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안
정법이란 올바른 법, 만고불멸의 신리, 신의 마음, 곧 우주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사물에는 모두 전생윤회라고 하는 법칙이 있으며 그 법자체가 만물만생의 존재를 가르치고, 그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대자연이란 환경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신의 대자비이며 크나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극미한 원자도 핵을 중심으로 하여 음외전자가 마치 태양을 혹성처럼 돌고 있다. 하루가 끝나면 이윽고 내일이 찾아온다. 사람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는다. 대자연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초목도 꽃도 언제까지나 싹트고 피어 있지는 못한다. 또한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도 이 자연의 법칙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선의 행위는 선의 결과로서 순환하며 악의 행위는 악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이와 같은 법칙을 순환의 법칙이라고 한다. 인간의 일상 생활도 이러한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올바른 행위는 올바른 결과로서 그 사람의 인생, 건강, 환경을 정돈해 준다.
그것은 자연의 운행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다. 어김없는 운행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 인간은 지상에서의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자비와 사랑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법이 바르게 운용되고 있기 때문에 태양의 열은 식지 않고 지구는 정해진 궤도를 이탈함이 없이 움직이고 있다. 지상에서의 생활도 태양의 변함없는 열과 빛의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비라든가 사랑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마치 인간적인 행위 인간적인 감정을 연상하지만 태양도 지구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자비란 그런 의미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대자연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은 말을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희노애락이 있지만 자연은 우리가 아는 그러한 감정은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도 또한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이다.
사계의 바뀜, 풍우, 한난, 태풍.... 모두 살아 있는 표현인 것이다. 꽃도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애정을 가지고 접하면 꽃도 동물도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된다. 그것은 의지가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꽃에는 꽃의 정이 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그 꽃의 정과도 이야기할 수 있고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았기에 모르는 것이지 그것은 부정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초목 등 모든 것에 의식이 있다.
그들이 자기 주위에서 일어난 세상의 변이를 영청이 가능한 사람에겐 바르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라고 하는 대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대지는 인간을 비롯하여 지상과 지하에 여러 가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하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참을성 있게 모든 생명을 살아 가게 하고 있다.
대지에 표정이 없는가 하면, 그것도 분명히 있다. 우리가 여행길에서 처음 대하는 경치를 보고 고장마다 영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대지는 수동적이고 우리 인간은 능동적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감정, 상념, 말하자면 거기 사는 사람들의 의식의 조화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그 고장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싸움이 많은 고장에는 작물도 자라지 않는 예가 많다. 그리고 마을이나 거리도 지저분하다. 조화에 차 있는 곳은 깨끗하고 밝고 느긋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대지는 어떤가. 역시 표정을 가지고 있다. 기후나 바람의 흐름에 따라 상쾌한 곳이 있는가 하면 현재는 인기척이 없지만 그 옛날 인류가 집을 짓고 살았던 곳은 수없이 많다. 그러한 곳에는 옛날 주민들의 마음의 파동이 남아 저마다 명암, 미추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와 같이 대지도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화산, 지진, 산사태, 함몰 등 대지는 때로는 성내고, 광란하는 수도 있다. 이러한 노여움이나 광기는, 대지가 제멋대로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부조화한 행동과 상념이 만들어 낸 물리적 현상이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태평양에 있었던 '무우 대륙'도 대서양에 있었던 '아틀란티스 대륙'도 모두가 거기 살던 인류의 업상념에 의해 함몰되었다는 것을 나의 지도령인 아가샤는 가르쳐 준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인간의 생명 의식, 지상에서의 목적은 자기 자신의 조화와 동시에 동물, 식물, 광물을 포함한 지상의 대조화에 있으며 그 목적에 위배되는 상념과 행위에 대해서는 그 분량 만큼의 배상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믿든, 안 믿든 인간의 생명 목적이란 것은 이 지상계를 평화로운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목적을 인간은 육체주를 타고나면 잊어버리기 쉽게 된다.
우리는 대지라고 하는 생활 환경에서 태양의 열, 빛의 변함없는 에너지를 받으면서 생존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거기에 대자연의 위대한 자비와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대자연의 생명에 조화하고, 신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고 자비와 사랑에 살아야 한다는 의의를 지금까지의 설명에 의해서 대충 알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치판단이라는 것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정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먼저 가치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사물에 값어치가 있다는 것이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돈의 값어치는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절해의 고도에서 혼자 사는 생활이라면 몇 억의 재보인들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가치라는 것은 효용이 있는 것과 동시에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의 값어치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는 상대적이다. 나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사람이 좋게 보인다. 착한 사람만 있다면 착한 사람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요즈음에는 인간성이야 어떠하든 돈이나 지위 명성 또는 재능이 있는 사람한테는, 선인, 위인이라는 딱지를 곧잘 붙인다.
'...뭐니뭐니 해도 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평가인가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단순히 운으로만 돌리는 경향도 있다. 현상계에 있어서의 가치의 성질은 이와 같이 상대적이지만 동시에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도 가치관이 바뀐다.
부모를 위해서는 딸이 매춘을 강요당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자식에게도 주권이 있으며 매춘 그 자체도 금지되어 있으므로 무법적 행위가 아니고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가치관은 시대적 배경 또는 사회의 구조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다시 말하면 시대적 배경이나 사상 혹은 사회 구조에 따라서 인간의 근본이 되는 가치관은 바꾸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정법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 있어서나 변하지 않는 것이며, 아무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 정법을 마음의 양식으로 하여 매일의 생활에 살려나간다면 우리는 항상 미혹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며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여 신의 자식으로서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대우주의 마음과 조화되어 본래의 평안의 경지에 이르고 신의 빛에 싸여 실재계인 저 세상에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주 즉아를 깨닫기 위해 우주와 동화된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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