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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원점

제3장 인생의 의의와 정도-마음이나 정신의 실체는 있는 것일까

by Yuneelif 2023. 3. 4.

마음이나 정신이 실체는 있는 것일까

이 제목의 질문은 어떤 종교 단체의 청년부의 간부한테서 나온 것이었다. 

그 사람은 만다라 앞에서 아침 저녁으로 경문이나 제목을 올리고 있는 광신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석가의 불교는 이미 없으며 일련상인이야말로 말법의 세상을 구할 분이다'라고 말한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중국의 천태대사가 설법한 법화경, 그리고 전교대사에 의해서 일본에 전해진 법화경을 외우면서 '이것은 잠시 빌려쓰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알지 못할 일이다 지도자들은 갖은 말로써 그들의 주의를 진실인 양 꾸며대고 있다. 불교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세의 가르침이라고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 철학이니 뭐니 하면서 지에만 매달려 있을 뿐 마음은 없다.

다른 종교는 사교로 몰아붙이고 신자들에게는 벌을 받는다고 협박하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에 족쇄를 채운 가엾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벌 같은 것을 받을 리 없건만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차라리 종교 따위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하다.

'몇 사람을 입교시켜야 당신의 업이 없어진다'라는 말로 교묘하게 교세를 확장해 나간다.

조직의 세포로 있는 신자의 모습이야말로 가엾다. 신앙을 가지므로 도리어 괴로움과 의문의 와중에서 허덕이게 되니 말이다. 온갖 회의와 의문을 혼자 가슴 속에 숨기고 있어야 하는 지도자 역시 가엾다.

질문자는 나에게 이렇게도 말한다. "당신에게는 예배를 드릴 대상물이 없지 않는가."

"당신은 태어날 때 만다라를달고 나왔는가." 라고 되묻자 강연회장은 곧 웃음바다가 됐다.

"남자니까 달고 나온 것은 불알이었습니다."라고 그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신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었다. 만약 만다라 따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면 신은 우리에게 그것도 주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인쇄물이나 조각물을 본존이라고 모시고 있는 사람들은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존이 신이라면 도능로 살 수 있을 리 없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다. 경문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이를 생활에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바른 마음으로 생활하면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조직의 세포가 되어 자기를 상실하게 되면 올바른 말에도 귀가 열리지 않게 된다. 광신이나, 맹신에 빠지면 그렇게 되기 일쑤이다. 벌이라는 것은 바른 길을 잃고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에 다름 아니다.

본존이 벌 같은 것을 내릴 리 없다. 만약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본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이나 부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사실 그런 짓을 하는 장본인은 마왕이나 아수라나 동물령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들도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범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마음에 구름이 없으므로 신의 광명이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 마왕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자애의 빛이다.

유유상종의 법칙에 따라 태양의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엔 불결한 잡귀가 들끊게 마련이다. 썩은 물 웅덩이에는 파리나 모기의 유충인 구더기와 장구벌레가 들끊는다. 그런 곳이 저 세상의 이른바 지옥계이다. 음습하고 침침한 세계, 그 곳이 마왕들의 주가(거주하는곳)이다.

태양의 열과 빛이 가득 찬 곳에는 아름다운 화초와 싱그러운 푸르름이 넘친다. 나비와 꿀벌들이 모여들어 낙원을 구가한다. 설령 구더기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태양의 열과 빛 때문에 자연 도태되게 마련이다.

제목을 올리면 죽은 망령이 성불 구제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게 되는 것일까. 제목을 올림으로써 죽은 자가 성불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말이다.

우리들의 그룹 중에는 이미 정도의 실천으로 관자재가 되어 저 세상의 지옥계와 천상계를 마음 먹은 대로 돌아보고 올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죽은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도 금방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지상계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당시의 모든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해 줄 수도 있다.

F출판사의 S사장은 모든 종교를 취재해 온 베테랑이다. 그 분이 놀랐던 일이 하나 있다. 그 분의 죽은 아버지가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서 살아 있을 당시와 똑같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 때 강연회에 출석했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트란지스터를 응용한 좋은 수신기는 여러 나라의 방송을 청취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도 라디오나 텔레비젼과 흡사하여 모든 세계의 일을 파악할 수 있다.

병사구의 수신기는 잡음이 많고 혼신도 있어서 가까운 발신국의 것밖에 수신하지 못한다. 전파를 넣고도 좀체로 선국이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 각자의 마음의 조화도에도 이 수신기처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디오는 어느 나라에 가져가더라도 그 나라의 언어로 말한다. 우리들의 그룹 가운데에는 고대 인도어를 비롯하여 아득한 과거의 아틀란티스 제국과 태평양에 가라앉은 무우 대륙 시대의 언어에 이르기까지 과거세를 회상하여 말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많다. 수없이 많은 전생윤회를 거듭해 온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과거세의 모든 일이 기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의 테이프 레코더를 재생시킬 수 있는 길은 스스로의 마음의 조화도에 달렸다. 그러니 만큼 마음이란 것이 가장 중요하며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면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우리의 마음은 의식의 중심으로서 우리의 육체를 부리는 주인공이다. 우리는 기뻐서 감격할 때나 슬픔 때에는 가슴이 미어진다.

가슴이 미어지면 눈에는 눈물이 나온다. 눈물은 마음의 가정의 영역이 마음의 중심에 있는 상념, 지성, 이성 등의 작용에 의해서 육체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노여운 마음이 생기면 감정이 부풀어 올라 얼굴색이 파래지거나 붉어지고 더러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거나 몸이 굳어지기도 한다. 이는 곧 마으므이 움직임이 그대로 육체에 반영되어 현상으로 나타났음을 말해 준다.

뱃사공이 감정적으로 노를 저으면 배가 어떻게 되겠는가. 진행 방향을 잘못 잡는 일도 있게 될 것이다. 감정의 부조화는 그대로 육체적 부조화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올바른 판단도 불가능해진다.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 한 바르게 말하는 것, 듣는 것, 보는 것, 생각하는 것이 다 어렵게 된다.

자기에게 이롭지 못한 말을 듣거나 보거나 했을 경우에 우리는 곧잘 감정적이 된다. 이것은 중도가 아니다. 자기 보존의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듣거나 보거나 한다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상대방의 오해 때문에 생긴 감정의 갈등인 경우에는 그 오해를 풀어주어야 한다. 상대방이 감정적으로 다가오더라도 냉정한 이성의 힘으로 바르게 새겨듣고 바르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상대방의 감정적 언동에 휘말려 자기 자신도 이성을 잃는다면 상대방의 독을 그대로 먹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어두운 구름으로 가릴 뿐만 아니라 둘레의 영위기마저 부조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독은 체내에 남아 흘러다니게 된다. 그래서 심신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우리 그룹의 사람 가운데에는 과거세에서 동기생이었다는 사실을 비록 몇 천 년이 지난 오늘이라 하더라도, 당시의 언어로써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감격에 겨운 눈물의 해후를 체험하게 된다.

어느 강연회장에서의 일이었다. Y.S(33세)가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인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그의 백모 미세스 브라운의 안내로 나에게 온 사람이었다. Y.S는 신리에 대한 나의 강연을 몇 차례 듣더니 생활이 변했고, 마음이 조화됨에 따라 지금부터 2500여 년 전의 언어로 맒하기 시작했다.

"포코라 파라 가리 파라세레 파라파라 치코라 파라 가리 파라세레 파라파라..."

라고 자기가 고타마 붓다의 제자였던 바라나시의 야사라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

나도 인도 시절에는 같은 사로몬으로서 야사와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강연회에 참석한 많은 청중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감격적인 추억담을 나누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마하반야바라밀다', 즉 위대한 지혜가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는 '내재하는 위대한 지혜에 도달한다'라는 뜻이다.

여러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생각없이 눈물 흘리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부끄럽다는 감정도 자기 보존이다. 사람들 앞에서도 마음에 거짓이 없으면 부끄럽다고 하는 심적 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를 꾸미려고 하는 위아(거짓자아)가 부끄럽다고 하는 괴로움을 만들어 낸다. 자기보존인 것이다.

그리고 식욕과 정욕은 본능과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작용이다.

비록 짝사랑이랑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능과 감정이 불타고 있으므로 마음 속에 사랑의 동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마음은 불타며 곧 그 모습은 육체에도 나타난다.

사춘기의 신체는 핑크색의 빛에 쌓인다. 후광의 빛이 변화하는 것이다. 성이 났을 때는 불꽃같은 핏빛의 후광이 나타난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우리의 의식 속에 낱낱이 기록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만족할 줄 알고 본능과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브레이크가 마음의 이성의 작용이다.

음식물은 약간 모자랄 정도로 먹는 것이 좋은 줄 알면서도 맛있는 것을 대하면 본능적으로 과식하게 된다.

그러나 술이든 담배든 끊으려고 작심만 하면 끊을 수 있다. 이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강한 의지력을 발휘하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는 무르고 관대하기 때문에 자칫 본능이나 욕망의 주문대로 살고 싶어한다.

어린 아이들에게 이성과 의지의 힘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들 마음 속의 각 기능은 성장함에 따라 지성의 힘으로 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갓 태어난 젖먹이는 모유나 밀크를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데 빨 줄 안다. 이것도 식생활을 했던 과거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본능적 능력이다.

그리고 성장과 동시에 오관의 작용이 활발해져서 욕망의 싹이 자란다. 자아의 싹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본능과 감정의 영역이 먼저 부풀어난다. 그러나 아직 지성, 이성의 작용이 결핍되므로 무작정 자아를 관철시키려는 응석을 부리게 된다. 이 시기부터 좋은 환경과 부모 밑에서 훌륭한 중도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게 된다. 아직 인생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지성은 오관에 의해서 수용되는 것과 교육으로 배운 것에 의해서 길러져 간다.

유치원에 갈 무렵에는 선악의 판단이 조금은 가능해 진다. 그래서 친구나 이웃 가정의 생활 등을 통해서 스스로의 지성을 키워나간다. 

어버이로서 자식의 예의범절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 걸친 교육에 주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자식을 편애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지나치게 엄격한 것도 자식의 마음을 좁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마침내 이성의 영역마저 우리의 표면의식층으로 차츰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표면 의식은 10% 정도밖에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물에 잠긴 빙산에 비유할 수 있다. 빙산의 90%가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의식의 90%는 잠재의식층에 내재해 있게 된다. 10%의 표면의식은 주로 자아가 표면으로 드러나서 자기 본위의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 내기 일쑤이다. 올바른 중도의 길은 이 10%의 표면의식의 길잡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도의 길을 지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결점을 수정하는 데에는 비상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결점을 바로잡아 둥글고 넉넉한 마음을 키워나가면 항상 원만하고 기쁨에 넘치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면 자존심이라고 하는 괴물에 홀려 도리어 마음이 비뚤어지기 쉽게 된다. 타인에게 자아를 강요하여 욕설을 늘어놓거나 속이기도 하며 이런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철따구니 없는 자들이다.

지나 의만을 좇아 신의 자식인 자기의 본성을 망각해버린 것이다. 지성이 아무리 풍부해도 마음의 조화를 잃은 사람들은 인격자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들은 원만하지 못한 편협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서를 잃고 메마른 인생을 보내도 한 세상이요, 욕망대로 짐승처럼 살아도 한 세상이며,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팔정도의 인생을 걸어도 역시 한 세상이다.

그러나 같은 한 세상이라도 그 내용과 크기에 있어서는 대우주와 겨자씨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결과는 스스로 마음에 품은 상념의 씨앗들이 결정짓는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일생 동안의 자신의 행위와 상념은 자기 자신이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심안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보면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일념삼천이란 표현과 같이 그 형태는 참으로 천태만상이다. 얼굴과 체격이 다른 것처럼 그 마음의 모양도 십인십색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