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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다마, 비얄라 그리고 까따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8.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무서운 지옥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악한 행동들이 발정기에 있는 힘센 코끼리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행위들에 책임이 있는 감각들은 무서운 갈망의 무기고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감각들을 정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 배은망덕한 감각들은 신체와 그들 자신의 거처 및 지지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올가미가 코끼리의 존재에 해를 끼치지 않고 코끼리를 억제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지혜를 갖추고 있는 이들은 존재에 해를 주지 않고 갈망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각들을 제어하고 있는 현명한 자들이 누리는 기쁨은 벽돌과 회반죽으로 지어진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왕이 누리는 향락보다 뛰어납니다. 현명한 이의 지성은 감각의 쾌락을 향한 갈망이 사라지기 시작함에 따라 선명함에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고의 진리를 본 뒤라야 갈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현자들에게 마음이란 순종하는 하인, 좋은 상담자, 각각들의 유능한 지휘관, 즐겁게 해 주는 아내, 보호해 주는 아버지와 신뢰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마음은 그로 하여금 선한 행동들을 하게 합니다.

라마여! 진리 안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는 마음이 없는 상태인 자유 안에서 살아기십시오. 악마들인 다마, 비얄라와 까따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그들에 대하여 그대에게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지옥에 삼바라라는 힘센 악마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법계의 대가였습니다. 그는 지평선 위에 백 개의 태양이 있고, 금으로 만들어진 걷고 말하는 존재들이 있고, 값비싼 돌에 조각된 백조들이 있으며, 얼음같이 찬 불과 그 자신으 천상의 몸들이 있는 마법의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천국의 신들에게는 공포였습니다.

그가 잠을 자거나 그의 도시에서 떠나 있을 때, 신들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그의 군사들을 죽였습니다. 화가 난 악마는 천국에 침입했습니다. 그의 마술 같은 힘을 두려워한 신들은 몸을 숨겼습니다. 악마는 신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알맞은 때에 그의 병력들을 무찔렀습니다. 자신의 군대를 지키기 위하여, 악마 삼바라는 3명의 다른 악마들인 다마, 비얄라와 까따를 창조했습니다.

이 세 악마들은 전생에 태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모든 조건화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두려움, 의심 및 경향성들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적 앞에서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쟁도, 승리나 패배의 의미도 몰랐습니다. 사실, 그들은 독립된 지바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악마 삼바라의 로봇처럼 일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잠재된 경향성과 조건화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악마 삼바라는 그의 군대가 무적의 보호자를 갖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악마 삼바라는 신들과 싸우려고, 세 명의 새로운 악마들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무적의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신들의 군대 역시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악마들은 무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들과 일대일로 싸웠습니다. 격렬한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모든 도시, 마을, 동굴, 동물 등을 파괴하는 온갖 종류의 끔찍한 날아다니는 무기들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양편은 번갈아 승리를 즐기고 또 패배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세 악마들은 주요한 신들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악마들은 삼바라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돌아갔습니다. 신들은 창조자 브람마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브람마가 앞에 나타났습니다. 신들은 세 악마들을 없앨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브람마에게 청했습니다.

브람마가 말했습니다.

오, 신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삼바라를 죽일 수 없다. 비슈누 신이 백년 후 그를 죽일 것이다. 세 악마들에 의해여 패배를 당하는 듯하면서, 이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이 현명하다. 조만간 그들이 이 전쟁에 관여했으므로 자아라는 것이 그들 안에 생길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심리적 조건화의 지배를 받고는 잠재적 경향성들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이 세 악마에게는 자아와 그것의 부가물인 조건화들과 경향성들이 전혀 없다.

자아인 '나'와 그것의 대응물인 경향성등을 지니지 않고 있는 그들은 욕망도 노여움도 모른다. 그들은 무적이다. 자아인 '나'와 마음의 조건화에 의해 묶인 자는, 비록 그가 위대한 사람이나 배움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아이조차 그를 패배시킬 수 있다.

사실 '나'와 '나의 것'이라는 개념들은 슬픔과 고통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그릇이다. 몸을 참나와 동일시하는 이는 비참함 속으로 가라앉는다. 참나를 모든 것에 편재하고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은 슬픔을 극복한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삼계에 참나가 아닌 것이 없으며, 갈망해야 할 것이 없다.

마음이 조건화된 사람들은 패배할 수 있다. 그런 조건화가 없으면 모기조차 불멸이 된다. 조건화된 마음은 고통을 겪는다. 조건화가 없으면, 그것은 기쁨을 경험한다. 조건화나 갈망은 사람을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 세 악마들과 싸우려 할 필요가 없다. 그들 내부에 '나', '나의 것'이라는 느낌을 만들 수 있는 일을 하라. 그들은 악마 삼바라의 무지한 창조물이므로, 그들은 이 유혹에 쉽게 밥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들 모두는 그들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바시슈타는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창조자 브람마는 사라졌습니다. 신들은 악마들을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고서 그들의 거처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신들의 군대와 악마들의 군대의 새로워진 전쟁은 전보다 훨씬 더 격렬하였습니다. 도처에 끔찍한 파괴가 있었습니다.

전쟁에 계속 관여함으로 세 명의 악마들 안에 '내가 있다.'라는 개념이 만들어졌습니다. 거울이 가까이에 있는 대상을 비추듯이, 사람의 행동은 자신의 의식 안에 있는 자아로서 비추어집니다. 그러나 이 행동이 의식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있게 하고 그 행동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자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아가 일어나자마자 신체의 생명의 연장, 부의 획득, 건강, 쾌락 등을 향한 욕망이 재빨리 뒤따라 왔습니다. 이런 욕망들은 악마들의 개성을 대단히 약화시켰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의 마음속에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차례로, '이것은 나으;ㅣ 것이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느낌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일의 비능률과 무력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데 몹시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자유는 사라졌습니다. 자유를 잃게 되자, 그들의 용기 또한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그들은 몹시 걱정했습니다.

신들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악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세 악마는 도망쳤습니다.

악마편의 군대가 자신들을 지켜 주던 무적의 보호자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사기가 완전히 저하되었습니다. 악마들은 패했습니다.

자신의 군대가 신들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악마 삼바라는 분노했습니다. 그는 무적의 악마인 다마, 비얄라와 까따를 가리키며, "그들이 어디로 갔느냐?"라고 다그쳤습니다. 삼바라의 노함을 두려워한 이 세 악마는 지옥의 세계로 피신했습니다.

죽음의 신인 야마의 하인들이 그들에게 피난처를 주었으며 결혼도 할 수 있도록 세 여자도 주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지옥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야마는 치장을 하지 않고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야마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경의도 표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야마는 가장 무서운 지옥으로 그들을 보내 버렸습니다. 그곳에서 고통을 받고, 인간보다 낮은 다양한 종들로 수없이 태어난 후, 그들은 지금 까슈미르 호수의 물고기로 살고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이제까지 그대는 지혜롭지 않음에서 오는 비참한 결과들을 보았습니다. 그대는 무적의 악마들이 어떻게 완전히 패배했으며 자아 때문에 수치스러워졌는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가슴에 두려움을 일으켰습니다. 세상의 무서운 덩굴도 자아라는 씨앗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이 자아와 그 안에 놓여 있는 모든 힘을 버리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신념에 자리 잡음으로 행복해지십시오. 자아라는 그림자는 순수한 희열의 본성을 지닌 무한한 의식을 가립니다.

악마들인 다마, 비얄라와 까따는 삶과 죽음의 윤회에서 자유로웠지만, 자아로 인해 그들은 삶과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신들조차도 두려워했던 그들이 지금은 까슈미르 호수의 비참한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다마, 비얄라와 까따는 삼바라의 마법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실재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우리처럼 실재하는 존재들이 되었습니까?

바시슈타가 답했다.

라마여! 다마와 다른 악마들이 실재가 아니고 마법의 산물이듯이, 우리 그리고 신들과 모든 다른 것도 실재가 아닙니다. 오, 라마여! '나', '너'와 같은 이 모든 개념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대와 나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지금 그대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죽은 것처럼, 그대와 내가 실재의 존재들처럼 보인다는 것이 진리를 바꾸어 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인 '브람만만이 실재이다.'를 무지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박혀 있는 세상 모습의 실재는 경전들의 요지를 강렬하게 탐구하지 않고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브람만이 실재이다."를 무지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자는 비웃음을 당합니다. 그대가 "이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브람만만이 실재이다."를 아무리 잘 설명하더라도, 무지한 사람들은 시체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믿기보다는 그것을 믿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 진리는 현명한 이들에 의해서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오, 라마여! 우리도, 이 악마들도 실재가 아닙니다. 실재는 아무런 변화를 겪지 않는 무한한 의식입니다. 그 무한한 의식 안에서 그대, 나, 악마라는 개념들이 일어납니다. 지각하는 의식이 실재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실재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의식이 이른바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그러한 개념들이 일어납니다. 이 의식이 이른바 '잠자는' 상태에서는 그러한 개념들이 소멸합니다. 그러나 무한한 의식 안에는 깨어 있거나 잠자는 상태라는 그러한 것들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순수한 의식입니다. 이것을 깨달아, 구분 때문에 만들어진 슬픔과 두려움에서 풀려 나십시오.

라마가 물었다.

오, 신성한 현인이시여! 바라건데 세 악마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해방을 얻을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가 답했다.

라마여! 그들이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의 근원적 본성이 순수 의식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될 때, 해방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아디슈타나라는 도시가 까슈미르의 중앙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 도시의 중앙에 언덕이 있을 것이며, 그 꼭대기를 프라듐나라 할 것입니다. 그 언덕의 꼭대기에 마천루가 있을 것인데, 그 건물의 모퉁이에서 악마 비얄라가 참새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 건물 안에는 야샤스까라라는 왕이 기거할 것입니다. 악마 다마는 모기로 태어나 그 궁전 기둥의 한 구멍 속에서 살 것입니다.

그 도시 어딘가에 라드나발리비하라라는 궁전이 있을 것이며, 거기에 나라심하라는 국무대신이 있을 것입니다. 악마 까따는 새(미나)로 태어나 그 궁전에서 살 것입니다.

어느 날 그 대신은 세 악마 다마, 비얄라와 까따의 이야기를 읊조릴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미나는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미나는 자신의 원래 성격은 악마 삼바라의 마법이 만들어 낸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 낼 것입니다. 이 회상은 삼바라의 마법에서 그를 풀어 줄 것입니다. 악마 까따는 이와 같이 해서 해방(니르바나)을 얻을 것입니다.

다른 어느 누가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참새 도한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해방을 얻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악마 비얄라는 해방을 얻을 것입니다.

같은 식으로, 모기가 된 악마 다마 역시 이 이야기를 듣고 해방을 얻을 것입니다.

오, 라마여! 그들의 자아와 그들의 갈망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졌던 세 악마 다마, 비얄라와 까따의이야기는 그러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무지와 환영의 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내가 있다.'라는 순수하지 못한 개념을 놀이 삼아 사지고 논 것은 순수 의식입니다. 의식으로서의 자신의 본성을 버리지 않은 채, 자신 안에서 자신의 왜곡된 이미지를 경험하는 것도 바로 순수 의식입니다. 이 왜곡된 이미지는 진정 실재가 이니지만, '내가 있다.'라는 자아감이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는 미혹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오, 라마여! 경전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해방의 상태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은 그들의 의식이 참나를 향하여 흘러가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이 바다를 반드시 건너갑니다. 그러나 슬픔과 혼란만을 낳는 논쟁의 그물에 갇힌 이들은 그들 자신의 최고의 선을 잃습니다. 경전들이 보여주는 길에서조차, 오직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이 지고의 목표로 가는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한 웅큼의 재 이외의 무엇이 탐욕스런 자에게 남겠습니까? 세상이 풀잎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재난을 당하지 않습니다. 무한한 것을 완전히 깨달은 이들은 우주의 신들이 보호합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고난의 시기에 있을 때조차도 그릇된 길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됩니다. 덕이 있는 삶을 살아 좋은 평판을 얻은 이들은 가져 보지 못한 것을 얻게 되며, 불운이 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닌 미덕에 기뻐하지 않고, 자신이 들은 것을 가르치는 데 헌신하면서 진리의 길을 밟으려 애쓰는 이들만이 진정한 인간입니다. 다른 이들은 인간의 탈을 쓴 동물입니다. 인간적인 친절이라는 우유로 채워진 곳이 분명코 신 하리의 거처입니다. 사람들은 신 하리가 우유의 바다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즐겨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즐겼고, 보아야 할 모든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현명한 이들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즐거움을 향한 모든 갈망을 버리고, 경전들이 지시하고 있는 자신의 의무에 헌신하십시오. 성자들을 숭배하십시오. 이것들이 죽음으로부터 그대를 구할 것입니다.

경전들에서 지시하고 있는 것들을 행하면서, 때가 무르익으면 오는 완전을 끈기 있게 기다려야만 합니다. 해방을 가져다주는 이 신성한 경전을 공부함으로 자신을 아래쪽으로 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단지 그림자일 뿐이다.'라는 것을 알고서 진리를 끊임없이 탐구하십시오. 다른 것들에 유인당하지 마십시오. 짐승들만이 다른 것들에 유인당합니다.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깨어나 노년과 죽음을 끝내려 노력하십시오.

부는 악의 근원입니다. 감각들이 주는 쾌락은 고통의 원천입니다. 불행은 최고의 행운입니다. 모든 것에 의해 거부당하는 것은 승리입니다. 품행과 행위가 선하고 유쾌하며, 은둔에 헌신하며, 결국에는 고통으로 나아가게 하는 세상의 쾌락을 갈망하지 않는 이들에게 생명, 명예 및 고귀한 자질들이 꽃피어나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면 항상 결실을 거둡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노력을 그만드자 마십시오. 물론 어떤 것을 열심히 하기 전에, 마지막에 올 결과의 가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의 깊게 탐구해 본다면, 참나 지식만이 모든 고통과 즐거움의 뿌리를 완전히 없애 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노력을 다하여 오로지 참나 지식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대 안에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만들어진 대상들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리십시오. 불행으로 오염되지 않고 있는 행복이 있습니까?

금지하지 않는 것과 금지의 수행이라는 이 둘은 절대적 브람만 안에서는 같습니다. 그것들 간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스빈다. 그러나 금지의 수행은 그대에게 큰 즐거움과 행운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금지하고 자아를 버리십시오. 진리의 본성을 탐구하는 현명한 이들과 함께 하십시오. 경전들에서 말하는 금지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은 선량하고 현명합니다. 그들 안에는 탐욕, 미혹, 분노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현명한 이들과 함께 할 때, 참나 지식이 일어납니다. 그와 동시에 지각의 대상들이 실재한다는 개념은 점점 감퇴하여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매달릴 가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각의 대상인 세상이 이렇게 하여 사라진다면, 지고의 진리만이 남습니다. 지각의 대상인 이 세상은 결코 창조되지 않았으며,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일의 실재로서 늘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지고아ㅢ 존재입니다.

이렇게 나는 지각의 대상인 세상이 본질적으로 실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대에게 수많은 방법들로 설명하였습니다. 세상은 오로지 의식의 순수한 공간입니다. 순수한 공간 안에서는 "이것은 진리이다.", "이것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분리가 없습니다. 그 무한한 의식의 놀라운 나타남이 세상이며, 달리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안에 주체와 대상이나 물체와 그림자의 분리가 있다는 것은 태양 광선과 햇빛의 구분처럼 인정되지 않는 임의적인 가정일 뿐입니다. 사실 분할할 수 없으며 변경되지 않고 있는 의식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신의 눈을 감고 뜰 때, 말하자면 우주의 멸망과 창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바르게 이해되지 못했을 때, '나'는 무한한 의식 안에 있는 순수하지 못한 개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나'라는 것이 바르게 이해되면, 그것의 의미는 무한한 의식입니다. 나의 진정한 실재가 보이면, 그것은 더이상 자아가 아니라 무한한 실재로서 나타납니다. 사실, '나'라는 구별되는 실체는 없습니다.

이 진리가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드러날 때, 그의 무지는 즉시 덜어져 나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유령이 있다고 믿는 아이들처럼 그들 자신의 거짓 개념에 매달립니다.

그러므로 분리된 실체로서의 '나'가 거짓으로 알려진다면, 어떻게 그것과 관련된 천국, 지옥 등의 여러 개념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가 하나의 실체로 보이는 한, 천국을 향한 심지어 해방을 향한 갈망이 자신의 가슴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나'가 있는 한, 자신의 삶에는 불행만이 있습니다. 이 '나'라는 개념은 참나 지식을 통하지 않고는 없앨 수 없스빈다. '나라는 것'의 이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떤 경전, 어떤 만뜨라, 그 어떤 것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없애도록 할 수 없습니다.

자기란 무한한 의식에 비친 순수한 반영이라는 진실을 계속적으로 기억할 때만 '나라는 것'은 성장을 중지합니다. 세상은 마술사의 속임수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와 세상 사이에 있는 모든 주체와 대상이라는 관계는 어리석습니다. 이 이해가 뿌리를 내릴 때, '나라는 것'은 뿌리가 뽑힙니다. '세상'이라는 게념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나'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 둘은 평화 안에서 사라집니다.

하지만, "나는 온 우주와 하나이고, 나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느낌을 일어나게 하는 높은 형태의 '나'가 깨달은 이들이 지니고 있는 이해입니다. 다른 유형의 '나'는 "'나'는 본질적으로 매우 미묘하고 극히 작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과 다르며 독립적으로 있다."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반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해방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두 유형이 아닌, 앞에서 말하였던 '나'는 몸과 동일시하는 '나'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버려야 합니다. 높은 형태의 '나'를 끊임없이 키워 감으로써 낮은 형태의 '나'는 뿌리 뽑힙니다.

낮은 '나'를 점검하면서, "나는 모든 것이다." 혹은 "나는 극히 미묘하며 독자적이다."라는 느낌을 자신 안에서 계속 만들면서, 높은 '나'에 의존해야 합니다. 조만간 높은 형태의 '나'의 모습마저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때 그 사람은 온갖 활동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조용한 곳에 은둔하면서 살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몰락의 두려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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