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세와 내세의 다름
저승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승뿐이다,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생명의 영원은 육체의 자손을 통하여 보존되므로 그런 의미에서의 영원성은 긍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유물적인 사고에 지배되어 올바른 생명의 전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조상이 혼과 마음까지 주었다고 한다면 어째서 같은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형제 자매가 재산 문제로 다투고 있는 것일까. 부모와 자식 간에도 부조화한 대립이 일어나서 서로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일까.
자식이 부모의 마음과 같다면 부모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모두 이해하고 불효 따위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흔히 있는 보기이지만 부모들은 자기가 못한 일을 자식에게 위탁이나 하듯이 '공부하라, 공부하라'하고 자기의 분신처럼 교육한다. 그 아이가 부모와 같은 마음이라면 어째서 노이로제가 되기도 하고 불효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토록 뒷바라지를 해 주었는데도 배신했다고 넋두리하는 부모도 많다. 부모의 연에 의해 인생항로의 육체주를 얻고 양육된 것은 사실이지만 부모로부터 영혼이나 마음까지 얻은 것은 아니다. 자식은 자식대로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다. 마음까지 내 자식일 수는 없는 일이다.
부모 자식은 서로 대화를 통해서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것이다. 부모로서는 섭섭한 일이지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자식은 자식 나름의 인생을, 그리고 새로운 자기 완성의 학습장으로 현세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차원이 다른 저 세상에서 이미 서로 약속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잊고 있을 뿐이다. 마음의 원점을 잘 이해하고 한 쪽에 기울어지지 않는 생활을 영위한다면 인간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되풀이 말하지만 저 세상을 물리적인 차원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면 물질계인 이 현상계는 X축, Y축, Z축을 잇는 3차원적 입체의 세계이다.
비행기는 3차원 공간을 자유로 날 수 있지만 X,Y축의 2차원적인 세계에서는 활동이 불가능하다.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활동이 불가능하다. 다만 3차원의 세계에서 투영된 2차원의 스크린의 영상은 볼 수 있겠지만.
텔레비전의 스크린도 2차원적인 평면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화면의 주인공에게 3차원의 세계에서 말을 걸수가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말을 걸더라도 영상의 인물에게 3차원에서 통신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3차원을 투영하고 있는 4차원의 세계에서 3차원의 세계에 말을 걸어도 통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2차원은 3차원의 투영이니 이 둘은 연속된 것임에 틀림이 없고 3차원과 4차원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X·Y·Z·t의 4차원의 세계가 물질의 차원보다 고차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물질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질의 질량 M과 빛의 속도 C의 2승의 적은 차원이 다른, 즉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E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4차원의 존재에 대해서 보통의 능력으로는 인식하기 힘들다. 인식은 못하더라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일이다. 물질계는 분명히 3차원을 구성하고 있으나 그 뒤에 숨은 고차원의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다.
불교에 색심불이라는 말이 있다. 색이란 우리의 오관에 감지되는 만생만물을 말하며 그 만생만물은 색채에 의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의식의 세계는 3차원을 투영하고 있는 4차원 이상의 고차원의 세계다. 죽은 영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 염파에 의한 텔레파시, 예지 능력, 투시 능력, 거슬러 올라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은 다 4차원 이상의 세계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마음의 문제는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경험하지 않은 경우에는 이해하기 힘드는 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험이 없다고 해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과학하는 현대인으로서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예로부터 많은 성자가 보통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적, 덕행을 행하므로 많은 중생을 구제해 왔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쪽도 대어주라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는 현ㄷ인에게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모세의 대기적은 오늘에 와서는 하나의 신화로 전달되어 학자에 따라서는 한낱 가공의 인물로 취급되기도 한다.
또한 붓다의 깨달음에 대해서도 전래되어 오는 창작처럼 보는 사람도 있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모두 삭제해 버리는 경향도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문헌들 중의 많은 것들은 허구와 진실이 뒤섞여 진위의 판단이 어렵게 된 부분도 많지만, 3차원적 이해를 넘어선 덕행이나 기적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3차원 이상의 고차원의 작용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3차원인 현세의 육체주를 타고 있을 때는 우리의 의식은 보통 10% 정도밖에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그야말로 장님의 인생을 살면서 고락을 체험하고 있다.
하지만 육체주에서 내려 있을 때 (잠 잘 때나 마음이 조화되어 뱃사공인 영혼이 육체로부터 벗어날 때)에는 육체주의 부속품인 눈, 코, 귀, 혀, 몸의 오관의 작용은 외부로부터의 진동에는 전혀 무반응이다.
따라서 기억력조차도 그 작용을 멈추고 만다.
기억력이 정지한다는 것은 일체의 기억은 결코 우리의 뇌신경이 하고 있지 않다는 증좌이다. 어떤 희노애락이 있더라도 잠 잘 동안에는 잊고 만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3차원의 육체주를 떠나 4차원 이상의 세계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깨어 있을 때와는 반대로 의식의 90%가 표면에 나오고 10%가 잠재하여 3차원적 현상화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면은 육체주의 생명이 인생항로의 수행에 견딜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수면은 빛의 선(즉 영자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4차원 이상의 다차원의 세계에 접속되어 있는 선)을 타고 영혼이 저 세상인 실재계로 올라가는 현상이다.
죽음은 육체주가 인생항로에 견디기 어렵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고 육체주와 의식을 연결하고 있는 영자선의 완전한 절단을 의미한다.
두번 다시 육체주를 지배하여 3차원의 공간에서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현상이다.
사공을 잃은 육체주는 차츰 썩어 대자연으로 돌아간다.
한편 육체(원자체)를 떠난 영혼은 4차원의 배인 광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묘한 육체만을 지니게 된다.
생전에 있어서도 우리들의 원자 육체는 이 광자체와 겹으로 함께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죽음은 이 양자의 결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우리들의 의식은 4차원 이상의 다차원의 세계에 얼마든지 통할 수 있으며 반대로 같은 4차원이기는 하나 몹시 어두운 지옥계로 통하기도 한다.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풍부한 영혼은 빛이 충만한 다차원의 세계로 통하고 자기보존 자아아욕이 강한 사람은 마음이 어두운 구름에 덮혀 신의 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후광도 어둡고 괴로움과 슬픔 속에서 신음하며 지옥계로 통한다.
저 세상의 지옥계는 아귀, 아수라, 축생, 연옥, 무간지옥 등으로 구분되는 무서운 세계이다.
아름다운 마음의 상태에 의하여 비물질적인 정묘한 영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천상계는 이 3차원의 불안정한 고체적 천체인 지구를 감싸고 있다.
지상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가 중도의 조화를 이루면 지구는 한층 더 광명화되어 유토피아 완성의 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다.
지상계의 인류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투쟁과 파괴의 업을 지어왔으나 그 동안 매우 다면적이었던 사상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극으로 나누어져 겨우 조화에의 서광이 비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의 혼란된 사회는 인류가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적인 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경제력, 권력, 무력에 의한 지배는 비록 일시적으로는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인간 본래의 신성, 불성인 마음의 자유까지는 지배하지 못한다.
비록 생활 환경의 경제적 틀이 달라지더라도 마침내 인류는 모두 형제라고 한ㄴ 자각이 자유 평등 평화의 세계국가를 완성해 갈 것이다.
인류는 그것을 위한 엄한 학습을 지금 체험하고 있는 셈이다.
마음을 잃은 사상은 사회를 혼란으로 빠뜨려 인심을 어지럽히고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마음이 썩어버린 사상가와 그 추종자는 가장 엄한 연옥 지옥에서 그들이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수행하게 된다. 그 수행을 남에게 전가시킬 수는 없다.
이 현상계는 무에서 유를 낳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유에서 연에 의한 유가 생겨나는 것이 무너뜨릴 수 없는 현상의 법칙이다.
우리들의 오관으로 잡지 못하는 것은 모두 부정해버리는 태도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인간의 생활의 지혜에 의해서 만들어진 물질문명은 공해라고 하는 부산물을 수없이 낳고 있다. 대기 속에 질소화물이나 유화물 광화학 스모그라는 생물의 생존에 위험한 독물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우리들의 육체주는 부모의 연에 의한 것이고 한편 뱃사공(영혼)은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사전에 이미 인을 맺었던 것이며 그 인연에 의하여 유에서 유가 생겨난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에너지 불멸의 법칙도 질량 불변의 법칙도 오로지 유에서 유가 생겨나는 것이며 유가 다만 모양을 바꾸어 현상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행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괴로움, 슬픔, 기쁨의 원인은 모두 오관과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결코 무에서 유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상념이 현상을 낳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육체적 저신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은 서로 깊은 상관 관계를 맺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심불이란 말의 의미를 상기해 주기 바란다.
양자는 따로따로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 현상을 만들어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의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육체적 조건만을 추구하여 질병을 고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 물리학의 분야는 벌써 하나의 큰 벽에 부딪혀 수 십년 전의 상대성 이론 특수상대성 이론 이상의 것이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다.
육체의 여러 기관은 위는 위로서, 심장은 심장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주의 뱃사공인 영혼과 육체 세포의식의 상호간의 대조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질병은 이 양자의 부조화가 원인이 된다.
현대인에게 흔한 노이로제라는 병도 육체주와 뱃사공인 마음의 상호 부조화가 그 원인이다.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편견과 자기중심적인 생각, 마음 속에 채워넣은 부조화한 상념, 그리고 누적된 정서 불안정의 생활 등의 결과로써 생겨나는 질병이며 그 대부분이 지옥령이나 동물령의 빙의에 의하여 인격이 바뀐 현상이다.
어둡고 습한 장소에 바퀴벌레나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그들은 밝은 태양 밑에서는 살 수 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행위가 올바른 사람은 그 마음이 밝기 때문에 악령들이 가가이 접근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3차원의 색의 세계와 4차원 이상의 마음의 세계는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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