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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망상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6. 25.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최고의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뒤에 까짜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아감과 소유욕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오, 라마여! 까짜처럼 살아기십시오. 자아감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신뢰하지 말고 버리십시오. 비실재적인 것이 어떻게 붙잡히거나 버려질 수 있겠습니까? 자아감 자체가 실재하지 않으면, 탄생과 죽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대는 분할할 수도 없고 관념화 작용도 없는, 그러면서도 모든 존재를 포함하고 있는, 미묘하고도 순수한 의식입니다. 오직 무지의 상태에 있을 때만 이 세상은 하나의 환영과 같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브람만으로 보입니다. 일원성과 다양성의 개념을 버리고, 희열의 상태로 계십시오. 망상에 빠진 사람처럼 활동하며 고통 받지 마십시오.

라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넥타와 같은 말씀으로부터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얻습니다. 나는 이제 초월적인 상태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싫증도 없습니다. 나는 만족하고 있지만, 다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넥타에 만족한 채로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언급한 그 망상에 빠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시슈타는 말했다.

오, 라마여! 망상에 빠진 사람의 재미나는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망상의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막에서 태어나 사막에서 자랐습니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망상의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공간에서 태어났다. 나는 공간이다. 공간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공간을 보호해야 한다." 이와 같이 결심을 하고, 그는 공간을 보호할 집을 하나 지었습니다. 공간이 집 안에서 안전하게 둘러싸인 것을 보고서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 집은 허물어졌습니다. 그는 "오, 나의 공간이여! 너는 어디로 갔느냐? 아, 슬프게도 공간을 잃어버렸어!"라며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그 다음 그는 우물 하나를 팠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물 속의 공간이 보호받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지나자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 그는 잇따라 항아리와 구덩이와 또한 네 그루의 사라 나무가 있는 작은 숲을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 이들도 하나씩 사라졌고, 망상에 빠진 사람은 불행해졌습니다.

오, 라마여! 이 이야기의 의미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그 사람은 자아감입니다. 그것은 바람으로 움직임이 일어나듯이 일어납니다. 그것의 실재는 브람만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아감은 자기 둘레의 공간을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를 그것이 보호하고 싶어하는 몸 등과 동일시합니다. 몸 등은 존재하다가 얼마 뒤에 사라집니다. 이러한 망상 때문에, 자아감은 참나가 죽고 없어진 줄로 알고, 거듭 슬퍼합니다. 항아리 등이 없어졌을 때, 공간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오, 라마여! 참나는 심지어 공간보다도 더 미묘한 순수 의식입니다. 그것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어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죽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계로서 빛나는 것은 오로지 무한한 브람만뿐입니다. 이것을 아시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지고의 브람만으로부터, 마음은 생각하는 능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처음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마치 향기가 꽃에 있듯이, 파도들이 바다에 있듯이, 그리고 햇빛이 태양에 있듯이, 그 브람만 안에 그 자체로서 있습니다. 지극히 미묘하고 볼 수 없는 브람만은 말하자면 잊혀졌으며, 따라서 현상계가 진짜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만일 햇빛이 태양과 다르고 구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사람에게 햇빛은 별개의 실재를 지닙니다. 금으로 된 팔찌를 팔찌로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금이 아니라 정말로 팔찌인 것입니다.

그러나 햇빛이 태양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으면, 그 사람의 이해력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니르비깔빠)고 합니다. 파도들이 바다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으면, 그 사람의 이해력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니르비깔빠)고 합니다. 팔찌가 금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으면, 그 사람의 이해력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니르비깔빠)고 합니다.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사람은 그것이 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은 이들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 땅으로 흩어져 내릴 때 기쁨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만약 그가 그 불꽃이 불에 지나지 않으며 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오직 불만을 보고, 그의 이해력은 변화되지 아노았다(니르비깔빠)고 합니다.

따라서 니르비깔빠에 자리 잡은 사람은 정말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해력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는 얻을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대상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다양성이나 객관화에 대한 이러한 지각을 버리고, 의식에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참나가 깊이 생각하는 것은 모두 그 의식에 내재된 힘 때문에 구체화됩니다. 그 구체화된 생각은 그 다음 마치 독립해 존재하는 것처럼 빛납니다. 따라서 (생각의 능력을 갖춘) 마음이 깊이 생각하는 것은 모두 즉시 구체화됩니다. 이것이 다양성의 발단입니다. 그러므로 이 현상계는 실재하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지각력이 있는 존재들이 그들 자신의 백일몽 속에서 자양한 대상들을 만들고 경험하는 것처럼, 이 현상계도 브람만의 백일몽입니다. 현상계가 브람만임을 깨달을 때, 그것은 사라져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브람만은 브람만으로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던 그 어떤 것도 만들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그대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순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시오. 브람만만이 여기서 이 모든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 밖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나 '다른 것'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해방과 속박이란 개념들조차 버리십시오. 자연스러운 활동들을 하면서, 순수하고 자아가 없는 상태에 머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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