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천사, 제천선신
우리 인류는 신의 신체의 일부분인 지구라고 하는 환경에서 육체의 배를 타고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지구 위의 만생 만물을 지배하여 대조화에의 길을 열어가는 사명을 신으로부터 위임받고 있다.
빛의 대지도령이나 천사들은 인간을 위시한 만생만물에 대하여 자비와 사랑으로 일관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육체의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투쟁과 파괴의 부조화한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워 하고 있다. 흡사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전쟁의 무참한 꼴을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과도 같이.
사람들의 마음의 영위기가 조화되어 있을 때는 빛의 천사들이 영감적으로, 또는 현상적으로 협력할 수 있지만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조화한 영위기가 있으므로 천사들이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사람들의 의식의 차원이 흐려지면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인간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현상이며 그런 마음을 지배하는 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인간은 온갖 체험을 통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부조화한 혼란 속에서 깨달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자기가 신의 자식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고정이 빠르냐 늦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늦다는 것은 큰 괴로움의 짐을 지고 헐떡이면서 인생의 길을 오래 걸어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세와 현세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상념과 행위가 집약된 것이 현재의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실재계의 빛의 천사들은 늘 이러한 우리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지상계에 경찰이나 군대처럼 시민 대중을 다른 범죄나 폭력으로부터 지켜주는 직업이 있는 것과 같이 실재계에도 그와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는 천사들이 있다.
또한 빛의 천사들 중에는 부조화한 지옥령이나 동물령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선량한 중생을 수호하는 직책을 가진 천사들도 있다. 이들을 제천선신이라고도 말한다.
변재천 또는 대흑천이라고 하면 돈벌이에 무슨 도움을 주는 선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어처구니 없는 잘못이다. 그들은 결코 돈벌이의 협력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변재천이란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잠재의식층에 쌓아온 우리들의 지혜의 보고를 열기 위한 협력자이다. 그리고 육체를 가진 빛의 천사들이 정법을 유포할 때의 재정적 협력자이다. 경제적인 원조나 환경을 제공하는 제천인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우상화하고 빌면 재물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인즉 돈벌이와는 전혀 인연이 먼 제천선신인 것이다.
그리고 이나리대신명이라든가 용신, 용왕과 같은 선신도 있다.
그들은 동물령들에게 신의 자식으로서의 길을 가르는 직책을 맡은 천사들이다.
특히 여우 따위는 영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부조화로 이끌어가기 쉬우므로 이것을 이나리대명신으로서 받들어 제사지내고 있는 맹신을 경계해야 한다. 여우는 결코 이나리대명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용왕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마음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동물들에게 정법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가장 엄격한 수행이고 학습이라고도 하겠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감정의 기성이 강하고 본능적이므로 지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용왕, 이나리대명신이라고 불리는 제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 곧 윗단계의 빛의 지도령이 되기 위한 수행 과정이다. 그러나 실패할 위험성이 많은 환경이기도 하다.
제천선신들도 뱀이나 여우를 지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이 현상계에서 말하면, 약 300년 동안이나 엄격한 환경에서 고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서는 흔히 용신이라든가 이나리 대명신이라고 하면 여우나 뱀이나 용 따위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그들 동물령들은 장님과 다를 바 없는 육체인간을 희롱하기도 하고 또한 그들도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여러 가지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자아아욕에 빠져 길을 잃고 마는 경우가 매우 많다. 어느 날 나를 찾아온 중년 부인이
“선생님, 저의 수호령은 흑룡이라고 다른데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호령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마는...”
라고 말했다. 나는 즉석에서
“당신은 들이나 동물원에 있는 뱀을 좋아합니까”
라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부인은
“무섭기도 하고 기분이 나쁩니다. 딱 질색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무릇 뱀이나 용 따위가 우리 인간의 수호령이 되는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용이나 뱀이 정법을 잘 터득하여 용왕이 하는 일을 도우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용신도 용왕도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장사가 번창할 것을 목적으로 흔히 여우 따위를 섬기고 있는 가정이나 점포가 있는데 단순히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섬기고 비는 것은 매우 위험한 노릇이다.
왜냐하면 여우나 용이나 뱀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그 가정을 혼란에 빠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들을 볼 수 있고 그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사람이 욕심을 위해서 그들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빌어서 장사가 번창하더라도 인간은 이내 그들에게 사례하는 것도 공양을 바치는 것도 잊고 만다. 그래서 여우나 뱀의 불만을 사서 병자가 생기거나 장사가 기울거나 하고 만다.
태양은 만생만물에게 아무리 많은 열과 빛을 주더라도 결코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 없다.
신의 마음은 그와 같은 동물령들과는 다르다. 동물령들은 대개 자애가 없고 욕망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나 지도자의 인격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여움, 시기, 비방, 아욕, 정욕 따위를 품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망을 채우려고 하다가 도리어 괴로움을 당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지상계에는 온갖 동물들이 있다.
저 세상에도 영혼을 향상시키기 위해 수행하고 있는 선한 동물들이 있는가 하면 지옥계에서 본능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이 지상계에서 욕망에 눈먼 사람들의 마음 속을 혼란시키고 있는 자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제천선신들도 부조화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빙의하고 있는 부조화한 동물령이나 지옥령, 마왕이나 아수라들을 다스리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배자는 어디까지나 자기인만큼 자기 자신이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를 수정하지 않는 한 자애의 광명에 싸일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제천선신이 부조화한 영들을 지배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악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부조화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만다. 제천선신의 지배는 일시적 청량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결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다.
부조화한 지옥령에 빙의된 사람은 마음의 안정을 잃고 항상 불안하며 종내는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만다.
육체의 배는 원래 한 사람의 사공이 배를 젖고 있는 것인데 그 인간의 마음이 부조화하면 지옥령에게 지배되어 뱃사공이 두 사람도 세 사람도 되고 만다.
지옥령들이 귓전에서 속삭이기도 하고 마음 속에서 말을 걸어오기 때문에 자기이면서도 자기가 아닌 것과 같은 상태에 빠진다. 다시 말해서 정신분열증처럼 되고 만다는 것이다.
조울이라는, 중도를 잃은 양극단의 마음의 상태가 되어 스스로의 인격을 상실하고 만다.
조병의 경우는 개방적이 되고 완전히 지옥령에게 지배되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 이미 영위기는 헝클어져 불면의 상태가 계속되고 환각을 일으키거나 걷잡을 수 없는 언동을 하게 된다. 평소의 울분을 터뜨리듯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거침없이 말하고 만다. 이러한 사람의 일상은 우울한 생활이며 원한이나 질투, 남을 비방하는 마음이 강하다. 겉으로는 얌전하게 보여도 허영심과 자존심은 보통 이상으로 강한 자들이다.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으며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때때로 극단적이 되어 마음의 안정을 잃고 있다.
울병의 경우도 본인을 지배하고 있는 지옥령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과보호의 교육, 방임 교육, 그리고 부모의 마음의 부조화가 원인이다. 어버이와 자식의 대화가 거의 없는 가정에 이러한 마음이 비뚤어진 자녀들이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어두운 상념에 뒤덮여 이미 신의 빛을 받을 수 없고 스스로의 마음을 지옥령에게 팔아버린 자들이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용기와 노력으로 스스로의 성격을 중도로 되돌아오게 하는 수밖에 없다.
어두운 상념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제천선신은 지켜주지 못한다. 그것은 이 지구가 수도장임과 동시에 인간에게는 개의 생명으로서의 존엄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생활을 통해서 마음의 가치를 알고 서로가 신뢰와 자애로써 밝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빙의하고 있는 지옥령들에게는 그들의 죄를 일깨워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항시 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지옥령들에게 마음가짐을 가르쳐주는 것이 중요하다.
중도의 생활이 일상 속에 행위로서 살아날 때 자기 자신을 원위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부조화한 신앙 따위에 깊이 빠져들면 그들 지옥령들의 무자비한 행위는 더욱 기세를 부린다. 이야말로 ‘긁어 부스럼 일으킨다’라는 속담 그대로이다.
마음이 둥글고 크고 자비에 찬 사람들은 절대로 이와 같은 정신적인 병에 걸리는 법이 없다. 이 경우는 마음 속에서 생기는 마를 제천선신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지상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빛의 천사들은 영원한 신의 마음 곧 정법의 씨를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고 꽃을 피워 대조화에의 길에 광명을 준다.
그러나 인도의 고타마 붓다나 예수 그리스도, 모세도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무척 험난한 것이었다.
빛의 대지도령들이 지상에 내려오는 시기는 정법의 힘이 없는 말법의 혼란기이다. 사람들은 마음을 잃고 인간으로서 태어난 목적과 사명을 잊어버렸을 때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물질문명의 노예로 타락시키고 부조화한 종교가 난립하며 마음을 마왕이나 동물령에게 팔아넘긴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이다.
투쟁이나 파괴가 일상의 다반사로 되어버린 세상을 말법의 시대라고 한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 재해나 천변지이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가정은 헝클어져 어버이와 자식의 마음이 단절된다. 교육자는 중도의 교육을 잊고 사상적으로 편협된 교육을 한다. 정치가는 사리사욕 당리당략에 내달으며 사상이라기보다는 자기 주장의 난립, 거리에서의 사고사... 등등 열거하지도 못할 부조화한 세상이 전개된다.
이것을 구하는 길은... 정치가도, 법률가도, 교육자도, 문화인도, 종교가도, 모두가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적인 판단을 기본으로 하는 길밖에 없다 하겠다.
남을 돌보지 아니하고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이기주의자로서 스스로 조화에의 길을 폐쇄하여 고독한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애를 표현함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사회와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행위야말로 참된 보시가 되는 것이다.
노동 봉사, 경제적 봉사, 정신적 봉사의 행동이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룩해 간다. 그것이 사람마다의 자발적인 행위일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 행위는 강제도 의무도 아니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오는 빛의 대지도령들도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이 양친을 선택하고 가장 깨닫기 쉬운 환경을 가려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도 모세도 고타마 싯달다도 대지도령으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내려왔던 것이며 아가샤계 그룹의 빛의 대지도령들이다.
고타마 붓다는 자비의 마음을 45년 동안 인도의 중생에게 설법했다. 그리고 불국토를 이룩하기 위하여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설법했다.
당시의 바라문교의 화석화한 베다나 우파니샤드의 먼지를 털고 올바른 법의 빛으로 많은 중생의 마음에 인생의 살아가는 기쁨을 심었다.
예수 그리스도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혼경을 정하여 이스라엘에 육체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래서 로마의 지배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대중에게 화석화된 유태교, 사람들의 지와 의의 먼지에 싸인 모세의 법을 사랑이라고 하는 표현으로써 수정해 나갔던 것이다.
스스로의 육체는 악마들에 의해서 멸망했지만 부활의 현상으로서 제자들의 결속을 다지고 정법의 토대를 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상계에 신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타난 빛의 대지도령은 몸소 인생의 난관과 의문에 부딪치면서 그 해명을 스스로 규명하고 실재계의 빛의 천사들의 협력을 얻어 깨달음의 정점에 도달해 갔던 것이다. 그 신리는 불변의 것으로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정법도 역사가 흐름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나 학자들에 의해서 학문적으로 난해하게 개조되어 개인의 견해가 가미되고 화석화되어 버린 것이다.
또한 그 역사 속에서 권력자나 지도자들이 대중을 지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종교를 이용한다. 그러는 동안에 정법이 왜곡되어 버린 면도 있다.
그러한 화석화된 법의 수정을 위한 사명을 띤 지도령들이 태어나는데 구태를 고집하는 광신자나 맹신자들의 박해를 받고 학자나 권력자들의 가해를 당하여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여러 단계의 빛의 천사들도 함께 육체를 지니고 태어나지만 이들 또한 변질된 종교를 정도로 돌려놓지 못한 채 실재계로 돌아가고 마는 예도 많다.
스스로 신을 자칭하여 예배하게 하고 중생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집착의 화신이 되어 지옥계로 ᄄᅠᆯ어져 간 자도 적지 않다.
말법의 세상이 되면 될수록 혼란된 부조화한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아, 사이비교조가 만들어낸 종이 조각에 배례를 올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목에 거는 펜던트까지 나돌아 신의 대명사로서 비싼 값으로 팔리고 있는 예도 있다.
교조라든가 그를 둘러싼 무리들은 대신전인 이 지구상에 옥상옥을 쌓아 정재라고 칭하는 부정한 돈을 모아서는 우람한 건물을 지어 소원을 빌 대상물을 만들어 놓고 맹신자나 광신자들을 갈팡질팡 헤매게 하고 있다.
또한 몇 사람을 신자로 끌어들이면 구원받는다든가 몇 사람을 인도해 오면 병이 낫는다든가 하면서 간접적 협박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대신전 대불전이라고 칭하는 건물을 잇달아 지어가고 있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광신자 맹신도들이야 말로 구원받지 못한다.
오직 한 마음으로 염불을 외우면 구원받는다고 아침 저녁 근행을 시킨다니 종교도 이 지경에 이르면 땅에 떨어졌다 하겠다.
“가난은 전세의 인연에 의한 것이다. 이 종교에 귀의하여 신에게 빌면 그 업이 소멸된다.”
라고 신앙을 강매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마음까지 가난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본래가 넉넉한 것이다. 태어날 때에는 누구도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모두 발가숭이이다. 만다라를 목에 걸고 태어났을 리도 없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으로서 생활하고 있다.
태양의 열과 빛, 대자연의 혜택의 일체가 신의 대자비이고 그것이 또한 마음이라고 하는 원래의 모습이 아닌가.
인간도 그러한 그릇된 지도자들로부터 속임을 당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신의 자녀이다. 일체의 괴로움은 우리들 자신의 마음가짐과 행위로써 수정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구원받게 될 것이다. 정법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불변의 신리이다.
힘 안 들이고 구원받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용기와 지혜와 노력으로 자신의 결점을 수정함으로써 괴로움의 원인을 없앴을 때 비로소 신으로부터 조화된 광명을 받아 구원된다.
길은 오직 하나, 신의 마음을 지향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편안한 마음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신은 벌 따위는 주지 않는다. 벌은 자신의 마음가짐과 행위가 중도를 벗어나면 마음에 구름이 끼고 그것이 신의 빛을 차단했을 때 자업자득으로 현상화되는 것이 곧 벌이다.
다시 말해서 벌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다는 말이다.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지 않도록 하면 된다.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본래의 가르침은 인간의 바른 삶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오랜 전생윤회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일체의 인생에 대한 위대한 지도서가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체험된 지도서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법은 그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도 고타마 붓다도 마찬가지이다.
철학화된 불전이 정법이 아니라 불전의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고 행하는 것이 정법이다. 이 세상에 육체를 지니고 태어난 빛의 대지도령들도 이와 같은 불변의 신리를 설법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원시불교나 원시그리스도교와 완전히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원시불교이건 원시그리스도교이건 그것이 신리라면 현대에서도 통용되는 것이 당연하다. 인도의 강가의 강물이 옛날도 지금도 변하지 않듯이 신리는 불변인 것이다. 변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아닐까.
정법은 그 시대의 양상에 맞도록 설법되지만 그 근본은 조금도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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