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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원점

심행의 해설

by Yuneelif 2023. 11. 18.

독자 여러분은 이 '심행'을 읽고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비록 현대어로 쓰여진 경문이라 할지라도 한문으로 된 불경처럼 그 의미가 아리송하다, 도대체 '심행'이란 제목 자체부터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하고 고개를 저을지 모르겠다.

심행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제 1장과 제 2장에서 언급하였다. 즉 제 1장과 제 2장은 '심행'에 대한 해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 그트머리에 '심행'의 본문과 해설을 싣는 이유는 정법을 잘 이해 못하는 독자들에게 처음부터 불쑥 '심행'을 선보이게 되면 당혹감을 안게 될 것이라는 기우 때문이다.

그러면 '심행'에 대해서 그 대의를 설명해 보기로 한다.

'심행'이란 마음과 행동을 가리킨다.

'심행'을 읽은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미 어느 정도 감을 잡았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인간을 포함한 대우주는 항상 상호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태양계 하나를 들어보아도 태양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혹성이 서로 관계를 유지하면서 태양계라는 틀을 형성하고 있다. 지구나 화성 어느 것 하나가 빠져도 태양계의 존립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지상 생활도 동·식·광물의 상호 관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 상호 관계는 무엇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대자연의 의식이다. 질서 정연한 의식의 작용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대우주도, 지상의 생활환경도 성립된다.

생명의 신비를 바라볼 때 우리는 거기 위대한 대자연의 예지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대자연의 예지, 그것은 신의 마음에 다름 아니다.

만일 자연의 이러한 상호 관계가 그저 우연의 연속으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지구는 아마 옛날에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지구 탄생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지구라는 구체가 생긴 것은 지금부터 약 33억 년 전의 일이다. 당시의 지구는 이를테면 불덩어리였으며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것은 지금부터 약 6억년 전의 일이다. 그때까지의 지상은 화산의 폭발과 빙하시대의 반복이었다. 대우주의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6억 년이란 세월은 일순간의 짧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기 시작한지 이미 수십억 년이나 되는데 그 궤도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정확무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극대의 대우주의 상호 관계와 마찬가지로 극미의 소립자에도 핵과 전자의 상호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때 거기 대자연의 의사, 의식, 마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또한 주관적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단지 여러분에게 설명할 경우에는 주관적인 방법으로서는 이해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상과 같은 설명이 되고 만다.

대우주에는 마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마음은 우리의 마음과도 서로 통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이것을 설명하면 태양의 열·빛에는 강약이 없다. 공기에도 증감이 없다. 하루에는 낮과 밤이 있어서 결코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즉 대자연의 마음은 우리에게 중도라는 조화있는 질서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태양의 열·빛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지상의 생명은 존립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공기가 많아졌다 줄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생활 태도도 과식하면 배탈이 나고 게으름을 피우면 체력의 저항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음이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식욕은 감퇴하고 잠도 이룰 수 없다.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면 피의 흐름이 나빠진다. 뿐만 아니라 화를 내는 입김에서는 연탄가스와 똑같은 독이 섞여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자연은 조화라고 하는 중도의 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육체는 과로해서도 안 되고 나태해서도 못 쓴다. 마음에 있어서도 화를 내거나 슬퍼하면 육체와 정신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육체도 마음도 중도에 따른 생활 행위, 즉 올바른 상념과 행위가 필요하다. 대자연은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동시에 대자연에 거역하면 그 거역한 분량만큼 괴로움을 되받게 된다는 사실도 가르치고 있다.

중도란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이다.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자신을 확립해야 한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중도를 상실한 자아와 집착의 상념에서 생겨난다.

인간은 대자연을 떠나서는 한시도 생활할 수 없다. 대자연 속에서 생활이 가능하다. 이것은 우리가 대자연의 마음과 한 뿌리이기 때문이다.

'심행'은 만족할 줄 아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보은이라는 행위를 표시해가는 행동 지침이다. 중도의 정신으로 일상생활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심행'은 대우주의 상호 관계와 인간 관계, 그리고 모든 것이 순환하고 그 순환이 대우주의 마음, 중도를 축으로 회전하고 인간의 영혼도 이러한 규칙바른 순환의 법칙 속에서 성장하며 조화라고 하는 목표를 향하여 전생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영원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지극히 쉽고 정확한 글로 표현한 것이다.

사물에는 무릇 기둥이라는 것이 있는데 '심행'의 기둥은 

1. 대자연이라는 신의 마음

2.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는 순환의 법칙

3. 자비와 사랑

의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가 '심행'을 형성하고 우리를 살리고 있다.

'심행'은 그러므로 마음의 가르침이요, 생활의 규범이다. 따라서 '심행'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실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대우주의 중도의 마음과 조화를 이루고 참다운 평안을 체득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말이라는 것은 파장이다. 경문의 독송도 그저 암송하는 것만으로서는 뜻이 없다. 경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독송할 경우에는 그 말의 파장이 저 세상의 천상계까지 올라가게 되며 듣는 이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말은 원래 언혼이라고 하여 빛의 입자로 성립되고 있다. 발성하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빛의 구슬이 되어 공간에 날아간다. 빛의 구슬은 보통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영시가 가능한 사람, 혹은 4차원 이상의 세계에서 보면 이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남의 말에 감동하거나 웃거나 화가 나는 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정신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순진한 마음으로 말할 경우에는 이것을 듣는 쪽에 설령 사심이 있다 하더라도 대개 그 사심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말은 이론정연한데 도무지 이쪽 마음이 동의할 수 없을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은 말하는 쪽의 마음의 상태가 듣는이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순진한 마음은 빛인데 그 마음이 비뚤어지게 되면 빛은 검은 덩어리가 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반작용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찰에 가면 대개 종이 있다. 그 종소리도 좋을 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진동의 파장이 달라진다. '징'하는 종소리는 누가 쳐도 같은 음색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치는 사람이 평소 마음의 연마에 정진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 종소리는 저 세상의 천상계까지 울려서 다시 그 사람에게 되돌아온다. 뿐만 아니라 그 종소리는 중생의 마음에 전달되어 정화작용을 한다.

경문의 독송, 낭송도 이와 마찬가지다. 올바른 마음과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독경을 하면 그 목소리의 파장은 금강계까지 통하게 되고, 다시 그 사람에게 되돌아와서 마음의 통일과 평안을 한층더 확실하게 한다.

'심행'의 낭독은 이런 의미에서는 중요한 것이며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편이 좋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 내용의 뜻도 모른 채 외고 예배하면 이익이 있다고 취급당하면 곤란하다.

반야심경은 어디에서나 많이 읽혀지고 있다.

고마운 경인 만큼 사경도 좋고 독송을 해도 이익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의미도 모르는, 행동이 없는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독경해 보아야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날의 불교는 경문을 외거나 사경하는 자체에 비중이 걸려 있고 일상의 상념과 행위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이 문제다.

'심행'은 이런 의미에서 그 진의를 잘 이해하고 현실생활에 실천하여 그런 진심으로 낭독한다면 하나의 언혼은 둘이 되고 셋이 되어 마음의 평안을 다져나갈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심행'의 해설은 제 1, 제 2장에서 풀이하였다. 그래서 '심행'의 전문을 참조하면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조용히 낭독하고 그날 하루의 이로가를 반성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중도의 마음에 하루 빨리 접근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한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