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비데하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통찰력이 끝이 없던 훌륭한 군주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자나까였습니다. 그 왕의 도움을 바라는 이들에게 그는 풍요의 뿔이었습니다. 그가 있으면 친구들에게 가슴의 연꽃이 피어났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태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모든 선한 자들에게 커다란 은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유롭게 거닐곤 하였던 기쁨의 정원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거닐고 있는데, 어떤 신성하고 완성을 이룬 현인들이 영감을 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들었습니다.
완성을 이룬 현인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보는 자가 분리나 개념화 없이 대상과 접촉할 때, 순수한 희열의 경험으로 참나가 나타나는데, 우리는 그런 참나를 명상한다.
주체와 대상이라는 분리된 경험과 이 분리를 만드는 의도나 의지가 모두 멈추어졌을 때, 대상들이 참나 안에 아무런 의지 없이 비치는데, 우리는 그런 참나를 명상한다.
빛나는 모든 것을 비추는 빛이며, '있다'와 '없다'라는 두 개념 너머에 있어서, 그래서 말하자면 두 방향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 참나인데, 우리는 그런 참나를 명상한다.
그것 안에 모든 것이 있으며, 모든 것이 그것에 속하며,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으며, 그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며, 그것 스스로가 모든 것인 실제인데, 우리는 그러한 실재를 명상한다.
모든 언어와 표현의 바탕이며, 알파와 오메가이면서 "a"에서 "ha"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덮고 있으며, "나(아함)"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참나인데, 우리는 그런 참나를 명상한다.
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가슴 동굴 속에 거주하고 있는 신을 버리고 대상들을 뒤쫓고 있다.
대상들의 무가치함을 알고서도 가슴이 여전히 대상들에 속박된 채로 있는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가슴속에 갈망이 일어났거나 일어나려 한다면, 지혜의 막대기를 사용하여 매 갈망을 없애야 한다.
평화로부터 흘러나오는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마음이 잘 조절되는 사람은 평화 속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가슴이 평화 속에 자리 잡으면, 곧바로 참나의 순수한 희열이 일어난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현인들의 말을 듣고, 자나까는 몹시 우울해졌습니다. 황급히 발걸음을 궁전으로 돌렷습니다. 재빨리 청중들을 물러가게 하고 방에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그는 고뇌에 휩싸였습니다.
자나까 왕은 중얼거렸습니다.
아! 이 비참한 세상에서 나는 돌처럼 무력하게 흔들리고 있다. 영원 속에서 수명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나는 그것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 마음이란 이제 역겨워! 평생 동안 통치할지라도 그 통치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수명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것의 전과 후에는 영원의 세계가 있다. 이제 내가 수명을 어떻게 소중히 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라는 환영을 퍼뜨려서 나를 미혹시킨 마술사는 누구인가? 어떻게 해서 내가 그런 미혹에 떨어졌는가? 가깝고 먼 것, 이 모두가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제 나는 외부 대상들을 이해하려는 것을 그만둘 것이다. 세상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더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이 고통으로만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안 내가 어떻게 마음속에 희망을 지닐 수 있겠는가?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순간마다, 행복은 슬픔을 안고 있으며 그러므로 슬픔이 반복해서 나에게로 오고 있는 것을 본다!
여기서 보이거나 경험되는 것은 무엇이나 변화되고 파괴되도록 되어 있다. 현명한 자가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오늘 고귀한 자가 내일은 발아래 짓밟힌다. 오, 어리석은 마음이여! 이 세상에서 무엇을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 나는 끈이 없는데도 묶여 있다. 나는 불순이 없는데도 오염되어 있다. 위에 있는데도, 나는 떨어지고 있다. 아, 나의 참나여! 이 얼마나 수수께끼 같은 것인가! 늘 빛나고 있던 태양도 곧 떠도는 구름을 만나듯이, 이 이상한 미혹이 불가사의하게도 내 앞으로 오고 있음을 본다. 친구들과 친척들은 누구이며, 이 쾌락들은 다 무엇인가? 유령을 본 아이가 무서워하듯이, 나는 공상적인 관계들로 미혹당하고 있다. 그런 관계들이 밧줄처럼 나를 늙음과 죽음 등으로 묶어 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직 그것들에 집착하고 있다. 이런 관계들을 내버려주라. 그것들이 나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대단한 사건이나 인물들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게 하고는 사라진다.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나? 여러 신들과 세 신들마저도 수백만 번을 오고 갔다. 이 우주에서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세상이라는 악몽에 자신을 묶어 버리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부질없는 희망이다. 아! 나는 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
자나까 왕은 계속했다.
나는 '나는 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거짓 느낌을 만드는 자아라는 악귀에 홀린 무지한 바보와 같다. 시간이 수많은 신들과 세 신들을 삼켜 버렸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있다. 낮과 밤이 무한한 의식의 희열을 경험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헛된 갈망에 쓰이고 있다. 슬픔에서 더 큰 슬픔으로 가고 있는데도, 초연이 내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
세상에서 소중히 했던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을 비참하게 내버려둔 채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뛰어나며 바람직하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 날이 갈수록 이 세상사람들은 더욱더 죄와 폭력 속에서 자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큰 슬픔을 경험하고 있다. 유년 시절은 무지 속에서 사라지고, 청년 시절은 쾌락을 햔한 열망 속에서 사라지며, 나머지 안생은 가족을 걱정하다가 사라진다. 이 삶 속에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큰 종교적 의식을 행했을 때, 그 사람은 아마도 천국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것은 없다. 무엇이 천국인가? 천국은 지상에 있는가, 지하에 있는가? 그곳은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곳인가? 슬픔은 행복을 가져오고, 행복은 슬픔을 가져온다! 온 땅의 구덩이는 죽은 시체들로 가득하다. 따라서 그것이 단단한 것처럼 보인다!
이 우주에는 눈을 깜빡이는 순간이 다른 존재들에게는 한 시대에 해당하는 수명을 지닌 존재들이 있다. 그와 비교해 보면 내 수명은 얼마나 짧은가? 물론 이 세상에는 즐거움을 주며 오래 지속되는 듯한 대상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끝없는 걱정과 근심을 가져온다! 번영은 정말이지 역경이다. 역경은 마음먹기에 따라 바람직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마음만이 미혹을 일으키는 씨앗이다. '나', '나의 것'에 대한 거짓 감정을 가져오는 것은 마음이다.
우연히 까마귀가 야자나무에 앉자마자 까마귀에 의해 야자열매가 떨어지는 듯이 보이듯이, 창조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안에서 무지하여 '이것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버려야 한다.'와 같은 느낌을 만들어 낸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오히려 은거처나 지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낫다.
의도나 동기가 세상을 일으키는 씨앗이다. 나는 이 동기를 없애 버릴 것이다! 나는 온갖 경험을 통해 즐겨 왔다. 이제 쉬고 싶다. 더 이상 비탄에 잠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나의 지혜를 앗아간 이 도둑인 마음을 죽일 것이다. 나는 현인들로부터 가르침을 잘 받았다. 이제 나는 참나 지식을 찾을 것이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왕이 자리에 앉아 깊은 명상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수행원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폐하! 이젠 왕실의 의무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폐하의 시녀는 향수 목욕을 준비해 놓고서 폐하께서 즐기기를 기다립니다. 신성한 성직자들이 욕실에서 찬송을 시작하려고 폐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폐하! 일어나셔서 해야 할 일을 해 주십시오. 귀한 분들은 시간을 지키지 않거나 태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는데, 왕실과 왕실의 의무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들은 나에게 쓸모가 없다. 나는 모든 행위와 의무를 버리고 참나의 희열에 잠길 것이다.
오, 마음이여! 늙음과 죽음의 윤회가 가져다주는 비참함을 없애려면 감각의 쾌락에 대한 갈망을 버려라.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그 어떤 상황도 불행의 근원이다! 이 죄 많고, 조건화되어 있으며,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이제 충분하다. 그대 안에 자연스러우며 본래부터 있는 기쁨을 그하여라.
왕이 고요한 것을 알고 수행원 역시 조용해졌습니다.
왕은 다시 혼자 말했습니다.
이 우주에서 내가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이며, 확신을 가지고 의지할 수 있는 진리는 어떤 것인가? 끊임없이 활동하거나 활동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것, 이들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어떤 경우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정말로 영원하지 않다. 활동을 해도 게으름을 피워도 이 몸은 영원하지 않다. 몸은 항상 변한다. 지성이 평온 속에 뿌리내리고 있을 때, 무엇을 어떻게 잃는단 말인가?
나는 내게 없는 것을 갈망하지 않는다. 바라지 않았는데도 오는 것은 버리지 않는다. 나느 참나 안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의 것이 나의 것으로 있게 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활동하지 않음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활동으로 얻어진 것이나 활동하지 않음으로 얻어진 것 둘 다는 거짓이다. 마음이 욕망이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쾌락을 추구하지 않을 때, 몸과 손발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 홛동과 활동하지 않음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몸이 자연스럽게 기능하도록 두자. 그런 활동을 하지 않으면 몸은 해체될 것이다. 마음이 '나는 이것을 한다.'거나 '나는 이것을 즐긴다.'라는 개념을 가지지 않을 때, 활동은 활동하지 않음이 된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이렇게 숙고하면서, 해가 떠오르자 자나까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실의 의무를 집착이 없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모든 개념을 버리고, 모든 심리적인 조건화와 의도에서 자유로운 채, 그는 깨어 있지만 깊이 잠든 것처럼 자연스럽고 적절하게 활동에 관계하였습니다. 그는 신성한 존재들을 숭배하는 것을 포함한, 그 날에 해야 할 모든 일을 하였습니다. 하루가 끝날 때쯤이면 서재로 물러가서 쉽고 자연스러운 깊은 명상 속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의 마음은 모든 혼란과 미혹에서 자연적으로 멀어졌으며, 확실히 침착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자나까 왕은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 불안해 하고 있는 마음이여! 이 세상의 삶은 그대를 진정한 행복으로 안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온한 상태에 있어라, 평온의 상태에서만 그대는 평화, 희열 및 진리를 경험한다. 그릇된 생각을 할 때마다, 이 세상의 환영은 팽창하기 시작한다. 즉러움에 대한 욕망을 가질 때, 이 세상의 환영은 수많은 가지를 뻗친다. 이 세상을 만드는 것은 생각이다. 변덕과 환영을 버리고 평온에 이르러라. 감각적 쾌락과 기쁨의 희열을 그대의 지혜로 저울질하라. 무엇인가를 진리로 정하였다면, 그것을 구하여라. 무엇인가를 구하거나 버리려 하지 말고, 모든 희망과 기대를 버리고는 자유롭게 방랑하라. 이 세상의 모습이 실재이거나 실재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그냥 그대로 두어라. 세상이 나타나거나 사라지도록 그냥 두어라. 그러나 세상의 좋고 나쁜 점이 그대의 평온을 방해하게 두지 말라. 이 세상은 그대와 한 순간도 관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 때문에 그러한 관계가 그대 안에서 일어났다. 오, 마음이여! 그대는 거짓이다. 이 세상의 모습 또한 거짓이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과 그녀에게서 태어난 자식처럼, 그대와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대는 실재라 하고 세상은 실재라 하지 않는다면, 둘 사이에 어떻게 정당한 관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반대로 둘 다 실재라 한다면, 기쁨과 슬픔을 어떻게 정당화시키겠는가? 따라서 슬픔을 버리고 깊은 명상에 들어가라. 이 세상에는 그대를 충만한 상태로 이끌어 줄 것이 없다. 용기와 인내로, 그대의 고집을 정복하라.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지금까지 묘사된 것을 이해한 후, 자나까 왕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왕으로서의 자신의 직분과 필요한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 왕실의 즐거움은 그의 마음을 혼란시키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는 계속 깊은 잠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모으는 것에도 버리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의심이나 혼란이 없이 그는 현재를 살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중단되지 않았으며, 그의 지성은 불순함에 의해 어두워지지 않았습니다. 참나 지식(찌뜨 아뜨마)의 빛이 그의 가슴속에 떠올랐습니다. 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불순과 슬픔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주의 힘(찌뜨 샥띠) 속에 존재함으로 그는 우주의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참나 지식을 지니고서 그는 무한한 참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는, 그는 들뜨지도 의기소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평온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자나까 왕은 살아있는 동안 해방된 사람(지반 묵따)이 되었습니다.
악이나 선의 영향으로 그의 참나 지식이 가라앉거나 일어나지 않은 채, 자나까 왕은 왕국을 계속 통치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활동들로 분주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의식 속에 늘 있은 채, 그는 활동하지 않는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든 경향성과 의도들이 끝나 버렸습니다. 따라서 활동적으로 보여도, 그는 늘 깊이 잠든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미소를 띠며 현재를 살았습니다.
자나까는 그 자신의 탐구에 의하여 그가 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탐구의 끝에 이를 때까지 진리의 본질을 탐구해야 합니다. 참나 지식 즉 진리에 대한 지식은 스승이나 경전 탐구, 좋은 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현명하고 신성한 분들과 교제하면서 얻은 영감으로 탐구를 해야 얻어집니다. 자신의 내면의 빛만이 수단이지 그 밖의 것은 아닙니다. 이 내면의 빛이 계속 살아 있을 때, 그 빛은 둔한 어둠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극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슬픔도 내면의 빛인 지혜라는 배의 도움으로 쉽게 건널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작은 어려움에도 괴로움을 당합니다. 하지만 이 지혜를 가진 이는 이 세상에서 혼자이더라도, 무력하더라도, 경전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쉽게 슬픔의 바다를 건넙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일을 이루어 냅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조차도 잃습니다. 과일을 따려는 사람이 과수원에서 계속 노력하듯이, 이러한 내면의 빛과 지혜를 얻으려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꾸준히 영양을 주면, 지혜는 참나 지식이라는 훌륭한 열매를 주는 뿌리가 됩니다.
세속적 활동을 향하여 하는 노력과 에너지는 지혜를 얻는 데 먼저 사용되어야 합니다. 먼저 모든 슬픔과 재난의 근원이며, 세상 모습의 큰 나무의 씨앗인 어리석음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 지옥 혹은 여기의 제국들에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이나 여기 지금에 있는 지혜에 의해서 얻어집니다. 지혜에 의해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는 것이지, 자선, 순례 혹은 고행에 의해서는 아닙니다. 여기에서 신성한 미덕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그것들을 지혜에 의해서 얻었습니다. 왕들조차 자신들의 왕의 자리를 지혜를 통하여 얻었습니다. 지혜는 지고의 선인 해방뿐만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실임이 확실합니다.
온순한 학자가 힘센 적과의 대결에서 이긴 것은 지혜에 의해서입니다. 오, 라마여! 지혜 혹은 내면의 빛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주는 전설에 나오는 귀한 돌과 같습니다. 이 제혜를 가진 사람은 세상이라는 환영의 건너편에 쉽사리 도달합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세상의 환영 속에 빠지게 됩니다. 내면의 빛이 지성과 이해를 적절히 안내하면, 그 사람은 건너편에 도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애물에 패배합니다.
결점, 욕망, 악마는 마음이 미혹에 들지 않는 지혜로운 이들에게는 다가가지 못합니다. 내면의 빛인 지혜로 볼 때 온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맑은 비전을 가진 이에게는 행운이나 불운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태양을 가리고 있는 짙은 구름이 바람에 의해 걷히듯이, 참나를 가리고 있는 자아의 어둠은 지혜에 의해 사라집니다. 최고의 의식 상태에 있고자 하는 자는, 곡식을 바라는 이가 땅을 갈 듯이, 지혜를 키우고 내면의 빛에 불을 붙임으로써 먼저 마음을 정화해야 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자나까가 한 것처럼 참나의 본성을 탐구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방해도 없이, 아는 자들이 알아야 하는 영역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감각이라는 적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노력으로 참나가 주는 참나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무한한 참나가 깨달아지면 슬픔은 끝납니다. 미혹의 씨앗조차 파괴되고 불행이 없어지면, 악에 대한 지각도 끝납니다. 오, 라마여! 그러므로 자나까 왕처럼 되십시오. 내면의 빛 속에 있는 참나를 깨달으십시오. 뛰어난 자가 되십시오.
끊임없이 참나 탐구를 하면서 무상한 세상의 본질을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적절한 때에 자나까 왕처럼 참나 지식을 얻을 것입니다. 참나 지식에는 신도, 의식도, 의례도, 행위도, 부도, 친척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의 환영을 두려워하는 이에게는 참나 탐구라는 자기 노력만이 참나 지식을 가져오게 할 수 있습니다. 신들, 다양한 의식들, 틀에 박힌 행동들에 의존하고 있는 미혹된 자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며, 그 외의 다른 왜곡된 수행들을 좇지 마십시오. 지고의 지혜 안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을 때, 오직 참나로 참나를 볼 때, 지성이 감각적 지각에 의해 딴 곳으로 향하거나 물들지 않을 때, 그대는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비로소 건널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말하자면 지식이 은총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자나까 왕이 참나 지식을 얻게 된 과정을 그대에게 말했습니다. 자나까 왕이 가지게 된 지식을 연마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내면의 빛을 경험할 것이며, 세상의 환영이라는 무지스러운 공상이 즉시 버려질 것입니다. '나는 이러저런한 사람이다.'라는 제한되고 조건 지어진 느낌이 멈출 때, 모든 곳에 퍼져 있는 무한한 자의 의식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오, 라마여! 자나까 왕처럼 가슴속에 있는 자아라는 거짓되고 공상적인 개념을 버리십시오. 이 자아가 버려졌을 때, 참나 지식이라는 지고의 빛이 그대의 가슴속에 확실히 빛날 것입니다. 자아만이 가장 짙은 어두움입니다. 그것이 사라질 때, 내면의 빛이 저절로 빛납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존재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마음의 활동이 정지하게 된 사람은 욕심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려는 욕심과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피하려는 걱정 이외에 다른 굴레는 없습니다. 그런 근심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탐난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는 것이 그대의 목표가 되게 하지 마십시오. 이 둘 다를 버리십시오. 그 뒤에 남아 있는 것 안에서 휴식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획득과 거부라는 쌍을 이루는 충동들이 없어진 사람들은 어떤 것을 바라지도 않으며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획득과 거부라는 이 두 충동이 없어지지 않는 한, 마음은 완전한 평온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것은 실재이다.', '이것은 실재가 아니다.'라고 느끼는 한, 마음은 평화와 평정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옳다.', '이것은 틀렸다.', '이거은 얻는 것이다.', '이것은 잃는 것이다.'라는 생각에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평온, 순수, 초연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브람만(그것은 늘 하나이면서 여럿입니다)이 있을 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으로 흔들린다면 평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욕망 없음(모든 기대들이 없음), 두려움 없음, 변함없는 안정, 평온, 지혜, 무집착, 무활동, 선함, 왜곡의 완전한 부재, 용기, 인내, 다정, 지성, 만족, 부드러움, 유쾌한 말, 이 모든 자질은 획득과 거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자질들조차도 의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일어납니다.
둑을 세워 강의 흐름을 막듯이, 마음이 아래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외부 대상들과의 모든 접촉을 확실히 버린 후, 마음을 내부로 돌리고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명상하십시오. 다양한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그렇게 하십시오. 지혜라는 날카로운 칼의 도움을 받아 세상 모습의 원인인 갈망, 의도, 동기, 획득, 거절을 만들어 내는 조건화를 헤치고 나아가십시오.
마음으로 마음을 잘라 내십시오. 순수의 상태에 도달한 후, 그 안에 확고히 머무르십시오. 마음으로 마음을 자르십시오. 그러고 난 뒤 마음을 부인하는 마음도 버리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마침내 세상의 모습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습이 사라지고, 미혹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은 세상의 모습을 다시는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남에게는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 모든 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자각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십시오. 모든 희망과 시대를 포기하십시오. 평온 속에 뿌리내린 채,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하며, 원하지 않았음에도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조차 생각하지 말고, 의지 없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신이 모든 행위의 행위자와 행위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듯이, 그대 역시 해야 할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 아무런 의지 없이 살아가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그대는 모든 것을 아는 자인 참나입니다. 그대는 태어나지 않은 존재이며, 지고의 신이십니다. 그대는 모든 것에 퍼져 있는 참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참나 이외의 지각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버린 자는 기쁨과 비탄에서 나온 결함을 겪지 않습니다. 끌림과 혐오에서 자유롭고, 흙덩어리와 그 덩어리가 독같이 가치 있고 중요하며, 세상의 모습을 확고하게 하는 경향성들을 버린 사람을 요기라 합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주고, 무엇을 파괴하든 그의 의식은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즐거움 속에서도 침착합니다.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은 행동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신념 속에 확고히 있는 사람은 쾌락에 대한 생각에서 즉시 풀려 납니다. 그래서 고요하며 스스로 통제됩니다. 마음은 본래 경험하는 능력을 얻기 위해 의식으로부터 지성을 빌려 옵니다. 그래서 마음은 의식의 힘이나 에너지(찌뜨 샥띠)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 것을 접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마음은 의식의 은총에 의해 존재합니다. 이 우주에 대한 자신의 지각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의식만이 마음의 빛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활발하지 못한 마음이 지적으로 움직이겠습니까?
경전들에 조예가 깊은 이들은 의식 안에서 에너지가 상상으로 움직이는 것을 마음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뱀의 쉿 하는 소리 같은 마음의 표현들이 생각이나 관념이라고 합니다. 의식에서 개념을 없앤 것이 영원한 브람만인 절대자입니다. 의식에 개념을 더한 것이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생각의 작은 부분이 실재로서 가슴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유한한 지성 혹은 개체화된 의식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 제한된 의식은 자신이 근본적으로 의식이라는 것을 곧 잊습니다. 계속해서 존재하지만 둔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은 수용과 거부를 내재적 경향성으로 가지는, 생각하는 기능이 됩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된 것은 무한한 의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무한한 의식에 대해 깨어나기까지는, 참나 지식 속에 있는 그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경전들, 초연, 감각들의 조절에 기초한 탐구라는 수단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깨어나면, 지성은 절대자인 브람만으로서 빛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이 유한한 세상을 계속 경험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이 내면의 지성이 일깨워지지 않으면, 그것은 어떤 것도 정말로 알거나 이해하지 못합니다. 생각을 통하여 알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물론 실재가 아닙니다. 생각은 의식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얻어 냅니다. 그릇 안에 두었던 향 때문에 그릇이 향의 냄새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 빌려 온 지식 때문에 생각은 이 우주 의식의 파편 같은 조각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한 것의 빛이 마음에 비칠 때만 마음은 완전히 피어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생각은 어떤 것을 진정으로 정말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거은 춤추도록 요청 받았지만 화강암으로 된 무용가의 형상이 춤추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화폭 위에 그려진 전쟁의 장면이 싸우는 군대의 굉음을 낼 수 있습니까? 시체가 일어나서 뛸 수 있습니까? 바위에 새겨진 태양의 그림이 어둠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둔한 마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태양이 빛남으로써 신기루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듯이, 마음은 내면의 빛이 의식이기 때문에 지적이고 활동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생명력의 움직임이 마음이 된다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마음은 쁘라나 즉 생명력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성이 생각들에 의하여 조각나거나 제한되지 않는 이들의 경우, 마음은 지고의 존재인 참나의 광채입니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개념들을 가짐으로써 그 자신을 참나 속에 있는 특정한 생명력의 움직임과 동일시하는 지성이 지바 즉 살아 있는 영혼입니다. 지성, 마음, 지바 등은 현자들조차 사용하는 이름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실체들은 절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실재가 아닙니다. 사실상 마음, 지성, 몸을 가진 존재란 없습니다. 참나만이 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참나만이 세상이고, 참나만이 시간이고 또한 진화의 과정입니다. 극도로 미묘하기 때문에, 참나는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사로 혹은 나타난 모습으로 있더라도, 그것 역시 진리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참나는 이 모든 말들 너머에 있으며 그것의 진리는 참나 지식 안에서만 오직 직접적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내면의 빛이 빛나기 시작할 때 마음은 존재하기를 멈춥니다. 반면에 의식이 감각의 대상들을 경험하려는 노력으로 대상화되면, 말하자면 참나는 잊혀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만든 창조물들이 관련한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지고의 존재에서 올라온 생각을 개체적 의식이라 합니다. 이 의식이 생각과 개체화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해방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습에 대한 씨앗 즉 유일한 원인은 무한한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그 씨앗은 제한되고 유한한 개체적 의식을 일어나게 합니다. 의식이 극히 고요한 상태에서 벗어날 때 그래서 오염될 때, 생각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그것과 더불어 마음은 우주를 생각합니다.
오, 라마여! 생명력의 조절에 의해서도 마음은 억제됩니다. 실체가 없어질 때 그림자가 사라지듯이 마음은 생명력이 없어지면 사라집니다. 어디선가 겪었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은 생명력의 움직임 때문입니다. 생명력은 다음과 같은 수단들에 의해 억제됩니다. 즉 초연으로, 호흡 조절(쁘라나야마)로, 생명력의 움직임의 원인에 대한 탐구로, 지적인 방법을 통하여 슬픔을 끝냄으로, 그리고 직접적인 지식 즉 궁극의 진리를 경험함으로 가능합니다.
마음은 지성이 돌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지성을 조금도 소유하지 않고 있습니다. 움직임은 둔한 생명력에 속합니다. 지성 즉 의식의 힘은 참나에 속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영원히 편재해 있습니다. 마음은 이 두 요인들 간의 관계에 대해 공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상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잘못된 관계에서 나온 지식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을 무지, 마야 즉 우주적 환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습이라는 무서운 독을 만듭니다.
생명력과 의식 간의 이 관계는 상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상상되지 않으면, 세상의 모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력이 의식과 관계를 맺음으로 생명력은 의식을 지니게 되고, 세상을 생명력 자싡의 대상이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이들이 유령을 경험하는 것처럼 실재가 아닙니다. 무한한 의식 안에 있는 움직임만이 진리입니다. 이 무한한 의식이 어떤 유한한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 열등한 실체가 우수한 실체를 압도할 수 있습니까? 오, 라마여! 따라서 진리 안에는 마음이나 유한한 의식이 없습니다. 이 진리가 명확하게 이해될 때 마음으로 잘못 상상된 것이 끝을 맺습니다. 미흡한 이해 때문에 마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오해가 끝나면, 마음 역시 존재하기를 멈춥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이 마음은 둔하며 실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존재들이 이 죽은 것에 의해 죽고 있스비다. 이 우둔은 얼마나 불가사의한 것입니까!! 마음은 참나도, 몸도, 토대도,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의해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소모됩니다. 이는 참으로 거대한 불가사의입니다. 실체 없는 마음에 의해 자신이 파괴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상 연꽃에 의해 그의 머리가 박살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둔하고, 말 못하며, 보지 못하는 마음에 의해 상처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보름달의 열기에 의해 누군가가 태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 서 있는 진짜 적을 파괴시킬 수 있는 영웅도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이런 마음에 의해 파괴됩니다.
거짓 존재이며, 그것의 존재를 탐구할 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며, 생각에 의하여 조립된 그것의 힘은 무엇입니까?
어리석음과 무지만이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의 근원입니다. 이런 창조는 오직 무지와 어리석음에 의해 야기된 것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살아 있는 존재들은 실재가 아니며 거짓인 비실테를 추구하여 그것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환영은 적의 눈으로부터 나온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자신을 묶고 있으며 그리고 적의 단순한 생각으로부터 만들어진 보이지 않는 군대가 자신을 공격하여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영웅의 상상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마음에 의해 파괴됩니다. 이 환영의 세상은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는 자는 경전에서 설명되는 미묘한 진리를 알기에 걸맞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마음은 경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미묘한 진리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은 환영의 세상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마음은 비나의 아름다운 소리를 두려워합니다. 심지어는 잠들어 있는 친척들조차 두려워합니다. 누군가가 큰소리치면 그는 놀라서 그 자리에서 도망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미혹된 마음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한 것입니다.
독이 행복과 약간만 섞여도 매우 유해하듯이, 자신의 가슴속에 마음이 있으면 그는 그 마음으로 타 들어갑니다. 그는 진리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에 의해 어리석게도 미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거대한 신비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나의 가르침은 이 환영의 세상을 실재라 믿고 그 결과로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계속 추구하는, 지성이 침묵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다채로운 숲을 보여 주려 애쓰겠습니까? 나병으로 코가 없어진 사람에게 향수를 구별하는 섬세한 기술을 누가 교욱시키려 하겠습니까? 누가 술고래에게 형이상학의 정교한 내용을 가르치겠습니까? 누가 화장터에 누워 있는 시체에게 걱정스런 마을 일을 문의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이가 이렇게 하고 있다면, 누가 그에게 그런 어리석은 의도를 하지 말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처럼 말 못하고 보지 못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 무지한 사람을 누가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사실상 마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항상 정복당해 있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실재하지 않는 마음을 이기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는 자는 먹지도 않은 독의 영향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참나만을 봅니다. 그는 생명력에 의해 모든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또한 감각들이 각각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마음이라 합니까? 모든 움직임은 생명력에 속해 있으며, 모든 의식은 참나에 속해 있으며, 감각들은 각각 그들 자신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함께 묶는 이는 누구입니까? 이 모든 것은 정말이지 하나이며 무한하며 전능한 의식입니다. 다양성은 실체 없는 단어에 불과합니다. 다양성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그대에게 일어납니까?
지성을 혼미하게 하는 단어에 불과한 개체적 영혼(지바)이란 무엇입니까? 제한된 그리고 개인화된 으식은 실재 아닌 공상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공상으로 마음을 존재하게 해 놓고는 그 마음이 홀로 존재하고 있는 진리를 가립니다. 그러한 결과로 고통 받고 있는 무지한 사람들의 운명을 보는 것은 정말 딱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는 태어나 고통 받다가 사라집니다. 매일 수백만의 동물들이 세상에서 죽습니다. 매일 수백만이 넘는 모기들이 바람에 의해 죽습니다. 매일 바다에서는 큰 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습니다. 스퍼할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힘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죽이고 잡아먹습니다. 작은 개미로부터 가장 위대한 신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태어났다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상관없이, 기뻐하든 슬퍼하든 개의치 않고, 매 순간 셀 수 없는 존재들이 죽고 매 순간 셀 수 없는 존재들이 태어납니다. 따라서 필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비탄에 빠지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거이 현명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왜곡된 지성을 가지고 사람의 슬픔을 없애려 앞으로 나오는 자는 작은 우산으로 하늘을 덮으려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짐승처럼 행동하는 이들은 가르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나하면 그들은 마음이라는 밧줄에 의하여 동물처럼 이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수렁에 빠지는 무지한 사람들을 보고 돌조차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 자신의 파멸을 초래합니다. 현자들은 마음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모든 면에서 불행합니다. 반면 현자들은 마음을 정복하여 참나 탐구를 할 만큼 성숙한 자들의 슬픔은 없애려 합니다.
오, 라마여!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존재를 쓸데없이 상상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마음의 존재를 상상하면 그것은 유령처럼 그대를 죽일 것입니다. 그대의 참나를 잊고 있는 한, 이런 상상적인 마음은 존재합니다. 마음의 존재를 계속 확신함으로써 마음은 커 간다는 것을 그대는 깨달았으므로, 그와 같이 생각하기를 버리십시오.
대상이 그대의 의식 안에 일어날 때, 의식은 조건화되고 제한됩니다. 그것은 속박입니다. 대상이 버려지면, 그대는 마음 없음이 됩니다. 그것이 해방입니다. 속성들과 접촉하는 것은 속박을 조성합니다. 그것들을 버리는 것이 해방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가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나는 없다.', '이것은 없다.'를 깨닫고, 무한한 공간처럼 확고하며 움직이지 않는 채로 있으십시오. 참나와 세상이라는 이원성을 만드는 순수하지 못한 생각을 버리십시오. 보는 자로서의 참나와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세상 사이에서, 그대는 봄(지켜봄)입니다. 늘 이 깨달음 속에 있으십시오. 경험자와 경험 사이에서, 그대는 '경험하고 있음'입니다. 이것을 알고 참나 지식 속에 있으십시오.
이 참나를 버리고 대상을 생각할 때, 그때 그대는 마음(주체)이 됩니다. 따라서 불행을 겪게 됩니다. 참나 지식이 아닌 그 지성이 마음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슬픔의 근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참나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마음도, 주체도, 객체도, 생각하기도 없어집니다. '나는 지바이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것과 더불어 슬픔도 옵니다. '나는 참나이고, 지바 및 다른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면, 마음은 존재하기를 그치고, 지고의 희열이 있게 됩니다. '이 모든 우주는 참나일 뿐이다.'라는 진리의 견지에서 보면, 마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이 뱀이 몸 속에 있을 때만 두려움이 있습니다. 요가 수행으로 마음이 제거되면, 어디에 두려움의 원인이 있겠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참나가 참나를 잊고, 보이고 경험되는 대상들과 스스로 동일시함으로 불순하게 될 때, 갈망이라는 독이 생깁니다. 이 갈망은 미혹을 강화시킵니다. 쉬바와 같은 신들은 우주적 소멸의 불과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갈망이라는 타오르는 불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의 끔찍한 고통과 재난은 모두 갈망의 결과입니다. 오, 라마여! 보이지 않고 미세한 채로 있기에, 이 갈망은 몸의 살, 뼈, 피마저 소진시킬 수 있습니다. 잠시 동안 가라앉은 듯이 보이다가, 다음 순간에 그것은 팽창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에 시달려 사람은 불쌍하고, 약하고, 빛나지 않고, 비열하고, 미혹되고, 비참하며, 파괴됩니다.
이 갈망이 사라지면, 그 사람의 생명력은 순수하고 모든 신성한 가치와 미덕들이 가슴속으로 들어옵니다. 먹이(미끼)에 대한 갈망으로 짐승이 덮에 걸리듯, 자신의 갈망의 흔적을 따르는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노쇠로 인해 생기는 최악의 무분별도, 눈 깜짝할 사이에 갈망이 가슴속에 일으키는 눈먼 미혹에 비하면, 가벼운 것입니다.
갈망은 사람을 위축시키고 작게 만듭니다. 심지어 비슈누 신도 그가 부탁하려고 결심하자 난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슬픔의 근원이고 모든 존재의 삶을 파괴하는 이 갈망을 멀리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태양이 지구 위에서 빛나고, 바람이 불고, 산들이 서 있고, 땅이 살아 있는 것들을 지탱하는 것은 갈망 때문입니다. 삼계의 모든 것은 오로지 갈망 때문에 존재합니다. 삼계에 있는 존재들은 갈망이라는 밧줄에 의해 묶여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밧줄을 부수는 것은 가능하나, 갈망의 밧줄을 부수기는 힘듭니다.
오, 라마여! 따라서 생각이나 개념화를 포기함으로써 갈망을 포기하십시오. 마음은 생각이나 개념화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첫째로 '나', '너', '이것'이란 이미지들이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이런 이미지로 인해 희망과 기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이런 이미지들이 생기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면, 그대 또한 지혜로운 사람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갈망은 자아감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아감은 모든 죄들의 근원입니다. 무아라는 지혜의 칼로 자아감의 뿌리를 잘라 버리십시오.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십시오.
라마는 말했다.
신이시여! 당신은 자아감과 그것을 일으키는 욕구를 버리라고 가르치십니다. 자아감을 포기하게 되면, 또한 이 몸과 자아감에 기초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과 생명력은 자아감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인 자아감이 잘려지면 나무는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자아감을 없애고도 살아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라마여! 모든 관념, 조건화 그리고 개념화를 버리는 데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이나 직접적인 깨달음에 기초를 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명상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나는 그것들에 대하여 그대에게 자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세상의 대상들에 속해 있고, 나의 삶은 그것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이 없이는 살 수 없고, 그것들도 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미혹된 개념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은 탐구로, '나는 이런 대상들에 속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대상들도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숙고해야 합니다. 그렇게 강한 명상을 통하여 자아감을 버리고, 자연스레 일어나는 행동들과 놀듯이 관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슴과 마음은 늘 서늘하고 고요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자아감과 조건화를 버리는 것을 관조적 무아라 합니다.
비이원의 진리에 대한 지식 혹은 직접적인 경험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자아감과 조건화를 버리며, 몸과 관련해서도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느낌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자아 없음의 직접적인 깨달음이라 합니다. 관조적 방법을 통해 자아감을 흔쾌히 포기하는 이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해방됩니다.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아감을 완전히 근절시키는 자는 평온에 자리 잡습니다. 그는 해방되었습니다. 자나까와 같은 이들은 관조적 방법을 따릅니다. 자아감 없는 직접적인 경험을 가져 본 다른 이들은 브람만과 하나이며, 몸의 의식을 넘어섰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둘은 해방되고 브람만과 하나 되었습니다.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 자, 이 세상에 살고 움직이지만, 마치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내적으로는 전혀 세상에 의해 닿지 않는 자는 해방된 현인이라 여겨집니다.
(현인 바시슈타가 이렇게 말했을 때, 또 하나의 날이 끝났다. 모임은 흩어졌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몸 의식을 넘어간 사람들 역시 형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대에게 살아 있는 동안 자유로워진 이들의 내용을 말해 줄 것입니다.
갈망 없이 자연스럽게 기능을 하는 과정에 일어난 욕망은 해방된 현인의 욕망입니다. 하지만 외부 대상들에 대한 갈망으로 묶인 욕망은 속박을 부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슴속에 자아에 바탕을 둔 모든 개념이 없어질 때, 자연스럽게 생긴 관심은 또한 해방된 현인의 본성입니다. 외부 대상들과 접촉함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갈망은 속박을 불러옵니다. 어떤 대상에 영향 받지 않은 의지 없는 욕망은 해방입니다. 대상들과 접촉하기 전에도 있었던 갈망은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우므로 슬프지 않으며 불순함이 없습니다. 현명한 이들은 그런 갈망을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라 여깁니다.
'나는 이것이 나의 것이기를 바란다.'라는 갈망이 가슴속에 생기면, 그것은 불순함을 일으킵니다. 현명한 사람은 그런 갈망은 늘 그리고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속박으로 가는 욕망과 해방을 향한 욕망 역시 포기하십시오. 바다처럼 고요하십시오. 참나는 늙음과 죽음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이런 것들이 그대의 마음을 혼란시키지 못하게 하십시오. 전 우주가 환영으로 깨달아질 때, 갈망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다음 네 가지의 느낌이 사람의 가슴속에 일어납니다. 첫째, 나는 나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몸이다. 둘째, 나는 몸과는 다른 미묘한 원자적 원리이다. 셋째, 나는 세상에 있는 사라질 수 있는 다양한 대상들 중에 있는 영원한 원리이다. 넷째, 세상과 나는 공간처럼 순수한 공(空)이다. 이들 중 첫 번째는 구속을 만들며, 다른 것들은 해방에 도움이 됩니다. 다른 세 느낌과 함께 하는 갈망들은 속박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나는 모든 것의 참나이다.'라는 깨달음이 일단 일어나면, 그는 잘못이나 슬픔에 다시는 빠지지 않습니다. 텅 빔, 자연, 마야, 브람만, 의식, 쉬바, 뿌루샤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것은 오로지 참나입니다. 그것만이 언제나 실재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비이원의 이해에 의지하십시오. 진리는 비이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행동은 이원성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분명히 이원성 안에서 기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본성이 이원성과 비이원성 모두를 갖도록 하십시오. 실재는 이원성이지도(마음이 분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이지도(하나의 개념은 이원성과의 대조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않습니다. 이런 개념들이 사라지면, 무한한 의식만이 유일한 실재로 깨달아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과거, 현재와 미래의 사건들에 무심한 해방된 현인들은 세상의 상태를 즐겁게 봅니다. 계속적으로 적절하게 행하며, 극단적이고 반대되는 두 관점의 중간에 행복하게 있으면서, 그는 모든 유형의 조건화와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꾸준히 살아갑니다. 그는 지고의 충만 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흔들리거나 들뜨지 않습니다. 모든 적개심 속에서도 그는 중립적인 입장에 있습니다. 모드 것에 대한 자비와 동정심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걸면, 그는 간단하고 적절하게 답합니다. 그러지 않을 때는 고요히 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또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세상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좋은 것을 말하고, 질문을 받으면 견해를 설득력 있게 설명합니다. 그는 무엇이 타당하고 무엇이 타당하지 않은지를 압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고의 상태에 확고한 채 있습니다.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 고요하고 침착한 그는 세상의 상태를 즐겁게 바라봅니다. 이런 것이 이 세상에서 아직 살아 있으면서 해방에 도달한 현인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지 않고 감각적 즐거움의 수렁에 빠진 어리석은 자들의 철학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성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부의 취득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고통과 기쁨이라는 모습의 모든 종류의 보상을 가져다주는 종교적인 의식과 일상의 일에 대해서도 또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 라마여! 모든 제한을 확고히 거부한 후, 무제한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내적으로 모든 욕망과 희망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하지만 겉으로는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모든 것을 알아보고, 제한되거나 유한하지 않은 것만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끊임없이 무한한 것을 명상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대의 가슴속에 아무런 희망을 품지 않지만 희망에 차 있듯이 살아가며, 외부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면서 그대의 가슴을 고요하고 태연하게 한 채, 이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안으로는 '나는 행위자이다.'라는 개념을 버린 채, 겉으로는 모든 행동에 관여하십시오. 오, 라마여! 조금의 자아감의 흔적도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채 이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아무런 속박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런 해방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습은 원래 실재가 아니며, 마술사의 속임수와 같은 본성을 지녔습니다. 어디서나 존재하는 무한한 참나는 결코 속박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왜 그것이 해방되겠습니까? 이 모든 혼란은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어납니다. 밧줄에 보이는 상상의 뱀처럼, 진리가 알려지면 이 혼란은 사라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그대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자아 없음에 확고히 자리 잡고, 공간처럼 때 묻지 않은 채 있으십시오.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나와 관계하는 것들이다.'라는 개념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참나는 그런 개념들에 관련되지 않을 뿐 아니라, 기쁨과 고통, 선과 악이라는 개념들에도 연루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습에 의해 야기된 두려움과 미혹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태어나지 않는 이에게는 아무런 친척들이 없으며, 그러한 친척들에 의한 슬픔이 없습니다!
그대가 자신이 예전에 누구였는지를 알고, 지금 누구인지를 알며, 앞으로 누구로 있을 것인지를 깨닫는다면, 그리고 이 모든 관계들 중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대는 환영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대가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지만 앞으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낀다면, 그때도 비탄에 잠길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세상 모습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이 세상에서 슬퍼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항상 행복하고, 언제나 적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일입니다. 하지만 오, 라마여! 환희에도 슬픔에도 굴복하지 말고,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 있으십시오. 스대는 영원하고 무한한 빛이며, 순수하고 지극히 미묘합니다.
이 세상의 모습은 존재합니다. 나중에 그것은 사라질 것이고, 또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습이란 깨달은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지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습은 본질상 슬픔을 지녔습니다. 무지는 그것을 확장시키고 악화시킵니다. 오, 라마여! 하지만 그대는 현명합니다. 그러므로 행복하십시오. 환영적인 모습은 환영일 뿐이며 꿈은 꿈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전능한 존재의 힘이며, 모습은 그냥 모습일 뿐입니다.
여기서 누가 누구에게 친척이며, 누가 누구에게 적입니까. 모든 존재의 신이 원하므로, 모두가 모두에게 늘 모두인 것입니다! 이 관계의 강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습니다. 수레바퀴처럼 꼭대기에 있던 것이 바닥을 향해 내려오고, 및에 있는 것이 위로 올라갑니다. 천국에 있는 이들도 곧 지옥으로 가고, 지옥에 있는 이들도 천국으로 갑니다. 그들은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가고, 우주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갑니다. 용감한 자가 겁쟁이가 되고, 겁쟁이는 용감해집니다. 이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관계가 있었던 것들도 잠시 후에는 가 버립니다. 친구, 적, 친척, 낯선 사람, 나, 그대는 그에 따르는 실체 없는 단어들일 뿐입니다. '그는 친구이다.', '그는 친척이 아니다.'와 같은 생각들은 평범한 자에게 떠오릅니다. 도량이 큰 사람에게 그런 구분은 생기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모든 존재는 그대의 친척입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서 절대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이는 '내가 없는 곳은 없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계나 조건화를 극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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