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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명상록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켜라

by Yuneelif 2018.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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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켜라



메디젠(medi****)채팅

2018.11.08. 14:50 조회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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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무드라는 무(無)에 의지한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켜라.


이것이 틸로빠와 탄트라의 방편이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노력하면 에고가 강화된다. 노력하는 순간 ‘나’가 들어온다. 사랑은 노력이 아니다.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대가 노력한다면, 거기에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라. 사랑 안으로 들어가라. 사랑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라. 노력하지 말라.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전체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력하지 말라. 다만 그것과 함께 흘러가라.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켜라.


이것이 탄트라의 길이다. 이것이 탄트라의 근본이다. 요가는 노력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요가는 에고를 지향하다가 마지막에 에고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탄트라는 처음부터 무아(無我)를 지향한다. 요가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제 에고를 버려라.”하고 말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처음부터......


요가가 끝나는 곳에서 탄트라가 시작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요가의 최정상이 탄트라의 출발점이다. 탄트라는 그대를 궁극적인 목적지로 데려간다. 요가는 탄트라를 위해 그대를 준비시킬 수 있다. 그것이 전부다. 궁극적인 것은 노력이 없을 때 온다.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울 때 궁극의 문이 열린다.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키라는 틸로빠의 말은 무슨 뜻인가? 그대 자신과 싸우지 말라. 유연하게 대처하라. 그대 주변에 인격과 도덕이라는 틀을 만들지 말라. 그대 자신을 너무 계율에 얽어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계율은 속박이 된다. 그대 자신을 감옥에 가두지 말라. 유동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라. 상황과 더불어 움직여라. 현재 직면한 상황에 대응하라. 인격이라는 갑옷을 입고 움직이지 말라. 고정된 태도를 갖지 말라. 얼음처럼 굳어지지 말라. 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여라. 항상 유연하게 흘러가라. 자연이 어디로 인도하건 그대로 따라가라. 저항하지 말라. 그대 자신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말라.


사회는 그대에게 무엇인가 강요한다. 사회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라. 이런 저런 사람이 되어라.”하고 말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사회와 문화, 문명을 완전히 초월한다. 지나치게 문명화되면 자연적인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탄트라는 말한다. 이때 그대는 기계가 될 것이다. 강처럼 흐르지 못한다. 자신의 주변에 어떤 틀도 세우지 말라. 순간 순간을 살아라.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라. 이것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틀을 만드는 것일까? 그렇게 특정한 틀 속에 갇혀 있으면 자각이 필요 없다. 그러나 아무 인격도 갖고 있지 않으면 매 순간 주의 깊게 깨어 있어야 한다. 매 순간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미리 짜여진 결론에 매달리지 말라. 고정된 태도를 갖지 말라. 순간마다 상황에 감응해야 한다. 무엇인가 여기에 있는데, 그대는 그것에 대해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이때 그대는 주의 깊게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자각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속임수를 만들었다. 이 속임수가 인격이다. 자신을 특정한 계율 속으로 밀어 넣으면 그대가 깨어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계율이 그대를 돌보아 준다.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습관을 들이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떤 질문을 해도 그대는 습관적으로 진실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습관에서 나온 진실은 죽은 것이다. 아무 생명력도 없다.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삶은 아주 복잡한 현상이다. 때로는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으며, 진실이 위험한 경우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가령, 거짓말을 함으로써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대의 거짓말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의 생명을 구한다면, 이때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고정된 태도를 고수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때 그대는 한 생명을 죽이고 말 것이다.


삶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때로는 그대의 진실이 누군가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 단지 그대의 고정된 행동 패턴과 습관을 지키기 위해, “나는 진실한 사람이다.”라는 에고를 지키기 위해 한 생명을 희생시키겠는가? 이것은 지나친 일이다. 이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다. 거짓말을 함으로써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그대를 거짓말쟁이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이런 거짓말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왜 사람들의 평판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가?


고정된 패턴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순간마다 새로운 상황이 닥치고, 그대는 이 상황에 응답해야 한다. 현재 직면한 상황에 철저하게 깨어 있는 의식으로 감응하라. 그리고 상황 자체로부터 어떤 결정이 나오게 하라. 이미 정해진 결정을 강요하지 말라. 이것이 전부다. 마음속에 고정 관념을 담아 두지 말라. 항상 유동적이고 깨어 있어라. 자연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어라.


이런 사람이 진실로 종교적인 사람이다. 소위 종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죽어 있다. 그들은 습관을 통해 행동한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세뇌 작용에 불과하다. 의식은 자유를 필요로 한다.

유동적인 상태를 유지하라.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라. 이 말이 그대의 내면으로 깊이 뚫고 들어가게 하라. 유동적인 자세를 가져라.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다. 잔에 물을 따르면 물은 잔의 형태를 취한다. 물은 저항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 모습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전자에 담긴 물은 주전자의 형상을 취한다. 물은 저항하지 않는다. 물은 항상 유동적이다. 물처럼 유동적인 상태를 유지하라.

그대는 때로는 남쪽으로 가야하고, 때로는 북쪽으로 가야 한다. 상황에 맞춰 방향을 바꾸고 그 쪽으로 흘러가야 한다. 흘러가는 법을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흘러가는 법을 알면 머지않아 바다에 도달할 것이다. 


특정한 패턴을 만들지 마라. 그런데 사회 전체가 일정한 틀을 만들려고 한다. 모든 종교가 특정한 패턴을 창조하려고 한다. 오직 극소수의 깨달은 사람들만이 진리를 말할 용기를 갖고 있다. 그들이 말한 진리는 “항상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키라.”는 것이다. 유동적인 사람은 당연히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틸로빠는 도덕적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라고 말한다. 도덕주의자가 되는 것과 자연스러워지는 것은 완전히 정반대의 차원이다. 도덕주의자는 자연스럽지 않다. 그럴 수가 없다. 그는 화가 날 때에도 화를 내지 못한다. 도덕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을 느낄 때에도 사랑하지 못한다. 도덕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도덕률에 따라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


나는 분명하게 말한다. 자신의 본성이 아니라 도덕적인 패턴에 따라 움직이면 그대는 절대로 마하무드라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하무드라는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마하무드라는 자연스러운 상태의 최고 절정이다. 화가 날 때에는 화를 내라. 그러나 완벽하게 깨어 있어라. 분노가 그대의 의식을 제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전부다.


분노가 거기에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라. 분노가 일어나도록 놔두어라. 다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철저하게 자각하라.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깨어 있어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시하라. 그러면 서서히 많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 쪽에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것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 감정들을 죽이려고 애쓰지 않았음에도 간단하게 사라진다.


깨어 있어라. 그러면 서서히 분노가 사라진다. 분노가 어리석게 보인다. 분노는 나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명심하라. ‘나쁘다’는 것은 인공적으로 부과한 가치 판단이다. 깨어 있는 눈으로 보면 분노가 어리석어진다. 분노가 나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아니다. 분노는 죄가 아니라 단순히 어리석음일 뿐이다. 탐욕이 사라진다. 그것은 어리석음이다. 질투가 사라진다. 질투 또한 어리석음이다.


이 기준을 명심하라. 도덕에는 선과 악이 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상태에는 지혜로운 것과 어리석은 것이 있다. 자연적인 사람은 선한 것이 아니라 지혜롭다. 자연적이지 못한 사람은 악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다. 자연에는 선과 악이 없다. 다만 지혜로운 것과 어리석은 것이 있을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미친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다.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 죄도 없고 덕도 없다. 지혜와 무지가 있을 뿐이다. 이 지혜를 덕으로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라. 이 무지를 죄로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라. 무지가 유일한 죄다.

어떻게 하면 이 무지를 지혜로 변형시킬 수 있을까? 이것이 유일한 변형이다. 이 변형은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유동적이고 자연적일 때 저절로 변형이 일어난다.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켜라.

그러면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으리라.


완벽한 자유가 가능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다. 낡은 습관이 계속해서 그대를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화를 내고 싶은데, 습관이 그대의 얼굴 위에 미소를 만들어 낸다. 화가 날 때마다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있다. 이 미소는 그들이 화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무엇인가 숨기면서 얼굴에 거짓된 미소를 흘린다. 이것은 위선이다.


위선적인 사람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마음속에 분노가 들끓고 있는데 그는 미소 짓는다. 미움이 솟아오를 때 그는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자비로운 체 한다. 위선자는 완벽한 도덕주의자다. 그는 인공적인 플라스틱 꽃이다. 진짜 꽃이 아니다. 그는 추한 모조품이다. 


탄트라는 자연스러운 길이다.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워라.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다. 먼저 낡은 습관이 깨져야 한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대는 위선적인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방에서 위선과 마찰을 빚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험난한 길이다. 이 사회는 거짓과 위선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대는 완전히 혼자가 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곧 다른 사람들도 그대의 진실성을 인정하기 시작할 것이다.

거짓된 미소보다는 진실한 분노가 낫다. 분노는 최소한 진실하다. 진실하게 화를 낼 수 없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도 진실할 수가 없다. 진실하게 화를 내는 사람은 최소한 진실하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충실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진실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나의 관찰에 의하면, 진실한 분노는 아름답지만 거짓된 미소는 추하다. 진실한 사랑에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듯이, 진실한 증오에도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움은 진실과 관련된 현상이다. 아름다움은 미움이나 사랑과 관계없다. 아름다움은 진실의 속성이다. 진실은 어떤 형태를 취하건 아름답다. 진짜로 죽은 사람은 거짓되게 살아 있는 사람보다 아름답다. 최소한 진실이라는 기본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라 나스루딘의 부인이 죽었다. 이웃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나스루딘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서 있었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피 울던 이웃 사람들이 나스루딘에게 말했다.

“나스루딘, 거기에 서서 무엇을 하고 있나? 자네 부인이 죽었단 말일세.”

나스루딘이 말했다.

“기다려 보게. 그녀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여자였어. 그녀가 진짜로 죽었는지 알아보려면 최소한 삼 일은 기다려야 하네.”


진리의 아름다움, 진실성의 아름다움을 잊지 말라. 더 진실해져라 그러면 그대는 꽃이 되어 활짝 피어날 것이다. 더 진실해지면 많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일단 이 기술을 터득하면 그대는 더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된다. 더 진실해진다. 

틸로빠는 말한다.


그러면 속박의 사슬을 끊고

해탈을 얻으리라.


해탈은 멀리 있지 않다. 해탈은 바로 그대 뒤에 숨어 있다. 진실해지면 즉각 해탈의 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대는 거짓말쟁이이며 위선자다. 그대는 거짓에 깊이 물들어 있다. 해탈이 아주 멀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해탈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진실한 사람에게 해탈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자연적인 것이다.

강이 바다를 향해 흐르고 수증기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태양이 뜨겁고 달이 차가운 것처럼, 진실한 존재에게는 해탈 또한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해탈은 자랑할 것이 못된다. 사람들에게 “나는 이것을 얻었다!”고 말할 것이 없다.


누군가 임제 선사(臨濟 禪師)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사람들은 당신이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임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변함없이 우물에 가서 물을 긷고, 산에 가서 땔감을 장만한다.”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주 의미심장한 몸짓이다. 임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것이냐? 우물에서 물을 긷고 산에서 나무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 삶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해탈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해탈은 자랑할 것이 못된다. 해탈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특별한 것이 못된다. 해탈은 그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위선과 허위를 버려라. 그대의 주변에 인위적으로 조성해 놓은 모든 것을 버려라. 자연적이 되어라. 처음에는 아주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만 그렇다. 일단 익숙해지면 다른 사람들 또한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진실한 존재는 자력 같은 힘을 갖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제 이 사람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 오직 인위적인 것만 떨어져 나간다.


인위적인 것들이 떨어져 나가면, 허위와 가면을 버림으로써 텅 빈 공간이 창조되면 자연적인 존재가 저절로 흐르기 시작한다. 필요한 것은 공간이다. 

내면을 텅 비워라.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워라. 이것을 그대 삶에서 제일가는 원칙으로 삼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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