내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마치 파멸의 악마들이 승리를 거두면서 지르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그 바람은 인드라(천국의 신)와 기타 신들의 도시들이 타다 남은 잔해들을 휩쓸어 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물과 불과 바람이라는 세 가지 원소들이 통제나 협조 혹은 조화를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은 마치 그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혼란의 소동과 소음은 귀를 멀게 할 정도였습니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는 불길을 진화하면서 '피시식' 하고 불이 꺼지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산 아래로 흘러내리는 서대한 강물들이 다른 산들과 대륙들과 도시들을 휩쓸어 버렸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행성들과 별들도 또한 그들의 궤도를 이탈하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높은 파도들이 어디에서나 산들을 무너뜨리고 있었으며, 바람은 이들 산들을 날려 버리고 있었습니다.

태양의 광선이 비와 구름에 가리자, 사방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그 색깔은 검푸른빛이었습니다. 지구를 지탱해 주던 지지물마저도 완전히 붕괴했고, 그러므로 산들도 붕괴하고 있었습니다. 높은 파도들이 이들 산을 집어삼키며 구름 속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삼계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신들과 악마들도 모두 이 무서운 참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끝없는 적의로 서로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몸의 분해를 관장하고 있는 생명의 공기 즉 쁘라나만이 분해되어 가는 대상들을 떠받치면서, 그것들을 여기저기에 떠돌게 했습니다. 동시에 우주 전체는 날아다니는 도시들, 악마들, 불, 뱀들과 태양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 숫자만큼 많은 파리들과 모기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각기 다른 방향들을 관장하고 있는 신들조차 파멸로 다가가고 있었으며, 그러한 방향들에 혼란이 있었습니다. 파괴된 우주의 먼지가 사방에 퍼져 있었습니다. 우주 전체가 상이한 보석들과 다른 색깔의 금속들로 만들어진 '사원들'의 부서진 파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주를 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우주라고 알려진 것이 완전히 파괴되고 난 뒤에 남은 그것(진리나 혹은 신)만이 우주의 장막이 전혀 없는 상태로 존재했습니다. 다시 한 번 충만함이 있었고, 그 충만함은 다양한 생물들이 파괴될 때 분명해지며, 또한 항상 거기에 있었던 충만함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때쯤 우주적 파괴의 불길은 우주적 구름에서 떨어지는 억수 같은 빗물로 완전히 진화되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공간도 전혀 없었고, 방향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래'도 '위'도 또한 없었습니다. 원소들도 우주들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의 무한한 바다만이 있었습니다.

한편, 나는 태양이 떠오르면서 지구를 바라보듯이, 브람마로까를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창조주 브람마는 마치 흔들리지 않는 산처럼 사마디 즉 명상에 잠겨 앉아 있었고, 그의 주변은 쁘라다나 즉 제일의 원리들, 신들과 현자들, 천인들과 싯다들이 에워싸고 있었으며, 그들 역시 모두 명상 자세로 앉아 마치 생명이 없는 것처럼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열두 개의 태양도 거기에 도착하여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잠시 뒤에 나는 마치 사람이 잠에서 깨어날 때 자신이 꿈 속에서 본 대상들을 보듯이 브람마와 다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보았을 때, 나는 꿈 속의 대상들이 구체화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적 조건화가 그렇게나 많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다음 나는 이 모든 신들이 순수한 공이라는 것을 또한 깨달았습니다. 그곳을 떠나지도 않고 그들은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그들 또한 창조주 브람마처럼 이름과 형상을 버린 뒤에 이미 니르바나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를 제한시키는 조건화 즉 바사나가 그들로부터 사라졌을 때, 그들은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몸은 순수한 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사나나 정신적 조건화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사나가 사라지면, 마치 잠에서 깨어난 뒤 꿈 속의 대상을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는 것과 꼭 같이, 몸도 더 이상 보이거나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묘한(아띠바히까) 몸이나 거친(아디바우띠까) 몸도 정신적 조건화가 사라지면 심지어 깨어 있는 상태에 있을지라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꿈의 상태를 예로 드는 이유는 그것이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경험을 거절하는 사람 같으면, 일찌감치 멀리서부터 그를 피해야 합니다. 잠자는 페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그를 깨울 수 있겠습니까?

꿈을 일으키는 몸이 없어질 때 꿈이 없어진다고 주장한다면, 몸이 없을 때 내게에서는 어떤 삶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우주도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이 지금과 다른 세상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의식이 몸 등의 분비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경전들의 가르침은 완전히 쓸모없게 됩니다. 만약 그대가 경전들의 권위를 부정한다면, 왜 그대는 조금이라도 권위를 가집니까? 만약 그대가 몸이 존재하는 한 명상도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망상은 하나의 실재가 됩니다. 만약 의식이 몸에서 우연히 일어난다면, 왜 그 의식은 그 무한한 본성을 실현시키지 못합니까?

어쨋든 의식이 그 자체 내에서 무엇이든지 작가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실재적이라고 하든 비실재적이라고 하든지 간에, 그것은 경험을 합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예에서, 참나의 본성은 그 자체의 타고난 움직임 때문에 그 자체를 의식으로서 압니다. 그 다음 그 의식은 정신적 조건화(바사나) 때문에 잘못된 자각을 경험합니다. 제한된 작가은 속박입니다. 반면에, 조건화에 대한 어떠한 자각(혹은 제한적인 자각)도 없을 때 니르바나가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모든 신과 열두 태양이 브람마와 하나가 되었을 때, 이들 태양은 지구를 태워 없앴듯이 창조주의 세상마저 태워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창조주의 세상을 태우고 브람마처럼 깊은 명상에 들어간 뒤에 그들은 연료 없는 등불처럼 니르바나에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 모든 것이 짙은 암흑에 싸였습니다.

한편 나는 거기에서 무시무시한 형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그는 형체를 가진 어둠처럼, 형체를 가진 우주의 소멸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광휘로 빛을 발했습니다. 그에게는 다섯 개의 얼굴과 열 개의 팔, 그리고 세 개의 눈이 있었습니다. 손에는 삼지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존재의 공간 속에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를 머금고 있는 구름처럼 어두웠습니다. 그는 마치 우주의 바다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였으며, 그 자신이 바로 그 우주적 바다의 화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날개 달린 산과 같이 생겼습니다. 그의 삼지창과 세 개의 눈을 보고, 나는 "이 분이 루드라 신이다."라고 생각하며 먼 거리에서 그에게 절을 했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이 루드라는 누구이며, 그의 다섯 개의 얼굴과 열 개의 손 등은 무엇입니까?

오, 라마여! 그는 루드라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아감입니다. 그는 마음의 평정을 깨뜨리는 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상은 순수한 공간 내지 공입니다. 그는 공간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공간의 색깔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공간처럼 순수하고 분할할 수 없는 의식이기 때문에, 그는 공간의 참나(아까샤 아뜨마)라고 합니다. 또 그가 모든 것의 참나이고 편재하기 때문에, 그는 큰 참나 혹은 지고의 참나라고 합니다. (지식의) 다섯 감각 기관이 그의 얼굴입니다. 활동의 다섯 기관과 그들의 다섯 영역이 그의 열 개의 팔입니다.

무한한 의식이 그 자체를 자각하게 될 때만 이 형상이 실제로 밖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또 루드라로서 나타난 이 형상은 말하자면 무한한 의식의 작은 입자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므로 실제로는 그러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형상은 가공의 자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찌다까샤(무한한 의식)의 전개나 움직임으로서 존재하고, 또한 (생명의 숨결로서) 창조물과 살아 있는 존재들의 두 공간에서 공기로 존재합니다. 마침내 그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게 될 때, 그는 지고의 평정을 얻습니다. 루드라의 세 개의 눈이란 세 개이 구나(사뜨바, 라자스 그리고 따마스), 세 개의 시간(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세 개의 내면의 도구(찌따, 붓디 그리고 아함까라), 옴(AUM)의 세 가지 양상, 그리고 세 개의 베다를 말합니다. 삼지창은 그가 그의 손에 삼계를 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사뜨바나 미덕에 의해 얻어지고 그의 존재 자체가 모든 것의 행복을 위해 있기 때문에, 그는 쉬바라고 합니다. 그 다음 그는 지고의 평화 상태를 얻으므로 끄리슈나라고 합니다. 그는 깔빠나(상상력)로서 직접 우주 전체를 창조하고, 우주적 존재의 바닷물을 마시며, 그 지고의 평화에 도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 다음 나는 이 루드라가 생명력 즉 쁘라나의 속도로 우주적 바닷물을 마시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주적 바다의 바닷물은 거대한 불길이 맹렬하게 타고 있는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루드라나 자아감은 바다(지구)의 중심에 있는 불로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주기가 끝날 때에 그는 그 바닷물을 마십니다. 정말로 이 자아감은 언제나 모든 것입니다.

그때, 그 순수하고 무한한 공간 속에는 오직 네 개의 것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검은색의 루드라였는데, 그는 어떤 지지물도 없이 그리고 어떤 움직임도 없이 서 있었습니다. 둘째는 지구였으며, 그것은 상당히 진흙투성이였고, 지옥에서부터 천국에 이르는 모든 세상의 거처였습니다. 셋째는 이 우주의 상층부로서, 그것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 모든 것 가운데 어디에나 순수한 브람만, 즉 이 우주의 각기 다른 부분들에 고루 퍼져 있는 무한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밖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창조주 브람마의 거처는 어디입니까? 그리고 그 거처의 장막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존재합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브람마의 거처(지구 평면의 중심)는 지구 평면의 열 배나 넓은 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와 꼭 같이, 불의 영역도 그 크기가 물의 열 배나 됩니다. 그 너머에 있는 공기의 영역도 불의 영역보다 열 배나 넓습니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크기는 공기 영역의 열 배나 됩니다. 그 너머에 브람마아까샤라는 무한한 공간이 있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오, 현자시여! 이 우주를 누가 위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붙들고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지구 등이 그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브람마안다(황금의 알 즉 우주적 인격체)의 커다란 몸 때문입니다.

라마가 다시 물었다.

오, 신이시여! 브람마안다는 또 누가 지탱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 라마여! 그대가 그것을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것은 어떤 누구의 지탱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비록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형상도, 몸체도, 물질성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이 떨어진다.'라고 말하거나 '그것을 붙잡는다.'라고 말할 때, 그 정확한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관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그런 식으로 있습니다. 이 우주는 무한한 의식이 만들어 낸 꿈의 도시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떨어진다'라고 생각될 때, 그것은 언제나 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그것이 공간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면, 그것은 공간 속에 있으면서 움직입니다. 또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면, 그것은 움직임이 없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소멸된 것으로 생각이 되면, 그것은 소멸된 것처럼 보입니다.

  1. 주석: 물론, 비차라는 '직접적인 관찰이나 들여다보기'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2. 주석: 이 단락에 나오는 '생각하기'와 '생각 안 하기'란 단어에 대해 말하자면, 본문에서는 단순히 생각한다는 의미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삼베다남'과 '아삼베다남'이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삼베다남'이란 말에는 또한 인지, 이해, 느낌, 경험 그리고 지식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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