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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브링기샤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6. 25.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대의 모든 의심을 버리십시오. 도덕적 용기에 의지하십시오. 최고의 행위자가 되고, 최고의 향락자가 되며,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는 최고의 포기자가 되십시오. 이러한 세 가지 계율은 먼 옛날 쉬바 신이 브링기샤에게 전수한 것이며, 그 때문에 브링기샤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브링기샤는 일상적이고 전통적인 참나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쉬바 신에게 바가가서, "신이시여! 저는 이 현상계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부디 이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알려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쉬바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대의 모든 의심을 버리십시오. 도덕적 용기에 의지하십시오. 마하복따(위대한 기쁨의 향유자)와 마하까르따(위대한 활동의 행위자)와 마하뜨야기(완벽한 포기자)가 되십시오.

아무 의심이 없고,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 성공과 실패에 흔들리지 않고, 자아감이나 질투심이 없이, 마음을 고요와 순수의 상태에 둔 채, 자연스러운 상황들에서 비록 그 활동이 다르마(옳음)나 아다르마(그름)로 간주되든 안 되든 간에, 적절한 활동들을 행하는 사람이 마하까르따(위대한 활동의 행위자)입니다. 그는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으며, 이기적인 욕망들이나 동기들도 없고, 지나치게 들뜨거나 너무 기뻐 날뛰는 일도 없이,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슬픔이나 비애도 없이, 활동과 활동 아님에 무관심한 채로 모든 것의 목격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본성 자체는 평화와 균형, 다시 말해 모든 상황(모든 것의 출생이나 존재나 소멸)에서도 유지되는 평정입니다.

어떤 것도 미워하지 않고, 또한 어떤 것도 동정하지 않으며, 모든 자연스러운 경험들을 즈기는 사람과, 심지어 활동들을 하면서도 그 어떤 것에 집착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사람과, 비록 경험을 하고 있지만 경험하지 않는 사람과, 세상의 유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이 바로 마하복따(위대한 향락자)입니다. 그의 마음은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쾌락이나 고통 그리고 혼란을 일으키는 변화들과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노령과 죽음, 통치와 빈곤, 심지어 큰 재난들과 행운들을 즐겁게 바라봅니다. 그 사람의 본성 자체는 비폭력과 미덕이며, 그는 '이것은 즐길 수 있다.', '이것은 즐길 수 없다.'와 같은 임의적인 구별을 하지 않고, 달콤하고 쓴 것을 똑같이 맛있게 즐깁니다.

마음에서부터 다르마와 아다르마, 고통과 쾌락, 탄생과 죽음, 모든 욕망, 모든 의심, 모든 확신 같은 개념들을 버린 사람과, 몸과 마음 등이 일으키는 고통의 경험에서 그릇됨을 볼 수 있는 사람과, '나에게는 어떤 몸이나 탄생이나 옳고 그름이 없다.'를 깨달은 사람과, 가슴에 현상계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버린 사람이 바로 마하뜨야기(위대한 포기자)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쉬바 신은 브링기샤에게 가르쳤고, 브링기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오, 라마여! 바로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여 슬픔을 극복하십시오.

라마는 물었다.

신이시여! 당신은 모든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자아감이 마음속에서 사라져 없을 때, 어떤 징후로 사드바의 본성을 알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라마여! 그러한 마음은 가장 심한 자극 하에서도 탐욕과 망상과 같은 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보고 시뻐하는 미덕은 자아감이 사라진 그런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정신적 조건화와 경향성이란 매듭들이 산산이 끊어집니다. 노여움도 크게 약해지고, 망상도 아무 효력이 없어집니다. 욕망은 무력해지고, 탐욕은 사라집니다. 감각은 흥분되지도 우울해지지도 않은 채, 안정된 상태로 작용을 합니다. 쾌락과 고통이 얼굴에 반영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그들 모두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가슴은 평온의 상태에 고요히 머물러 있습니다.

이 모든 미덕들을 겸비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노력이 없이 자연스럽게 몸을 걸치고 있습니다. (행운이나 불운처럼) 존재와 비존재가 다양하고 그리고 심지어 크나큰 모슨들을 일으키면서 서로를 뒤따른다 해도 그것들은 거룩한 성현들에게 기쁨이나 슬픔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자신의 지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기만 하면 도달할 수 있는 이 참나 지식의 길을 따라가지 않는 자에게는 재난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삼사라(현상계, 즉 탄생과 죽음의 순환 주기)의 바다를 건너 지고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은 참나의 본질에 대한 탐구(나는 누구인가?)와,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 세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진리의 본질에 대한 탐구(질리는 무엇인가?)입니다.

그대 자신의 조상인 익슈바꾸가 그의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을 깨도, 그는 어느 날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노령과 죽음, 고통과 쾌락 그리고 망상과 같은 다양한 고통들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러나 그는 어떤 해답에도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브람마의 아들인 자신의 아버지 마누에게 적절한 경배를 올린 뒤에, 그에게 물었습니다. "신이시여! 당신 자신의 뜻에 따라 당신 앞에 문제 하나를 제기합니다. 이 세상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이 삼사라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마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지금 네가 여기서 보고 있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네가 볼 수 없고, 마음과 감각들을 초월해 있는 어떤 것도 없다. 오직 영원하고 무한한 참나만이 있다. 이 우주로서 보이는 것은 단지 그 참나에 비친 영상에 불과하다. 그 우주적 의식에 내재된 에너지 때문에, 그 영상이 여기서는 우주로,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들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네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속박도 해방도 없다. 하나도 아니요, 다수도 아닌, 오직 하나의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한다. 속박이나 해방이란 생각마저 모두 버리고, 평화 속에 조용히 머물러라."

마누는 계속 말했습니다.

순수 의식이 그 자체 내에서 개념들과 관념들을 일으킬 때, 그 순수 의식은 개별성(지바)을 띠게 된다. 그러한 개인들은 이 삼사라(현상계)를 떠돌아다니게 된다. 월식 때는,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기도 한다. 그와 꼭 같이, 개인의 경험들을 통하여 무한한 의식인 순수한 경험을 인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참나 지식은 경전들을 공부하거나 또는 구루의 도움을 받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참나 그 자체의 힘으로 얻어질 수 있다.

너의 몸과 감각들을 참나가 아닌, 경험의 도구로 생각하라. '나는 몸이다.'라는 개념은 속박이다. 그래서 구도자는 그것을 피해야 한다. '나는 순수 의식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이해가 지속될 때, 그것은 해방에 도움이 된다. 노령이나 죽음 등이 전혀 없는 그 참나를 깨닫지 못할 때만, "아! 난 죽었다. 혹은 난 어찌할 수 없구나!"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생각들 때문에 무지는 더욱 강화된다. 그러한 불순한 생각들과 개념들로부터 너의 마음을 해방시켜라. 그러한 개념들이 없는 참나 속에 조용히 머물러라. 다양한 활동들을 하더라도, 완벽한 균형 상태에 자리를 잡고, 평화와 기쁨 속에서 이 왕국을 통치하라.

신은 이 현상계 속에서 놀다가, 이 현상계를 다시 자기 자신 속으로 회수해 간다. 속박을 만들고 가져오게 하는 힘이나 에너지는 또한 이 세상을 소멸시키고 해방시키는 힘이나 에너지이기도 하다. 마치 나무가 그 모든 부분과 잎사귀에 골고루 스며들어 있듯이, 이 무한한 의식도 전 우주에 골고루 스며들어 있다. 아! 슬프게도, 무지한 사람들은 그 무한한 의식이 자기 존재의 모든 세포 속에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참나만이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희열을 누리고 있다.

경전들을 공부하고 거룩한 성인들과 함께 교제함으로써 이러한 이해력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깊이 생각해 보거나 탐구해 보는 것은 두 번째이다. 집착이 없거나 심리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세 번째이다. 네 번째는 바사나(조선화와 경향성들)의 속박을 딱 끊어 버리는 것이다. 순수한 의식에서 나오는 희열은 다섯 번째이다. 그때 해방된 현자는 마치 반쯤 잠을 자는 것처럼 살아간다. 참나 지식은 여섯 번째로, 이때 현자는 온통 희열에 잠겨 마치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살아간다. 뚜리야(초월)라고 하는 일곱 번째 상태는 바로 해방이다. 그때는 완벽한 평정과 순수가 있다. 이 너머(여전히 일곱 번째 상태)에는 설명할 수 없는 뚜리야띠따가 있다. 처음에 나오는 셋의 상태는 '깨어 있는' 상태이다. 네 번째는 꿈의 상태이다. 다섯 번째는 깊은 수면의 상태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희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뚜리야, 즉 비이원적 의식이다. 일곱 번째는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 도달한 사람은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없이, 순수한 존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죽고 싶어 하지도,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어 있다. 그는 개체화로부터 벗어났다.1

마누는 계속 말했다.

해방된 현자들은 정식으로 이 세상을 포기한 사람일 수도 있고, 집안 생활을 영위해 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나의 마음은 조금도 물들지 않고, 모든 조건화에서 벗어닜다. 나는 순수하고 무한한 의식이다.'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슬퍼하지 않는다. '나'와 '타인'에 대한 개념들이 없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리고 어떤 사회에 있든지 간에,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방향의 세상이 영원한 참나의 광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엇갈리는 환경들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는 것은 정말로 무지한 참나의 조건화 때문이다. 이러한 참나 조건화가 약화되든지 아니면 소멸될 때, 흥분도 없고 또한 슬픔도 없다. 이렇게 약화된 바사나나 조건화에서 나오는 활동은 무행위로, 그 무행위의 씨앗은 발아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신체의 수족들로 활동들을 행하지만, 그의 마음과 가슴은 지고의 평화에 조용히 머물러 있다.

사람이 힘써 얻는 기타 모든 능력들은 반복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된다. 그러나 이 참나 지식은 일단 얻기만 하면, 나날이 늘어만 간다.

개별성(지바)은 오로지 쾌락에 대한 욕망이 지속되는 동안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 욕망은 바로 무지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참나 지식이 일어나면, 욕망은 사라지고, 그와 함께 참나는 개별성의 개념을 버리고 그 무한한 본성을 깨닫는다. '이것은 내 것이다.' 혹은 '나는 이것이다.'와 같은 생각들을 지닌 사람들은 무지의 함정에 빠진다. 가슴과 마음을 다해 그러한 생각들을 버린 사람들은 더욱더 높이 상승한다. 만물에 골고루 퍼져 있는 스스로 빛을 내는 참나를 바라보라. 이 편재하는 의식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삼사라의 바다를 건넌다.

브람마, 비슈누 등의 신들이 행한 모든 것을 그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라. 어느 때고 볼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참나 즉 무한한 의식이다. 그대는 바로 그 무한한 의식이다. 그것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대는 공도 아니요, 공 아님도 아니다. 의식도 아니요, 의식 아님도 아니다, 참나도 아니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이러한 지식에 조용히 머물러라. 해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도 없고, 또한 다른 것으로 부를 수 있는 장소도 없다. 자아감이 소멸될 때 무지는 사라지며, 그것이 바로 해방인 것이다.

이러한 참나 지식을 얻은 사람은 마치 사자가 우리를 부수고 나온 것처럼 카스트 제도와 삶의 순서에 관한 규정들, 그리고 경전들의 지식 사항들과 금지 사항들을 초월해 있다. 그의 활동들은 어떤 동기에 의한 것도 아니요. 어떤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행위의 업에 물들지 않는다. 그는 칭찬과 비난을 초월해 있다. 그는 숭배하지도 않고, 숭배를 받지도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동요되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만이 숭배와 영광과 경의를 받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의례나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현자들을 숭배함으로써 사람은 진실로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

  1. 주석: 이 단락에 약간의 혼동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부문을 다루는 126장에서 그 뜻은 분명해진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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