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는 버려야 한다
이미 말해 온 바와 같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불이일체(두개가 아닌 한덩어리)이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원자육체와 저 세상에서 가져온 광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의식체가 표리일체(겉과 속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이며, 죽음은 그 양자의 완전 분리이다. 즉 육체주의 뱃사공인 의식이 차원이 다른 세계로 돌아가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주가 병들거나 다치거나 하면 뱃사공인 마음도 괴로운 것이다. 육체오 한몸이 되어 있는 광자체에 상호 감응이 일어나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전상이나 교통사고 등으로 팔이나 다리의 신경 조직이 파괴되면 외상에 통증은 없다. 그러나 수족이 절단되어 의수족을 끼우고 있어도 육체와 한몸이 되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광자체의 부분이 근질근질한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현세의 육체는 없어지더라도 광자체의 다리나 팔은 절단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우리의 육체는 이와 같이 광자체라고 하는 또다른 하나의 신체를 가진 의식체이며 그것에 의해서 육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육체와 광자체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깊이 생각해 보자.
우리의 신체 기능은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가 하면 의학적으로는 식물성 신경과 동물성 신경에 의한다고 말한다.
전자는 자율신경이라 하여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이 밤낮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신경을 가리킨다.
위장, 간장, 심장의 활동은 모두 이 자율신경의 활동에 속한다.
한편 동물성 신경이라고 하는 것은 뇌척수신경이다. 이것은 운동, 감각 작용을 하고 있다. 무서운 것을 보고 오금이 당기거나 아름다운 꽃을 보고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은 이 신경의 작용에 의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신경조직은 전혀 다른 활동을 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신경이 곤두선다든지, 걱정되는 일이 있다든지 하면 위장의 활동이 약화된다. 반대로 크게 웃으면 배가 고파지는 것처럼 서로 관련이 있다.
식물성 신경은 동물성 신경의 산하에 있다.
이를테면 무서운 것을 보고 기절하거나 때로는 죽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동물성 신경과 함께 식물성 신경도 동시에 활동을 정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병은 마음의 작용에 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육체 자체의 과로에 의하여 자율신경의 활동이 약해져서 내장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폭음 폭식에 의한 위궤양, 운동 부족과 비만에 의한 심장병, 과격한 운동에 의한 폐병 등도 있다. 이와 같은 육체 자체의 병도 있으나 역시 본인의 마음가짐에 좌우되는 것이 더 많다. 병의 원인을 규명해 보면 역시 마음의 상태에 귀착한다.
자율신경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고유의 세포의식을 약화시키는 정신 작용이 병을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병은 뇌척수신경의 활동에 잘못이 있어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뇌척수신경 그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광자체 속에 있는 각자의 영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뇌척수신경은 영혼의 명령을 받고 작동하는 조직체로서 뇌 그 자체는 명령의 집행자가 아니다. 명령을 받아서 각 기관에 작용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뇌는 육체주의 전자 계산실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적인 전산기를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다. 우리의 영혼이다. 이 영혼이 병의 제조자가 되기도 하고 건강의 근원이 된다. 이 두 개의 신경조직은 인간의 영혼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의 상념 여하에 따라 두 개의 신경조직이 보다 강인하게 되기도 하고 약하게 되기도 한다.
배타적이고 자아가 강한 사람, 욕망의 볼모가 되어 있는 사람, 성내고 원망하며 비난, 험담,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병의 원인을 만들고 사고의 원인을 불러들이며 환경의 부조화를 자초하고 있다.
이러한 상념과 행위가 질병의 경우, 자율신경을 약화시켜 육체세포의 활발한 운동을 저해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뇌척수신경도 부조화하게 되어 정신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육체와 광자체와 의식체는 일체가 되어 현실의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의식체는 영혼이고 광자체는 저 세상에서의 영혼의 육체주이다. 그런데 그 영혼의 중심에 있는 마음이 육체주의 오관번뇌에 현혹됨이 없이 정도의 생활을 하여 스스로의 결점을 수정하고 있는 사람들의 몸에서는 후광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그의 광자체의 밝음을 의미한다. 영혼을 순화시킨다는 것은 광자체의 광자량이 증가한다는 말과 같다.
마음도 육체도 상호 관계가 있으므로 인간은 육체가 괴롭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하면 서로 조화를 잃어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록 육체에 결함이 있더라도 마음까지 결함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은 누구나가 건전하며, 둥글고, 크고, 넉넉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육체를 가지고 돌아갈 수는 없다. 육체주의 뱃사공의 노젓기 여하에 따라 험난한 이 인생항로도 즐겁고 뜻 있게 보낼 수 있다. 물질경제도 생활에 지장이 없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만족할 줄 모르고 욕망의 포로가 되기 때문에 괴로움의 멍에를 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스스로의 마음의 결함을 수정해 간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떤 신에게 빌더라도 그것은 타력신앙으로 성취될 리 없다. 자력이어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부과된 신의 법칙이다.
왜냐하면 신은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어진 것이라고 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육체주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부모를 위시하여 육체조상에 대한 가장 큰 효양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공양도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는 이처럼 언제나 불이일체인 것이다.
육체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연결되고 마음의 번뇌는 또한 육체 세포의 활동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자칫 무리한 일을 하는 수가 있다. 기일내에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에 쫓겨 육체를 혹사한다. 밤 2시, 3시까지 일을 하더라도 정신이 긴장하고 있으므로 피로는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에는 육체의 한계가 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면 일의 목적 대신에 병을 얻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육체는 적당한 운동과 휴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정신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운동과 휴식의 상호 관계에 의해서 유지된다. 낮에는 육체를 움직이고 밤에는 휴식을 취한다. 이러한 원리 원칙을 무시하고 마음만 앞서 육체의 휴식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육체는 당연히 신진대사가 약화되어 결국 병에 걸리게 된다.
적당한 운동을 하지 않고 난의 포식을 일삼고 있으면 육체는 저항력을 잃고 대수롭지 않는 감기라도 큰 병을 유발하게 된다.
오랜 직장의 긴장에서 풀려나 남은 여생을 은급으로서 지내려고 하는 정년 퇴직자가 긴장을 풀고 1,2년을 살다가 죽는 예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정신 활동과 육체 활동의 상관성, 원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원리는 생활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으로 어렵다, 혹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하는 환경 속에서 인간은 아무래도 자기를 발견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돈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기 마련이고 가난하여 내일의 끼니가 여의치 않는 상태이면 마음까지도 가난하게 되어 남의 일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어진다.
옛부터 가문보다는 성장 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환경에 의해서 인격의 형성이 크게 달라진다.
나의 지도령 원투스리는 과거세의 모세라는 사람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왕궁에서 거두어져 자라는 바람에 거기서 지와 인과 용을 배웠고 성장함에 따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모순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성의 안팎을 막론하고 노예의 괴로움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노예 해방을 위하여 결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만약 모세가 왕궁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노예의 자식으로서 성장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떠한 운명의 길을 걸었을 것인가.
운명의 아들, 모세의 생애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며 그 화려했던 후반생도 아마 매우 다른 것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거두어졌기 때문에 노예로서는 배울 수 없었던 문자를 배웠고 품성을 도야했으며 왕궁의 체제의 뒷면을 알고 사회 전반을 두루 볼 수 있는 소양을 몸에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용자 모세는 마침내 자기가 노예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모순에 눈뜨게 된다.
그래서 육십 몇 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안주할 땅을 찾아 사십 몇 년에 걸친 긴 여행길에 올랐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환경에 따라 사물을 보는 시각, 성격,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이다.
정도를 성취하는 길은 고락의 양극단에는 없고 중도에 있다.
중도의 마음은 찾으면 찾을 수록 심오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중도의 마음을 일상 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실천하는 길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반드시 자아가 튀어 나온다. 이기적인 자기보존의 싹이 트게 마련이다.
우리는 고락 속에 있더라도 이를 극복해야 하며 자기의 결점을 바르게 고치지 않는 한 깨달음의 경지에는 숫제 근접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항상 반성이라는 행위를 잊지 않고 정신과 육체의 조화, 환경의 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중도란 글자 그대로 한가운데의 길이다. 한가운데란 언으로 말하면 언의 중심,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세상은 남녀, 선악, 미추와 같이 상대적으로 되어 있으며 인간은 그 상대 속에서 영혼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현상계이니만큼 우리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좋은 수행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선인 뿐이고 괴로움이 없는 세계라면 수행은 되지 않는다.
인간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을 통하여 비로소 빛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광명의 세계를 찾았을 때의 그 기쁨은 비할 데 없이 큰 것이다.
그것은 전생윤회의 비밀을 알고 이 현상계에 육체를 지니고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위대한 의미를 깨닫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깨닫는 것 없이 고뇌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고 번뇌 속에서 일생을 보내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태어나기 전의 둥근 마음을 왜곡된 상처 투성이로 만들어 저 세상으로 되돌아 간들 그것 역시 자업자득일 뿐이다.
저지른 스스로의 죄는 엄한 지옥계에서 그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떠한 괴로움도 견디고 위대한 인생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욕망의 바다에서 방랑하고 있는 길 잃은 중생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 구해주어야 한다.
그 실천 행동이야말로 신의 자식으로서의 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어떤 자는 국가를 위하고 민족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사상에 취하여 중도의 길을 그르치고도 그것을 대의로 착각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시 한번 대의와 명분이란 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류는 본디 모두가 다 형제이다. 지구는 하나이고 거기에는 애당초 국경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인류 생존의 긴 역사에 의해서 저마다의 자기보존, 자아아욕에 따른 생각으로 말미암아 권력이 생기고 지배가 생겨 경계가 대중의 희생 위에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나라와 나라의 경계는 기정 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인류의 이상으로부터 벗어나 각 나라의 민족 에고이즘이 되어 그것이 인류의 한 척도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인류의 큰 잘못이다.
그리고 개인의 마음까지 일상 생활 속에서 선악의 감정에 지배되어 이념보다도 자기의 이익, 가족의 행복이 선행하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일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은 선인이고 자기를 매도하는 사람은 악인으로 몰아부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개인생활이건 나라와 나라의 관계이건 모두가 자기의 편리, 자리 나라의 편리, 자기 민족의 편리라고 하는 자기보존의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선·악, 정·부정의 기준은 지금 엉망이다. 설사 법률이 있다고 해도 법률 이전의 개개의 자기보존의 감정이 선·악, 정·부정을 결정짓고 있다.
이래서는 중도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중도의 마음은 자아를 떠난 객관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 자신을 백지의 상태에 놓아야 한다.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서 머리 속에 채워져 있는 기성관념들을 일단 옆으로 밀어내 놓고 자기의 모습을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지식이나 경험 따위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한 얄팍한 척도로써 사물을 보면 자기의 척도 이외의 넓이는 알지 못한다. 상황의 판단도 흐려지고 만다.
중도의 마음은 사심이 없는 마음이다. 그것은 곧 신의 마음이요, 신의 척도인 것이다. 이 신의 척도에 섰을 때 비로소 바른 판단이 서고 정신과 육체, 환경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생활을 할 때 우리는 자기를 알게 되고 가정과 나라의 평화며 이웃나라와의 조화도 유지될 수 있으며 불국토 유토피아의 완성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상실한 사상으로서는 인간의 대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투쟁과 파괴의 아수라계를 만들어 낼 뿐이다.
중도의 마음을 일상생활의 지표로 삼고 끊임없는 반성과 보은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만이 우리가 정도를 성취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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