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샤 ㅡ 공간 또는 차원 원본에는 세 가지 주요 용어가 나온다. 그것은 찌다까샤, 찌따까샤, 부따까샤이다. 글자 그대로 말하면, 아까샤는 공간을 뜻한다. 찌다까샤는 의식의 공간을, 찌따까샤는 마음의 공간을, 부따까샤는 원소의 공간을 의미한다. 이 세 개념을 바가반 라마나 마하리쉬는 아래와 같이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다. "찌다까샤는 아뜨마 스와루빠(아뜨마의 모습)이며, 그것을 마음의 도움으로만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진정되면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습니까?" 하고 누군가가 물었다. 바가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을 예로 들자면, 그것은 찌다까샤, 찌따까샤, 부따까샤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자연적 상태는 찌다까샤로 불리며, 찌다까샤에서 태어난 '나'라는 느낌이 찌따까샤입니다. 찌따까샤가 팽창하면서 모든 부따(원소)들의 형태를 취하는데, 이것이 부따까샤입니다. 자기('나')의 의식인 찌따까샤가 찌다까샤를 보지 않고 부따까샤를 보면, 그것을 마노(마음의) 아까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노 아꺄샤를 떠나서 찌다까샤를 볼 때 그것은 친마야(순수 의식)라 합니다. 마음이 진정된다는 것은 대상들의 다양성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고, 대상들이 하나라는 생각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성취되면 모든 것은 자연스러워집니다." 아마도 아까샤라는 단어에 대한 더 나은 해석은 '차원'일지도 모른다. 동일한 무한한 의식이 영적, 심리적(개념적) 그리고 물리적 차원에서 각각 보여지는 것이 찌다까샤, 짜따까샤, 부따까샤이다. |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창조와 그 비밀을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각된 대상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한, 속박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개념이 계속되는 한, 그것과 함께 속박도 지속됩니다. 여기 이 창조 속에서는 창조된 것만이 자라고 쇠퇴하며, 그 뒤에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며, 그리고 해방됩니다.
우주적 소멸 때, 대상으로 있는 모든 창조물은 무한한 존재 안으로 용해됩니다. 의사소통과 원활한 대화를 위해, 현자들은 무한한 존재를 아뜨만, 브람만, 진리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습니다. 바로 이 무한한 참나는 자신 속에 자신과 타인이라는 이원성을 생각합니다. 바다의 표면이 흔들릴 때 물결이 일듯, 그때부터 마음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금팔찌가 실제로는 금이듯이 (금은 팔찌가 되지 않고도 존재하지만, 팔찌는 금이나 다른 금속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의 성질들과 본성, 창조물의 잠재성은 창조자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마음은 무한한 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기루가 진짜 강물처럼 보이듯이, 이 창조물도 완전히 실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너'와 '나'가 실재한다는 개념에 매여 있는 한, 해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존재의 개념을 단지 말로만 부인한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러한 부인은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라마여! 사실 창조물이 실재라면 그것이 멈춰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실재하는 것에는 아무런 실재적 존재가 없으며, 실재하는 것은 계속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행, 명상 및 다른 수행들은 그것을 중단시킬 수도 없으며, 깨달음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창조물이라는 개념이 지속되는 한, 생각이 움직이지 않는 사마디는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마디에서 돌아오는 순간에 슬픔과 동행한 창조물이 마음에 생겨납니다. 생각의 움직임은 창조된 대상들의 개념을 불러일으킵니다.
참깨 씨 속의 기름처럼, 꽃 속의 향기처럼 모든 것 속에 정수가 존재하고 있듯이, 대상적 지각의 기능은 지각하는 자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꿈의 대상들은 꿈꾸는 자에 의해서만 경험되듯이, 지각의 대상들은 지각하는 자에 의해 경험됩니다. 때가 되면 씨에서 싹이 돋듯이, 이 잠재성은 창조물이라는 개념으로서 나타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아까샤자(글자대로 해석하면 '공간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라는 신성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꾸준한 명상을 하였으며 가슴에 모든 존재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그를 삼키려 할 때까지 그는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죽음이 그에게 다가갔을 때, 죽음은 그 신성한 사람을 보호하는 격력한 불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불을 피한 후에도, 죽음은 그를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유별나고 전에 없었던 일에 당황한 죽음은 운명을 관장하는 주인인 야마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신이시여! 왜 제가 그를 죽음으로 데려올 수 없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야마는 대답했습니다. "오, 죽음이여! 사실, 그대는 누구도 죽일 수가 없다. 까르마가 죽음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치명적인 까르마를 찾아보도록 하여라."
아이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의 아이들을 찾을 수 없듯이, 죽음은 세상의 그 어디에서도 그 신성한 사람의 까르마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야마에게 보고했습니다.
야마는 말했습니다. "오, 죽음이여! 이 신성한 사람인 아까샤자는 진정으로 우주에서 태어난 자이다. 그에게는 까르마가 없다. 그는 우주만큼이나 순수하다. 그래서 그는 그대가 그를 잡아 삼키도록 하는 까르마를 초래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의 아이들처럼, 이 신성한 이는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또한 전생의 까르마도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마음이 없다. 그대의 범위 안에서 그를 데려올 수 있는 마음의 어떤 행위도 그는 하지 않았다. 그는 지성의 정어리일 뿐이다. 우리의 눈으로는 존재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에게는 까르마를 일으킬 수 있는 아무런 개념이 없다. 의식은 의식 안에서 비추어진다. 그러면 비추어진 것은 독립된 모습을 취한다! 이것은 거짓된 가정이지 진정한 존재는 아니다. 이 신성한 사람은 이 진리를 알고 있다.
유동성이 물 속에 본래 존재하고 있듯이 텅 빔은 공간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 신성한 사람은 최고의 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는 원인이 없는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창조되었다고 얘기된다. '나는 흙으로 된 몸이다.'라는 어리석은 개념을 가진 사람은 문제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를 이길 수 있다. 이 신성한 자는 그런 생각이 없기에, 그는 실제로는 아무런 몸이 없다. 그는 그대가 닿을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다.
이 신성한 사람은 결코 태어난 적이 없다. 그는 변화를 겪지 않는 순수한 의식이다. 한 시대가 시작되는 때에 무한한 존재 안에서 잠재된 무지로 인하여 진동이 일어난다. 이것은 우주적 꿈 속에서처럼 다양한 존재들로 나타난다. 이것에 관련되지 않은 채, 이 신성한 사람은 순수 의식으로 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창조자 안에는 보는 자도 없고 지각의 대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창조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가의 마음속에 있는 그림처럼 그는 우주적 의식 안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창조자 안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전의 까르마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신체적 몸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영적 실체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멸하는 존재들은 신체적 몸과 영적인 몸이라는 두 개의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창조자는 영적 몸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체적 몸을 만드는 원인이 그의 내부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존재의 창조자입니다. 금팔찌 같은 창조된 대상들은 그것이 만들어진 것인 금과 동일한 실체입니다. 창조자의 생각이 이 다양한 창조의 원인이 되고 또 창조자 자체가 신페적 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창조물 또한 물질이 없는 생각의 내용을 정말로 지니고 있습니다.
창조자 안에서 한 진동은 모든 존재의 지성으로 만들어진 미묘한 몸을 존재하게 합니다.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이 모든 것은 비록 그 모습이 실재처럼 느껴지지만,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꿈 속에서의 성적 즐거움이 그러하듯이, 실재라고 상상된 이 나타난 모습은 실제적인 결과들을 가져옵니다. 이와 비슷하게 몸이 없는 창조자(이 이야기 속의 신성한 사람)조차 몸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창조자 또한 의식과 생각이라는 이원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식은 순수하며, 생각은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자는 실제로는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일어나 존재 안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온 우주를 지지하는 지성입니다. 그 지성 안에서 일어나는 매 생각은 하나의 형태를 일어나게 합니다. 이 모든 형태들은 순수한 지성이지만, 이것에 대한 자기 미혹과 물질적 형상들에 대한 생각으로 그것들은 물질적 형태로 굳어집니다. 악귀들은 형상이 없지만, 지각하는 자의 미혹 때문에 형상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창조자는 그러한 미혹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영적 본성이지 물질적이지 않습니다. 창조자는 영적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창조물 역시 근본에 있어서는 실제로 영적입니다. 이 창조에는 원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물은 지고한 존재인 브람만이 그러하듯이 본질적으로 영적입니다. 공중에 있는 누각처럼, 창조가 지닌 물질성은 자신의 마음의 환영적인 투사입니다.
창조자는 마음입니다. 마음 즉 순수 지성은 그의 몸입니다. 생각은 마음 안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지각의 대상은 지각하는 자 안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 둘에 대한 구분을 누가 한 적이 있습니까?
발미끼가 말했다.
이 단계에서 태양은 현자의 말을 명상하기를 열망하고 땅의 다른 부분들을 비추려는 듯이 서쪽 언덕을 향해 졌다. 다음 날 아침 모든 사람은 전과 같이 궁정에 모여들었다.
라마는 물었다.
오, 성스런 현자시여! 청하건대 마음이 실제로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텅 비어 있고 움직임이 없는 무(無)가 공간으로 알려져 있듯이, 마음은 텅 빈 무입니다. 마음이 실재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마음은 지각의 대상들 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라마여! 생각은 마음입니다. 이 둘 사이는 구분이 없습니다. 영적 몸을 입은 나를 마음이라 합니다. 마음은 물질적, 신체적 몸을 존재하게 합니다. 무지, 삼사라(반복되는 역사), 마음, 속박, 불순, 어둠, 둔함 등은 모두 비슷한 말들입니다. 경험만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지각되는 것들일 따름입니다.
금으로 된 장신구가 금과 다르지 않듯이, 이 온 우주는 각 원자 안에 머무르고 있는 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장신구의 모습이 금 안에 존재하고 있듯이, 대상은 주체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상에 대한 개념을 확고히 거부하여 주체에서 없앴을 때, 외형적, 잠재적 대상성이 없이 의식만 존재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이끌림과 혐오, 사랑과 미움 같은 악들과 세상, 너, 나 등의 거짓 개념들 또한 자신의 가슴속에서 멈춥니다. 대상화시키려는 경향성마저도 멈춥니다. 이것이 해방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지각의 대상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말했다.
오, 라마여! 하지만 그것을 이겨 낸 신성한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공간과 같은 외적 대상들과 '나'등과 같은 심리적 요소들은 단지 이름으로만 존재합니다. 실제로는 대상적 우주도, 지각하는 자신도, 그와 같은 지각도, 공도, 둔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우주적 의식(찌뜨)입니다. 이것 안에서 다양성, 다양한 행위들, 경험들, 속박이라는 개념과 해방을 향한 갈망을 그려 내는 것은 마음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오, 성스러운 현자시여! 마음의 원천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이 일어납니까? 이것에 대해서 저를 자비롭게 깨우쳐 주십시오.
바시슈타가 답하였다.
우주의 소멸 후 다음 시대가 오기 전에, 온 대상적인 우주는 완전한 평온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영원하며 태어나지 않고 스스로 빛나는 지고한 신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며 전능합니다. 그는 생각할 수 없으며 묘사할 수 없습니다. 아뜨만 등의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들은 견해일 뿐이고 진리는 아닙니다. 그는 존재하고 있지만 세상은 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또한 몸 속에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멀리 있습니다. 셀 수 없는 광선들이 태양에서 나오듯이, 비슈뉴와 같은 수많은 신들이 그로부터 나타납니다. 바다 표면에서 물결들이 일어나듯이, 무한의 세상들이 그로부터 나옵니다.
그는 우주적 지성이며, 무수한 지각의 대상들이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빛입니다. 참나와 세상은 그 안에서 빛납니다. 그는 창조된 모든 것의 특징을 부여합니다. 신기루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사라지듯이, 그 안에서 세상들이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그의 형태(세상)는 없어지나, 그의 참나는 변치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 속에 거주합니다. 그는 가려져 있지만 그는 넘쳐흐릅니다. 그의 단순한 현존만으로도 이 외형상의 활력이 없는 물질적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은 늘 활동적입니다.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그의 생각들이 물질화합니다.
오, 라마여! 이 지고한 참나는 지혜 아닌 다른 방법에 의해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종교적 수행들을 하는 것으로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참나는 멀리 있는 것도,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접근하기 어려운 것도,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서 희열의 경험으로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서 깨달아집니다.
고행과 금욕, 자선과 종교적 맹세들을 지키는 것으로는 신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스러운 이들과의 만남, 참된 경전에 대한 공부는 도움이 됩니다. 그것들은 무지와 미혹을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이 참나만이 실재라는 것을 확신할 때, 그는 슬픔을 넘어 해방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고행이나 금욕들은 스스로 부과한 고통입니다. 다른 이들을 속여서 얻은 부를 가지고 행한 자선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것들은 자선의 진정한 결실들을 없앨 뿐입니다! 종교적 의식들은 허영심을 증가시킵니다. 신에 대한 무지를 처방하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을 향한 갈망을 확고하고도 단호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이 신은 어디에 있으며, 제가 어떻게 그분에게 갈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답했다.
신이라고 묘사되는 그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는 몸 안에 거주하고 있는 지성입니다. 비록 우주는 그가 아니지만, 그는 우주입니다. 그는 순수한 지성입니다.
라마가 말했다.
어린 소년조차 신은 지성이라고 말합니다. 이 특별한 가르침을 이해하기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시슈타가 답했다.
아, 순수한 지성을 대상적 우주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지각력이 있는 것이 우주이며, 지각력이 있는 것이 영혼(지바)입니다. 지각력이 있는 것은 인식 가능한 것을 만들며 그래서 슬픔에 빠집니다. 인식 가능한 것을 멈출 때, 인식할 수 없는 것 즉 순수한 지성을 향한 주의의 흐름이 있게 됩니다. 그때 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품 너머로 갑니다.
인식 가능한 것의 멈춤이 없이는, 그 사람의 주의는 인식 가능한 것으로부터 방향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단지 지바가 이 삼사라 속에 관련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고한 신이 알려지면, 슬픔은 끝납니다.
라마가 물었다.
성스러운 분이여! 신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시오.
바시슈타가 답했다.
우주가 존재하기를 멈출 때 그 안에 나타나는 우주적 지성이 신입니다. 신 안에서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중단되는 듯이 보입니다. 신은 공(空)입니다. 그 안에 우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 안에서는 우주적 의식조차도 산처럼 가만히 서 있습니다.
라마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신을 깨달을 수 있으며, 우리가 실재한다고 여기는 우주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하늘의 푸름이 실재하지 않듯이, 우주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확고히 자리를 잡을 때만 신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원론은 단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이원론은 이원론을 암시합니다. 창조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때만 신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성스런 분이시여! 이것은 어떤 방법으로 알 수 있으며, 무엇을 알아야 인식 가능한 것들의 정지가 옵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잘못된 생각이 지속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실재한다는 잘못된 개념이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이들과 함께 하고 신성한 경전을 공부하는 날, 그 잘못된 생각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경전 중에서도 이 마하라마야남이 가장 좋습니다. 이 경전에서 알려지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알려집니다. 또 이경전에서 알려지지 않는 것은 다른 곳에서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공부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경전을 공부해도 좋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개념을 물리쳐 진리가 깨달아질 때, 그 깨달음은 완전하게 그 사람에게 스며듭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며,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그것 안에서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칩니다. 그런 이들은 때로는 지반묵따라 불리며, 때로는 비데하묵따라 불리기도 합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지반묵따(살아 있을 때 해방된 자)와 비데하묵따(몸이 없는 해방된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핶다.
보통의 삶을 살면서 온 세상을 공으로 경험하는 자가 지반묵따입니다. 그는 깨어 있지만 깊은 잠이 주는 평온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는 쾌락과 고통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깊은 잠 속에서는 깨어있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는 결코 깨어 있지 않습니다. 그의 지혜는 잠재된 경향성들에 의해 흐려지지 않습니다. 좋아함, 싫어함, 두려움을 겪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그는 공간처럼 자유롭습니다. 그에게는 자아와 의지가 없습니다. 활동할 때나 활동하지 않을 때도 그의 지성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누구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도 누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어 몸을 버릴 때, 그는 비데하묵따가 됩니다.
하지만 비데하묵따는 존재도 존재하지 않음도 아니며, '나'도 '다른 이'도 아닙니다. 그는 빛나는 태양이며, 모두를 보호하는 비슈누이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루드라이며, 모든 것을 창조하는 브람마입니다. 그는 공간, 공기, 불, 물과 땅입니다. 사실 그는 모든 존재의 본질인 우주 의식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이며, 오로지 그일 뿐입니다.
라마가 다시 물었다.
신이시여! 저의 지각은 왜곡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말한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답했다.
오, 라마여! 해방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 그 자체입니다. 오로지 그것만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나', '너'로서 지각되는 것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브람만이 이 모든 세상들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오, 라마여! 나는 금으로 된 장신구에서는 금만을, 파도들에서는 물만을, 공기 속에서는 움직임만을 봅니다. 나는 공간 속에서는 공(空)만을, 신기루 속에서는 열기만을 보지, 어떤 다른 것은 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절대자, 브람만만을 볼 뿐이며, 세상들은 보지 않습니다.
'세상들'에 대한 지각은 시작이 없는 무지입니다. 그렇지만 진리에 대한 탐구로 그것은 없어질 것입니다. 존재하게 되었던 것만이 존재하기를 그칩니다. 이 세상은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있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창조에 관한 이 장 속에서는 이 진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우주적 소멸이 일어났을 때, 존재하는 듯이 보였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무한함만이 홀로 남았습니다. 그것은 공도 형태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귀도, 눈도, 혀도 없지만 그것은 듣고, 보며, 먹습니다. 그것은 원인이 없고, 창조도 없습니다. 물이 물결들의 원인이듯이, 그것이 모든 것의 원인입니다. 이 무한하고 영원한 빛이 모든 것의 가슴 안에 있습니다. 그것의 빛 안에서 삼계가 하나의 신기루와 같이 빛납니다.
무한한 것이 진동할 때, 세상은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한한 것이 진동하지 않을 때, 세상은 잠겨 있는 듯 보입니다. 횃불이 빠르게 회전하면 그것은 불의 원처럼 나타나며, 가만히 있으면 불의 원은 소멸합니다. 진동하는 것과 진동하지 않는 것은 항상 어디서든 같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미혹을 겪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모든 갈망과 고뇌는 소멸됩니다.
무한한 것으로부터 시간이 옵니다. 무한한 것으로부터 지각 가능한 대상에 대한 지각이 옵니다. 행위, 형태, 맛, 냄새, 소리, 촉각, 사고 등 그대가 알고 있는 이 모든 것은 오직 무한한 것입니다. 무한한 것으로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압니다! 무한한 것은 보는 자, 봄 그리고 보이는 것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을 알 때 그대는 그대의 참나를 깨닫게 됩니다.
라마가 말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어떻게 그것이 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며, 빛이 비춰지지 않고, 어둡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반대되는 표현 때문에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바시슈타가 답했다.
라마여! 그대의 질문들은 미숙하지만,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겠습니다.
나무토막 속에는 만들어 두지 않았지만 이미지가 늘 있습니다. 이처럼 그대가 세상을 실재로 여기든 실재가 아닌 것으로 여기든, 이 세상은 절대적인 것 안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것은 공하지 않습니다. 고요한 바다 안에 파도들이 없다고 말할 수 없듯이, 절대적인 것에 세상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예들은 제한적으로 적용을 해야 합니다. 한도를 넘어서는 적용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실 이 세상은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일어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 속에 용해된 것도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만이 지금 존재하고 있으며 영원합니다. 절대적인 것을 공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감정 때문입니다. 그것을 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공하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물질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태양과 같은 물질적 빛의 근원들은 그것을 빛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빛을 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활기를 잃지 않으며 어둡지도 않습니다. 이 절대적인 것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깨달아지거나 경험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것만이 그것 스스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한한 의식(의식의 공간)은 무한한 공보다 훨씬 더 순수합니다. 그리고 무한한 것이 존재하는 것만큼 세상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고추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고추의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처럼 대상이 없을 때는 무한한 것 속에 있는 의식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의식이 생명력이 없거나 지각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도 그렇게 경험됩니다. 만져서 알 수 있는 바다 안에 만져서 알 수 있는 파도들이 보이듯이, 형태 없는 브람만 안에 세상 역시 형태가 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것으로부터 무한한 것이 나타나며 그리고 무한한 것으로서 그것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실제로 결코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나타난 것인 무한한 것과 동일합니다.
마음에 생각들의 연료를 주지 않음으로 자기라는 개념이 없어질 때, 존재하는 것 그것이 무한한 것입니다. 잠자지도 않고, 활기 없지도 않은 것, 그것이 무한한 것입니다. 그 무한한 것 때문에 지성이 없음에도 앎, 아는 자, 알려지는 것이 하나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라마가 말핶다.
신이시여! 우주가 소멸되는 동안에 지금 확연히 보이는 이 세상은 어디로 갑니까?
바시슈타는 말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아이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 여인의 아이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 역시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그대를 당황시킬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금팔찌 안에 팔찌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단지 금이 아닙니까? 텅 빔이 없이 하늘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처럼, 절대적인 것인 브람만과 관계가 없는 세상이라 불리는 '그러한 것'은 없습니다. 차가움이 얼음과 분리될 수 없듯, 세상이라 불리는 것은 브람만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신기루 속의 물은 존재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그래서 존재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습니다. 그처럼 이 세상도 절대적인 것에서 온 것이 아니며, 그래서 어느 곳으로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라는 창조물에는 아무런 원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시작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금에조차도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파괴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브람만으로부터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브람만이라는 실재에 근거한 모습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때도 정말이지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브람만만이 홀로 존재합니다. 세상은 꿈과 같습니다. 무지의 상태에서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지성이 수많은 꿈의 대상들로 나타납니다. 그 모든 것은 모두 지성일 뿐입니다. 그처럼 창조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것 안에서도 그와 같은 나타남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은 브람만과 독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브람만과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마가 말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이유로 그런 실재감을 얻었습니까? 지각하는 자가 있는 한 지각되는 것도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모두가 끝날 때만 해방이 있습니다. 깨끗한 거울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나 다른 것을 늘 비출 것입니다. 그처럼 보는 자 내부에서 이 창조물은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그렇지만 창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보는 자는 없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을 얻기는 힘듭니다!
바시슈타는 말했다.
라마여! 나는 우화를 통해서 그대의 의심을 없앨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창조물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세상에서 깨달음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말했다.
오, 라마여! 꿈들이 잠자는 자의 의식 안에 나타나듯이, 이 창조물이 순수하고 나누어지지 않는 우주적 존재에서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이 우주는 사실 영원하고 빛나는 무한한 의식입니다. 그것은 그것의 형태(공간)에 관련된 생각과 그것 자신에 관한 탐구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질 인식 가능한 것들을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무한한 존재 안에서 창조의 의식이 강해질 때, 미래의 지바(살아 있는 우주적 영혼, 히란야가르바라고도 함)가 그 안에서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무한한 존재는 자신의 지고한 상태를 버리고 자신을 지바로서 한계 짓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조차 브람만은 무한한 것으로 남아 있으며, 이런 것들로의 아무런 변형은 없습니다.
공간에서는 소리의 기능이 그 스스로를 나타냅니다. 다음 우주 창조를 촉진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자아가 존재하게 됩니다. 동시에 시간이라는 요소도 존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주적 존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창조적 사고에 의하여 일어나며, 무한한 존재가 실제로 변형된 것은 아닙니다.
창조적 사고와 유사한 활동으로 인하여 공기가 창조됩니다. 베다들도 역시 존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에 둘러싸인 의식을 지바라 합니다. 이 지바는 이 세상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원소를 일어나게 합니다.
존재에는 열네 가지 측면이 있으며, 각각 그 유형에 맞는 거주자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의식의 창조적 사고의 나타남입니다. 그와 같이, 이 의식이 '나는 빛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태양과 같은 빛의 근원들이 즉시 창조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물과 흙이 창조되었습니다.
이 모든 근원적 원소들은 계속 서로에게 경험하는 자와 경험으로 작용하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온 창조물이 바다 표면의 물결들처럼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서로 너무 잘 엮이고 섞여 있어서, 우주가 소멸될 때까지는 서로에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물질적 모습들은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실재는 변화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비록 이 모든 것이 전혀 변화를 겪지 않는 무한한 의식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의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들은 즉시 거친 물질적 실체가 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지고의 존재 안에는 즉시 균형을 이루거나 혼동이 일어나는 진동이 존재합니다. 이것 때문에 그것들이 실제로 창조된 것이 아닐지라도 공간, 빛, 둔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이 의식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들은 알 수 있는 자질을 가집니다. 그와 동시에 아는 자가 일어납니다. 아는 자가 우주적 아는 자이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것을 빛나게 하는 의식의 내재적 힘입니다. 그 의식 자체가 그것 자신의 알 수 있는 대상과 아는 자가 됩니다. 그러한 관계가 일어날 때, '나는 살아 있는 영혼인 지바이다.'라는 개념이 의식 안에서 일어납니다.
알 수 있는 것과 더 깊이 동일시함으로써, 순수 의식 안에서 자아에 대한 개념이 생깁니다. 그러고 나서 구별하는 기능, 즉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지성이 생깁니다. 그 다음에 마음과 근원적 원소들이 생성됩니다. 이 근원적 원소들은 거듭 결합하여 세상을 만듭니다. 꿈 속에서 도시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듯이, 자발적이며 또한 질서를 지닌 변화들에 의하여 이 수많은 형태들은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이것들 중에 어떤 것도 흙, 물, 불 같은 수단적이거나 물질적인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의식의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꿈 속에서 도시를 짓듯이, 이 모든 것을 표면적으로 만드는 것도 바로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순수한 의식입니다.
다섯 원소들은 씨앗이며, 그 씨앗의 나무는 세상입니다. 영원한 의식은 원소들의 씨앗입니다. 씨앗이 존재하듯이 그 열매(나무)도 또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다름 아닌 절대적 존재인 브람만입니다.
이런 식으로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주적 의식은 우주 공간 안에서 우주를 마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우주는 사실이 아니며, 정말로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모든 원소들이 서로 결합되어 이 세상의 외형적 물질들을 만들었지만, 진실로 이 모든 것은 공간 안에 보이는 형상처럼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의 실재성은 유일한 실재인 우주적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섯 원소들로 된 세상이 다섯 원소들의 창조물이라는 생각을 갖지 마십시오. 다섯 원소들을 절대적 의식 안에 내재하고 있는 힘의 나타남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흙 등의 원소들은 꿈 속의 대상들처럼 의식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것들은 우주적 의식 위에 무지하게 얹어진 단지 겉모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신성한 이들의 통찰 혹은 깨달음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라마여! 이제는 지바(살아 있는 영혼)가 몸 안에 어떻게 머물게 되었는지 말하겠습니다.
지바는 "나는 성질과 크기가 원자처럼 극소하다."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지바는 본성이 원자처럼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형상으로만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짓된 상상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죽어서 다른 몸을 갖는 것을 꿈꿀 수 있듯이, 실제로 순수 의식이라는 극히 미묘한 몸을 가지고 있는 지바는 이제 거친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거칠어졌습니다.
산이 거울 속에 비춰질 때 마치 거울 안에 산이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지바는 외적 대상들과 활동들이 비춰지면 곧 그것들 모두가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은 행동하는 행위자이며 그리고 경험하는 경험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지바가 보기를 원하자, 눈이 거친 몸 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와 같이 피부, 귀, 혀, 코, 행위 기관이, 지바 안에서 일어나는 특유한 갈망의 결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의식이라는 극히 미묘한 몸을 지니고 있는 지바는 여러 외적인 물질적 경험과 여러 내적인 심리적 경험을 다양하게 상상하면서 몸 속에 거주합니다. 이렇게 실재이지만 실재가 아닌 것에 머무르면서, 이제는 지바로 나타난 브람만은 혼란스러워집니다.
그 자신을 유한한 지바로 여겨 신체적 몸을 지니게 된 이 동일한 브람만은 외부 세상을 이해할 때, 무지의 베일 때문에 세상이 물질로 이뤄진 듯이 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을 브람마라고, 어떤 이는 자신을 다른 누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지바는 그것을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상상해 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습의 환영에 자신을 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상이나 생각에 불과합니다. 지금조차도 아무 것도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순수한 무한한 공간만이 존재합니다. 창조주인브람마는 우주적 소멸 전에 소위 말하는 세상을 창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브람마는 그때 최종적인 해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의식만이 지금 그리고 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 속에는 아무런 세상들도, 아무런 창조된 존재들도 없습니다. 의식이 자체 속으로 비추어진 의식이 창조로 나타납니다. 실제가 아닌 악몽이 실제적인 결과들을 낳듯이, 무지의 상태에서 이 세상은 실재감을 얻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정한 지혜가 일어날 때, 이 비실재감은 사라집니다.
바시슈타가 계속하였다.
내가 이미 그대에게 설명하였듯이, 오 라마여! 자아와 수많은 경험의 대상들로 구성된 이 세상은 창조되지 않았스비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 존재인 브람만입니다. 바다가 동요할 때 바다의 표면에 파도들이 일어나듯이, 절대적 존재가 생각할 때 말하자면 지바라는 것이 나타납니다. 마치 잠자는 사람이 그자신의 독특한 그리고 고유한 실재성을 버림이 없이 그 자신 내에 다양한 창조물들을 만드는 것처럼, 절대적 존재는 고통스러운 감소나 변화를 거치지 않고 단순한 생각이나 의지로 이 무수한 창조물들을 존재케 합니다.
이 우주적 의식의 우주적 모습(비라뜨)은 물론 거친 물질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는 순수 의식의 성품입니다. 순수의식으로 만들어진 우주적 모습은 잠자는 사람이 계속해서 꾸는 꿈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 꿈에는 궁전들과 다른 존재들이 있습니다.
창조자 브람마조차도 이 우주적 의식에서 그저 하나의 생각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의식이 자신 안에 자신의 생각의 모습들을 비추는 것이 이 모든 눈에 보이는 보는 자와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것 모두는 그저 상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오직 이름으로만 있고 오직 이름으로만 증가됩니다. 우주적 존재가 우주적 생각으로 우주적 의식 안에 일어나듯이, 마치 하나의 등불이 다른 등불들을 밝히듯이, 이 모든 것은 그 우주적 존재의 생각들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하나로 있는 우주적 존재와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는 우주적 존재의 생각의 파동들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브라람만이 우주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주적 존재는 지바 및 모든 원소들과 더불어 있는 이 모든 창조물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오직 하나의 우주적 지바만이 있습니까? 아니면 많은 지바들이 있습니까? 아니면 지바들의 거대한 집합들이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하였다.
라마여! 하나의 지바도, 많은 지바들도 없으며, 지바의 집합들도 없습니다. 지바는 이름일 따름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직 브람만입니다. 전능하기 때문에, 브람만이 하는 생각은 물질화됩니다. 원래 하나인 것이 다양하게 보이는 것은 무지 때문입니다. 어둠을 보기 위해 빛이 오게 할 때는 어둠은 없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탐구로 사라지는 이 무지를 우리는 경험하지 않습니다. 브람만만이 우주적 영혼(마하지바)이며, 수없이 많은 지바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지각이나 인지의 대상을 이해하고자 하므로 의식은 살아 있는 영혼인 지바가 되며, 외적으로는 반복되는 역사인 삼사라에 관련됩니다. 아는 자인 의식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인지의 대상에 대한 거짓 개념이 멈출 때, 지바는 평온을 되찾습니다.
규칙적이거나 불규칙적인 방법으로, 하나였던 마하지바는 개체적인 지바가 됩니다. 그 지바는 이전의 삶으로부터 이원성과 개체성의 감각을 이어 받습니다.
설명이 불가능하며 놀라운 방법으로 이 무한히 다양한 이름과 형태(몸)를 낳는 의식의 신비로운 힘을 자아라 합니다. 같은 의식이 자신을 음미하거나 경험하기를 바랄 때, 의식은 알 수 있는 우주가 됩니다. 미숙한 사람만이 이것 안에서 실제적인 변형이나 현혹된 겉모습을 봅니다. 의식만이 존재하며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물입니다. 파도들은 물입니다. 이 파도가 바다의 표면에서 유희할 때, 물결이 만들어집니다. 우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다가 물결의 개체성을 바라보고 인식하듯이, 의식은 개체적인 것들을 독립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아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이 모든 것은 의식이 지닌 신비한 힘의 놀라운 유희입니다. 그것이 우주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자아가 존재하게 될 때, 의식과 다르지 않은 자아는 이 우주를 구성하는 여러 원소들에 대한 개념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그 원소들이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 속에서 다양성이 일어납니다. 오, 라마여! 지바와 그 자신의 원인에 대한 생각조차 버림으로, '나'와 '너'라는 모든 거짓 개념들을 없애도록 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실재와 비실재 간의 중앙에 있는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이 모든 '구름'이 없어질 때,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전체가 빛납니다. 그것은 결코 빛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실재이며 무엇이 거짓인지를 모릅니다!
이 의식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알려지기를 원할 때, 그것은 우주로서 알려집니다. 마음, 지성, 자아, 다섯 원소들, 세상 등 이 모든 셀 수 없는 이름들과 형태들은 오로지 의식일 뿐입니다. 사람과 그의 삶과 일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정적인 모습과 동적인 모습도 그렇습니다. 지바와 마음 등은 의식 안에 있는 모든 진동들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 의식은 "나는 잘릴 수 없다, 나는 태워질 수 없다, 나는 젖을 수 없다, 나는 건조될 수 없다. 나는 영원하며, 모든 곳에 있으며, 변함이 없고, 움직임이 없다."라는 것을 알면서,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고 혼란시키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오, 라마여! 우리는 혼란 너머에 있습니다. 무지하고 미혹된 사람들은 변화 없는 것 안에서 변화를 상상합니다. 하지만 참나 지식을 지닌 현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의식 속에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 라마여! 의식만이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공간으로서 퍼져 있습니다. 그 후에, 의식은 움직임의 성질을 지닌 바람으로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 의식은 불로, 물로, 광물성을 가진 흙으로, 살아 있는 존재의 몸으로 나타납니다.
외적 대상에 대한 개념을 없애면, 참나 지식이 일어납니다. 의식 안에 활동이 없고 무지가 있을 때, 깊은 잠의 상태가 옵니다. 그러므로 의식만이 늘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공간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세상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열이 불에, 흰색이 조개껍질에, 움직이지 않음이 산에, 유동성이 물에, 달콤함이 사탕수수에, 버터가 우유에, 차가움이 얼음에, 밝음이 조명에, 기름이 겨자씨에, 흐름이 강에, 단 것이 꿀에, 장신구가 금에, 향기가 꽃에 있는 것처럼, 우주는 의식에 있습니다. 의식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합니다. 세상은 의식의 몸입니다. 어떤 분리도, 어떤 차이도, 어떤 구별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는 실재한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실재하는 이유는, 우주 자신의 실재인 의식이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이유는, 의식과 별개로는 우주가 우주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의식은 나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분이나 가지가 없습니다. 의식 안에서 산, 바다, 땅, 강 등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의식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따라서 의식 안에는 부분들도 가지들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주 등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의 원인인 의식 역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말은 의미 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경험에 반대되는 것이며, 의식의 존재는 부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삼일째 저녁이 되었고, 모임은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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