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은 법의 존재를 가르치고 있다
지구라고 하는 장이 신의 의식의 나타남이라고 한다면 지구 그 자체는 대신전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도시이건 시골이건 대신전이다.
그 대신전 속에 무슨 까닭에서인지 금은보화를 들여 온갖 신전을 세우고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이 점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2,540여 년 전 붓다는 인도의 쿠시나가라에서 그 생애를 끝마쳤다.
예수 그리스도는 1세기에 이스라엘의 골고다의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석가의 시대나 예수의 생존 당시에 과연 불각이나 교회란 것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다른 종교에는 우상과 제단이 있었지만 석가나 예수는 그런 것은 일체 만들지 않았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보면, 그 후세의 사람들이 석가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리고자 해서 만들었던 것이 그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물질과학이 발달하여 극미의 세계와 극대의 우주로 인간의 관심이 쏠려가면 이러한 교회나 불각은 겉발림 같은 것으로서 관광이나 결혼식장으로밖에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뻔한 현실인 것 같다.
다만 이러한 교회나 불각은 이간인 이상 마음의 고향으로서의 효용은 혹실히 있는 듯하다. 결혼식이라는 인생의 출발을, 이런 장소를 골라서 하는 것도 그 표현일지 모른다.
또한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을 때는 그다지 필요하게 느끼지 않지만 장사가 부진하거나, 후배에게 앞지름을 당하거나, 가정불화, 질병, 불안 초조 등을 당하게 되면 절간이나 교회에 가서 정신적 안식을 구하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무엇인가에 매달리고 싶어지고 도움을 구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몽매한 마음인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 가부좌를 틀고 참선할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될 수만 있다면 깨달음을 얻어 사물의 이치를 이 눈으로, 이 몸으로 확인하고 싶은 사람도 나올 것이다.
석가는 처자를 버리고 왕자의 자리마저 내던지고 출가했다. 전쟁과 번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무력과 압정, 사종(사교)의 횡행(거리낌없이 모로 감) 등 인간의 길은 땅에 떨어져 지배자 이외는 동물 이하의 취급을 받던 시대로서 오늘날과는 그 시대적 배경이 전혀 달랐다. 깨달음을 얻은 뒤 석가는 재가의 중생에게 불교를 전도하여 함부로 현실 도피를 위하여 출가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였다.
인간의 목적은 현실 사회의 조화에 있다. 생활 속에 깨달음이 있다. 석가는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출가했다. 그리고 스스로 오랜 괴로움을 겪고 해탈하여 인류를 구제하는 목적을 수행해 갔다.
예수 또한 그러하다. 목수의 집에 태어나서 처음에는 일을 하면서 사랑을 설교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악마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전도의 길에 나서서 그 생애를 던져 성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수많은 기적을 남기고 일생을 마쳤다.
이렇게 훑어보면 사찰이라든가 교회의 존재 의의란 거은 그다지 있는 것 같지 않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의 장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석가도 예수도 이와 같은 전당이나 가람은 만들지 않았으며 인간의 마음, 사물의 본질,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 지는 사실, 사계의 변화, 물의 성질, 인간 사회의 가지가지 경험 속에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다고 설법했기 때문이다. 쓸데 없이 전당에 막대한 돈을 들여 위엄을 뽐내느니 인간 자신의 마음의 존엄성을 아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며 차라리 그런 돈이 있으면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 줄 일이다. 대전당을 만들어 신자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일은 석가도 예수도 하지 않았다.
자연은 항상 바르게 운행하며 우주도 ,극미의 세계도 신불의 경륜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본디 대우주가 대신체이며 지구가 대신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일련이 쓴 남묘호오렌게쿄라고 하는 만다라를 가지고 이것을 신불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도 터무니 없는 잘못이다. 왜냐 하면 만다라 그 자체는 한갖 종이 쪽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련종의 신자가 나에게
"당신은 예배를 드릴 본존이 없지 않는가. 우리한테는 만다라라는 본존이 있는데 대상물 없이도 기도를 올릴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나는 되려 질문했다.
"왜 기도할 대상이 필요한가. 만다라는 본존이라고 일컫는 일련이 만든 것인가."
그 신자는 이렇게 대꾸했다.
"일련이야말로 구원의 부처이니 그가 만든 만다라가 곧 본존이다."
일련은 과연 신인가. 아니다. 일련도 육체를 가지고 인간으로서 지상계에서 생활했던 사람이다.
그 일련이 태어났을 때 목에 만다라를 걸고 나왔을까?
역시 일련도 사람의 아들이다. 신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주고 있으며, 만다라 따위는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예배할 대상물은 대우주의 법, 곧 신의 마음과 자기 마음과의 대화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당신이 태어날 때 기도를 드릴 대상물로서 만다라를 목에 걸고 나왔다면 믿겠다."라고 하니 그 신자는 "만다라를 걸고 태어나지는 않았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인도의 그 당시 고타마 붓다는 무학 문맹의 중생에게 방편으로 설법했다. 그 중에서 중생이 알기 쉽도록 설명한 것의 하나가 법화경이라고 하는 경전이 되었다.
"모든 중생, 비구, 비구니들이여, 저 늪에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 있다. 어떤 것은 물 위에 어떤 것은 물 속에 피어 있다. 그러나 물 밑은 진흙으로 더러워져 있을 것이다. 결코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중생이여, 비구·비구니들이여. 그대들의 육체도 저 연꽃이 피어있는 늪과 같다 할 것이다.
눈을 보라. 피로할 때나 눈병이 나면 눈꼽이 나올 것이다. 코딱지, 귀똥, 땀, 대소변, 깨끗한 것은 한 가지도 나오지 않는다. 육체는 흡사 진흙의 늪과 같다. 이 진흙의 늪과 같은 육체에 집착을 가지고 괴로움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육체가 진흙탕처럼 더럽더라도 마음이 '법'을 깨닫고 그 법에 따라 생활한다면, 저 연꽃처럼 아름답게, 대자연 속에 조화되어 신의 마음과 일치되는 것이다."
이렇게 설법한 것이 법화경의 근본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자로 철학화된 법화경을 가지고 2,500년 전의 인도의 중생에게 설법했댔자 이해되었을까. 아마도 이해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가 앞서고 학문화된 오늘날의 경은 생활 속에서 살리기가 어렵다.
도대체 대승이니 소승이니 원시불교니 하는 자체가 이상하다.
'법'이란 신의 마음이며 신리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또한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대자연의 법칙 이것이야말로 불변의 법이다. 대자연은 동시에 대신전이고 신의 신체이다.
'무엇인가에 의지한다, 그 대상을 구한다'하는 것은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일면이다. 인간이 물질로밖에 보이지 않고 우주 전체를 꿰뚫고 있는 영원의 생명, 영혼의 유구성을 잊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대지는 신의 신전이고 내 마음도 신불이 묵는 대신전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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