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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원점

제3장 인생의 의의와 정도-중도는 어디에 있는가

by Yuneelif 2023. 3. 3.

중도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의 강연회는 매 토요일과 일요일 각지에서 열리게 되었으며 질문자도 많아졌다. 그 중에서 특히 알지 않으면 안 될 문제를 추려 여기에 말하고자 한다.

'올바르다'라는 것의 기준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대학생이 물은 것이었다.

올바르다는 것은 그 나라에 따라서 또한 그 나라의 지도자의 생각에 따라서도 다를 수 있고 생활 환경에 따라서도 그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올바르다는 것은 권력이나 인간의 지혜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의 법칙 속에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복잡하게 생각하므로 도리어 해답을 어렵게 만들고 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형편에 이로운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일이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선악의 구별없이 다른 사람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선은 선, 악은 악으로서 매듭을 분명히 짓는 행동이 아니고서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자기의 중심으로 노여움이나 원한의 상념을 마음에 품은 채 겉으로만 상대방을 위하는 행동으로 위장하고 있는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듯 몸도 마음도 지치고 말 것이다.

진실로 상대방을 용서하는 그런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마음이 개고 평화로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입장에 집착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기보존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도 자기중심으로 생각했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는 형식만의 위함은 괴로움을 낳고 마음의 짐은 배로 무거워질 뿐이다.

자기보존이나 자아아욕은 자기 중심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이라고 하는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일방적이고 한편에 치우친 생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올바르다는 것은 한쪽으로 기울지 아니한 중도의 생각과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와 모든 타인을 포함한 조화된 생활이 만물의 영장인 인류가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인 것이다.

한쪽으로 기울지 아니한 중도란 대체 어떤 것일까.

우리의 육체 보존에 없어서 아니 될 것은 물이다. 그것은 H2O라고 하는 분자식으로 표기된다. H인 수소도 O인 산소도 지극히 불안정한 것이다.

공기 중에 산소나 수소가 너무 많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O인 산소는 모든 것을 산화시키고 연소시킨다. H인 수소도 애드버룬이나 기구 등에 사용되기도 하고 바테리의 충전을 하고 있을 때에도 나오는 것으로서 폭발력이 강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연성이며 폭발력이 강한 것이지만 조화되면 H2O라고 하는 가장 안정된 물이 된다. 더욱이 불타고 있는 것을 소화시킬 수도 있게 된다.

물에는 산성분이 강한 것과 알카리성의 것이 있으며 증류수는 그것이 중화된 아름다운 물이다.

우리의 육체적 조건에 적응될 수 있는 것은 가장 중화되어, 양극단과는 무관한 물이 좋다.

체질이 산성분이 강한 경우에는 알카리성의 물이나 알카리성 식품을 먹음으로써 체질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신체를 보면 물이 약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생물에게 물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또한 물은 어머니인 대지를 태양의 열 에너지와 함께 적당한 온도로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어떤 때는 얼어붙어 은세계를 만들고, 또 어떤 때는 유동하여 대지의 청소자가 되어 산수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대자연에 조화되어 있다.

또한 어떤 때는 은자처럼 기체가 되어 모습을 감추고 하늘저편에 집을 짓고 있다가 이따금 먹이를 사냥하듯 대지로 뛰어든다. 변화 자재의 힘을 지니고 있다.

대지의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 모체의 혈액과 같이 수맥을 이루어 내닫고 어떤 것은 모체의 열에 데워져 지상으로 분출하여 사람들에게 온천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샘이 되어 흘러나와 유유상종의 법칙에 따라 내가 되어 도시와 마을 근처를 아름답게 흘러간다. 먼지와 오물을 삼키면서 대하를 이루어 마침내 바다로 들어가서 대조화에의 길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물이다.

하늘과 바다의 조화됨에 따라 다시 깨끗한 물이 된다.

스스로 길을 찾아 스스로 조화 속에 융해되어 영원한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것이 물이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대기의 오염 때문에 그 깨끗하 물이 지상을 오염시키는 사태를 맞고 있다.

우리도 마음을 잃으면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행동이 없는 실천은 가공의 원칙에 흐르기 쉽다.

자연의 흐름에 거역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진로를 정하여 대조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물의 모습을 볼 때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고 반성하게 한다.

인간은 물과 같은 용기도 지혜도 노력도 없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결점에는 눈이 어둡고 타인의 결점에 대해서만은 유독 눈에 심지를 세우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억눌러 이기는 극기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까.

스스로의 눈에 비치는 부조화한 제현상을 억누르고 스스로의 귀에 들어오는 잡된 소리를 억누르며 자기의 편의만을 입에 담는 것을 억누르고 후각과 미각의 유혹을 억눌러 일체의 집착을 끊고 만족할 줄 안다면 인생항로의 거친 파도는 잠잠해질 것이다. 평안이 깃든 광명에 찬 대해 속으로 조화되어 갈 것이다. 그래서 설령 대해 속으로 대조화되는 물이라 하더라도 그 개의 물의 본성은 변함이 없는 것과 같이 우리들 개의 생명의 존재도 또한 우주 속에서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의 흐름마저도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간지스강의 물처럼, 인도에서 고타마 붓다가 설법한 올바른 마음에 대한 가르침을 잠재의식의 문을 열고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들도 나의 둘레에는 많이 있다. 

물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나 NaCl(소금)은 또 어떠한가.

이것도, 생물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다. 서로 양 극단에 있는 NaOH(수산화나트륨)의 염기 성분과 HCl(염산)의 강산성이 화합하여 중화, 조화된 것이 소금이다.

우리에게 단맛과 매운맛도 소금 넣기 나름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단맛과 매운맛의 양극단도 소금에 의해서 중화될 수 있다.

고기가 야채 따위가 썩지 않도록 하는 데에도 이용되며 우리와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연에 의하여 묶여 있는 것이 소금이다. 또한 악귀를 쫓고 액을 물리치기 위해서 소금을 뿌리는 습관도 있다.

이와 같은 습관은 중화, 조화가 근본이지만 최근에는 자기에게 이롭지 못한 사람한테도 소금을 뿌리곤 한다. 뿌리는 형식보다 마음가짐 쪽이 더 반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금을 뿌리는 사람은 좀체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맑게 한다는 것은 조화한다는 뜻이다. 이 뜻을 알고 있다면 소금을 뿌리기 전에 사람끼리 서로 마음을 터 놓고 대화함으로써 상호간에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선결 문제이다.

마음을 터 놓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의 생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탐지하려 들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어서는 불가능한 노릇이다.

자기의 결점도 장점도 드러내 놓고 중도의 마음으로 쌍방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 조화로 가는 첫걸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판단과 행동, 이것이 중도이며 대조화의 길로 통한다.

하물며 권력이나 무력으로 상대방을 지배하는 것은 일시적인 겉만의 조화는 이룰지라도 결과는 혼란을 낳을 뿐이다.

육체적인 행동에 제한을 가하더라도 중도의 조화된 환경은 이루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으로 아무리 제약이 가해지더라도 뱃사공인 그 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 속에서 납득된 것이 외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참된 조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의 마음인 대조화는 우리에게 주어진 태양을 비롯한 일체 대자연의 조화에서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자비의 모습이고 사랑의 모습이며 신의 마음의 현현에 다름 아니다.

고타마 붓다가 설법한 법화경의 방편으로 진흙의 늪에 피는 연꽃을 인용한 것처럼 대자연은 늘 우리에게 위대한 스승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스승은소금의 상태를 통하여 중도의 조화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