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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아할야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8.

태양은 계속 말했습니다.

신이시여! 마음만이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마음만이 지고의 인간입니다. 마음이 행하는 것은 행위이며, 몸이 행하는 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마음의 힘을 보십시오. 단호하게 생각함으로써 성자의 아들들은 이 우주의 창조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나는 하잘 것 없는 몸이다.'라고 생각하면, 사람은 사멸하는 존재가 됩니다. 자신의 의식이 밖으로 향하는 이는 고통과 쾌락을 겪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의식이 내면으로 향해진 요기는 고통과 쾌락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신께 들려줄 전설이 있습니다.

마가다라는 나라에 인드라듐나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아할야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곳에 인드라라는 품행이 단정치 못한 잘생긴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강연 중에 왕비는 천국의 왕 인드라가 이름난 아할야를 유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녀는 청년 인드라에 대한 대단한 사랑을 품게 되었습니다.

인드라를 향한 사랑으로 아할야는 정신이 혼란해졌습니다. 한 시녀의 도움으로 그 젊은이를 자신에게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이들은 비밀의 집에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할야는 그를 너무나 좋아하여, 모든 곳에서 그가 보였습니다. 그를 생각만 해도 그녀의 표정은 빛났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커지면서 사람들이 그들의 관계를 알게 되었으며 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분노한 왕은 그들의 관계를 끊어 버리려고 수많은 방법으로 그들을 벌주었습니다. 그들을 얼음같이 차가운 물 속에 집어넣기도 했고, 끓는 기름에다 튀기기도 하였습니다. 코끼리 다리에다 묶어 놓기도 하였고, 죽도록 매로 때리기도 하였습니다. 인드라는 웃으며 왕에게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내게 있어 전 우주는 나의 사랑하는 이일 뿐입니다. 그것은 아할야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왕이시여! 나는 오직 마음일 뿐입니다. 마음이 개인입니다. 당신은 몸에 벌을 줄 수 있지만 마음에는 벌줄 수 없습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어떤 것에 완전히 적셔져 있으면, 몸에 일어난 그 무엇도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조그만 짐승들이 뿔이 굳게 서 있는 산을 움직이게 할 수 없듯이, 은혜와 저주조차도 마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몸이 마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몸을 만듭니다. 마음만이 몸의 씨앗입니다. 나무가 죽어도 씨앗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씨앗이 죽으면 나무는 그것과 함께 죽습니다. 몸이 죽으면 마음은 혼자 힘으로 다른 몸들을 만듭니다.

태양은 계속 말했습니다.

신이시여! 그래서 왕은 현자 바라타를 찾아가서, 고집 센 이 남녀에게 저주로써 벌을 주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현자는 그들에게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자와 왕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둘 모두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저주함으로써 당신은 고행으로 얻은 공덕을 헛되이 써 버렸습니다. 당신의 저주는 확실히 우리의 몸을 없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 인해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다른 이들의 마음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자의 저주는 그들의 몸을 죽였습니다. 몸을 떠나자, 그들은 동물로, 다음에는 새들로서 함께 태어났습니다. 다음에는 성스러운 집안에서 부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서로를 향한 완전한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남편과 아내로서 함께 태어났습니다. 이 부부의 뛰어난 사랑과 헌신은 숲 속의 나무들까지 감화시켰습니다.

현자의 저주조차 그 남녀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었습니다. 신이시여! 그처럼 당신도 성자의 아들 열 명이 하는 창조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창조를 한다 해서 당신이 잃을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마음이 만든 창조물들과 그들이 함께 있도록 두십시오. 수정에 반사된 모습을 없앨 수 없듯이, 당신은 그것을 없앨 수 없습니다.

신이시여! 당신의 의식 속에서 원하는 대로 세상을 창조하십시오. 사실, 무한한 의식, 자기 자신의 의식인 마음, 무한한 공간, 이 모두는 무한한 이식이 퍼트린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그 젊은이들이 창조한 것에 상관없이 당신은 원하는 만큼 많은 세상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브람마가 바시슈타에게 말했습니다.

태양의 조언을 듣고, 즉시 나는 내 존재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서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나는 태양에게 이 일에서 나의 처음 상대가 되어 달라고 청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 젊은이들의 창조물에서는 태양이 되었고, 나의 창조물에서는 인류의 선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잘 행했다. 내 의도대로, 그는 세상의 창조물들을 가져왔다. 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존재가 되고, 확립되며, 결실까지 낳는다! 마음의 힘은 그러한 것이다. 성자의 아들들이 그들의 마음의 힘으로 세상의 창조자의 위치를 얻은 것처럼, 나도 창조자가 되었다. 어떤 것들을 이곳에 나타나게 한 것은 마음이다. 마음은 몸 등의 외적인 모습을 만든다. 그 밖의 것은 몸을 알지 못한다.

창조자 브람마가 말했습니다.

향신료에 가지각색의 맛이 나듯이, 이 개체적 의식인 마음에는 여러 잠재력이 있다. 의식 그 자체는 미묘하고 영묘한 몸으로서 나타나지만, 거칠어지면 그것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몸이 된다. 잠재력들이 극도로 미묘한 상태에 있을 때, 그 개체적 의식을 지바나 개체적 영혼이라 한다. 지바의 모든 속임이 끝나면, 그것은 지고의 존재로서 빛난다. 이 우주 속에는 나도 없고 어느 느구도 없다. 모든 것은 무한한 의식일 뿐이다. 그 젊은이들의 의도가 표현되었듯이, 이 모든 것은 무한한 의식에 기초한 외적인 모습이다. 젊은이들의 의도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창조자라고 느끼게 했듯이, 나 또한 그렇다.

순수한 무한한 의식만이 자신을 지바라고,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그 자신을 몸이라고 믿는다. 이 굼 같은 환영이 연장되면, 이 긴 꿈은 실재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실재이기도 하고 실재가 아니기도 하다. 그것은 지각되기 때문에 실재처럼 보이지만, 내재적인 모순 때문에 실재가 아니다. 마음은 의식에 기초하기 때문에 지각력이 있다. 의식에서 떨어진 어떤 것으로 보일 때, 마음은 둔하며 미혹된다. 지각이 있을 때, 마음은 지각의 대상이라는 역할을 맡는다. 팔찌가 금인 것이 사실이지만 팔찌만 보이는 것과 같이, 그것이 그렇게 지각될 깨조차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브람만만이 이 모든 것이기에, 움직이지 않는 둔한 것마저도 순수 의식이다. 그러나 나로부터 저 바위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둔하다고도 지각력이 있다고도 할 수 없는 형용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 유사성이 있을 때만 지각이 가능하다. 정의하기 어려운 것과 존재가 확실하지 않은 것에 있어서, '둔한'과 '지각력이 있는'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는 말에 불과하다. 마음 안에서 주체는 지각력이 있고 대상은 둔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바는 현혹된 채 배회한다. 진실로 이런 이원성은 마음이 창조한 것이며 환영이다. 물론 그런 환영이 존재하는지 확실히 결론을 지을 수는 없다. 무한한 의식만이 진정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환영의 분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때, 거짓 자아가 일어난다. 그러나 마음이 그것 자신의 본성을 탐구할 때 이런 분리는 사라진다. 하나의 무한한 의식에 대한 깨달음이 있으면, 커다란 희열을 얻는다.

바시슈타는 브람마에게 물었습니다.

신이시여! 현자의 저주가 인드라의 몸에만 영향을 주고 마음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몸이 마음과 다르지 않다면, 그럼 그 저주는 마음에도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어떻게 마음이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아니면 마음이 영향을 받았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창조자 브람마가 대답했습니다.

친애하는 이여! 브람마에서 언덕에 이르기까지, 형체가 부여된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두 개의 몸을 가지고 있다. 이들 가운데 첫째는 쉬지 않고 빠르게 행동하는 마음의 몸이다. 둘때는 살로 만들어진 몸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물론 저주, 은혜, 마력은 후자를 압도한다. 몸은 연꽃잎 위에 있는 물방울처럼 어리석고 무력하며 덧없는 것이다. 그것은 운명, 숙명, 다른 요인들과 같은 것들에 전적으로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마음은 의존적인 듯 보이지만 독립적이다. 마음이 확실히 자기 노력에 임할 때, 그것은 슬픔의 범위를 넘어선다. 마음이 노력할 때, 언제나 그것은 노력의 결실을 틀림없이 발견한다.

육체적 몸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반면에, 마음의 몸은 결과를 얻는다. 마음이 언제나 순수한 것에 머물 때, 마음은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몸은 불이나 수렁에 빠질 수 있지만, 마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을 경험한다. 이것은 인드라에 의해 증명되었다. 이것은 현자 디르가따빠에 의해서도 증명되었다. 그는 종교적 의식을 하고 싶었다. 종교적 의식을 위한 물질을 모으다가 막힌 우물에 빠졌다. 그래서 그는 의식을 위한 물질을 모으다가 막힌 우물에 빠졌다. 그래서 그는 의식을 마음으로 치렀다. 그렇게 하여도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의식을 치른 결말을 얻었다. 성자의 열 명의 아들들 또한 마음의 노력으로 브람마의 신분에 이를 수 있었다. 나조차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저주와 '사악한 눈'은 물론이고 정신적, 육체적 질병이 참나에 헌신하고 있는 마음에 닿는 것보다는 연꽃이 바위에 떨어져 바위를 둘로 쪼개는 것이 더 쉽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지고는 마음이 순수한 길을 가도록 하고, 참나를 가지고는 참나가 순수의 길을 가도록 애써야 한다. 마음이 생각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즉시 이루어진다. 환영을 실재라고 지각하는 시각을 치유하기 위해, 집중적인 명상을 함으로써 마음은 내부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마음이 하는 것을 실제로 경험한다. 마음은 달빛 속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타는 듯한 더위를 경험하게도 한다! 이런 것이 신비한 마음의 힘이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옛날에 창조자 브람마는 이렇게 나를 가르쳤습니다. 나는 그것을 그대에게 전했습니다.

이렇게 구분이 없는 상태에 있는 절대적 브람만이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이 자진해서 응축되면, 우주적 마음이 탄생합니다. 그 마음 안에 극히 미묘한 상태에 있는 여러 원소들의 존재에 대한 의도가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의 총체가 창조자 브람마로 알려져 있는 우주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자는 다름이 아닌 우주적 마음입니다.

창조자 브람마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나 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의식의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우주에서의 구별의 원리인 무지를 존재시키고자 한 이는 창조자 브람마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참나를 참나 아닌 것과 혼동합니다. 또 무지의 이 요인과 더불어 창조자는 산, 풀잎, 물 등의 이 우주를 다양한 창조물 중의 하나로 나타나게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비록 전 우주가 다름 아닌 무한한 의식이지만, 분자와 미립자로부터 태어난 창조물들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파도들이 바다에 나타나듯이, 이 우주 안의 모든 대상과 물체는 절대자 브람만에서 나타났습니다. 이 창조되지 않는 우주에서, 창조자 브람마의 마음은 스스로를 자아라고 지각합니다. 그래서 우주적 마음인 브람마가 우주의 창조자 브람마가 된 것입니다. 우주적 마음의 힘만이 우주에서 다양한 힘들로 나타납니다. 무수한 다양한 창조물들이 우주적 마음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을 다양한 지바라 합니다.

겉으로는 원소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지바들이 의식의 무한한 공간 속에서 일어나 각각의 몸으로 들어갈 때, 의식은 생명력의 틈으로 들어 갑니다. 그래서 움직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기도 하는 모든 몸들의 씨앗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개체로서의 탄생이 일어나고, 각 개체적 존재들은 우연하게, 마치 까마귀가 나뭇가지에 내려앉자 야자열매가 떨어지듯이, 원인과 결과 등의 법칙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진화 속에서 오르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오로지 욕망입니다.

라마여! 그러한 것이 세상의 나타남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숲입니다. 탐구라는 도끼로 그 뿌리를 자르는 자는 그것에서 자유롭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곧 이해하고, 어떤 이들은 오랜 시간 후에 이것을 이해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라마여! 이제 창조의 순환이 시작되어 분리가 일어날 때 생긴 존재들의 최고, 최악 그리고 중간의 구분들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창조물 중 처음이며 최고의 것들은 고귀한 습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천성적으로 선하며 선한 행동에 헌신합니다. 그들은 몇 번의 삶 후에 해방에 이릅니다. 그들은 순수함과 빛(사뜨바)의 자질로 가득합니다. 다음에는 불순함으로 가득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속에는 세상의 습관이 강하게 물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수천 번의 탄생 후에 해방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들은 선한 자들 중에서는 가장 적습니다. 그들 중에 이 세상 순환에서 해방 그 자체가 의심스러운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짙은 암흑의 존재들입니다.

중간 유형은 역동성과 욕망(라자스)으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해방에 가까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은 그곳에 이릅니다. 그들에게는 라자스와 사뜨바가 섞여 있게 됩니다. 그러나 라자스적(격렬한 욕망)인 경향이 너무나 강하여 그것을 순화시키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게 되면, 그들은 순수한 라자스입니다. 하지만 라자스적 경향이 너무 강하면, 그것은 어두움(따마스)의 경향을 띱니다. 해방이 너무나 멀리 있어서 해방이 의심스러운 이들의 경우에는, 라자스의 자질은 가장 짙은 어둠의 경향을 띱니다.

수천 번의 탄생을 거듭한 뒤에도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있는 이들은 어두움의 존재(따마스)라고 합니다. 그들이 해방에 이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해방이 가까이 있으면, 그때 그들의 따마스는 라자스와 섞입니다. 그들이 해방으로 가까이 가는 중에 있다면, 그때 그들의 따마스는 라자스와 섞입니다. 수백번의 탄생을 거듭한 후에도 다시 수백 번의 탄생을 거쳐야 할 만큼 해방이 멀리 있을 때, 이들은 따마스로 가득합니다. 해방이 의심스러우면, 그들은 짗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이 장은 사뜨바, 라자스, 따마스는 원래 해방에 있어서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하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과 행위로 더한 변형을 가져올 때 해방은 멀어진다. ㅡS.V.)

파도들이 바다 표면에 일어나듯이, 절대적 브람만의 군형에 가벼운 동요라도 있게 되면, 이 모든 존재들이 그 안에서 생겨납니다. 항아리 안의 공간, 방 안의 공간, 조그만 구멍 속의 공간이 하나의 우주적 공간의 모든 필수적인 부분들이듯이, 이 모든 것은 부분들이 없는 하나의 무한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일어나듯이, 그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됩니다. 이와 같이 무한한 브람만의 의지에 의하여 이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일어나 그 안으로 소멸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꽃과 향기가 동시에 있듯이, 행위와 행위자는 동시에 지고의 존재 안에 자연스럽게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한 자들의 눈에는 지바의 창조가 사실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무지한 자들의 눈만이 하늘에서 푸름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은 이들에게는 '지바가 브람만에게서 태어났다.'와 '지바는 브람만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라는 이 두 표현 모두 무의미합니다.

단지 가르침을 위하여, 이원적인 것이 일시적으로 수용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바가 브람만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가정한 후에, 결과가 원인과 다르지 않기에 스승들은 지바가 브람만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향기가 꽃에서 나오듯이, 이 모든 것은 브람만에게서 태어난 듯이 보입니다. 한 계적이 다른 계절로 들어가듯이, 이 모든 것은 브람만 안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우주 안에 나타난 모든 종의 존재들은 그것들의 천성적 습성들과 더불어 태어납니다. 자신의 본성 즉 참나에 대한 무지 때문에 다음 생에서 반작용을 일으키는 행동이나 행위를 하게 됩니다.

라마가 말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진실로 마음이 채색되지 않은 현자들의 말씀이 경전이 됩니다. 그리고 가슴이 순수하고 분리 없는 시각을 지닌 이들이 현자로 여겨집니다. 미성숙한 이들은 경전과 깨달은 이의 본성에 대한 지식의 도움으로만 진리의 빛을 보기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이 세상에서 우리는 씨앗이 나무에서 나고, 나무가 씨앗에서 자라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이전의 까르마의 씨앗이 없이도, 다양한 존재들이 절대적 브람만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합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주의해서 본다면, 마음이 행위에 연루되었을 때만 행위가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행위의 씨앗입니다. 그처럼 우주적 마음이 절대적 브람만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순간, 다양한 존재들의 본성적 경향과 그들의 행위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몸을 가진 존재들이 지바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행위와 마음 간에는 구분이 없습니다. 그것이 행위로서 투사되기 전에, 그것은 마음을 그것의 '몸'으로 하여 마음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행위는 다름이 아니라 의식 안에 있는 에너지의 움직임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것 자신의 결실을 낳습니다. 이런 행위가 끝나면, 마음도 끝납니다. 마음이 존재하기를 멈추면, 행위는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해방된 현자들에게만 해당되며 다른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마음은 오직 지각일 뿐이며, 지각은 의식 속의 움직임입니다. 이 움직임의 표현이 행위이고, 결실은 이것을 따라옵니다. 마음은 전능하고 무한한 의식 안에 일어난 의지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실재와 비실재 사이에 있지만, 이해의 방향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한한 의식과 다르지 않지만, 마음은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것은 자신이 행위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마음입니다. 이런 자질들은 마음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처럼 지바와 마음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행위 기관들은 마음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물질화시키려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행위입니다. 그러나 마음, 지성, 자아, 개체화된 의식, 행위, 상상, 탄생과 죽음, 잡재적 경향성, 지식, 노력, 기억, 감각, 본성, 마야 즉 환영, 활동, 이런 모든 말은 단어에 불과하며, 그에 맞는 실체가 없습니다. 유일한 실재는 무한한 의식일 뿐이며, 그 안에 이런 개념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무한한 의식이 참나를 잊고 그 자신을 지각의 대상으로 볼 때, 야자열매를 떨어뜨린 까마귀처럼 우연의 일치로 이 개념들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무지에 가려진 의식이 들뜬 상태에서 다양성을 보고, 대상들을 그렇게 바라볼 때, 그것을 마음이라 합니다. 어떤 지각에 대한 신념이 확고할 때, 그것을 지성이라 합니다. 무지하고 어리석게도 그것이 자신을 분리된 개체적 존재와 동일시할 때, 이것을 자아라고 합니다. 그것이 계속적인 탐구를 그만두고, 자신을 끊임없이 오가는 생각과 함께 놀게 할 때, 이것을 개체화된 의식 즉 마음이라 합니다.

의식 안에서의 순수한 움직임은 독립된 행위자가 없는 까르마인데 비해, 그것이 행위의 결실을 추구할 때 그것을 까르마라 합니다. 그것이 본 적이 있거나 없는 어느 것과의 관계에서 '나는 전에 이것을 본 적이 있다.'라는 개념을 가질 때, 그것을 기억이라 합니다. 과거의 즐거움의 효과가 효과 그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의식의 영역에 계속 남아 있을 때, 그것을 잠재적 경향성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분별의 시각은 무지의 산물이라는 진리를 의식할 때, 그것을 지식이라 합니다. 반면에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여 더욱더 참나를 망각하게 되고 거짓된 상상에 더욱 깊이 관여할 때, 그것을 불순함이라 합니다. 그것이 감각들을 지닌 내재하는 자를 가질 때, 그것을 감각(인드리야)이라 합니다. 그것이 우주적 존재 안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을 때, 그것을본성이라 합니다. 그것이 실재와 모습 사이에서 혼돈을 일으킬 때, 그것을 마야(환영)라 합니다. 그것이 '나는 속박되어 있다.'라고 생각할 때 속박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는 자유다.'라고 생각할 때 자유가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마음에 있는 확고한 신념으로 의식의 빛이 가려질 때, 그 가려진 의식의 빛이 바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인간, 신, 악마, 반신반인, 천사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다양한 행위의 형태뿐만 아니라, 도시, 마을 등과 같은 형태로 퍼져 나갑니다. 그런 것이 진리인데, 이 모든 외적 모습을 살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펴봐야 할 적당한 것은 마음뿐입니다.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면, 모든 창조물과 모습들은 마음이 창조한 것으로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의식만이 마음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으로 있습니다. 깊이 관찰할 때 마음은 그것 자신의 바탕으로 흡수됩니다. 그렇게 흡수되면 지고의 희열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분해되면 해방이 있습니다. 더 이상의 탄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탄생하고 죽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마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라마가 다시 물었다.

신이시여!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순수하고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까? 실재와 비실재가 섞여 있는 마음이 어떻게 의식 속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말했다.

라마여! 공간에는 분리되지 않은 의식의 무한한 공간, 분리된 의식이 유한한 공간, 물질적 세상이 존재하는 물질적 공간이라는 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분리되지 않은 의식의 무한한 공간(찌뜨 아까샤)은 실재인 것과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의 순수한 목격자로서, 모든 것의 안과 밖에 존재합니다. 나누어진 의식의 유한한 공간(찌따 아까샤)은 시간의 구분을 만들며, 모든 존재에 스며들어 있으며, 모든 존재의 안녕에 관심을 가집니다. 물리적 공간은 공기 등과 같은 여러 원소들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뒤의 둘은 첫 번째의 것 즉 분리되지 않은 의식의 무한한 공간과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다른 것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의식을 이 세 가지로 나누는 것은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는 동안만 임의적으로 제안한 것입니다. 깨달은 자는 오로지 한 가지 실재인 무한한 의식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라마여! 그 읫기이 '나는 지혜롭다.'나 '나는 둔하다.'라고 분명히 생각할 때, 그것이 마음입니다. 이 거짓 개념으로부터 모든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요소들이 상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