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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비마, 바사 그리고 드르다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8.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오, 라마여! 세 명의 악마들 즉 다마, 비얄라, 까따가 도망을 가 버린 후에, 삼바라는 그들이 어리석게도 자아적인 개념을 갖게 되어 재난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마들을 만들 것을 결심했지만, 이번에는 자아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참나 지식과 지혜를 가진 악마들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삼바라는 마법으로 비마, 바사 그리고 드르다라는 세 명의 악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전능했습니다. 그들은 참나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초연과 순결로 가들했습니다. 그들은 옹 우주를 풀잎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들의 군대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싸웠지만 자아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아가 머리를 들 때마다 그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참나 탐구로 그것을 가라앉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웠습니다. 현재 속에서 적절히 행동했으며, 모든 집착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내가 그것을 했다.'라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주인 삼바라가 정해 준 일에 전념했으며, 욕망과 혐오가 없었고, 모든 것을 동등한 시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신들의 군대를 재빠르게 패배시켰습니다. 신들은 피하여 비슈누 신에게로 도망쳤습니다. 비슈누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다른 거처로 이주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비슈누 신이 손수 악마 삼바라와 싸워야 했습니다. 신에 의해 죽음을 당한 악마는 즉시 비슈누의 거처에 이르렀습니다. 지배자 비슈누는 세 악마인 비마, 바사, 드르다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들은 원래 자아가 없었으므로 몸이 죽었을 때 바로 깨달았습니다.

오, 라마여! 조건화된 마음만이 굴레입니다. 마음에서 조건화가 떨어져 나갈 때 해방이 있습니다. 진리가 선명히 보이고 깨달아질 때, 마음의 조건화는 멀리 떨어져 나갑니다. 램프의 불꽃이 꺼질 때처럼 조건화가 중지되면, 그 사람의 의식은 더없이 평화로워집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생각하든, 참나만이 이 모든 것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깨끗한 지각입니다. '조건화'와 '마음'은 그에 상응하는 진실이 없는 그냥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리를 탐구하면 '조건화'와 '마음'은 의미를 지니기를 그칩니다. 이것이 깨끗한 지각입니다. 이러한 깨끗한 지각이 일어날 때, 해방이 있습니다.

다마, 비얄라, 까따는 자아에 의하여 조건 지어진 마음을 예로 든 것입니다. 비마, 바사, 드르다는 조건화나 자아가 없는 마음을 예로 든 것입니다. 오, 라마여! 전자처럼 되지 말고 후자처럼 되십시오. 그것이 나의 소중하고 총명한 제자인 그대에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한 이유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비마, 바사, 드르다는 무지와 기만의 지배를 받는 마음을 통제하였던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마음의 그러한 통제는 이 세상의 모습, 또는 출생과 죽음이라는 윤회의 고통, 비극의 끝없는 사슬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지혜의 정수 모두를 말할 것입니다. 잘 듣고 그대의 온 인생을 그 향기로 채우십시오. 굴레는 쾌락을 향한 갈망이고, 쾌락을 포기하는 것이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모든 쾌락의 중심들을 독한 기운으로 보십시오.

맹목적인 포기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감각들이 주는 쾌락의 본질 안으로 깊고 진지하게 탐구하여 그것들을 위한 모든 갈망을 버리십시오. 그때 그대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자질들을 배양함으로써 잘못된 모든 지식이 점차 그치게 됩니다. 그에 따라 마음은 반대를 이루는 쌍들, 불안, 두려움 및 미혹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점차 욕망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은 평화와 희열의 상태에서 쉽니다. 그러면 마음은 자아, 나쁜 생각들, 감정들, 집착과 슬픔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마음은 의심이라는 난폭한 아들과 갈망이라고 알려져 있는 아내를 없앱니다. 이상하게도, 깨달은 마음은 자신을 키워 주었던 생각, 욕망 같은 바로 그러한 것들의 정지를 가져옵니다. 마음의 진정한 본성을 탐구해 가면서, 마음은 몸과의 동일시마저 버립니다. 무지한 마음은 팽창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깨어나면, 마음이 마음이기를 그칩니다.

마음만이 이 우주입니다. 마음은 산맥입니다. 마음은 공간입니다. 마음은 신입니다. 마음만이 친구이자 적입니다. 의식이 자신을 잊어버리고 변화의 심리적 조건화를 거칠 때, 그것이 탄생과 죽음을 일어나게 하는 마음입니다. 이 무한한 의식이 심리적 조건화에 의해 조금 둘러싸임으로 이 의식의 대상이 되는 무한한 의식의 부분을 지바라 합니다. 무한한 의식의 진리에서 떨어져 나와 조건화 속으로 더욱더 깊이 가라앉음으로써 세상에 관련되는 것도 이 지바입니다.

물론, 참나는 지바도 아니고 몸도 아니며, 몸의 구성 원소들도 아닙니다. 참나는 공간처럼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하여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마음 자체가 지바입니다. 마음은 마음 자신이 마음 그 자신에게 투사한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에 의하여 마음은 구속됩니다. 지바의 화신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도 마음의 상태입니다.

왕이 되고 싶은 왕은 사람은 왕이 되는 것을 꿈꿉니다. 사람은 자신이 강하게 바라는 것을 조만간에 획득합니다.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면, 그것의 결과들도 순수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순수하면, 그것의 결과 역시 순수합니다. 고귀한 사람들은 궁핍할 때도 고귀한 영적인 추구를 합니다.

진리 안에는 굴레도 해방도 없습니다. 무한의 존재가 '나는 몸이다.'라고 생각하며, 이 생각이 굴레로서 작용합니다. 이것들 모두가 거짓임을 깨달을 때, 그는 무한한 의식으로서 빛납니다. 순수한 천은 쉽게 물이 듭니다. 마음이 순수한 생각들과 행위들로부터 정화되었을 때, 마음은 무한함의 성질을 지니게 됩니다.

순수한 마음 안에서 몸, 경전의 지식 및 초연 등에 관한 개념과 관념들이 일어날 때, 세상의 모습이 존재하게 됩니다. 마음이 외적 대상인 우주에 관여할 때, 마음은 참나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포기하면, 마음은 즉시 무한한 것 안으로 흡수됩니다.

마음은 무한한 의식과 따로 떨어져서는 아무런 존재도 가지지 않습니다. 마음은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끝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지금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이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손에 슬픔을 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실제로는 참나임을 아는 사람은 그 슬픔 너머로 갑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그에게 기쁨과 해방 둘 다를 줍니다.

마음은 다름이 아니라 생각들과 개념들일 뿐입니다. 그런 마음이 끝난다고 해서 누가 슬퍼할 것인지요! 실재는 보는 자와 대상 간의 중간에 놓여 있는 의식입니다. 이 실재는 마음에 의해 가려져 있으며, 마음이 그치면 드러납니다.

마음의 조건화가 그치면 무지, 갈망, 욕망들과 혐오들, 미혹, 우둔, 두려움과 개념 작용들이 끝납니다. 순수함, 행운, 선함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참나 지식의 기쁨을 즐깁니다.

모든 내적 불순물들을 파괴함으로 순수해진 지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참나 안으로의 탐구를 통해 얻은 참나의 불빛으로 자신의 가슴을 빛나게 했습니다. 탄생과 죽음의 무가치함을 앎으로, 그는 몸이라는 도시에서 공포와 걱정이 없이 삽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무한한 의식은 초월적인 것입니다. 청하건대 그 안에 이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오, 라마여! 미래의 파도들이 고요한 바다 안에 존재하듯이, 이 우주는 무한한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지만, 잠재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차별이 있습니다. 비록 공간이 모든 곳에 있지만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무한한 의식은 모든 곳에 있지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수정 안에 비친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무한한 의식 안에 비친 이우주는 실제로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공간이 그 안에 떠 있는 구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듯이, 이 무한한 의식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우주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굴절체가 없으면 빛이 보이지 않듯이, 무한한 의식은 여러 몸들을 통하여 보입니다. 무한한 의식은 본질적으로 이름들과 형태들이 없지만, 이름들과 형태들은 그것 안에 나타납니다.

릐식 안에 비친 의식은 의식으로서 빛나고 의식으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현명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무지한 자에게는 개념이 일어나 존재하며, 이 개념은 의식과 다른 어떤 것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자에게는 이 의식이 끔찍한 세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현명한 자에게는 같은 의식이 하나의 참나로 나타납니다. 이 의식만이 순수한 경험입니다. 태양이 빛나고 모든 존재들이 여기에서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의식의 덧분입니다.

이 의식은 창조되지도 소멸되지도 않습니다. 파도들과 바다의 관계처럼, 세상의 모습은 순수 의식 위에 덧붙여진 것입니다. 그 의식 안에서 그것이 그것 스스로 비추어질 때, 다양성을 일어나게 하는 '내가 존재한다.'라는 개념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동일한 의식이 공간으로서는 씨를 싹 틔우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공기로서는 싹을 나오게 하고, 물로서는 그것에 영향을 주고, 흙으로서는 그 싹을 튼튼하게 하고, 빛으로서는 의식 자체가 새로운 생명을 나타나게 합니다. 오래지 않아 과실로서 나타나는 것은 씨 안에 있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만이 여러 계절들이며 여러 계절들의 특징입니다. 이 의식이 우주의 소멸 때까지 수많은 존재들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온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이 의식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말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습은 바로 무한한 의식의 본성으로서 오고 갑니다. 이 세상은 무한한 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은 서로 인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세상은 무한한 의식 안에서 일어나, 그 안에 존재하다가, 그 안으로 흡수됩니다. 깊은 바다처럼 무한한 의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의식은 바다 표면에 보이는 파도들처럼 흔들립니다. 약물로 중독이 된 사람이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보듯이, 자신을 의식하게 된 이 의식은 그 자신을 다른 것으로 여깁니다.

이 우주는 실재도 비실재도 아닙니다. 우주는 의식 안에 존재하지만, 그러나 의식 안에서 독립하여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의식에 덧붙여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의식을 능가하지는 않습니다. 그 관계는 금장식들과 금의 관계와 같습니다.

모든 것에 스며 있는 이 참나인 지고의 브람만은 그대로 하여금 소리, 맛, 형태, 향기를 경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 라마여! 그것은 초월적이며 모든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비이원적이고 순수합니다. 그 안에는 다른 것이라는 개념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와 비존재, 선과 악 같은 이 모든 다양성은 무지한 자들이 동연히 상상한 것입니다. 이 상상이 참나 아닌 것이나 참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나 아닌 것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에 대한 욕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바람직하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와 같은 개념들은 참나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참나는 욕망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행위자인 행위의 도구와 행위 그 자체 역시 비이원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행위에 관계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그것과 그것 안에 존재하는 것은 동일하므로, 심지어 그것이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 안에는 어떤 욕망도 없기 때문에, 그것 안에는 행동하지 않음의 개념도 없습니다.

오, 라마여! 그 밖의 것은 없습니다. 그대가 바로 이 절대적 브람만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을 모든 이원성의 개념들로부터 자유롭게 하고는 활기찬 삶을 살아가십시오. 모든 종류의 행위들을 몇 번이고 반복함으로써 그대는 무슨 이득을 얻었습니까? 그리고 행위하지 않기를 바람으로써 그대는 무엇을 얻을 것입니까? 또는 경전들에 집착함으로써 무엇을 얻을 것입니까? 오, 라마여! 바람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을 때의 바다처럼 평화와 순수 속에 있으십시오. 모든 것에 완전히 충만해 있는 참나는 그대가 널리 여행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의 마음을 세상의 대상들 속에서 방황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대 자신이 지고의 참나이며, 무한한 의식입니다. 그대는 그 외의 것이 아닙니다!

바시슈타는 말하였다.

오, 라마여! 행복과 불행 둘 다를 일어나게 하는, 혹은 요가의 상태를 일어나게 하는 행위자라는 감각인 '내가 이것을 한다.'라는 개념은 현자들의 눈에는 허구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무지한 자들에게는 그것이 실재입니다. 왜냐하면 이 개념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이 개념은 경향성에 의해 자극된 마음이 어떤 것을 얻으려 노력할 때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서 결과로서 생기는 행위는 자신에게 돌아갑니다. 같은 행위가 그것의 결실의 경험으로 나아갈 때, '나는 이것을 즐긴다.'라는 개념이 일어납니다. 사실 두 개념은 같은 개념의 두 얼굴입니다.

행위를 하든 행위를 하지 않든, 천국에 있든 지옥에 있든 간에, 심리적 조건 형성이 무엇이든 그것은 마음에 의하여 경험됩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자들이나 조건 지어진 자들에게는 그들이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을 때도 '내가 이것을 한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었거나 조건 지어지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러한 개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에 관한 진리를 알면, 조건화는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이들은 이 세상에서 행위를 하고 있지만, 행위들의 결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그런 행위들에 집착함이 없이, 행위들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도록 허용합니다. 그리고 행위의 결과들이 어떠하든지, 그는 그것들을 자신의 참나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마음의 상태들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아닙니다.

마음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만이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만이 행위자이지 몸은 아닙니다. 마음만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모습은 마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은 마음 안에서 쉽니다. 경험하고 있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대상들이 고요해지면, 의식만이 납습니다.

현자들은 깨달은 이들의 마음이 희열의 상태에 있는 것도 희열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며, 움직이고 있는 것도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며, 실재인 것도 비실재인 것도 아니며, 이 두 속성 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그의 조건화되지 않은 의식은 연극을 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즐겁게 연기합니다. 왜냐하면 행위와 경험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무지한 자들에게 존재하고 있는 마음의 조건화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깨달은 이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그들은 늘 희열에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행위하지 않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덕이나 공덕 아님을 초래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어린아이의 행위와 같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상과 마음과 감각들의 행위에 전혀 집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해방의 개념도, 굴레의 개념도 간직하지 않습니다. 그는 참나를 봅니다. 그는 참나만을 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라마여! 절대적 브람만은 전능하기 때문에, 그의 무한의 잠재성이 이 눈에 보이는 우주로서 나타납니다. 실재, 비실재, 단일성, 다양성, 시작과 끝이라는 이 다양한 분류들은 그 브람만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파도들처럼 지바들 역시 개별화된 의식에 의하여 스스로 한계 지어진 브람만 안에 나타납니다. 이 지바는 나중에 점차 더 짙은 조건화를 경험합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행위의 결과들을 경험합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브람만은 슬픔에서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램프가 다른 램프로부터 불을 전해 받아 불이 켜지는 것처럼, 슬픔으로 가득한 우주가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운 우주에서 나왔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발미끼가 말했다.

이 질문을 듣고서, 바시슈타는 잠시 동안 다음과 같이 숙고했다. 분명히 라마의 이해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 불순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의 마음은 휴식을 찾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쾌락이나 행복에 대한 생각들로 흔들리는 한, 마음은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마음이 순수하다면, 그때 진리를 즉시 이해한다. 그러므로 무지하거나 반쯤 깨달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브람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현명한 스승들은 먼저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제심과 평온에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 다음에 진리의 지식을 전하기 전에 제자를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바시슈타가 말했다.

브람만이 슬픔으로부터 자유롭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대는 혼자 힘으로 진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혹은 적절한 시간이 오면 나는 그대가 이것을 이해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지금은 다음의 것을 이해하십시오.

브람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으며, 모든 것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브람만은 마야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을 통하여 이 창조물들을 존재하게 만들었습니다. 텅 빈 공간을 푸른색으로 보이게 하는 것처럼, 이 마야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도록 혹은 그 반대로 보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라마여! 보십시오. 그대는 이 세상 안에 무한히 다양한 창조물들을 봅니다. 그것은 신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의 표현입니다. 평온을 받아들이십시오.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은 진리를 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을 때, 세상은 다양성을 지닌 혼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우주는 신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이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불빛이 있는 곳에는 자연스레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듯이, 신의 부한한 능력 때문에 이 세상은 자신의 성품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나타남과 더불어 무지 또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슬픔이 있습니다. 이 무지를 버리고 자유로우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오, 라마여! 세상의 모습으로 있는 이 전체 창조는 무한한 의식 즉 브람만의 전능한 의식 에너지(찌뜨 샥띠)의 의도가 우연히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이 의도가 응축되어 마음 안에 의도된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마음은 즉시 이 세상이라는 장 안에 물질을 만들어 냅니다. 이 단계에 이 창조가 무한한 의식으로서의 자신의 본래적이며 진정한 본성을 사실상 버렸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 무한한 의식은 자신 안에서 순수한 공을 봅니다. 그래서 의식 에너지(찌뜨 샥띠)가 공간을 존재케 합니다. 그 의식 에너지 안에 다양화하려는 의도가 일어납니다. 이 의도는 여러 생명이 있는 창조물들을 만드는 수행원들을 가지고 있는 창조자 브람마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무한한 의식의 공간 안에 모두 열넷의 세상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세상들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어떤 존재들은 짙은 어둠 속에 있으며, 어떤 존재들은 깨달음에 가까이 있으며, 어떤 존재들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오, 라마여! 이 세상에 있는 살아 있는 많은 종들 중에서 인간만이 진리의 본성 안으로 지도를 받기에 적당합니다. 이 인간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은 슬픔과 미혹, 미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제 나는 이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경전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설명할 목적으로 이야기된 것이지 진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한한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변형들 혹은 우주적 존재의 조직화는 그렇게 보일는지는 모르지만, 신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상상 속에서조차 오로지 무한한 의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창조자로 그리고 우주를 창조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한 램프에서 다른 램프로 불이 옮겨 붙을 때, 그들 사이에는 창조자와 창조물이라는 관계는 없습니다. 불은 하나입니다. 창조는 단지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는 그 말에 댕으하는 실질적인 실재가 없습니다.

의식은 브람만입니다. 마음은 브람만입니다. 지성은 브람만입니다. 브람만만이 알맹이입니다. 소리와 말은 브람만입니다. 브람만만이 모든 물질의 구성 원소입니다. 참으로 모든 것은 브람만입니다. 실제로는 아무런 세상이 없습니다.

먼지가 제거되면 진짜 물질이 나타나고, 밤의 어둠이 없어지면 밤으로 인해 가려졌던 대상들이 확실히 보이듯이, 무지가 제거되면 진리가 깨달아집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무한한 의식 안에서 다양화하려는 의도가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말했다.

오, 라마여! 내가 한 말에는 어떤 모순도 없습니다. 그대가 진리에 대한 통찰을 얻을 때, 그대는 말 속에 있는 진리의 아름다움을 볼 것입니다. 창조 등에 관한 묘사들은 제자들을 지도할 목적으로 경전들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대의 마음이 그것들에 의하여 물들게 하지 마십시오. 단어들이 가리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대는 자연스럽게 단어들의 마술을 버릴 것입니다.

무한한 의식 안에는 의도도 없고 미혹의 베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 그 자체가 세상으로서 그대 앞에 있습니다.

이것은 무지가 끝날 때만 깨달아질 수 있습니다. 이 단어들과 설명들에 의지하고 있는 가르침의 도움 없이는 무지는 끝나지 앟을 것입니다. 이 무지는 스스로 파괴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무지는 진정한 지식의 빛을 찾고 있습니다. 무기들은 다른 무기들로 파괴되고, 먼지는 먼질르 깨끗이 하며, 독은 독을 치료하고, 적들은 다른 적들에 의해 파괴됩니다. 이처럼 이 마야는 마야가 파괴될 때 기뻐합니다. 그대가 이 마야를 자각하게 되는 순간, 마야는 끝이 납니다.

이 무지 즉 마야는 진리를 가리고는 이 다양성을 만듭니다. 그러나 마야는 그것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상합니다. 마야의 본성을 탐구하지 않는 한, 마야가 지배합니다. 마야의 본성을 탐구하는 순간, 마야는 그칩니다.

이 마야는 진리 안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직접 경험하지 않는 한, 그대는 그것에 대한 나의 말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브람만만이 진리라는 것을 아는 자는 해방되어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견해들은 사람을 무지에 가두려는 것입니다.

이 무지는 참나 지식이 없이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참나 지식은 경전들에 대하여 깊이 공부했을 때만 일어납니다. 이 무지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확실히 그조차도 참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어떻게 무지가 일어났는가?'라고 묻지 말고 '어떻게 무지를 제거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십시오. 이 무지 즉 마야가 존재하기를 그칠 때, 그때 그대는 이 마야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이 무지가 절말로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지는 지혜롭지 않은 상태에서만 일어납니다. 위대한 학자이건 영웅이건 단 한 사람도 이 무지를 면치 못했습니다. 이 무지는 모든 슬픔의 근원입니다. 그것을 뿌리 뽑아 없애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나는 무한한 의식이 지바와 이 모든 것으로 나타나게 된 과정을 다시 그대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는 바다 안에서 고요한 곳들도 보고, 파도가 일렁이는 곳들도 봅니다. 이처럼 무한한 의식 그 자체는 원래 비이원적이지만 어떤 장소에서는 다양성을 지닌 것처럼 보입니다. 전능하며 무한한 의식이 그것의 모든 무한한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무한한 의식의 전능한 이 힘이 나타날 때, 이 나타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인 시간, 공간 및 인과 관계와 제휴하여 나타납니다. 그때부터 무한의 이름들과 형태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외적인 나타남은 실제로는 무한한 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이름 및 형태와 연관을 짓고 시간, 공간, 인과 관계와 관련을 짓는 이 무한한 의식의 측면이 '들판의 아는 자' 즉 목격하는 의식입니다. 몸은 들판입니다. 이 들판의 모든 측면을 샅샅이 아는 자가 들판의 아는 자 즉 목격하는 의식입니다.

이 목격하는 의식이 잠재적 경향성들에 관련되면 자아 의식이 발달하게 됩니다. 이 자아 의식이 그 안에서 개념들과 의도들을 만들어 내면, 그것을 지성이라 합니다. 생각하는 도구로서 그것은 마음이라 합니다. 지성이 더욱 변형되거나 왜곡되면 그것은 감각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몸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과일이 익어 가면서 크기, 색깔 등에 있어 여러 변화들을 겪듯이, 무지가 깊고 짙어감에 따라 이 동일한 의식이 외적인 변화들을 겪습니다.

그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올바른 생각이나 진리로의 탐구를 버리고 자발적으로 무지가 희열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 가지 활동 및 자신을 그것들의 행위로 여기는 동일시의 덫에 걸린 채, 그들은 자신이 부과하고 자신이 의도한 끝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오, 라마여! 슬픔과 비탄, 욕망과 미혹으로 가득한 마음만이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참나 지식을 잊고서, 마음은 사람을 감각의 대상들이라는 불 속으로 던져 버리는 욕망과 분노, 악한 생각들과 갈망들을 만듭니다. 오, 라마여! 마음을 이 무지의 덮으로부터 구하십시오.

오, 라마여! 선하고 악한 생각들이 교차되는 마음의 불순한 상태를 걱정하지 않으며 노년, 죽음 및 절망에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악마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무한한 의식의 힘은 이 우주 안에 수백만의 존재들로서 우연히 나타납니다. 이 무수한 존재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의 조건화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에서 그리고 온 우주의 모든 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 안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이 시대에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창조된 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어떤 존재들은 단지 몇 번만 탄생했으며, 다른 존재들은 수없는 몸들로 탄생하고 있습니다. 어떤 존재들은 해방을 얻었습니다. 다른 존재들은 무서운 고통 속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어떤 존재들은 하늘에서 살며, 어떤 존재들은 반신반인이며, 어떤 존재들은 우주를 관장하는 신들입니다. 어떤 존재들은 악마이고, 어떤 존재들은 악귀입니다. 어떤 존재들은 인간의 네 계급의 구성원이고, 어떤 존재들은 미개한 원시 구성원입니다.

그 중 어떤 존재들은 약초 및 풀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또 어떤 존재들은 뿌리, 과일, 잎으로서 나타납니다. 어떤 존재는 넝쿨들의 형태로 있고, 어떤 존재들은 꽅들로서 삽니다. 어떤 존재들은 왕실의 의복을 걸친 왕과 장관들이며, 어떤 존재들은 은둔자나 거지이기 때문에 누더기나 나무껍질로 된 옷을 입습니다. 어떤 존재들은 뱀이고, 어떤 존재들은 곤충입니다. 어떤 존재들은 사자나 호랑이처럼 동물입니다. 어떤 존재들은 새이고, 어떤 존재들은 코끼리와 당나귀입니다.

어떤 존재들은 번영이고, 어떤 존재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존재들은 천국에 있고, 어떤 존재들은 죽어 가는 나무 구멍 속에 있습니다. 어떤 존재들은 해방된 현자들 사이에 살고, 어떤 존재들은 몸이라는 의식을 이미 넘어선 해방된 현자입니다. 어떤 존재들은 깨달은 지성을 부여받았습니다. 어떤 존재들은 완전히 우둔합니다.

오, 라마여! 이 우주에 여러 종류의 무수한 존재들이 있는 것처럼, 다른 세상에도 또한 그들 세상의 몸을 입고 있는 비슷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만든 마음의 조건화에 의하여 묶여 있습니다. 이 존재들은 때로는 올려지고 때로는 내려지면서 이 세상을 떠돌며 방황합니다. 죽음은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그들을 가지고 놉니다. 무수한 욕망들과 집착들에 속박되어 있으며 마음의 조건화에 의해 제한되면서, 그들은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 다닙니다. 무한한 의식인 그들 자신의 참나에 관한 진리를 지각할 때까지 그들은 계속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 참나 지식을 얻은 후에는 미혹에서 해방되며, 출생과 죽음이라는 윤회로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러나 이 모든 창조는 꿈과 같이 일어납니다. 이 창조는 실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실재처럼 보일 뿐입니다. 무지가 완전히 뿌리 뽑히고 모든 마음의 조건화가 멈춘 자가 해방된 현인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습이라는 이 꿈을 자각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세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지바가 해방을 얻을 때까지, 세상의 모습은 모든 지바들 안에서 항상 자연스럽게 상상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바 안에는 몸이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물질적 실질성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생각으로서 의지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다시 한 번 창조자 브람마가 무한한 의식 안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무한한 존재들이 그 의식 안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시간, 공간, 인과 관계가 없는 무한한 의식은 놀듯이 이것들을 취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주적 사람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 우주적 사람은 우주적 마음이기도 하고 우주적 생명이기도 합니다. 이 우주적 사람은 소리를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소리를 전달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공간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 우주적 사람은 접촉을 경험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공기가 창조됩니다. 공간과 공기는 보이지 않으며 미묘합니다. 보고자 하는 바람으로 이 우주적 사람은 불을 존재하게 합니다. 이 불은 빛의 근원들 안으로 확장합니다. 그는 불을 막는 차가움뿐만 아니라 맛을 경험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물이 존재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냄새를 맡으려는 소망으로 인하여, 냄새의 능력을 가진 흙이 존재하게 됩니다.

온갖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이 우주적 사람은 아직은 매우 미묘하고 분할되지 않았습니다. 외관상으로 볼 때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공간에 있는 무한의 불꽃들로 자신을 지각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이 각각의 불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아가 일어납니다. 이 자아는 그것 안에 내재하고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앞서 언급했던 우주의 다섯 원소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몸이라고 상상합니다. 그것은 몸을 거칠고 물질적이며, 물질로 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렇게 됩니다.

이 우주적 사람이 브람마입니다. 그는 이 모든 수많은 존재들을 창조한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그가 그것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무한한 의식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마치 태아가 잠들어 있는 것처럼, 참나 제한과 무한한 본성의 망각에 압도당하여, 그는 생명력(쁘라나)에 의하여 힘을 얻고 유지되며 그리고 물질로 된 몸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자신의 기원에 대한 탐구를 시작할 때, 그의 진정한 본성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는 참나 제한으로부터 해방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오, 라마여! 이 우주는 존재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우주로서 존재하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는 오로지 실재인 무한한 의식의 나타남이거나 반사일 뿐입니다. 무한한 의식 안에서 마치 꿈처럼 창조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실재만이 있습니다. 실재가 실재 안에서 나타나는 것은 실재입니다. 그것은 무한한 비어 있음입니다. 그대는 세상을 봅니다. 왜냐하면 눈 또는 여러 감각들이 세상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그대가 세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나 믿거나 안다면,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은 자신이 살기 위하여 이 몸을 존재하게 하였습니다.

마음이 타고난 이 모든 힘은 무한한 의식 안에 있습니다. 그 힘에 의하여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자들은 마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햇습니다. 이 모든 신들, 악마들, 인간들은 마음에 의해 출현되엇습니다. 마음이 그러한 개념들을 가지기를 그친다면, 그것들은 마치 연료가 없는 램프처럼 존재하기를 멈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대상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현자들은 이 세상에 있는 쾌락의 대상들을 추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만든 대상들을 좇는 사람들은 분명코 슬픔에 이르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습은 욕망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은, 세상에 등을 돌리거나 싫어할 때가 아니라, 오로지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 멈출 때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사실은 아무것도 파괴된 것은 아닙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 사라졌을 때, 그 사람이 무엇을 잃겠습니까? 그것이 전혀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정말로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왜 실재하지 않는 사라짐에 대하여 마음 아파해야 합니까? 그것이 실재한다면, 그때는 아무도 그것을 파괴할 수 없으며 그것을 실재하지 않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다름 아닌 영원한 진리인 브람만입니다. 어느 경우에도 도대체 슬퍼해야 할 여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실재하지 않는 것은 성장하거나 번창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시뻐합니까? 그러면 무엇을 갈망해야 합니까? 이 모든 것이 정말로 하나의 무한한 의식일 때, 무엇을 포기해야 한단 말입니까?

처음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끝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은 중간 즉 지금에도 역시 실재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존재하고 끝에도 존재하는 것은 현재에도 역시 실재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이 모든 것이 실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면, 그대 안에 아무런 슬픔이 없을 것입니다. 혹은 '나 자신을 포함한 이 모든 것이 실재이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슬픔은 그대에게 닿지 않을 것입니다.

(현자가 이것을 말했을 때, 아홉 번째 날은 저물고 집회는 흩어졌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자신의 부, 아내, 아들 등을 포함한 온 우주가 다름 아닌 마음의 마술이 만들어 낸 창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무엇을 잃었을 때 비탄에 빠지지도 않으며, 성공했다고 해서 들뜨지 않습니다. 오히려 번영할 때 불행을 느끼는 것이 적절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번영은 자신의 무지를 강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들에게 집착과 갈망을 만드는 것이 현자들에게는 초연과 차분한 무관심을 만듭니다.

현자들은 노력 없이 얻지 못하는 경험들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와 있는 것들은 경험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감각의 쾌락을 위한 갈망에서 떼어놓을 수 있다면, 미혹의 바다에 빠지는 것에서 구조될 수 있습니다. 온 우주와 자신이 하나임을 깨달은 자, '무엇을 위한' 욕망이나, '무엇에 반대하는' 욕망 모두를 넘어선 자는 결코 미혹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실재 아닌 것과 실재인 것에 스며들어 있는 참나 즉 무한한 의식을 깨달으십시오. 그러므로 실재와 실재 아닌 것 둘 다를 초월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안에나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잡지도 말고 버리지도 마십시오. 그런 참나 지식 안에 있는 현명한 현자는 어떤 물듦이나 마음의 조건화나 참나 제한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그는 그것 내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 하늘이나 공간과 같습니다.

그 어떤 감각의 대상들 속에서도 '나의 것'이라는 느낌을 마음 안에 불러오지 마십시오. 그러면 활동을 하든 하지 않든, 그대는 무지의 수렁에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의 가슴이 감미롭거나 바람직한 감각의 쾌락을 맛보지 않을 때, 그대는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윤회에서 놓여납니다. 자신 안에 몸 의식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이 세상이나 천국의 쾌락에 이끌리지 않는 사람은 해방을 특별히 열망하거나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아도 해방되어 있습니다.

오, 라마여! 무지스러운 마음의 조건화라는 이 바다 안에서, 참나 지식이라는 뗏목을 발견한 사람은 빠져 죽지 않고 구해집니다. 그 뗏목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분명코 빠져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칼날처럼 날카로운 지성으로 참나의 본성을 탐구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참나 지식 속에 자리를 잡아 휴식하십시오.

참나 지식을 가진 현자들이 살듯이 살아가십시오. 그들은 무한한 의식과 세상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의 활동을 즐기지도 않으며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라마여! 그대 또한 참나 지식을 얻었으니 그대는 평화 안에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오, 라마여! 과거에 수백만의 브람마들, 쉬바들, 인드라들, 나라야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들을 만든 것도 다름 아닌 마야의 마술이었습니다! 이 창조들은 때로 브람마가 한 것이며, 때로는 쉬바, 나라야나 혹은 다른 현자들이 하였습니다. 브람마는 때로는 연꽃에서 태어났으며, 때로는 물, 계란 혹은 공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떤 우주들에서는 브람마가 최고의 신입니다. 다른 우주들에서는 태양, 인드라, 나라야나, 쉬바가 최고의 신입니다. 어떤 우주들에서는 땅이 나무들로 가득합니다. 다른 우주들에서는 사람과 산들로 가득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땅이 흙이나 점토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바위, 금, 구리입니다. 태양 광성들을 셀 수 있을지 모르나 존재하는 우주들의 수효를 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창조는 시작이 없습니다. 이 '브람만의 도시' 즉 무한한 의식이나 가슴의 공간에 있는 의식에서 이 우주들은 거듭해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무한한 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거칠든 미묘하든, 안정되어 있든 분해되고 있든, 이 창조물들은 모두 의식의 무한한 공간에서 일어난 미묘한 원소들로 된 화환입니다. 어떤 때는 공간이 제일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는 공간에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다른 때는 공기가 먼저 만들어졋습니다. 다른 때는 시간, 불, 물, 흙이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는 적당한 이름을 얻습니다. 이 창조자의 몸으로부터 사제(브람마나)와 같은 '단어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적당한 호칭들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들'이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꿈에서 보이는 창조물들처럼 실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 모든 것이 무한한 의식에서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미숙하고 유치한 질문입니다. 창조는 마음의 의도들에 따라 일어납니다. 이것은 분명히 신비와 경이입니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나는 그대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창조에서 그러한 순서나 차례는 없습니다. 이 창조는 마음이 만든 창조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공상에서 나온 말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창조와 소멸의 연속 때문에 순간에서 영겁이라는 시간의 척도가 상상되엇습니다. 그러나 불꽃이 빨갛게 달구어진 쇠공 안에 늘 있듯이, 이 세상은 의식 안에 늘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은 자의 순수한 시각에서는 이 모든 것은 브람만이지 세상이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세상들의 반복 즉 창조와 소멸, 그리고 그 세상들 안에 있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창조자들은 무지한 자들과 미혹된 자들의 상상적 지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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