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은 스스로의 마음이 만든다
인생항로에 있어서 육체주의 부속품인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육근이 마음을 헷살리게 만든다. 괴로움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중도를 깨달은 의식의 중심,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에 물어야 한다.
모든 현상을 편견없이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선의의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반성해 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부조화한 상념의 구름을 걷어버리기 위해서는 반성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고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범하지 않는 생활을 다져나가는 길 밖에 없다.
맹목적인 인생 수행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반성은 신이 내려준 큰 자비에 다름 아니다.
명상적인 반성은 마음의 구름을 제거하고 그 상념이 신의 빛으로 감싸여지기 대문에 영위기가 정묘하고 편안한 경지에 들게 한다.
인간은 생활을 하면서 곧잘 인생의 무정이나 덧없음, 슬픔에 직면한다. 그래서 일상생활에는 반성할 기회가 수없이 마련되어 있다.
친한 사람의 죽음, 사회의 모슨, 질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운명의 장난, 삶으로 인한 헛된 노력 등 인간의 온갖 괴로움을 통하여 반성할 기회를 요구받는다. 반성을 통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넓고 넉넉하고 둥근 마음을 되찾아 신의 자녀로서의 자각이 싹텄을 때 실재계의 천사들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태어나고 무엇 때문에 고락을 체험하며 어찌하여 죽어가는가, 그리고 죽은 뒤의 세계는 무엇일까라고 누구든지 의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의문에서 인생을 바르게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눈 뜨고 지난 날의 그릇된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진심으로 반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잠재하고 있는 의식의 문이 열리어 우리는 과거세에서 공부한 체험을 기억해 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판단에 의한 중도의 생활이 시작됐을 때 독선적인 마음이 사라지고 인류는 모두가 형제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며 위대한 자애의 힘으로 우리들의 영위기는 상승하고 향상된다.
중도에서 이탈한 잘못을 용기 있게 수정했을 때 마음은 정화되고 광명으로 충만하다.
마음이 정화됨에 따라 수호령이나 지도령이나 영혼의 형제들은 우리의 새로운 영혼의 향상을 위해 서로 협력하여 영감을 주기도 하고 혹은 직접 말을 걸어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지도령은 새로운 인생 학습에 대하여 가르치고 인도해 주며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한 협력을 아끼지 아니한다.
반대로 자기보존이나 자아아욕, 교만 따위가 그 마음에 싹트면 어두운 영위기에 스스로의 마음이 타락하여 지도령이나 수호령들의 협력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지옥령이나 동물령, 끝내는 마왕에게 그 마음을 침범 당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은 그처럼 선악 어느 쪽으로도 가기 쉽다.
올바른 마음의 토대가 되는 법칙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법의 세상이 되면 인간은 판단하는 마음의 척도를 잃게 된다. 스스로 혼란에 빠져 부조화한 사회를 만들고 만다.
부조화의 씨앗은 결국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제거하지 못하면 엄한 지옥계에 떨어져 그 부조화한 마음의 수정을 완수해야 하는 더 어려운 난관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지옥계로 가는 것도 천상계로 가는 것도 자신을 속일 수 없는 선한 양심이 재판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재판하는 것이며 그 재판은 공정무비하다.
이 현상계에 있어서의 재판은 인간이 만든 법률에 의해서 인간이 재판받고 있다. 재판관의 생각이나 사상적인 배경 개인적 감정도 그 판결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본래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피고의 신병 구속으로 육체적인 행동은 제한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마음까지 속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스스로의 상념에 의해서만 자유 자재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중도의 법칙을 무시한 마음은 반드시 괴로움을 만들고 만다.
일부 종교가들은 벌을 받는다는 협박으로 신자의 마음에 고랑을 채워 조직의 세포로 만든다.
신불은 절대로 벌 같은 것은 내리지 않는다.
벌은 스스로의 마음과 해위가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릇된 교리에 빠진 신도들도 때로는 그 마음 속에 큰 의문이 고개를 쳐들 때가 있을 것이다.
의심하면 벌을 받는다고 겁을 먹고 마음을 점점 더 작게 위축시켜 자유와 평안을 잃고 만다.
제목이나 경을 외면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뇌세포만 혼란시킬 뿐 마음의 평안은 기대할 수 없다.
스스로의 마음의 존엄성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헤매고 있었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태어나기 이전까지는 천상계에서 마치 영화의 스크린에 비친 화면을 보는 것처럼 이 지상계의 생활상을 죄다 보고 있었을 텐데 일단 지상계에 육체를 지니고 태어나면 눈이 멀어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병든 인생을 걷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둥글고 넉넉한 마음을 비뚤게 망가뜨려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세 걸음 나가면 한 걸음 물러서서 자기의 마음과 행위를 반성하여 괴로움의 씨를 뿌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성이란 내재하는 위대한 지혜의 샘을 파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차원을 초월한 실재의 세계로부터 그 사람이 구하는 질과 양에 비례한 모든 지혜를 빌려주는 지도령이 존재한다.
반성은 자기를 똑바로 다시 보는 의식의 전환 작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기를 다시 본다는 것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일이며 거기에는 자아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의 결점이나 장점이 뚜렷이 나타날 것이다. 그 결점을 고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그 뿌리를 뽑아 없애야 한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수호령, 지도령도 함께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진실과 거짓이 동거하고 있는데 반성에 의해서 거짓된 어두운 구름을 걷어낼 수 있다. 그것이 반성의 크나큰 공덕이다.
결점의 뿌리가 제거됨에 따라 우리는 깨달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서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에의 단계가 올라감에 따라 관자재의 힘이 우리의 잠재의식에서 솟아난다.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마음을 얻은 다음에야 생사를 초월한 대오, 우주 즉아의 경지에 들 수 있다.
육체의 오관번뇌도 이 경지에 이르면 스스로 소멸되고 위대한 보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마음의 세계, 실재계에는 우리들 영혼의 형제들이나 친구들이 있어서 항상 현상계에서 수행하고 있는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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