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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4부 존재에 관하여

by Yuneelif 2018. 4. 8.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오, 라마여! 세상 창조의 진정한 내용을 설명한 후, 이 세상 모습의 유지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세상의 모습에 대한 미혹이 지속되는 한, 지각의 대상으로서 이 세상은 존재합니다. 사실, 그것은 꿈에서 보는 광경만큼 실재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어떤 도구도 없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아닌 무에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습은 백일몽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실재합니다. 그것은 무지개의 빛처럼 공간 위의 그림입니다. 그것은 넓게 흩부려진 안개와 같습니다. 그대가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것을 둔한 물질이나 공 혹은 원자들의 집합체로 취급합니다.

라마가 물었다.

이 우주는 궁극의 실재 안에서 씨앗의 상태로 존재하다가 다음 시대에 다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존재하면, 이런 관점을 가진 이들은 깨닫거나 혹은 무지한 것으로서 간주돼야 합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우주의 소멸 이후 이 우주가 씨앗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우주의 실재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 라마여! 이것은 순진한 무지입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둘 다를 현혹시키는 완전히 빗나간 견해입니다. 식물의 씨앗은 미래의 나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씨앗과 싹이 둘 다 감각과 마음으로 이해될 수 있는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각각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그것이 어떻게 세상을 위한 씨앗이 될 수 있겠습니까? 공간보다 더 미묘한 그곳에서, 어떻게 우주의 씨앗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그렇다고 했을 때, 어떻게 궁극의 존재로부터 우주가 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어떤 것이 무(無) 속에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그것 안에 우주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항아리 안의 빈 공간으로부터 나무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두 개의 상반되는 것들인 브람만과 우주가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어두움이 태양 안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나무가 씨앗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이것 둘 다가 적절한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형상이 없는 것인 브람만 안에서, 이 우주적 세상의 형상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절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브람만과 세상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진리는 오직 브람만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세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오직 브람만일 뿐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라마여! 우주의 소멸 동안 절대적인 브람만 안에서 우주가 씨앗 상태로 있다면, 소멸 후에 우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협조적인 원인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주가 그러한 협조적인 원인이 없이 나타났다고 추정하는 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에게 딸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원인을 지고의 존재의 바로 본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본성은 소멸 후의 기간 동안에도 그렇게 존재하기를 계속합니다. 사람들은 그것 속에서 이 창조를 봅니다. 지고의 존재와 우주 간에는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습니다.

수백만의 우주들은 무한한 의식(찌뜨 아까샤)안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지붕에 있는 구멍을 통하여 방 안으로 흘러드는 빛 줄기 속의 미세한 먼지와 같습니다. 하지만 미세한 먼지가 외부의 햇빛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세상은 비이원적인 지고의 의식 안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그 사람 자체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이 우주도 무한한 의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주 소멸의 끝에, 단지 기억에 지나지 않는 우주의 창조자가 일어났습니다. 그 기억으로부터 일어난 생각들이 이 세상을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림 속의 떡보다 더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의 세상의 순환에 있었던 신들(창조자 브람마 등)은 확실히 해방을 얻었기에, 기억에서 생각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무런 타당한 근거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해야 할 아무런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기억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전의 경험이든 아니든 간에 의식에서 일어난 그 기억이 세상으로서 나타납니다. 무한한 의식 안에서 자연적으로 세상이 나타나는 것을 자발적인 창조라 합니다. 이 세상의 모습은 우주적 인간으로 알려져 있는 에테르의 모습을 취하였습니다.

하나의 작은 원자 안에 공간, 시간, 행위, 물질, 낮과 밤 같이 모든 구성 요소들을 지닌 삼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대리석 속에 조각되지 않은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은 팔다리를 지닌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무한하게 계속되듯이, 그것 속에 그와 같은 세상의 모습들이 있는 다른 원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깨달은 자나 무지한 자 둘 다의 눈에 비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깨달은 자에게 이것은 언제나 브람만이고, 무지한 자에게는 이것잉 언제나 세상입니다! 전적인 공(空) 속에서, 그대는 '거리'로 여겨지는 것이 보입니다. 무한한 의식 속에서, 그대는 '창조'라고 여겨지는 것을 봅니다. 창조란 본질적인 실재와 연결이 없는 그냥 단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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