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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자기 노력-요가 바시슈타

by Yuneelif 2018. 4. 8.

바시슈타가 계속하였다.

라마여! 파도들이 일든 일지 않든 물은 물로 있는 것처럼, 해방된 현자의 겉모습이 어떠하든 그의 지혜는 변치 않습니다. 무지한 관찰자의 눈에만 차이가 보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 라마여!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십시오. 이 가르침은 무지의 어둠을 반드시 없앨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은 자기 노력에 의한 것입니다. 실패가 있는 곳은 노력 속에 태만이 있음을 묘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합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허구이며, 보이지 않습니다.

라마여! 자기 노력은 경전에 조예 깊은 성스러운 이의 가르침을 따르는 심적, 언어적, 신체적 행위입니다. 인드라가 하늘의 왕이 된 것, 브람마가 창조주가 된 것, 다른 신들이 그들의 영역을 얻은 것도 오직 그런 노력에 의해서입니다.

자기 노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즉, 과거에 있었던 탄생들의 것과 이번 탄생의 것입니다. 후자는 전자를 효과적으로 거슬러 중화시킵니다. 운명이란 바로 과거의 탄생들에서 한 자기 노력입니다. 지금의 환생 속에서는 이 둘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이 있고, 강한 쪽이 승리힙니다.

경전과 일치하지 않는 자기 노력은 미혹으로 인해 생기게 됩니다. 자기 노력의 결실에 방해가 있을 때는 미혹된 행위가 있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그럴 경우 즉시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현재의 바른 행동보다 더 강한 힘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악물고 자기 노력에 의지해야 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지금의 노력으로 운명을 이겨야 합니다.

게으른 자는 당나귀보다 나쁩니다. 나태함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매 순간 생명이 쇠해 가는 것을 보면서 해방만을 얻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고름 속에 빠진 벌레처럼 감각적 쾌락이라는 타락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운명이 이것을 하라고 지시한다."라고 말하는 이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행운의 여신은 그를 버립니다. 그러므로 자기 노력에 의해 지혜를 얻고, 진리의 직접적 깨달음 속에서 자기 노력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태함이라 불리는 이 무서운 악의 원천이 세상에 없다면, 누가 무지하며 가난에 허덕이겠습니까? 비탄과 가난에 시달리며 동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이 세상에 나태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발미끼가 말하였다. 이때 저녁 기도를 위한 시간이 되어 그날의 모임을 끝냈다.

바시슈타는 이튿날의 가르침을 시작했다.

오, 라마여! 노력이 있으면 결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노력의 의미이며, 그것은 운명(신)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통으로 상처 입을 때 '아, 비극이다!", "아, 내 운명을 보라!"고 울부짖는데, 이 둘은 같은 의미입니다. 운명이나 신의 의지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행위나 자기 노력일 뿐입니다. 현재는 과거보다 훨씬 힘이 있습니다. 과거에 했던 노력의 결실(이것을 그들은 신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에 만족하여, 자기 노력을 하지 않는 자는 실로 어리석습니다.

운명(또는 신의 의지)이 현재의 자기 노력을 때로 방해한다고 생각한다면, 현재의 자기 노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하고 지혜롭지 않은 이들은 강하고 힘 있는 적을 만났을 때 그것을 신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노력 없이도 큰 이익을 얻는 일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왕이 후계자 없이 갑자기 죽었을 때, 나라를 상징하는 코끼리가 고대 관습에 따라 탁발승을 통치자로 고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사건도 아니고 신이 행한 행위도 아니며, 탁발승이 과거의 생애에 행했던 자기 노력의 결실일 뿐입니다.

때로 폭풍 때문에 농부의 노력이 헛될 수도 있습니다. 폭풍의 힘이 농부의 노력보다 강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지금보다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는 불가피한 손실 때문에 비탄에 젖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슬픔이 옳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는 왜 매일 울지 않습니까? 물론, 현명한 이는 자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얻을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외적 힘으로 돌리고, "신이 나를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낸다."거나 "외적 힘이 나를 이것이나 저것을 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지한 일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는 피해야 합니다.

신 의지의 다른 이름은 자기 노력뿐이라는 것을 알고, 좋고 싫은 것에서 벗어나야 하며, 올바른 자기 노력을 하고, 지고의 진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운명론자를 비웃습니다. 경전들의 가르침과 성자들의 행위에 노출된 가슴으로부터 나타난 바른 이해에서 일어난 것만이 자기 노력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오, 라마여! 이곳에 다시 태어나지 않도록 질병 없는 신체와 근심 없는 마음으로 참나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기 노력은 세 개의 뿌리가 있고, 그에 따른 세 개의 열맬을 지닙니다. 지성에서의 내적 일깨움, 마음의 결심, 신체 행위가 그것입니다.

자기 노력은 경전들에 대한 지식, 스승의 가르침, 스스로의 노력이라는 이 세 가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운명(혹은 신의 섭리)은 여기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바라는 이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불순한 마음을 순수한 노력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경전이 말하는 정수입니다. 영원한 선함으로 가는 길을 꾸준히 가라고 성스러운 이들은 강조합니다. 노력의 결실은 자기 노력의 강도에 비례합니다. 운명이나 신도 그것을 다르게 정할 수 없다는 것을 현명한 구도자는 압니다. 실로 그런 자기 노력만이 이곳에서 얻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불행할 때, 그를 위로하려고 사람들은 그것이 운명이라고 합니다. 여행을 하여 외국으로 가고, 음식을 먹어 배고픔을 해소합니다. 그것은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명합니다. 누구도 그런 운명이나 신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하거나 악한 행위가 어떻게 선하거나 악한 결과에 이르는지 모든 이가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경전들에 대한 지적 탐구, 신성한 이들과의 교제 그리고 바른 자기 노력으로 어린시절부터 진정으로 선한 것(구원)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운명이나 신의 섭리는 진리라고 되풀이하여 말함으로써 진리로 간주되는 관습에 불과합니다. 신이나 운명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진정한 주관자라면 목욕, 말하기, 자선 같은 행위가 무슨 의미이며, 도대체 누구를 가르쳐야 합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시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런 활동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누구도 운명이나 신의 섭리를 안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자기 만족을 위해 "운명이나 신의 섭리 때문에 할 수 없이 이것을 한다."와 같은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점성학자가 어떤 젊은이에게 위대한 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하여 그가 공부도 하지 않고 학자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신의 섭리라는 것을 믿습니까? 라마여! 여기 현자 비슈바미뜨라는 자기 노력으로 브람마 리쉬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자기 노력에 의해 참나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운명론을 버리고 자기 노력에 전념하십시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당신은 진정으로 진리를 아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신, 운명 즉 다이밤으로 부르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말해 주십시오.

바시슈타가 대답하였다.

과거 행위에 의한 좋고 나쁜 결과를 겪는 자기 노력의 결실을 사람들은 운명 혹은 다이밤이라고 합니다. 또 사람들은 결과의 좋고 나쁜 특성을 운명이나 다이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식물은 이 씨에서 자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이밤의 작용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나는 운명은 자기 자신의 행위의 완성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잠재된 수많은 경향성들이 있고, 이러한 경향성들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다양한 행위들을 만듭니다. 분명히,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러한 경향성들과 정확히 일치하며, 그렇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행위의 과정입니다. 즉 행위는 잠재된 경향성들에서 가장 강한 경향성과 다르지 않고, 이러한 경향성들은 마음과 다르지 않으며, 사람은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음, 잠재된 경향성, 행위, 운명 같은 범주들이 실재인지 비실재인지 상징적으로 암시해 주었습니다.

라마가 다시 물었다.

고귀한 스승이시여! 전생에서 온 잠재된 경향성들이 현세에서 제게 어떤 행위를 강요한다면, 행동의 자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말하였다.

라마여! 전생에서 온 경향성들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입니다. 순수한 경향성은 해방으로 인도하나, 불순한 경향성은 문제를 가져옵니다. 그대는 정말이지 의식이며, 둔한 물질이 아닙니다. 자신 외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행위를 강요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유롭게, 불순한 것에 우선하여 잠재된 순수한 경향성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격렬한 반발이 일지 않도록 불순한 경향성을 점차 버리고, 마음을 그것에서 조금씩 돌아서게 합니다. 선한 경향성이 반복적으로 행해지도록 북돋음으로써 그것을 강화하십시오. 불순한 경향성은 쓰지 않음으로 약화될 것입니다. 그대는 선한 경향성의 표현 및 선한 행위에 젖을 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경향성들의 힘을 이겨 냈을 때, 다음에는 선한 경향성조차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 좋은 경향성에서 나오는 지성으로 지고의 진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사람들이 운명, 다이밤, 니야띠라 부르며 그리고 모든 노력이 적절한 결실로서 축복을 받도록 보증하는 우주 질서는, 모든 곳에 있으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아는 존재(브람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노력으로 감각들과 마음을 조절하고, 마음을 집중하여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고요히 경청하십시오.

이 이야기가 다루는 것은 해방입니다. 여기 모인 다른 지혜로운 구도자들과 함께 그것을 경청함으로, 그대는 슬픔이나 파괴 없는 저 지고한 존재를 깨달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앞 세대에 창조자 브람마가 내게 드러낸 것입니다.

라마여! 전지전능한 자 혹은 우주적 존재는 모든 존재 속에서 영원히 빛납니다. 바다의 표면이 동요할 때 파도들이 일어나는 것처럼, 우주적 존재 안에서 진동이 일어날 때 비슈누 신이 태어납니다. 그 비슈누로부터 창조주 브람마가 태어났습니다. 브람마는 우주 안에 무수히 다양한 생물과 무생물, 감각이 있거나 없는 존재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우주의 분해 전에 우주는 그것 그대로 있었습니다.

창조주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이 병과 죽음, 아픔과 고통을 겪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가슴에 연민이 생겨 살아 있는 존재들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길을 놓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과 금욕, 순결, 진실, 올바른 행위와 같은 숭고한 덕목들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것들은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위안만 되었을 뿐, 슬픔으로부터의 궁극적 자유는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숙고한 후, 창조자는 나를 존재케 했습니다. 그는 나를 그에게로 끌어당겨 내 가슴 위로 무지의 장막을 쳤습니다. 즉시 나는 내 정체와 자기 본성을 망각했습니다. 나는 비참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며 창조주인 브람마에게 이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비탄에 빠져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며, 나태와 게으름 속에 있었습니다.

간청에 대한 응답으로, 나의 아버지는 참된 지식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참된 지식은 나를 둘러싸고 있던 무지의 장막을 즉시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 창조주가 내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큰 기쁨을 가지게끔 나는 지식을 가렸다가 다시 보여 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너는 무지한 존재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라마여! 이 지식을 가진 채 나는 지금 여기에 있으며, 창조의 끝까지 여기에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시대를 막론하고 창조주는 모든 이에게 영적 깨달음을 주고자 나를 포함해 여러 현지들의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창조주 브람마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세속적인 의무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할 목적으로 지상의 모든 영역을 공정하고 현명하게 다스리는 왕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들은 곧 권력과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이해관계들을 둘러싼 갈등이 전쟁을 유발시켰으며, 이는 후회를 낳았습니다. 그들의 무지를 없애려고 현자들은 영적 지혜를 전해주곤 했습니다. 옛날에는 왕들이 이 지혜를 받아 소중히 여겼으므로 그것은 라자 비디야 즉 왕의 학문으로 알려졌습니다.

오, 라마여! 순수한 식별에서 나온 초연의 최고 모습은 그대의 가슴 안에서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환경적 요인이나 극도의 혐오에서 비롯된 초연보다 우월합니다. 그런 초연은 확실히 신의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가슴 안에 초연이 생겨나는 순간, 이 은총은 식별이라는 완숙함과 만납니다.

최고의 지혜가 가슴 안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삶과 죽음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청하건데 마음을 집중하여 내가 말하는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 지혜는 무지라는 숲을 없애ㅃ니다. 무지의 숲에 들어선 자는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과 혼돈을 겪습니다. 따라서 깨달은 스승에게 다가가 공손한 자세로 올바른 질문을 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그때 그 가르침은 그 사람의 존재의 절대 필요한 부분이 됩니다. 반면 어리석은 자는 불손한 자세로 불경한 질문을 합니다. 더 큰 잘못을 범하는 자는 현자들의 지혜를 무시해 버리는 자입니다. 물론 현자는 어리석은 자가 제기한 공허한 물음에는 답하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그대는 어떤 구도자들보다 훌륭합니다. 그것은 그대가 진리를 충분히 고찰했고 최고의 초연으로 고취되었기 때문입니다. 확신하건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가슴속에 굳건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마음이란 원숭이처럼 쉽게 동요하므로 인간은 진실로 지혜가 가슴속에 자리 잡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명치 못한 자들과의 만남은 피해야 합니다.

라마여! 자유(목샤)의 영역으로 가는 입구에는 네 문지기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자기 조절, 탐구심, 만족, 좋은 만남입니다. 현명한 구도자는 이 네 가지, 아니면 최소한 그들 하나와만이라도 우정을 부지런히 길러 나가야 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오, 라마여! 의심의 베일과 마음의 불안 없이 순수한 가슴과 수용적인 마음으로 해방의 본질과 수단에 대한 설명을 들어 보십시오. 왜냐하면 지고의 존재를 깨달을 때까지 삶과 죽음이라는 두려운 고통은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삶이라는 무서운 뱀을 지금 여기서 정복하지 않는다면, 그 뱀은 현세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수많은 삶에서 끝없는 고통을 만들 것입니다. 이 고통은 무시할 수 없지만, 내가 전하는 지혜에 의해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 라마여! 반복되는 삶(삼사라)의 슬픔을 극복한다면, 그대는 여기 이 세상에서 브람마나 비슈누 같은 신으로 살 것입니다. 환영이 사라지고 자기 본성의 탐구에 의해 진리를 깨달았을 때, 마음에 평화가 식들고 가슴이 지고의 진리로 도약하며, 마음의 모든 혼동된 생각의 물결들이 가라앉고, 중단 없는 평화가 흐르고, 가슴이 궁극의 희열로 충만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가슴속에서 깨달을 때, 바로 이 세상이 희열의 거주지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얻을 것도 피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삶의 결점들로 더렵혀지지 않고, 삶의 슬픔에 닿지 않습니다. 보는 사람 눈에는 그가 왔다가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종교적 의무조차도 불필요해집니다. 그는 힘을 잃은 과거의 경향성들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불안을 버리고, 그는 본성인 희열에 듭니다. 그와 같은 희열은 다른 수단이 아닌 참나 지식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를 참나 지식에 전념하게 해야 합니다. 오직 이것만이 자신이 해야 할 의무입니다.

성스러운 경전들과 성스러운 사람을 경시하는 자는 참나 지식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 어리석음은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모든 질병보다 더 해롭습니다. 그러므로 참나 지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이 경전에 충실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 경전을 가진 자는 맹목적인 무지의 우물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 라마여! 자신을 삼사라(반복적인 삶)의 슬픔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다면, 나와 같이 현자들이 주는 유익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삼사라(반복적인 삶)라고 하는 이 무서운 바다를 건너려면, 영원하며 변치 않는 것에 의지해야 합니다. 오, 라마여! 마음이 영원 속에 안주하여, 그래서 완전히 스스로 조절되고 평화롭다면, 그만이 사람들 중에서 최고의 사람입니다. 그는 쾌락과 고통이 서로를 좇고 소멸시킨다는 것을 알며, 그런 지혜 속에 자기 제어와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는 불타는 집에서 잠자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이 영원한 지혜를 얻는 사람은 삼사라에서 자유로울 것이며, 무지 속으로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불변의 진리는 없을 수도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설사 그런 진리가 없다 해도,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해를 입지는 않습니다. 영원을 추구하는 것은 삶의 변화들에서 오는 고통을 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아는 것으로 자유로워집니다.

영원은 의식과 의례를 통해서도, 성지 순례를 통해서도, 부를 통해서도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정복과 지혜의 배양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 악마, 반신반인, 인간 등의 모든 존재는 걷든지, 넘어지든지, 앉아 있든지 간에 지혜의 결실인 마음의 정복과 자기 조절을 항상 추구해야 합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순수하며, 잔잔하고, 미혹이나 환영에서 자유롭고, 얽힘이 없고, 갈망에서 자유로우면, 그것은 어떤 것도 갈망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 조절 즉 마음의 정복이며, 앞서 말했던 자유로 가는 네 문지기 중의 하나입니다.

선하고 상서로운 것은 자기 조절에서 나옵니다. 자기 조절은 모든 악을 몰아냅니다. 이 세상과 천국에서 얻는 어떤 이득이나 즐거움도 자기 조절의 기쁨에 비할 수 없습니다. 자기 조절을 경험하는 기쁨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습니다. 모든 존재가 자연스럽게 그를 신뢰합니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악마나 악귀까지도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자기 조절은 모든 육체적, 정신적 질병에 대한 최고의 치료제입니다. 자기 조절이 있을 때 먹는 음식은 더 맛있고, 그렇지 않을 때는 쓴맛이 납니다. 슬픔은 자기 조절이라는 갑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듣고, 만지고, 보고, 냄새 맡고, 맛볼 때도 들뜨거나 의시소침하지 않는다면, 자기 조절이 된 것입니다. 즐거움과 고통의 감정을 조절하고 모든 존재를 동등한 시각에서 본다면, 자기 조절이 된 것입니다. 모든 것 사이에서 살지만 그것들에 영향 받지 않고 잠잘 때조차 우쭐대거나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조절이 된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탐구(해방으로 가는 두 번째 문지기)는 경전들에 대한 철저한 공부를 통해 정화된 지성으로 행해야 하며, 이 탐구는 도중에 중단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한 탐구로 지성은 예리해지며, 지고의 것을 깨우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탐구만이 삼사라라는 질병에 대한 최고의 치료법입니다.

현자들은 힘, 지성, 능력과 때에 맞는 행동 등을 탐구의 결실로 여깁니다. 실로 궁극의 해방뿐만 아니라 왕국, 번영, 즐거움 등도 그 같은 과정의 결실입니다. 탐구 정신은 생각하지 않는 바보에게 떨어지는 재난으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탐구를 하지 않아 마음이 둔해지면 선선한 달빛조차 치명적인 무기로 변하며, 어리석은 상상은 어둠 속에서 악귀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탐구하지 않는 바보는 진실로 슬픔의 저장고입니다. 탐구하지 않으면, 자신과 남에게 해를 주는 행위들과 수많은 심신의 병들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 없는 자와의 만남을 피해야 합니다.

탐구 정신이 늘 깨어 있는 자는 세상을 밝히고, 접촉하는 모든 것을 깨우치게 하며, 무지한 마음이 만들어 낸 환영들을 없애며, 감각적 쾌락과 그 대상의 거짓됨을 압니다. 오, 라마여! 탐구의 빛 안에는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실재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고함입니다. 그것을 지니면 다른 것을 얻으려고 열망하지 않고, 어떤 것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는 망상과 집착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즉 그는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며, 행위에 몰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살며 활동하지만 자연스럽게 수명이 다하면, 완전한 자유가 주는 희열의 상태에 이릅니다.

영적 탐구라는 눈은 활동 중에도 통찰력을 잃지 않습니다. 이런 눈을 갖지 못한 자는 실로 가엾습니다. 이런 눈이 없는 자보다는 진흙 속의 개구리, 오물 속의 벌레, 굴 속의 뱀으로 태어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탐구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인가? 삼사라(반복되는 삶)라는 이 불행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고 묻는 것이 진정한 탐구입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그 같은 탐구에서 생깁니다. 그런 지식으로 내적 평온이 옵니다. 그때 이해와 모든 슬픔의 끝을 넘는 지고의 평화가 일어납니다.

(비차라 즉 탐구는 추리도 분석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 안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이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만족은 해방으로 안내하는 또 다른 문지기입니다. 만족의 감로를 마신 자는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갈망을 맛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즐거움도 모든 죄를 없애는 만족만큼 달콤한 것은 없습니다.

무엇이 만족인가요? 구하지 않아서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모든 갈망을 버리는 것이며, 구하지 않아도 오는 것에 만족하는 것, 그런 일로 인해 우쭐해지지도 기가 꺾이지도 않는 것, 이것이 만족입니다. 자신에 만족하지 않는 한, 슬픔을 당할 것입니다. 만족이 생기면서, 가슴의 순수함이 피어납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만족하는 이는 온 세상을 가진 것입니다.

삿상(현명하고 신성하며 깨달은 이들과의 만남)은 해방으로 가는 또 다른 문지기입니다. 삿상은 자신의 지성을 키우고, 무지와 심리적 고통을 없앱니다. 아무리 비용이 들고 어렵고 많은 장애들이 있더라도, 삿상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삿상만이 삶의 행로를 비추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삿상은 자선, 금욕, 순례 등과 같은 모든 종교적 수행이나 종교 의식을 행하는 것보다 진정 위에 있습니다.

힘이 닿는 한 반드시 성스러운 이를 숭상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깨닫고 가슴속에 있는 무지의 어둠을 걷어 낸 이들입니다. 그런 성스러운 이를 무례히 대하는 자는 분명 커다란 고통을 초래합니다.

만족, 삿상(현자와의 만남), 탐구 정신, 자기 조절, 이 네 가지는 삼사라의 바다에 빠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입니다. 만족은 최상의 얻음입니다. 삿상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가장 훌륭한 동반자입니다. 탐구 정신은 가장 위대한 지혜입니다. 자기 조절은 최상의 행복입니다. 네 가지 모두에 의존할 수 없다면, 한 가지라도 하십시오. 이들 중 하나를 열심히 한다면, 나머지 세 가지도 그대 안에서 찾아질 것입니다. 최고의 지혜가 스스로 그대를 찾을 것입니다. 이 고귀한 자질들로써 마음이라는 야생 코끼리를 길들이기 전에는 지고함을 향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대가 신, 반신반인,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오, 라마여! 그러니 이 고귀한 자질들을 연마하도록 반드시 노력하십시오.

바시슈타는 말하였다.

지금껏 열거한 자질을 갖춘 사람은 이제 내가 말할 내용을 들을 자격이 된 것입니다. 오, 라마여! 그대야말로 그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해방을 향한 준비가 된 자만이 이것을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빛이 잠자는 사람의 눈도 비추듯이, 이 경전은 자유를 원치 않더라도 사람을 해방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닏아. '밧줄은 밧줄이다.'라는 진리가 보일 때, 밧줄을 뱀이라 오해한 것에서 생긴 공포가 사라지듯이, 이 경전에의 공부는 삼사라에서 비롯된 슬픔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합니다.

이 경전은 32,000게의 2행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이라기야 쁘라까라남(초연에 관한 장)이라는 제1부는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삶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전합니다. 그것을 자세히 공부하면 가슴이 정화됩니다. 이 장은 1,500개의 2행구로 되어 있습니다.

무묵슈 비야바하라 쁘라까라남(구도자의 행동에 관한 장)이라는 제2부는 1,000개의 2행구로 되어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구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7,000개의 2행구로 이루어진 제3부 우뜨빳띠 쁘라까라남(창조에 관한 장)이 있습니다. 이 안에는 많은 고무적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이것'과 '나'라는 거짓 개념의 작용으로 인해, 사실 창조되지도 않은 우주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위대한 진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어서 스티띠 쁘라까라남(존재에 관한 장)이 나오는데, 그것은 3,000개의 2행구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도움으로 세상의 존재와 그 근원에 관한 진리를 말합니다.

5,000개의 2행구로 이루어진 우빠샨띠 쁘라까라남(소멸에 관한 장)이 그 뒤에 옵니다. 이것을 들음으로 무지는 흔적만 남게 되고, 세상에 대한 허구적인 지각이 끝납니다.

끝으로, 니르바나 쁘라까라남(해방에 관한 장)의 2행구는 14,500개에 달합니다. 이것의 공부와 이해는 근원적 무지를 없앱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만과 환영이 정지될 때, 절대적 자유가 있습니다. 그는 신체적 몸은 가지지만 몸이 없는 듯 살며, 모든 갈망과 욕구, 집착과 혐오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는 삼사라(반복되는 역사)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에게는 이기심이라는 악마가 없습니다. 그는 완전함을 진니 사람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이 경전 지식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진리의 깨달음이라는 결실을 곧 얻습니다. 천한 사람이 말할지라도, 진리의 설명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신의 계시라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거부해야 합니다. 지혜의 말일 때는 어린 소년의 말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짓의 말일 때는 창조자 브람마의 말일지라도 지푸라기인 양 버려야 합니다.

이 경전의 설명을 듣고 반추하는 사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 굳은 확신과 영의 평온한 서늘함을 즐깁니다. 곧 그는 그의 영광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해방된 현자가 됩니다.

무한한 시야를 지닌 현자는 분리 없는 하나의 지성으로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우주들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마야의 마법인 우주의 환영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원자 속에서 무한을 보므로, 그는 창조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데 초연합니다. 그래서 구하지 않아도(거부하지 않아도) 오는 것에 대해 늘 만족하며, 자신에게서 사라지는 것을 쫓아가지도 않고, 그로 인해 비통해 하지도 않습니다.

이 경전은 수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충분히 꾸며졌기에 이해가 쉽습니다. 이 경전을 공부하고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금욕, 명상, 만뜨라를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전의 공부로 얻은 해방보다 더 위대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경전을 공부하고 가르침을 이해한 사람은 세상의 모습에 더 이상 미혹되지 않습니다. 저쪽에 있는 독사가 실물처럼 보이는 그림이라는 것을 알면, 더 이상 그것이 두럽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습이 단지 모습으로만 보일 때, 그것은 우쭐함도 슬픔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 경전이 존재함에도, 사람들이 커다란 슬픔으로 이어지는 감각적 쾌락을 좇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된 일입니다.

오, 라마여! 직접 경험하지 못한 진리를 설명하고자 할 때, 예를 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납득하지 못합니다. 분명한 목표와 제한된 의도로 이 경전은 그런 예들을 이용했습니다. 그것들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그 의미를 본래의 의도 이상으로 확대 해석해도 안 됩니다. 이렇게 경전을 공부할 때, 세상은 꿈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것들이 정말이지 예들의 목표이자 의도입니다. 이 경전의 예들이 왜곡된 지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 잘못 해석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비유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즉, 듣는 이가 진리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비유는 가공일 수 있지만, 진리에의 깨달음이 극히 중요하므로 적당한 방법의 사용은 정당화됩니다. 비유는 설명된 진리에만 부분적으로 적용되므로 그 부분만 이해하고 나머지는 무시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는 예시와 유능한 스승의 도움으로 경전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공부는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지 않은 상태로는 공부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전에 대한 미미한 지식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가슴속에 있는 지고한 평화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상상적 요소를 실재로 가정하는 것, 이 둘은 불완전한 지식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왜곡된 논리를 낳습니다.

바다가 모든 파도들의 근본이 되듯이, 직접적인 경험만이 모든 증명의 기본을 이룹니다. 직접적 경험이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직접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근본은 스스로 경험자, 경험 행위, 경험이 되는 '경험하는 지성'입니다. 경험하는 것만이 오직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 경험이 주체(경험자)를 가진 듯합니다. 탐구 정신에서 태어난 지혜는 몰이해를 없애 버리며, 나뉘지 않은 지성은 자신의 빛 속에서 빛납니다. 그 단계에서는 탐구의 정신조차 필요 없게 되어 스스로 사라져 버립니다.

움직임이 공기 중에 내재하듯이, 미묘하게 지각하는 마음과 마음이 감지하는 거친 대상들로서의 이 현상은 이 경험하는 지성 속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지로 인해 지각하는 마음은 "나는 이러이러한 대상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그 대상이 됩니다. 대상은 다른 곳이 아닌 주체 안에서만 경험됩니다.

오, 라마여! 이 지혜가 그대 안에서 직접 일어날 때까지, 위대한 스승들이 전하는 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 위대한 스승들로부터 그 지혜를 받을 때, 그대의 행동은 스승들의 행동을 반영할 것입니다. 그대가 고귀한 자질 속에서 성장할 때, 지혜가 그대 안에서 펼쳐질 것입니다. 성스런 이들이 하는 숭고한 행동의 본뜸과 지혜는 서로를 성장시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