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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라바나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8.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무한한 의식 안에 마음이 나타난 후, 마음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그 자신을 퍼뜨립니다. 그것의 본성에 의해서, 다시, 마음은 긴 것을 짧게 보이게 하거나 그 반대로 짧은 것을 길게 보이게 하고, 또 자신의 마음을 뚜렷이 드러내기도 하고 그리고 반대로도 합니다. 마음이 손대는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고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마음은 수많은 세계들을 만들어 내고 눈깜박할 사이에 그 세계들을 파괴합니다. 유능한 배우가 무대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연기하듯이, 이 마음은 여러 측면들을 차례로 취합니다. 마음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또 그 반대로도 합니다. 이러한 것 때문에 마음은 즐거워하면서도 고통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은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는 것도 손과 발로 잡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소유감의 결과로 마음은 고통을 당합니다.

변화하는 계절로서의 시간은 간접적으로 나무와 식물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처럼 마음은 그것 자신의 사고와 생각의 힘으로 어떤 것을 다르게 보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간, 공간 그리고 모든 사물은 마음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마음의 강렬함과 둔감함에 따라, 그리고 창조되거나 영향을 받은 대상의 크거나 작은 크기에 따라 마음은 약간 늦춰지거나 아니면 훨씬 뒤에 해야 할 것을 합니다. 마음은 무엇이든 못할게 없습니다.

오, 라마여! 흥미로운 다른 전설을 들어 보십시오. 이것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웃따라빤다바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숲에는 현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들은 아름답고 부유했습니다. 그곳을 라바나라고 하는 왕이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리슈찬드라라고 하는 유명한 왕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정의롭고 품위가 있었으며 용감하고 자비로워서, 모든 면에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적들을 모두 정봇했고, 적을 따르는 자들은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걱정으로 병이 날 지경이엇습니다.

어느 날 이 왕은 그의 궁궐로 가서 왕좌에 앉았습니다. 모든 대신들과 다른 이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한 후, 한 마술사가 궁궐로 들어와 그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는 왕에게 말했습니다. "폐하께 아주 놀라운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가 한 뭉치의 공작새 깃털을 흔들자, 한 기사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마리의 말을 이끌고 궁궐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왕에게 그 말을 선물로 받아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마술사는 왕에게 그 말을 타고 온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것을 요청했습니다. 왕 역시 그 말을 바라보았습니다.

곧이어 왕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궁궐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숨을 죽였습니다. 절대적인 평화가 궁궐을 감돌았고 아무도 왕의 평화를 감히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라마여!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왕은 감았던 눈을 뜨고,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쓰러지려 하자 옆에 있던 대신들이 그를 부축했습니다. 당황해 하며 왕은 그들을 보고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누구이며 나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걱정스러워 하며 대신들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폐하! 당신은 위대한 지혜를 가진 전지전능한 왕이시지만 이 환영이 당신을 이겼습니다. 도대체 폐하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입니까? 이 세상으 작은 대상들과 아내, 자식 등과 같은 잘못된 관계에 집착하는 자들만이 정신적인 착오에 빠지며, 지고의 것에 헌신하는 폐하와 같은 이는 아닙니다. 더구나 지혜를 얻지 못한 자만이 주술과 약물 등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마음이 완전히 진화된 자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어느 정도 침착성을 되찾는 듯 했으나, 마술살르 보자마자 그는 다시 공포에 떨며 마술사에게 말했다. "오, 마술사여! 당신이 나에게 어떤 짓을 했단 말인가? 당신은 환영이라는 그물로 나를 덮쳤다. 현명한 자라 해도 마야의 마술에는 당할 수밖에 없다. 비록 내가 몸 속에 아직껏 있지만, 짧은 순간 나는 아주 놀라운 환영을 경험했다. "왕은 궁정의 사람들을 보고 자신이 방금 경험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마술사가 공작새 깃털을 흔드는 것을 보자 나는 내 앞에 있는 말에 올라타서 마음의 미혹을 얼마 동안 경험했다. 그리고 나는 사냥 길을 떠났다. 말은 나를 아무도 살지 않고, 아무것도 자라지 않으며, 물조차 없는 몹시 추운 사막으로 데려갔다. 나는 엄청난 슬픔을 겪었다. 나는 하루 종일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말을 타고 사막을 건너 조금 덜 두려운 다른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좀 덜 무서웠다. 나는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말은 달아나 버렸다. 나는 잠시 휴식을 취했으며 해가 졌다. 놀라서 나는 덤불 숲 속에 숨었다. 그날 밤은 어떤 한 시대보다 더 길었다.

새벽이 오고 태양이 떠올랐다. 잠시 뒤 나는 검은 옷을 입은 한 소녀가 접시에 가득 음식을 담아 옮기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소녀에게 다가가서 음식을 청했다. 나는 배가 고팠다. 그녀는 나를 무시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뒤쫓아 갔다. 마침내 소녀가 말했다. "당신이 나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음식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고 그 다음 문제는 그때 가서 하기로 했다. 그녀는 내게 음식을 주었고 그 뒤 나를 자신의 아버지에게 소개했는데, 그는 보기만 해도 무서운 사람이었다. 곧 우리 셋은 그들의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피와 살이 넘쳐흘렀다. 나는 그녀의 남편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들은 나를 존중하며 환대해 주었다. 그들은 고통의 근원인 무서운 이야기로 나를 맞아 주었다. 악마적인 예식으로 나는 그 소녀와 결혼했다.

왕은 계속 말했습니다.

바로 나는 그 원시 종족의 한 사람이 되었다. 내 아내는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것은 내가 더 불행해지는 요인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 명의 아이기 더 태어났다. 나는 그 종족에서 한 가족을 이룬 사람이 되었다. 나는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고 보호하는 괴로움에 고통을 받으면서, 이 종족과 여러 해 동안 같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장작을 패고 종종 밤에는 나무 밑에서 잠을 자야 했다. 날씨가 추워지면, 몸을 따뜻이 하기 위해 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돼지고기는 내가 주로 먹는 음식이었다.

시간은 흘러 나는 나이가 들었다. 나는 고기를 거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기를 빈드야 산에 있는 마을에 가지고 가서, 가장 좋은 부위를 팔았다. 나는 고기를 팔아 일정한 이윤을 남기지도 못했다. 나는 고기를 조각조각으로 나누어 매우 불결한 곳에서 말렸다. 배가 고플 때는 종족 내의 다른 사람들과 고기 한 조각을 먹기 위해 싸우곤 하였다. 나의 몸은 숯처럼 새까맣게 되었다.

이렇게 벌 받을 행위를 하며, 나의 마음 역시 죄에 물들기 시작했다. 선량한 생각과 감정은 나를 떠났다. 나의 가슴은 뱀이 허물을 벗듯 모든 연민을 벗어 버렸다. 나는 그물들과 여러 덫들 및 무기들로 새들과 동물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허리 부위만 가리는 옷을 입고 나는 모든 혹독한 날씨를 견뎌 냈다. 이렇게 나는 7년의 세월을 보냈다. 악마적 경향성들의 밧줄에 묶인 채, 나는 분노로 욕설을 퍼부으며 야만인이 되어 갔으며, 불행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썩은 고기를 먹었다. 이렇게 나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마치 나의 삶에서 유일한 목적이 먹는 일인 것처럼, 나는 바람 속의 마른 나뭇잎처럼 표류했다.

대지에 가뭄이 있었다. 공기는 너무나 뜨거워 대기는 불꽃이 불동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숲에 불이 붙었다. 숲은 재만 남겼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죽어 갔다. 사람들은 신기루에 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신기루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자갈을 고기 덩어리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씹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시체까지 먹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서 그 시체들의 피에 자신의 손가락들을 담근 뒤 씹어 먹기까지 했다. 그들의 굶주림은 그처럼 비참했다.

한때 나무들로 무성하던 숲은 거대한 화장터로 바뀌었다. 한때 기쁨으로 가득 찼던 나라는 죽어 가는 자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로 진동했다.

왕은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기근으로 고통을 받자, 많은 사람들은 그 나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아내와 자녀에게 깊이 집착한 다른 사람들은 그 땅에서 죽어 갔다. 그 외 많은 사람들은 야생 동물들에게 공격을 당해 죽었다.

나 역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그 나라를 떠났다. 그 나라의 국경에서 나는 시원한 그늘진 나무에 마음을 빼앗기고, 어깨 위에 올리고 가던 어린 아들을 내려놓고, 나무 그늘 아래서 오랫동안 쉬었다.

나의 막내는 매우 어리고 순진해서 내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다. 아이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음식을 달라고 졸랐다. 내가 먹을 고기가 없다고 해도 아이는 배고츰을 참지 못하고 어린애 같은 순진함으로 떼를 썼다. 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말했다. '그래, 나의 살을 먹어라!' 그 순진한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애착과 측은함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아이가 배고픔의 고통을 더 이상 못 참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 모든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나의 삶을 끝낼 것을 결심했다. 나는 주위에서 발견한 나무들로 장작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 장작더미에 올라가면서 공포로 떨었다. 이때 나는 그대들에 의해 환호와 영접을 받으며 궁궐에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왕이 이 이야기를 하자 마술사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들이 말했습니다. "폐하! 그는 마술사일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보상으로 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어떤 신성한 존재가 폐하와 우리 모두에게 우주적 환영의 힘을 보여 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로 미루어 보아, 이 세상의 모습은 단지 마음의 유희일 뿐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즉 마음은 단지 전지전능한 무한한 존재의 유희일 뿐입니다. 이 마음은 심지어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자도 바보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모든 학문에 대해 정통한 그 왕은 어디에 있으며, 그리고 이 당황스런 미혹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분명히 이것은 마술사의 속임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술사는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 마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환영의 힘입니다. 그래서 마술사는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고 사라진 것입니다."

바시슈타가 말하였다.

라마여! 나는 그때 그 시간에 그 궁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마음은 참나의 진정한 본성을 숨기고 많은 나뭇가지, 꽃, 과일이 있는 환영의 모습을 만듭니다. 이 환영을 지혜로써 파괴하고, 평화 속에서 휴식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처음에 지고의 존재 즉 무한한 의식 안에서 분리가 일어났으며, 그 무한한 존재는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관찰자가 관찰의 대상을 파악하거나 이해하려 할 때, 실재와 분명히 나타난 것들에 대한 혼합 즉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혼란으로 인해서, 무한한 의식 안에 한계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때 무한한 마음은 자신 속에 그것을 약화시키고 감추어 슬픔으로 인도하는 수많은 개념들을 일으키고, 마음은 그것을 크게 확대합니다. 이러한 개념들과 경험들은 그들의 표시를 마음에 남깁니다. 이것은 대개 잠재되거나 잠복해 있는 인상이나 조건적 경향성들을 만듭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러한 것을 버릴 때, 베일은 태양 앞의 이슬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것과 더불어 슬픔도 사라집니다. 그때까지 마음은 모든 것들과 어울려 놉니다. 이것은 아이가 병아리들과 놀면서 그것들을 괴롭히는 것과 같습니다.

순수하지 못한 마음은 기중이 있는 곳에서 귀신을 봅니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 의심을 일으키고, 그들을 적으로 만들며, 모든 관계들을 오염시킵니다. 그것은 술 취한 사람이 세상이 자신의 주위로 빙빙 돌고 있다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비탄에 빠진 마음은 음식을 독으로 바꾸고 질병과 죽음의 원인이 됩니다.

경향성들로 채워진 불순한 마음은 강박관념과 공포라는 미혹의 원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뿌리 뽑아 없애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무엇일까요? 몸은 둔감하고 지각력이 없습니다. 마음이 생기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마음이 둔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행하는 것이 행동이며, 마음이 버리는 것이 포기입니다.

마음은 온 세상이고, 마음은 대기이며, 마음은 하늘이고, 마음은 땅이며, 마음은 바람이고, 그래서 마음은 위대합니다. 마음이 어리석은 자를 바보라고 부릅니다. 몸이 지성을 잃었을 때, 예를 들어 죽었을 때, 그 시체를 어리석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봅니다. 눈들이 생깁니다. 마음이 듣습니다. 귀들이 생깁니다. 그렇게 하여 마음은 다른 감각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들을 창조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무엇이 달고 무엇이 쓴지, 누가 친구이며 누가 적인지 판단합니다. 마음은 시간의 길이를 결정합니다. 라바나 왕은 한 시간도 안 되는 기간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마치 한 평생처럼 늘어난 듯 하였습니다. 마음은 천당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인지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이 마음이 지배되면, 감각들을 포함한 모든 것이 지배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라마여! 마음이 전지전는하고, 순수하고, 영원하고, 무한한 의식을 이 둔감한 육체적 몸과 혼동시키면서 감출 수 있다는 것보다 더 신비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은 움직이는 원소 속에서는 바람으로, 영광스러운 것 속에서는 영광으로, 땅 속에서는 견고함으로, 공간 속에서는 비어 있음으로 자신을 나타냅니다.

만약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면', 먹고 있는 음식의 맛은 정말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만약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옳은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감각들은 마음으로부터 태어나며 다른 방법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아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실 그것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진리를 깨달은 현자들을 경배하십시오.

이것을 깨달은 현자들은 여자가 자신으 몸을 안아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그에게 이것은 몸으로 나무토막을 접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팔들이 잘려 나갈지라도, 그는 그것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슬픔을 희열로 바꿀 수 있습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면,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그대는 아무 것도 듣지 않습니다.

배우가 자신 안에서 다른 인물의 성격을 묘사할 수 있듯이, 마음은 깨어나고 꿈꾸는 것과 같은 다른 의식의 상태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라바나 왕으로 하여금 원시 종족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마음은 얼마나 신비로운가요! 마음은 자신이 구성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마음은 생각들이 합쳐진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서, 하고 싶은 것을 하십시오.

계속되는 생각 때문에 그것은 태어나서 죽는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형태가 없는데도 몸 등을 가진 지바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생각으로 인해 그것은 국적을 얻고, 그리고 기쁨을 즐기고 고통에 괴로워합니다. 이 모든 것은 기름이 씨앗 속에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있습니다.

마음이 기쁨의 대상들을 향하여 방환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이는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기둥에 매인 자가 움직이지 못하듯이, 고귀한 자의 마음은 실제로부터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만이 인간이며, 다른 이들은 벌레입니다. 그는 끊임없는 명상을 통해 지고의 존재에 도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자신의 자기 노력의 도움으로 참나 지식을 얻고, 마음이 즐거움이라고 갈망하는 것을 버릴 수 있을 때, 마음이라는 악귀에 대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이의 관심을 쉽게 다른 것으로 돌릴 수 있듯이, 이것은 적절한 태도를 개발하면 노력 없이도 쉽게 성취할 수 있습니다. 갈망을 버릴 수 없는 자를 슬퍼하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궁극적인 선을 성취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노력을 열심히 함으로써 마음을 누르고 승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개체성이 깨뜨려질 때, 개체화된 의식은 노력 없이도 무한한 의식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고 쉽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할 수 없는 자는 사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탐욕스러운 독수리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 외에는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음속에 있는 갈망을 버리려는 절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마음을 죽이려고 굳건히 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틀림없이 쉽게 성취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갈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스승의 가르침, 경전에 대한 연구, 만뜨라의 낭송 등은 지푸라기의 가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념화하지 않음이라는 것을 무기로 마음의 뿌리를 자를 때만, 전지전능하며 지고의 평화인 절대적 브람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개념화나 상상은 오류와 슬픔의 산물입니다. 이것은 참나 지식으로써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버릴 때 큰 평화가 있습니다. 왜 그것을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어리석은 자들이 만든 운명이나 신들에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자기 노력이나 참나 지식으로 마음을 마음이 아니게 하십시오. 말 그대로 무한한 의식이 말하자면 제한된 마음을 삼켜 버리게 하고, 그리고는 모든 것 너머로 가십시오. 궁극적인 것과 연결된 지성으로, 불멸한느 참나를 붙잡으십시오.

이렇게 하여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게 되면, 삼계를 정복하는 것조차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것은 경전을 연구하거나, 오르거나 떨어지는 것을 하여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나 지식에 의해서 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어렵다고 누가 생각한다면, 그는 어떻게 참나 지식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입니까?

참나의 죽지 않는 본성을 아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친구와 친척들과의 이별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느낌이 마음입니다. 그것들이 없어지면 마음은 존재하기를 멈춥니다. 그때는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칼과 같은 무기들은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자아를 파괴하는 무기인 지혜는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대상이 있는 곳은 어디나 마음은 강하게 그쪽으로 흐릅니다. 그것 속에서 마음은 자신의 갈망이 충족되는 것을 봅니다. 특별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원인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다 표면의 물결처럼, 그런 강렬한 움직임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 존재하다가 사라집니다. 얼음을 차가움과 분리할 수 없듯이, 이 쉼 없는 움직임은 마음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그렇다면 성스러운 분이시여! 어떻게 더 큰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힘으로 마음의 쉬지 않는 움직임을 억제할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말했다.

물론, 가만히 있는 마음은 없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함은 마음의 본성입니다. 오, 라마여! 무한한 의식에 바탕을 둔 마음의 이 쉬지 않는 작용이 이 세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 라마여! 그것은 정말이지 마음의 힘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그것의 쉬지 못하는 본성을 잃으면, 그것을 죽은 마음이라 일컫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경전과 해방을 입증하는 고행(따빠스)입니다.

이렇게 하여 마음이 무한한 의식에 흡수되면 지고의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생각에 관련되면 커다란 슬픔이 있습니다. 마음이 쉬지 못하는 것을 무지라 합니다. 그것이 경향성, 성질, 조건화가 위치하는 자리입니다. 탐구를 통해, 그리고 쾌락을 주는 감각 대상에 대한 생각을 확고히 버림으로써 이것을 파괴하십시오.

오, 라마여! 마음은 실재와 겉모습, 의식과 둔감함 사이를 끊임없이 시계추처럼 오깁니다. 마음이 오랫동안 둔한 대상들을 묵상할 때, 그것은 그 둔한 성질을 가집니다. 똑같은 마음이 탐구와 지혜에 쏟아진다면, 그것은 모든 조건화를 버리고 순수 의식이라는 원래의 본성으로 돌아갑니다. 마음은 본성적이든 계발된 것이든 간에, 묵상하는 것의 바로 그 형태를 취합니다. 그러므로 단호하지만 지혜롭게 슬픔 너머에 있는 의심들로부터 자유로운 그 상태를 묵상하십시오. 마음은 자신을 자제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잠재된 경향성, 즉 단지 마음일 뿐인 조건화가 일어나면, 그들의 마음에서 그 나타남을 없앱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지가 제거됩니다. 먼저 욕망을 포기하는 방법으로 마음의 조건화를 파괴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에서 속박과 해방의 개념마저 제거하십시오. 조건화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심리적 경향성 혹은 마음의 경향성 혹은 마음의 조건화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것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이것은 복시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두 개의 달을 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단순한 환영으로 간주하고 이런 경향성을 버려야 합니다. 무지의 산물은 무지한 사람에게만 실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그것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의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지 언어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오, 라마여! 무지한 상태로 있지 말고, 두 번째의 달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자 하듯이 마음의 조건화를 거부함으로써 현명해지려고 노력하십시오.

오, 라마여! 그대는 이곳에서 행동의 행위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행위자가 되려 합니까? 그것 하나만이 존재하는데,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활동하지 않아도 역시 안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무엇을 얻는단 말입니까? 이뤄져야 할 것은 이뤄져야 합니다. 따라서 참나 속에서 휴식하십시오. 그대에게 자연스러운 행위를 할 때도 그 행위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행위를 하지 않는 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행위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지라도 그대는 행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세상이 마술사의 속임과 같다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추구한단 말입니까?

이 세상 나타남의 씨앗은 무지입니다. '이것이 그것이다.'로서 보이지 않는다면, 이 무지는 진리의 자질을 가집니다! 심리적인 경향성 혹은 정신적 조건화는 세상의 모습을 만들고, 물레가 도공에 의해 계속 돌아가듯이 그것은 세상을 계속 돌릴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것은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고 실체가 없습니다. 강의 물결처럼, 그것은 설사 산산이 흩어진다 해도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움켜쥘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미묘하고 부드러우나 칼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그것 자신의 투영 안에 그것의 결과로서 지각되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탐구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조건화 때문에 창조물의 대상들 안에 차이가 보입니다.

특정 장소에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어디에나 보입니다. 이 정신적 조건화는 지성이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성에 기초하여 지성의 모습을 띱니다. 계속해서 변하지만, 그것은 자신 안에 영원이라는 환영을 만듭니다. 무한한 의식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것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무한한 의식이 깨우쳐지면, 그것 즉 조건화는 끝이 납니다.

대상에의 집착에 의해 부양되지 않을 때, 이 마음의 조건화는 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집착이 없어도 그것은 잠재적으로 계속 살아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무지나 마음의 조건화는 노력 없이 얻을 수 있으며, 기쁨을 키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슬픔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참나 지식을 완전히 감추는 방법에 의해서만 기쁨에 대한 환영을 만듭니다. 따라서 그것은 라바나 왕이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을 여러 해처럼 경험하도록 만들 수 있었습니다.

무지와 마음의 조건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활동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거울이 램프의 빛을 활동적으로 반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물 크기의 여자를 그린 그림이 살아 있는 여자의 일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무지 혹은 마음의 조건화는 능력이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습니다. 신기루가 짐승은 속이지만 지성을 가진 사람은 속이지 못하듯이, 그것은 어리석은 자를 제압할 수 있을지라도 현명한 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습니다.

무지 즉 마음의 조건화는 단지 순간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계속 흐르기 때문에 그것은 강처럼 영원해 보입니다. 그것은 실재를 감출 수 있기 때문에 실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잡으려 하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가는 섬유들이 모여 하나의 밧줄이 될 때 큰 힘을 얻는 것과 같이, 그것은 세상의 나타남 속에서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힘과 견고함을 다시 얻습니다. 이런 조건화는 커져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잡으려 할 때, 그것은 불꽃처럼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푸르게 보이듯이, 이 조건화 역시 어떤 종류의 실제 모습이 있는 듯 보입니다! 그것은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병세인 복시증의 두 번째 달로 태어납니다. 그것은 꿈의 대상들처럼 존재합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배 안에 앉은 사람이 해안이 움직인다고 보는 것처럼 그것은 혼동을 일으킵니다. 움직일 때 그것은 세상 모습이라는 긴 꿈의 환영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와 경험을 왜곡합니다. 창조와 이원성의 지각의 원인이 되며, 분리 및 지각과 경험에 대한 끊임없는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이 무지나 마음의 조건화 때문입니다.

그것의 비실재를 알아차려 무지 혹은 마음의 조건화를 극복하면 마음은 존재하기를 멈춥니다. 물이 흐르기를 멈추면 강이 마르는 것과 같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신성한 분이시여! 신기루 속에 보이는 강은 끝이 없습니다. 이런 무지가 온 세상을 눈멀게 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무지 혹은 마음의 조건화는 한 쌍의 욕망과 증오의 힘으로 번성합니다. 청컨대 무지나 마음의 조건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말해 주십시오.

신성한 분이시여! 이 두려운 무지의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 또한 말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말했다.

오, 라마여! 빛을 향하여 나아가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참나의 빛으로 향할 때 무지는 사라집니다. 참나 지식을 향한 자연스러운 열망이 일어나지 않는 한, 무지나 마음의 조건화는 세상 모습이라는 끝없는 흐름을 내뿜습니다. 빛을 보려 할 때 그림자가 사라지듯이, 참나 지식을 향할 때 무지는 사라집니다.

라마여! 무지 혹은 마음의 조건화는 욕망입니다. 따라서 욕망을 끝내는 것이 해방입니다. 이것은 마음속에 생각의 움직임이 없을 때 일어납니다.

라마는 물었다.

오, 현자시여! 무지가 존재하기를 멈출 때 참나 지식이 생긴다고 당신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참나(아뜨만)는 무엇입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창조자인 브람마에서 풀잎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참나입니다. 무지는 존재하지 않는 비실재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 참나 속에서 베일이 그것 또한 참나인 주체와 객체로 양극화시키면서 떠다닙니다. 그때 무한한 의식은 마음이 됩니다. 이 베일은 무한한 의식 속에 있는 사고, 의도, 생각입니다. 마음은 이런 생각이나 사고에서 태어나며, 그래서 생각이나 사고의 도움으로 즉 개념과 사고를 끝내는 방법으로 없애야 합니다.

'나는 절대적인 브람만이 아니다.'라는 귿건한 확신은 마음을 묶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은 절대적인 브람만이다.'라는 굳건한 확신을 가질 때 해방됩니다. 생각과 사고는 속박입니다. 그것들이 끝나는 것이 해방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에 대해 자유로워지고, 해야 할 것을 자연스럽게 행하십시오.

사고나 생각이 하늘의 푸름을 '보는' 것처럼, 마음은 세상을 실재라고 봅니다. 하늘에는 푸름이 없습니다. 어떤 한계를 넘어 볼 수 있는 시각의 무능함이 푸름으로 나타납니다. 그처럼 사고의 한계는 세상 모습을 지각하게 합니다. 이 세상 모습은 미혹입니다. 오, 라마여! 그것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의해 사람은 슬픔으로 갑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있다.'라는 생각에 의해서 사람은 희열로 나아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마음이 계속해서 미혹되거나 어리석은 개념들에 안주하고 있으면 마음은 미혹됩니다. 마음이 계속해서 깨달은 고결한 개념들에 안주하고 있으면, 마음은 깨달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무지의 사고가 마음속에 계속 자리하게 되면, 무지는 굳건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참나가 깨달아지면, 이 무지는 용해되어 버립니다. 게다가 마음이 얻고자 한느 것을 위해, 감각 기관들은 그들의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참나를 의식하려고 노력함으로, 마음을 사고와 개념에 묶이게 하지 않는 자는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지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존재했고 지금도 있는 것은 절대적인 브람만입니다. 이것을 명상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브람만은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든 그 밖의 어떤 것도 명상해서늕 안 됩니다.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최대한의 지성을 사용하여 힘껏 뿌리 뽑아야 합니다.

무지만이 늙음과 죽음의 원인입니다. 희망과 집착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조건화로 인해 가지를 칩니다. 이 가지들은 '이것은 내 재산이다.', '이 애들은 나의 자식들이다.' 등과 같은 개념을 만듭니다. 이 공허하며 비어 있는 물질적인 몸 속에 '나'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 라마여! '나', '나의 것' 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참나만이 항상 진리입니다.

밧줄 속에서 뱀을 보는 것은 깨달은 상태가 아닌 무지의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의 눈에는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하고 그 밖에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무지한 사람이 되지 말고 현자가 되십시오. 이 세상 모습을 일으키는 마음의 조건화를 파괴하십시오. 왜 무지한 사람처럼 자신으로 생각하고 괴로워합니까? 몸과 참나는 함께 존재하는 듯 해도, 그것들은 분리할 수 있습니다. 몸이 죽을 때 참나는 죽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사람들이 절대적인 브람만만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잊고, 실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무지를 확신하는 것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라마여! 무지가 존재한다는 어리석은 개념이 그대 속에 뿌리내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의식이 이렇게 오염되면, 그것은 끊임없는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지만 진정한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기루와 같은 환영이 존재하는 것, 그리고 공중을 날고 우주를 유영하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환영들과 광경들을 보며 천당과 지옥을 경험하는 것은 다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이원론적 지각의 원인이 되는 마음의 조건화를 버리고 완전히 조건화되지 말고 있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에 대해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몇 분 동안 깊은 명상에 잠겼다가 라마는 물었다.

신성한 현자시여! 존재하지 않는 무지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영을 만든다는 것이 진정으로 믿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가능한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또 왜 라바나 왕은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경험했는지 말해 주십시오. 이런 모든 고통을 경험하는 자는 누구 혹은 무엇인지를 말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의식이 어떤 형식으로 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진실이 아닙니다. 몸은 의식이 꿈 속에서처럼 생각해 낸 것일 뿐입니다. 자신의 에너지에 의해 옷이 입혀진 의식이 스스로를 제한하고 자신을 지바라고 생각할 때, 쉬지 않는 에너지를 부여받은 지바는 세상의 모습에 관련됩니다.

과거 행위의 결실을 누리거나 그로 인해 고통 받는 그리고 다양한 몸을 입고 있는 존재를 자아, 마음, 지바라고 합니다. 몸도, 깨달음을 얻은 존재도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고통을 받는 것은 단지 무지한 마음뿐입니다. 마음이 세상의 모습을 꿈꾸는 것은 잠과 같은 무지 상태에 있을 때뿐입니다. 깨어 있거나 깨달은 상태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고통을 겪는 존재인, 몸을 받은 존재를 마음, 무지, 지바, 마음의 조건화, 개체화된 의식이라 합니다.

몸은 감각이 없습니다. 따라서 즐길 줄도 모르고 고통을 받지도 않습니다. 무지는 경솔함과 지혜롭지 못함을 낳습니다. 따라서 즐기거나 고통을 받는 것은 무지일 뿐입니다. 태어나고, 울고, 죽이고, 가고, 다른 것들을 괴롭히고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합니다. 모든 환영과 상상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행복과 불행의 경험 속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곧 사람입니다.

라바나 왕이 고통을 받은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라바나는 하리슈찬드라의 후손이었습니다. 라바나는 생각했습니다. "내 아버지는 장엄한 종교적인 제사를 올려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나도 같은 제사를 올려야 한다." 그는 필요한 물건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정원에 앉아서 종교인들과 일 년 내내 마음으로 제사를 올렸습니다.

마음으로 행해진 종교적인 의식을 성공적으로 마쳤기 때문에, 그는 그 결실에 대한 권리를 가졌습니다. 오, 라마여! 그래서 그대는 마음만이 모든 행위의 실행자고, 또한 모든 행복과 불행의 경험자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오, 라마여! 그대의 마음을 구원으로 난 길로 인도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나는 직접 라바나 왕의 궁궐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마술사가 궁궐에서 갑자기 사라지고 사람들이 그 마술사가 누구인지 알고자 했을 때 나는 미묘한 통찰을 통해 그의 정체를 봤으며, 그가 신의 사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라바나가 마음으로 행하고 있던 특별한 종교 의식에 참가하였던 자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 인드라가 온갖 고통을 주는 것은 전통입니다. 그가 가졌던 환영은 그 결과었습니다. 의식은 마음으로 행해지고, 환영들은 마음에 의해 경험됩니다.

똑같은 마음이 완전하게 정화되면, 모든 이원성과 그것이 만드는 다양성이 사라질 것입니다.

라마여! 나는 이미 그대에게 이전의 우주적 소멸 이후에 주기적 창조의 과정과, 어떻게 '나'와 '나의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지혜로 무장하고 요가에서 말하는 완전한 경지로 나아가게 하는 일곱 단계를 차례로 올라가는 사람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해방을 얻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성한 분이시여, 말씀하신 일곱 단계는 무엇입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오, 라마여! 내려가는 무지의 일곱 단계가 있으며, 올라가는 지혜의 일곱 단계가 있습니다. 이제 이것들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참나 지식 속에 있는 것이 해방입니다. 이것이 방해를 받으면, 자아와 속박이 일어납니다. 참나 지식의 상태는 마음의 동요도 없으며 혼란, 마음의 둔감함, 자아, 다양성의 갸념도 없는 것입니다.

이 참나 지식을 가리는 미혹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깨어있음의 씨앗 상태(seed state of wakefulness), 깨어 있음(wakefulness), 큰 깨어 있음(great wakefulness), 깨어 있는 상태의 꿈(wakeful dream), 꿈(dream), 꿈의 깨어 있음(dream wakefulness), 잠(sleep)으로 되어 있습니다. 순수한 의식 속에서 마음과 지바가 단지 이름만으로 존재하는 경우 이것은 깨어 있음의 씨앗 상태입니다. '나'와 '나의 것'이라는 개념들이 일어날 때, 이것이 깨어 있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개념이 이전의 환생에 대한 기억에 의하여 힘을 얻으면, 그것은 큰 깨어 있음이 됩니다. 마음이 자신의 환영에 대해 완전히 깨어 있으며 그것들로 가득 차 있을 때, 그것은 깨어 있는 상태의 꿈입니다. 아직은 실재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잠자는 동안에 경험하는 거짓된 개념들은 꿈입니다. 꿈의 깨어 있음 상태에서는 과거의 경험들을 사실인 것처럼 회상합니다. 전적으로 움직임이 없는 둔함을 위해 이것들을 버릴 때, 그것은 잠입니다. 이들 일곱 가지는 무수히 세분화된 하위 구분들을 가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이제 지혜의 일곱 가지 상태나 단계들을 설명하겠습니다. 그것들을 알면 미혹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첫 단계는 순수한 바람과 의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탐구이며, 세 번째 단계는 마음이 미묘해지는 것이며, 네 번째 단계는 진리 속에 있는 것, 다섯 번째 단계는 집착과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이며, 여섯 번째는 대상화의 정지이고, 일곱 번째 단계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계속 어리석은 자로 있는가? 나는 초연함을 연마하면서, 신성한 자와 경전을 찾을 것이다.' 이러한 바람은 첫 번째 상태입니다. 그래서 탐구인 직접적 관찰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면 무집착이 일어나며 마음은 미묘하고 투명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세 번째 상태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가 수행될 때 구도자 속에 감각적 즐거움들로부터의 자연적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진리 속에 있게 됩니다. 이것이 네 번째 상태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잘 수행되면, 완전한 무집착이 생기고 그와 동시에 진리의 본성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상태입니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참나 안에서 기쁨이 생기고, 자신의 안과 밖 둘 다와 이원성과 다양성에 대한 지각이 멈추며, 다른 이들을 고취시킨 노력이 직접적인 영적 경험 속에서 결실을 맺습니다.

이휴에는 어떤 다른 지지나 분리나 다양성도 없으며, 참나 지식은 자발적이고 자연적이게 됩니다. 그래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인 초월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여기 살아 있는 동안에 해방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를 넘으면 몸조차 초월한 자의 상태(뚜리야띠따)입니다.

라마여! 이러한 지혜의 일곱 가지 수준을 올라간 위대한 이들은 모두 신성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해방을 얻은 자들이고, 행복과 불행이라는 수렁에 다시는 빠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혹은 활동 상태에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참나 속에서 기쁨을 맛보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최고의 의식 상태를 얻을 수 있는데, 동물이나 원시인들조차 얻을 수 있고, 몸을 가진 자에 의해서나 심지어 몸을 가지지 않은 존재에 의해서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혜의 일어남과만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의식 상태에 도달한 자는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입니다. 그들은 숭배받을 만합니다. 그들에 비하면 황제도 한낱 가치 없는 풀잎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기 지금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금이 자신이 금이라는 사실을 잊고 스스로를 반지라고 생각하고 '나는 금다운 성질을 잃었다.'라고 하며 울며 슬퍼하듯이, 참나는 무지하게도 자아적 존재를 상상합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성한 분이시여! 무지와 자아는 어떻게 참나 속에서 생깁니까?

바시슈타가 말했다.

라마여! 비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에 대해서 물어야 합니다. 진리 속에는 금이 없는 반지도, 제한된 자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금세공인이 반지를 팔 때 그는 금의 무게를 잽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금이기 때문입니다. 반지 안의 반지에 대한 존재 그리고 무한한 의식 속의 유한한 형태를 거론해야 한다면, 그것을 아이 못 낳는 여인의 아들과 비교해야 합니다. 비실재적인 것의 존재는 비실재입니다. 그것은 무지에서 나오며 탐구를 하면 사라집니다. 무지하면, 은을 푸른 조개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조차도 은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푸른 조개라는 진실을 모르는 한, 무지는 계속됩니다. 모래에서 기름을 추출할 수 없듯이, 반지에서 금만 얻을 수 있듯이, 여기 이우주에서는 두 개의 사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한한 의식만이 홀로 모든 이름과 형태로 빛날 뿐입니다.

그런 것이 완전한 무지, 환영 그리고 이 세상 과정의 본성입니다. 진전한 존재가 없다면, 자아라는 이 환영적인 개념만이 있게 됩니다. 자아는 무한한 참나 속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한한 참나 속에는 창조자, 창조물, 세상, 천국, 인간, 악마, 몸, 원소, 시간, 존재, 파괴, '너', '나', 자기, 그것, 진리, 거짓, 다양성이라는 개념, 명상, 즐김이 없습니다. 무엇이 있든지 간에, 우주라고 알려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지고의 평화만이 있습니다. 시작, 중간, 끝도 없습니다. 마음과 언어의 이해를 넘어서, 모든 것은 항상 모든 것입니다. 창조란 없습니다. 무한한 것은 결코 자신의 무한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이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드넓은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나 움직임이 없는 바다입니다. 그것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하지만 활동이 없습니다. 무지 속에서 지고의 존재가 대상으로, 세상으로 여겨집니다. 공간 속에 공간이 공간과 하나로 존재하듯이, 창조물로 보이는 것도 브람만 속에 브람만으로 존재하는 브람만입니다. 멀고 가까움, 다양성, 이곳과 저곳이란느 개념은 모든 도시를 비추는 거울 속의 두 사물 간의 거리와 같은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환영과 같은 경험을 하고 난 다음 날, 라바나 왕은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환영 속에서 본 그곳으로 가야 한다. 아마 그 세상은 실제로 존재할 것이다.' 곧 그는 수행원들과 출발하여 남쪽으로 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영 속에서 본 광경과 그 당시 만났던 사람들과 같아 보이는 이들과 마주쳤습니다. 그가 그 종족의 사람으로 있는 동안에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가난한 자식들까지도 보았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울면서 다음과 같이 외치는 늙은 여인을 보았습니다. '오, 사랑하는 남편이여! 당신은 우리들을 이렇게 남겨 두고 어디로 가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아름다운 내 딸을 잃었습니다. 그 애는 운이 좋게도 잘생긴 왕을 남편으로 맞아 시집을 갔답니다. 내 딸과 사위는 모두 어디로 가 버렸습니까? 슬프도다! 나는 그들 모두를 잃었습니다.' 왕은 다가가서 그녀를 위로했습니다. 왕은 그녀가 자신의 부족 아내의 어머니인 것을 알았습니다. 자비심에서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고 그가 전날 보았던 온 나라를 휩쓴 가뭄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재물을 주었습니다. 얼마 동안 그들 중에 살다가 그는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왕은 나에게 그 수수께끼를 설명해 달라고 했고 나의 설명을 듣고 매우 만족해 했습니다. 오, 라마여! 그러므로 무지의 힘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완전히 혼동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오, 현자시여! 이것은 진정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꿈 속이나 환영 속에서 본 것을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경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지입니다! 멀고 가까움, 순간과 영원의 개념은 모든 환영일 뿐입니다. 무지 속에서 실재는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실재하지 않는 것은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체화된 의식은 그것의 조건화 때문에 그것이 생각하고 그것이 지각하는 것을 지각합니다. 무지로 인해 자아의 개념이 일어나는 순간, 처음과 중간 및 마지막이라는 미혹도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미혹에 빠진 자는 자신이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동시 발생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까마귀가 야자나무로 날아가서 그 위에 앉자 까마귀가 떨어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야자열매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까마귀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전적인 우연의 일치와 무지 속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듯 보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최면의 상태에서 라바나 왕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한 왕자가 부족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투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듯이 경험햇습니다. 인간은 인생의 초기에 했던 것을,  그 당시에는 그것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였을지라도, 잊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실제로 자신이 한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순은 기억 속에서 자주 있는 일입니다.

인간은 때때로 과거의 사건을 마치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꿈꾸듯이, 라바나는 자신의 비전 속에서 종족 사람들과 관계된 어떤 과거의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빈댜스 지역의 숲에 사는 사람들이 라바나의 의식에 나타난 비전들을 그들의 마음속에서 경험하였던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또 라바나와 종족들이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것을 보았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한 말이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듯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면 환영도 실재가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신의 삶에 합쳐질 때, 그것들은 실재성을 얻습니다. 결국, 세상의 사물들이 자신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경험되는가를 제외한다면, 이 세상의 것들과 관련된 진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모래 속의 기름이 실제적인 존재가 아니듯이, 무지는 실제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무지와 참나는 어떠한 관련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들 사이에서만 관련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경험 속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우주 속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의식이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체가 스스로 빛을 가지지 않는 대상을 비추기 때문이 아니라, 의식이 이 모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지각하는 지성을 요구하지 않고도 스스로 빛을 내기 때문입니다. 지성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은 의식이 그 스스로를 자각하는 행위 때문이지, 의식이 둔한 대상을 이해하는 때가 아닙니다.

이 우주 속에 감각이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 혼합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의식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 의식이 그 스스로를 이해할 때 지식이 있습니다.

나무와 바위가 둔하게 보이지만, 우리는 그들 간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하나는 나무가 되고 하나는 바위가 되기 위해 어떤 변화를 겪었던 근원적 원소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맛을 느끼는 감각 기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혀 속에 있는 맛을 느끼는 돌기는 음식 속에 있는 맛에 감응합니다. 왜냐하면 구성에 있어서의 그들의 유사성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단일성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주체와 대상으로의 분리라는 이전의 잘못되고 현혹된 추측 때문에 그것은 관계로서 간주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이면서 모든 것 즉 무한한 의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 라마여! 따라서 이 우주가 무한한 의식임을 깨우치십시오. 이 우주는 의식의 힘의 마술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채워진 것은 더 이상 채울 수 없기 땨문입니다. 이 우주는 상상의 도시로 가득한 공간에서만 채워집니다.

금이 잊혀질 때만 팔찌가 보입니다. 팔찌는 금의 환영의 모습입니다. '나'라거나 '세상'이라는 환영의 개념도 그러하며, 반복되는 탄생이라는 환영의 개념도 그러합니다.팔찌라는 거짓 개념이 거부될 때, 금에 대한 진실이 깨달아집니다. 주체와 대상이라는 거짓된 개념을 거부할 때 분리를 만드는 무지가 없어집니다. 생각만이 이 모든 분리와 환영을 만듭니다. 생각이 멈출 때 창조도 멈춥니다. 그때 그대는 모든 파도들이 하나의 바다를 구성하고, 인형은 나무이며, 그릇은 진흙이고, 삼계는 절대적 브람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봄과 보이는 대상의 중간에는, 보는 자라고 알려져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보는 자, 봄, 보이는 대상 간의 분리를 없애면, 그것이 바로 궁극입니다. 마음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여행할 때, 그들 사이에는 우주적 지성이 존재합니다. 항상 그렇게 되도록 하십시오. 그대의 진정한 본성은 제한된 깨어 있는 의식, 꿈꾸는 의식, 잠자는 의식과 구별됩니다. 그것은 영원하며, 알려져 있지 않고, 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그것으로 있습니다. 둔함을 제거하고 가슴 안에 있는 진리 안에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고 그때 바쁘게 활동을 하든지 명상을 하든지 간에 갈망과 증오 없이 몸이라는 의식에 빠지지 말고 늘 그것으로 남아 있으십시오. 앞으로 있을 마을의 일로 자신을 바쁘게 하지 않듯이, 그대 마음의 기분에 빠지지 말고, 진리 안에 자리를 잡으십시오. 마음을 외국인, 나무 조각, 돌덩이로 생각하십시오. 무한한 의식에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 존재하지 않는 마음에 의해서 행해진 것은 또한 실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 있으십시오.

정말이지 마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존재했더라도 지금 그것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은 마음은 이 모든 것을 봅니다. 따라서 그것은 거짓 지각입니다. 이 개달음 속에 확고히 있으십시오.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이 마음에 의해 지배되는 자는 미친 자이고, 천둥이 달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멀리서 마음의 실재를 거부하고, 옳은 생각과 명상에 늘 헌신하십시오. 오, 라마여! 나는 매우 오랫동안 마음과 관련된 진리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단지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무지라는 끝없이 보이는 강은 신성한 이들과 계속해서 같이 있음으로써만 건널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교제를 통해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과 피해야 할 것에 대한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고 나면 해방을 얻기 위한 순수한 소망이 생깁니다. 이것은 진지한 탐구로 안내합니다. 그때 마음은 미묘해집니다. 탐구가 마음의 조건화를 줄였기 때문입니다. 순수 지혜가 일어난 결과로서, 의식이 실재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때 마음의 조건화는 사라지고 무집착이 있습니다. 행위와 행위의 결실에 대한 속박은 없어집니다. 비전이 진리 속에 굳건히 자리 잡으며, 비실재에 대한 이해가 약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기능하는 동안에도 이 무조건적인 비전을 가진 자는 마치 잠든 것처럼 세상과 그것의 즐거움에 대한 생각 없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이렇게 몇 년을 살고 난 후에 완전히 해방되어 이 모든 상태들을 초월합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해방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방된 현자는 얻은 것에 대해 들뜨지 않으며, 얻지 못한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그대 안에 마음의 조건화가 약해졋습니다. 진리를 알려고 하십시오. 무한한 의식인 참나 지식을 얻는다면, 슬픔, 미혹, 탄생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참나는 하나이며 분리되지 않았기에 그대에게는 친척들이 없으며, 그래서 그런 거짓 관계에서 오는 슬픔도 없습니다. 참나는 하나이며 분리되지 않았기에, 추구하고 갈망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은 없습니다. 그릇이 깨어져도 그 속의 공간은 깨어지지 않듯이 이 참나는 변화를 겪지 않으며, 죽지도 않습니다.

마음의 조건화가 극복되고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면, 무지한 자를 미혹하는 환영은 끝납니다. 환영이 큰 미혹을 만드는 것은, 이 환영(마야)이 명백히 이해되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명확하기 이해되면, 그것은 무한한 것으로 보이며, 행복의 근원이 되고, 절대적인 브람만에 대한 깨달음이 됩니다. 참나, 브람만 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단지 경전적인 가르침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진리 속에서는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순수 의식입니다. 알든 모르든, 몸을 가지고 있든 몸을 가지고 있지 않든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불행은 몸에 속해 있습니다. 슬픔은 감각들이 파악하지 못하는 참나에 닿을 수 없습니다. 참나 안에는 욕망이 없습니다. 세상은 참나의 일부로서 소망이나 의도도 없이, 그것 안에 나타납니다. 오, 라마여! 나의 가르침을 통하여, 창조와 존재라는 거짓된 개념이 없어졌습니다. 그대의 의식은 이원성이 없이 순수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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