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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까르까띠의 이야기-요가 바시슈타

by Yuneelif 2018. 4. 8.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이것과 관련해 말해 줄 옛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까르까띠라는 끔찍한 마귀가 히말라야 산의 북쪽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거대하고 검고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했습니다. 이 마귀는 먹을 것을 충분히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배가 고팠습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한 끼 식사로 잠부드비빠 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먹을 수 있다면, 폭우 뒤에 신기루가 사라지듯이 나의 배고픔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한 행동의 과정은 자신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기에 부적절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잠부드비빠 사람들은 경건하고, 자비롭고, 신에게 헌신하고, 그리고 허브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러한 사람들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은 얻기에 지극히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르까띠는 눈 봉우리들 중 한군데에 올라가 한 다리로 서서 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돌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가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너무 말라 해골이 얇은 피부에 덮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천 년 동안 그렇게 있었습니다.

천 년이 지난 후에 창조주 브람마가 그녀의 고행에 만족하고 그녀 앞에 나타났습니다. 격렬한 고행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독이 있는 연기조차도 소멸됩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절하면서 어떤 은혜를 청해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아, 그렇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질병의 화신인 살아 있는 철핀(슈찌까)이 되게 해 달라고 청할 것이다. 이 은혜로써 나는 동시에 모든 존재의 가슴에 들어가 나의 욕망을 달성하고 또 내 배고픔을 달랠 것이다." 브람마가 "네 고행에 기쁘다. 네가 택한 은혜를 묻겠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자신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브람마가 말했다.

그렇게 되어라. 너는 또한 비슈찌까가 될 것이다. 너는 미세한 것이 되어서, 나쁜 음식을 먹고 나쁜 삶에 탐닉하는 자들의 가슴속에 들어가 그들에게 고통을 가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 만뜨라를 사용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히마드레르 웃따레 빠르슈베 까르까띠 나마 락샤시

비슈찌까비다나 샤남나삐 안야야바디까

옴 흐람 흐림 슈림 람 비슈누샥따예 나모 바가바띠

비슈누샥띠 에히 에남 하라 다하 다하 하나 하나 빠차 빠차

마타 마타 웃샤다야 두레 꾸루 꾸루 스와하 비슈찌께

뜨왐 히마반땀 가챠 가챠 지바샤라 찬드라만달람 가또씨 스와하

이 만뜨라에 익숙한 자가 그의 왼팔에 그것을 끼고 달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손을 환자 위로 통과하면 환자는 즉시 치유될 것이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거대한 몸을 지닌 마귀는 즉시 핀의 크기로 점점 줄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미세해져서, 오직 상상으로만 그녀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머리 정수리에서 척추의 바닥을 연결하는 미세한 수슘나 나디 같았습니다. 그녀는 불교도가 말하는 알라야 의식과 같았습니다. 비슈찌까(콜레라)라는 그녀의 다른 형태가 그녀를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그녀는 극히 미세하고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마귀 들린 정신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은혜를 얻었지만 모든 존재를 먹어 삼키려는 욕망을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바늘만 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이상합니까? 미혹된 자들은 통찰력이 없습니다. 이기적인 목적을 획득하기 위한 이기적인 자의 격렬한 노력은 종종 다른 결과로 끝이 납니다. 그것은 숨을 헐떡이면서 거울로 달려갈 때, 그의 호흡이 거울을 흐리게 하여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거대한 모습을 한 마귀가 바늘이 되기 위한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고 몸을 버린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기적 이익에 여념이 없을 때, 그리고 극도의 갈망에 사로잡힐 때, 죽음조차도 바람직한 것이 됩니다.

비슈찌까는 빛이 났고 꽃의 향기만큼 미세했습니다. 다른 것들의 생명력에 의존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일에 열중했습니다.

슈찌까와 비슈찌까라는 두 가지 형태로써, 그 마귀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괴롭히며 떠돌아다녔습니다. 자신의 소원에 의해 그녀는 작아졌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강하게 바라는 대로 됩니다. 마귀가 잔인한 바늘로 변형되도록 기도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좁은 이들은 사소한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타고난 성품은 고행에 의해서조차 쉽게 거스를 수 없습니다.

슈찌까는 이전의 질병 때문에 아주 쇠약해졌거나 과도한 체중을 가진 사람들의 몸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비슈찌까(콜레라)로 변형시켰습니다. 슈찌까는 건강하고 지성적인 사람의 가슴에도 들어가 그들의 지성을 그르치게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이 만뜨라나 약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있으면 내버려두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마귀는 수많은 세월 동안 지구를 배회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슈찌까는 수많은 은신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은신처 중에는 지저1분하고 오물이 있는 땅, 더러운 손가락, 옷 속의 실, 몸 안의 근육, 먼지로 덮인 더러운 피부, 손바닥의 지저분한 깊은 주름, 노화로 인한 몸의 여러 부분들, 파리들이 많은 장소, 윤기 없는 몸, 썩은 잎들이 가득 찬 곳, 건강한 나무들이 없는 곳, 불결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 건강하지 못한 습관을 가진 사람, 파리가 새끼를 까는 산림 벌채로 생긴 나무 그루터기, 물이 고인 웅덩이, 오염된 물, 길 중간을 흐르는 열린 하수구, 여행객이 이용하는 휴식처, 코끼리나 말과 같은 동물들이 많이 사는 도시 등이었습니다.

슈찌까(재봉용 바늘)가 되어, 그녀는 길에 버려진 더러운 천 조각을 함께 꿰매어 걸치고 아픈 사람들의 몸을 자유롭게 돌아다녔습니다. 재봉사가 사용하던 바늘도 피로함을 느끼고 땅에 떨어져 쉬는 것처럼, 슈찌까 역시 파괴적인 활동으로 피곤해졌습니다. 꿰뚫는 것이 바늘의 자연적인 기능인 것처럼 잔인함은 슈찌까의 천성이었습니다. 바늘이 꿰뚫는 것을 실이 계속 삼키듯이, 슈찌까는 그녀의 희생자의 목숨을 계속 앗아갔습니다.

사악하고 잔인한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오랫동안 가난에 찌들어 불쌍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처럼 그녀도 그녀 앞의 천(그녀의 까르마) 안에서 그녀를 통과했던 수많은 실들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그녀(슈찌까 혹은 재봉용 바늘)가 꿰매었던 이 어두운 천이 자신의 얼굴을 가려서 판단이 흐려졌다고 그녀는 상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베일을 찢을까?"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녀(바늘)는 딱딱한 천(사악한 사람)을 관통하듯이 부드러운 천(좋은 사람)도 관통했습니다. 어리석고 사악한 자가 좋고 좋지 않은 것을 왜 구분하겠습니까?

다른 이들에 의해 해를 입지 않고 자극되지 않은 슈찌까는 다른 것들을 파괴하고 죽이기 위해 일합니다. 실로 묶인 채 그녀는 위험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지바 슈찌까라고도 알려져 있는 그녀는 쁘라나와 아빠나의 도움을 받아 생명력으로서 모든 존재들 속에서 움직이면서, 마음을 잃게 하는 엄청난 통증(통풍, 류머티즘의)을 일으켜 지바로 하여금 슬픔을 겪게 합니다. 그녀는 바늘처럼 발로 들어가서 피를 마십니다. 모든 사악한 자들처럼 그녀는 다른 이들의 슬픔을 기뻐합니다.

(바시슈타가 이렇게 말했을 때, 태양은 지고 그 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집회가 기도를 위해 휴회되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런 식으로 아주 오래 산 후, 마녀 까르까띠는 환영에서 깨어났습니다. 천 년 동안의 격심한 고행으로 바늘(그리고 콜레라 바이러스)이라는 타락한 존재가 되어 사람들을 탐식하려 했던 자신의 어리석은 욕망을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가한 자신의 불운을 몹시 슬퍼했습니다.

"아, 슬프다! 내 거대한 몸은 어디에 있고 바늘의 형태는 어디에 있는가? 때때로 나는 진흙과 오물 속으로 빠지고, 사람들에 의해 짓밟힌다. 슬프다! 나는 길을 잃었다. 나는 친구도 없다. 아무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나는 일정한 거주지가 없고, 이름을 붙일 만한 몸도 없다. 나는 마음과 감각을 잃은 것이 분명하다. 재앙을 향하는 마음은 우선 미혹과 악함을 만든다. 그 후에 이것들은 불행과 슬픔 속으로 퍼진다. 나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늘 다른 자들에 의해 좌우된다. 나는 다른 자의 손안에 있으며 그들이 시키는 것을 한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려는 욕망의 악귀를 만족시키길 나는 갈망했다. 그러나 그것은 질병보다 더 나쁜 치료로 나아가게 하여 더 큰 악귀가 생겼다. 확실히 나는 머리가 나쁜 바보이다. 나는 그렇게 위대하고 거대한 몸을 버리고 병원체(혹은 바늘)라는 이 비열한 몸을 스스로 선택했다. 곤충보다 더 작은 이 비참한 존재로부터 이제 누가 나를 해방시킬 것인가? 나와 같은 악한 창조물에 대한 생각은 현자의 가슴 안에는 일지 않을 것이다. 언제 다시 산만큼 큰 존재가 되어서 거대한 존재들의 피를 마실 것인가? 다시 고행자가 되어, 이전에 했던 것처럼 고행을 하자."

즉시 까르까띠는 살아 있는 존재들을 게걸스럽게 먹으려는 욕망을 모두 포기하고, 다시 강도 높은 고행을 하려고 히말라야로 갔습니다. 발이 하나인 것처럼 하고 서서, 그녀는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불의 고행은 그녀 머리의 정수리에 연기가 나게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슈찌까 즉 동료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그림자는 또 다른 슈찌까 즉 또 다른 친구가 되었습니다.

숲 속의 나무들과 덩굴식물들조차도 슈찌까의 고행을 보고 감탄하여 그녀가 먹도록 꽃가루를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결심을 굳게 했습니다. 하늘의 신 역시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고기 조각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바람, 비, 숲의 불로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녀는 7천 년 동안 서 있었습니다.

까르까띠의 온 존재는 이 고행에 의해 완전히 정화되었습니다. 죄의 경향성들은 고행으로 씻겨졌고, 그녀는 최상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녀가 한 고행의 에너지는 하말라야를 불태운 것입니다. 천국의 왕 인드라는 현자 나라다로부터 까르까띠의 전례 없는 수행에 대해 들었습니다.

인드라의 요청에 따라, 현자 나라다는 까르까띠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비열한 악마 까르까띠는 금속 바늘의 형태를 한 살아 있는 바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죄 많은 사람들의 몸 속으로 들어가, 근육과 관절을 아프게 하고 혈액에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녀는 바람같이 몸 속으로 들어가 찌르고 따끔거리는 통증을 일으켰습니다. 그녀는 고기와 같은 불결한 음식으로 영양을 섭취한 몸들 속에서 그러한 통증을 일으켰습니다.

그녀는 독수리처럼 모든 존재의 몸 속에 들어가 다른 이의 몸을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고행의 힘 때문에 그녀는 모든 이의 마음과 가슴 안으로 들어가고 '숙주'가 하는 모든 것에 관여하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바람처럼 보이지 않고 미세한 자에게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때때로 그녀는 자신의 불순한 경향성 때문에 다른 존재보다 특정한 존재를, 다른 즐거움보다 특정한 즐거움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그것들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위를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유롭게 배회했지만 무지한 사람이 곤란을 겪을 때 그렇게 하듯이, 어려움에 처할 때는 바늘의 몸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육체적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존재하는 요인만이 적절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몸이 만족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불만스러워진 슈찌까는 비참했습니다. 예전의 거대한 악귀의 몸을 되찾으려고 그녀는 다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히말라야의 꼭대기로 날아가는 독수리의 몸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독수리는 바늘을 내려놓고 날아갔습니다.

단단한 바늘로 자신을 지탱하면서 슈찌까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오, 인드라여! 당신이 그녀의 고행을 중단시키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 고행의 힘으로 세상을 파괴시키려 할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인드라는 슈찌까가 살고 있는 정확한 장소를 바람의 신 바유에게 찾아내라고 하였습니다. 바유는 우주에 있는 모든 다른 행성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마침내 지구로 들어와 히말라야로 내려갔습니다. 태양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히말라야에는 초목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지역은 불모의 사막 같아 보였습니다.

바시슈타가 계속 말하였다.

히말라야에서 바유는 산꼭대기처럼 서서 고행하고 있는 슈찌까를 보았습니다. 전혀 먹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거의 완전히 말라 버렸습니다. 바유(바람)가 그녀의 입에 들어가자, 그녀는 그것을 계속해서 내뿜었습니다. 그녀는 머리 꼭대기로 그녀의 생명력을 거두어들였으며 완전한 요기니로 서 있었습니다. 그녀를 보고 바유는 놀라움에 빠졌습니다. 그녀에게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최고의 고행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 후 그는 즉시 천국으로 되돌아가 인드라에게 보고했습니다.

"신이시여! 잠부드비빠 대륙에 있는 슈찌까는 전례 없는 고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입에 바람조차 들어가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고픔을 이겨 내기 위하여, 그녀는 위를 딱딱한 금속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청컨대 즉시 일어나 창조주 브람마에게로 가서 그녀가 바라는 은혜를 들어주어 그녀를 달래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녀의 고행의 힘이 우리 모두를 불태울 것입니다."

그래서 인드라는 브람마에게로 갔습니다. 브람마는 그의 청에 응하여 슈찌까가 고행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슈찌까는 고행으로 완전히 순수해졌습니다. 그녀의 두 가지 다른 형태, 즉 그녀의 그림자와 금욕 행위의 불이 그녀가 행한 고행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녀 주위의 공기와 먼지조차도 그녀에게 닿음으로써 궁극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때 자신 안에 있는 지성을 조사함으로써, 그녀는 모든 것의 지고의 원인이 없는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얻었습니다. 지고의 구루나 스승은 확실히 자기 자신의 의식 안에 있는 생각의 움직임을 직접 탐구합니다. 오, 라마여! 그밖의 다른 구루는 없습니다.

브람마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은혜를 청하라." 그녀는 감각 기관들이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 속에서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에 응하여 그녀는 자신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절대적인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의심이나 원하는 것이 없다. 은혜로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무지한 아이였을 때 욕망이라는 악귀가 나를 따라다녔다. 이제 참나 지식으로 그 귀신은 진정되었다."

브람마는 말했습니다. "오, 고행자여! 영원한 세상의 질서는 무시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세상의 질서는, 그대가 이전의 몸을 되찾고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다가 그때 해방을 얻을 것을 정하였다. 그대는 사악하고 죄지은 자들을 괴롭히며, 그리고 그대의 자연적인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만 먹어 최소한의 해를 끼치며 깨달은 삶을 살 것이다." 슈찌까는 브람마의 말을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바늘과 같은 몸은 산 같은 몸으로 커졌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이전의 악마적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악마적인 경향성이 없이 까르까띠는 상당한 시간 동안 초월의식의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녀는 명상하는 자세로 같은 장소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섯 달 후에는 바깥세상과 자신의 몸을 완전히 작가하게 되었습니다. 즉시 그녀는 배고픔을 느꼈습니다. 몸이 있는 한, 몸은 배고픔과 갈증을 포함하는 물질적 법칙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까르까띠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누구를 먹어 버릴 것인가? 현자들은 자신의 삶을 늘이려고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을 죽이는 것을 비난한다. 그런 금지된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나는 이 몸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 해가 없다고 본다. 해로운 음식은 독이다. 나아가 나처럼 깨달은 이에게는 육체적 삶과 죽음 사이에 구분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는 꿈같은 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 까르까띠여! 무지하고 미혹한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 안에 있는 지혜를 일깨워라. 실로 이것은 깨달은 존재들의 유일한 사명이다. 그대가 깨닫게 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진리를 깨닫는 데 실패한 자는 네가 먹기에 적당하다. 그런 무지한 자를 먹는 것은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까르까띠는 일어나 산에서 내려갔습니다. 그녀는 언덕에 있는 종족들과 사냥꾼들의 거주지인 밀림으로 들어갔습니다. 밤이 땅에 드리웠습니다.

그 지역에는 비끄람이라는 사냥꾼의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관습대로 대신과 함께 도둑과 강도를 진압함으로써 백성을 보호하려고 밤의 짙은 어둠 속으로 나갔습니다. 까르까띠는 숲에 있는 종족의 반신들에게 기도하고 있는 용감하고 대담한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보고 까르까띠는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이 두 사람은 내 배고픔을 달래 주려고 여기에 왔다. 그들은 무지함으로 지상에 짐이 되고 있다. 그러한 무지한 사람들은 이생과 내세에 고통을 당한다. 고통은 그들 삶의 유일한 사명이다! 그들에게 오는 죽음은 그러한 고통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죽은 후에야 깨어나서 그들의 구원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둘 다 현명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현명한 자를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한 행복, 명성, 장수를 누리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선한 자들이 갖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줌으로써 선한 자를 존경하고 경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보도록 하자. 그들이 현명하다면 나는 그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현명한 자, 선한 자들은 진실로 인류의 위대한 은인이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왕과 그의 대신을 시험하기로 결심을 한 마녀 까르까띠는 날카로운 소리로 고함쳤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소리쳤습니다. "어이! 이 짗은 숲 속을 방황하는 두 마리 작은 벌레들! 너희들은 누구냐? 나에게 빨리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희들을 먹어 치울 것이다."

왕이 대답했습니다. "오, 유령이여! 당신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나는 당신의 말만 들을 수 있다.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 달라."

왕의 침착하고 조용한 대답을 듣고 마녀는 그의 대답이 그럴 듯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녀 자신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 왕과 대신은 그녀의 무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신은 마녀에게 말했습니다. "오, 마녀여! 왜 그렇게 화가 났는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음식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현명한 자들도 분노와 마음의 동요를 버리고 평온하고 맑은 마음이 된 후에도 적절한 방법과 행위 즉 행동으로 자기 본위의 목적을 이룬다. 우리는 그대와 같은 많은 곤충들을 보아 왔으며 그들을 공정하게 다루었다. 왜냐하면 사악한 것을 벌주고 선한 것을 보호하는 것은 왕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분노를 버리고 평온에 의지하여 그대의 목적을 이루어라. 그것이 적당한 행위이다. 야망을 획득할 수 있건 없건 간에 평화로워야 한다.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요청하라. 우리는 거지를 빈손으로 보낸 적이 없다."

까르까띠는 그 두 사람의 용기와 지혜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가슴이 평화로 가득해졌기 때문입니다. 두 계곡의 물이 합류점에서 섞이듯이, 깨달은 두 사람이 만나면 그들의 가슴은 평화와 희열로 섞입니다. 더구나 확실히 죽음에 직면했는데도 침착할 수 있는 이는 현명한 자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를 잉요하여 마음속의 의심을 없애도록 하자. 왜냐하면 현명한 자와 같이 있으면서도 의심을 없애려 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요청에, 대신은 왕의 정체를 알려 주었습니다. 까르까띠는 반박했습니다. "오, 왕이여! 그대에게는 현명한 대신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훌륭한 대신은 왕을 현명하게 한다. 왕이 현명하면 백성도 현명하다. 왕의 권위와 평등한 시각은 참나 지식의 고귀한 학문에서 생긴다. 이것을 갖지 않은 자는 훌륭한 신하도 현명한 왕도 아니다. 그대 두 사람이 참나 지식이 없는 자들이라면, 나의 원래의 천성에 따라 나는 그대들을 삼켜 버릴 것이다. 그대들에게 참나 지식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할 것이다. 바른 답을 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내가 요청하는 유일한 것이다."

마녀는 질문하였습니다.

오, 왕이여! 하나이지만 다수이고, 그 안에 수백만의 우주가 바다의 물결처럼 녹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순수 공간인 것은 무엇인가? 내 속에 있는 그대이고 그대 속에 있는 나는 무엇인가?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고, 정지하지 않지만 정지한 채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의식이지만 돌이고 텅 빈 공간에서 놀라운 재주를 부리는 것은 무엇인가? 태양도 달도 불도 아니지만 여전히 영원히 빛나는 것은 무엇인가? 멀리 있는 듯하지만 가까이 있는 그 원자는 무엇인가? 의식이지만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지만 그것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아닌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의 참나이지만 무지에 의해 가려져 있다가 여러 번의 삶에 걸쳐 지속적이고 강한 노력을 통해 다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원자처럼 작지만 그 안에 산을 넣을 수 있고, 삼계를 풀잎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원자처럼 작지만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 원자적 본성을 버리지 않고도, 가장 큰 산보다 더 크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우주적 소멸 동안, 그 안에서 전 우주가 씨앗처럼 쉬고 있는 원자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전혀 하지 않지만,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원소의 기능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팔찌와 같은 장신구가 금인 것처럼, 보는 자, 봄, 보이는 대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나무가 씨앗 속에 있듯이, 무엇 안에서 세 가지 나타남(보는 자, 봄, 보이는 대상)이 자리 잡고 있는가? 나무가 씨앗 밖으로 씨앗이 나무 밖으로 번갈아 나오듯이, 바꿔 가면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오, 왕이여! 이 우주를 창조한 자는 무엇이며, 무엇의 힘으로 그대는 존재하고, 왕의 역할을 하고, 백성을 보호하고 사악한 자를 벌주는가? 그것을 봄으로써 그대의 시각이 정화되고, 분리 없이 그대가 그것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 왕이여! 눈앞의 죽음에서 목숨을 구하려면, 이 질문에 답하라. 그대가 가진 지혜의 빛으로 내 안에 있는 의심이라는 어둠을 쫓아 버려라. 질문을 받았을 때, 무지와 의심의 뿌리를 자를 능력이 없는 자는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대가 내 안의 무지를 근절하지 못하고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다면, 오늘은 그대가 내 배고픔을 풀어 줄 것이다.

대신이 답하였습니다.

오, 여인이여! 내가 그대의 질문에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모든 질문이 말하는 것은 지고의 참나이기 때문이다.

참나는 이름이 없고 묘사될 수 없으므로 공간보다 더 미세하다. 마음도 감각들도 그것에 도달하거나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순수 의식이다. 씨앗 속에 나무가 존재하듯이, 원자적인 의식 안에 온 세상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때 세상은 의식으로서 존재하지, 세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모든 것이 하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모든 것의 참나이기 때문에 그 의식은 존재한다. 그것이 존재하므로 모든 다른 것이 존재한다.

그 참나는 공간처럼 비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마음과 감각들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의 참나이지만, 그것은 경험의 대상으로서 누구나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이자만 존재하는 무한한 원자들 속에 투사되므로 다수인 것처럼 보인다. 팔찌가 실재인 금의 상상적인 모습이듯이, 그것의 외적인 모습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참나는 비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이나 무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의 참나이고,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자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의 참나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것의 존재는 장뇌의 존재를 그 향기로 경험할 수 있듯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것만이 의식으로서 모든 것의 참나이며, 세상의 모습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체이다.

흐르는 물의 속성으로 소용돌이가 생기듯이, 의식이라는 무한한 바다 속에서 삼계라는 소용돌이가 자발적이면서 자연적으로 일어난다. 의식은 마음과 감각들의 범위 너머에 있기 때문에,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참나 지식으로 알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은 분리될 수 없기에, 내가 그대이며 그대가 나이다. 그러나 분리할 수 없는 의식은 나도 그대도 될 수 없다. '그대'와 '나'라는 거짓 개념을 버린다면, 그대도 없고, 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없다는 자각이 생긴다. 그것만이 전부일 것이다.

참나는 무한하기에 움직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참나는 존재하는 모든 원자 안에 영원히 자리 잡고 있다. 참나는 가지도 오지도 않는다. 공간과 시간은 그들의 의미를 오로지 의식에서 끌어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참나 안에 있는데, 참나가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항아리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질 때, 그 안의 공간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늘 공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대신은 계속 말하였습니다.

활발하지 않은 것과 외관상으로 관련될 때, 순수 의식의 본성을 가진 참나는 둔하고 감각들이 없는 듯이 보인다. 무한한 공간에서 이 무한한 의식은 무한한 대상들을 나타나게 했다. 이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런 효과는 단지 상상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완성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식과 둔감한 것, 행위자와 비행위자 둘 다이다.

불 속에 있는 실재는 이 참나 즉 의식이다. 하지만 참나는 어떤 것을 태우지도 자신이 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 안에 있는 실재이며,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양, 달, 불에서 반짝거리는 영원한 빛이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독립적이다. 이러한 불들이 졌을 때 조차 그것은 빛난다. 그것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빛나게 한다. 그것만이 나무, 식물, 넝쿨 안에 거주하는 지성이며, 그리고 그것들을 보호한다. 보통의 관점으로 볼 때 참나 즉 무한한 의식은 모든 것의 창조자, 보호자, 지배자이지만, 절대적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모든 것의 참나이므로 그런 제한적인 역할들이 없다.

이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있는 세상은 없다. 그러므로 산들조차도 원자 같은 참나 안에 있다. 그것 안에서 순간적이기도 하고 시대적이기도 한 공상이 일어난다. 꿈에서 보이는 대상이 꿈을 꿀 당시에는 사실인 것처럼 보이듯이, 이러한 것들은 실재하는 시간의 척도인 것처럼 보인다. 눈을 깜박이는 동안에 한 시대가 존재하듯이, 전 도시가 작은 거울 안에 투영된다. 그러하거늘, 어떻게 실재를 이원성이나 비이원성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이 원자적 참나 즉 무한한 의식만이 한 순간이나 한 시대에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들 내부에서 서로 모순이 되지 않는다.

팔찌를 팔찌로 보는 한, 그것은 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팔찌는 말에 불과하다.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금이 보인다. 그처럼 세상이 실재로 여겨지면 참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추측을 버리면 의식이 깨우쳐진다. 그것이 모두이므로 그것은 실재이다. 그것이 경험되지 않으므로 그것은 비실재이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야의 마술일 뿐이다. 그것은 의식 속에서 주체와 대상이라는 분리를 만든다. 그것은 꿈 속의 도시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실재도 비실재도 아니지만 오래 지속되는 환영이다. 창조주 브람마에서 작은 곤충에 이르는 다양성은 분리의 가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의 씨앗 속에 나무의 다양한 특성이 늘 있듯이, 참나 속에는 늘 이런 분명한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의식으로 있다.

까르까띠가 말하였습니다.

오, 왕이여! 대산의 대답은 흡족하다. 이제 그대의 답을 듣고 싶다.

왕이 대답했습니다.

오, 고귀한 여인이여! 그대가 한 질문은 순수한 존재인 영원한 브람만에 관련된 것이다. 깨어 있고, 꿈꾸고, 깊이 잠자는 세 가지 변형이 멈추어 마음에 생각의 움직임이 없을 때, 그것은 알려진다. 그것의 나타남이 펼쳐지고 거두어지는 것을 일반적으로 세상의 창조와 소멸이라고 한다. 알려지는 대상이 끝날 때 그것은 침묵 안에서 표현된다. 그것은 모든 표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극단 사이에 있는 미묘한 중앙이며, 그 중앙은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 모든 우주들은 그것의 놀이이며 의식의 투사이다. 이 우주의 다양성으로서 그것은 그 자체가 분리된 듯 보이지만, 사실 분리되지 않은 것이다.

이 브람만이 원하면, 바람이 존재하게 된다. 바람은 다름 아닌 순수 의식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리를 생각하면,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 공상적으로 투사된다. 그러나 순수 의식인 실재는 소리나 그것의 의미 및 실체라고 생각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 지극히 미묘한 원자와 같은 존재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이지만, 그것은 나가 아니다. 그것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전지전능하므로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참나는 백 가지 방법과 수단으로 얻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얻어지면,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지고의 참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이 실재처럼 보이게 하는 근원적인 무지를 없앨 수 있는 지혜의 여명이 있을 때까지, 사람은 삼사라의 숲인 반복적인 역사 속에서 방황한다. 무지한 자가 신기루 속에 있는 물을 보고 끌리듯이, 이 세상 모습은 무지한 자를 유인한다. 하지만 마야라는 그것 자신의 힘을 통해 그것 자신 속에서 세상을 지각하는 것은 무한한 의식이라는 것이 진리이다. 정욕으로 마음이 흐려진 사람의 착각처럼, 내부에서 보이는 것이 외부에서도 나타난다.

참나는 지극히 미묘하고 원자적이다. 순수 의식의 근본적 본질이지만, 그것에 의해 온 세상이 펼쳐진다. 모든 것에 존재하는 이 전능한 존재는 세상의 모습이 자신의 곡조에 맞춰 춤추게 한다. 머리카락 한 올을 백 번 나눈 것보다 더 미묘한 그것은 모든 곳에 있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것보다 더 위대하다.

왕은 계속 말했습니다.

참나 지식의 빛만이 모든 경험을 비춘다. 그것은 그것 자신의 빛으로 빛난다. 태양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빛이 둔해진다면, 사람이 무슨 빛으로 보는가? 오직 내적인 빛이다. 이 내적 빛은 바깥에 있는 듯하기도 하고 외부 대상들을 비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빛의 다른 근원은 정말이지 무지의 어둠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이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안개와 구름 둘 다는 대상들을 가린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안개는 빛을 방출하는 듯이 보이는 반면에 구름은 빛을 가리는 듯 보인다. 의식이라는 내면의 빛은 안과 밖에도, 낮이나 밤에도 늘 빛난다. 신비스럽게도 그것은 무지의 어둠을 없애지 않고 무지의 결과들을 비춘다. 늘 빛나고 있는 태양이 밤과 낮의 도움으로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드러내듯이, 참나의 빛은 의식과 무지 둘 모두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나타낸다.

한 방울의 꿀 속에 꽃, 잎, 열매의 미묘한 본질이 있듯이, 의식의 원자적인 공간 안에 모든 경험이 존재하고 있다. 그 의식으로부터 모든 경험이 퍼진다. 왜냐하면 경험하는 것은 의식인 경험자뿐이기 때문이다. 경험에 대해 특별한 기술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 모두는 하나의 의식의 경험 속에 포함된다. 진실로 이 무한한 의식만이 이 모든 것이다. 모든 손과 눈이 비록 지극히 미세하지만, 그것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지가 없다. 짧은 꿈 속에서도 젊음, 늙음 및 죽음조차도 경험하듯이, 눈을 깜박하는 사이에 무한한 의식은 자신의 내부에서 한 시댈르 경험한다. 돌로 만든 조각이 돌에 불과하듯이, 의식 속에 나타나는 모든 대상은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나무가 지니게 될 모든 것이 씨앗 속에 있듯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전 우주가 무한한 의식의 원자 속에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참나는 행위의 행위자도, 경험의 경험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행위의 행위자이고 모든 경험의 경험자이다. 참나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한한 의식의 원자 안에 행위와 경험자가 내재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이지 결코 창조된 적이 없으며, 사라지지도 않는다. 상대적인 관념으로 본다면, 세상은 실재가 아닌 것으로 여거진다. 절대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세상은 무한한 의식과 다르지 않다.

왕이 계속 말하였습니다.

현자들은 안과 밖에 대해 얘기하지만, 그것은 단어일 뿐, 그것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보는 자는 자신은 보이지 않은 채 스스로를 본다. 그리고 보는 자는 결코 의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보는 자는 보이는 것이며, 잠재된 마음의 인상들이 멈추면, 보는 자는 자신의 순수한 존재를 되찾는다. 외적 대상을 상상하면, 보는 자를 창조한 것이다. 주체가 없다면, 대상 역시 없다. 남자를 아버지로 만드는 것은 아들이다. 대상이 되는 것은 주체이다. 주체(보는 자)가 없이는 대상(보이는 것)도 없다. 아버지가 없을 때 아들도 없다. 주체(보는 자)는 순수 의식이기 때문에, 그는 대상을 나타나게 할 수 있다. 반대로는 될 수 없다. 즉 대상이 주체를 낳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보는 자만이 실재이고, 대상은 환영적인 존재이다. 금만이 실재이며, 팔찌는 이름과 형태일 뿐이다. 팔찌의 개념이 계속되는 한, 순수한 금을 이해할 수 없다. 대상의 개념이 지속되는 한,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의 분리 역시 지속된다. 그러나 팔찌 속에 있는 의식 때문에 금이 자신이 금이라는 것을 깨닫듯이, 대상(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주체(보는 자)는 주체성(의식)을 깨닫는다. 한쪽은 다른 한쪽의 반사이다. 실재하는 이원성은 없다. 보는 자가 대상을 볼 때 그는 자신을 보지 않는다. 즉, 보는 자는 자신을 대상으로 보기에 보지 않는 것이다. 비록 그는 실재이지만 실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참나 지식이 일어나고 대상이 존재하기를 멈출 때, 보는 자(주체)는 하나뿐인 실재로 깨달아진다.

주체는 대상 때문에 존재한다. 대상은 다름이 아니라 주체의 투사이다. 하나가 없다면 이원성이 있을 수 없다. 하나만이 존재한다면, '단일성'이라는 개념이 어디에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진정한 지식이 올바른 탐구와 이해로 얻어지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만이 남는다. 그것에 대하여 하나라거나 다수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보는 자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주체나 대상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단일성도 다양성도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정의는 그 반대의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도들이 물과, 팔찌가 금과 다르지 않듯이, 한쪽은 '다른 한쪽'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분리는 단일성의 반대가 아니다! 단일성과 다양성에 관한 이 모든 추측은 단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것 너머에 있는 것이 진리이며, 지고의 참나이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왕의 이와 같은 현명한 말을 들은 후 까르까띠는 평온해졌으며, 그녀의 마귀 같은 본성이 그녀를 떠났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오, 현명한 분들이여! 당신 두 사람은 모두에 의해 경배되고 섬겨질 자격이 있다. 당신들과의 거룩한 만남으로 나는 완전히 깨어났다. 손에 초를 쥔 사람은 어디에서도 어둠을 보지 않듯이, 깨달은 자들과의 만남을 즐기는 자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지 않는다. 당신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말해 달라."

왕이 말했습니다. "오, 여인이여! 내가 다스리는 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류머티즘성 심장 질환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도시에는 콜레라 전염병도 돌고 있다. 이것들을 조사하고 치료법을 알아보려고 나와 대신이 오늘 밤 궁전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은 내 백성의 어떤 생명도 거두어 가지 말라는 것이다. (즉시 까르까띠는 왕의 요구에 응했습니다.) 부탁하건대, 대답해 달라. 그대의 친절함에 어떻게 보답하며, 그대의 배고픔을 어떻게 달랠 수 있겠는가?"

까르까띠가 대답했습니다. "한때 나는 히말라야에서 고행에 임하면서 내 몸을 버리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생각을 버렸다. 내 일생을 말해 주겠다. 한때 나는 몸집이 거대한 마녀였다. 나는 사람들을 포식하기를 원했으며, 그런 의도로 고행을 했다. 창조주 브람마로부터 은혜를 얻고, 그 결과 나는 바늘과 콜레라 병균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주었다. 그러나 브람마는 유일하게 나를 통제할 수 있는 만뜨라를 만들었다. 이 만뜨라를 배워라. 그러면 그 도움으로 당신은 백성들에게 류머티즘성 심장 질환, 백혈병 및 다른 혈액 질환들을 제거할 수 있다. 나는 부모에게서 아이에게 유전되는 방법으로 백혈병이 퍼지도록 하곤 했다!"

그들 셋 모두는 강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왕은 까르까띠로부터 만뜨라를 받았습니다. 이 만뜨라를 반복(자빠)하자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왕이 감사히 여기며 까르까띠에게 말했습니다. "오, 친절한 여인이여! 이제 그대는 나의 구루요 친구가 되었다. 선한 사람들은 우정을 가치롭게 여긴다. 바라건대 부드럽고 좀 작은 모습을 하고서, 내 궁전으로 와서 나의 손님으로 살도록 하자. 좋은 사람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하지만 죄인과 도둑들을 음식으로 주어 당신을 부양할 것이다."

까르까띠는 동의했습니다. 그녀는 매력 있는 젊은 여인이 되었고 왕의 손님으로 살려고 왕을 따라갔습니다. 왕은 도둑, 범죄자, 죄인들을 그녀에게 맡겼습니다. 매일 밤 그녀는 마귀 같은 형태를 되찯았고 그들을 먹었습니다. 낮에는 왕의 친구이고 매력 있는 여자 손님으로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의식과 삶으로 돌아가기 전, 그녀는 식사 후 종종 한꺼번에 몇 년씩 사마디에 들곤 하였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이리하여 까르까띠는 지금까지도 왕의 자손을 보호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게를 닮은 마귀의 딸이었습니다. 마귀들은 많은 종류와 색깔(회색, 검은색, 초록색, 붉은색)들이 있습니다. 그녀는 검은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과 왕의 대답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 이야기를 그대에게 해 준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나무의 가지가 잎, 꽃, 열매 등과 더불어 씨앗에서 나오듯이, 다양한 세상은 무한한 의식에서 펼쳐져 나옵니다.

오, 라마여! 내 말들을 듣기만 하여도 그대는 깨달을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세상은 브람만으로부터 일어났으며, 그것은 브람만일 뿐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라마가 물었다.

하나인 그것만이 진리라면, '이것에 의해 저것을 얻는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라마여! 경전에서는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말들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원인과 결과, 나와 신, 차이점과 비차이점, 지식과 무지, 고통과 즐거움, 이러한 모든 쌍들은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려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들은 원래 사실이 아닙니다. 이 모든 토론과 논쟁은 무지 때문에 무지 속에서 일어납니다. 지식이 있을 때 이원성은 없습니다. 진리가 알려지면, 모든 묘사는 중단되고 고요만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나타내려고 말들이 상요되는 한, 이원성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원성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분리는 환영입니다.

다른 예를 그대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제 설명에 들어 있는 약을 수단으로, 마음을 괴롭히는 질병을 확실히 극복할 것입니다. 세상의 나타남인 이 삼사라는 좋아함과 싫어함으로 채워져 있는 마음일 뿐입니다. 마음에 그것들이 없을 때 세상의 모습은 끝납니다. 마음속에 있는 의식은 모든 물체의 씨앗입니다. 마음의 둔한 측면은 환영의 세상 모습의 원인입니다. 의식은 모든 곳에 있기 때문에, 마음은 알 수 있는 것의 모습을 취합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의 씨앗이 됩니다. 아이와 같은 마음은 세상이 존재한다고 상상합니다. 마음이 밝아지면, 마음은 마음의 안에서 무한한 의식을 경험합니다. 이제 어떻게 주체와 대상의 분리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해 주겠습니다.

바시슈타가 계속 말했다.

한때 나는 창조주 브람마에게 어떻게 이 우주가 처음 창조되었는지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브람마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브람마가 말했습니다.

나의 아이야! 이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마음일 뿐이다. 이 시데의 처음에 나에게 생긴 일을 너에게 말해 줄 것이다. 이전 시대의 끝에 우주의 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의 끝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아침 기도를 올리고 우주 창조를 바라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무한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내 마음속에는 창조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 나의 가슴속에서 미묘한 비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 안에서, 그리고 나의 마음으로 나는 몇 개의 독립된 우주들을 보았다. 그 모든 것들 속에서 나는 또한 나와 상대가 되는 것들인 창조주들을 보았다. 그 우주들 속에서 나는 산과 강, 바다와 바람, 태양과 천국에 있는 존재들, 저승과 마귀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존재들을 보았다.

이 모든 우주 속에서 나는 또한 선과 악,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 경전과 도덕률을 보았다. 기쁨으로 가는 길과 해방으로 가는 길을 설명해 놓은 경전들도 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목표들을 추구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일곱 세상, 일곱 대륙과 바다와 산들을 보았다. 그것들 모두가 확실히 파괴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과 시간의 나눠짐, 낮과 밤들을 보았다. 나는 거룩한 강가 강이 하늘 영역, 공기, 땅이라는 이 삼계를 엮고 있는 것도 보았다.

공중의 누각처럼, 이 창조물이 그것의 하늘, 땅, 바다와 함께 널리 빛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놀라고 당황했다. "육체적인 눈으로 보지 않는데도, 커다란 공 속에 있는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은 왜인가?" 나는 상당 시간 동안 이 문제를 생각해 내고 그에게 오라고 청했다. 나는 그에게 나의 관심을 끌고 있는 질문을 했다.

태양이 대답하였습니다.

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이 모든 것의 전능한 창조자이신 당신은 진정 신이십니다. 끊임없고 끝없는 창조적 활동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마음일 뿐입니다. 무지 때문에, 그것은 사람을 미혹시켜 '이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신이시여! 분명히 당신은 진리를 아십니다. 하지만 당신의 의문에 제가 대답하도록 명하시기에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