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피안으로 가는 길
중도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것은 석가가 설법한 중도의 목적에 맞는 팔정도밖에 없다.
바르게 본다,
바르게 생각한다,
바르게 말한다
라는 세 가지 정신 작용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기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는 보지 않는다, 듣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라는 삼원의 속담을 통하여 번뇌 이탈의 기초 조건으로 삼는 말이 있다.
번뇌라고 하는 미망이 생기는 것은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하는데서 일어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번뇌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눈·귀·입을 닫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보고 , 듣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닫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감각 작용을 현실사회 속에서 올바르게 행하라고 하는 뜻이다. 중국의 속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피가 되기 때문이다. 중도를 마음의 척도로 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생활, 그것이 바로 올바른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담은 번뇌가 생기는 가장 위험한 정신 작용에 대한 경고를 뜻하며 또한 인간의 약점을 꼬집은 속담이다.
팔정도의 첫머리에 있는
'바르게 본다'라는 것은 선한 중도의 마음의 눈으로 보라.
'바르게 생각한다'라는 것은 머리로서 생각하지 말고 선한 중도의 마음으로 생각하라.
'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선한 중도의 마음으로 생각한 바를 말하도록 하라라는 뜻이다.
마음이란 의식의 중심이며 의식의 중심은 자타의 차별관이 없는 선한 마음이다.
다음으로 '바르게 일한다'라는 것은 주어진 그 직무에 대해서 충실하게 의무와 책임을 완수한다는 뜻이다.
이 경우의 일이란 단순히 표면적으로 양적으로 남보다 많이 한다는 것보다도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빌고 일하는 환경과 그 제공자에게 감사하며 그 감사의 마음을 행위에 의해서 보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일하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들도 일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가 보다 나은 생활의 안정과 마음의 평안을 위하여 서로 조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화가 이뤄지고 있는 곳에 모순과 갈등을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스스로의 의무와 책임을 완수할 것, 비록 일의 양은 적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나는 봉사의 행위를 신은 훨씬 더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영혼의 수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므로 일 그 자체는 영혼 수행의 재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질과 양이 상부하면 그 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
그러나 신불의 눈은 어디까지나 그 질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자의 만등보다 빈자의 일등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서 우러난 행위, 그것을 가리킨 말이다.
자본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물질과 경제가 기준이 되어 있으므로 거기에는 마음이 없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과연 경제일까. 경제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마음이 빈약한 인간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화폐경제라고 하는 것이 온갖 불안정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바로 보아야 한다. 참된 행복이란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만이 결코 인생이 아니다.
신이 만들어 낸 법칙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것이며 인간의 지로서는 이 법칙을 뒤집을 수 없는 노릇이다.
신의 자식인 인류는 이 불변의 신리를 깨달아 그 신리에 맞는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보다 넉넉한 마음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조화된 사회를 이룩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르게 생활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의 마음과 행동에 있어서 가정생활, 이웃과의 사귐, 직장인으로서의 자세, 사용자로서의 처신 등을 중도에 맞게 생활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자칫 사소한 일에 마음이 빼앗겨 육근에 좌우되기 쉬우며 마음을 비뚤게 하기가 일쑤이다.
더욱이 눈으로 보는 여러 현상, 귀로 듣는 여러 문제, 그리고 내뱉는 말, 이런 것에 의해서 우리는 마음이 갈피를 못잡을 때가 많다. 또한 남까지 현혹시켜 큰 죄를 짓게 된다.
이와 같이 눈·귀·입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이것들에 휘둘리게 되면 포로의 볼모가 되어 자기 자신을 잃고 만다.
그래서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카르마가 마음 속에 베어 나와서 악순환(나쁜 운명)에 몸을 빠뜨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바라지 않는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사람한테 속아 남을 믿지 못하게 되기도 하며 마음은 점점 작아진다. 작은 틀 속에 자기 자신을 가두어, 괴로운 인생을 살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카르마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현재의 환경, 입장, 살아 있는 그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물건 하나에도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깃들어 있으며 태양이나 물과 같은 자연의 은혜가 베풀어짐으로써 우리의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해 마땅히 보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결점을 알고 고쳐나가서 인류와 사회를 위하여 남은 시간을 봉사해야 한다.
바르게 사는데는 먼저 육근에 좌우되지 않는 자기를 발견할 것, 그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결점과 장점을 똑똑히 바로 알고, 결점은 고치고 장점은 살려나가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병이건 사고이건 또한 남에게 속임을 당하건 그것은 모두 오관에 좌우된 상념과 행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점은 아무래도 오관에 근거하는 상념에 결부되기 쉽다. 그러기에 결점을 고치는데는 결단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바르게 생활한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깨달은 나날의 생활 행위에 있는 것으로서, 항상 평안한 마음으로 일체의 거리김이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만족할 줄 알게 되면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정도를 깨닫고 뉘우침없이 일을 하루하루 쌓아나가면 누구든지 피안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하루가 한평생이라고 생각하고 후회없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반성해도 좋은 면밖에 나오지 않는 그러한 하루를 체험해 나가야 한다.
바르게 도에 정진한다는 것은 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의 일이다.
부부, 부자, 형제, 친구 등은 저마다의 인연, 또는 약속 아래 맺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욕에서 나오는 자기 주장을 하지 말고 조화를 목표로 감사와 보은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그 중에는 자기는 조화를 바라지마는 아내가, 남편이 또는 친구가 좀체로 따르지 않는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헤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는 한쪽이 양보할 마음을 가지고 태도를 바꾸면 상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무엇인가 원인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부조화의 원인을 찾아내도록 깊게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래도 조화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상대의 폭력이나 독설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도에서 이탈한 상대의 모습을 느껴도 다투어서는 안 된다. 다투지 말고 '이 가엾은 사람에게 부디 신이여 평안함을 주소서'하고 진심으로 기원할 만한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인욕은 '두고 보자', '나중에 복수하겠다' 등의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있어서는 결코 인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상념은 어두운 구름으로 덮여 있고 스스로의 영위기를 부조화로 혼란하게 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외부로부터 받은 욕된 일을 잘 견뎌 마음에 왜곡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결국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부조화하게 되거나 남의 신뢰를 잃고 점점 더 괴로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고 만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는 순환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과 꼭같은 결과가 된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둥글고 넓고 넉넉한 것으로 만들어 설사 여러 가지 부조화한 환경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대조화를 목적으로 한 인간관계를 이룩해 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진의 제일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은 바르게 염한다는 것이다. '염'에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훌륭하게 되고 싶다든가, 좋은 집에 살고 싶다든가, 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든가, 저 사람은 밉다고 하는 것 등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일 터이다.
그러나 올바른 염은 중도에 맞는 목적을 가진 것이 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염 가운데는 자기의 욕망에 뿌리를 둔 것이 많은데 그런 욕망은 끝없이 뻗어가게 마련이다. 이것이 이윽고는 사람고 사람과의 조화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에게는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스스로의 기량과 이 현상계에 나와서의 기량이 있다. 그것이 총합된 인간의 그릇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해도 대통령은 한 사람밖에 못한다. 그런데 기량은 생각하지 않고 자리만을 탐하기 때문에 쟁탈전이 벌어진다. 예전에는 무력으로 이것을 빼앗았지만 현대는 어떠한가.
선거라는 것이 있지만 여기에도 투쟁은 필연인 듯하다. 그리고 관리나 회사원의 세계에서도 직책에 대한 집착, 자리 다툼이 치열하다.
이와 같은 자기의 욕망에 뿌리를 둔 염이 작용하기 때문에 사회는 분쟁과 모순이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욕망도 하나하나가 자기의 그릇을 알지 못하고 자아아욕의 포로가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것은 자기의 적업이 무엇인가 하는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에는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하는 한계가 없다. 그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마음에 만족을 아는 생활,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올바른 염은 이러한 의미에서 만족과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정인데 이것은 반성을 가리킨다.
앞에서 말한 일곱 가지의 규범에 비추어 오늘 하루의 자기의 상념과 행위에 지나친 점은 없었던가 하는 것을 되돌아 보고 만약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을 고쳐서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하지 않도록 궤도 수정하는 것이다.
반성은 단순히 나빴다, 좋았다로 끝나고 말면 올바른 반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반성할 때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발견했으면 그 잘못은 왜 일어났는가 하는, 자기 마음 속의 원인을 추구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일이 중요하다.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곧 마음을 정화시키는 길이 된다.
그 결과 정신과 육체가 우선 건전해지고 가정의 조화, 직장의 조화, 사회의 조화로 확대되어 나간다.
일상 생활 속에서도 하는 일에 실패했을 경우 그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여 두번 다시 같으 실패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렇게 하면 이윽고 그 실패는 성공으로 연결되어 간다.
반성도 하지 않고 같은 일을 반복해서야 성공하기는 어렵다.
사람의 마음과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정정'의 기본은 반성에 있다는 점을 깊이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명상적 반성은 마음에 가린 구름을 제거하고 스스로의 영위기를 높여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성, 반성하고 반성만으로 끝나면 스스로의 마음을 좁고 작게 하고 말 것이니 주의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내향적, 외향적, 낙천적, 비관적 등의 여러 가지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성격에 알맞는 반성의 방법을 터득하여 '정정'을 해야 한다.
정도는 지혜와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그에 이르는 지름길이며 동시에 정신과 생활이 넉넉해지는 지름 길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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