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쾌락과 힘을 추구하느라 이 세상에서 여러 일들로 바쁜 자들은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진리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명하지만 쾌락을 추구하려는 감각의 경향성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자는 진리를 보며 또한 미혹을 봅니다. 세상과 지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였으며 세상이 샐재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린 자는 해방되어 있습니다. 그는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참나가 아니라 몸의 이익을 위해 노력합니다. 오, 라마여! 무지한 자들처럼 되지 말고 현명해지십시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흥미로운 전설을 하나 말해 주겠습니다. 쾌락의 정원이 많은 마가다라는 마을에 다슈라라고 하는 현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놀랄 만한 고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속세의 쾌락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대단한 금욕가였습니다. 또한 학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랄로마라는 현자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가 어렸을 때 양친을 모두 잃었습니다. 숲의 신들이 슬픔에 잠긴 이 고아를 동정하며 다음과 같이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현명한 아이야! 너는 현자의 아들이다. 왜 무지한 바보처럼 울고 있느냐? 너는 이 세상 모습이 덧없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어린 아이야! 다음과 같은 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이다. 사물들은 나타나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바르게 본다면, 창조자 브람마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종말을 겪는다. 이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네 부모의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지 말라.
그 어린 소년의 슬픔은 호전되었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 다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엄격한 종교적 삶을 시작했습니다.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모든 명령과 금지들이 포함된 종교 의식에 완전히 열중했습니다. 이 모든 수행은 그에게 이 세상이 불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그는 오염되지 않은 곳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장소를 나무 꼭대기라 생각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살면서 그는 자신의 살을 잘라 성스러운 불에 바치는 신성한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곧 불의 신이 그의 앞에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네 가슴속에 이미 일어나 있는 그 소원을 너는 반드시 얻게 될 것이다."
그 금욕주의지의 숭배를 받은 후, 불의 신은 사라졌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 현자는 그의 앞에 장엄한 형상을 하고 있는 큰 까담바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손인 나뭇잎으로 그가 사랑하는 하늘의 눈물인 빗물을 닦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 나무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공간을 수많은 자신의 팔인 나뭇가지들로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태양과 달을 자신의 눈으로 가진 신의 우주적 형상처럼 서 있었습니다. 꽃들을 지닌 그 나무는 하늘을 선회하는 경건하고 신성한 현자들에게 꽃을 실은 비를 내렸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벌들은 현자를 환영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나무에 대한 자세한 묘사들은 사실적이면서 아름답다. ㅡ S.V.)
현자는 하늘과 지구를 연결하는 기둥처럼 서 있는 이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잠시 동안 그는 모든 방향들에 시선을 두었습니다. 그는 우주적 존재에 대한 통찰을 가졌습니다. (자세한 묘사가 50장에 있는데 그가 보았던 것 또한 흥미롭다. ㅡ S.V.)
거처를 까담바 나무 위로 하였기 때문에, 그는 까담바 다슈라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금욕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베다에서 말하는 종교적 의식 수행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의식들을 행했지만, 이번에는 마음으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현자의 마음과 가슴을 정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수한 지혜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마음 수행의 힘입니다.
어느 날 그는 꽃들로 장식한 요정이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현자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오, 아름다운 아가씨여! 그대는 큐피트의 광채를 능가하겠소. 그대는 누구시오?"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신이시여! 나는 숲의 여신입니다. 이 세상에는 당신과 같이 깨달음을 얻은 현자의 현존에 의지함으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방금 숲에서 있은 축제에 참석하였습니다. 거기서 자손을 가진 여러 여신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에서 저만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슬펐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숲에 있는데 왜 제가 슬퍼해야 할까요? 저에게 아들을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저는 재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현자는 나무 덩굴을 하나 주워 그녀에게 건네주면서 말했습니다. "가시오. 이 덩굴이 한달 안에 꽃을 생산하게 되듯이, 그대도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 여신은 감사하며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12년이 지난 뒤에 12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현자에게 다시 왔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신이시여! 이 아이가 당신의 아들입니다. 저는 이 아이에게 온갖 종류의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당신이 아이에게 참나 지식을 가르쳐 주기를 원합니다. 어느 부모가 아들이 바보로 자라도록 내버려둘까요?" 현자가 그렇게 할 것을 허락하지 그 여신은 사라졌습니다. 그날부터 현자는 어린 소년에게 모든 종류의 참나 지식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그 나무를 보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을 가르치는 현자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다슈라가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로 설명해 보겠다. 삼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강력한 왕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꼬타였다. 세상을 관장하는 신들도 그의 명령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행복과 불행 둘 다를 만들 수 있는 그의 셀 수 없이 많은 행위들은 아무도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도 그의 용맹에는 도전하지 못했다. 심지어 불도 그러하였다. 그것들은 주먹으로 허공을 치는 것에 불과했다. 인드라, 비슈누, 쉬바조차 그의 힘에 맞설 수 없었다.
이 왕은 세상들을 완전히 감쌀 수 있는 세 개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각각 최상의 것, 중간의 것, 가장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이 왕은 공간 속에서 생겨나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왕은 그 공간 안에 열넷의 길과 세 지역을 가진 도시를 세웠다. 그 도시에는 쾌락의 정원들, 운동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산봉우리 그리고 귀중한 물건과 파충류들이 있는 일곱 개의 호수가 있었다. 그곳에는 뜨겁고 차가운 두 개의 불이 있었다. 그 불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그 도시에서 왕은 여러 모습의 존재들을 만들었다. 어떤 것은 높은 곳에, 어떤 것은 가운데에, 또 어떤 것은 아래에 있었다. 그들 중에 어떤 것들은 오래 사는 것이었고, 또 다른 것들은 수명이 짧은 것이었다. 그들은 검은 털로 싸여 있었다. 그들은 아홉 개의 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환기가 잘 되었으며, 다섯 개의 램프와 세 개의 기둥 그리고 하얀 색의 목조 지지 기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드러운 점토 회반죽으로 만들어졌다. 이 모든 것은 마야 즉 그 왕의 환영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여기서 왕은 저택 즉 여러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탐구나 조사를 두려워하는) 유령들과 악귀들과 더불어 그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 움직이는 것을 생각하자, 그는 미래의 도시를 생각하고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그리게 된다. 유령들에 둘러싸인 그는 지금의 거처를 떠나 새로운 거처로 재빠르게 달리고, 신비스러운 창조 양식으로 새로운 도시를 짓고는 그곳을 차지한다. 그곳에서 다시 그가 파괴를 생각하자, 그 자신도 파괴된다. 가끔 그는 한탄하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무지하다. 나는 비참하다." 어떤 때는 행복하고, 다른 때는 불행하다.
그렇게 그는 살아가고, 정복하고, 가고, 이야기하고, 번성하고, 빛나고, 빛나지 않는다. 아들이여! 그래서 이 왕은 세상이라는 이 바다 안으로 던져지고 있다.
다슈라는 계속 말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위대한 공(空)에서 일어난 꼬타는 다름 아닌 개념이나 의도이다. 이 개념은 위대한 공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 위대한 공 안으로 저절로 사라진다. 온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이 개념이나 의도의 산물이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사실, 세 신인 브람마, 비슈누, 쉬바조차도 그와 같은 개념의 소산이다. 그 의도가 삼계, 열네 지역, 일곱 바다를 창조하게 하였다. 그 왕이 세운 도시는 다름이 아니라 여러 기관들과 각각의 특징들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창조된 여러 존재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높은 곳에 있고 다른 것들은 낮은 곳에 있다.
이 상상의 도시를 세운 왕은 그 도시를 유령들의 보호 아래 두었다. 이 유령들이 자아(아함까라)이다. 그때부터 그 왕은 이 세상 안에서, 이 몸 안에서 논다. 잠깐 동안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 있는 세상을 본다. 얼마 후에 그는 꿈 속의 세상을 즐기려 그의 주의를 꿈 속의 세상으로 불현듯 돌린다. 그는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 몸에서 다른 몸으로,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
그런 많은 이주가 있은 후에, 그 왕은 지혜를 발전시킨다. 이런 세상들과 세상들이 주는 환영의 쾌락들에서 점점 깨어난다. 모든 개념을 중지시킴으로 그의 방향은 끝에 이른다.
잠깐 동안 지혜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다가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쾌락 찾기에 열중한다. 어린아이들처럼 한 순간에 그의 이해는 그르친다. 이러한 개념들은 짙은 무지(무지를 가져오게 하고 보다 낮은 창조의 질서 속으로 태어나게 하는)이거나, 혹은 지혜를 일으켜 진리에 가깝도록 해 주는 순수와 투명이거나, 혹은 세상을 일어나게 하는 불순이다.
온갖 영적 수행을 한다고 해도, 신들을 스승으로 두고 있다고 해도, 천국이나 다른 지역에 있다고 해도, 모든 개념을 중지시키지 않고는 해방을 얻을 수 없다. 실재, 비실재, 이 둘의 혼합, 이 셋은 모두 개념들일 뿐이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개념들은 실재도 비실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우주 안에 있는 무엇을 실재라 할 수 있겠는가? 아들아! 이 개념들, 생각들, 의도들을 포기하라. 그것들이 그칠 때, 마음은 자연적으로 마음 너머에 있는 것 즉 무한한 의식으로 향한다.
어린 소년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이런 상깔빠(의도, 생각, 관념, 개념)는 어떻게 일어나고 자라나고 그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다슈라가 대답했습니다.
나의 아들아! 무한한 의식 안에서 의식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자각하고자 할 때, 거기에 관념화의 씨앗이 있다. 이것은 매우 미묘하다. 곧 그것은 거칠어져 전 공간을 채운다. 의식이 이 관념화에 몰두하면, 그것은 대상과 주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때 관념화는 싹트고 자라기 시작한다. 관념화는 자연스럽게 저절로 불어난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슬픔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세상 슬픔의 원인은 관념화 외에는 없다!
이 관념화 혹은 개념은 진실로 까마귀가 야자나무에 내려앉아 그 열매가 인과의 연결이 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이 전적으로 우연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재가 아닌 이 비물질은 자라날 수 있다! 그러므로 너의 탄생은 실재가 아니며, 너의 존재 역시 분명코 실재가 아니다. 이것을 알고 깨달으면, 비실재는 사라진다.
개념들을 가져오지 말라. 네 존재에 대한 개념을 붙잡지 말라. 왜냐하면 이것들에 의해 미래가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관념화의 파괴를 두려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개념이나 관념화가 그친다. 나의 아들아! 개념들을 받아들이기를 멈추는 것은 네 손에 놓여 있는 꽃을 뭉개 버리는 것보다 더 쉽다. 후자는 노력을 요하지만, 전자는 노력이 들지 않는다. 모든 개념이 사라질 때, 거기에 거대한 평화가 있다. 그리고 슬픔이 뿌리째 뽑힌다. 왜냐하면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생각, 관념,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 살아있는 영혼인 지바, 지성 그리고 조건화와 같은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낱말들에 상응하는 실재하는 실체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들을 버려라. 다른 시도를 한다고 네 삶과 노력을 낭비하지 말라.
개념들이 약해지면, 행복이나 불행에 영향을 덜 받는다. 대상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집착이 없어진다. 아무런 희망이 없을 때, 의기양양이나 의기소침도 없다. 의식 안에 나타난 마음이 지바이다. 그러면 마음은 공중에 누각을 짓고 난 뒤 과거, 현재, 미래로 뻗어 나간다. 관념화의 물결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각 경혐들은 관념화를 증식시킨다. 감각 경험들이 버려질 때 관념화가 존재하기를 멈춘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 개념들이 석탄의 검은색처럼 실재하고 있다면, 너는 그것들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너는 그것들을 없일 수 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그 현자의 말을 듣고, 나는 그 까담바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우리 셋은 참나 지식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나는 지고의 지식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그들을 떠나 사라졌습니다. 오, 하마여! 이것은 세상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세상만큼이나 진실한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이 세상과 그대 자신이 실재한다고 믿는다면, 그때는 그들이 실재합니다. 그렇다면 그대 자신의 참나 안에 확고히 쉬십시오. 이 세상이 실재하기도 하고 실재하지 않기도 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변화하는 세상에 적절한 자세를 취하십시오. 그대가 이 세상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때는 무한한 의식 속에 단호히 머무르십시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창조자가 있다고 믿든 없다고 믿든 간에, 그것이 그대의 이해를 흐리게 하지 마십시오.
참나는 감각들이 없습니다. 비록 참나가 모든 것의 행위자일지라도, 참나는 마치 둔한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겨우 백 년 동안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불멸의 참나가 왜 감각들의 쾌락을 좇아야 합니까? 세상과 세상의 대상들이 실재라 한다 하여도, 의식이 있는 참나가 둔한 대상들을 찾는다는 것은 당연치 않습니다. 물론 세상의 대상들이 실재가 아니라면, 그것들을 추구해서 오는 결실은 단지 불행일 것입니다.
그대 가슴 안에 있는 욕망들을 버리십시오. 그대는 이 세상에서 있는 그대로의 그대입니다. 이것을 알고 이 세상에서 즐기십시오. 램프가 있는 곳에 불이 있듯이, 참나가 있기에 세상의 모든 활동이 일어납니다. 램프는 빛을 낼 아무런 의도가 없습니다. 그처럼 참나는 아무런 의도가 없지만, 모든 것이 그의 현존에서 일어납니다. 그대는 다음의 두 가지 태도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모든 곳에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행위를 하는 자이다.'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대는 불멸하는 완전한 평정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좋은 것과 싫은 것, 매력적인 것과 혐오스러운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섬긴다.'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준다.'와 같은 어리석은 감정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그대는 '나는 행위자가 아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나는 행위자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라고 느낄 것입니다. 혹은 참나의 본성을 탐구하여('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속한다고 하는 그 어떤 것도 나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의식의 최상의 상태인 참나 속에 자리 잡고 휴식하십시오. 그 속에는 이 상태를 알고 있는 신성한 분들 중에도 가장 신성한 분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라마가 무었다.
성스러운 현자시여! 절대적인 브람만 안에 어떻게 이 비실재적인 세상이 존재합니가? 태양 아래에 눈송이가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말했다.
라마여! 지금은 그대가 이 질문을 하기에 적당한 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대가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이야기는 어린 소년에게는 재미가 없스빈다. 모든 나무는 정해진 때에 열매를 맺습니다. 내 가르침도 좋은 시절이 되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대 자신의 참나의 노력으로 참나가 참나를 찾는다면, 그대는 그대의 질문의 답을 확실히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의 조건화나 관념화의 본질이 확실해지도록 행위자와 비행위자에 대한 질문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속박은 생각과 개념들에의 속박이고, 자유는 그것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모든 개념을 버리십시오. 해방이라는 개념마저 버리십시오. 먼저 우정과 같이 좋은 관계들을 배양함으로써, 거칠고 물질적인 경향성과 개념들을 버리십시오. 다음에는 계속 다정히 지낸다 해도 우정과 같은 개념들을 버리십시오. 모든 욕망을 버리고 우주적 의식의 본성 또는 개념을 명상하십시오. 비록 이것이 관념화나 생각의 영역 안에 있더라도 말입니다. 조만간에 이것마저 버리십시오. 이 모든 것을 버린 후에 남아 있는 것 안에서 쉬십시오. 그 다음에는 이러한 개념들을 버린 자를 버리십시오. 자아라는 개념이 사라질 때, 그대는 무한한 공간과 같아질 것입니다. 자신의 가슴으로부터 모든 것을 포기한 자는 활동을 하고 있든지 늘 명상 속에 있든지 간에 사실상 궁극의 신입니다. 그가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 라마여! 나는 모든 경전을 조사하였고 진리를 연구하였습니다. 모든 관념, 개념 혹은 마음의 조건화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런 구원이 없습니다.
다양한 이름과 형상들로 된 이 세상은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서는 애를 쓰지만, 참나 지식을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애쓰지 않습니다. 이 삼계에서 참나 지식을 지닌 현자들은 드뭅니다. 세상의 황제나 천국의 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섯 원소들로 만들어진 것일 분입니다! 이같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그런 터무니없는 삶의 파괴에 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것들을 부끄러워하십시오. 현자들은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자는 참나 지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해와 달이 접하지 않는 수슘나라는 지고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나 지식을 지닌 현자들은 이득이나 온 우주가 주는 쾌락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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