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마음의 기원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든, 자기 노력을 통하여 마음을 끊임없이 해방으로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은 잠재적 경향성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참나 지식을 얻습니다. 전 우주가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굴레와 해방이라는 개념 또한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내가 창조자 브람마에게서 직접 들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 보십시오.
거대한 숲이 있었습니다. 그 숲은 너무나 커서 수백만 평방 마일의 공간도 그 속에서는 작은 먼지 속에 있는 공간일 뿐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수천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진 오직 한 사람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손에 철퇴를 쥐고 스스로를 내려쳤습니다. 철퇴를 맞는 두려움으로 그는 공포에 질려 이리저리 달아났습니다. 그는 출구가 없는 우물에 빠졌습니다. 거기서 나온 그는 다시 자신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시 공포에 질려 달아났습니다. 이번에는 숲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서 나온 그는 다시 자신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시 공포에 질려 달아났습니다. 이번에는 바나나 숲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두려워할 다른 존재도 없었지만 그는 울면서 두려움에 소리 질렀습니다. 그는 이전과 같이 계속 뛰기 시작했고 이전과 같이 자신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직관적으로 목격하고 내 의지의 힘으로 나는 그를 잠깐 멈추게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누구인가?" 하고 물엇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 괴로워하면서 나를 그의 적으로 몰아붙이면서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또 그는 크게 웃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의 몸인 수족을 하나하나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곧바로, 첫 번째 사람처럼 계속해서 달리면서 자신을 때리고 울고 소리 지르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나는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그를 멈추게 하자, 그는 나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자신의 삶의 방식을 좇기 위하여 달아났습니다. 그 후로 나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의 말을 듣고 그들의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심지어 나를 경멸하기까지 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출구가 없는 우물 혹은 어리석음의 숲에서 나오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오, 라마여! 거대한 숲은 이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든지 그 속에서는 아무도 진정으로 쉴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대는 이 세상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 자신도 그러한 무지와 미혹의 삶을 보아 왔습니다. 젊고 무지하기 때문에 그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이 큰 숲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바로 그 숲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공(空)입니다. 그러나 이 공은 탐구의 불빛 속에서만 보입니다. 이 탐구의 불빛은 우화 속의 '나'입니다. 이 지혜를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거부하는 이는 계속해서 고통에 시달립니다. 지혜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수천 개의 팡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수많은 나타남을 가진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자신의 잡재적 경향성들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쉼 없이 방랑함으로써 스스로를 벌합니다. 이 이야기 속의 출구 없는 우물은 지옥을, 바나나 숲은 천국을 말합니다. 가시덤불로 된 울창한 숲은 아내, 아이, 부유함이라는 수많은 가시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세상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마음은 이제 지옥을 방황하고, 이제 천당을 방황하고, 그리고 이제 인간의 세상을 방황합니다.
지혜의 빛이 미혹된 마음의 삶을 비출 때도, 어리석게도 마음은 그 지혜를 적으로 생각하고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흐느끼고 비탄에 빠져 절규합니다. 때때로 마음은 불완전한 깨우침을 경험하고는 적절한 이해도 없이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합니다. 그러한 포기는 커다란 슬픔의 근원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포기가 완전한 이해로부터, 그리고 마음의 본성에 대한 탐구에서 나온 지혜로부터 생기는 경우, 그것은 궁극의 희열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한 마음은 자신이 과거에 가졌던 기쁨에 대한 생각까지도 놀라워하면서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팔다리가 잘리면 그것들이 떨어져 없어지듯이, 현명하게 세상을 포기한 자의 잠재적 경향성 역시 마음에서 사라집니다.
무지가 하는 놀이를 보십시오!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의미 없는 공포로 여기저기를 달리는 저 놀이를 보십시오. 참나 지식의 빛이 모든 이의 가슴속에서 빛나지만, 자신의 잠재적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방황합니다. 마음은 이 슬픔을 심화시키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찮은 일에 초조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변덕과 망상, 생각과 희망들로 자신을 속박합니다. 슬픔이 방문하면 그것은 절망하며 불안해 합니다.
지혜를 얻고 그것을 오랫동안 보존하고 탐구를 계속하는 사람은 슬픔을 겪지 않습니다. 통제되지 않은 마음은 슬픔의 근원입니다. 태양이 뜨면 안개가 걷히듯, 그것을 철저히 이해했을 때 슬픔은 사라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개체화된 의식인 마음은 지고의 존재에서 일어났습니다. 즉, 파도들이 바다와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한 것처럼, 그것은 무한한 의식과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합니다. 깨달은 이들에게 있어, 마음은 절대적인 브람만일 뿐입니다.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있어, 마음은 반복적인 역사(삼사라)의 원인입니다. 오, 라마여! 이원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가르침을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분리는 실재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브람만은 전지전능합니다. 절대적 브람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사물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절대적 브람만의 힘과 에너지입니다. 몸을 지닌 존재들 속에서, 그것은 의식 혹은 지성의 힘(찌뜨 아까샤)입니다. 그것은 공기 속의 움직임이며, 땅 속의 안정이며, 공간 속의 무이며, 창조된 존재들 속에 있는 자기 의식('나는 존재한다.')의 힘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절대적 브람만의 힘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분리의 힘이고, 슬픔에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슬픔을 유발하는 힘이며, 즐거운 자들에게서 의기양양함을 유발하는 힘입니다. 전사의 가슴속에서 그것은 용기입니다. 창조를 일으키는 것도 그 힘이며, 우주의 소멸을 가져오는 것도 동일한 그 힘입니다.
지바는 의식과 물질의 접합부에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 브람만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브람만 속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온 우주와 절대 브람만으로서의 '나'를 보십시오. 왜냐하면 브람만인 참나는 전지전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참나가 생각할 때, 그것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브람만과 다르지 않은 절대적 브람만의 힘입니다. 그 속에서는 '나'와 '이것'으로의 임의적 분리는 단지 외적인 나타남일 뿐입니다. 마음의 바로 실재는 오직 브람만일 뿐입니다.
여기 그리고 저기서, 지금 그리고 그때, 이 브람만의 힘은 그 힘들 중 하나나 다른 것을 나타나게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나타남은 브람만이 가진 힘의 외적 나타남일 뿐이며 실재의 창조가 아닙니다. 따라서 창조, 변형, 존재와 파괴는 모두 브람만 속에서 브람만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브람만일 뿐입니다. 행위의 도구와 행위와 행위자, 탄생과 죽음과 존재, 이 모든 것은 브람만입니다. 상상 속에서조차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혹, 갈망, 탐욕, 집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원성이 없는데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겠습니까? 속박이 존재하지 않을 때, 분명히 해방 또한 거짓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성한 분이시여! 당신은 마음이 어떤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속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것들이 동시에 가능합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오, 라마여! 무지한 상태에 있는 마음은 속박을 상상합니다. 속박은 무지스러운 상태에서만 존재합니다. 꿈꾸는 자가 깨어나면 꿈의 대상들이 사라지듯이, 깨달은 자의 눈에는 속박과 자유라는 이 모든 환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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