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가의 죽음
"저는 신문기자입니다. 작가의 자살이 예전부터 많이 있는 듯한데 그들은 왜 죽음을 서두르는지요.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염세적이 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질문이다.
하기야 최근에도 미시마, 가와바다, 두 사람의 자살이 잇달아 문학 애호가들에게는 슬픈 소식이 되어 있다.
작가가 죽음을 택하는 속마음을 일반 독자는 알 수 없다. 존경하는 작가의 죽음은 독자의 마음에 쓸쓸한 그늘을 던진다. 삶의 무상함이 엄습해 오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결론은 같다 하더라도 그 동기는 사람마다의 입장, 환경, 사상에 따라 다르다. 자살은 인생으로부터의 도피이고 자기보존의 극단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문인에 한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천수를 다하는 것이 본래의 도리이다. 스스로 인생의 수행을 포기하는 자학은 비록 세상에 알려진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였든 간에 올바른 행위가 되지 못한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원하여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이 육체주는 그 생명이 존속되는 한 신의 자식으로서 이 인생항로에서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행을 계속해야 할 의무가 있다. 목숨이 있는 한 이 육체주를 소중히 다루는 것이 신이 자식으로서의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가 남기는 작품은 많은 독자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그 책임은 더욱 무거운 것이다.
작품 가운데는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겨 그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저속한 것도 있을 것이다. 한편 독자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지성을 넉넉하게 기르며 감성을 풍족하게 해주는 작품도 있다.
그 내용은 가지각색이다.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에 눈 뜨고 마음이 조화된 작가의 작품은 독자에게 마음의 양식이 되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용기와 기쁨을 준다.
그러나 아무리 명성이 높은 작가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상실한 작품은 마침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마음 없는 독자와 마음 있는 독자에 따라서 작품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다르다. 다시 말해서 작품의 내용은 독자의 올바른 마음의 척도로써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에 따라서는 많은 독자에게 큰 영향을 주며 그로 인한 현상 또한 크다. 저속한 작품의 경우는 특히 그 영향력이 독버섯처럼 급속도로 강하다. 부조화를 불러일으킨 그 책임은 작가 쪽에도 물론 있지만 그 독을 먹는 독자에게도 큰 문제가 있다. 독을 뿌린 죄의 대가는 신의 자식으로서 피할 수 없는 가혹한 수행장(지옥)에서 치러야 한다. 작가의 책임은 그런 의미에서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논픽션이건 픽션이건 간에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붓을 움직이고 있는 사이에 작가의 마음 속에 만들어져 나가는 상념은 작중 인물의 마음고 완전히 합일되고 만다.
이를테면 역사상의 남겨진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난세를 헤쳐나간 한 무장의 이야기를 쓴다고 하자. 이 경우 작가의 마음 속에는 당시의 상황이 살아나온다.
이럴 때 차원을 초월한 세계로부터 그 작가의 지도령이 쓰게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결투의 장면을 쓰고 있을 때는 작가의 마음까지도 싸움의 파장으로 일렁거린다. 만약 묘사하고 있는 그 장수가 악인이라면 작가의 마음도 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창작하고 있는 작가이 마음이 차원이 다른 저 세상에 통하고 말기 때문이다.
조화된 마음의 상태라면 몰라도 부조화한 상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경우에는 설자 그것이 창작이라 하더라도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부조화한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올바른 마음의 척도를 확고하게 깨닫고 생활하고 있는 작가들은 비록 부조화한 주인공을 그리고 있을지라도 스스로의 올바른 마음 속에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 내는 일이 없다.
그러나 작가가 올바른 마음의 척도를 잃고 작품 중의 부조화한 인물에 도취되면 작가의 마음도 어느새 주인공으로 바꿔지고 만다. 이럴 때 불면 노이로제 따위의 증상이 나타난다.
상념은 현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념은 현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보존에 빠져 가정 생활도 불안정하게 되고 이름이 유명해 짐에 따라 오만해지는 작가도 있다. 겸허한 마음은 간 데 없고 자기는 위대한 인간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작자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자신 과잉과 자신 상실은 표리관계에 있다. 마음의 변화는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기복이다. 그 기복도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명작을 남긴 작가라도 그 사람의 정신 상태는 항상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사이엔가 그 정신이 작품 속에서 전개되는 부조화한 의식에 상응하는 지옥령에게 빙의되어 마침내 올바른 판단을 잃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창작의 작은 세계 속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 명리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평정을 간직할 수 있는 넓고 넉넉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작가의 마음에는 사신이라는 지옥계의 빙의령이 접근해 온다.
그러므로 유명한 작가라고 해서 인격적으로 표리가 없는 원만한 인간인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인간의 가치는 명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여움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나면 가장 가혹한 연옥, 즉 지옥의 화염에 휩싸인 환경에서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명성에 도취되어 마음 속에 그려내는 부조화한 파괴적 상념을 형상화하려고 했을 때 그 작가의 의식의 바늘은 벌써 연옥과 지옥의 아수라계로 통하고 만다.
감정의 영역이 부풀고 이성을 잃은 마음은 크게 왜곡되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서 문무양도 따위는 신리일 수 없다. 그것은 봉건시대의 한갓 잔영에 불과하다.
문필은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는 무기가 될 수 있다. 투쟁적 무력은 육체적 행동을 제어할 수 있어도 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왼손에 칼 오른손에 붓을 들고 문무양도를 외친다면 과격한 작품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지어낸 불만 가상의 적에게 쫓기게 되어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마음의 격투는 스스로 중도를 깨닫고 중도의 척도로써 가라앉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품 속의 선악을 올바르게 판단하여 선의 길을 존중하고 선을 마음의 양식으로 삼으며 보다 둥글고, 넓고, 넉넉한 인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과 악은 그 어느 쪽도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의해서 윤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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