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심불이와 과학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색이란 눈에 비치는 만물만생을 일컫는다'라고 대답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물만생에는 모두 색채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적청황의 삼원색은 색의 배합에 따라서 몇 만색으로도 변한다. 대자연을 보더라도 춘하추동에 따라서 그 색채가 변화하고 있다. 색이란 우리의 육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물질도 또한 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무지개의 칠색의 범위 뿐이다. 0.00004~0.00007센티미터 정도의 파장의 범위밖에 보지 못한다.
무지개의 양끝의 색은 자색과 적색이다.
자색에서부터 자외선, X선,a선, r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적색으로부터는 적외선, 초단파, 단파, 장파로 주파수가 달라진다.
이들 세계를 우리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전파도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오관으로는 감지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색'이라는 말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기실 복잡한 세계이다.
전파 같은 것은 물질이 아니라 차원을 초월한 세계의 존재라고 하겠다. 이것은 에너지이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빛에 대해서도 그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전파도, 빛도, 열도 에너지입자이다.
눈에 보이는 색채의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는 세계이기는 하나 물리적 차원이 에너지, 즉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므로 그 차원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색심불이'라고 하는 철학적인 표현을 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색'이 물질, '심'이 에너지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물질이란 우주 공간에 체적과 질량을 가지는 것이라고 물리하게서는 정의하고 있다. 물질의 본질은 에너지입자가 집중 고정화된 것이므로 그것이 분산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입자로서 따로따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심'은 의식 또는 영혼의 중심인 우리의 마음을 가리킨다. '색심불이'란 육체주와 뱃사공이 동거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육체주만으로는 활동할 수 없다. 또한 영혼, 즉 육체주의 뱃사공만으로도 이 지상계에서 행동하고 현상화하기는 어렵다. 역시 이 지상계의 법칙에 따라 육체와 마음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다.
잠들어 버리면 육체는 침상에 정박하고 있는 배일 뿐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수 없다. 의지는 뱃사공인 마음의 영역이다.
아인슈타인은 에너지불멸의 법칙 질량불변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MC2(이 게시판에선 정확한 문자를 표시할수 없음)
E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즉 에너지이다. 그리고 C는 빛의 속도를 표시하고 M은 질량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곧 질량과 빛의 속도의 적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이다.
또한 열의 문제에 관해서 프랑크는 그의 실험을 통해서 상수를 발견하고 진동수와의 적에 의해서 열입자의 에너지를 설명하고 있다.
E=hv
h는 프랑크 상수로서 6.626×10-27(erg·sec)(이 게시판에선 정확한 문자를 표시할수 없음)인 것이다. v는 진동수를 나타내고 있다. E는 열에너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심불이의 의미도 현대 물리학에서 증명하고 있는 자연의 법칙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차원이 다른 세계와 물질은 동거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외력이라고 하는 연에 접하여 물질은 형태가 변화하지만 질량이나 에너지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공'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공'을 비어 있는 것이라든가 허무하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와 같은 해설은 지에만 의존한 좁은 틀 속에서 판단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공부하고 마음과 행을 닦아 집착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알며 불생불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있다고 생각하면 없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다'와 같은 애매모호한 풀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론이나 머리로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차원을 넘어선 실재의 세계로 가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차원이란 물질적 에너지의 차원과는 또다른 정묘한 의식계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언젠가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저 세상 곧 실재계를 말한다. 만물을 만들어 내는 근본의 세계다. 그것도 '연'이라고 하는 작용에 의해서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X축 Y축,Z축으로 이루어지는 입체의 삼차원의 현상계이다. 즉 물질계이다. 이 물질계로부터 X축, Y축에 의해서 묶어진 2차원의 세계를 생각해 보자.
영화의 스크린이 2차원의 세계이다. 여기에 투영되어 비추어져 나오는 화면을 상상해 보자.
이를테면 전쟁의 뉴스를 보도한다.
<자기의 귀여운 어린 아이가 전쟁터에서 막 적병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려 하고 있다. 그의 신체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이다> 그 뉴스를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의 양친,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2차원에 투영되고 있는 그 아이를 아무도 구해낼 수 없다. 소리를 질러도 통하지 않는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 관계가 3차원에서 투영하고 있는 영사기와 2차원의 스크린과의 연관 관계인 것이다.
뉴스 필름은 3차원의 세계에서 취재한 것으로서 그 생생한 모습은 뉴스 카메라맨이 포착한 것이다. 생보도라고 하는 인간 사회가 엮어낸 사건이 카메라맨이란 연에 의해서 기록된 것의 재현인 것이다.
이처럼 2차원을 3차원이 투영하고 있듯이 3차원의 세계를 투영하고 있는 세계가 4차원 이상의 다차원의 세계로서 신의 마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다차원 세계가 참된 실재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비물질적인 가장 정묘한 세계로서 자애에 찬 세계이며, 전혀 거짓이 없는 대조화의 세계이다.
물질은 모두 에너지가 차원을 달리하여 변화된 것이다. 식물도 본래는 식물로서의 의식의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다. 다른 동물도 같은 의식의 단계에서 생존을 계속하며 3차원의 고체적 불안정한 세계를 왕래하며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다.
3차원과 연속된 저쪽 세계에는 부조화한 상념의 영위기에 감싸인 암흑의 세계도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지옥계이다. 거기에는 유유상종의 법칙에 따라 똑같이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애를 잃은 자들끼리 만들어 낸 집단의 수행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곳이다.
신리를 깨닫고 마음이 조화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차원이 다른 그러한 실재계의 모습을 직접 보고 온 분들도 있다.
현상계의 육체주로부터 광자체의 배를 분리시켜 차원을 달리하는 천상계나 지옥계에 가서 죽은 사람들과도 만나볼 수 있다. 마음이 조화되면 그와 같은 왕래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현상계의 어느 곳이든 가고자 하는 곳으로 그 광자체의 몸으로 쏜살같이 날아가서 보고 올 수도 있다. 현재의 육체주는 물론 거기에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광자체라면 빛 이상의 속도로 갈 수 있다.
이 육체주와 광자체의 배는 영자선이라고도 하는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탯줄'과도 같은 것으로써 연결되어 있다.
이 영자선은 무한히 늘어나고 또한 줄어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광자체에도 우리의 영혼이 타고 있으므로 도착한 행선지의 여러 현상을 뚜렷이 포착할 수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빛도 입자라는 거을 알 수 있고 소리도 또한 입자라고 말할 수 있다.
소리의 파동도 매체를 통해서 보면 입자가 물결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내장도 뚜렷이 보이고 결함도 똑똑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차원을 초월한 마음의 눈은 모든 현상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의 상태나 생각하는 것은 녹화 테이프처럼 전부 의식 속에 기록된다. 그리고 이 테이프는 지워지지 않고 남는다.
아욕이 강한 사람들은 붉은 문자로 기록되며 중도를 이탈한 행동이나 상념도 붉은 문자로 기록된다.
원한, 질투, 노여움, 비방, 자기보존, 자아아욕의 생각 등도 모두 의식에 기록으로 남는다.
그런데 자비로운 마음이나 행위는 황금색의 문자로 기록되고 있다. 중도의 생활을 하고 있으면 일반으로 쓰는 흑자로 기입된다. 만약 연애를 하고 있는 경우에는 상대방의 이름이 수 없이 기록되어 있다. 번뇌가 많은 사람들의 의식은 어두운 영위기에 감싸여 매우 무겁다. 중도를 걷는 편협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은 광명에 차 있으며 매우 가볍다. 붉은 글자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어두운 상념을 지어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1초 1초의 생각과 행위가 모두 우리의 의식 속에 기록으로 남게 된다.
마음 속에 어두운 상념을 만들지 않는 생활이 중요하다. 만약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 냈을 때에는 중도라고 하는 마음의 자로 자기가 생각한 것 행동한 것을 잘 반성해야 한다.
인간인 이상 잘못도 있을 것이다. 반성은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자비의 빛이다. 우리들의 기록의 테이프에는 반성을 하면 부조화한 부분의 옆에 그 반성의 사실이 기입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의 기록장치는 가장 정묘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그룹의 사람은 저마다의 수호령이나 지도령으로부터 그 사람에 관한 일을 들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마음 속의 기록과 수호령의 조언을 종합해 보면 그 사람의 결점이나 장점을 절로 알 수 있다.
물론 마음에는 뚜렷한 모양이 있는데 그것을 심안으로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둥근가 비뚤어졌는가 하는 것도 금방 알 수 있다.
둥글고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후광에 싸여 있으며 그 곁에는 반드시 수호령이나 지도령이 서 있다.
반대로, 어두운 상념과 부조화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두운 영위기에 감싸이므로 흔히 빙의령이 붙어 질병의 원인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처럼 마음이 정묘하다는 것을 알면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특히 타인에 대한 생각이나 행위는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교육자나 의사들이 이와 같은 넉넉한 마음가짐으로 학생이나 환자를 볼 수 있다면 그보다 나은 일은 없을 것이다.
비뚤은 사상으로 학생을 오도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장래성 있는 학생을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사는 일체의 질병의 원인을 추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4차원 이상의 다차원의 입장에서 이 3차원의 여러 현상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ㅂ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결점을 용기를 가지고 수정해야 하며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팔정도의 척도로써 생활을 하는 수련을 쌓아가야 한다.
이와 같이 공의 세계는 허무한 것이 아니며 있다고 생각하면 없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과 같이 애매한 것도 아니다. 이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과 색은 윤회하고 있다는 것을 한자로써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물은 고체로도 기체로도 변한다. 압력이나 열의 연에 의해서 세 가지의 상으로 변화하지만 물의 본성인 H2O는잃지 않고 있다.
공중에 증발한 수증기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열의 강하나 압력과 같은 연에 의해서 다시 비나 눈이 되어 지상에 내려온다. 이것도 공즉시색이요 색즉시공이라고 하는 법칙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실재계-즉 공의 세계에서 약속한 양친과의 연에 의해서 이 현상계-즉 색인 육체주를 부여받아 험난한 고락의 인생항로를 수행한 뒤 명이 다하면 다시 실재계-즉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실재계와 현상계는 바꾸어 말해서 이승과 저승은 표리일체의 세계이다. '이'와 '저'의 차이일 뿐 세상에는 다름이 없으며, 당장에라도 갈 수 있는 곳이 저 세상이다. 생과 사는 영원한 윤회요, 신의 마음이며 신리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으니까 없다, 죽으면 그 뿐 시신밖에 남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이다. 시신은 인생항로를 건너갈 수 없게 된 육체주의 잔해에 다름 아니다.
이 잔해에 대한 집착은 바로 이 현상계에 대한 집착이며 그래서 그것 자체가 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지옥계를 전개하여 그 장소에서 지옥령으로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왜 지옥으로 떨어졌는가 하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말법의 세상이 되면 '올바르다'고 하는 마음의 기준이 흐려져 불단이나 신사, 사찰을 찾아 불경이나 올리는 일이 바로 신앙이고 신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와 같은 형식주의에 의존하고 있음으로써 신불의 가피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스스로의 마음과 행을 바르게 하지 않고 마음을 욕망의 구름으로 감싸서 아무리 빌어도, 그것은 지옥령이나 동물령의 세계에 통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공'의 실체를 알지 못하므로 '허무'란 해석도 나온 듯하다.
염불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우상이나 만다라에 공양하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과 행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신의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자력 우선이야말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다. 허무맹랑한 생각을 버림과 동시에 종래의 그릇된 습성을 깨트리고 신리의 실천에 매진하는 생활이 중요하다.
"일체의 현상은 공의 세계에 의해서 법칙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라고 나의 지도령은 보충 설명해 주기도 한다.
색즉시공에 대해서 질문한 사람이 마음 속으로 '과연 그렇구나'하고 수긍하는 파동이 나에게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마하지관'이란 질문에 대해서는 '위대한 반성'이라는 대답이 된다. '멈추어서서 본다'라는 뜻이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일, 행하고 있는 일을 확실하게 판단해서 중도인가, 극단의 행위인가를 마음을 가라앉혀 반성하고 만약 그릇되었으면 마음으로부터 정정하여 두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보다 향상시키는 길이다.
어떤 지도자들은 참선하여 무의 경지에 드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큰 잘못이다.
마음 속의 원한, 비방, 시기, 미움, 노여움, 질투, 정욕, 권력욕, 금전욕, 질병 등의 심적 원인을 반성하지 않고 어두운 구름이 낀 상태에서는 지옥령이나 동물령들에게 의식을 지배당하기 십상이다.
반성에 의해서 이제까지의 마음의 그늘을 제거하고 감정, 지성, 이성, 본능, 상념, 그리고 의지의 영역에 비뚤어짐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점검하여 둥글고 넉넉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마음도 육체도 광명의 빛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보다 조화된 영위기가 조성되어 내재한 위대한 지혜를 자기의 것으로 끌어낼 수 있게 된다.
내재한 위대한 지혜란 반야바라밀다라고 일컬어지는,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배워온 불지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내재한 지혜의 보고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승에서 배우지 않았던 일이라도 과거세에서 배웠었더라면 당장에 알아버린다는 뜻이다.
현세뿐 아니라 실재계로 갈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항상 중도의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마음이란 것은 무한에 가까울만큼 변화무쌍한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자유자재인만큼 항상 '올바르다'는 기준을 확고하게 지니고 생활을 해 가야 한다. 올바른 마음의 자로써 스스로의 상념과 행위를 멈추어 서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마하지관'의 바른 의미이다.
천태 이후의 승려나 학자들은 이것을 너무 어렵게 해석하여 그 결과 스스로의 마음과 행을 잊어버렸다. 그 까닭은 지만의 해석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불교는 학문이 아니라 도덕이고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질문자는 학문적인 체험만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지만이 앞서가는 듯했다.
행이 따르지 않는 불교는 정법도 아니며 신리도 아니다. 조화의 광명에의 길은 행 이외에는 없다.
'빛' 즉 '행'이 바로 정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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