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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1장 몸과 마음의 분리현상-신앙에의 길

by Yuneelif 2023. 1. 29.

소년의 신앙

이 무렵부터 부모님의 신앙에 영향을 받아 나 자신도 '또 한 사람의 나를 찾아 혼자서 신앙심을 품게 되었다. 마을 근처에 있는 백산신사라는 조그마한 신사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저녁 두 차례씩 참배하였다. 신사를 청소하고 명상과 기도를 거듭했다.

열 살부터 열세 살까지 삼 년 동안 계속했다. 사쿠고원 지대의 엄동 설한에도 꺾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불을 향한 신앙심에 어린 소년의 영혼은 불탔다.

어느 날 나는 어머님과 함께 나리다산에 참배하러 갔었다. 그 때 검은 옷을 입고 만두 모양의 삿갓을 깊게 눌러 쓴 낯선 스님 한 분을 만났다. 그 스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병 걱정은 하지 말아라. 멀지않아 낫는다. 너의 눈은 이중동자다. 열심히 공부하면 반드시 영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머님과 나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멍청하게 들을 뿐이었다.

그 스님의 예언대로 내 병은 거의 반년만에 나았으며 그 후로는 '또 한 사람의 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후 지난 번 나리다산에서 만났던 그 스님과 흡사한 복장을 한 스님이 놀고 있는 내 곁에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얘야, 언제나 혼자서 신사 참배를 잘 하고 있더구나."

산사에서는 아무도 나를 본 사람이 없었는데 이 스님은 어째서 나의 일을 잘 알고 있을까 신기하였다.

"오늘 밤은 이 냇가에서 잘테니 저녁 때까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 주마."

그리고 과자를 주는 것이었다. 냇가의 잡초에 빨간 잠자리가 앉아 있다. 벼가 익어가는 논에 괴인 물이 물고에서 소기를 내면서 흘러 내린다. 그 물소리는 내 마음의 소리와 같았다. 그 친절한 스님 옆에 앉으니 스님은 나의 장래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마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다'라는 어려운 말씀도 해 주셨다. 그 말씀을 나는 어젯일처럼 기억할 수 있다. 어느 때는 우리 집으로 그 스님이 찾아와서 내가 잘 크고 있는가 물어 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집에는 이상하게도 그런 스님이 자주 찾아와서는 나에게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르쳐주고 가는 것이었다.

이럴 때에도 나의 마음 속에는 '또 한 사람의 나'에 대한 의문이 심각하게 새겨져 나는 신불의 실체에 대한 사색을 거듭 하고 있었다. 공부는 별로 취미가 없었고 신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금방 생기가 돌고 신명나게 끼어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과 들을 쏘다녔다.

6학년 1학기 때 '노력이 천재를 이긴다', '하면 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슨 일이든지 안 되는 것은 사람들이 하지 않음이니라'라고 칠판에 써 놓고 노력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신 다나카 담임 선생님의 교훈도 내 인생에 큰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군인 지망의 수험 공부를 강의록으로 익혀 목표하는 학교에 입학하였다. 집단 생활의 첫걸음이었다. 이 생활을 하면서 나는 사상에 바탕을 둔 교육으로서는 신리의 판단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상은 자기 자신의 의식을 놓치고 인간이 작성한 역사의 정부까지를 통채로 외우게 한다. 이래서는 마음의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 나는 이 때에도 계속 '또 한 사람의 나'를 추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인 학교는 육체와 의지의 단련이 주체이고 화학·물리·지질학 등의 기초적인 학문이 교육의 전부였으며 이 때 나는 극미의 세계에 대한 의문과 극대의 우주와의 관계 등을 사색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격렬해졌으며 그 허무감을 나는 친구의 죽음에 의해서 뼈아프게 느꼈다. 순정의 젊은이들이 명령 하나에 죽음의 공포를 간직한 채 사라져 갔다. 왜 전쟁을 하는 것일까.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새로운 무기로써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

나의 인생에 대한 의문은 더욱 확대되어 그 해결의 실마리를 풀 길이 없었다.

이윽고 종전. 나는 몇 번인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제대하여 부모님 앞으로 돌아왔다.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 바라보는 고향의 산천은 나에게 위안을 주었으며,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군대 생활과는 전혀 딴 세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고향의 풍경에 취해 있을 수 만은 없었다. 나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두 달 후에 상경했다.

형님 집에 신세를 지면서 물리·화학의 공부에 열중함으로써 나의 전후의 즐거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극미의 세계와 극대의 세계가 서로 어떠한 관련이 있으며, 우리들 인생과의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방향으로 나의 사고는 비약해 갔다. 또 한편으로는 생활 수단을 위해서 전기공학을 배웠다.

차츰 극미의 세계 집단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깨달았으며, 물질계의 짜임의 개략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나'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육체의 세포와 여러 기관의 구조를 공부하지 않으면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식량난이 심한 때라 감자 장사를 하면서 내 공부는 계속되었다. 학우인 사토군이 라디오 조립의 일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주문도 많았고 수리 등의 일로써 경제적으로는 어렵지 않은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학력·성적 등에는 구애받지 않고 오직 수수께끼의 해명을 위해서 '또 한 사람의 나'를 찾고 있었다. 

경제 기반을 튼튼하게 해서 마음껏 연구에 몰두해 보리라는 생각에서 나는 조그마한 공장을 차려 경제력을 키워 나갔다.

 

영감의 나타남

물질에는 에너지가 동거하고 있다. 에너지와 질량의 존재를 알았다. 육체와 의식의 관계처럼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부터 나의 나의 영감은 강해져서 제삼자에 대한 예언은 백발백중이었다. '나에게는 왜 이와 같은 영감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의문은 의문을 더해 갔다.

1950년경의 나는 전개와 자석에 의한 상호감응과 자기유도작용이 어째서 일어나는가, 트랜스의 1차측과 2차측의 관계 등의 전기적 변화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었다. 전기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저 수학적으로 푸는 것만으로는 '왜'라는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법칙에 따라 각 회로의 전기적 현상의 결과는 알 수 있어도 법칙은 전기 그 자체의 근본을 해명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문은 상승해 갔다. 나는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는 일도 없이 계속 생명 현상의 탐구에 몰두했다. 종래의 종교 관계에 의존하거나 그러한 서적을 읽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백지의 상태에서 자연 과학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연구를 거듭했다.

이 무렵부터 친한 친구로부터 장래 문제 등을 상담 받으면 한 장의 백지 위에 그에 대한 해답이 똑똑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 자신은 이러한 현상에 더욱더 큰 의문이 쌓여 가기만 했다.

나의 인생은 어릴 때 나의 장래를 예언한 그 스님의 말씀대로 진행되어 갔다.

사업 관계의 일이며 추궁을 거듭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의 나'에 대한 문제는 그저 막연한 생활 가운데에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실천으로 일관하는 생활 활동 이외에는 해결될 길이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신문이나 텔레비젼 등에서 여러가지 신비스러운 현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불가사의한 일이라고만 생각할 뿐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해답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의 영적 현상이나 예언에 대해서도 '왜'라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종교적 환경에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그 신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까. 나는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 나는 다른 종교에의 편력도 하고 있었다. 자주 놀러간 미다의 스님과 종교적인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전생윤회 등이 책에 씌어 있지만 그것은 인간 번뇌를 없애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대답이었다. 

"인간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라는 말도 기억에 남아 있다.

또한 호슈의 관폐중사의 신관은

"일본은 신국이며 야오요로즈의 신들이 수호하고 있다. 석가도 예수도 모세도 일본국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고문헌에 남아 있다."

라고 아주 사실인 것처럼 늘어놓는 것이었다.

미다의 스님은 단골 신도만을 상대하는 종교 사업가이며 독경해 주는 것이 장사이고 스님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적 현상이 일어날 리가 있나. 현대 과학의 시대에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은 없어."

하고 자기야말로 과학적인 문화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이 불교의 근본 정신을 알고 있었을까. 물론 나의 연구 문제에 대해서도 

"현대 사회에 통하지 않는 꿈 이야기이다."

하고 일소에 부치던 일을 나는 기억한다.

호슈의 신관도 일본만이 신국이며 일본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지배하는 듯이 착각을 하고 있었으며 나의 의문에 대해서도

"당신의 뇌세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신관의 가정을 살펴보면 평화롭지 못했고 부부는 별거하였으며 복잡다난하기가 도저히 신을 모시는 사람의 생활 태도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신을 모시는 사람이 어째서 가정의 조화 하나 이루지 못하는가 나는 의심스러웠다.

신은 전지 전능하며 자비와 사랑의 당체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신관은 국수주의자로서 일본 이외에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을 믿을 수 없다. 자기 보존의 본능과 사상에 발목 잡혀 있는 신관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어느 해 4월에 난생 처음으로 종교 단체 방문차 나스로 갔다. 친구의 안내를 받아서였다. 봄이라고는 하나 나스고지의 아침은 추웠다. 나무의 어린 잎들은 이슬을 머금고 싱그러웠다. 이따금씩 뻐꾸기가 울었다. 나는 친구와 한적한 산길을 걸어 산중턱에 있는 교단 본부의 붉은 문을 통과했다. 나의 얼굴을 간지르는 여린 나뭇잎에도 햇빛은 반짝이고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신의 빛처럼 느꼈다. 마음은 편안해졌다. 본부에 명함을 전달하니 우리는 따뜻한 손님 대접을 받았다. 본당에는 용신이 모셔져 있었으며, 그 날은 마침 축제일이라 마을에서 많은 신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도 실망을 맛보았다.

시주금에 관심이 집중되는 교조의 눈빛과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각 지방의 지부 책임자들이 시주금을 보고하고 있는데 금액의 액수에 따라서 교조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었다.

"시주는 평소의 감사의 표시이다. 그리고 또 이익을 올리기 위해 바치는 것이다. 적은 시주로서는 용신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신심이 부족하다."

교조는 시주가 적은 것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래도 신도들은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꾸중을 듣고 있었다. 자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교조의 옆에 앉아 있기가 민망하였다. 친구가 말했다.

"이 살아 있는 신은 언제나 보시 때문에 흥분한다는 거야."

청정한 바깥 풍경과는 달리 교조의 아귀같은 행동에 나는 기가 찼다.

2박 3일동안 친구의 안내를 받은 교단 견학이었다.

이런 것이 과연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아침 여섯 시부터 종교 행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독경 소리도 합창 소리도 북소리도 이상한 괴물에 홀린 비애의 소리로만 들렸다. 본전 안에 있는, 등이 희고 배가 분홍빛인 큰 뱀과 등이 검은 큰 뱀이 나의 영시로 똑똑하게 보였던 것이다. 교조에게 그렇게 말하니

"이 곳의 신이 용신이다."

하고 오히려 뽐내며 설명하는 것이었다.

본전 옆에 있는 사당에는 이나리대신명을 모시고 있었다. 여기에는 흰 여우, 다갈색, 여우, 큰 여우, 새끼 여우들이 영시를 통해 우글거렸다. 이 곳의 신도들은 거의가 다 이러한 동물령에 빙의되어 있었다.

'왜 인간이 동물령을 받드는 것일까'

나는 동물에 에워싸인 신을 자칭하는 자를 믿을 수 없었다. 

동물령이기 때문에 물질 경제에 집착을 가지고 약육 강식하는 처참한 모습을 나는 볼 수가 있었다. 정도를 잃고 헤매는 사람들은 동물과 동류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 판단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신도가 되어 있었다. 아무 것도 신앙하지 않고 있는 나는 이러한 종교를 광신·맹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그저 아연 실색한 따름이었다.

여기에는 창가학회의 젋은 회원들이 섞여서 신도들을 상당히 괴롭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동물령에게 기도드리고 있는 맹신도들 가운데에는 젊은 학회원들과 논쟁을 전개할 만한 능력자는 없었다. 나는 이 교단을 견학하고 신불일체의 신리를 깨달은 것으로 만족하여야만 했다.

이 교단의 신도들로부터는 아편의 공포증 같은 것을 느꼈을 따름이었다.

 

마음 속의 마왕

1953년에 나는 약혼녀에게 48세로 끝날 내 일생의 장래를 예언하였으며, 1955년 3월 사업상에 큰 문제가 일어날 것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기쁨의 절정에 있던 나에게 수표부도의 문제가 일어나 내가 예언한 해에 경제적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와 약혼녀는 곧 구제되었다. 나의 거래처인 모회사의 사장이 도와 주었으며 나는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H은행의 도움으로 경제적 원조 자금이 생겨 다시 사업도 햇빛을 보게 되었다. 실패의 원인은 나의 경영력 미숙에 있었다.

아내는 내가 말하는 신불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30여 년 동안 하루도 신불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줄기차게 '또 한 사람의 나'를 추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맹신이나 광신은 아니었다. 나는 항상 생활 기반을 밑바닥으로 한 신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의 자형은 몸이 약해서 누님은 늘 신불에게 구원을 빌고 있었다. 1953년경 자형은 신장 결핵으로 소화의대에서 대수술을 받고 콩팥 하나를 제거했다. 그리고 인조 방광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누님부부는 창가학회의 일련정종의 가호를 입었다고 생각하여 그 신앙은 차츰 광신적인 것이 되어갔다. 

처음에는 열심히 교리를 공부하고 사념이 없었으므로 올바른 신앙이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의 평안도 찾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불행을 좇게되는 기복 신앙이 차츰 광신화됨에 따라 칼날 같은 아수라의 포교가 시작되었고,ㅡ 그 때문에 나의 형제들은 거의가 신자가 되어 그 쪽 교리를 공부하고 있었다. 다행히 다른 형제들은 광신적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불교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본인들을 위해서도 퍽 다행한 일이었다.

물론 많은 신도들이 우리집에도 몰려와 재앙을 쫓는 기복행사를 벌였다. 불교철학이라 일컬으며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구사하면서였다. 하지만 나는 제목 투쟁이라든가 만다라라는 대상을 향해서 독경을 올리는 그런 신앙에 대해서 모순을 느끼고 있었다. 불벌이 내린다고 위협 받아온 그들은 늘 공포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인간이란 얼마나 불쌍하고 어리석은 것인가'하고 가슴 아파했다. 아무 신앙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편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데 특정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말이 아니었다.

광신적 전투적인 종교 지도자 가운데에는 나와 지면이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가정을 파괴해 가면서까지 만다라 신앙에 몸을 바치고 있었다. '석가 불교는 더 이상 인간을 구제할 수 없다'라고 그 지도자들은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爾時世尊 從三昧 安詳而起 告舍利弗 이시세존 종삼매 인상이기 고사리불(그 때 세존께서 삼매로부터  편안한 모습으로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길'이라는 경문을 외고 있었다.

세존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일련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샤리푸트라가 등장한단 말인가. 일련이 이 경문에 나오는 세존이라면 적어도 그의 제자인 여섯 스님의 이름이 나올 법도 하다. 틀림없이 세존이란 고타마 싯달다 석가모니불을 가리키며 그의 수제자 샤리푸트라를 상대로 불법의 신리를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일련은 불제자였지 세존이 아니다. 불법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일본에 태어난, 원래는 빛의 천사였다.

지와 의로 배운 것은 불법 정신의 깨달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신리일 수도 없다. 더욱이 제목 투쟁은 불자가 취할 짓이 아니며 자기 종파 보존의 에고이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불성을 망각한 광신도만이 할 짓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신도들이 마음은 아수라계와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은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집단에 의탁한 자기도취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지도자들은 스스로 뿌린 씨앗의 결과를 스스로 거두어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석가의 불법은 그 힘을 상실하였으며 천태의 법화경도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을 구제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 그 경문만을 빌려 쓰고 있다. 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철학화된 불법에서는 자신을 알기가 몹시 어렵다. 지장보살은 강제적인 제령으로 불법을 설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투쟁과 파괴의 상념 행위는 보살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현상이 일어나다

1968년 2월 5일, 심야 오전 1시의 일이었다. 나는 촛불을 켜고 마음을 조화시켜 하루의 반성과 감사의 일념으로 선정에 들어갔다. 

그런데 2센티미터쯤 되던 촛불의 불꽃이 세 곱 가까이 굵고 높아지더니 금새 22센티미터 정도로 커졌다. 실내 온도는 섭씨 21도, 물론 바람 같은 것이 불 리도 없었다. 혹 물리적인 상승 바람이 불었다 해도 10배 이상으로 불꽃이 변화하는 일은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촛불을 바라보았다. 불꽃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졌고 다시 네 갈래로 갈라지더니 차츰 연꽃 모양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15분 후 불꽃은 연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이 날 밤 참선 정진에 동참했던 가족과 종업원들도 그저 어안이 벙벙해서 그 모양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윽고 내 앞에 참선 정진에 동참했던 가족과 종업원들도 그저 어안이 벙벙해서 그 모양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윽고 내 앞에 육체적 조상이라고 자칭하는 14대 전의 조상이 나타났다.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었다. 내가 태어난 시쿠 지방은 전국 시대 가이의 다케다 씨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 때의 나의 육체 조상이다.

그 조상은 나에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천석평의 숲 속에서 전사했던 당시의 장소까지 일러주는 것이었다. 묘를 파 보면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는 것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의 조상 다케노죠 한구로 도모유키이다. 그 묘 안에는 나와 아들의 목이 묻혀 있다. 아마 갑옷과 칼이 아주 녹슬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육체 조상으로서 당신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기쁘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공손하게 그 말을 경청하였다.

그 후 내가 이 이야기를 사쿠 지방 사람들에게 말하니 역시 목이 두 개, 녹슨 쇠붙이가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조상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육체적 자손을 사쿠 지방에 둔 것도 언젠가 이런 사실을 알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부터 육체적 조상의 문제에 대한 나의 연구도 구체적인 실마리가 풀려 나갔다. 그 조상은 옛날 가미쿠라 시대의 미나모도 요리도모와 기소요시나가의 관계며 요시쯔네와의 전쟁 이야기 등을 상세하게 들려 주었다.

이러한 사건에 의해서 육체 조상은 이 지구상에 적응한 육체로서 신불이 보존한 것이며 '영혼이 타고 부리는 배'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빛을 넣고 마음을 조화시켜주니 차례차례로 영적 현상이 일어났다.

 

빛에 대해서

빛이란 마음이 조화됨에 따라 몸에서 방사되는 후광을 말한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심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불상이나 예수상에서 방사되고 있는 그 후광을 말한다.

이 빛은 그 사람의 마음의 조화도에 따라 단계가 있다. 신리를 깨닫고 올바른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져 그 육체는 황금빛으로 싸인다. 마음에 평안이 없고, 늘 남을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며 불평하고 화내는 사람의 육체는 어두운 빛으로 싸인다.

보라빛의 아로는 황금빛 다음으로 조화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 복숭아빛의 아로, 회색의 아로, 백색의 아로 등 마음의 조화도에 따라 후광의 빛깔에도 단계가 있다. 

빛은 입자가 되어 인간의 육체 속에 들어간다. 빙의한 부조화의 악령 등은 황금색 빛에 의해서 물러간다. 빛을 넣는 사람의 상념이 조화되어 있을수록 상대방을 보다 강력한 빛 속에 싸이게 할 수 있다. 이미 마음의 조화를 이룬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빛을 넣으면 수호령, 지도령이 그 사람을 지배하여 과거세의 말을 할 수 있게 한다.

심령 현상의 연구가인 지하라씨는 영매나 무당 집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뛰어난 영적 현상이 나의 빛에 의해서 실현된 사실에 크게 놀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적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올바른 마음가짐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