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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바사와 빌라사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10.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오, 라마여!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한, 누구도 참나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 '나의 것'이란 잘못된 개념들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림 속의 태양이 지지 않는 것처럼 기나긴 슬픔은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같은 진실을 나타내 주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얘기를 그대에게 해 주려 합니다.

삼계를 함쳐 놓은 만큼 높은 거대한 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산꼭대기에는 신들이 살았고, 중간 부분에는 인간이 그리고 밑 부분에는 암흑의 존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산은 사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산의 꼭대기에는 현자 아뜨리의 오두막이 있었고, 그 안에는 브리하스빠띠와 슈끄라라 알려진 현인 두 명이 살았습니다. 각각은 빌라사와 바사라고 알려진 존경할만한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들은 청년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들은 무척이나 가까워 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두 명의 나이 많은 현인들 즉 브라하스빠띠와 슈끄라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슬펐던 두 명의 젊은이들은 적절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그들은 부나 재산 같은 것들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홀로 생활하기 위하여 각각 다른 방향의 숲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다시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빌라사가 그의 친구 바사에게 말하였습니다.

"다시 만나 정말 기쁘네, 내 친구여! 우리가 헤어지고 난 이후로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말해 보게. 너의 금욕이 결실을 맺었는가? 마음속에서 세상에 대한 타오르는 불길을 없애 버렸는가? 참나에 대한 지식을 얻었는가? 말해 보게. 너는 괜찮고 행복한가?"

바사가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너를 다시 보게 된 것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하네.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이자 형제여!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회하고 있는 한, 그리고 가장 고귀한 지혜를 획득하지 않는 한, 심리적 왜곡이 그치지 않는 한, 어떻게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겠는가? 세상이라는 이 바다를 건너기 전까지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욕망들과 희망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참나 지식을 지닐 때까지, 우리는 어린 시절,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그리고 죽음을 거치는, 태어나서 죽는 과정을 반복하는 이곳에 되돌아와서는, 똑같은 의미 없는 행동과 경험들에 관계할 것이네. 열망이라는 것은 지혜를 망가뜨린다네. 감각적인 욕구의 만족에 빠져 있으면 인생은 빠르게 쇠퇴해 버린다네. 마음이란 쉽사리 감각적인 만족에 눈이 멀어 버리지. 참나 지식의 건너편 해안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는 뛰어난 운송 수단인 우리의 몸을 어떻게 그리고 왜 세상의 진흙 속으로 떨어져 버리게 하는지 놀라울 뿐이네!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음이라 알려져 있는 이 작은 물결은 끔찍한 모습을 취하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조금도 참나에 닿지 않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참나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네. 그래서 비참해진다네.

바시슈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처럼 서로 대화를 하고 세상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서, 그들은 곧 지고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나는 그대에게 참나 지식을 아는 것 외에는 굴레를 끊어 버리고 환영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깨달은 사람에게 이 슬픔의 바다는 작은 웅덩이와 같습니다. 구경꾼이 멀리 있는 군중을 바라보듯이 그는 자신의 몸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몸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파도가 바다의 풍만함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몸의 존재는 모든 것에 퍼져 있는 참나의 존재를 없애 버리지 못합니다.

백조, 바위 또는 나무토막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물과 무슨 연관성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지고의 참나는 이 세상의 모습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떨어지는 나무는 물 위에 파도를 일어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몸에 나타나는 기쁨과 슬픔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참나에게 일어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나무가 물에 가까이 갈수록 나무는 물 위에 반사되어 보이듯이, 몸도 참나에 가까이 갈수록 참나 안에 반사됩니다. 바위가 물 속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물 자체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고 또 물에 의해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이 아내, 아이들 또는 물질적 대상들과 같은 다른 물질적 실체들과 접한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에게 해나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는 진짜라고도 진짜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즉, 그것은 말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나에 반사된 육체는 진짜도 아니요, 가짜도 아닙니다. 단지 묘사할 수 없을 뿐입니다. 무지한 자는 자기가 세상에서 보는 것들은 무엇이나 진짜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토막과 물에 비친 나무토막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과 참나는 아무런 실제적인 관련성이 없습니다. 게다가 사실상 그런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 아무런 이원성이 없습니다. 하나의 완전무결한 의식만이 홀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이 존재합니다. 이 점에서 마치 귀신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이가 귀신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습들은 상상된 것이며, 슬픔에 의하여 닿지 않고 있는 그것이 그것 자체를 비참하다고 믿습니다. 생각의 힘 때문에 이 상상적인 관계가 실재의 힘을 얻습니다. 참나는 고통이나 쾌락에 닿지 않고 있습니다. 참나 그 자체가 몸이라고 생각하여, 참나는 몸의 여러 경험들을 겪습니다. 이 무지스러운 믿음을 버리는 것이 자유입니다.

이렇게 하여 잘못된 동일시나 애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들은 즉시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늙음과 죽음 그리고 미혹의 씨앗은 이 조건화입니다. 이 조건화가 사라질 때, 그 사람은 미혹의 바다 너머로 갑니다. 조건화된 마음은 금욕주의자들에게도 굴레를 만듭니다. 반면에 조건화되지 않은 마음은 가정 거주자라도 순수해질 수 있습니다. 이같이 조건화된 마음은 굴레입니다. 그러므로 해방은 조건화인 내적 접촉, 애착 혹은 동일시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내적인 접촉(이는 가상의 구분을 가정한 것이다) 그 자체는 속박과 해방의 원인입니다. 조건화가 없는 사람으로부터 행해진 행위는 행위가 아닙니다. 조건화된 마음은 외견상으로는 행위를 그만두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행위를 하는 것과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몸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잘못된 구분을 전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라마가 물었다.

오, 신이시여! 조건화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그것이 어떻게 속박을 만들어 냅니까? 그리고 해방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얻어집니까?

바시슈타가 계속 말했다.

신체와 참나 간의 차이를 무시해 버린 이들이 신체가 실재라는 확고한 믿음을 지닐 때, 이것이 조건화입니다. 그들은 무한한 참나는 한계가 있다고 여기며 쾌락을 좇습니다. 그래서 묶입니다. 반면에 '이 모든 것은 정말이지 무한한 참나이다. 내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탐구하는 사람은 조건화되지 않은 해방의 상태에 자리를 잡습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이것들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게 하라.'라는 것을 알고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이는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무행위에 중독이 되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행위의 결과에 빠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는 열광에 빠지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행위의 결과를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이 마음에 의해서 포기합니다! 속박이 없어지고 가장 고귀한 선이 얻어지는 것은 조건화의 거부에 의해서입니다. 조건화가 모든 슬픔의 근원입니다.

조건화는 다음과 같은 예들에 의해 얘기될 수 있습니다. 첫째, 당나귀가 주인의 밧줄에 의해 끌려가며 두려워서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 둘째,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더위, 추위, 바람, 비를 참아 내는 것, 셋째, 벌레가 땅의 구멍 속에 살면서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있는 것, 넷째, 배고픈 새가 약탈자를 경계하면서 나뭇가지 위에서 쉬는 것, 다섯 째, 길든 사슴이 평화롭게 목초 위를 거닐다 사냥꾼의 총알의 희생양이 되는 것, 여섯째, 수많은 사람들이 벌레나 곤충으로 반복해서 태어나는 것, 일곱째, 셀 수도 없이 많은 존재들이 바다 표면의 파도들과 같이 태어났다 사라져 가는 것, 여덟째, 움직일 수조차 없는 나약한 인간이 반복해서 죽어 가는 것, 아홉째, 관목과 덩굴식물들이 땅으로부터 영양분을 얻기 위해 땅 위에서 자라나는 것, 열째, 강과도 같은 이 세상의 환영이 셀 수도 없이 많은 슬픔과 고통의 물결을 만들어 내는 것, 이 모든 것이 조건화의 확장된 모습들입니다.

조건화 혹은 내적 연결, 집착 혹은 참나 제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숭배할 만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메마르고 보질 것없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무익한 조건화는 바보들의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숭배할 만한 조건화는 진리를 아는 이들 사이에서 보입니다.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조건화는 자신의 참나에 무지한 이들의 마음속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신체와 같은 것들로부터 일어나며 생사를 반복하게 합니다. 다른 조건화의 형태는 참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존경할 만한 이들로부터 발견됩니다. 이것은 진정한 지혜의 깨달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즉,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과 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숭배할 만한 조건화는 '자연적인' 한계들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눈, 귀 등과 같은 것들은 그들의 지각에 한계가 있다. 무지한 자들의 조건화란 그들 스스로 부과한 조건화이다. 그것들은 무한한 참나를 신체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사용되는 용어, 예를 들어 삼샥띠는 종종 '집착'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집착은 무한한 것에 대한 한계 그리고 무조건적인 것의 조건화인 구분이나 이원성을 의미한다.)

바시슈타가 계속하였다.

소라와 원반 등을 양손에 든 신은 그 '숭배할 만한 조건화' 때문에 삼계를 보호합니다. 태양이 빛나고 창조자의 우주적 몸이 이 거대한 창조를 계속 연출하는 그 조건화와도 같은 유형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 쉬바 역시 이 같은 종류의 조건화 때문에 신성한 존재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유지하고 여러 방법들로 기능하고 있는 신들은 이 숭배할 만한 조건화 즉 참나 제한에 의해 그들의 능력들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조건화의 영향 아래에 있는 마음은 그러한 경험이 기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쾌락의 갈구의 먹이가 되고 있습니다.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기능조차도 이 조건화 때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조건화 때문에 천국의 신들, 지상의 인간들 그리고 지하의 악마들이 바다에 이는 파도와 같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바다에서 거대한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들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이 수없이 많은 존재들은 서로 먹고 먹히면서 그들의 조건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간 안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공간에 있는 별들은 조건화 때문에 그들 자신의 궤도를 순회합니다. 이제 떠오르고, 이제 지고, 그리고 이제 밝아졌다가 이제 어두워지는 달은 끊임없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고, 이 조건화 때문에 이것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이 신비로운 창조가 존재들의 개념들에 반응하여 존재하게 되는 것을 보십시오. 이 우주는 빈 공간 속에서 단순히 마음의 조건화에 의해 나타나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실재가 아닙니다. 이 우주에서, 쾌락을 갈망하는 것은 세상과 신체 등에 집착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생명력을 좀먹는 것입니다. 그들이 해변을 따라 이어져 있는 모래의 수보다도 더 많이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들의 수를 셀 수는 없습니다. 이 우주의 창조자는 이 우주를, 말하자면, 이 셀 수 없이 많은 존재들의 마음의 조건화에 반응하여 존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존재들은 진실로 이곳 지옥의 불타는 불꽃을 위한 탁월한 연료입니다. 어떠한 고통이 이 세상에서 나타나더라도, 이것은 오직 이 존재들을 위한 것임을 아십시오. 강물이 바다로 빠르게 흘러가듯이, 고통이라는 것은 마음으로 조건화된 이들을 향하여 흘러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온 창조물은 무지로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쾌락에 대한 욕망을 잘라 버린다면, 마음의 조건화의 한계는 무너져 거대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마음의 조건화 또는 유한한 것 그리고 썩어 없어지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사지에 타들어 가는 고통입니다. 오, 라마여! 그러나 아 무한한 확장 혹은 무한한 것에 헌신하는 것은 타들어 가는 고통을 위한 놀라운 치료약입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한한 확장의 평화로운 상태에 자리 잡는 마음이 기쁨을 오게 합니다. 참나 지식에 뿌리를 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비록 다시 사용된 단어가 '접촉'이나 '집착'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 삼산감(saṃsaṅgaṃ)이지만, 이 장에서는 '조건화'의 진정한 의미가 부각되어 있다. 진전으로 의미하는 것은 '동일시'나 '조건화'이다.)

바시슈타가 계속 말하였다.

오, 라마여! 항상 적절한 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행위, 생각들이나 대상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위로는 천국에 얽매여서도 안 되며, 아래의 그리고 그 어떤 방향의 것들에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 마음은 외적인 관계들이나 내적 감각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나 생명력 등 그 어떤 것에도 묶여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머리에도, 경구개 안에도, 미간에도, 코끝에도, 입이나 눈 안에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또한 마음은 어두움 안이나 빛 안에도, 또는 가슴의 동굴 안에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깨어 있거나, 꿈을 꾸거나 잠자는 상태들도 마음을 잡아서는 안 되며, 넓고 순수한 공간조차도 마음의 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색의 스펙트럼에, 움직임이나 정적에, 시작이나 중간 및 끝이나 그 어떤 곳에도 집착되지 않아야 하며, 멀거나 가까이, 앞이나, 대상들 안이나 혹은 자기 안에도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감각의 경험들, 미혹된 행복의 상태, 개념들 그리고 지각들은 마음에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대상들이 전적으로 무상하다는 것을 자각하고서, 마음은 생각의 움직임을 조금도 지니지 않은 채 순수 의식으로서 순수 의식 안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집착이 끈어져 버릴 때, 지바는 더 이상 지바가 아닙니다. 행위든 무행위든지 간에 그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지바는 더 이상 지바가 아닙니다. 그 같은 무집착의 상태에서 지바는 행위의 결과들에 묶이지 않습니다. 혹은 대상들에 대한 약간의 이해의 상태조차도 버리고, 지바를 지고의 평화 속에 쉬게 하십시오.

그와 같이 해방된 사람은, 그가 다른 이들과 행위에 있어서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늘 슬픔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다른 이의 눈에는 흥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 자신의 안에서 그는 지혜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의식은 행복이나 불행에 의해 늘 물들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매력에 혼란되지 않습니다. 참나 지식을 얻었으므로 그는, 말하자면, 늘 명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주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상반되는 쌍들 너머로 일어섰으므로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깊은 잠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이 마음의 특징인 생각의 움직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리고 오직 평화의 경험만이 있는 그 상태를 '깨어 있는 깊은 잠'이라 합니다. 이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무의지의 삶을 살며, 모든 종류의 마음의 억압이나 고뇌로부터 자유로우며, 짧거나 긴 삶에 대하여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 같은 '깨어 있는 깊은 잠'의 상태가 성숙할 때, 그것을 뚜리야 또는 제4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 상태에 확고히 자리를 잡은 현자는 이 우주를 마치 우주적인 운동장인 양 여기고, 그 안의 삶을 우주적 춤으로 여깁니다. 슬픔과 두려움으로부터 그리고 세상 모습의 미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뚜리야 안에 자리를 잡은 이는 다시는 오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늘 희열 속에 있습니다. 그는 이 단계를 뛰어넘어 위대하고 표현할 수 없는 지고의 희열의 상태로 나아갑니다. 그것을 뚜리야조차도 뛰어넘는, 이해할 수도 없고 묘사할 수도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바시슈타가 계속 말하였다.

살아 있는 동안에 해방된 사람의 상태를 뚜리야의 상태나 '깨어 있는 깊은 잠'이나 또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라 칭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 이상의 상태 즉 신체 의식을 뛰어넘은 상태는 말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뚜리야 너머의 상태'입니다. 오, 라마여! 그 단계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우선, '깨어 있는 깊은 잠'의 상태에 먼저 자리를 잡으십시오. 신체라는 것은 단지 환영의 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서, 존재 또는 신체의 다른 것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있으십시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 라마여! 그리고 그대는 내적인 일깨움의 상태에 도달해 있습니다. 참나 지식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밑으로 달리지 않습니다. 단지 순수한 의식만이 여기에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개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와 같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나'라는 단어조차도 단지 의사소통을 위해서만 사용하십시오. 진리는 이 모든 묘사들 너머에 있습니다. 이원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체들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간의 관계 또한 성립되지 않습니다. 태양에는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그대에게 외견상으로 이원성을 가정하고 말하고 있지만, 진실로 그 같은 이원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과 어두움 간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신체와 몸으로 있는 존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알려질 때, 잘못된 지각들은 사라집니다. 참나는 순수하고 영원하고 스스로 빛나고 그리고 변화로부터 자유로운 의식입니다. 신체는 순수하지도 영구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들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체는 생명의 힘에 의해서 혹은 다른 원소들에 의해서 생명력을 얻습니다. 이 신체는 참나와 어떠한 관계도 가질 수 없스비다. 이처럼 비록 참나와 신체라는 이 둘이 두 가지의 구분되는 실재라고 여겨지더라도,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이원성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는 그 같은 생각 자체가 불필요해집니다. 이 진리가 그대 안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하십시오. 그러면 어느 누구든 어느 곳에 있든지 어느 때에 있든지 간에 아무런 속박도 해방도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하나의 무한한 참나 혹은 의식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만약 그대가 귀에게 '나는 행복하다 또는 불행하다.' 또는 '나는 무지하다.'와 같은 개념들을 준다면, 그때는 그 같은 개념들이 그대에게 끝없는 슬픔을 안겨 줄 것입니다. 신체는 바람인 생명의 호흡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신체의 말들은 호흡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모든 감각적인 기능들은 그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몸 안에 있는 지성은 나누어질 수 없는 의식입니다. 그 무한한 의식만이 공간 등으로 모든 곳에 퍼져 있습니다. 후자는 의식 안에서 반사되며 그리고 이 반사를 마음이라 합니다. 마음이 자신의 육체적 새장을 포기하고 훨훨 날아갈 때, 마음은 으식인 참나를 경험하게 됩니다. 향기가 있는 곳에는 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있는 곳에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마음만이 이 세상의 모습이 있게 하는 원인입니다. 의식이 궁극적인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 의식은 어디에나 있고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의 모습을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진실로 이 세상 모습을 있게 하는 원인은 실재의 본성을 탐구하지 않음인 무지입니다. 램프가 즉시 어두움을 제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나 지식으 빛은 무지의 어두움을 즉시 없앨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소위 말하는 지바 혹은 마음 혹은 내적인 심리적 요인을 탐구해야만 합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성한 분이시여! 어떻게 이러한 개념들과 범주들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습니까? 제발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은 정말이지 참나입니다. 그러나 파도가 바다에 일듯이, 우주라는 다양성이 마음속에 일어납니다. 여기저기에서 참나가 활동적인 참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는 참나는 정적인 상태로 있습니다. 정적인 참나라는 것은 바위와 같은 활동성이 없는 것을 말하며, 활동적인 상태의 참나라는 것은 인간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전능한 참나는 무지의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무지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무지의 옷을 입은 무한한 것이 지바입니다. 지바는 이 세상의 나타남에서 보면 그물에 걸린 코끼리와 같습니다.

그것이 살아 있기에, 그것을 지바라고 합니다. 그것의 자아 본위적인 개념 때문에, 그것을 자아라고 합니다. 그것의 구분하고 결정하는 특성 때문에, 그것을 붓디(buddhi) 혹은 식별력이라고 합니다. 또 그것의 어떤 개념이나 관념을 형성하는 능력 때문에, 그것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자연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연이라고 합니다.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몸이라 합니다. 그것의 본질이 의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이라 합니다.

오로지 진리인 지고의 참나는 둔한 것과 지성적인 것 바로 한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즉, 그것만이 다양성을 만들며 이 모든 다양한 이름들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범주들은 논쟁을 좋아하여 그리고 무지한 사람들을 혼란시키기 위하여 심술궂은 지적인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이 세상의 나타남을 있게 한 원인은 오직 지바 밖에 없습니다. 즉, 이 귀먹고 말 못하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체라는 것이 사라진다 해도 참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져 버려도 나무는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미혹된 이들만이 이와 반대로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최종적인 해방이 있습니다. '나는 죽어간다, 나는 사라진다.'라고 한탄하는 사람은 잘못된 생각에 어리석게 매달려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느 곳에든 그리고 어느 시간에든 세상의 환영을 계속해서 경험합니다. 마음의 조건화 상태에 있는 지바는 하나의 신체를 버리고 다른 신체를 찾습니다. 이는 마치 원숭이가 숲에서 하나의 나무를 버리고 다른 나무로 뛰어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후에 곧 지바는 그것 역시 버리고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또 다른 어떤 것을 찾습니다. 유모가 아기의 주의를 돌리기 위하여 이곳저곳을 다니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의 조건화는 지바를 돌리기 위하여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닙니다. 이처럼 마음의 조건화에 묶여 있어 지바는 끝없는 고통을 참으며 다양한 종들로 반복해서 타어납니다.

(성자 바시슈타가 이를 말할 때, 도 다른 하루가 저물고, 모였던 무리는 저녁 예배를 위해 돌아갔다.)

바시슈타는 말을 계속하였다.

오, 라마여! 그대는 신체가 태어날 때 같이 태어난 것이 아니며, 신체가 죽는다고 해도 그대는 죽지 않습니다. 항아리 안의 공간이 항아리가 만들어질 대 생겨나서 항아리와 함께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한 어리석음입니다. 게다가 내재하는 의식은 신체와 마음 그리고 감각과 관련한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개념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마치 여행자가 여인숙을 발견하거나 숲의 오두막을 발견하거나 시냇물을 발견하거나 그것을 떠나거나 같은 채로 있는 것처럼, 그 내재하는 의식은 이러한 관계들에서 늘 같은 채로 있습니다. 즉, 만나거나 헤어지는 것이 의식에게 아무런 행복이나 불행의 원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들에 얽매여 크게 기뻐하거나 술퍼합니까?

무지한 참나 제한 때문에 마음이 된 참나가 세상의 사물들에 의해 더럽혀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된 참나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깨우치게 될 때 그것은 무지한 환영을 버리고 참나 지식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때서야 마음은 비로소 굉장한 높이에서 신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신체가 원소들의 총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마음은 신체 의식을 초월하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그와 같은 깨달은 사람은 비록 그가 이 세상에서 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사나 무지에 의해 물들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에 있는 어느 것에 의해 유혹당하지도 거부당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세 개의 시간 속에 있는 '나'라고 알려진 것과 '세상'이라고 알려진 것은 단지 순수한 경험하기와 경험 그 자체의 연결을 확장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압니다. 경험의 대상이 실제이든 실제가 아니든 간에, 그것은 전적으로 경험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슬픔이나 기쁨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거짓은 거짓이며, 진리는 진리입니다. 이 둘의 혼합은 물론 거짓입니다! 미혹되지 마십시오. 거짓된 지각을 버리고 진리를 잡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절대로 다시는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지 순수한 경험하기와 그것의 경험 사이의 관계의 확장입니다. 그 경험은 진실로 참나 희열의 기쁨입니다. 그것은 순수한 경험하기 그 자체입니다. 때문에 그것은 절대자 브람만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이 순수한 경험하기가 경험과의 접촉으로 일어나는 그 기쁨은 최상의 것입니다. 우매한 자에게는 이것이 세속적인 것이겠지만, 현자에게 이것은 해방입니다. 이 순수한 경험하기는 그 자체로 무한한 참나입니다. 그것이 대상들에게로 기울어질 때, 그것은 굴레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로울 때, 그것은 해방입니다. 그러한 경험하기가 이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 내지 접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그때서야 세상의 나타남은 전적으로 그칩니다. 그때서야 뚜리야 의식 또는 '깨어 있는 깊은 잠'의 상태가 일어납니다.

참나라는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기서 경험하기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진리를 아는 이의 무한하고 조건화되지 않은 시각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참나 그리고 무한한 의식입니다. 참나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물체의 본질은 참나 또는 무한한 으식 이외의 것이 아닙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다른 태도가 있는데 이를 통해 그대는 또한 신성한 통찰을 가질 것이며 그리고 참나 지식 안에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공간이다. 나는 태양이다. 나는 위와 아레 같은 방향이다. 나는 신들이다. 나는 악마들이다. 나는 모든 존재들이다. 나는 어두움이다. 나는 지구이며 바다 등이다. 나는 먼지, 바람, 불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이다. 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 이외의 어떠한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 같은 태도를 가짐으로써 그대는 기쁨과 슬픔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두 가지 태도 모두가 해방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는 '나는 지극히 미묘하며 초월적인 참나이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는 모두이고 모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나'에 관련한 또 다른 태도가 있습니다. '나는 이 신체이다.'라는 태도입니다. 이 태도는 끝없는 슬픔의 근원입니다. 오, 라마여! 이 모든 세 관점을 버리고 순수한 의식으로 있으십시오. 왜냐하면 비록 참나가 초월적이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참나만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안에 있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실 거짓입니다.

이 참나 지식은 설명이나 묘사를 통하여 얻어지지 않으며,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해서도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모든 것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알려집니다. 이 세상의 여기에서 알려지거나 경험된느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은 경험하기와 경험이라는 이원성이 없는 의식인 참나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참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그것은 경험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들 안에서, 그것은 지바입니다. 모든 행위들은 태양의 빛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행동들이 그친다고 해서, 태양은 상실이라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나 때문에 몸 등이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몸 등이 없어져도 참나는 상실로 고통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참나는 태어나지 않으며 또한 죽어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참나는 구하지도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참나는 구속되어 있지도 해방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참나는 언제나 모든 것의 참나입니다.

그 참나는 시간 공간 등에 의해서 조건화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속박되겠습니까? 어떠한 속박도 없을 때, 해방이란 무엇입니까? 그러한 것이 참나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참나의 본질에 대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서 울고 통곡을 합니다. 이 두 가지 잘못된 개념 즉 굴레라는 것과 해방이라는 것을 버리고, 여기에서 깨달은 삶을 사십시오. 하늘이나 땅 또는 지옥에는 해방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해방이란 단지 순수한 마음, 정확한 참나 지식, 그리고 정말로 깨달은 상태와 동의어입니다. 모든 욕망이나 희망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가 해방입니다. 이 진정한 내적 개달음 혹은 참나 지식에 이르 때까지, 사람들은 자신이 속박되어 있다고 간주하고 해방을 위하여 노력합니다. 이 같은 잘못된 속박과  해방의 개념을 벗어 던지고 '지고의 포기자'가 되십시오. 오, 라마여! 그런 다음에 오래오래 살며 온 세상을 다스리십시오.

바시슈타는 말을 계속했다.

참나가 장난으로 신체를 봄으로 자신이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을 가집니다. 세상이라는 환영을 구성하는 이 모든 것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존재하게 됩니다. 이 환영은 마음, 식별의 능력, 자아감, 잠재적인 경향성 및 감각과 같은 다양한 이름들을 취하면서 바다의 파도와 같이 퍼져 나갑니다. 마음과 자아감은 사실 둘이 아니며 같은 것입니다. 그 차이는 언어 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마음이 자아감이며 자아감이 바로 마음입니다. 단지 우매한 사람들만이 하나는 다른 하나로부터 생겨났다고 믿습니다. 이는 마치 우매한 사람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에서 흰색이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같은 마음과 자아감은 만약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하나도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굴레와 해방이라는 개념을 가지는 대신에, 모든 갈망을 버리고 지혜와 초연을 통하여 마음이 중지되게 하십시오. '내가 해방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그대 안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소생합니다. 그리고 다른 개념들을 지니게 된 마음은 신체를 만들어 냅니다. 바로 그때 '나는 이것을 한다.', '나는 이것을 즐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안다.'와 같은 다른 개념들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개념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실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실제성을 모르기 때문에, 마치 신기루가 동물들을 미혹시켜 유혹하듯이 환영은 마음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은 마음을 유혹할 수 없게 됩니다. 마치 램프가 어두움을 완전히 없애 버리듯이, 진리에 대한 지식이 개념들과 조건화를 완전히 뿌리 뽑습니다.

'이 신체는 그저 둔한 물질인데, 왜 사람은 신체를 위하여 쾌락을 좇아야 한느가?'라고 진실되게 질문을 던진다면, 모든 갈망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들이 사라지면, 자신 안에서 위대한 희열과 지고의 평화를 경험합니다. 참나 지식을 지닌 현자들은 용기와 안정성을 얻으며 그 자신으 영광 안에서 빛납니다. 그는 자신 안에서 지고의 만족을 즐깁니다. 그는 깨달았으며 그리고 이 내면의 빛이 그의 안에서 밝게 빛납니다. 그는 어디에나 있으며, 모든 것의 주인이며, 형상이 없지만 형상이 있는 모든 것에 퍼져 있는 모든 것의 참나로서 참나를 봅니다.

갈망에 흔들렸던 과거를 기억하면서, 그는 그 자신의 과거의 무지에 대해 웃습니다. 그는 사악한 친구들을 멀리하며, 마음의 고뇌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참나 지식 안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고, 모든 사람에게 갈채를 받으며, 모든 사람이 그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관심한 채로 있습니다. 그는 주지도 받지도 않으며, 어느 누구를 모욕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으며,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해방된 현자입니다. 그는 동기가 있는 모든 행위를 버렸으며, 조건화로부터 자유로우며, 모든 욕망과 희망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오, 라마여! 모든 욕망을 버리고 그대 자신 안에 있는 평화에 있으십시오. 세상의 어떤 기쁨도 그대가 모든 욕망과 희망을 완전히 버릴 때 그대의 가슴에 채워질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왕위에 있건, 천국에 있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건 간에, 희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느껴지는 그러한 기쁨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욕망이 없는 사람 즉 헛된 희망이 없는 사람은 온 세상을 송아지으 발자국인 양, 가장 놓은 산은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인 영, 공간은 작은 상자인 양 그리고 삼계는 마치 풀잎인 양 여깁니다. 그는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이들의 행동에 대해 웃습니다.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그 같은 사람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는 이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나기를 바란다.'라는 생각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때, 어느 누가 그의 평정으 상태를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 라마여! 사람을 세상의 윤회에 묶이게 하는 것은 갈망과 희망입니다.

그대가 참나만이 이 모든 것이며 그 다양한 모습들은 단지 실체가 없는 말뿐이라는 진리를 안다면, 그대는 욕망과 희망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지고의 초연을 지니고 있는 그 같은 영웅들은 그의 현존에 의해 환영의 악귀를 쫓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는 쾌락에 의하여 즐거워하지 않으며, 고통들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마치 바람이 산을 뿌리 뽑을 수 없는 것처럼 유혹이라는 것은 더 이상 그를 현혹할 수 없습니다. 유혹과 혐오, 이 두 가지 힘은 그에게 전혀 닿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똑같은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최소한의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면서 그는 구하지 않아도 그에게 오는 어떤 것도 즐깁니다. 이는 마치 눈이 욕망이나 혐오 없이 그들의 대상들을 지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험들은 그에게 어떠한 기쁨이나 슬픔도 유발하지 못합니다. 비록 그가 이 세상에서 적절한 행동을 하는 데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의식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간, 공간, 인과 관계의 법칙에 부응하여 어떤 일이 그에게 닥치더라도, 그것이 기쁜 일이든 기쁘지 않은 일이든지 간에, 그는 내적으로는 전혀 혼란되지 않은 채 있습니다.

뱀으로 잘못 본 밧줄이 뱀이 아니라 밧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밧줄이 위협적이지 않듯이, 한번 사라진 환영은 되돌아오지 않으며, 한번 얻어진 참나 지식은 결코 잃지 않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과일을 어떻게 다시 원래대로 달 수 있겠습니까?

진리를 아는 사람은 비록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도 마치 그려진 이미지로 여깁니다. 즉, 그것이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둘 모두는 흙, 물 등과 같은 재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가 보일 때, 소유하고픈 욕망은 가슴속에서 더 이상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여자가 그녀의 가슴에 그 사랑하는 이를 깊이 간직하면서도 자신의 집안일을 해 나가는 것처럼, 깨달은 현자들은 자신의 의식을 진리에 확고하게 둔 채 이 세상에서 기능합니다. 이 두가지의 경우 모두에 있어서 어떤 누구라도 그들의 행동을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말하자면, 그 여자에게 그녀의 사랑하는 이를 잊게 하거나 또는 현자들에게 진리를 잊게 하지는 못합니다.

깨달은 현자들은 자신의 몸이 베여도 자신의 참나가 베이지 않는다는 것,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도 자신의 참나는 울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신체가 불타더라도 자신의 참나는 불자티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을 때조차도 자신의 참나는 잃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 앞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즉 빈곤에 빠지든 풍요로움 속에 있든지 간에, 또 궁전에 살든지 숲 속에 살든지 간에, 그는 내적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같은 해방된 존재들이 이 우주 속에 많습니다. 오, 라마여! 내가 그대에게 몇 가지 예를 제시하겠습니다. 통치자 자나까, 우리의 조상 딜리빠 국왕, 세상의 첫 번째 통치자 마누, 전쟁에 참여했던 통치자 만다따, 악마왕 발리, 나무찌, 신들의 왕인 인드라와 싸웠던 브르뜨라, 뿌라흘라다, 신과 악마들의 스승이자 우주의 창조, 보존 및 소멸에 관계하고 있는 삼바라, 비슈바미뜨라와 나라다 같은 현자, 그리고 불과 공기 같은 자연의 원소들을 다스리는 신들도 이에 해당됩니다.

오, 라마여! 그 이외에도 이 우주에 해방을 얻은 수천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몇몇은 현자이며, 다른 이들은 왕이며, 다른 것들은 별이나 행성과 같이 빛나는 것들도 있고, 또 다른 존재들은 신 또는 악마입니다. 오, 라마여! 벌레나 곤충의 무리 중에서도 자유로운 것들이 있으며, 그와 반대로 신들 중에서도 우매한 신들이 있습니다. 참나는 모든 것 안에 있습니다. 참나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모습으로도 존재합니다. 참나만이 신이며 모든 다양한 신성들입니다. 물질들 안에는 공(공간)이 있고 실체들은 공이나 공간 안에 있습니다. 적절하지 않은 것이 탐구로 적절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올바르게 행동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즉, 공간이나 공의 명상이 지고의 진리의 얻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안내되어 존재 안으로 들어옵니다. 다른 한편, 강해 보이거나 대단해 보이는 것들은 그것 자신의 소멸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이렇게 진리를 보고서 즐거움과 슬픔, 비통과 집착을 버리십시오. 실재가 아닌 것이 실재인 것으로 보이고, 실재인 것이 실재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희망과 희망 없음을 버리고 평정을 얻으십시오.

오, 라마여! 이 세상에서 해방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바로 가까이 존재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자기 노력으로 해방을 얻었습니다. 해방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지혜로움과 우매함에 따라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그대 안에 있는 지혜의 등불에 불을 밝히십시오. 참나를 봄으로 슬픔은 사라집니다.

이 세상에는 자나까 왕처럼 살아 있으면서도 참나 지식과 해방을 획득한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그리고 지금에 자유로워지십시오. 여기에 있는 그 어떠한 것에도 전적으로 무집착함으로 내적인 평화를 얻는 것이 해방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신체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간에 가능합니다.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해방됩니다. 현명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이 자유를 얻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송아지의 발자국조차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 라마여! 영적 영웅에, 올바른 노력에 의지하십시오. 그래서 올바른 참나 탐구로, 참나 지식의 완성에 이르도록 노력하십시오. 이 같은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는 온 우주가 마치 송아지의 발자국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오, 라마여! 이 모든 세상은 절대적 브람만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 또는 지혜롭지 못함 때문에 독립적인 본질적 실체라고 이해됩니다. 그 같이 잘못된 개념은 지혜가 일어남으로 사라집니다. 잘못된 지각은 이 모든 것을 '세상'으로 나타나게 만듭니다. 이와는 달리 올바른 지각은 이 오류를 끝내 줍니다. 라마여! 이 오류는 올바른 태도와 지혜를 가진 올바른 노력으로 예외 없이 없애 버릴 수 있습니다. 오, 라마여! 오류를 극복하는 이 같은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환영의 진흙탕 속에 빠져 있는 불쌍한 이들이 있습니다. 라마여! 감탄그럽게도 그대는 올바른 탐구 정신이 그대의 가슴 안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진리가 그와 같은 탐구에 의하여 깨달아질 때, 강함, 지성과 밝음이 증가합니다.

진리를 깨달은 그리고 여기 지금에서 오류로부터 자유로운 현자들은 이 세상을 마치 한 치의 갈망도 없이 깊은 잠의 상태에 있는 듯 바라봅니다. 그는 추구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에게 오는 대상들과 경험들조차 그의 내적 지성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가슴이 그 자체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니지 않으며, 과거를 회상하지도 않으며, 현재 속에서조차 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을 행합니다. 잠들어 있으면서도 그는 깨어 있고, 깨어 있으면서도 그는 잠들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행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밖으로는 무척 바쁜 것처럼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평정의 상태에 늘 있습니다. 그의 행동들은 전혀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현자는 어떤 것에도 또는 어떤 사람에게도 집착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헌신적인 것처럼 보이고, 무정한 이에게는 무정하게 보입니다. 그는 아이들 사이에 있으면 아이가 되고, 노일들 사이에 있으면 노인이 되고, 영웅들 사이에 있으면 영웅이, 젊은이들 사이에 있으면 젊은이가, 슬픔 속에 있으면 슬픔이 됩니다. 그의 부드럽고 달콤한 말들은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고상한 행동들로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그러나 그는 고상합니다. 그는 쾌락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유혹되지 않습니다. 그는 굴레나 심지어는 해방에도 끌리지 않습니다. 무지와 오류의 그물은 지혜의 불길에 타 버렸고, 그의 의식의 새는 해방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는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 우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결실을 맺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이와 같은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거나 포기합니다. 그는 달이 뜨겁게 빛나거나 태양이 시원하게 빛나더라도 놀라지 않습니다. 무한한 의식인 참나가 이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그 같이 놀라운 현상들에 대해서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는 소심하지 않으며 분노의 폭발도 없습니다.

존재들은 계속해서 태어나고 또한 계속해서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꿈으 대상들이 꿈을 꿀 때 이어나는 것처럼, 세상이 자신의 비전 안에 일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대상들은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불쌍함이나 기쁨에 대한 어떠한 정당화도 느끼지 못합니다. 쾌락과 고통,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과 같은 모든 개념이 없어졌을 때, 마음속에 있는 모든 개념이 그칩니다. 타 버린 씨앗으로부터는 기름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오류는 다시 생겨나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오, 라마여! 횃불을 돌릴 때 가공의 불꽃의 원 모양이 만들어지듯이, 의식에서 일어나는 동요 때문에 세상이라는 가공의 현상들이 생겨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에 있는 흰 색깔과 같이, 참기름 씨앗에 있는 기름과 같이, 꽃으 향기와 같이, 불의 열기와 같이 동요와 의식이라는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것들을 별개의 다른 범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마음과 생각의 움직임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가 없어지면 둘 다 소멸해 버립니다.

오, 라마여! 이 같은 소멸이 일어날 수 있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생각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요가의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올바른 지식의 길을 가는 지식의 방법입니다.

이 신체에서 에너지 경로(나디, 이것은 '움직임의 경로'를 의미하며, 편의상 그렇게 불리지만 꼭 신경의 경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들을 따라 흐르는 에너지를 쁘라나라고 합니다. 신체에서의 이것의 다양한 기능에 따라 그것은 아빠나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쁘라나는 마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사실 쁘라나의 움직임 때문에 생각하는 쪽으로 향하는 의식이 마음입니다. 마음속의 생각의 움직임은 쁘라나의 움직임으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리고 쁘라나의 움직임은 의식 안에서 생각이 움직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물결과 물살의 흐름의 관계와 같이, 그것들은 상호 의존적인 순환을 만듭니다.

현자들은 마음이 쁘라나의 움직임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쁘라나의 억제로,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마음이 생각의 움직임을 버릴 때, 세상의 환영의 모습은 사라집니다. 쁘라나의 움직임은 경전과 현자들의 교훈을 열심히 행함으로써, 그리고 이전 삶들에서 초연을 배양함으로, 도는 묵상과 명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유일한 진리에 헌신하는 단계에 이름으로 모든 희망과 갈망이 자신의 가슴속에서 없어지는 순간에 멈춥니다.

쁘라나의 움직임은 또한 은둔처에서 긴장이 없이 들숨 등의 수행을 통해서, 또는 신성한 옴의 의미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반복해도 멈추어 집니다. 그때 의식은 깊은 수면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쁘라나가 신체의 사지에 닿지 않고 공간에서 배회할 때 숨을 내쉬거나, 쁘라나의 평화로운 활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들이쉼이나, 숨을 오랫동안 참는 것 즉 호흡을 정지하는 수행 등 이 모든 것은 쁘라나의 움직임을 멈추게 합니다. 브라나가 머리꼭대기 쪽으로 올라갈 때 혀끝으로 코의 뒷부분을 막음으로, 아무런 생각의 움직임도 없는 명상을 수행함으로, 코끝으로부터 12인치 떨어진 지점에 의식을 꾸준히 붙잡음으로, 그리고 입천장과 위쪽의 구멍을 통해서 이마 쪽으로 쁘라나를 들여보냄으로, 그리고 미간에 쁘라나를 집중시킴으로, 갑작스러운 생각의 움직임을 멈춤으로, 또는 오랫동안 가슴 중심의 공간에 명상을 함으로, 이 모든 것은 쁘라나의 움직임을 멈추게 합니다.

라마가 무었다. "신이시여! 당신이 말씀하신 가슴이란 무엇입니까?"

바시슈타가 말을 이었다.

오, 라마여! '가슴'으 두 가지 측면을 지금부터 말하겠습니다. 하나는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무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물질적인 몸의 한 부분이며 신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슴은 무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슴은 순수한 의식입니다. 그것은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며, 또한 안에도 바깥에도 있지 않기도 합니다. 그것이 주요한 가슴입니다. 그것 안에서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나오며, 그리고 그것은 모든 부를 가지고 있는 보물 창고입니다. 의식만이 모든 존재의 가슴이며, 사람들이 가슴이라 부르는 살의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만약 모든 조건화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이 순수한 의식 안으로 들어간다면, 쁘라나의 활동은 억제됩니다.

여러 스승들에 의하여 제시된 이들 방법 중 그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쁘라나의 활동은 억제될 수 있습니다. 이 요가의 방법들을 격렬하거나 강제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초연이 동시에 자라면서 그러한 수행에 확고히 자리를 잡을 때 그리고 마음의 조건화가 완전한 자제 아래에 올 때, 쁘라나 활동의 정지라는 결실이 있습니다.

수행을 하는 동안에 미간이나 입천장, 코끝 또는 코로부터 12인치 떨어진 머리의 끝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쁘라나가 억제될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꾸준하고 지속적인 수행으로 혀끝이 목젖에 닿을 수 있다면, 쁘라나의 활동이 정지될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수행들이 산만하게 보일 것이지만, 그것들을 끊임없이 수행하면 산만함이 사라질 것입니다. 슬픔으로부터 자유롭고 참나의 희열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러한 꾸준한 수행을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요가를 수행하십시오. 수행을 통하여 쁘라나의 활동이 제어될 때, 그때 니르바나 즉 해방만이 남습니다. 그것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것 안에 세상의 나타남은 없습니다. 그것으로부터는 이것이 없으며, 세상의 모습도 그것 같지 않습니다! 그것 안에 확고히 자리 잡는 이는 살아 있는 동안에 해방되어 있습니다.

요가의 수행으로 마음이 평화 안에 확고히 자리 잡은 이는 진리에 대한 바른 통찰을 가집니다. 지고의 참나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이 셀 수 없이 많은 대상들은 사실 참나이며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른 통찰입니다. 잘못된 견해는 환생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와는 달리 올바른 견해는 환생을 끝냅니다. 그 안에는 주체와 객체(아는 자와 알 수 있는 것)의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나인 의식은 아는 자와 지식 그리고 알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며, 분리는 무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직접적으로 보여질 때 속박도 해방도 없습니다. 현자가 내면의 참나 안에 확고히 자리 잡은 지성으로 자신의 참나 안에서 쉴 때, 그 무슨 쾌락이 이 세상에서 그를 묶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탐구를 하고 있는 이는 산만한 것에 의해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눈은 단지 볼 뿐입니다. 즉, 즐거움, 즐겁지 않음 등과 같은 개념들은 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곳에서 일어납니다. 다른 감각들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의 기능들은 사악하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생각이 순간적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이 감각의 기능들과 연결된다면, 마음의 동요가 있습니다.

오, 눈이여! 당신의 경험의 대상들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대상들은 단지 외적 모양일 뿐입니다. 영원히 내재하고 있는 의식이 유한한 운명을 겪지 않 도록, 그것들을 응시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진정한 존재인 보는 자가 되십시오. 오, 마음이여! 셀 수 없는 장면들이 눈의 자연적인 기능에 따라 눈에 의해서 보입니다. 왜 당신이 그들에게 관계되어야 합니까? 비록 이 장면들이 마음에 비치고 마음에 의하여 인식되더라도, 왜 당신은 자아감으로 이것들에게 반응합니까? 눈과 그들의 대상 간에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친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왜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그것들의 지지로 제공하고 난 뒤에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까? 얼굴과 거울과 거울에 비친 얼굴처럼 장면, 봄 그리고 마음은 서로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안지 '나는 이것을 본다.'와 같은 환영적인 개념이 일어납니다. 무지라는 것은 이것들을 서로 봉하는 밀랍입니다. 그러나 참나 지식은 이 밀랍을 녹여 없애는 열기를 지닌 불입니다!

진정으로, 이 무지한 관계를 강하게 하는 것은 반복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올바른 탐구를 통하여 그것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무지가 파괴될 때, 장면, 봄 그리고 마음 간의 환영적인 관련성은 다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만이 감각들에게 그것들의 사고력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소멸되어야 합니다. 오, 마음이여! 왜 당신은 허무하게 오감에 의하여 동요됩니까? '그것은 나의 마음이다.'라고 생각하는 자만이 당신에 의해서 미혹됩니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 마음이여! 나는 당신이 머물건 나로부터 떠나 버리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실재가 아니며, 둔하며, 환영의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당신에 의해 시달림을 당합니다. 이 이해는 무지의 어두움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오, 악마여! 당신의 갈망과 분노 같은 당신의 감정들과 함께 신체로부터 나가십시오. 오, 마음이여! 당신이 진실로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나는 오늘 당신을 베어 버립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이라는 이 악마는 탐욕, 분노 등 셍 수도 없이 많은 악한 개념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 그 악마는 넘어뜨려졌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과거의 우매함에 대해 웃습니다. 마음은 죽었습니다. 나의 모든 걱정과 욕망은 죽었습니다. 자아감이라 알려진 그 마귀 또한 죽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탐구라는 만뜨라를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나는 자유로우며 지금 행복합니다. 나의 모든 희망과 욕망이 사라졌습니다. 나 자신의 참나에 찬양을! 어떤 미혹도 슬픔도, '나'도 '다른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아가 아니며 또한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나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입니다. 나 자신의 참나에게 찬양을! 나는 시작입니다. 나는 의식입니다. 나는 모든 우주입니다. 내 안에는 어떤 구분도 없습니다. 나 자신의 참나에게 찬양을! 모든 것 안에 똑같이 존재하고 있느 그것, 미묘하게 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 있는 그것, 그 참나에게 찬양을!

바시슈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오, 라마여! 이렇게 생각하면서, 현자들은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참나인 의식만이 이 모든 것일 때, 그리고 마음이 이 이해로 깨끗해졌을 때, 마음이라는 것은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보이지 않건, 또는 그것이 마음이 아니건, 또는 그것이 환영의 나타남이건 간에, 즉 그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것이 단순한 환영이라는 정도만큼은 확실하다. 이제 사악함과 미혹 이 두 가지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마음이라는 것을 볼 수 없다.

나의 모든 의심들은 없어졌다. 나는 동요의 흥분이 없이 있다. 내가 무엇이건 간에, 나는 갈망이 없는 나일 뿐이다. 마음이 존재하기를 그쳤을 때, 갈망 또한 존재하기를 그친다. 마음이 죽고 갈망 또한 죽을 때, 미혹이 사라지고 자아 없음이 태어난다. 그러므로 나는 깨어남의 이 상태에서 깨어난다.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으며 다양성은 전혀 아무런 실재를 가지지 않는데 내가 도대체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미묘한 영원한 참나이다. 나는 어떤 것도 비치지 않는 실재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것은 시작도 긑도 없으며, 전적으로 순수하다. 무엇이 있건, 무엇이 없건 간에, 마음과 내적 실재 모두는 하나의 무한한 의식이다. 그것은 이해 너머에 있는 지고의 평화이다. 그것에 의하여 이 모든 것은 퍼져 있다. 마음을 계속해서 존재하도록 하거나 죽게 하라. 참나가 완전한 평정의 상태에 있을 때, 이 모든 것을 탐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 같은 탐구에 어리석게 매여 있는 한, 나는 제한된 상태에 있게 된다. 이제 이 탐구를 통하여 나는 조건화되지 않은 존재에 이르렀다. 그러면 누가 탐구자인가?

그와 같은 생각들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이제 마음은 죽었다. 생각들이 마음이라고 알려진 이 마귀를 되살려 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모든 생각과 개념을 버린다. 옴을 명상하면서 나는 참나 안에, 완전한 내적 침묵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이렇게 현명한 이들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라도 늘 진리의 본질을 탐구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탐구 때문에, 마음은 모든 동요로부터 자유롭지만 그것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행하면서 그것 자신 안에 자리 잡은 채 있습니다.

조건화되지 않은 의식을 가진 성수러운 이들은 자만과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늘 즐거운 가슴을 가지고서, 여기에 살면서 기능을 합니다. 그들의 안색은 성스러운 광채로 빛나며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행위를 합니다.

탐구에 관한 위의 글은 현자 삼바르따가 옛날에 나에게 말해 주었던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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