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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브람만에 대한 설명

by Yuneelif 2018. 4. 26.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그대의 영적인 일깨움을 위하여 나는 이 모든 것을 되풀이해서 말합니다. 왜냐하면 참나의 깨달음은 영적인 수행의 반복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비디야 혹은 아냐나(ajnana)라고 알려진 이 무지는 사람이 수천 번의 몸을 바꾸는 가운데 이 몸의 내부와 외부를 통하여 감각들에 의해 표현되고 체험되었기 때문에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참나 지식은 감각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참나 지식은 여섯 번째 의식인 감각과 마음이 멈출 때 일어납니다.

오, 라마여! 마치 자나까 왕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다 알고 난 뒤에도 살아간 것처럼, 참나 지식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는 활동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깨어 있든지 간에 늘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비슈누 신이 몸을 받아 이 세상에 인간으로 화신할 때도 그는 참나 지식 안에 완전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와 꼭 같이 쉬바 신도 참나 지식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브람마 신도 참나 지식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오, 라마여! 그대도 그들처럼 참나 지식에 확고히 잡으십시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이 모든 위대한 이들이 자리 잡고 있는 참나 지식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햇다.

라마여! 그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선명히 하기 위하여 그대는 또다시 그것을 묻고 있습니다.

무엇이 존재하든, 그리고 무엇이 요술 같은 세상으로 보이든지 간에, 그것은 다름 아닌 순수한 부람만이나 절대 의식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의식은 브람만이고, 세상은 브람만이고, 모든 원소도 브람만입니다. 나는 브람만이고, 나의 원수도 브람만이며, 나의 친구와 친척도 브람만입니다. 브람만은 셋의 주기에 걸쳐 있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브람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다가 파도들 때문에 팽창되는 것처럼 보이듯이, 브람만도 무한한 다양한 종류의 물질 때문에 팽창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브람만은 브람만을 이해합니다. 브람만은 브람만 자신의 힘에 의해 브람만 안에서 나타납니다. 브람만은 브람만인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나의 원수의 형상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한단 말입니까?

애착과 반감, 좋아함과 싫어함과 같은 마음의 형태는 상상력에서 불러낸 것들입니다. 이들은 생각이 없으면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확대될 수 있습니까? 오로지 브람만만이 브람만인 모든 것 안에서 움직이고, 브람만만이 모든 것 안에서 브람만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인데,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슬픔이겠습니까? 브람만으로 만족하고 있고, 브람만은 브람만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도 없고, 또한 다른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은 브람만입니다. '나'는 브람만입니다. 그런 까닭에 열정과 냉정, 갈망과 혐오는 모두 개념들에 불과합니다. 몸은 브람만입니다. 죽음은 브람만입니다. 따라서 진짜 밧줄과 상상의 뱀이 함께 합쳐지듯이 그들이 함께 합쳐지면, 슬퍼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몸은 브람만입니다. 쾌락도 브람만입니다. 그렇다면 몸이 쾌락을 체험할 때 기뻐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잔잔한 바다 표면 위에서 파도들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 파도들은 역시 바닷물이 아니겠습니까! 브람만이 세상의 나타남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때도 그 본질은 변화가 없으며, '나'라는 것도 없고, '너'라는 것도 없습니다. 소용돌이가 없어지면서 물이 될 때도,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죽음의 브람만이 몸의 브람만을 따라잡아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물은 잔잔해질 수도 있고, 출렁일 수도 있습니다. 그와 꼭 같이 브람만도 가만히 정지할 수도 있고, 가만히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브람만의 본성입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어 '이것은 지각력이 있는 지바이다.'와 '이것은 지각력이 없는 물질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나 망상 때문입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그런 잘못된 생각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으며,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세상이 희열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장님에게는 이 세상이 어둡고, 시력이 좋은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브람만만이 모든 것에 충만해 있을 때, 죽음도 없고, 살아 있는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잔물결들이 바다의 표면 위에서 일어나지만, 그것들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원소들도 꼭 그와 같습니다. '이것은 존재한다.'와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기만적인 개념들은 참나 안에서 일어납니다. 마치 수정이 어떤 동기도 없이 여러 색깔의 대상들을 반사하듯이, 이들 개념들도 실제로는 원인도 없고 동기도 없습니다.

참나는 이 세상의 에너지가 의식이라는 바다의 수면 위에 무한한 다양성을 토해 낼 때도 항상 그 자체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몸'과 같은 것으로 알려진 독립된 실체들은 전혀 없습니다. 몸으로서 보이는 것과 생각으로서 보이는 것들, 지각의 대상들, 소멸할 수 있는 것과 소멸할 수 없는 것들, 생각과 감정과 그것들의 의미, 이 모든 것은 무한한 의식인 브람만 속의 브람만인 것입니다. 현혹된 사람들과 무지한 사람들의 눈에서만 이원성이 존재합니다. 마음과 지성, 자아감, 우주적 근본 원소들, 감각들과 이러한 모든 다양한 현상들은 오로지 브람만입니다. 그래서 쾌락과 고통은 환영입니다. 그것들은 실체가 없는 말에 불과합니다. 마치 산중에서 외친 단 한마디의 고함 소리가 메아리치고 다시 메아리쳐 여러 소리로 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우주 의식은 '이것은 나다.', '이것은 마음이다.' 등과 같은 생각과 함께 그 자체 내부에서 다양성을 경험합니다. 하나의 우주 의식은 마치 꿈꾸는 사람이 자신의 내부에서 다양한 대상들을 꿈꾸는 것처럼 다양성을 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금이 금으로서 식별되지 못할 때, 그 금은 흙과 함께 섞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브람만이 브람만으로 지각되지 못할 때, 무지라는 불순물이 생겨납니다. 브람만을 알고 있는 이는 그렇게 위대한 자가 바로 신이며 브람만이라고 선언합니다. 무지한 자의 경우, 이 진리를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무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혹은 꼭 같은 바로 그 신이나 궁극의 존재가 무지한 사람에게 무지로서 간주되는 것은 브람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인 것입니다. 금이 금으로서 식별이 될 때, 그 금은 즉시 금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브람만이 브람만으로서 인정될 때, 브람만은 즉시 브람만이 됩니다.

브람만은 전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는 어떤 동기도 없이 그것이 생각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되어 버립니다. 브람만을 아는 사람들은 브람만이 신이며 위대한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활동과 행위자와 수단이 없고, 원인이 되는 동기가 없으며, 변형이나 변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자가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 그에게는 무지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게 되면 무지는 사라집니다. 친척을 친척으로 알아보지 못하면, 그는 낯선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친척을 알아보면, 낯선 사람이라는 생각은 즉시 사라집니다.

이원성이 가공의 현상임을 알면, 절대자 브람만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아감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진정한 초연이 일어납니다. '나는 진실로 브람만이다.'라는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진리에 대한 자각이 그 사람 안에 일어나며, 그러면 모든 것은 그 자각 안으로 통합됩니다. '나'와 '너' 같은 생각들이 사라질 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나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정말로 브람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나는 슬픔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활동이나 망상이나 욕망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는 슬픔이 없는 평화에 있다. 나는 브람만이다.' 이러한 것이 진리입니다. '나는 모든 결함들로부터 자유롭다. 나는 모든 것이다. 나는 어떤 것을 구하지도 않고, 어떤 것을 버리지도 않는다. 나는 브람만이다.' 이러한 것이 진리입니다. '나는 피고, 살이며, 뼈다. 나는 몸이다. 나는 의식이다. 나는 또한 마음이다. 나는 브람만이다.'이러한 것이 진리입니다. '나는 창공이고, 공간이며, 탱야이고, 전 우주이다. 나는 여기의 모든 사물이다. 나는 브람만이다.' 이러한 것이 진리입니다. '나는 풀잎이다. 나는 지구다. 나는 나무 둥치다. 나는 숲이고, 산이며, 바다이다. 나는 비이원의 브람만이다.' 이러한 것이 진리입니다. '나는 의식이며, 이 의식 속에 모든 것이 엮여 있으며, 이 의식의 힘을 통해 모든 존재가 그들의 모든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의 본질이다.' 이러한 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즉, 모든 것은 브람만 안에 존재합니다. 모든 것은 브람만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모든 것은 브람만입니다. 그리고 브람만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참나이고, 진리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모든 곳에 있으며 객관성이 없는 순수 의식인 진리를 가리켜 의식이나 참나, 브람만, 존재, 진리, 질서 도는 순수 지식 같은 다양한 이름들로 부릅니다. 그것은 순수하며, 그 빛 안에서 모든 존재는 그들 자신의 참나를 압니다. 나는 마음과 지성과 감각 같은 순수 의식의 외양과 기타 그러한 모든 개념이 부정된 뒤에도 남아 있는, 순수 의식인 브람만입니다. 나는 그 빛을 통해서만 모든 원소와 우주 전체가 빛을 내는 불멸의 의식 즉 브람만입니다. 나는 의식 즉 브람만이며 불곷입니다. 이 불곷으로부터 이 우주 전체의 구석구석까지 끊임없이 빛나는 반사된 의식이 일어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볼 때도, 그것은 침묵 안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수한 존재들의 자아감의 끊임없는 경험들과 접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브람만인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들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또한 그들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진실로 모든 행복과 기쁨의 궁극적인 근원이지만, 그것은 다양성이 없는 깊은 잠의 속성을 띠고, 평온하며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와 그 결과로 오는 쾌락의 경험 속에서는 브람만의 희열이 극미하게 경험됩니다.

나는 쾌락과 고통을 벗어나 있는 영원한 브람만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합니다. 나는 참되고 순수한 경험을 한느 의식입니다. 나는 순수한 지성이 생각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작용하는 그런 순수한 의식입니다. 나는 흙, 물, 불 등과 같은 모든 원소들에 작용하는 지성적 에너지인 그런 브람만입니다. 나는 종류가 다른 과실에서 보이는 특색 있는 맛 등으로 나타나는 순수 의식입니다.

나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었다고 우쭐하거나 그것을 얻지 못했을 때 우울해 하는 것 모두를 초월할 때 깨달아지는, 변화 없는 브람만입니다. 태양이 빛나고, 이 세상의 대상들이 그 빛으로 볼 수 있을 때, 나는 이들 둘 사이에 있는 순수한 의식이고, 그 순수 의식은 바로 그 빛과 그 빛으로 빛나는 대상의 참나입니다. 나는 깨어 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그리고 깊은 수면 상태에서도 끊어짐이 없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제4의 즉 초월적 진리인, 그런 순수 의식 즉 브람만입니다.

백 개의 각기 다른 농장에서 재배된 사탕수수의 주스 맛이 균일하고 꼭 같은 것처럼, 모든 존재물 안에 내재하는 의식도 꼭 같습니다. 나는 그런 의식입니다. 나는 우주보다도 더 큰, 그러면서도 가장 미세한 원자의 입자보다 더 섬세하여, 볼 수도 없는 그런 의식 에너지(찌뜨 샥띠)입니다. 나는 우유 속의 버터처럼 어디에서든지 존재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본성은 경험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금으로 만들어진 장식물이 오로지 금인 것과 꼭 같이, 나는 몸 안에 있는 순수 의식입니다. 나는 안과 바깥의 만물에 충만해 있는 참나입니다. 나는 그 스스로 어떤 변화도 받지 않고 모든 경험을 비추어 주며, 또한 불순물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그런 순수 의식입니다.

나는 모든 생각이라는 과실을 주는 자이며, 모든 발광체에서 빛을 내는 빛이며, 지고의 이득인 그 의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 의식은 항상 깨어 있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상태로 모든 수족에 충만해 있으며, 모든 물질 속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으며, 늘 동질의 상태로 있으며, 그리고 비록 완전히 깨어 있기는 하지만 마치 깊은 수면 상태에 있는 것처럼 어떤 방해도 받지 않습니다. 그 의식은 우주 안의 모든 개개의 물질에 개별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실재이고, 또한 비록 모든 것 내부에 있고 모든 것에 가장 가까이 있지만, 그것은 마음과 감각들이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 의식은 깨어 있을 때나 꿈꾸고 있을 때, 깊은 수면에 있을 때, 그리고 제4의 (초월적) 의식의 상태에 있을 때도 계속 동질의 상태로 있기 때문에, 모든 생각이 멈추었을 때나 모든 흥분이 멈추었을 대나 모든 증오가 멈추었을 때도 계속 빛을 발합니다. 나는 욕망과 자아감이 없으며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그 의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만물의 내재자인 그 의식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식은 비록 모든 곳에 있지만 다양성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것은 무수한 존재들이 새처럼 걸려드는 우주적인 그물입니다. 그 안에서 사실은 아무것도 일어난 것이 없지만, 이 모든 세상이 나타납니다. 그 의식은 존재와 비존재의 본성이고, 선하고 신성한 모든 것의 휴식처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역할을 수행하며, 비록 영원히 통일되고 해방된 것이지만, 그것은 모든 애정과 평화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생명이고, 어떤 누구도 훔칠 수 없는 창조되지 않은 감로수이며, 늘 존재하는 실재입니다. 감각 경험들 속에 반영된 그 의식은 아직 감각 경험들이 전혀 없으며, 감각 경험들에 의하여 경험될 수도 없스빈다. 비록 그것 자체가 모든 기쁨을 초월한 순수한 희열이지만, 모든 존재들은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것은 공간과 같지만 공간을 초월해 있으며, 영광스럽지만 모든 팽창과 영광이 전혀 없습니다. 표면상 그것은 모든 것을 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이고,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존재하지 않고, 또한 나는 '나 이외의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나는 이미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이 환영인지 아니면 실재인지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고통의 열병을 받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러한 진리의 깨달음 속에 자리를 잡고서, 위대한 현자들은 마음의 평화와 평온 속에서 영원히 살았습니다. 그들은 심리적인 경향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삶이나 죽음 그 어느 것도 구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 하나의 메루 산처럼 직접적인 경험 안에서 흔들리지 않은 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숲과 섬과 도시를 떠돌아다녔고, 마치 그들이 천사나 신들인 양 천국으로 여행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적을 정복했고, 황제로서 군림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경전의 지시에 따라 다양한 활동에 종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것이 적절한 활동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의 쾌락도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쾌락의 정원을 방문했고, 천상의 선녀들로부터 환대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가정생활의 의무를 충부히 이행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큰 전쟁에도 개입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마음의 평화와 군형의 상태를 잃어버렸을 그런 참화와 상황 속에서조차 마음의 평온을 유지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사뜨바 즉 신성의 상태에 완전히 들어섰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망상이 전혀 없었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인 '내가 이것을 한다.'도 전혀 없었으며, 비록 그들이 성취나 그들의 활동에 대한 보답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성취의 욕망도 전혀 없엇습니다. 그들이 적을 쳐부수었을 때도 그들은 우쭐해 하는 허영심에 탐닉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이 패했을 때도 절망이나 비탄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활동이 그들로부터 의지 없이 나오게 하면서 자연스러운 활동에 종사했습니다.

오, 라마여! 그들의 본을 따르십시오. 그대의 성격(자아감)에 자아가 없도록 하고, 적절한 행위들이 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나눌 수 없는 무한한 의식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눌 수 없는 무한한 의식이 다양성이라는 이러한 현상을 가장했습니다. 그것은 또 실재하지도 않고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어떤 것에도 전혀 집착하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그대는 왜 마치 무지한 사람인 것처럼 슬퍼합니까?

라마는 말했다.

신이시여! 당신의 은총으로 저는 실재에 완전히 깨어 있습니다. 저의 망상은 사라졌습니다. 저는 당신이 저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대로 할 것입니다. 확실히, 저는 살아 있으면서도 해방된 사람의 상태에서 평화롭게 쉬고 있습니다. 부디, 신이시여! 생명력(쁘라나)을 억제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자기 제한이나 심리적 조건화를 소멸시킴으로써 어떻게 이러한 해방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말했다.

사람들은 탄생과 죽음의 이러한 주기를 멈추게 하는 방법을 요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마음의 완전한 초월이며, 거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참나 지식이 그 하나의 형태이고, 생명력의 억제가 또 하나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요가는 후자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이 다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탐구를 통한 참나 지식이 어렵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요가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는 탐구의 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쉽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나 지식은 늘 나타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요가의 방법을 설명해 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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