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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제6부 해방에 관하여

by Yuneelif 2018. 4. 26.

바가반 라마나 마하리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찌다바사는 마음의 빛으로 나타나는 참나의 느낌이다. 하나는 셋이 되고, 셋은 다섯이 되며, 다섯은 다수가 된다. 다시 말해, 순수한 참나(하나로 나타나는 사뜨바)는 접촉을 통해 셋(사뜨바, 라자스, 따마스)이 되며, 그 셋과 더불어 다섯 원소가 생겨나고, 그 다섯과 더불어 온 우주가 생겨난다. 몸이 참나라는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늘(아까샤)로 설명을 하자면, 그것은 영혼에 비친 세 가지 범주 즉 순수 의식의 무한한 세상, 정신적 의식의 무한한 세상, 그리고 물질의 무한한 세상(찌다까샤, 찌따까샤, 부따까샤)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마음(찌따)이 세 양상, 다시 말해, 마음(마나스), 직관(붓디) 그리고 '나'의 창조자(아함까라)로 구분될 때, 그것을 내적 도구 즉 안따까라나라고 한다. 까라남은 우빠까라남을 의미한다. 신체의 다리, 손 그리고 기타 몸의 기관들은 바햐즈까라나 즉 외적 도구들이라고 한다. 반면에, 신체 내부에서 작용하는 감각 기관을 안따까라나 즉 내적 도구들이라 한다. 이들 내적 도구들과 함께 작용하는 자기의 느낌이나 빛나는 마음을 개인의 영혼 혹은 지바라 한다. 그러나 이 순수한 의식의 만질 수 있는 측면의 반사물인 정신적 의식이 물질의 세상을 볼 때, 그것을 마음의 세상(마노 아까샤)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순수 의식의 만질 수 있는 측면을 볼 때, 그것은 총체적 의식(찐마야)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마음은 인간에게 속박과 해방의 원인이다."라고 말한다. 그 마음이 많은 환영을 만들어 낸다.

이에서 언급한 비밀의 진리가 참나 탐구를 통해 확인되면, 다수는 다섯으로, 다섯은 셋으로, 셋은 하나로 귀착된다. 당신이 약을 복용함으로써 당신의 두통을 없앤다면, 그때 당신은 원래의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두통은 몸이 자기라는 환영과 같다. 그래서 참나 탐구라는 약을 처방할 때, 그 두통은 사라진다.

그것은 미숙한 사람들이 아닌 성숙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미숙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호흡과 더불어 만뜨라를 반복하거나(자파), 신상들을 숭배하거나, 호흡을 조절하거나, 빛의 기둥을 마음에 떠올리거나, 아니면 이와 유사한 요가 수행이나 영적, 종교적 수행 등을 하라는 처방이 권장되어 왔다. 그러한 수행을 통하여 사람들은 성숙해지고, 그 다음 참나 탐구의 길을 통해 참나를 깨달을 것이다.



발미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자 바시슈타는 우빠사마 쁘라까라남의 가르침을 종결지으면서, "오, 라마여! 그대는 지금까지 우빠사마 쁘라까라남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해방을 다루는 부분을 들어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궁전에 앉아 있던 모든 왕과 현자들은 위대한 바시슈타의 강연에 흠뻑 빠져 있었다. 바시슈타의 말과 몸짓에 주의력을 완전히 쏟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흡사 그림 속의 사람 같이 보였다. 사실 태양이나, 공기, 새, 짐승들을 포함한 전 자연계마저 인간의 가장 내면에 있는 참나의 본성에 대한 탁월한 설명에 넋을 잃고 현자의 강연을 열심히 경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궁정은 갑자기 북과 나팔 소리로 가득 찼다. 잠시 동안 이 소리 때문에 현자 바시슈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북과 나팔 소리가 잠잠해지자, 현자는 라마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바시슈타는 말했다.

나는 이와 같이 최고의 진리를 보여 주는 이야기들로 짠 그물 하나를 그대에게 주었습니다. 그대 마음의 새를 이 그물로 붙들어 매어, 그 마음을 그대의 가슴속에 조용히 머물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대는 참나 지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 라마여! 그대는 마치 속담 속의 백조가 함께 섞여 있는 우유와 물을 따로 불리시켜 우유만을 마실 수 있듯이, 내가 얼려 준 이 진리도 비록 다양한 표현이나 실례가 함께 섞여 있다 할지라도 진리만을 흡수하였겠지요?

오, 고귀한 분이시여! 이제 그대는 거듭 반복해서 이 진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깊이 생각하고 숙고하며, 이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그대가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더라도, 그대의 지성이 이 진리로 흠뻑 젖어 있다면, 그대는 속박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코끼리가 절벽에서 떨어지듯이 그대도 추락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가 이 가르침을 지적인 오락으로 개념화하기만 하고 실생활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눈먼 장님처럼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입니다.

내가 가르친 완벽한 해방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그대는 그대에게 일어나는 매 상황에서 적절한 것을 행하면서 무집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경전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니 안심하십시오.

자리에서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그 집회에 모였던 모든 왕과 현자들은 그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들은 바시슈타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며 그들끼리 토론을 벌이다가,, 불과 두세 시간밖에 안 되는 달콤하고도 깊은 잠을 즐겼다.

발미끼는 계속 말했다.

이윽고 밤의 어둠은, 마치 내면의 지성이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조건화가 물러나듯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동쪽의 지평선에서부터 쏟아지는 햇살이 동쪽과 서쪽의 산봉우리를 밝게 비추었다.

라마와 락슈마나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도 그 상서러운 시각에 깨어나서 아침 예배를 올렸다. 그 다음 그들은 재빨리 현자 바시슈타가 머물고 있는 은둔처로 갔다. 그들은 그의 발치에 엎드려 그에게 적절한 예를 올리고, 그를 따라 왕궁으로 갔다. 청중이 궁정을 꽉 메웠다. 그러나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궁정의 공간은 이미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천인들과 현자들로 다시 가득 채워졌다. 그들 모두는 전날처럼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라마는 경건하게 현자 바시슈타의 얼굴을 응시했다.

바시슈타는 말했다.

라마여! 그대는 내가 지금까지 그대에게 들려 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참나의 지식을 일깨울 수 있는 말들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나는 그대에게 다시 한 번 완벽의 경지가 어떻게 영원히 확립될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평정심(조건화가 없는 마음)과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의지함으로써 이 삼사라(삶과 죽음에 대한 속박)의 바다를 건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노력에 온 힘을 기울이십시오. 진리가 명확히 지각되고 진리에 대한 오해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잠재해 있던 모든 경향성과 마음의 조건화가 소멸될 때 그대는 슬픔이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하나의 무한한 절대적 존재 즉 우주적 의식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또한 양극성이나 구분에도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무한만이 존재하지만, 어떻게 해서인지 무한이 이원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무한이 이렇게 양분될 수 없는데도, 어떻게 그러한 이원성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알고, 자아감에서 벗어나 참나를 향유하십시오.

마음도, 무지도, 개인의 영혼도 없습니다. 이들 모두는 창조주 브람마 안에서 일어난 개념들입니다. 어떤 대상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과 그것의 욕망이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정말로 하나의 우주적 의식입니다. 그 하나만이 하계와 지상 그리고 천국 안에서 의식으로서 빛납니다.

무지에서 태어난 개념들이 지속되는 한, 무한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자각이 있는 한, 그리고 세상이라고 알려진 함정 안에 희망이 있는 한,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 등과 같은 개념을 지니게 됩니다. 사람이 몸을 '나'로서 간주하고, 자기를 보이는 것과 관련시키는 한, 그리고 '이것이 내 것이다.'라는 느낌과 함께 대상들을 향한 희망이 있는 한, 마음 등에 관한 망상은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완전한 무집착의 경지에 도달한 현자들과 어울려 진리에 대한 숭고한 깨달음을 경험하지 않는 한, 그리고 사악함이 약화되지 않는 한, 마음 등이 있다는 잘못된 개념은 지속됩니다. 이 세상을 하나의 실재로서 보는 경험이 진리에 대한 명확한 지각에서 나온 에너지에 의해 흔들려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 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상적 경험에 대한 갈망 때문에 맹목적인 의존이 있습니다. 그 결과로 사악함과 망상이 존재하는 한, 그러한 개념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쾌락에 이끌리지 않고 가슴이 순수하여 마음이 평온한 사람, 그리고 욕망, 갈망 및 희망의 우리를 부수어 버린 사람에게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개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 마저 실체가 없는 기만적인 경험이라고 보고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 무한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가슴속에 현상계가 녹아든 그런 사람은 지바 등과 같은 잘못된 개념을 품지 않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지각이 사라지고 참나 지식의 태양이 가슴속에 떠오를 때 마음은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것은 마치 마른 낙엽을 태워 버린 것처럼 두 번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아직 살아 있으면서 지고의 진리와 상대적 현상 모두를 볼 수 있는 해방된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사뜨바라고 합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사뜨바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없으며, 완벽한 균형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유희를 하듯 여기에서 그들의 삶을 삽니다. 비록 그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언제나 내면의 빛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원성이나 일원성 혹은 기타 개념들이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슴속에는 아무런 경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씨앗 자체가 사뜨바의 상태에서 다 타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자시는 망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그대는 그 사뜨바의 상태에 도달했으며, 그대의 마음은 지혜의 불길 속에서 타 버렸습니다. 그 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무한한 브람만이 정말로 무한한 브람만이며, 현상계는 그 실재가 브람만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현상(예컨대 '라마'로서 그대의 몸)은 지각력이 없고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실재란 의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슬퍼합니까? 그러나 만약 이 모든 것이 의식이라고 그대가 느낀다면, 그대에게 다양성의 개념들이 일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무한한 의식이라는 그대의 본질적인 본성을 기억하십시오. 다양성의 개념들을 버리십시오.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입니다. 아니, 그대는 하나의 관념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관념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스스로 빝나는 존재입니다. 오, 무한한 의식인 우주적 존재여! 그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대는 우주라고 알려진 무수한 파도들과 물결들이 일어나는 그 의식의 바다입니다. 그대는 그저 마음의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 존재와 비존재의 상태들 너머에 있습니다. 그러한 조건화와 모든 이원성을 초월하십시오. 어떻게 그대 안에 경향성들과 한계들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모든 개념('이것은 잔재된 경향성이거나 한계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바나 살아 있는 영혼이다.')은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그것들이 의식과 다릅니까? 그리고 만약 그것들이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이 의식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라마라고 알려진 그 존재는 사실은 구많은 우주가 물결들과 파도들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웅장하고 무한한 의식의 바다입니다. 완전한 평온의 상태에 머물러 계십시오. 그대는 무한한 공간과 같습니다. 불은열과 분리될 수 없고, 향기는 연꽃과, 검정색은 점안수와, 흰식은 흰눈과, 당분은 사탕수수와, 그리고 빛은 발광체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험은 의식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파도들이 바다와 분리될 수 없듯이, 우주도 의식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경험은 의식과 다르지 않으며, 자아감은 경험과 다르지 않으며, 지바는 자아감과 다르지 않으며, 마음은 지바와 다르지 않습니다. 감각들은 마음과 다르지 않고, 몸은 감각들과 다르지 않으며, 세상은 몸과 다르지 않으며, 또 이 세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의존적인 범주의 목록들은 매우 오랫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누군가가 움직인 것도 아니고, 또한 그것이 매우 오랫동안 혹은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존재해 왔는지의 여부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 라마여! 사실, 이 모든 것은 존재해 왔는지의 여부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 라마여! 사실, 이 모든 것은 무한을 스스로 경험한 것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비어 있는 것 안에 텅 빔이 있고, 브람만은 브람만에 가득 차 있으며, 진리는 진리 속에 빛나며, 충만은 충만을 채우고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 라마여! 공간처럼 가슴에 순수하게 머물러 계십시오. 그러나 외적으로는 적절한 활동을 하십시오. 그대를 기뻐하게 하거나 우울하게 할 수 있는 상황들에서도 그것들의 영향을 받지 말고 통나무처럼 그냥 계십시오. 자신을 살해하려 하는 자에게조차 우호적인 사람이 진리를 보고 있는 자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초월하지 못한 사람을 숭배하는 것은 헛된 노력입니다. 자기중심적이거나 의지에서 나온 활동을 전혀 하지 않으며, 여기의 어떤 집착을 전혀 하지 않는 그런 사람만이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비록 그가 이 세상을 파괴시켜야 할지라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개념과 습관적인 경향성들이 그친 사람은 모든 정신적 조건화와 속박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는 연료 없이 타는 등불과 같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오, 라마여! 감각은 물론, 마음과 지성과 자아감은 모두 독자적인 지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바와 그 나머지 모두는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달은 하나이지만, 시력의 결함이나 반사체의 동요 때문에 두 개나 그 이상으로 보이는 것과 꼭 같이, 참나(내면의 지성 혹은 의식)도 하나이지만, 생각으로 인한 동요 때문에 여럿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둠이 물러가면 밤이 끝나는 것처럼, 쾌락을 갈망하는 독약이 사라지면 무지도 없어집니다. 쾌락을 갈망하는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경전의 말씀이라는 신비로운 공식으로 즉시 치료됩니다. 사악함이나 어리석음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마치 진주를 꿴 실이 끊어지면 진주가 흩어지는 것처럼, 마음도 딸린 그 모든 것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경전을 버린 사람들은 스스로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벌레나 해충처럼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바람이 가라앉으면, 호수의 표면은 다시 한 번 평온해집니다. 무지로 인한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면, 아내와 다른 쾌락의 대상들에 대한 맹목적인 정열로 인한 눈의 동요도 사라집니다. 오, 라마여! 분명히 그대는 그 흔들림이 없는 안정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그대는 내 말을 열심히 경청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대의 마음속에 있던 무지의 장막이 걷혀 버렸습니다. 심지어 보통의 사람들도 그들의 가족을 지도하는 스승의 말씀에 의해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처럼 확장된 통찰을 지닌 사람의 경우에는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라마는 말했다.

신이시여! 당신의 지혜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던 세상이 그것의 실체를 잃었고, 제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지고의 평화에 조용히 머물러 있습니다. 무한한 의식이 제 앞에 무한히 전개되었으므로, 저는 이제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의심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애착과 저항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저는 본성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건강하고(스와스타흐: 저는 참나 안에 쉬고 있습니다), 행복하며, 또 저는 세상이 제 안에 피난처를 찾는 라마입니다. 저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마음의 조건화가 사라졌습니다. 마음도 끝나 버렸습니다. 저는 참나를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서 보고 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제가 품었던 이원성의 어리석은 생각을 보고 웃음이 납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감미로운 영적 충고의 말씀 덕분입니다. 이 세상에 여전히 살고 있으면서, 저는 또한 빛의 세상에 있습니다. 지고의 지혜라는 말씀의 형태로 당신의 빛나는 가슴에서 발산되는 빛 덕분에 저는 지금 여기에서 지고의 희열 안에 잠겨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그대는 나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한 번 그대에게 진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의 깊게 경청하십시오.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렇게 하는 동안에는 다양성의 존재를 가정해야만 합니다. 그대의 의식은 확대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설명할 진리는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마저 슬픔에서 구할 것입니다.

무지하면 그는 몸이 자기라는 잘못된 생각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면 그의 감각은 가장 나쁜 적으로 드러납니다. 반면에 참나 지식을 지니고 있으며 진리를 아는 사람은 즐겁고 만족스러운 자신의 감각의 우정을 즐깁니다. 감각은 그를 파괴시키지 않습니다. 신체와 신체의 기능에 혐오감밖에 가지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그것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며, 그래서 고통을 초래하게 됩니다.

참나는 몸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또한 몸도 어떤 식으로든 참나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들은 빛과 어둠과 같습니다. 모든 변화와 왜곡들을 초월해 있는 참나는 생겨나지 않으며, 또한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둔하고, 무지하며, 지각력이 없고, 유한하고, 소멸될 수 있는, 또 감사할 줄 모르는 이 몸에 일어납니다. 그것이 일어나게 내버려두십시오. 그러나 이 몸이 (감각이나 마음을 통하여) 어떻게 영원한 의식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둘 중 어느 하나가 실재로서 보여질 때, 다른 하나는 존재하기를 그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본성이 완전히 다를 때, 고통과 쾌락에 대한 그들의 경험이 어떻게 꼭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관련을 가질 수 없을 때, 그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하나가 생겨나면, 다른 하나는 사라집니다. 이는 마치 날이 밝아지면 밤의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참나 지식은 결코 참나 무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그림자가 결코 뜨거워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실재인 브람만은 사람이 다양성을 자각하고 있을 때라도 결코 비실재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참나는 편재하지만, 마치 몸도 무한한 의식의 본성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참나는 편재하지만, 마치 연꽃이 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그것도 몸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공간이 그 안의 공기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과 꼭 같이, 이 무한한 참나도 몸과 관련이 있는 노령이나 죽음, 쾌락과 고통, 존재와 비존재 등과 같은 여러 조건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비록 이 모든 몸이 잘못된 이해에 의하여 보여진다 할지라도, 파도들이 바다에서 보이듯이 그 몸들은 모두 오직 무한한 의식 안에 있습니다. 현상계가 다양하고 왜곡되게 나타나는 것은 반사하는 매개체 때문입니다. 진리나 무한한 참나는 이 모든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태양이 여러 개의 거울이나 기타 반사체에서 일어나는 반사물의 다양성과 흔들림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참나에 관한 진리를 이와 같이 알게 되면, 참나 무지의 개념은 즉시 사라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몸과 몸 안에 있는 지성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그는 물질적, 영적 양상들로 있는 온 창조물을, 등불로 사물을 보는 것만큼이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올바른 이해력이 없을 때만, 기만적이고 잘못된 개념들이 자신의 가슴 안에 무성하게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러한 개념들에는 실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참된 지식의 빛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이 잘못된 개념들로 혼란에 빠지면, 사람은 바람에 흩날리는 풀잎처럼 끊임없이 불안하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됩니다.

우주적 지성에 대한 '미각'(직접적인 지식)이 없을 때, 감각은 그들 대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또 그러한 접촉이 의미 있는 경험을 낳으리라고 헛되이 상상합니다. 확실히 무한하고 다함이 없는 지성(의식)이 이 모든 것 안에 내재해 있습니다. 그러나 참나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를 모르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므로 제한적이고 유한한 것처럼 보입니다.

생명력과 그에 수반하고 있는 것들은 어떤 다른 동기도 없이, 단지 생명에 내재하고 있는 운동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하여 여기에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참나 지식이 없을 때, 사람들이 즐기는 모든 대화와 고함 소리는 총 소리와 같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파괴를 향해 나아가며, 유익한 결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이 타는 듯이 뜨거운 바위 위에서 쉬거나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들의 노동의 결과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것은 곧 베어 넘어질 숲 속의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가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은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가 만약 그들에게 무엇을 준다면, 그것은 진흙 속으로 버리는 것과 같고, 또 그들과 대화한다면, 그것은 마치 개가 하늘을 보고 짖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합니다.

참나에 대한 무지는 모든 고통과 불행의 근원입니다. 오, 라마여! 참나의 무지에서 생겨나지 않는 고통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말해 보십시오. 이 온 창조물은 그것을 지탱해 주는 무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굉장한 슬픔을 몇 번이고 겪지만, 기쁨은 좀체 누리지 못합니다. 몸이나 부나 배우자와 같은 슬픔의 근원은 참나를 모르는 자에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참나라고 확고히 믿는 사람의 무지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참나 지식이 어떻게 그에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무지가 지배하는 한, 어리석은 자는 몇 번이고 쓰러질 것입니다. 그의 슬픔은 끝이 없습니다. 시원한 달빛조차도 그에게는 유독한 독기로서 경험됩니다. 활짝 열려 있는 지옥의 문은 그런 어리석은 자를 받아들이려고 안달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어리석은 자의 눈에는 유독한 덩굴식물(여자 혹은 남자)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두 눈과 진주처럼 하얀 치아를 가지고 있는 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악한 자의 가슴속에서만 무수한 새(사악한 경향성)들의 거처를 제공하는, 맹목적인 심취라는 무서운 나무가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악한 가슴이라는 숲 속 안에는 증오의 불길이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질투심으로 넘쳐흐르고, 그 질투심은 다른 사람들을 파괴시키는 험담의 잡초가 자라나게 합니다. 자신의 가슴이 알고 있는 유일한 연꽃은 끊임없는 불안이라는 벌들이 찾고 있는 것인 질투입니다.

죽음은 이러한 사악한 바보들에게만 마련되어 있습니다. 탄생과 유년기는 청년기로 이어지고, 청년기는 노년기로 이어지며, 노년기는 죽음으로 끝납니다. 이 모든 것은 어리석은 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경험됩니다. 무지한 사람은 세상이라는 밧줄에 묶인 두레박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따금 삼사라라는 잘 보이지 않는 우물 속으로 내려졌다가 올려지곤 합니다. 이 현상계라는 바다 자체는 현명한 사람에게는 송아지의 발자국과 같지만, 무지한 자에게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끝없는 슬픔의 바다와 같습니다. 새장에 갇힌 새가 자유를 찾을 수 없는 것과 꼭 같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몰두한 무지한 자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은 분명히 무수한 경향성과 조건화로 혼란에 빠져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라는 순환하는 수레바퀴를 선명히 볼 수 없습니다.

무지한 사람을 속박 안에 사로잡아 두기 위하여, 그 자신의 심취는 가곡적인 관계의 망 전제를 세상 도처에 펼쳐 놓습니다. 한 조각의 작은 살점(두 눈)으로 어리석은 인간은 흙으로 된 작은 입자를 산이나 호수, 숲 또는 도시로 간주합니다. 무지는 가공의 대상이라는 무수한 잎들을 만들어 내는 가지들을 사방으로 펼친 거대한 나무와 같습니다. 그 나무 위에는 수많은 새들이 삽니다. 그 새들은 무지한 자가 경험하는 수많은 쾌락입니다. 탄생은 그 나무의 잎이고, 활동은 그것의 싹이며, 공과는 그것의 열매이고, 부와 행운은 그것의 꽃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지혜의 태양이 졌을 때 떠오르는 달과 같습니다. 반복되는 탄생은 달빛입니다. 그리고 이 무지는 결점과 불완전함의 군주입니다. 경향성들과 습관들은 이 달이 쏟아 붓는 감미로운 빛입니다. 희망과 욕망의 새들은 이 감로를 마십니다. 무지의 어둠 속에 있는 어리석은 자는 이 세상의 대상들 속에서 쾌락이나 행복을 경험합니다.

대상들 속에 들어 있는 외적인 달콤함의 모습은 무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대상들은 처음과 끝을 가지고 있으며,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또 소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대가 여기에서 진주와 기타 보석으로 장식한 찬란하게 빛나는 여자 혹은 남자들로서 간주하는 그들은 그대 자신의 망상이 만들어 낸 창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욕망의 바다에서 이는 잔물결들과 같습니다. 살이나 지방, 피부 등의 변화에 불과한 것에서 매력과 유혹의 특성들을 보고, 그래서 그들을 매력적이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망상입니다. 그들의 가슴은 황금 항아리로, 그들의 입술은 감로의 원천 등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 망상 때문입니다.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망상 때문입니다. 부와 성공이란 처음에는 우둔한 자에게 달콤하지만, 중간에는 행복과 불행, 쾌락과 고통, 성공과 실패 같은 두 개의 대립되는 개념의 원인이 되며, 끝에 가서는 매우 빨리 사라집니다. 번영의 추구로부터 무수한 쾌락의 가지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불행의 가지가 생겨납니다.

이 망상은 시작도 없는 때부터 강물처럼 흐르고, 그것은 쓸모없는 행위들과 그것들의 반응들에 의해 흐려지고 어두워집니다. 그것은 반복되는 탄생을 일으키고,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도록 계산된 활동에 대한 쓰라린 반응들과 결과들 때문에 더욱더 커집니다.

이러한 행위는 신체적, 정신적 질병 및 노령과 다양한 관계들이 입자인 먼지 구름을 일으키는 불길한 바람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죽음 즉 시간의 경과로 나아갑니다. 죽음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게걸스러운 식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들이 익을 때, 그것들을 모두 죄다 먹어 치웁니다.

청년기는 지혜의 달이 빛을 내지 않아서 근심과 걱정이라는 악귀들이 춤추며 자주 출몰하는 시기입니다. 그 청년기는 망상이라는 더 짙은 어둠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의 혀(언어의 능력)는 여기의 평범하고 고양 없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혹사당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약해집니다.

한편 가난은 불행과 고된 노동의 열매를 오게 하는 수천의 가지들을 뻗습니다. 그러나 공허하고 실체가 없으며 그리고 자기 자신의 영적인 발전을 파괴하는 탐욕이 망상의 어둠 속에서 계속 승리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노쇠라는 고양이가 살금살금 다가와 청춘이라는 쥐를 잡아먹습니다.

이 우주는 본질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짜의 실재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다르마(올바른 삶)와 아르타(성공의 추구)의 열매를 재배합니다. 하늘로 둘러싸여 있고 태양과 달의 눈을 갖추고 있는 이 세상은 그것의 실체에 대한 망상 때문에 쓰러지지 않고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계의 호수에는 몸이라고 하는 백합꽃들이 만발해 있고, 생명력이라고 하는 벌들이 그것들에게로 자주 찾아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세상 존재에 대한 퇴폐적인 개념은 참나 제한과 조건화에 의하여, 그리고 욕망이라는 강력한 실에 묶인 채, 감각 속에 갇힌 채 놓여 있습니다. 이 현상계는 쁘라나 즉 생명력의 움직임의 바람 안에서 끊임없이 떨고 있는 그리고 모든 종류의 존재들을 떨어뜨려 그들을 완전한 파멸로 몰아가게 하는 연약한 덩굴식물과 같습니다.

세상 존재라는 이 지옥과 같은 수렁을 벗어나 아무런 의심이 없는 상태에서 잠시 동안 기뻐하는 고귀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푸른 광활한 창공에서 연꽃처럼 살아가는 신성한 존재들도 있습니다.

이 창조 속에서 활동은 활동들의 결과에 대한 헛된 욕망 때문에 오염되고, 심리적 조건화의 그물에 갇혀 있으며, 그리고 활발함이란 향기를 타고난 연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나타남은 이 유한한 공간 안에 들어와 끄르딴따(행위의 끝이나 종결)라고 알려진 완고한 무적의 늙은 독수리에게 곧 삼켜져 버리는 작은 물고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마치 물결들과 파도들이 바다의 수면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다양한 장면들이 나날이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시간이라는 도공은 이 모든 것을 도공의 녹로처럼 계속 순환시키고 있습니다. 창조물이라고 알려진 무수한 숲들이 시간이라는 산불에 의해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창조물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잘못된 개념들에 꽉 묶여 있기에, 이 세상의 덧없음이나 그들이 삶에서 받는 고된 타격도 그들을 깨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심리적 조건화나 자기 제한은 신들의 왕인 인드라의 몸처럼 온 세상의 순환 동안 지속됩니다. 이 모든 와중에서도 우연히 가장 순수한 본성이 드러나는 신성한 현현들도 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피조물들은 말하자면 시간의 신비를 깊이 생각하며 서 있지만, 애착과 반감, 사랑과 증오 같은 두 힘에 따라 흔들리고, 쾌락과 고통이나 노령과 죽음 같은 무서운 질병에 시달리는 움직일 수 있는 피조물들은 노쇠해져 쇠퇴합니다. 움직일 수 있는 피조물 가운데 벌레와 해충들은 과거 그들 자신의 사악한 행위의 결과를 말없이 참을성 있게 견뎌 내면서, 말하자면 언제나 그 결과를 깊이 묵상합니다. 그러나 묵상조차 초월해 있는 감지할 수 없는 시간(혹은 죽음)은 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집어 삼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나무는 추위와 바람과 열을 견디어 내면서도 꼿꼿이 서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불행 그 자체의 모습입니다. 꿀벌과 같은 존재들은 이 세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연꽃에 갇힌 채 언제나 불안스럽게 윙윙거립니다.

이 우주 전체는 말하자면 행위와 움직임의 본성을 가진 여신 깔리(시간과 죽음을 의미하는 깔라의 여성형을 암시)의 탁발 그릇입니다. 이 깔리는 끊임없이 그 그릇에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채워, 그 음식들을 계속해서 그녀의 신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이 우주는 노파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참나 무지의 어둠은 노파의 머리카락입니다. 태양과 달은 그녀의 불안한 두 눈입니다. 그녀의 내부와 외부의 본성 속에는 신들인 브람마와 비슈누와 인드라, 지구와 산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절대자 브람만에 관한 진리는 그녀의 가슴속에 숨겨진 보물 상자입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의식 에너지(즉, 그녀는 의식 에너지로 알려진 어머니이다)입니다. 그녀는 치아들입니다. 새벽과 황혼은 그녀의 입술입니다. 연꽃은 그녀의 손바닥입니다. 하늘은 그녀의 입입니다. 일곱 바다는 그녀의 진주 목걸이입니다. 그녀는 푸른 하늘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극지는 그녀의 배꼽입니다. 숲은 그녀의 몸에 나 있는 털입니다. 이 노파는 계속해서 태어납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계속해서 죽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의식의 빛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 가운데에 눈 깜짝할 사이에 창조자 브람마에 의해서 창조되는 신들도 있고, 브람마가 눈을 감는 바로 그 순간에 파괴되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 지고의 의식 속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천 번에 걸친 시간의 순환 주기를 시작하고 끝내 버리는 루드라 신들도 있습니다. 또한 눈 깜짝할 사이에 루드라와 같은 신들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다른 신들도 있습니다! 확실히 이러한 현현은 무한합니다. 무한한 의식이 무한한 공간 속에서 무엇인들 생기게 할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지의 한 현현인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행운과 모든 불운, 어린 시절, 청년기, 노년기와 죽음, 또한 고통은 물론, 행복과 불행에 휘말려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과 그 나머지 모든 것은 무지의 짙은 암흑이 확대된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나는 이제 무지라고 알려져 있는 이 덩굴식물이 어떻게 사방으로 기어 올라가는지를 그대에게 이야기해 주겠습니다. 이 덩굴식물은 현상계라고 알려져 있는 숲 속에서 무성하게 자라며, 의식이라고 하는 산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삼계가 그것의 몸이며, 우주 전체가 그것의 겁질입니다. 쾌락과 고통, 존재와 비존재, 지혜와 무지는 그것의 뿌리와 열매입니다. 그 무지가 쾌락이라는 생각을 품을 때 쾌락이 체험되고, 그것이 고통이라는 생각을 품을 때는 고통이 체험됩니다. 존재라는 생각이 만연하면 존재가 있고, 비존재라는 생각이 만연하면 비존재가 있습니다. 그 무지의 수단에 의해 확대되고, 더 큰 무지를 낳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혜를 찾을 때, 그것은 지혜를 먹고 결국은 지혜로 성장합니다.

무지라는 이 덩굴식물은 그것이 즐기는 다양한 오락과 심리적 상태들이나 양상들로 나타납니다. 언젠가 어디쯤에 가서 그것은 지혜를 만나 접촉하게 되고 그래서 정화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시 집착에 빠집니다. 그것은 모든 감정과 감각 경험의 원천이 됩니다. 그것의 수액은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입니다. 비차라, 즉 참나의 본성에 대한 탐구는 그것을 갉아먹는 흰개미입니다. 창공에서 빛나는 별과 행성은 이 덩굴식물의 꽃입니다.

이 덩굴식물은 마음에 의해 흔들립니다. 그곳에는 생각이라는 새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감각이라는 치명적인 뱀들이 그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금지된 행위라는 비단뱀이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상의 빛에 의해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들의 살림살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는 또한 다른 것들도 들어 있습니다. 즉, 어리석은 자들을 현혹시키는 그 모든 것, 지혜를 증진시키는 그 모든 것, 무한한 종류의 다양한 살아 있는 존재들이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태어난 사람들, 곧 태어날 사람들, 죽은 사람, 곧 죽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따금씩 부분적으로 절단되기도 합니다. 또 어딘가 다른 곳에서는 전혀 잘리지 않기도 합니다(완전히 미숙한 사람들의 경우).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어 버리는 치명적인 덩굴식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호히 조사할 때 그것은 죽게 됩니다.

이 덩굴식물 자체가 벌레와 해충은 물론이고, 별과 행성, 살아 있는 존재, 식물, 원소, 하늘과 땅, 신들과 같은 이 모든 것들로 나타납니다. 이 우주 안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그것은 이 무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것이 초월될 때 그대는 참나 지식을 얻을 것입니다.

라마가 질문했다.

신이시여! 비슈누와 같은 신들조차도 이 무지 즉 아비디야의 일부분이라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저는 얼덜떨합니다. 제발 그 점을 더 설명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진리, 즉 절대적인 존재-의식-희열은 생각과 이해를 초월해 있으며, 그것은 지고의 평화로서 어디에나 존재하며, 그것은 상상과 묘사를 초월해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개념화의 능력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참나 이해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봅니다. 미묘한 부분, 중간 부분, 거친 부분이 그것입니다. 이들 셋을 포함하고 있는 지성은 그것들을 사뜨바와 라자스와 따마스로 여깁니다. 이 셋이 합쳐져서 쁘라끄르띠 즉 자연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비디야 즉 무지는 쁘라끄르띠 즉 자연이며, 그것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그 너머에는 궁극이 있습니다.

본성의 이 세 가지 특성(사뜨바, 라자스, 따마스)은 다시 각각 세 부분으로 세분됩니다. 즉 이들 각각에 대하여, 미묘한 부분, 중간 부분 그리고 거친 부분입니다. 따라서 모두 아홉 개의 범주가 생기며, 이들 아홉 개의 특성이 우주 전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현자, 금욕주의자, 완벽한 자, 하계의 거주자, 천인(天人) 및 신들과 같은 이들은 무지 중의 사뜨바 부분입니다. 이들 가운데, 천인과 하계의 거주자들이 거친 부분(따마스)을 이루고, 현자들은 중간 부분(라자스)을 이루며, 비슈누와 쉬바 같은 신들은 사뜨바의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뜨바의 범주에 들어오는 이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해방된 자들로 간주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지속되는 한 존재합니다. 현자들과 같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해방된 지반묵따들은 적당한 때에 그들의 몸을 벗고 신들의 거처에 도달하여, 이 세상이 존속되는 동안 거기에서 거주하다가 해방을 얻습니다. 따라서 아비디야 즉 무지의 이러한 부분이 비디야 즉 참나 지식이 된 것입니다! 아비디야는 물결이 바다에서 일어나듯이 비디야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비디야는 물결이 물 속으로 사라지듯이 비디야 속으로 사라집니다.

물결들과 물을 구별하는 것은 비실재적이며, 용어상의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지와 지식의 구별도 비실재적이며, 용어상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지금 여기에는 무지도 없고 지식도 없습니다. 그대가 지식과 무지를 두 개의 다른 실체로 보지 않을 때,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합니다. 비디야의 반사물은 본질적으로 아비디야로 간주됩니다. 이들 두 개념을 버린 뒤에 남아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떤 것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지전능하고, 공간보다 더 비어 있으면서도 의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아리 속의 공간처럼 그것은 파괴될 수 없고 도처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실재입니다. 마치 자석이 바로 그 존재만으로 쇳조각을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그것은 우주를 움직이게 하려는 의도 없이도 우주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해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움직일 수 있거나 움직일 수 없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있는 이 모든 세상의 나타남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체적 혹은 물질적으로 변해 버린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존재와 비존재의 생각들을 일으키는 개념화가 없어지면, 이 모든 지바(개인의 영혼)는 공허한 표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무지 때문에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관계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밧줄을 뱀으로 오인할 때라도, 그 뱀에게 물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지나 망상이라는 것은 참나 지식의 부재입니다. 참나를 알게 되면, 무한한 지성의 피안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그 자체를 객관화시켜, 그것을 관찰의 대상 자체로 여길 때, 아비디야 즉 무지가 싱깁니다. 이러한 주체와 객체의 개념을 초월하면, 실재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베일이 제거됩니다. 개인은 개인화된 마음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멈추면, 개별성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개별성의 개념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지속됩니다. 항아리가 있는 한, 내부로 둘러싸여 있거나 혹은 그 항아리에 한정된 공간의 개념도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항아리가 깨어지면, 이전에 항아리의 공간이라고 상상했던 그곳에도 무한한 공간만이 존재합니다.

라마가 질문했다.

신이시여! 어떻게 이 우주적 지성이 지각력이 없는 바위와 같은 사물이 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바위와 같은 물질에는 의식이 생각하는 능력을 버렸지만 마음이 없는 상태에는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해방의 상태와는 거리가 먼, 깊은 수면의 상태와 샅습니다.

라마가 다시 물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어떤 개념이나 지각의 대상들도 없이 깊은 수면 안에 있는 것처럼 존재한다면, 저는 그것들이 해방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유(목샤)나 해방이나 무한함의 깨달음은 움직일 수 없는 창조물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방을 얻는 것은 참나의 본성에 대한 지적인 탐구를 하고, 이것이 내적인 일깨움을 불러일으킨 뒤, 지고한 평화의 상태에 이를 때입니다. 까이발야 즉 완전한 자유는 모든 마음의 조건화가 의식적으로 초월되고 철저한 탐구를 마친 뒤에 얻어지는 순수한 존재의 성취입니다. 현명한 사람들이 말하길, 사람은 깨달음을 얻은 현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경전에 설명된 대로 진리의 본질을 탐구한 뒤에야 비로소 순수한 존재 즉 브람만에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심리적 조건화가 심지어 미묘한 '씨앗'의 상태로 가슴에 남아 있는 한, 그것은 깊은 수면의 상태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평온의 상태를 체험하고 마음이 참나에 흡수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환생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고, 불행의 근원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위 등과 같은 지각력이 없고 움직일 수 없는 대상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것들은 자기 제한(바사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제한은 마치 꽃이 씨앗(새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우는) 속에 숨어 있고, 항아리가 점토 속에 숨어 있는 것과 꼭 같이, 그들 안에 숨어 있습니다. 바사나(자기 제한이나 조건화나 경향성)의 씨앗이 존재하는 그 상태는 깊은 수면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경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바사나가 파괴되고, 심지어 바사나의 잠재성조차 존재하지 않을 때, 그 상태는 (깨어 있는 상태와 꿈, 그리고 깊은 수면의 상태 너머에 있는) 제4의 초월 상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경지를 가져다 줍니다. 바사나와 불, 채무, 질병, 적, 우정(혹은 아교), 증오, 그리고 독과 같은 이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을 없애고 난 뒤에도 약간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면, 귀찮게 됩니다.

반면에 모든 바사나들을 완전히 없앴다면, 그때 그 사람은 순수한 존재의 상태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살아 있든지 않든지 간에 다시는 슬픔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찌뜨 샥띠(의식 에너지)는 숨어 있는 바사나로서 움직일 수 없는 창조물 안에 있습니다. 각 대상의 본성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이 찌뜨 샥띠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각 대상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 자체의 근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익서을 아뜨마 샥띠(참나나 무한한 의식의 에너지)로서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세상  나타남의 망상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한한 의식인 진리로서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음이 모든 슬픔을 사라지게 합니다. 이 진리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비디야 즉 무지입니다. 이러한 무지가 다른 모든 현상의 근원이 되는 세상 나타남의 원인입니다. 첫 생각이 일어나면서 잠이 방해받고 잠이 끝나는 것과 꼭 같이, 내면의 지성이 조금이라도 일깨워지면 무지는 파괴됩니다. 사람이 손에 등불을 들고 어둠을 보려고 어둠에 다가가면, 어둠은 곧 사라집니다. 탐구의 불을 무지 쪽으로 돌리면, 무지는 사라집니다. 즉, "피와 살과 뼈 등으로 구성된 이 몸 안에 있는 '나'는 무엇인가?"라고 탐구를 시작할 때, 무지는 즉시 존재하기를 그칩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끝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할 때,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란 아비디야 즉 무지의 중단입니다. 그대는 그것을 어떤 것으로 여길 수도 있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도 여길 수 있습니다. 무지가 사라졌을 때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맛보는 달콤함은 다른 사람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비디야의 중단을 설명하는 어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그대의 깨달음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각자가 그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컨대 아비디야는 '브람만이나 우주적 의식이 아닌 어떤 실재가 존재한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브람만이다.'라는 어떤 지식이 있을 때, 아비디야는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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