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슈타는 계속해서 말했다.
오, 라마여! 장애물들로부터 자유로운 깨달음의 길을 설명하는 다른 이야기를 해 주겠습니다. 저승에 히란야까쉬뿌라는 강력한 악마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리로부터 삼계의 통치권을 얻었습니다. 그는 삼계를 지배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보석들 중에서도 찬란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유명한 쁘라흘라다가 있었습니다.
삼계의 지배, 강력한 군대와 훌륭한 자녀라는 행운을 이렇듯 누렸던 악마 왕은 자만심이 가득하고 거만해졌습니다. 그의 공격적인 방식과 공포의 통치는 신들을 걱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신들은 곤경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창조자 브람마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에 답하여, 신 하리는 나라심하의 모습을 취하여 악마 왕을 파괴시켰습니다. 나라심하의 몸은 거대하고 강력했습니다. 그는 날카롭고 무서운 이빨과 꼬리를 지녔습니다. 그의 귀고리는 횃불과 같았습니다. 그의 배는 산과 같았습니다. 그는 모든 창조물을 흔들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지녔습니다. 그의 호흡은 산을 흔들었습니다. 그의 몸의 머리카락은 불길과 같았습니다. 그의 사지는 바로 무시무시한 무기였습니다. 나라심하의 불같은 눈빛을 참을 수 없어서, 악마들은 사방으로 도망쳤습니다. 궁궐 내부는 재가 되었습니다.
목숨을 유지한 쁘라흘라다는 죽은 친척들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는 다친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거대한 파괴에 놀란 그와 살아남은 다른 친척들은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쁘라흘라다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제 누가 우리를 도와 줄 수 있겠는가? 하리는 악마 종족의 모든 자손을 없애 버렸다. 아! 우리의 적은 신속하게 군사적 승리의 정점에 도달했다. 한때 아버지의 발밑에 초라하게 무릎 꿇었던 신들이 우리의 왕국을 점령했다. 나의 친척들은 빛을 잃고, 일도 없고, 정열도 없이, 빈곤하고 비참해졌다. 한때 강력하고 힘셌던 악마들이 이제는 신들처럼 허약하고 소심해졌다. 정말로 운명은 신비로운 것이다. 겁 많은 사슴이 낯선 마을로 들어오면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놀란다. 그처럼 적의 용맹스러움을 본 악마들은 사소한 것에도 놀란다.
소망을 이뤄 주는 나무를 신들이 다시 차지했다. 이전에 악마들이 신들의 얼굴을 보는 것을 즐겼던 것처럼, 이제는 신들이 악마들을 보는 것을 즐기고 있다. 악마의 내실에서 삶을 즐겼던 반 여신들과 다른 자들은 메루 산의 숲 속으로 도망가 숲 속의 새처럼 살아가고 있다. 내 어머니는 슬픔의 이미지 자체이다. 아버지를 추종하는 자들은 지금은 하리를 시중든다. 하리의 은총에 의해, 우리는 비할 데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역경을 겪게 되었다. 그것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비참하고 절망스럽게 만든다.
쁘라흘라다는 계속해서 명상했습니다.
눈 덮인 히말라야 꼭대기가 태양의 뜨거운 열은 받지 않는 것처럼, 비슈누의 보호 속에 살아가는 신들은 억압을 받지 않는다.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원숭이가 땅 위에 있는 힘센 개를 괴롭히듯이, 비슈누의 보호 하에 있는 신들이 악마들을 괴롭히고 있다.
전 우주를 보호하며 유지하는 것은 비슈누이다. 비슈누가 무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대적할 자는 없다. 나라심하는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만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안식처이다. 따라서 반드시 누구나 그에게서 안식을 찾아야 하며 다른 방도는 없다. 어떤 이도 그보다 우월하지 못하고 그만이 우주의 창조와 보존, 소멸의 근원이다. 바로 이 순간부터 나는 비슈누에게 헌신할 것이고, 그의 현존이 가득한 것처럼 살아갈 것이다. 그에게 바쳐진 신성한 만뜨라 "나모 나라야나야."는 그의 헌신자들에게 모든 은총을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가슴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슈누가 아닌 사람이 비슈누를 숭배하는 것으로써 어떤 혜택을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비슈누가 되어서 비슈누를 숭배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비슈누이다. 쁘라흘라다로 알려져 있는 이는 비슈누 외의 어떤 이가 아니다. 이원성은 없다. 비슈누를 나르는 가루다가 지금 나를 실어 나르고 있다. 그의 훈장이 나의 팔다리를 장식한다. 그의 아내인 락슈미는 내 옆에 서 있다. 비슈누의 모든 신성한 찬란함이 나의 것이 되었다.
비슈누와 변함없이 관련된 상징물인 소라, 원반, 철퇴, 검이 지금은 나에게 있다. 창조자 브람마를 잉태한 연꽃은 내 배꼽에서 핀다. 반복적으로 생겨나고 사라지는 전 우주가 내 배 안에 있다.
나의 색깔은 이제 비슈누의 색깔이다. 그것은 푸르다. 나는 비슈누의 노란색 옷을 입고 있다. 나는 비슈누이다. 누가 이제 나의 적이 될 수 있으며, 누가 나에게 도전할 수 있겠는가? 나는 비슈누이기 때문에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확실히 생명의 종말에 이르렀다. 내 앞에 있는 악마들은 나에게서 나오는 찬란함을 견디기가 어렵거나 견딜 수 없다. 나는 비슈누이기 때문에, 신들은 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나는 이원성이라는 모든 감각을 초월했다. 따라서 나 자신은 비슈누가 되었다. 그의 배 속에서 그는 삼계를 지키고, 우주의 모든 악을 진압하며,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내쫓는다. 그는 나이고 나는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자신을 비슈누의 이미지로 변경시키고서, 쁘라흘라다는 비슈누를 숭배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스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여기 또 다른 비슈누가 있다. 그 역시 운송 수단인 가루다에 앉아 있으며, 모든 신성한 자질과 힘을 부여받았고, 비슈누의 지위와 연관된 모든 표지를 지니고 있다. 나는 지금 숭배와 관련된 전통에 따라 그를 경배하되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렇게 결심한 후, 쁘라흘라다는 경전의 가르침과 전통이 규정하는 모든 도구들로써 마음으로 비슈누를 경배했습니다. 이렇게 한 후에, 그는 외적인 종교 의식과 의례로도 비슈누를 경배했습니다. 이런 숭배를 마치자마자, 쁘라흘라다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쁘라흘라다는 매일 그러한 방식으로 비슈누를 숭배했습니다. 그를 보고 그의 본보기를 따라, 그 왕국의 모든 악마들은 철두철미한 비슈누의 헌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소문이 들불처럼 천국에 퍼지면서 최근까지 비슈누의 적이었던 악마들이 갑자기 그의 헌신자가 되었습니다! 천국의 신들은 당혹스러웠습니다. 어떻게 악마들이 헌신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재빨리 비슈누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신들이 말했습니다.
신이시여! 이런 신비는 무엇입니까? 악마들은 당신의 옛날부터 있어 온 적입니다. 악마들이 당신의 헌신자로 바뀌게 된 것은 사실이 아니며 속임수인 듯합니다. 악마들의 극악무도한 자질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바의 마지막 화신 동안에만 일어나는 당신에 대한 헌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좋고 신성한 자질은 이런 악마들과는 맞지 않스비다. 이것은 터무니없게 들립니다. 어떤 존재의 자질이 항상 그 존재의 근본적인 천성과 일치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악마들이 하룻밤 사이에 당신의 헌신자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고통스러울 지경입니다. 그들이 차츰 더 나은 존재의 상태로 진화하여 선한 자질들을 계발하고 그런 다음 당신의 헌신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악한 성질을 지니고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당신의 헌신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비슈누가 대답했습니다.
오, 신들이여! 의심과 절망으로 고통 받지 말라. 쁘라흘라다는 나의 헌신자가 되었다. 이번이 진정 그의 마지막 탄생이며 그는 지금 해방될 만하다. 그의 무지의 씨앗은 불타 버렸다. 그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선한 사람이 사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은 무의미하고 고통스런 것이다. 선하지 않은 자질을 지닌 사람이 선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적절하고 좋은 것이다. 쁘라흘라다의 변화는 선함을 향한 것이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그렇게 신들을 안심시킨 후, 비슈누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신들은 각자의 거주지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쁘라흘라다에 대해 우호적이 되었습니다.
매일 쁘라흘라다는 생각, 말, 행동으로써 비슈누 신을 경배했습니다. 그런 경배의 즉각적인 결실로서, 지혜와 초연과 같은 고귀한 자질이 그에게서 생겨났습니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조차도 쾌락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쾌락에 대한 갈망을 버리자, 그의 마음은 지지를 받지 않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비슈누 신은 쁘라흘라다의 상태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쁘라흘라다가 그를 경배하고 있는 저승을 그는 여행했습니다. 궁궐에 비슈누 신이 온 것을 보고서, 쁘라흘라다는 더욱더 기뻐하며 다시 비슈누를 경배했습니다.
쁘라흘라다는 기도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안식처를 구합니다. 그의 내부에서 삼계는 즐거워하며, 당신은 모든 종류의 무지와 불순을 파괴시키는 숭고한 빛이며,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자들의 안식처이며, 당신만이 추구할 가치 있는 피난처를 지닌 신이시며, 태어나지 않음이고, 가장 확실한 안전지대입니다. 당신은 푸른 보석, 푸른 연꽃처럼 빛을 발하십니다. 당신의 몸은 가장 높은 맑은 겨울 하늘처럼 푸릅니다. 그리고 당신은 손에 신성한 표시를 들고 계십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신성한 경전인 진리이며, 당신의 배의 연꽃은 창조자 브람마의 자리이며, 모든 존재의 가슴속에 있는 당신에게서 저는 안식을 구합니다. 당신의 손발톱은 천국의 별처럼 빛나며, 당신의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은 달이며, 당신의 가슴에는 강가 강처럼 광선이 빛나 흘러나오는 보석이 있으며, 순수한 맑은 가을 하늘을 옷으로 입고 계십니다. 당신이게서 저는 안식을 구합니다. 당신 안에서 광대한 우주가 작아지지 않고 쉬고 있으며, 결코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변하지도 않으며, 몸은 길조의 자질들로 되어 있는, 보리수 잎 위에 있는 당신에게서 저는 안식을 구합니다. 옆에는 락슈미 여신이 있으며, 몸의 아름다움이 지는 해의 아름다움과 같은 당신에게서 저는 안식을 구합니다. 삼계의 연꽃 위에 비치는 태양 같고, 무지한 어둠의 등불 같으며, 무한한 의식을 지니고 계시며, 우주의 모든 만물의 고통과 고뇌를 없애시는 당신에게서 저는 안식을 구합니다.
신이 말했습니다.
오, 쁘라흘라다여! 그대는 선한 자질의 바다이며 악마들 중에 있는 진정한 보석이다. 탄생의 슬픔을 없앨 수 있는 은총을 택하여 내게 요구해 보거라.
쁘라흘라다가 말했습니다.
오, 신이시여! 당신은 모든 존재들의 내면의 거주자이시며, 우리의 모든 소망이 결실을 맺도록 합니다. 끝이 없으며 무한하다고 당신이 생각하시는 은총을 제게 주십시오.
신이 말했습니다.
쁘라흘라다여! 무한한 브람만 안에서 쉴 때까지 그대는 탐구하는 정신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모든 명상은 끝나고 최고의 열매인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그렇게 말한 후에, 신은 사라졌습니다. 쁘라흘라다는 경배를 끝내고 신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른 후에 다음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쁘라흘라다는 묵상했습니다.
신은 "계속 탐구하라."고 명했다. 따라서 나는 참나 탐구에 전념할 것이다. 세상이라는 정교한 무대에서 말하고, 걷고, 서 있고, 기능하는 나는 무엇인가? 우선 이것을 찾아봐야 한다.
확실히 나는 나무, 관목, 산으로 이루어진 생기 없고 외부에 있는 이런 세상은 아니다. 또한 호흡의 움직임으로 태어나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살아 있는 듯 보이는 몸도 아니다. 나는 귀라는 둔한 물체에 의해 감지되며, 공기의 순간적 움직임이고, 형태가 없고 존재가 없는, 소리인 단어, 이름 혹은 표현이 아니다. 나는 순간적이며 무한한 의식에 의해서만 기능할 수 있는, 감각 즉 촉각의 경험이 아니다. 또한 나는 끊임없이 변하며 불안정하며 그리고 자신의 대상들에 헌신하는 혀를 바탕으로 두고 있는 미각이 아니다. 또한 나는 매우 찰나적이고 단지 보는 사람을 미혹시키는 시각도 아니다. 또한 나는 코의 상상물이며 불확실한 형태를 지닌 후각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이런 모든 상징적인 자질들이 없다. 나는 이런 감각의 기능과 관계가 없다. 나는 순수한 의식이다. 나는 생각들 너머에 있는 평화이다.
쁘라흘라다는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나는 객관성이 없고 그래서 개념과 관념이 없는, 모든 것에 퍼져 있는 실재이다. 나는 순수 의식이다. 하찮은 항아리로부터 강력한 태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단지 이 의식에 의해서 지각된다. 나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개념화를 갖지 않는 참나라는 진리를 나는 회상한다. 모든 감각과 경험은 단지 그런 참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부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 내부의 빛 때문에 이런 대상들이 명확한 실재성을 얻는다.
태양이 뜨겁고, 달이 서늘하고, 산은 무겁고, 물이 액체인 것은, 모든 변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내면의 의식의 빛 때문이다. 그것은 이 창조물들로서 나타나는 모든 결과들의 원인이지만, 그러나 그것 스스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양한 대상들의 특징적인 성질들이 생겨나게 된 것은 그 내면의 의식의 빛 때문이다. 그것은 형태가 없고 모든 결과들의 원인이기 때문에, 이 다양성을 지닌 우주가 그 안에서 생겨났다. 그것만이 삼위일체인 창조자 브람마, 유지자 비슈누, 구제자 쉬바가 나타난 원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인을 지니지 않고 있다.
나는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원성이 없는 그 자신의 불빛인 참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안에 우주의 모든 것이 존재하며, 그 안으로 그것들이 들어간다. 내부의 참나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외부의 실재로서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 이 의식이 생각하면, 이런 것들이 존재하게 된다. 비존재로서 생각하면, 그것들은 종말에 다다른다. 따라서 이 모든 무한한 대상들은 무한한 의식의 공간에서 나타난다. 그림자가 태양 빞 속에서 자라고 줄어드는 것과 같이, 그것들은 자라고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 참나 즉 내부의 의식의 빛은 보이지 않고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가슴을 정화시킨 사람들에 의해 얻어진다. 그러나 신성한 이들에 의해서는 그것은 매우 순수한 의식의 우주적 공간 혹은 차원 안에서 보인다.
이 참나는 창조자 브람마로부터 풀잎에 이르기까지, 무한하고 스스로 빛나는 의식으로서, 삼계 속에서 나누어지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없는 하나이다. 그것은 모든 것으로서, 모든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존재들의 내적 경험으로 존재한다.
쁘라흘라다는 계속해서 묵상에 잠겼습니다.
따라서 유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인 참나는 모든 것의 경험자이다. 그러므로 참나는 수천 개의 손과 눈을 지니고 있다고 얘기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태양이라는 몸을 지니고서, '나'인 참나는 공기로 된 몸처럼 공간을 배회한다. 이 세상에서 숭배되고 있는 소라, 원반, 철퇴 등을 지니고 있는 신의 몸을 가진 참나도 그렇다. 연꽃 안에 늘 앉아 있는 존재인 창조자 브람마로 태어난 것도 참나인 나였다. 이런 창조를 소멸시키고, 세상의 순환의 끝에 모든 창조물을 사라지게 한느 것도 참나이다.
인드라 안에 몸으로 있다고 언급되고 있는 참나가 세상을 보호한다. 나는 여자이고 남자이며, 젊은이고 고령의 노인이다. 그리고 몸을 얻었기 때문에 나는 분명히 이곳에서 태어난다. 나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무한한 의식의 지면으로부터 나는 나무와 식물을 자라게 하고, 그것들의 본질로서 그들 속에 존재한다. 노는 아이의 손에 쥐어진 진흙처럼, 이 세상의 모습은 즐거움을 위해 내가 펼쳐 놓은 것이다. 세상은 참나(나)로부터 자신의 실재를 끌어내며, 내 안에서 나를 통해 움직이고, 내가 그것을 버리거나 이해하려는 것을 그만둘 때, 실재를 갖기를 중단한다. 왜냐하면 투영이 거울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세상은 나, 참나, 무한한 의식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꽃 속의 향기이며, 꽃과 잎에서 광휘이며, 광휘 속의 빛이며, 그런 빛 속에서조차 나는 경험이다.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존재들이 이 우주 안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숭고한 진리이거나 혹은 개념화가 없는 의식이다. 나는 우주의 모든 존재들 안에 있는 정수이다. 버터가 우유 안에 존재하고 유동성이 물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이식의 에너지로서 나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 안에 존재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이런 세상의 모습은 객관적 실재의 구별이 없이 무한한 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 어디에나 있는, 전능한 우주적 존재는 '나'라는 것으로 나타나는 참나이다. 우주라고 알려져 있는 이 우주적 왕국은 찾지 않았음에도 내게로 왔으며 그것은 나에 의해 퍼져 있다. 우주적 창조물이 소멸된 후에는 하나의 우주적 바다가 우주에 퍼지는 것과 같이, 나는 참나 즉 무한한 의식으로서 온 우주에 퍼져 있다. 걷지 못하는 불완전한 물 속 생물들조차도 우주의 바다가 무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무한한 나 자신의 크기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 세상은 무한한 의식 안에 있는 먼지 입자와 같은 것이다. 작은 과일이 코끼리의 배고픔을 달랠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습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창조자 브람마의 집에서 확장되기 시작한 세상의 모습은 지금도 계속 팽창하고 있다.
쁘라흘라다는 계속 묵상에 잠겼습니다.
정말이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오로지 무한한 의식이었다. 어떤 정당화나 지지 없이, 유한하며 한계를 지닌 자아감이 어떻게 그 안에서 일어났는가? 무엇이 '이것은 당신이다.', '이것은 나다.'와 같은 말 속에 자신을 나타내는 미혹을 일으켰는가? 무엇이 이 몸이며, 무엇이 몸이 없는 것이며, 살아 있는 것은 누구이며, 죽은 것은 누구인가? 확실히, 나의 조상들은 이해가 부족하여 이 무한한 의식을 버리고는 이 작은 땅을 배회하였다. 욕망과 갈망으로 가득한 세상의 영광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무서운 허영과 무한의 비전을 어떻게 비교하겠는가? 무한한 의식의 이 비전은 순수하고, 지고의 평화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 우주에서 있을 법한 비전들 중에서 지고의 것임에 확실하다.
모든 존재들 안에 거주하고 있는 자이며, 개념화나 객관적 실재가 없는 의식이며, 모든 존재들 안에 있는 지성인 나 자신의 참나에 나는 경의를 표한다. 나는 태어나지 않은 자이다. 그 안에는 세상의 모습이 사라진다. 나는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을 얻었다. 나는 승리했으며 승리를 얻어 살아간다. 나는 우주적 의식의 이 숭고한 희열을 버리고 왕국을 지배하는 데서는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이 세속적 삶의 오물 안에서 흥청망청하고 있는 사악한 악마들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아! 이 육체적 존재를 즐기고 만족해 했던 내 아버지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하였는가! 땅이라는 하찮은 진흙 공을 지배하고 오래 살면서 그가 얻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수많은 세상의 기쁨은 참나의 희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참나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포기하고 다른 것들을 추구하는 자는 현명한 이가 아니다. 죽어야 할 육체적 존재와 깨달음의 희열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삼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통치하는 세상의 통치는 의식 안에 있다. 왜 사람들은 의식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를 경험하지 못하는가?
모든 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나누어지지 않고 편재하고 있는 의식을 통해서 십게 얻어진다. 태양과 달의 빛, 신들을 움직이는 에너지, 마음과 원소들의 본질적 특징,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는 성질들과 기능들(공간은 비행기가 움직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에너지와 지성의 무한하고 다양한 표출은 모두 나누어지지 않고 변화가 없는 하나의 우주적 의식의 팽창이며 기능이다. 태양이 모든 만물을 구별하지 않고 비추는 것처럼, 이 우주적 의식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의 참나로서 구분하지 않고 즉각적이고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밝히고 있다.
쁘라흘라다는 계속 묵상에 잠겼습니다.
무한한 의식은 시간의 세 주기에 퍼져 있으며, 무한한 세상을 경험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감싸고, 그것은 모든 것을 바라본다. 혼돈이 없고 변형이 없으므로, 무한한 의식만이 늘 남아 있다. 이 의식은 달콤하고 쓴 것을 동시에 경험한다. 무한한 의식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이 의식은 본성적으로 개념과 관념인 모든 변형에서 자유롭고 또한 미묘하고 모든 것을 동시에 경험하기 때문에, 그것은 다양한 현상을 경험할 때조차도 늘 평화롭고 동질적이다.
변형된 것이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 존재에 의존하거나 의지하게 되면, 그것은 슬픔에서 자유롭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 생각의 움직임이 없는 마음에 의하여 보이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의 사악함을 버린다.
의식이 시간의 세 양식을 지각하지 않을 때, 객관적 실체나 개념화의 구속으로부터 자율울 때, 그것은 완전한 고요에 자리 잡는다. 의식은 마치 비실재적인 것처럼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참나인 브람만이 있든 없든, 소멸하지 않는 그것이 지고의 해방이다.
변화(생각) 때문에, 이 의식은 분명히 베일에 가려 있고 깨달아지지 않는다. 매혹과 혐오의 진창에 빠진 사람들은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사고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사람들이 나의 조상들이었다. 욕망, 미움, 미혹된 이원성의 지각으로 인해 그들은 해충과 같은 삶을 산다.
자신의 내부에 갈망과 적대감이라는 유령들을 진정시키고, 무지한 사고와 심리적 타락의 신기루를 진실한 내적 깨달음으로 없앤 자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는 무한한 의식 속에서 어떻게 개념들과 지각 대상들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나는 참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분리 없는 의식이며, 보이고 보이지 않는 세상들의 보석인 나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대는 정말이지 조만간에 도달한다! 그대는 접촉되었고, 얻어졌으며, 깨우쳐졌고, 모든 종류의 왜곡이 초월되어졌다. 그대는 그대의 것으로 존재하고 있다. 나의 참나, 쉬바, 신들의 신, 지고의 참나인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라.
자신의 몸 안에서 즐기며, 그것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을 완전히 조절하고 있으며, 스스로가 만든 무지의 베일인 생각과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난 참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쁘라흘라다는 계속해서 명상에 잠겼습니다.
옴(OM)은 아무런 타락이 없는 비잉원적 의식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참나이다. 살과 피 등으로 만들어진 이 몸 안에 있을지라도, 태양처럼 빛의 근원 안에서 그리고 빛의 근원을 통하여 빛나기 때문에, 참나는 빛나는 지성이다. 참나는 불을 뜨겁게 하고, 감로의 달콤함을 경험하게 한다. 말하자면 참나는 모든 감각 경험들을 경험한다. 참나는 서 있지만 정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고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휴식 상태에서도 계속 바쁘다. 동적이지만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 여기, 저기, 모든 곳에서 분명한 모든 변화들 속에서도 그것은 늘 같은 채로 있다. 두려움이 없고 제한을 받지 않으면서 의식은 창조자 브람마에서 풀잎에 이르기까지 다양성을 지닌 무한한 존재들을 나타나게 하고는 유지시킨다. 그것은 항상 동적이며 활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위보다 비활동적이며, 공간보다도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바람이 나뭇잎을 살랑이듯이, 마음을 활동하게 하는 것은 참나 즉 의식이다. 기수가 말을 관리하듯이, 그것은 감각들을 작용하게 한다. 비록 참나는 이 몸의 주인이지만, 노예처럼 다양한 활동을 한다.
이런 참나만이 추구되고, 찬미되고, 명사외어야 한다. 참나의 도움으로, 사람은 탄생과 죽음의 윤회 및 환영을 지니고 있는 이 세상을 건넌다. 그것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좋은 친구처럼 쉽게 자기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이의 가슴의 연꽃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부를 필요도 없이, 자신의 몸 안에 얻어져 있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것을 명상하면, 그것은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 준다. 그것은 모든 우월을 지니고 있고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그것을 찬미하는 사람에게는 거만과 자만을 보이지 않는다.
꽃에 향기가 있듯이, 모든 몸에 이 참나가 거주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그것을 깨닫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참나에 관한 진리를 탐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나 탐구를 통하여 그것을 깨달으면, 즉각적으로 지고의 희열을 경험하게 되며 영원한 진리의 비전을 지니게 된다. 모든 구속들이 사라지고, 모든 적들이 소멸되며, 욕망은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한다. 그것이 보일 때 모든 것이 보이고, 그것이 들릴 때 모든 것이 들리며, 그것이 만져질 때 모든 것이 만져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으므로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잠을 잘 때조차도 깨어 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이들을 깨어나게 한다. 그것은 고통의 아픔을 없에고 갈망하는 모든 대상을 준다. 이 창조물 속에서,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실체인 지바처럼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쾌락을 즐기는 듯이 보이며, 이 세상의 대상들 속에 퍼져 있는 듯이 보인다.
쁘라흘라다는 계속해서 묵상에 잠겼습니다.
이 참나는 공간 속의 비어 있음이다. 그것은 움직이는 모든 것 속에 있는 움직임이다. 그것은 빛을 발하는 모든 것의 빛이다. 그것은 모든 액체 속에서 맛이다. 그것은 흙 안에 있는 견고함이다. 그것은 불 속의 열기이다. 그것은 달의 시원함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들의 존재이다. 특징적인 자질이 그에 해당하는 물질 속에 있듯이, 그렇게 그것은 몸 안에서 신으로 존재하고 있다. 존재가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듯이, 시간이 늘 존재하고 있듯이, 이 참나는 물질적, 심리적 기능들을 지니고 모든 몸에 존재하고 있다.
이 참나는 영원한 존재이다. 그것은 신들마저 깨닫게 한다. 나, 참나만이 있다. 내게는 아무런 지각의 대상이나 개념이 없다. 공간이 떠다니는 먼지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연꽃이 물에 오염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행복과 불행이 몸을 지배하도록 두라. 어떻게 참나가 그것에 영향을 받겠는가? 등잔의 불길이 실 한 조각에 묶여 있지 않은 것처럼, 모든 물질적 존재를 넘어서 있는 참나는 물질에 의해 묶이지 않는다. 우리(참나)와 존재 및 비존재라는 개념과 감각에서 생겨난 갈망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누가 무엇이 공간을 구속하며, 누구에 의해 마음이 묶인다는 말인가?
몸이 백 개의 조각으로 잘릴지라도, 참나는 다치지 않는다. 항아리가 부서져 가루가 될지라도, 그 안의 공간은 파괴지 않는다. 이 악령 같은 마음이 실체가 아니라 말로서 존재하는데,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무엇을 잃겠는가? 옛날에 행복과 불행이라는 개념으로 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모든 개념이 존재하기를 그쳤는데,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다른 것을 즐긴다.', '다른 것을 이해한다.', '본다.', '불행을 겪는다.'와 같은 그런 개념들을 받아들일 바보가 있겠는가? 자연만이 즐긴다. 마음은 이해하고 파악한다. 고통은 몸에 속한다. 사악한 사람은 바보다. 그러나 해방을 얻은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없다. 나는 쾌락의 욕망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또한 그것을 없애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오게 두라. 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가게 두라. 다양한 경험의 개념들이 몸 속에 일어나거나 자리 잡게 하지 말라. 나는 그것들 안에 있지도 않고 또한 그것들이 내 안에 있지도 않다.
오렛동안 나는 나에게서 지혜의 풍부함을 빼앗아 가는 무지라는 무서운 적의 노예로 있었다. 그러나 지금, 비슈누 신의 은총과 나 자신의 뛰어난 자기 노력에 의해 나는 그 지혜를 획득하였다. 참나 지식이라는 마법의 주문에 의해 이런 악마적 자아가 추방되었다. 기만이라는 결핍을 없앤 채, 나는 지고의 신으로 있다. 알 가치가 있는 것은 모두가 이미 알려졌고, 볼 가치가 있는 것은 모두 보여졌다.
쁘라흘라다는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운 좋게도, 감각적 쾌락을 향한 갈망이라는 치명적 뱀은 멀리 뒤에 남겨졌고, 모든 미혹과 희망은 누그러졌다. 나는 지고의 진리의 상태를 얻었다. 찬가, 경배, 기도, 마음의 평화, 절제된 생활로 나는 참나인 신을 보았다. 비슈누 신의 은총으로 지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확고히 내 가슴 안에 있다.
지금까지 무지스러운 한계들과 미혹들은 나를 괴롭혔다. 무지의 숲에는 감각적 갈망의 모습을 한 독뱀들이 사는 수많은 개미집,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함정, 슬픔이라는 산불이 있다. 그 안에는 자아라는 가장 치명적인 적처럼, 폭력과 탐욕이라는 도둑들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지금 나는 자기 노력과 비슈누 신의 은총으로 그것에서 자유로우며, 내 지성은 완전히 깨어났다. 태양이 떠오를 때 어둠을 보지 못하듯이, 깨어 있는 지혜의 빛 속에서 나는 자아라는 실체를 지각하지 못한다. 자아의 악귀를 달래었기 때문에, 나는 내 안의 평화에 있다.
진리가 보이고 자아가 추방될 때, 미혹, 슬픔, 희망, 갈망, 정신적 고민을 할 여지가 어디에 있는가? 해방에 관한 망상처럼, 천국과 지옥은 자아가 존재하는 한 존재한다. 그림은 텅 빈 하늘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서 그려진다! 지성이 자아의 구름과 욕망의 뇌우로부터 자유로울 때, 그것은 참나 지식의 불빛으로 빛난다. 그것은 보름달이 비치는 가을 밤의 하늘이 빛나는 것과 같다.
오, 참나여! 자아의 늪이 없는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 참나여! 무시무시한 감각들과 모든 것을 소모시키는 마음이 고요해진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 참나여! 내부에 활짝 핀 희열의 연꽃인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 참나여! 의식과 그것의 반사라는 양쪽 날개를 가지고 가슴의 연꽃에 거주하는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 참나여! 가슴속에 있는 무지의 어둠을 쫓아내는 태양인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 참나여! 가장 높은 사랑의 촉진자이며, 우주의 이 모든 것들의 유지자인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강철이 가열된 강철 빔을 자르는 것처럼, 나는 마음을 정화된 마음의 상태로 차분히 가라앉혔다. 나는 욕망, 무지, 어리석음을 그것들의 반대들에 의하여 조각조각 잘라 버렸다. 자아 없이, 나의 몸은 원래의 에너지를 지니고 움직인다. 과거의 경향성들, 마음의 조건화와 한계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는 의문이 일기 시작한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자아의 덫에 사로잡혀 있었던 걸까! 의존, 사고의 습관들, 욕망과 갈망, 자아 존재에 대한 현혹된 믿음, 쾌락 추구 경향의 착색, 환락 등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채, 나의 마음은 완전한 고요에 으르렀다. 이와 함께 모든 슬픔이 끝났고, 지고의 희열의 빛이 새벽을 열었다!
쁘라흘라다는 계속해서 묵상에 잠겼습니다.
마침내 의식의 모든 양상과 상태들을 초월하여 있는 참나가 깨달아졌다. 오, 참나여! 다행히도 그대는 깨달아졌다. 나는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며 껴안는다. 그대를 제외한 누가 삼계에서 나의 친구이며 친척이겠는가? 그대만이 파괴하고, 그대만이 보호하고, 그대가 주고, 그대가 칭찬하고, 그대가 움직인다. 오, 참나여! 나는 그대를 보았으며 그대를 가졌다. 지금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의 실재가 모든 세상에 퍼져 있으며, 그대만이 모든 곳에서 보인다. 오, 참나여! 그대는 지금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시작도 없는 시간부터 우리 사이에는 무지라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벽이 붕괴되었으므로, 그대는 전혀 거리가 없는 곳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취될 필요가 있는 것을 완전히 성취한, 모든 행동의 진정한 행위자, 영원하고 늘 순수한 존재이며 신인 참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비슈누에게, 쉬바에게, 창조자 브람마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 참나여! 그대(참나)와 나 사이의 차이점은 말과 그 말이 가리키는 실체의 구분처럼 말에 불과하다. 파도와 파도 속에 있는 물을 말로 구분하듯이, 구분이란 실재가 아니며 상상적인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 보이는 무한히 다양한 창조물에 오직 그대만이 널리 퍼져 있다.
보는 자이며 경험하는 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모든 것의 내면의 실재인 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모든 곳에 있는 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 참나여! 그대의 보이는 몸과의 동일시로 인하여, 말하자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본성을 망각해 왔다. 그래서 참나 지식이 없는 외적 지각들을 경험하면서 그대는 탄생의 반복이라는 끝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잉 ㅚ적 세상은 흙, 나무, 바위에 불과하다. 오, 참나여! 이 모든 것들 안에는 그대와 다른 아무런 실재가 없다. 참나 지식을 얻으면, 사람은 어떤 것도 갈망하지 않는다.
신이시여! 이제 그대가 보이며, 그대에게 도달했다. 이 시간 후로, 그대는 다시는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신이시여! 눈의 빛이며, 몸 전체를 타고난 지혜로 채우는 참나가 어떻게 보이거나 경험되지 않겠는가? 촉감으로서 작용하며 모든 대상을 경험하는 지성이 왜 깨달아지지 않겠는가? 청각 속에 있는 지성으로서 듣기도 하고 소름을 낳기도 하는 그런 지성이 자기 자신과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 놓인 대상들의 달콤함 같은 것을 경험하는 그런 지성의 달콤함을 왜 사람은 맛보지 않는가? 후각을 즐기는 그런 지성의 존재를 왜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가? 경전들이 그것의 영광을 노래하고, 지식이며 지혜 자체인 참나가 어떻게 그 스스로를 망삿하는가? 오, 참나여! 지금 그대를 깨달았기에, 전에 탐닉했던 감각의 쾌락은 나의 주의를 더 이상 끌 가치가 없다!
쁘라흘라다는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오, 참나여! 태양 속에서 빛나는 것은 순수한 그대의 빛이다. 달을 통해서 발하는 감로 같은 서늘함은 순수한 그대 자신의 빛이다. 산의 묵중함은 그대에게서 얻어졌으며, 바람의 속도도 그렇다. 그대로 인해 땅은 견고하고, 공간은 비어 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그대를 깨달았다. 오, 신이시여! 그대(참나)와 나 사이에 차이점은 없다. 그대가 나이고, 내가 그대이다. 그대나 나로서 언급되는 것이 무엇이든, 뿌리가 어느 것이든 가지가 어느 것이든, 그것에게 나는 경의를 거듭 표한다. 무한하고 자아가 없는 나의 참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형태 없는 참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형태 없이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없이, 순수한 목격자의 의식으로서 그대(참나)는 균형의 상태로 내 안에 거주하고 있다. 생명의 힘의 두 변형인 쁘라나와 아빠나의 두 힘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동요되고, 감각들은 움직이기 시작하며, 에너지는 확장되기 시작한다. 욕망의 힘에 이끌린 운전자인 마음은 피, 뼈, 피부로 이루어진 몸을 휩쓸어 버린다. 하지만 나는 몸과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있는 순수 의식이다. 욕망이 몸을 움직이게 한다. 욕망에 따라, 몸이 일어나거나 떨어지도록 두라.
시간이 감에 따라 자아가 일어나고, 또 우주 순환의 끝에 우주가 소멸하는 것과 같이 시간이 감에 따라 자아는 존재하기를 멈춘다. 그러나 전 우주가 존재의 순환이 끝날 때 휴식하는 것과 같이, 그런 탄생과 죽음의 순환 후에 나는 평화와 안식의 상태를 얻었다. 초월하여 있으며 그리고 모든 것인 나 자신인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우리에 대하여 말하는 그들 모두에게 경의를 표한다!
목격의 의식인 지고의 참나는 그것과 관련된 경험의 오점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꽃에 향기가 있고 참깨 씨앗에 기름이 있는 것처럼, 참나는 모든 곳에 있는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존재하고 있다. 오, 참나여! 그대는 자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만, 그대는 여기서 파괴하고, 보호하고, 주고, 포효하고, 기능한다. 실제로 이것은 커다란 경이이다. 난느 참나의 빛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내가 눈을 뜨면 우주가 존재하게 된다. 내가 눈을 감으면 우주가 존재하기를 멈춘다. 오, 그대 참나여!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작은 씨앗 안에 잠재되어 있듯이, 그대는 전 우주가 이미 그대 안에 존재하고 있는 지고의 원자이다. 오, 참나여! 하늘에 있는 구름 모양이 말, 코끼리, 기타 동물을 종종 닮듯이, 그대 자신은 무한히 다양한 대상들로서 우주 공간에 나타난다. 존재와 비존재로부터 자유로운 채, 참나는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다양한 존재들로서 있으며, 그리고 말하자면 다른 것들과 구분되고 분리된 자이다.
쁘라흘라다는 계속해서 명상했습니다.
허영, 분노, 불순, 그리고 폭력을 버려라. 왜냐하면 위대한 영혼들은 그런 천한 자질들에 의하여 정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슬픔을 반복해서 기억하라. 그리고 밝은 마음가짐으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생겼는가?"를 탐구하여,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지난 것은 지나간 것이다. 그대를 불태웠던 모든 슬픔과 근심은 존재하기를 멈추었다. 오늘, 그대는 몸이라는 이 도시의 통치자이다. 주먹이 하늘을 잡을 수 없듯이, 슬픔은 그대 위에 손을 올려놓을 수 없다. 이제, 그대는 감각과 마음의 지배자이다. 그리고 그대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린다.
신이시여, 오, 참나여! 말하자면, 그대는 지금까지 잠들어 있다. 진행되는 경험을 자각하려는 목적으로, 그대는 그대 자신의 에너지에 의하여 분명히 일깨워진다. 그와 같은 경험의 대상과 접촉하는 것은 사실상 그 에너지다. 하지만 그런 자각 때문에, 그대는 그런 경험들이 자신이라고 여긴다. 생명력의 수행(쁘라나야마)으로, 머리의 왕관에 있는 '브람마의 틈'에 이른 자들은 창조자 브람마의 도시에서 과거에 있는 것과 미래에 있을 것을 매 순간 지각한다.
오, 참나여! 그대는 몸이라는 꽃에 있는 향기이다. 그대는 몸이라는 달 안에 있는 감로이다. 그대는 몸이라는 약초 안에 있는 엑기스다. 그대는 몸이라는 얼음 안에 있느느 시원함이다. 우유에 버터가 있는 것처럼, 몸 안에는 우애나 집착이 있다. 불이 목재에 있듯이 그대는 몸 속에 있다. 그대는 빛을 내는 모든 대상들 안에 있는 빛이다. 그대는 대상들에 대한 지식을 가능케 하는 내적 빛이다. 그대는 마음이라는 코끼리의 힘이다. 그대는 참나 지시이라는 불의 열기이고 빛이다.
오, 참나여! 말은 그대를 차단한다. 그것은 어딘가에서 다시 나타난다. 여러 장식들이 금으로 만들어졌듯이, 모든 수많은 창조물들은 그대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 차이는 언어적인 것이다. '이것은 그대이다.', '이것은 나이다.'와 같은 그런 표현들은 그대 스스로가 그대를 찬미하거나 그대의 기쁨을 위해 그대를 묘사할 때 사용된다. 하나의 불길이지만 거대한 산불이 다양한 형태들을 취하는 것처럼, 그대의 비이원적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다양한 대상들로 나타난다. 그대는 이런 모든 세상을 꿴 끈이다. 그대는 이런 모든 말이 들어 있는 진리의 기반이다. 세상들이 영원히 잠재적으로 그대 안에 있다. 음식의 맛이 요리에 의해 나타나듯이, 그대에 의해 그것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세상들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그대가 없다면 존재하는 것을 그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의 실재이다. 이 몸은 통나무처럼 생명력이 없이 쓰러질 것이다. 어둠은 빛이 접근할 때 사라지듯이, 행복과 슬픔은 그것들이 그대에게 접근할 때 붕괴한다. 하지만 행복의 경험 등은 그대에게서 나오는 자각의 빛 때문에만 가능하다.
쁘라흘라다는 계속해서 묵상에 잠겼습니다.
오, 참나여! 쾌락과 고통, 행복과 불행은 그들의 존재를 그대에게 빚지고 있다. 그것들은 그대에게서 태어난다. 그대와 독립해서는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깨달아질 때 그것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는다. 환영이 눈 깜박할 사이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고통과 쾌락이라는 환영적인 경험은 눈 깜박할 사이에 나타나고 사라진다. 고통과 쾌락은 자각의 빛에서 나타나고 그것들이 그 자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지각될 때 그것들은 사라진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죽는 순간에 태어나고, 그것들이 태어나는 순간에 죽는다. 누가 이 모든 신비스러움을 지각하는가?
모든 것은 언제나 변화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순간적인 원인들이 만질 수 있는 견실한 결과들을 만들 수 있겠는가? 물결이 꽃처럼 보일 수 있다고 그것을 화환으로 묶을 수 있는가? 안정된 결과들이 덧없는 현상과 같은 불안정한 원인에서 나올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벼락을 묶어 빛을 내는 화환으로 만들고 그 화환을 입는 것도 가능해야 하지 않는가! 오, 참나여! 그대는 완전한 평온의 상태를 저버리지 않은 채, 현자들의 의식을 통해 쾌락과 고통을 지각하고 받아들이면서, 마치 그것들이 실재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같은 것이 현명하지 못하고 깨어 있지 못한 이들의 가슴 안에 일어날 때, 그대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말로써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 참나여! 그대는 진실로 아무런 집착이 없으며, 갈망과 희망도 없으며, 그대는 부분이 없는 하나이고 동질적이며, 그대는 자아가 없다. 그대는 행위자의 모습을 가지며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든 허구적이든 간에 그대는 다양성을 경험하는 듯이 보인다.
오, 참나여! 이 무한한 우주로서 나타나는 그대를 환호한다. 지고의 평화인 참나를 환호한다. 오, 참나여! 경전들 너머에 있는 그대를 환호한다. 오, 참나여! 모든 경전들의 바탕이자 목표인 그대를 환호한다. 오, 참나여! 모든 창조물 안에 태어나서 거주하고 있는 그대를 환호한다. 오, 참나여! 태어나지 않은 그대를 환호한다. 오, 참나여! 변화와 파괴를 겪고 있는 그대를 환호한다. 오, 참나여! 변하지 않고 파괴되지 않고 있는 그대를 환호한다. 오, 참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인 그대를 환호한다. 오, 참나여!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인 그대를 환호한다. 오, 참나여! 정복될 수 있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인 그대를 환호한다. 오, 참나여! 정복될 수 없고 이를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는 그대를 환호한다.
나는 기쁘다. 나는 완전한 평온과 지고의 평화 속에 있다. 난느 움직이지 않는 채로 있다. 나는 참나 지식에 도달했다. 나는 승리자이다. 나는 정복하기 위해 산다. 나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 나의 참나여! 그대가 순수하고 더렵혀지지 않는 실재로서 있는 한, 속박이 어디에 있으며, 불행이 어디에 있으며, 행운이 어디에 있으며, 탄생과 죽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나는 늘 지고의 평화 안에서 쉴 것이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그렇게 숙고한 후, 쁘라흘라다는 마음의 변형이 전혀 없지만, 생각의 움직임에 의하여 흐트러지지 않는 지고의 희열 상태에 들었습니다. 그는 조각상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악마들은 온갖 노력을 다하여 글르 방해하려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천 년이 지났습니다. 악마들은 그가 죽었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저승이 혼돈 상태가 되었습니다. 히란야까쉬뿌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세상에 죽은 채로 있었습니다. 어떤 이도 왕좌에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악마들은 변덕과 공상에 휩싸인 채, 나라를 마음대로 떠돌아다녔습니다. 극도의 무질서가 팽패했으며, 바다 속에서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집어삼키듯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힘으로 지배했습니다.
그 동안 우유로 된 바다 속에서 뱀의 의자에 기대어 있던 우주의 보호자인 비슈누 신은 우주의 상태를 지켜보았습니다. 마음속에서 그는 천국과 세상을 보았고 모두 질서가 잡혀 있어서 만족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저승의 상태를 보았습니다. 그는 쁘라흘라다가 초월적 의식의 상태에 잠겨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악마들에 의한 고통에서 자유로워진 천국의 신들은 끝없는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것을 보고서,
비슈누 신은 생각했습니다.
쁘라흘라다가 초월적 의식의 상태에 잠겨 있기 때문에, 지도자가 없는 악마들은 그들의 힘을 잃어버렸다. 악마로부터 위협이 존재하지 않아서 천국의 신들은 두려움이 없으며, 따라서 미워하는 것도 없다.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없다면, 그들은 조만간 상반되는 쌍들 너머에 있는 초월적 의식의 상태로 오를 것이며, 그리고 해방을 성취할 것이다! 그러면 비위를 맞출 신들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종교적 의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자연적인 우주의 소멸 때까지만 존재해야 하는 이 우주는 갑자기 끝날 것이다. 나는 이 속에 어떤 좋은 점도 보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악마들은 악마들로서 계속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악마들이 신들의 적으로서 기능한다면, 종교적이고 올바른 행위가 이 창조물들 속에서 퍼질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창조는 계속 존재하고 번영할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곧바로 저승으로 가서 그것을 있어야 할 상태로 다시 세울 것이다. 쁘라흘라다가 그 왕국을 지배하는 데 관심이 없다면, 나는 그의 지위를 대신할 누군가를 임명할 것이다. 확실히 이번은 쁘라흘라다의 마지막 횐생이다. 그는 이 세상 순환의 종말까지 그런 모습으로 살 것이다. 그런 것이 세상의 순리이다. 따라서 나는 지옥으로 가서 소리쳐 쁘라흘라다를 깨울 것이다. 나는 그를 설득하여 그가 해방의 의식을 누리면서 왕국을 지배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나는 자연스런 소멸이 있을 때까지 이 창조를 유지시킬 것이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이렇게 결심하고, 비슈누 신은 재빨리 저승에 도달했습니다. 그의 빛 속에서, 악마들은 새로운 힘과 활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성한 빛에 의해 아찔해진 그들은 달아났습니다. 비슈누는 쁘라흘라다가 앉아 있던 속에 다가가서, "고귀한 자여, 깨어나라!" 하고 큰 소리로 소리치면서 동시에 그의 소라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 악마들은 쓰러졌고 신들은 기뻐했습니다.
생명력이 쁘라흘라다의 머리의 왕관 부위를 진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생명력이 몸을 통해 퍼졌습니다. 감각이 에너지를 얻었고 감각에 맞는 각각의 대상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신경(나디)들이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은 그것의 육체적 상자 즉 몸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쁘라흘라다는 자신의 주위 환경에 완전히 깨어나서 신을 응시했습니다.
비슈누 신이 쁘라흘라다에게 말했습니다.
오, 쁘라흘라다여! 저승의 지배자로서의 그대의 정체성을 기억하라. 그대에게는 얻거나 거절해야 할 것이 없다. 이 세상의 윤회가 끝날 때까지 그대는 지금의 몸으로 있어야 한다. 이 세상 질서의 법칙을 알기 때문에, 난느 이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대는 모든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된 현인으로서 지금 이곳에서 이 왕국을 통치해야 한다.
우주적 소멸의 시간이 아직은 오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우주의 소멸이 일어나기 전에 오는 표시, 징후나 사건들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대는 헛되이 이 몸을 포기하려 하는가?
나는 존재한다. 그 안에 이 모든 세상과 창조물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은 그대 몸의 포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라.
무지와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이 죽기에 적합하다. '나는 약하고, 비참하고, 어리석다.'와 같이 생각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죽기에 적합하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욕망과 소망에 의해 동요되는 사람이 죽기에 적합하다. 행복과 불행 같은 반대되는 것들에 의해 지배되고, 몸에 집착하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번뇌와 분노의 불길이 가슴을 말려 버린 사람이 죽음을 경험하기에 알맞다. 사람들은 몸을 버릴 때 그것을 죽음이라고 여긴다!
삶은 마음이 참나 지식에 의해 조절되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적절하다. 자아감의 개념이 없으며,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없으며, 고요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이 마음 없는 상태에 이른 사람은 살아야 한다. 진리를 지각하고 있으며, 놀듯이 이 세상에서 움직이고, 외적인 사건에 의해 내적으로 들뜨거나 우울해 하지 않으며, 얻거나 거부하는 욕망이 없는 자가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에 대해 듣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커다란 즐거움을 경험한다. 삶만이 그에게 적당하며, 죽음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몸이 기능하고 존재하는 것을 살아 있는 상태라 한다. 다른 몸을 얻기 위하여 몸을 포기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 쁘라흘라다여! 그대는 이 두 가지 개념에서 자유롭다. 그대에게 무엇이 죽음이고 무엇이 삶인가! 나는 그대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상요하는 개념을 쓰고 있었다. 사실 그대는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다. 몸 속에 있지만 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몸이 없다. 그대는 비물질적 지성인 관찰자이다. 그것은 공기가 공간에 존재하지만 공간에 붙어 있지 않으므로 그 공간에서 자유로운 것과 같다. 그러나 말로 표현하자면, 공간이 식물의 성장을 막지 않으면서 식물의 성장에 책임을 지고 있듯이, 몸을 통해 감각들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대는 몸이다.
그대는 깨달았다. 그대에게 몸이나 몸을 지닌 것이란 무엇인가? 그대의 형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단지 무지한 이들의 눈에서만 그렇다. 늘 그대는 모든 것이며, 그대는 지고한 내적인 의식의 빛이다. 그대에게 무엇이 몸이거나 몸 없음이며, 그대가 무엇을 잡거나 버릴 수 있겠는가? 봄철이든, 우주적 소멸의 날이든 간에, 그러한 것들은 존재와 비존재하는 개념을 초월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조건에서, 그는 확고히 참나 지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혹은 번성하든 간에, 그는 참나 지식에 확고히 자리 잡은 채로 있다.
지고의 신은 몸이 죽을 때 죽지 않으며, 몸이 변할 때 변하지 않은 채로 몸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몸에 속한다.' 또는 '몸이 나에 속한다.'와 같은 잘못된 개념을 포기할 때, '나는 그것을 포기할 것이다.' 또는 '나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한다.', '나는 이것을 하지 않는다.'와 같은 표현은 무의미하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비록 활동에 끊임없이 관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비활동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활동하지 않음으로써가 아니다! 이런 비활동의 사실이 그대를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왜냐하면 씨를 뿌리지 않는 곳에는 수확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한다.' 그리고 '나는 경험한다.'와 같은 두 개념이 중단되었을 때, 오로지 평화만이 남는다. 그런 평화가 확고히 자리 잡을 때, 해방이 있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 얻어야 하거나 버려야 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왜냐하면 오로지 주체와 대상의 개념이 멈출 때만 해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와 같이 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늘 깊은 잠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을 산다. 오, 쁘라흘라다여! 그처럼, 잠을 반쯤 자는 듯이 이 세상을 지각하라! 깨달음을 얻은 존재들은 쾌락에도 크게 기뻐하지 않으며, 고통에도 비탄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수정이 의도 없이 가까이 놓인 대상을 반영하듯이 그렇게 하려는 의도가 없이 움직인다. 그들은 참나 지식에는 완전히 깨어 있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잠을 자고 있다. 그들은 자아와 그와 관계된 것들이 없이, 이 세상에서 어린애처럼 움직인다. 오, 쁘라흘라다여! 그대는 비슈누의 상태에 도달했다. 창조자 브람마의 삶 속에서는 하루에 해당하는, 한 세상의 순환 동안 지옥을 다스려라.
쁘라흘라다는 말했습니다.
신이시여! 실제로 나는 피로로 지쳤고 그래서 잠시 동안 휴식을 취했습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나는 명상과 명상하지 않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당신을 나의 내부에서 오랫동안 보아 왔습니다. 다행히도, 지금 당신은 내 앞에 보입니다. 나는 슬픔, 미혹, 포연에 대한 걱정, 몸을 버리려는 욕망, 세상의 모습에 대한 공포가 없는, 무한한 의식에 대한 진리를 나의 내부에서 경험하였습니다. 하나의 유일한 실재가 알려지면, 어디에 슬픔이 있고, 어디에 파괴가 있으며, 무엇이 몸이고, 무엇이 세상의 모습이며, 무엇이 두려움이고 두려움 없음입니까? 나는 내 안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그 의식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지쳐서 세상을 버릴 것이다.'와 같은 그런 생각은 단지 무지한 자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무지한 자만이 몸이 있을 때 슬픔이 있고 일단 몸이 포기되면 슬픔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쾌락이다.', '이것이 고통이다.', '이것이 있다.', '이것이 없다.'는 현명한 자가 아닌 무지한 자의 마음속에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개념은 지혜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무지한 자의 마음 상태 안에만 존재합니다. '이것은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포기되어야 할 것이다.'와 같은 생각은 단지 무지한 자의 마음 상태에서만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당신에 의해 퍼져 있을 때, 가지거나 버려지는 '다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 우주는 의식에 의해 퍼져 있습니다. 무엇이 얻어져야 하고 무엇이 버려져야 합니까?
나는 내 자신 안에서 자연스럽게 내 자신을 탐구하면서, 존재와 비존재, 가짐과 버림의 개념이 없이 단지 잠시 동안 휴식을 취했습니다. 나는 이제 참나 지식을 성취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나의 경배를 받아 주십시오.
쁘라흘라다의 경배를 받고, 비슈누 신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오, 쁘라흘라다여! 일어나라. 이곳의 신들과 현자들이 그대의 영광을 찬송하는 동안, 나는 지금 그대를 저승의 왕으로 임명할 것이다. (그를 저승의 왕으로 앉힌 후에, 비슈누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태양과 달이 비치는 동안 저승의 지배자가 되어라. 욕망, 두려움, 미움에 동요되지 말고 평등한 시각을 가지고서 왕국을 보호하라. 왕의 기쁨을 누려라. 모든 번영이 그대에게 올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신들도 지상의 인간들도 크게 동요되거나 염려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라. 생각이나 동기에 의해 흔들림 없이 적절하게 행동하라. 그러면 그대는 행동에 의해 묶으지 않을 것이다. 오, 쁘라흘라다여! 그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대를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부터 신들과 악마들은 우호적으로 살 것이다. 여신들과 악마들이 조화롭게 살 것이다. 오, 왕이여! 오랫동안 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무지를 아주 멀리하고, 깨달은 삶을 살아가라.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그렇게 말한 후에, 비슈누 신은 악마의 왕국을 떠났습니다. 신의 은총과 축복으로 천국의 신, 저승의 악마, 지상의 인간들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오, 라마여! 이렇게 나는 그대에게 자신의 자슴속에 있는 모든 불순들을 파괴할 수 있는 쁘라흘라다의 상서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아주 악하거나 죄가 있을지라도, 더욱 높은 의식의 상태에 곡 이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만 조사하여도 모든 죄들을 없애 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조사가 요가식이라면, 확실히 그것은 지고의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죄는 단지 무지입니다. 죄는 탐구로 파괴됩니다. 그러므로 탐구를 결코 버려서는 안 됩니다.
라마가 물었다.
오, 신이시여! 비이원의 의식이라는 최고로 높 은 상태에 있었던 쁘라흘라다가 어떻게 소라 소리에 의해 깨어났습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오, 라마여! 해방에는 '몸이 있는' 그리고 '몸이 없는'이라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어떤 것에 집착하지 않는 즉 무엇을 얻으려거나 포기하려는 행위가 없는 그리고 갈망이 전혀 없는 해방의 상태를 '몸이 있는 해방'이라 합니다. 몸이 떨어져 나갈 때, 그것을 '몸이 없는 해방'이라 합니다.
'몸을 지닌 해방'의 경우에 있어서, 모든 경향성과 마음의 조건화는 미래에 몸을 가질 수 없는 튀긴 씨앗과 같습니다. 이런 상태는 잠자는 사람의 상태처럼 비의도적이고 비자발적이지만, 순수, 확장, 참나 지식과 같은 조건화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런 자취가 남아 있는 한, 몸을 가진 채 해방된 현자는 100년 동안의 내적 명상 후 세상에 대한 의식에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쁘라흘라다의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소라 나팔 소리에 깨어난 것입니다.
더구나 비슈누 신은 모든 것이 참나이며, 그의 안에서 일어나는 개념은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물질화됩니다. 그의 나타남은 원인이 없지만, 그것은 이 우주에 무한한 생명체를 만들고자 하는 유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나 지식을 얻음으로써, 비슈누 신이 깨달아집니다. 비슈누 신을 찬미함으로써, 참나 깨달음이 얻어집니다.
오, 라마여! 쁘라흘라다가 가졌던 비전에 이르십시오. 그대 스스로 끊임없는 탐구를 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대는 지고의 상태에 도달할 것입니다. 참나 탐구의 태양이 가슴속에서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세상은 사람을 미혹시킵니다. 비슈누 신과 참나의 은총을 얻을 때, 이런 환영적인 세상의 모습이라는 유령에 의하여 괴로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거룩한 분이시여! 당신은 쁘라흘라다가 비슈누 신의 은총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노력으로 모든 것이 얻어진다면, 비슈누의 은총 없이는 그가 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습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확실히 쁘라흘라다가 성취한 모든 것은 자기 노력을 통해서였습니다. 오, 라마여!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슈누가 참나이고, 참나가 비슈누입니다. 그 차이점은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비슈누에 대한 헌신을 내부에서 만들었던 것은 바로 쁘라흘라다의 참나였습니다. 자신의 참나인 비슈누로부터 쁘라흘라다는 참나 탐구라는 은혜를 얻었으며, 그런 탐구를 통해 참나 지식을 얻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 노력으로 한 참나 탐구를 통하여 참나 지식을 얻습니다. 때때로 이런 자기 노력은 참나인 비슈누에 대한 헌신으로서 나타나며, 이렇게 깨달음을 얻습니다.
오랫동안 비슈누를 굉장한 헌신으로 경배할지라도, 그는 참나 지식에 있어 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을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참나 지식의 최고 수단은 참나 탐구입니다. 은총과 다른 요인들은 부차적인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감각을 제어라고, 온 영혼을 다한 영적 수행으로 마음이 참나 탐구의 길로 나아가게 하십시오. 자기 노력을 하여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 건너편 해안에 이르십시오.
참나 탐구라는 노력 없이 비슈누 신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왜 새와 짐승들은 그에 의해 공야되지 못합니까? 구루가 자기 노력이 필요 없이 사람을 영적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구루가 낙타나 황소를 들어 올릴 수 없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무엇도 신, 구루, 부, 다른 수단의 도움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노력에 의하여 마음을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성취됩니다. 무색(모든 형태의 마음의 조건 형성으로부터의 자유)과 더불어 오는 단호한 자기 제어에 의하여 얻어질 수 없는 것은 삼계에 있는 다른 어떤 수단들로도 얻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참나에 의하여 참나를 찬미하십시오. 참나에 의하여 참나를 경배하십시오. 참나에 의하여 참나를 보십시오. 참나에 의하여 참나 안에 확고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비슈누 헌신이 의식은 경전의 탐구, 자기 노력, 참나 탐구를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선한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습니다. 확고하고 일관성이 있는 자기 노력은 최고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자기 노력이 없을 때, 다른 경배의 형태가 제시됩니다. 감각들의 완전한 통제가 있다면, 경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감각의 통제가 없다면, 경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참나 참구와 그에 따르는 내적 평온이 없다면, 비슈누 신에 대한 헌신도 참나 지식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참나 탐구와 정신의 흐트러짐을 중단하게 하는 수행에 의존하십시오. 그리고 참나를 경배하십시오. 이것에 성공한다면, 그대는 완벽함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단지 사나운 당나귀와 다를 바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그대가 비슈누 신과 다른 신들을 경배하듯이, 왜 그대는 자신의 참나를 경배하지 않습니까? 사실 비슈누 신은 모든 것의 가장 내부에 거주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내부에 있는 자를 버리면서 밖으로 비슈누를 찾는 자들은 가장 나쁜 자들입니다. 신이 거주하는 곳은 모든 존재들의 가슴 동굴입니다. 그것이 그의 영원한 몸입니다. 소라, 원반, 기타 등등에 의해서 보이는 형태는 참나의 이차적인 형태일 뿐입니다. 주요한 진리를 포기하고 부차적인 면들을 뒤쫓는 이는 확실한 치료법을 버리고, 다른 수단으로 치료 효과를 가져오게 하려고 헛되이 몸부림치는 것과 같습니다. 내부에 거주하고 있는 참나에 일점 지향의 주의를 주면서 명상할 수 없어서 참나의 지혜를 성취할 수 없는 사람은 비슈누 신의 외적인 형태에 대한 경배에 전년할 것입니다. 그러한 수행에 관련된 노력에 의하여 마음은 점차 정화되어 색깔이 지워질 것입니다. 이런 수행을 지성과 지혜와 더불어 지속한다면, 가슴속에 평화와 즐거움이 일어나고 참나 지식을 위한 성숙과 무르익음이 옵니다. 실제로 내가 언급했던 이 결실은 참나로부터 옵니다. 소위 말하는 비슈누 신에 대한 경배는 단지 그것에 대한 구실일 뿐입니다.
비슈누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모든 은총과 축복은 사실 참나 본성을 탐구하는 사람에 의해서 오로지 참나로부터 얻어집니다. 이 모든 여러 수행들과 이것들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이는 축복은 모두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해와 통제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이 모든 다양한 음식물의 근거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흙을 쟁기로 갈고 바위를 옮기는 것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 이외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천 번의 삶 동안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를 돌릴지라도 모릅니다. 이것은 마음을 완전히 통제하여 마음이 지고의 평화와 평온에 이르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삼계의 어느 누구도, 심지어 신들이나 셋으로 있는 신들조차도 변덕스러운 마음의 괴롭힘에서 사람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그것들이 그대 안에서 나타나든 그대 밖에서 나타나든 간에 대상적 세상의 모습에 대한 모든 환영을 버리십시오. 반복적 탄생을 멈추려면 의식의 유일한 실재를 명상하십시오. 대상으로 있는 의식인 모든 개념과 지각을 단호히 버리고 무한한 변함없는 의식을 명상함으로써 사실 모든 존재의 본성인 순수 의식을 맛보십시오. 그대는 확실히 세상 모습과 재탄생이라는 이 강을 건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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