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적 반성의 의의
선종의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비우고 그 비운 가운데에서 참 나를 찾는데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무념무상이 견성성불로 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고타마 싯달타가 가르친 명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의 상념과 행동이 중도에서 벗어났는가 아닌가를 확인하고 만일 잘못이 있으면 신에게 빌고 지혜와 용기와 노력으로써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자신을 다스려나가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명상의 목적은 반성이었으며 하루 24시간의 생활을 올바른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결코 명상을 위한 명상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지 인간은 반성에 의해서 전진한다. 학업이건 직업이건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은 반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보할 수 없다.
우리들의 인격을 형성하는 마음과 행위의 문제도 반성을 통해서 키워지며 안심 입명의 자신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반성은 언제 어디에서나 할 수 있으며 숙달되면 일초 일초의 생활이 반성의 생활로 일관한다.
하지만 명상에 의한 반성은 반성의 내용을 한결 심도 있게 충실한 것으로 이끌어올려 준다. 왜냐하면 중도를 척도로 삼고 반성을 하면 반드시 수호령이 곁에 와서 그 반성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또한 명상은 가볍게 눈꺼풀을 닫고 그러면서 눈동자는 뜬 채 사념을 일점에 집중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눈을 뜨고 있으면 사념이 아무래도 산만해지고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외계의 움직임에 마음이 빼앗기기 쉬우며 생각이 깊지 못하고 약팍해지기 일쑤이다.
우리들의 마음과 육체의 관계는 누누히 말한 바와 같이 별개의 존재다. 깨어 있을 때는 양자가 일체가 되어 생활하고 있으므로 마치 육체가 정신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마음과 육체의 파동은 마음, 의지, 대뇌, 오관, 육체의 순으로 전달 왕래한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아름답다, 더럽다 등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눈이라는 오관에서 대뇌로, 대뇌에서 의식(마음)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잠들어 버리면 제3자가 비록 눈을 열어주어도 시각은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마음은 원래 둥글고 큰 것인데 오관에 좌우되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비뚤어지고 변형되기 쉽다. 하지만 중도의 척도로써 외계에서의 영향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으면 마음의 왜곡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원만한 마음을 유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프다, 가렵다 등의 감각이 마음에 전달되기 때문에 오관과 육체를 중심으로 한 견해, 사고방식에 젖게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의식이 올바르게 작용하지 못하고 마음의 모양을 비뚤어지게 만들어버리기 일쑤이다.
연애 중인 사람의 마음은 본능과 감정의 영역이 유별나게 부풀고 지성·이성은 작아진다. 본능과 감정이 부풀면 마음의 모양은 하트형이 된다. 하트는 마음이란 뜻이지만 마음의 본형은 하트형이 아니다.
연애 중에는 '곰보딱지도 보조개'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의 장점만 보인다. 즉 상대방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 지성, 이성이 작게 오므라들어 충분한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지성과 감정이 이상하게 부풀 경우도 있다. 이것은 주의나 사상에 빠졌을 경우에 일어난다. 지난 날의 군국주의자나 일부 인텔리를 자칭하는 자들에게 흔히 볼 수 있다.
명상적 반성은 이와 같은 비뚤어진 마음을 수정하고 본래의 둥근 마음을 되찾게 해 준다.
즉 중도라고 하는 팔정도의 척도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이 지금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가, 부풀고 있는가, 아니면 오므라졌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4각 4면도 있고 삼각형도 있다. 이렇게 마음의 모양은 여러 가지로 변형된다.
마음의 왜곡은 의식인 자기의 의사, 즉 사고방식이 한쪽으로 기울어졌을 때 일어난다.
괴로움, 슬픔의 원인은 모두 이러한 왜곡된 마음이 만들어 내고 있다. 마음이 둥글고 풍부하면 부동의 진아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반성이 싶어지고 그 반성을 실천에 옮기면 명상의 경지도 깊어진다. 그래서 수호령, 지도령과의 대화도 가능해진다.
반성 후의 명상이 더욱 깊어지면 자신의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여 저 세상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고 올 수 있다. 또한 멀리 떨어진 사람의 근황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나아가 천상계의 사람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앉아서도 사물의 추이를 손바닥처럼 환하게 알 수 있다. 삼매의 경지란 명상의 극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상무념이 되어 기분이 좋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상무념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마음의 공백을 의미하며 언제 악령들이 자기의 의식 속에 침입할지 모른다.
명상 중에도 자기 자신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대아의 자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부동의 자기 자신이며 명상이 깊어질수록 대아(무아라고도 함)는 더욱더 생생하게 살아나온다.
반성의 명상은 눈꺼풀을 약간 닫고 눈은 전방 아래 쪽의 일점을 본다. 눈을 완전히 감아버리면 대개 졸음이 와서 반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속눈은 뜨고 전방을 보고 있는 것이 좋다.
졸음이 오면 대개 눈동자가 위로 이동한다. 피로할 때나 밤이 깊었을 때 눈꺼풀을 닫으면 스르륵 잠이 온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그렇지 않는데 눈꺼풀을 닫으면 그렇게 된다. 이것은 자연현상이고 생리현상이니 어쩔 수 없다.
이럴 때 눈을 뜨고 똑바로 전방을 응시하고 의식을 긴장시키면 그다지 졸리지는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 수가 있어서 반성이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진다.
명상이라고 하면 보통 조용히 눈을 감고 여러 가지 잡념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인 줄 알고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명상의 의의는 우선 반성을 되풀이하여 수호령, 지도령의 빛이 내려왔을 때 비로소 진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반성도 하지 않고 갑자기 잡념을 불식하는 명상에 잠기거나 혹은 그런 습관이 몸에 배면 그럴 때는 마음이 비뚤어진 상태이므로 그 비뚤어진 파장에 합당하는 악령을 불러들이게 된다.
정도도 모르면서 깨닫기 위한 욕심으로 참선에 정진하다가는 마의 밥이 되기 십상이며 정신분열증에 걸려들 염려가 농후하다.
따라서 반성은 명상에 앞서서 반드시 빠뜨릴 수 없는 기본적 수행법이며 마음의 때를 벗기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다.
명상은 아무래도 밤에 할 수밖에 없다. 낮에는 일에 종사해야 하며 일을 하지 ㅇ낳고 명상만 하고 있으면 생계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밤이 되면 하루의 피로가 나타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명상을 하면 졸음이 오게 마련이다. 아무리 하여도 반성이 되지 않을 때에는 눈꺼풀을 약간 열고 방바닥의 일점을 응시하면 졸음은 해소된다. 반성이 잘 되거든 다시 눈을 감고 명상적 반성에 들어가면 된다.
밤은 낮과 달라서 잡음과 소음이 적은 것이 이점이다. 초목의 활동도 조용해지고 동물들도 잠이 든다. 그만큼 밤의 명상은 심도가 깊고 마음을 통일하기가 쉽다.
동시에 저 세상의 천사들의 통신도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된다. 낮에는 가사나 일에 마음이 빼앗기게 되므로 천사들의 통신을 잡기가 어렵다.
고타마 붓다의 명상은 거의 한밤중에 이루어졌다. 지금의 시간으로 치면 새벽1시부터 3시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념하였다.
하지만 반성의 명상이 아니라 의식의 공백상태가 되거나 집착에 빠질 경우에는 낮보다 밤이 훨씬 더 위험하고 마가 침범하기 쉽다. 백귀야행이라는 말처럼 밤은 마가 활동하기 쉬운 시간대이다.
반성의 명상을 하고 나서도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반성의 방법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며 무엇인가에 사로잡혔던 집착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는 의례히 지옥령이 곁에 와서 본인의 의식 속에 들어가려고 엿보고 잇으니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태가 여러 날 계속되면 노이로제가 된다. 이것은 반성이 아니라 집착이므로 이럴 때에는 반성의 명상은 잠시 중단하는 것이 좋다.
정법에 따라 반성을 하고 있을 때는 수로형, 지도령이 곁에 와서 본인을 지켜준다. 따라서 명상을 풀면 금방 잠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반성의 명상을 계속하고 있을 동안에 수호령, 지도령과의 교류가 이루어져 대화가 가능해진다.
결국 마음의 구름이 걷혀서 언제 어디에서나 수호령, 지도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명상은 제1단계에서 제9단계까지 있다.
수호령, 지도령과의 대화는 제4단계에 속한다. 제1단계는 반성이다. 제2는 반성 후의 마음의 통일, 제3은 수호령, 지도령과의 교류이며, 그런 다음 제4단계에 이른다.
이러한 구별은 반성을 거듭하여 마음의 구름을 벗기고 일상생활에 반성의 결과를 실천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 5, 제 6, 제 7... 상승해 가지만 제 6까지 갈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도어 있다.
제 8은 여래의 명상이며 앉아서 외계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하게 알 수 있다.
제9단계는 고타마 붓다, 예수, 모세의 명상이다.
이 명상은 과거세의 수행이 쌓여 신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된 대여래의 경지이다. 여기에는 여타의 사람은 근접할 수 없다. 과거세의 수행에 의해서, 또한 금세의 덕행에 의해서 제 6단계까지는 누구든지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단계가 되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무튼 반성의 명상은 모세도, 예수도, 석가도 실천했던 중요한 수행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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