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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

브힘라오 암베드카르 Bhimrao Ramji Ambedkar

by Yuneelif 2017. 8. 21.

브힘라오 암베드카르

[Bhimrao Ramji Ambedkar ]

요약 인도의 사회개혁운동가이자 정치가. 불가촉천민의 기본권보장과 힌두사원 출입금지 철폐운동 등을 전개하여 투쟁하였고 독립노동당을 결성하였다. 인도 독립 후 헌법기초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공화국 헌법제정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하였고, 힌두교를 버리고 자유와 평등을 설법하는 불교에 귀의하였다.
Bhimrao Ramji Ambedkar

Bhimrao Ramji Ambedkar

출생-사망1891.4.14 ~ 1956.12.6
국적인도(India)
활동분야정치, 행정, 사회운동
출생지인도 마하라시트라 주() 암바바데라
주요저서《붓다와 불법》(1956)
주요업적카스트제도 철폐, 인도헌법제정

1891년 인도 마하라시트라 주() 암바바데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했다. 인도 힌두교의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의 사성보다 아래인 최하 계급, 즉 불가촉천민()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군인이었으며 아버지 람지 사크팔도 육군에 입대하였다. 아버지는 학구열이 매우 높았던 사람이었는데 군부대에서 영어를 익혔고 독학으로 공부하여 군대에서 교사자격을 취득하였다. 또한 교장을 역임하며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도 육군 장교였으며 어머니 비마 바이는 자상했으며 그에게 '브힘라오(Bhimrao)'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896년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마하라시트라 주 콘칸 군 다폴리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해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국립고등학교를 다녔으나 신분의 차이로 인해 멸시와 인격적인 수모를 겪었다. 그는 수업시간에 책상과 의자가 주어지지 않아 거적을 깔고 바닥에 앉아 수업을 들었고 교사들은 부정을 탄다고 그에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산스크리트어 수업은 아예 수강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1904년 아버지의 임기가 끝나자 가족들은 인도 뭄바이(Mumbai)로 이주하였고 엘핀스톤 고등학교를 다녔다. 뭄바이로 이주하였지만 그의 신분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여전했으며 인격적인 모독과 고통은 극심했다. 암베드카르는 신분의 차별을 극복하고자 더욱 학업에 매진하였으며 대학시험에 합격하였다. 

1912년 뭄바이이대학교 엘핀스톤칼리지를 졸업하고 1913년 2월 육군 소위로 입대하였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회사업가였으며 그를 후원하였던 켈루스카의 도움으로 바로다 주지사 장학금을 받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에 입학하게 된다. 1915년 경제학 석사, 1917년 6월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영국 변호사 협회에도 가입하였다. 그가 받았던 장학금이 종료되자 장학금 혜택에 따른 조건대로 인도로 귀국하여 10년간 봉직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불가촉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모멸적인 냉대와 모욕을 참아야 했다. 그는 사직하고 뭄바이로 돌아가 자신의 논문을 출판하였고 뭄바이 시드넘 대학교수로 취업했다. 하지만 대학에서도 신분차별은 여전했으며 모욕감은 더해갔다. 마침내 교수직을 버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1922년 10월 영국 그레이법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인도 화폐 루피의 문제점》이라는 논문으로 영국의 런던정경대학교(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의 논문인 《영국령 인도에서 지방 재정의 발전과정》이 책을 출판되었다. 1923년 1월 독일 본대학교(University of Bonn)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연구 후, 그해 4월 인도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관리가 되었으나 신분이 높은 자들의 천대를 받고 사직, 변호사와 하층민들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27년 마하라시트라 주 콜라바 군 마하드에서 불가촉천민들에게도 공공 식수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주민들이 반대하여 식수를 마실 수 없게되자 암베드카르는 약 1만명의 불가촉천민을 이끌고 시위 행진을 하였고 신분차별을 정당화한 힌두교법전을 태워 구덩이에 묻는 의식을 거행했다. 당시 인도에서는 최하층 신분의 사람들이 최초로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1930~1932년 영국 ·인도원탁회의에 피압박계급의 대표로 참석하는 등 불가촉민의 힌두사원 입역()금지 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불가촉민의 분리선거구와 의회 대표자 파견을 주장하면서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파의 민족운동을 비판, 대립하다가 결국은 양보하였다. 하지만 불가촉천민의 신분 해방을 반대하던 간디를 설득하여 반 불가촉 대회에 동참하게 하였으며 결국은 간디가 암베드가르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936년 뭄바이에서 독립노동당을 결성하였고 의회정치가로 활약하였으며 특히 노동문제 담당관으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다.

1947년 인도 독립 후에는 헌법기초위원장 ·법무장관을 역임하여 공화국 헌법제정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인도의 사회적 불평등과 악법을 담은 힌두교 마누법전을 폐기하고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실현한 힌두법전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반대파에 의해 법안이 좌절되자 법무장관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석가()가 설법한 자비와 평등정신이 인도의 사회를 구제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하였다. 1950년 델리에서 대규모 법회를 열었으며 인도에서 수천년동안 사라졌던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6년 10월 14일 나그푸르에서 수십만의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브힘라오 암베드카르 [Bhimrao Ramji Ambedkar]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