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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슈끄라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8.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오, 라마여! 세상의 모습이라는 이 험난한 바다를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감각들을 성공적으로 제어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노력도 소용이 없습니다. 경전들에 대한 공부와 현자들과 사귐으로써 얻어지는 지혜를 갖추고, 자신의 감각들이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을 때, 그는 지각하는 모든 대상이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라마여! 마음만이 이 모든 것입니다. 그것이 치유될 때, 세상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 마술 또한 치유됩니다. 마음의 생각하는 능력에 의해서만 이 마음은 몸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마음이 기능하지 않는 곳에 몸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상들의 지각이라고 알려져 있는 심리적 마음을 다루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치료들 중에서 최고입니다. 마음은 미혹을 만들고, 마음은 탠생과 죽음이라는 생각을 만듭니다. 그 자신의 생각의 직접적인 결과로, 그것은 속박되기도 하고 해방되기도 합니다.

라마가 물었다.

오, 성스러운 현자시여! 어떻게 이 거대한 우주가 마음 안에 존재하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오, 라마여! 그것은 브람마나 소년들에 의하여 창조된 우주들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라바나 왕에 의해 고통을 받았던 환영들과 같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할 이야기는 현자 슈끄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 현자 브리구는 산봉우리에서 심한 고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슈쓰라는 그 당시에 젊은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움직이지 않고 앉아 명상하는 동안, 그 젊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돌보았습니다. 어느 날, 이 젊은이는 한 아름다운 요정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그녀에 대한 욕망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녀 역시 환한 젊은 슈끄라를 보았을 때 마음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요정에 대한 욕구로 강렬하게 압도단한 슈끄라는 눈을 감고 마음으로 그녀를 뒤쫓았습니다. 그는 천국에 도달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찬란한 천상의 존재들, 신들과 그들의 배우자들, 천상의 코끼리들과 말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이 우주를 다스리는 여러 신들과 더불어 창조자 브람마를 보았습니다. 그는 완전한 존재(싯다)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천상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는 천국에 있는 천상의 정원들로 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요정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위엄 있게 앉아 있는 천국의 왕 인드라를 보았습니다. 그는 인드라에게 절했습니다. 인드라도 그의 왕좌에서 일어나 젊은 현자 슈끄라에게 인사를 하면서 오랫동안 천국에 머무르라고 청했습니다. 슈끄라도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바시슈타가 계속하였다.

슈끄라는 예전의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잊었습니다. 인드라의 궁전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낸 후에, 슈끄라는 천국을 떠돌았습니다. 곧 그가 보았던 요정이 있는 곧을 발견하였습니다. 소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천국의 특징이므로, 그들은 서로를 보자 서로에 대한 욕망으로 압도 당했습니다.

슈끄라는 그가 요정을 만났던 그 쾌락의 정원이 밤의 어둠으로 둘러싸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둡게 되었습니다. 슈끄라는 그때 그 정원에 있는 아름다운 휴식처로 들어갔습니다. 요정도 뒤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간청하기를, "위대한 분이시여! 나는 당신에 대한 욕망으로 괴롭습니다. 오직 우둔한 사람이 사랑을 비웃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삼계의 지배권조차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기쁨에 견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당신의 가슴속에 저의 안식처를 주십시오." 하고 말하며, 그의 가슴 위로 무너졌습니다.

슈끄라는 천국에서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면서 그 요정과 함께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여덟 세상의 순환 동안 요정과 함께 살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의 공덕이 소멸되어 버리자, 슈끄라는 그 요정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들의 미묘한 육체가 지구상에 떨어졌을 때, 그들은 이슬방울이 되어 곡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신성한 브람마나가 그 곡물을 먹었습니다. 그로부터 그의 아내는 그들의 정수를 받았습니다. 슈끄라는 그들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그 요정은 암사슴이 되었고, 슈끄라는 그녀를 통해 인간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는 이 아들에게 대단히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에 의해 생겨난 근심과 갈망이 슈끄라를 나이 들게 했고, 그는 기쁨을 바라며 죽었습니다.

이 때문에 슈끄라는 다음 생애에서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행과 신성한 삶을 갈망하며 죽었습니다. 다음 생애에서 그는 신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몸에서 또 다른 몸을 거치면서 온갖 종류의 운명을 견딘 후에, 슈끄라는 강둑 위에 확고히 앉아 강한 고행을 행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 앞에 앉아 명상하면서, 슈끄라는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그 동안에 쉬지 않는 마음은 계속적인 수명, 탄생과 죽음, 천국으로의 상승과 땅으로의 하강 그리고 은둔자의 평화로운 삶의 인생들을 창조했습니다. 이것들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는 그것들을 진실로 간주했습니다. 몸은 여러 험난한 날씨들 때문에 살갗과 뼈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보기만 해도 두려울 만큼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그 몸이 깊은 명상에 몰두하고 있는 현자 브리구 앞에 똑바로 서 있었고 슈끄라 자신도 요가 수행을 통하여 정신적인 힘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육식 동물에게 먹히지는 않았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천상의 백 년 동안을 명상한 후에 현자 브리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앞에 있는 아들 슈끄라를 보지 못하고, 바싹 말라 버린 육체를 보았습니다. 눈구멍 속에서 빠른 속도로 번식하는 벌레들의 서식처가 된 그 육체는 보기만 해도 소름끼쳐 보였습니다. 그가 보았던 것에 깊이 유감으로 여기고 사건들의 자연적 진행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브리구는 노여움에 차서 자신의 아들의 이른 죽음을 일으킨 것에 대하여 시간을 저주하기로 했습니다.

시간 또는 죽음은 육제척인 모습으로 현자에게 즉시 다가왔습니다. 시간은 한 손에 검을, 다른 손에 올가미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꿰꿇을 수 없는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섯 개의 팔과 여섯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무리의 하인들과 사신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과 손에 들고 있는 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괴의 불꽃으로 빛났습니다.

고요하며 단호한 목소리로 시간은 브리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당신 같은 지혜로운 현자가 그와 같은 무가치한 행동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혜로운 이들은 기분이 상했을 때도 흥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당신을 화나게 만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마음의 균형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숭배할 만한 사람이고, 나는 행동의 적절한 방식을 엄격히 지키는 이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동기도 없이 당신에게 절합니다.

저주하려고 쓸데없이 힘을 드러냄으로써 당신의 공덕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우주를 용해시키는 불마저도 내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시오! 나는 우주 소멸의 불에도 영향을 받지 않음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저주로써 나를 파괴하기를 바라다니 얼마나 유치한 일입니까!

나는 시간입니다. 나는 수많은 존재들, 아니 이 우주를 지배하는 신들조차도 파괴하였습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나는 먹는 자이며, 당신은 우리의 음식입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자연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상호 관계들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불은 위쪽을 향하여 타오르며, 물은 당연히 아래로 흐릅니다. 음식은 자신을 소비시킬 자를 찾고, 창조된 대상들은 자신들의 종말을 좇습니다. 이것이 신에 의해 정해져 온 방식입니다. 모두의 자신 안에 참나가 그 자신으로서 거주합니다. 정화된 눈에게는 행위자도 없고 즐기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분을 보는, 정화되지 않은 눈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정말이지 진리를 아는 자이며, 여기에는 행위한다는 것도 행위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음을 당신은 압니다. 창조물들은 나무의 꽃처럼 오고 가며 그것들의 원인을 가린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시간으로 귀착됩니다. 이것은 실재 혹은 비실재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호수의 표면이 출렁일 때 달으 그림자도 출렁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실이며 동시에 거짓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습니다.

시간은 계속 말했습니다.

분노를 일으키지 마십시오. 오, 현자시여! 그것은 확실히 재앙으로 가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되어야 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십시오. 우리는 공허한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본래의 타고난 경향성들을 이루려 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정말이지 현명한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현명한 이들이 여기서 행해야 하는 것을, 마치 깊은 잠 속에서처럼 자아 없고 이기적이지 않은 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겨지도록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지혜, 위대함, 도덕적 용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 현자시여! 희열로 가는 길을 알면서도 왜 당신은 바보처럼 행동합니까? 당신은 무르익은 과일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 채, 당신은 왜 나를 저주하려 합니까?

당신은 누구나 신체적인 몸과 마음의 몸이라는 두 개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체적인 몸은 생명이 없으며 그것 자신의 멸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마음은 유한하며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당신 속에서 혼란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진흙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마음은 몸을 자신의 장단에 맞춰 춤추게 하면서 마음속에서 계속적인 변화들을 오게 합니다. 마음의 행위들만이 행위입니다. 마음이 만들어 낸 생각들이 굴레의 원인이며, 마음의 순수한 상태가 해방입니다. 팔다리들이 있는 몸을 만드는 것은 마음입니다. 므암은 지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들입니다. 이 모든 끝없는 다양성은 단지 마음입니다. 결정하는 기능을 하는 마음을 지성이라 하며, 동일시하는 기능의 마을을 자아라 합니다. 육체적인 몸은 오직 물질적인 물체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마음이 진리를 향한다면, 마음은 몸과 동일시하는 것을 포기하고 지고의 존재를 성취합니다.

오, 현자시여! 당신이 명상에 몰두해 있는 동안, 당신의 아들은 그의 공상 속에서 아주 멀리 가 버렷습니다. 그는 '브리구의 아들'이었던 몸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 버렷습니다. 하늘에서 그는 천상의 요정과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그가 지녔던 공덕이 그런 쾌락에 의해 없어지자, 그는 요정과 함께 잘 익은 과일처럼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하늘의 몸은 하늘에 남겨두어야 햇습니다. 그는 땅에 덜어져 육체적인 몸으로 태어낫습니다. 이곳 땅 위에서 그는 연속되는 탄생들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브람마나 소년, 왕, 어부, 백조, 다시 왕, 정신적 힘들을 지닌 요기, 천상의 반신반인, 현자의 아들, 다시 왕, 그리고 다시 현자의 아들이 되었고, 사악한 행동 때문에 그는 사냥꾼, 왕, 그러고 나서 벌레들과 식물들, 당나귀, 대나무, 중국에서 사슴, 뱀, 새 그리고 다시 한 번 반신반인,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 그는 바수데바라는 브람마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경전들에 정통하며, 지금은 신성한 사망가 강둑에서 고행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시간(야마)의 말에 용기를 얻은 현자 브리구는 아들의 삶을 지켜보려고 지혜의 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즉시 그는 자신의 지성 속에서 아들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 전부를 보았습니다. 자신이 본 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며, 그는 자신의 몸 속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아들에 대한 집착들을 완전히 없앤 브리구가 말했습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정말이지 과거, 현재, 미래를 알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거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실재가 실재처럼 보이는 이 세상의 모습은 지혜를 지닌 대단한 이조차 미혹시킵니다. 확실히 이 모든 것은 당신 안에 있으며, 오직 당신만이 마음의 상상들이 만들어 낸 이 환영의 참된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아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죽었다고 여김으로써 나는 동요하였습니다. 나는 아들이 때가 오기도 전에 내게서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시여! 우리는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과정을 알기는 하지만, 우리가 행운과 불행으로 여기는 것으로 인해 기쁨과 슬픔으로 움직입니다.

이 세상에서 분노는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해서는 안 될 것을 분노하게 하지만, 고요는 해야 할 것을 하게 합니다. 세상의 모습에 대한 미혹이 존재하는 한, 적절한 행동과 그렇지 못한 행동 사이의 구별은 타당합니다. 이곳에 있는 존재들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가져오는 자연적인 작용 때문에 동요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나는 다시 나의 아들을 보았고, 마음만이 몸일 뿐이며 이 세상에 대한 비전을 그려 내는 것도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말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좋은 말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마음이 몸입니다. 마치 도공이 항아리를 만들 듯이, 단지 생각들만으로 몸을 만드는 것도 마음입니다. 마음은 새로운 몸을 만들고,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원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됩니다.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미혹이나 환영, 꿈, 비합리적인 생각의 기능들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바로 그처럼 마음은 그 스스로의 안에 몸의 형상을 만듭니다. 하지만 둔한 육체적 비전을 지닌 무지한 자는 육체적인 몸을 마음과 독립적인 것으로 봅니다.

깨어 있음, 꿈, 깊은 잠이라는 세 가지 세상이란 단지 마음의 기능들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이 표현은 실재도 아니며 비실재도 아니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양성으로 지각에 의하여 조건 지어진 마음이 무엇을 볼 때, 마음은 다양성을 봅니다.

시간이 계속했습니다.

마음은 '나는 약하다, 불행하다, 어리석다' 등과 같은 수많은 개념들을 가짐으로써 이 세상의 모습에 휘말립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마음의 거짓된 창조물이며, '나는 내가 존재하는 것(I am that I am)'이라는 이해가 일어날 때, 그때서야 지고의 평화가 자신의 의식 안에 일어납니다.

마음은 그 안에 무한히 다양한 파도들을 지닌 광대한 바다와 같습니다. 그 위에서 크기가 다른 잔물결들이 일어나고 떨어집니다. 작은 파도는 자신이 작다고 생각합니다. 큰 파도는 자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바람 때문에 부서진 파도는 자신이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파도는 춥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파도는 따뜻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모든 파도들이 단지 바다의 물일 뿐입니다. 바다 안에 파도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이지 진리입니다. 오직 바다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파도들이 있다는 것 또한 진실입니다!

그와 같이, 절대적인 브람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브람만은 전능하기 때문에, 그것의 무한한 능력들의 자연스러운 표현은 이 우주 안에 무한한 다양함으로 나타납니다. 다양함은 자기 자신의 상상 안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실재적 존재를 가지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정말이지 절대적인 브람만이다.'라는 것이 이 진리 안에 확고합니다. 다른 모든 개념을 포기하십시오. 파도들 등이 바다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이 모든 사물은 브람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씨앗 속에 풍성한 나무가 잠재적으로 숨겨져 있듯이, 브람만 속에 온 우주가 영원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 색깔의 무지개가 햇빛에 의해 만들어지듯이, 이 모든 다양성이 하나 안에서 보입니다. 둔한 거미줄이 살아 있는 거미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이 둔한 세상은 무한한 의식에서 나왔습니다.

누에가 고치를 짜서 스스로를 감듯이, 무한한 존재는 이 우주를 공상하고는 그 속에 갇힙니다. 코끼리가 묶여 있던 기둥에서 애쓰지 않고 풀려 나듯이, 참나는 자신의 속박으로부터 그 스스로를 해방시킵니다. 왜냐하면 참나는 참나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에게는 속박도 해방도 없습니다. 나는 속박과 해방의 이러한 개념들이 어떻게 존재 속으로 들어왔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속박이나 해방은 없으며,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보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일시적인 것에 의해 가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대단한 경이 또는 커다란 환영입니다.

이 마음이 무한한 의식 안에서 나타나는 순간, 다양성의 개념들 또한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개념들은 무한한 의식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 때문에 이 우주 안에 다양한 신들과 수많은 창조물의 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것은 수명이 길고 어떤 것은 짧고,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행복하고 어떤 것은 불행합니다. 이 모든 살아 있는 실체들은 단지 무한한 의식 속의 개념들에 불과합니다. 어떤 것은 스스로를 무지하고 구속되었다고 여기고, 다른 것들은 무지로부터 자유로우며 해방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계속 말하였습니다.

오, 현자시여! 신들과 악마들, 그리고 인간들은 브람만이라고 알려져 있는 의식의 이 우주적 바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리이며, 다른 모든 주장들은 거짓입니다. 그들은(신들 등) 잘못된 개념들 즉 '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와 같은 말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불순과 몰락의 감정을 자신 위에 덮습니다. 그런 그들조차도 의식이라는 이 우주적 바다 안에 늘 거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브람만과 분리되었다고 생각하고는, 그들은 미혹됩니다. 언제나 순수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 위에 불순물을 덧씌웁니다. 이것이 행복, 불행, 무지와 깨달음 등과 같은 모든 그들의 행위들과 그 결과들의 씨앗입니다.

이러한 존재들 중 어떤 것들은 쉬바와 비슈누 같이 순수하고, 어떤 것들은 사람과 신들처럼 약간 오염되었고, 어떤 것들은 나무와 관목들처럼 짗은 미혹에 빠져 있고, 어떤 것들은 벌레들처럼 무지에 의해 눈멀게 되었고, 어떤 것들은 지혜와는 멀리 떨어져서 방황하고, 어떤 것들은 브람마, 비슈누 그리고 쉬바와 같이 깨달음과 해방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이와 같이 무지와 미혹의 수레바퀴 속에서 돌고는 있지만, 지고의 진리와 관련된 지혜에 발을 들여놓을 때 그는 즉시 구원됩니다.

이들 중 미혹 속에 굳게 뿌리내린 나무와 같은 자들과 미혹을 완전히 제거한 자들은 경전들의 연구에 골몰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전들은 악의 본성을 따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깨어나 악의 표현이 그친 이들과, 지성이 자연적으로 그런 경전이 주는 가르침을 찾는 사람들에게 지침을 주기 위해 깨달은 이들이 만든 것입니다.

오, 현자시여! 이 세상에서 즐거움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존재들이 지닌 육체적인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사실 육체적인 몸은 다름이 아니라 마음의 상상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육체적인 몸은 마음과 독립되어 있는 실체가 아닙니다. 당신의 아들은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의도하였던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이 없습니다. 이 세상 여기의 모든 존재들은 그들 자신이 지닌 잠재성과 경향성이라는 창고에서 나온 그런 행동들만을 합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그러한 행동들에 책임이 있지 않습니다. 초인간적인 존재나 신들까지도.

자, 천국의 즐거움을 잠시 감상한 후에, 당신의 아들이 고행에 전념하는 곳으로 가 봅시다.

(이와 같이 말하고서, 시간 야마는 브리구를 붙잡고 멀리 데려갔다. 현자 바시슈타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팔 일째 날이 저물었고, 모인 사람들은 흩어졌다.)

바시슈타가 계속 말하였다.

오, 라마여! 현자 브리구와 시간을 지배하는 신은 사망가 강둑을 향해 갔습니다. 그들이 만다라 산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그들은 완벽하고 깨달은 현자들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숲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발정기에 있는 힘센 코끼리들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완벽한 현자들도 보았는데, 그들에게 천상의 요정들은 장난스럽게 꽃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숲을 거닐고 있는 깨달음을 얻은 불교 수도승들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마을과 도시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평야를 따라 내려갔습니다. 곧 그들은 사망사 강둑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현자 브리구는 그의 아들을 보았습니다. 비록 그가 우주 안에 살고 있는 존재들의 운명을 충분히 비추고 있을지라도, 그는 이전과 다른 몸과 평화로운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깨달음의 평온 속에 있었습니다. 이 빛나는 젊은이는 생각들과 반대 생각들의 유희가 멈춘 마음의 완전한 정지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엿습니다. 그는 주위에 있는 것을 반사하는 것조차도 관심이 없는 수정처럼 절대적으로 순수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것은 얻어야 한다.'나 '이것은 피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시간은 이 젊은이를 가리키며 브리구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슈끄라는 "일어나라."는 말을 들었고 조용히 눈을 떴습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빛나는 존재들을 보고, 그는 그들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는 그들을 바위 위에 앉게 햇습니다. 그는 부드럽고 감미롭게 말햇습니다. "신성한 분들이시여! 나는 질실로 두 분 모두를 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내 앞에 있는 당신의 현존으로, 경전을 연구하거나 고행이나 지혜나 지식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은 마음이 주는 미혹들이 없어졌습니다. 감로가 쏟아지는 것이라도 신성한 분둘을 대하는 것만큼의 행복은 주지 못합니다. 두 분의 발이 밟은 땅 조차도 성스럽습니다."

현자 브리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에 대해 회상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시 슈끄라는 자신의 예전 존재를 기억하게 되엇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그는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슈끄라가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수많은 고통과 기쁨의 경험들, 지혜와 미혹을 경험하는 수많은 몸들을 통과하였습니다. 나는 잔인한 왕, 탐욕스런 상인, 떠돌아다니는 고행자였습니다. 내가 즐기지 않은 쾌락이 없으며, 나는 모든 행위들을 했으며, 모든 불행과 행복을 겪어 보았습니다. 지금 나는 바라는 것이 없으며, 피하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대로 둘 뿐입니다. 아버지, 예전의 저의 육체가 말라 있는 장소로 함께 갔으면 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곧 그들은 브리구의 아들인 슈끄라의 몸이 있던 장소에 도착했는데, 그 몸은 부패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슈끄라는 통곡했습니다. "아! 천상의 요정들에 의해서 숭배 받고 사랑을 받았던 이 몸을 보라. 그것은 이제 벌레와 해충들의 서식처가 되었다. 향으로 발라지던 몸이 지금은 먼지로 덮여 있다. 아, 몸이여! 너는 지금 시체라고 불리고, 너는 나를 정말 두렵게 하는구나. 맹수들조차 너의 끔찍스러운 모습을 두려워한다. 감각들이 전혀 없는 이 몸은 개념과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마음이라는 악귀에서 자유로워진 채, 그것은 자연적인 재난들마저도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상태로 있다. 마음이라는 쉬지 않는 원숭이의 장난을 없앤다면, 이 몸이라는 나무는 뿌리째 뽑혀 쓰러진다. 내가 이 깊은 숲 속에서, 슬픔에서 해방된 이 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행운이다."

라마가 물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슈끄라는 수많은 몸들을 경험했음에도 왜 브리구에게서 태어난 몸의 운명을 슬퍼합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라마여! 모든 다른 몸들은 이 원래의 몸이었던, 현자 브리구의 아들 슈끄라가 가졌던 몸의 환영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소멸의 끝에 창조가 있은 후 곧, 무한한 의식의 의지 때문에 음식이 되어 현자 브리구의 몸에 들어갔던 지바 즉 살아 있는 영혼은 나중에 슈끄라가 되어 태어났습니다. 이 영혼이 브람마나 소년의 탄생에 적합한 모든 의식들과 제식들을 누렸던 것은 바로 그 몸 속에서였습니다.

지금은 바수데바인 슈끄라는 왜 그 몸에 대해 슬퍼햇습니까? 현명하든 무지하든 몸이 지속되는 한, 몸의 기능들은 그것의 본성에 따라 변함이 없이 움직입니다. 몸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집착한 채로 아니면 집착하지 않은 채로 세상에서 적절하게 기능을 합니다. 집착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그들의 마음의 경향성들에 있습니다. 현자들의 경우에는 해방되어 있으며, 무지한 자들의 경우에는 구속되어 있습니다. 몸이 있는 한, 고통은 고통스럽고 기쁨은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둘 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이들은 사실은 깨달았음에도 불수하고 무지한 사람처럼 기쁨 속에서는 즐기고 고통 속에서는 고통스러워하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감각 기관들은 자유롭게 두고 행위 기관들은 억제하고 있는 이는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감각 기관들은 억제되어 있지만 행위 기관들이 자유로운 이는 굴레 속에 있습니다. 현자들은 외적으로는 사회의 규범을 지키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동조의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오, 라마여! 모든 열망과 갈망을 포기하고, 그대가 늘 순수한 무한한 의식임을 깨닫고,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을 행하십시오.

바시슈타가 계속 말했다.

젊은 고행자인 바수데바가 그의 이전의 몸의 운명에 대해 슬퍼하는 것을 듣고서, 시간(혹은 죽음)이 끼어들어 슈끄라에게 말했습니다.

시간(혹은 죽음)이 말했습니다.

오, 브리구의 아들이여! 왕이 자신의 왕국으로 다시 들어가듯이, 그대의 이 몸을 버리고 그대의 다른 몸으로 다시 들어가십시오. 슈끄라의 그 다른 몸을 가지고, 다시 고행에 전념하여 악마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십시오. 한 시대의 막바지에 그대는 그 몸을 버리고는 다시는 몸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시간은 바로 그 장소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후 곧 슈끄라는 사망가 강둑에서 맹렬히 고행했던 바수데바의 몸을 버렷습니다. 그리고는 현자 브리구의 아들 슈끄라의 부패된 몸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 바수데바의 몸은 뿌리 뽑힌 나무처럼 쓰러져 시체가 되었습니다. 현자 브리구는 그 몸을 소생시키는 힘을 지닌 신성한 찬가들을 읊조리고, 살 등으로 몸에 옷을 입히면서, 자신의 물 항아리로 떠 온 신성한 물을 슈끄라의 몸에 뿌렸습니다. 즉시 그 몸은 이전처럼 젊어지고 빛나게 되엇습니다.

슈끄라는 명상 자세에서 일어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아버지 현자 브리구를 보고는 그의 발아래에 절하였습니다. 브리구는 죽음에서 부활한 자신의 아들을 보고 기뻐하였으며, 행복한 미소로 그를 다정하게 껴안았습니다. "얘가 나의 아들이다."라는 생각에서 오는 애정의 감정은 현자 브리구조차도 압도하였습니다. 몸의 의식이 있는 한 이것은 당연합니다. 그들 둘 다는 이 행복한 재회에 기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브리구와 슈끄라는 브람마나 소년 바수데바가 지녔던 몸에 대한 장례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지닌 자들은 사회적인 관습들이나 전통들에 경의를 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들 둘은 태양과 달의 빛으로 빛났습니다. 확실히 전 우주의 영적인 지도자들이었던 그들은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참나 지식 속에 확고한 그들은 시간과 환경이 일으키는 변화들에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슈끄라는 악마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 브리구는 가장 높은 지혜를 가진 현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정에게 홀렸기 때문에 수많은 자궁 속에서 헤매었던 현자 슈끄라의 이야기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성한 분이시여! 슈끄라의 소망이 천국 등과 같은 상승으로 물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소망은 왜 그와 같이 물질적으로 실현되지 않습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슈끄라의 마음은 순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첫 번째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은 다른 이전의 몸들의 불순함이 쌓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은 순수하며, 그 안에서는 모든 갈망이 정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 순수한 마음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슈끄라에게 일어난 일은 그 밖의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은 씨앗의 상태로 각각의 지바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마치 나무가 씨앗으로부터 싹을 내듯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상은 이처럼 각각의 개체에 의해 그릇되게 상상됩니다. 세상은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습니다. 이 모두는 단지 미혹된 마음의 상상일 뿐입니다. 각 개체 안에 상상의 세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꿈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듯이, 어떤 사람의 세상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습니다. 마귀들, 반신반인들, 악마들이 있습니다. 그것 모두는 미혹의 몸들입니다. 오, 라마여! 그렇게 하여 우리는 순수한 사고력에서 나와 존재 속으로 들어가, 허위의 것을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이 정말이지 무한한 의식 속에 있는 창조의 기원입니다. 물질이 텅 빔 속에서 지각되더라도, 그것은 실제의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세상을 상상합니다. 이 진리가 깨달아지면, 이렇게 상상된 세상은 끝이 납니다. 이 세상은 외적인 모습이나 상상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지, 사람들이 물질적인 실채를 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나긴 꿈이나 마법사의 속임수와 같습니다. 마음이라는 코끼리가 묶이게 된 것은 그 후입니다.

마음이 세상이고, 세상이 마음입니다. 어느 하나가 진실하지 않은 것으로 자각될 때, 둘 모두는 사라집니다! 마음이 정화될 때 마음은 진리를 비춥니다. 실재하지 않는 세상의 모습은 사라집니다. 마음은 진리를 계속해서 명상할 때 정화됩니다.

라마가 물었다.

연속적인 탠생들 등이 슈끄라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슈끄라는 계속적인 탄생들에 관하여 그의 아버지 브리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가르침은 슈끄라의 마음을 조건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런 조건화를 확대시켰습니다. 마음이 모든 조건화에서 완전히 정화될 때만 마음은 다시 그것의 완전한 순수함을 얻습니다. 그 순수한 마음은 해방을 경험합니다.

바시슈타가 계속 말하였다.

오, 라마여! 이 창조 안에 보이는 다양성은 단지 외형상의 다양성일 뿐입니다. 진화나 수축은 그것의 근원이며 목표인 하나의 무한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화가 일어나는 동안, 하나의 무한한 의식 안에서 다양성이 일어납니다. 그 다양성은 그 의식 안에 나타나는 개념들과 일치합니다. 이러한 개념들 중 어떤 것은 서로 섞입니다. 그래서 이 다양성 안에 무한한 다양성들이 만들어집니다. 어떤 것은 이와 같이 혼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모든 개념은 존재의 매 원자 안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원자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전체는 절대적인 브람만입니다.

각 개인은 그 자신의 마음 안에 뿌리내린 그러한 대상들만을 봅니다. 마음속에 있는 개념들이 열매를 맺지 않을 때, 마음속에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심리적인 변화들에 맞는 연속적인 탄생들이 있게 됩니다. 탄생과 죽음의 실재, 몸의 실재를 확신시키는 것은 이 심리적인 연결입니다. 이 확신이 포기될 때 몸의 형상화가 중지됩니다.

진리에 대한 망각 때문에 비실재가 실재라는 혼란이 일어납니다. 생명력(쁘라나)의 정화에 의해서 그리고 쁘라나 즉 생명력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지식에 의해서, 탄생의 연속을 있게 하는 바탕뿐만 아니라 마음의 활동들에 관한 모든 지식을 얻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은 깨어 있음, 꿈, 깊은 잠이라는 세 가지 상태를 경험합니다. 그것들은 몸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순수 의식인 깊은 잠의 상태 너머로 간 현자는 근원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어리석은 자들은 삶의 주기 안에 잡혀 있습니다.

의식은 무한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의 삶의 주기에서 다른 삶의 주기로 나아가며, 세상의 주기조차도 넘어섭니다. 바나나 줄기의 껍질과 같이 하나의 창조가 다른 창조 안에 나타납니다. 그러한 창조들은 끝이 없습니다. 물론 절대자 브람만을 어떤 것과 비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모든 실체들의 정말로 원인이 없는 원인을 탐구해야 합니다. 그 원인은 그러한 모든 인과 관계 너머에 있습니다. 단지 이것만이 탐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왜 본질이 아닌 것을 묻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오, 라마여! 씨앗 속의 나무는 씨앗을 파괴한 후에 그 씨앗으로부터 자랍니다. 하지만 브람만은 자신을 파괴시키지 않고 이 세상을 창조합니다. 나무(세상)는 씨앗(브람만)이 그대로 있을 때조차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비할 수 없는 브람만을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것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무나 그 밖의 것들은 정의할 수 있는 물질적 실체이지만, 브람만은 이름이 없고 형상이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 본성으로 나타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오직 브람만입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하고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브람만에 관하여 어떤 것도 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이 모든 것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참나가 대상으로서 보일 때, 보는 자는 보이지(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우주가 지각되는 한, 참나를 깨닫지 못합니다. 신기루를 물로 본다면, 솟아오르는 뜨거운 공기를 지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뜨거운 공기를 지각한다면, 신기루 속의 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가 진리일 때,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대상물을 지각하고 있는 눈은 자기를 보지 못합니다. 객관적 실재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한, 참나는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브람만은 공간만큼 미묘하고 순수합니다. 그것은 노력 등으로 개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들이 지각의 대상이라는 내적인 느낌을 가지고 보는 한, 자신을 분리된 주체 혹은 보는 자라고 보는 한, 브람만에 대한 깨달음은 진실로 먼 곳에 있습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라는 분리가 버려질 때만, 둘이 하나의 실체로 보일 때만,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주체와 전적으로 다른 본성을 가진 대상은 없습니다. 주체인 참나가 대상처럼 보일 수도 없습니다! 사실, 주체인 참나만이 보이는 것인 대상으로서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여기에 다른 지각의 대상은 없습니다. 주체 즉 참나만이 이 모든 것이라면, 그때 그것은 주체나 보는 자조차도 아닙니다! 그러한 시각에는 아무런 분리가 없습니다.

설탕이 타고난 단맛을 잃지 않고 다양한 사탕과자가 되듯이, 이 무한한 의식 즉 브람만은 자신의 본질적인 본성은 변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무한한 다양성으로서 그 스스로를 보이게 합니다. 이 무한한 의식의 나타남에는 아무런 한계가 없습니다.

바시슈타가 계속 말했다.

각각의 지바는 자신이 지닌 생명력의 도움으로 자신 안에서 스스로 만든 것을, 그것이 어떤 것이더라도 어떤 식으로라도, 자신 속에서 경험합니다. 오, 라마여! 자기 내면의 지혜의 눈으로써, 존재의 모든 원자 안에 수많은 세상의 모습들이 있다는 진리를 보십시오.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바로 공간 안에, 각 바위 안에, 불꽃 안에, 물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세상의 모습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기름이 참깨 씨앗 속에 존재한느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절대적으로 순수해질 때, 마음은 순수 의식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무한한 의식과 하나가 됩니다.

이 세상의 모습은 다름이 아니라 창조자 브람마와 여러 존재들의 상상이며, 모든 곳에 나타나는 그들의 기나긴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창조자의 꿈 속에서 생겨난 대상물들은 꿈에서 꿈으로, 몸에서 몸으로 이동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의 모습에 대한 환영이 견고해집니다. 이 꿈과 같은 나타남은 굼이 지속되는 동안에만 사실입니다.

모든 원자 안에는 모든 종류의 잠재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씨앗이 그것의 내부에 나무의 (꽃, 잎, 열매 등과 같은) 다른 측명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의 모든 원자 안에는 무한한 의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분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양성이나 하나와 같은 그대의 모든 개념을 버리십시오. 시간, 공간, 행동(또는 움직임)과 물질은 무한한 의식의 다른 측면들입니다. 그리고 의식은 그것들을 자신 안에서 경험합니다. 의식이 창조자 브람마의 몸이 되거나 벌레의 몸이 되거나 말입니다.

의식의 원자는 그것이 완전히 성숙한 상태의 몸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 자신의 기능들을 경험합니다. 무한한 의식이 모든 곳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이는 대상들이 마치 밖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지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진화와 수축을 번갈아 하는 모든 것을 내부에서 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의 모습 안에서 방황하며, 하나의 꿈의 경험에서 다른 꿈의 경험으로 나아갑니다.

그들 자신 안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이 늘 영원한 진리로 있는 하나의 무한한 의식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이 환영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이 의식 때문에 세상은 지바 안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바들 안에 지바들이 무한하게 있습니다. 그가 환영에서 풀려나는 것은 이 진리를 경험할 때입니다. 동시에, 쾌락들에 대한 열망은 약해집니다. 이것만이 지혜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감로주를 그린 항아리는 감로주가 아니며, 불곷 그림은 불이 아니며, 여인의 그림은 여인이 아닙니다. 현명한 말들은 욕망과 분노가 구체적으로 없지 않는 한, 그 말들은 그냥 말(무지)일 뿐, 지혜는 아닙니다.

바시슈타가 계속 말했다.

모든 존재의 씨앗은 절대적 브람만입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바들 안에 무수한 다른 지바들이 있습니다. 전 우주가 무한한 의식으로 완전히 충만해 있기 때문에 이것은 그러합니다.

지바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그들이 하는 명상의 형태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들은 그 형태가 됩니다. 신에게 헌신하는 이들은 신에게 이릅니다. 반신을 숭배하는 이들은 반신에 이릅니다. 절대적인 브람만을 명상하는 이들은 브람만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제한적이거나 조건 지어지거나 유한하지 않은 것에 의지해야 합니다.

요정의 모습을 지켜봄으로써 슈끄라는 묶이게 되었고, 무한한 의식인 자신의 참나의 순수함을 깨달았을 때 그는 즉시 자유로워졌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거룩한 분이시여! 깨어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의 진정한 내용을 말해 주십시오.  깨어 있는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꿈 혹은 미혹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하였다.

오래 지속되는 상태가 깨어 있는 상태이며. 일시적인 상태가 꿈의 상태입니다. 꿈꾸는 동안에는 꿈은 깨어 있는 상태의 특징을 가집니다. 깨어 있는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깨어 있는 상태는 꿈의 특징을 가집니다. 그 점을 제외하면, 둘은 같습니다.

몸 안에 있는 생명력이 움직이면, 생각, 말, 행위라는 갖가지 기관들은 자신의 기능을 행합니다. 마음속에 퍼져 있는 미혹된 개념들에 일치하여, 그것들은 지각의 대상들을 향해 흐릅니다. 이 생명력은 참나 안에 있는 다양한 형상들을 지각합니다. 이 지각은 영속하는 성질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깨어 있는 상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지바 체따나)이 이처럼 몸과 마음에 의해 여러 대상들을 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슴 안에 뿌리를 내린 채 평화롭게 있습니다. 몸의 신경들 안에는 의식의 움직임이 없으며, 생명력도 감각들을 활동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잠 속에서조차 깨어 있고, 또한 깨어 있거나 꿈꾸는 동안에도 빛나는 빛이기도 한 그 의식은 초월의 의식인 뚜리야입니다.

무지와 미혹의 씨앗들이 팽창하면 첫 번째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꿈들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이라는 형태들을 지각합니다. 이때 외부 감각 기관들은 기능하지 않지만 내부의 감각들은 기능합니다. 자신의 내부에는 지각이 있습니다. 이것이 꿈의 상태입니다. 생명력이 다시 감각 기관들을 움직이게 하면, 또 한 번 깨어 있는 상태가 있습니다.

바시슈타가 계속 말하였다.

나는 마음의 상태들에 대하여 묘사했는데, 이것은 그대가 마음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자신이 강렬하게 묵상하는 모습을 띠기 때문입니다. 존재, 비존재, 얻음, 버림, 이 모든 것은 마음의 변덕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마음이 이 모든 것이라면, 신이시여! 어떻게 그것이 언젠가 더렵혀집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라마여! 좋은 질문이지만, 지금은 묻기에 적당한 때가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는다면, 그대는 분명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명쾌히 찾을 것입니다.

마음이 불결하다는 것은 해방을 얻으려 애쓰는 모든 이들이 겪는 경험입니다. 개개인의 특별한 견해에 따라 각자 그것을 다르게 설명할 뿐입니다.

여러 꽃들과 접한 공기가 각 꽃들의 향기에 감염되듯이, 여러 개념들을 지닌 마음은 그런 기분에 감염되어 그것들에 적합한 몸을 만들고, 감각들을 활성화시키는 에너지가 되어 자신의 개념들이 만들어 낸 결실들을 즐깁니다. 행위 기관들의 기능을 위한 연료를 공급하는 것 역시 마음입니다. 마음이 행위이고, 행위가 마음입니다. 이 둘은 꽃과 그것의 향기와 같습니다. 마음의 신념은 행위를 결정하고, 행위는 신념을 강화합니다.

마음은 모든 곳에서 다르마, 부, 즐거움과 자유에 헌신합니다. 그러나 각자는 이것들에 대해 다른 정의를 내리며, 자신의 정의가 진리라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성자 까삘라의 추종자들, 베단따인들, 비냐나바딘(Vijñānavādin)들, 자이나인들은 그들의 길이 해방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들의 철학은 그들 자신의 경험의 결실이며, 그들의 마음 안에 있는 확신과 일치하는 그들의 경험의 표현입니다.

라마여! 속박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개념 바로 그것입니다. 이 개념이 마야이며, 무지 등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의 태양에 눈멀게 하는 백내장입니다. 무지는 의심을 일으키며, 의심은 지각되고, 그 지각은 곡해됩니다. 어둠속에서는 비어 있는 사자 우리에 다가갈 때조차 그는 두렵습니다. 그처럼 사람은 자신이 이 텅 빈 몸 안에 갇혀 있다고 무지하게 믿습니다. '나'와 '세상'에 대한 개념들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 개념들만이 '대상들'을 창조하며, 이 대상들은 진리도 거짓도 아닙니다. 자신을 주부로 생각하는 어머니는 그렇게 행동하고, 자신을 남편의 어머니로 간주하는 아내는 당분간은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라마여! '나'와 '이것'에 대한 개념을 버리고 진리 안에 확고히 자리 잡으십시오.

바시슈타가 계속했다.

참나 탐구를 통하여 지혜를 얻고, 그에 따르는 능력들을 지닌 사람은 참나 지식의 명쾌함을 즐깁니다. 그것은 명반 조각이 물 속에 던져질 때 물이 깨끗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마음은 변화들에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의 존재는 변형되었습니다. 얻을 만한 가치 있는 것 즉 참나 지식을 얻었으므로, 그는 객관적 실재라는 바로 그 개념을 버렸습니다. 보는 자만이 보기 때문에, 그는 다른 요인들을 보는 자, 즉 주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지고의 진리에 완전히 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그는 세상에 완전히 잠든 것입니다. 초연이 가득하므로 그는 즐거움과 그 반대의 것에도 흥미가 없습니다. 쉬지 않는 강이 바다에 들어설 때 멈추듯 그의 갈망들이 정지되었습니다. 쥐가 올가미를 잘라 내듯이 그는 세상이라는 그물을 잘라 버렸습니다.

마음에 모든 집착이 사라졌을 때, 마음이 반대되는 것들의 쌍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때, 마음이 대상들에 의해 이끌리지 않을 때, 마음이 모든 지지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일 때, 마음은 미혹이라는 새장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모든 의심이 멈추게 될 때, 의기양양함도 의기소침함도 없을 때, 그때 마음은 보름달처럼 빛납니다. 마음의 불순함이 존재하길르 그칠 때, 가슴속에는 길조의 모든 특성들이 일어나고, 모든 곳에 평등한 시각이 있습니다. 어둠이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사라지듯이, 세상의 환영은 무한한 의식의 태양이 가슴 안에서 떠오를 때 사라집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의 가슴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나타나고 확장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알 가치가 있는 것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고 가는 모든 것, 삶과 죽음을 초월합니다.

참나 탐구가 직접적인 관찰을 통하여 일어난 참나 지식을 지닌 성스러운 이들은 브람마, 비슈누, 인드라 그리고 쉬바와 같은 신들과도 공감되며 그들을 돕습니다.

자아감이 없을 때, 마음속에 혼란이 없습니다. 그때 마음은 자연스럽게 기능합니다. 파도들이 바다 안에서 일어나 사라지듯이, 이 세상들도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것은 무지한 자들을 미혹시키지만, 현명한 자들은 미혹되지 않습니다. 항아리 안의 공간은 항아리가 만들어질 때 존재하게 된 것도, 항아리가 깨어질 때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몸(항아리)과 참나(공간) 간의 관계가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자는 칭찬이나 책망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참나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을 때만 이 매혹적인 세상의 모습이 사람을 괴롭힙니다. 지혜가 일어나면, 미혹은 가라앉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오, 라마여! 몸을 미혹된 이해의 산물로 그리고 불행의 근원으로 보는 자, 그리고 몸이 참나가 아님을 아는 자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즐거움과 고통은 시간의 변화와 자리하고 있는 환경 때문에 이 몸 안에서 경험된다는 것을 아는 자, 그래서 그것들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 안에 감싸고 있는 무한한 의식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털을 백만 번 쪼갠 것보다 더 미묘한 참나가 모든 것에 퍼져 있음을 아는 자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참나와 다른 것 사이에는 전혀 구분이 없으며, 하나의 무한한 의식의 빛이 유일한 실재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들에 내재하는 비이원의 의식은 전능하며 모든 것에 편재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병, 두려움, 흥분, 노화, 죽음에 지배당하는 몸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미혹되지 않는 이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많은 구슬이 하나의 실에 꿰어 있듯이, 모든 것이 참나 안에 꿰어져 있으며, 그리고 "나는 마음이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자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도 '다른 것'도 아닌 브람만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삼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신의 동정과 보호를 받아야 하는 가족처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참나만이 존재하며 대상 속에는 아무런 실채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는 진리를 보고 있습니다.

즐거움, 고통, 출생, 죽음 등 이 모두가 참나라는 것을 아는 자는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참나인데,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라고 깨달은 자는 진리 속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외견상으로 보이는 온 우주의 창조, 존재, 소멸 동안에도 변화되지 않는 채로 있는 것은 진실로 브람만일 뿐이라는 지고의 깨달음으로 가득한, 상서로움이 머물고 있는 자에게 경의를.

바시슈타가 계속 말하였다.

라마여! 도공의 녹로가 이전의 추진력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고귀한 길을 걷는 이는 몸 안에 있으면서 행했을 수도 있는 행위들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습니다. 그의 경우, 몸은 자신의 기쁨과 자신의 영혼의 해방을 위해 있습니다. 그는 몸 안에서 불행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무지한 자에게 몸은 고통의 원천입니다. 깨달은 이들에게 이 몸은 무한한 기쁨의 원천입니다. 몸이 존재하는 동안, 현명한 이는 몸으로부터 커다란 즐거움과 깨달음의 기쁨을 이끌어 냅니다. 수명이 다하면, 몸이 죽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깨달은 이들에게 몸 그 자체는 무한한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몸은 자유롭고 즐겁게 이 세상을 떠돌 수 있도록 그를 운반해 주기 때문에, 이 몸을 지혜의 운송 수단으로 여깁니다. 현자들은 몸을 통하여 갖가지 감각 경험들을 이끌어 내고 다른 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얻기에, 그에게 있어 몸은 획득의 근원입니다. 천국의 왕 인드라가 그의 도시에서 머물 듯이, 깨달은 이들은 몸이라는 자신의 도시에 머물면서 행복하게 군림합니다.

현명한 이들은 몸이 욕망과 탐욕이라는 유혹의 지배를 받도록 하지 않으며, 무지나 두려움이 그에게 들어오도록 하지 않습니다. 현자들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지성은 무지한 사람들이 쾌락이라고 부르는 자극에 의하여 밖으로 끌려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명상의 상태 안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공기가 존재하고 있는 항아리에게 영향을 주지만, 존재하지 않는 항아리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듯이, 몸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몸이 있을 때는 몸과 쉽게 접촉을 하지만, 몸이 없어지면 즉시 그것과 접촉을 하지 않습니다.

쉬바 신이 마신 치명적인 독이 그를 해치지 않고 그의 매력을 오히려 돋보이게 하였듯이, 깨달은 사람의 다양한 행위들과 즐거움들은 그를 탄생과 죽음이라는 윤회에 묶지 못합니다. 그대가 어떤 사람이 도둑임을 알고 있으면서 그와 상대한다면 그 도둑이 그대의 친구가 되듯이, 대상들의 진정한 본성을 알고 그것들을 즐긴다면 그것들은 그대에게 기쁨을 줍니다. 모든 의심을 없애고, 자신에 대한 어떠한 이미지도 내면에 두지 않고 있는 현자들은 몸 안에서 지고의 주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쾌락에 대한 모든 갈망을 버리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잘 훈련된 마음만이 진정으로 행복을 경험합니다. 포로가 된 왕은 풀려났을 때 빵 한 조각으로도 기뻐합니다. 포로가 되어 보지 못한 왕은 왕국의 합병조차도 그처럼 즐겁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자는 이를 갈면서 자신의 마음과 감각들을 정복하려 애씁니다. 그런 정복은 외부의 적들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위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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