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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우달라까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10.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미묘하고 날카로운 것인 마음의 개념과 관념에 자리 잡지 마십시오. 마음은 시간이 흐름으로 합쳐지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커다란 힘을 얻습니다. 몸이라는 넝쿨을 시간이 죽이기 전에 지혜로 마음을 통제하십시오. 나의 말을 깊이 숙고함으로써 그대는 지고의 희열을 얻을 것입니다.

오, 라마여! 그대에게 옛날 현인 우달라까가 어떻게 지고의 진리의 비전을 얻었는지 말해 주겠습니다.

지상의 한 곳에 간다마다나라는 큰 산이 있었습니다. 그 산의 한 정상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 현인 우달라까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린 소년일 때조차도 그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 지고의 지혜를 얻고자 했습니다. 순수한 가슴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해가 부족했고 안정되지 않은 마음을 지녔었습니다. 그는 금욕적인 생활과 경전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내부에 지혜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혼자 앉아 있는 동안, 현인 우달라까는 다음과 같이 숙고했습니다.

해방은 무엇인가? 얻어질 수 있는 대상들 중 어느 것이 최상의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어떤 것을 얻어야 슬픔을 겪지 않으며, 다시 태어나지 않는가? 언제 내가 그런 상태에서 영원히 쉴 것인가? 욕구와 갈망으로 일어난 마음의 동요는 언제 끝날 것인가? '나는 이것을 했다.', '나는 이것을 해야 한다.'와 같은 생각에서 언제 자유로울 것인가? 연꽃이 물에서 살지만 물로 오염되지 않는 것처럼, 내 마음이 이런 관계 속에서 살지만 사악함을 경험하는 것은 언제 중단될 것인가? 지고의 지혜라는 배의 도움으로 해방이 있는 건너편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을 내가 지켜볼 수 있을 때는 언제인가? 마음이 완전히 고요할 때는 언제인가? 무한한 의식의 경험을 통해 주체와 대상적 경험 간의 환영적인 분리가 중지될 때는 언제인가? 그 속에 연루됨이 없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지켜볼 수 있을 때는 언제인가? 완전히 고요한 마음을 갖고서 동굴 안에 살면서, 내가 생각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태에 있는 바위처럼 있을 때는 언제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달라까는 명상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계속 동요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마음은 외적 대상들을 포기하고 순수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그것은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 변하는 기분에 괴로워하면서, 그는 숲 속을 거닐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지금껏 누구도 방문한 적이 없던 숲 속의 고요한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완전한 고요와 평화의 상태를 얻기에 가장 적합할 것 같은 동굴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아름다운 담쟁이와 꽃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기후도 적당했으며, 모든 면에서 쾌적했습니다. 그곳은 에메랄드로 조각된 것처럼 빛났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우달라까는 그 쾌적한 동굴로 들어가서 명상의 자세로 앉았습니다. 생각의 움직임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얻고자 하면서, 그는 마음속에 있는 잠재적 경향성들에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우달라까는 다음과 같이 숙고했습니다.

오, 마음이여! 그대는 이런 세상의 모습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현명한 사람들은 나중에 고통으로 변하는 쾌락이라는 것과 접촉하지 않는다. 내부에 있는 지고의 평화를 버리고 쾌락을 찾아가는 자는 기쁨의 낙원을 포기하고 독초 들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좋아하는 곳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벽한 고요 없이는 지고의 평화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희망과 갈망을 포기해라.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 경이로운 이 모든 자연의 대상들은 그것들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대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과 종소리 때문에 덫에 걸린 사슴처럼, 암코끼리의 도움으로 인해 덫에 걸린 수코끼리처럼, 미각으로 인해 낚시 바늘이라는 죽음으로 간 물고기처럼, 불빛에 매혹되어 그 안에서 사라진 나방처럼, 후각으로 인해 꽃으로 가서 밤이 되어 꽃봉오리가 닫히자 그 속에 갇혀 죽음을 당한 꿀벌처럼 사라지지 말라.

오, 어리석은 마음이여! 청각에 의해 사슴이, 후각에 의해 꿀벌이, 시각에 의해 나방이, 촉각에 의해 코끼리가, 미각에 의해 물고기가 그렇듯이,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감각적 갈망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라졌지만 그대는 다섯 가지 유혹의 희생자이다. 어떻게 그대가 행복을 지닐 수 있겠는가? 누에가 고치를 짜서 그 안에 갇히듯이, 그대는 개념의 그물을 짜서 그 안에 갇혀 있다. 그 모든 것을 없애고, 순수함을 얻으며, 삶과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래서 완전한 고요를 얻을 수 있다면, 그대는 가장 위대한 승리를 얻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상이라 불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에 집착한다면, 그대는 확실히 슬픔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오, 마음이여! 왜 내가 그대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는가? 왜냐하면 진리를 탐구한다면, 마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은 단지 무지의 산물이다. 무지가 마멸되면 마음도 마멸된다. 따라서 그대는 마멸되는 과정 속에 있다. 그러므로 없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고 어리석다. 왜냐하면 나날이 그대는 점점 약해져서, 나는 그대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이는 버려야 하는 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오, 마음이여! 나는 자아가 없으며 무한하고 동질로 있는 의식이다. 나는 자아의 원인인 그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달라까는 다음과 같이 계속 명상에 잠겼습니다.

코끼리가 사과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보다, 무한한 참나가 마음으로 비집고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 자기를 한정시키는 과정을 통해 유한하게 한정된 의식이 개념이 되는데, 그것을 마음이라 한다. 이것은 무지의 결과이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아는 어린아이의 개념에 불과하다. 진리를 탐구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것을 믿는다.

나는 조심스럽게 조사해 왔다. 나는 모든 것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찰해 왔다. 그리고 '이것이 나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찾지 못했다. 나는 지식이나 아는 것의 대상이 아니며, 자기라는 것이 없는 모든 것에 퍼져 있는 의식이다. 나는 나누어질 수 없고, 아무런 이름도 변화도 없으며, 단일성과 다양성의 모든 개념을 뛰어넘고, 크고 작은 측정을 넘어서 있는 것이며 그리고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따라서 오, 마음이여! 나는 슬픔의 근원인 그대를 포기한다.

살, 피, 뼈 등이 있는 이런 몸 안에서 '이것은 나이다.'라고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움직임은 에너지의 본성이며, 생각은 의식에 본래 내재하고 있으며, 노화와 죽음은 몸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누가 '이것을 나다.'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혀이고, 이것은 귀이고, 이것은 코이며, 이것은 움직임이고, 이것은 눈이다. 누가 '이것을 나다.'라고 말하는가? 나는 이들 중 그 어떤 것도 아니고, 오, 마음이여! 나는 너도 아니며, 이런 개념들도 아니다. 나는 단지 순수하고 독립적인 무한한 의식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다.' 또는 '나는 없다.'라는 이 둘 다는 똑같은 진리의 표현이다.

아! 그렇게 오랫동안 무지는 나를 기만해 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나에게서 참나 지식을 빼앗아 갔던 것을 발견했다! 나는 더 이상 무지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언덕의 꼭대기에 있는 구름이 언덕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슬픔과 연관된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것과 독립되어 있다. 참나 지식이 없을 때 자아감이 일어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자아감이 없다. 감각, 몸, 기타 등등을 그대로 두거나 사라지게 하라. 나는 그것들과 관계가 없다. 눈 등의 감각들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대상과 접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이것은 나다.', '나는 본다.' 등과 같은 생각으로 미혹시키는 '나'는 누구인가? 이런 눈 등과 같은 것들은 이전의 조건 형성에 의해 강요됨이 없이, 그들의 대상을 자연스럽게 보고 경험한다. 따라서 행위들이 마음의 조건화 없이 자발적으로 행해지면, 그들의 경험은 과거에 있었던 행복이나 불행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며 순수할 것이다. 이런 기억 또는 마음의 조건화는 실제로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의식과 다르지도 않으며 또 독립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의식 속에서 그것을 떠올리지 않음으로 쉽게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오, 마음이여! 이런 다양성에 대한 이 지각을 버리고 그대 자신이 무한한 의식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해방이다.

우달라까는 다음과 같이 계속 명상에 잠겼습니다.

실제로 의식은 조건 지어질 수 없다. 그것은 한계가 없으며 가장 미묘한 원자보다 더 미묘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음의 조건화의 영향 너머에 있다. 마음은 자아감과 감각들 안에 있는 투영된 의식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의식의 자기 제한이라는 환영이 일어난다. 이것을 거듭하여 생각하고 경험할 때, 자아감과 탐나 제한이라는 환영은 거짓 타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나는 이것들 중 어느 것에도 닿지 않는 의식이다.

몸으로 하여금 무지한 활동들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 이 세상 안에 계속 살게 하라. 아니면 몸이 세상을 포기하도록 하라. 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의식이다. 무한하고 널리 퍼져 있는 의식은 탄생과 죽음이 없으며, 어떤 이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는다. 의식은 분리된 실체로서 살아가는 존재가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곳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탄생과 죽음은 마음의 개념이다. 그것들은 참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자아감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붙잡히고 구속될 수 있다. 참나는 자아감이 없다. 따라서 참나는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서 있다.

자아감은 헛된 망상이다. 마음은 신기루와 같고 세상의 대상들은 둔한 물질이다. '내가 있다.'라고 말하는 그것은 누구인가? 몸은 살, 피와 같은 것의 집합체이다. 마음은 그것의 본성을 탐구할 때 사라진다. 의식의 자기 제한과 그와 다른 개념들은 생명(감각)이 없는데, 무엇이 자아란 말인가? 감각은 존재하면서 늘 자기를 만족시키는 활동을 한다. 세상의 물질은 세상의 물질일 뿐이다. 어디에 자아가 있단 말인가? 자연은 자연일 뿐이다. 자연의 성질들은 시각과 불빛, 청각과 소리 등처럼 서로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것 자신 안에 휴식하고 있다. 어디에 자아가 있단 말인가?

의식인 참나는 모든 것의 지고의 참나로서 모든 몸들 안에서 그리고 모든 시간들에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나의 형태는 무엇이며,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그러므로 이렇게 '나'라고 불릴 수 있으며 존재와 비존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은 없다. 실제로 아무런 자아감이 없는데, 어떻게 그 자아감이 관련될 수 있으며, 그리고 누구에게 관련되겠는가? 따라서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이원성의 허구적 개념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주적 존재인 브람만 즉 참나이다. 내가 그 실재인데, 왜 내가 환영 속에서 고통을 겪는가? 하나인 것만이 순수하게 모든 곳에 있는 존재로서 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아감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어떤 물체라도 그 안에 아무런 실체가 없으며 단지 참나만이 존재하고 있다. 또는 어떤 실체가 정말로 있는 것으로 생각되더라도, 그것과 참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감각들은 감각으로서 기능하며, 마음은 마음으로서 존재한다. 의식은 이것들에 닿지 않고 있다. 무엇이 관계이며, 그 관계가 어떻게 생긴단 말인가? 그것들이 나란히 존재한다고, 관련성을 가정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돌과 철로 된 막대기는 나란히 놓일 수 있지만, 서로 간에 전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달라까는 계속해서 명상에 잠겼습니다.

거짓 자아감이 일어날 때만 '이것은 내 것이다.', '저것은 그의 것이다.'라는 잘못된 개념들도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이 거짓 자아감의 속임수라는 것이 보일 때, 이런 실재하지 않는 개념들이 존재하기를 그친다. 진실로 참나만이 있을 뿐 다른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나는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우주적 존재 즉 브람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아감이라는 미혹은 하늘의 푸름과 같은 것이다. 그런 개념은 다시 갖지 말고 버리는 것이 더 낫다. 자아감의 뿌리를 버린 후에, 나는 평화의 본질을 진니 참나 속에서 쉰다.

자아감은 끊임없는 슬픔, 고통, 악행의 근원이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고 죽음은 탄생을 오게 한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끝에 가서는 사라진다. 자아감이 받아들인 그런 개념들은 커다란 슬픔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지금 이것을 가졌다.', '나는 저것도 가질 것이다.'와 같은 생각들로 일어난 근심은 무지한 자들을 부태운다. '이것은 있다.'와 '저것은 없다.'와 같은 개념들은 자아를 가진 이들을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자아감이 존재하기를 그친다면 환영적인 세상의 모습은 다시 생기지 않는다. 모든 갈망은 끝에 이른다.

이 우주는 우주의 창조에 있어서 아무런 타당한 이유 없이 생겼음이 확실하다. 어떻게 원인이나 목적이 없는 창조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태초부터, 항아리가 언제나 흙 속에 들어 있듯이, 이 모든 몸들은 우주적 존재 속에 내재하고 있었다. 바다가 과거에도 현재와 미래에도 바다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리고 같은 물이 일시적으로 파도의 형태를 취하듯이, 이 모든 것은 영원히 언제나 우주적 존재이다. 어리석은 자만이 몸 등과 같은 일시적인 모습과 관련하여 '이것이 나다.'라는 느낌을 가진다.

같은 식으로, 마음은 처음에 의식이었고, 마음으로서의 본성과 기능을 가한 후에는 결국 다시 의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중간(지금)에 다르게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모든 현상들은 꿈같은 경험, 광란 상태에서의 비전, 술주정뱅이의 환영, 눈의 환영, 심신의 병, 감정의 혼란, 정신병적 상태 등과 같은 일시적인 실재를 지닌 듯이 보인다. 그러나 오, 마음이여! 그대는 그것들에 영원한 실재를 부여했다. 그것은 연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별에 대하여 상상함으로 고통을 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나의 마음인 그대가 진정한 실체라는 개념에 매달리는 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 모든 현상이 환영의 모습이라는 것을 내가 깨달을 때, 그대는 마음이 아니게 될 것이고, 감각적 경험 등과 같은 모든 기억들은 끝이 날 것이다. 의식이 스스로를 깨닫고 자기 제한적인 마음의 조건화를 버릴 때, 마음은 그것의 색깔이 없어지고 자신의 본성인 의식 속에서 휴식한다. 자신의 모든 가지들을 모은 마음이 자신을 순수 의식의 불 속에 바칠 때, 그것은 정화되고 불멸성을 얻는다.

우달라까는 계속해서 명상에 잠겼습니다.

마음이 몸을 자신과 전혀 다른 것으로 보고, 자신의 조건화인 개념들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무상한 본성을 인식할 때, 그것은 승리한다. 마음과 몸은 서로의 적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없앨 때, 지고의 행복이 따른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함께 있을 때,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주인이 고통 받기 때문이다.

생각의 힘을 통해 마음은 몸을 낳는다. 그리고 몸이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은 마음 자신의 슬픔으로 몸을 부양한다. 따라서 슬픔에 의해 고통을 받으면서, 몸은 자신의 부모인 마음을 파괴하기를 원한다! 이 세상에는 친구도 적도 없다.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은 우리의 친구로 간주되며, 고통을 초래하는 것은 우리의 적이다!

그처럼 마음과 몸이 끊임없이 서로를 파괴할 때,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마음을 없앨 때만, 행복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몸은 매일 깊은 잠 속에서 마음을 파괴할려 한다. 하지만 참나 지식을 성취할 때까지, 한쪽은 자기도 모르게 다른 쪽의 힘을 키우며, 공통의 목적을 위해 그들은 함께 움직이는 듯하다. 그것은 서로의 반대지만, 물과 불이 요리와 같은 공통된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는 것과 같다.

마음이 존재하기를 멈추면, 생각의 힘과 마음의 조건화도 중단되기 때문에, 그때 몸 역시 존재하기를 멈춘다. 하지만 마음은 몸이 죽을 때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을 죽이려고 애써야 한다. 마음은 생각이라는 나무들과 갈망이라는 덩굴 식물들을 가지고 있는 숲과 같다. 이것들을 파괴함으로써, 나는 희열을 얻는다. 마음이 죽는다면, 살과 피로 된 몸이 있든 없든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시체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참나 지식이 있는 곳에 마음이나 감각, 경향성이나 습관은 없다. 나는 그 지고의 상태를 얻었다. 나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나는 해방(니르바나)을 얻었다. 씨앗에서 짜낸 기름이 씨앗과 관계없듯이, 나는 마음, 몸, 감각과의 관계 위로 솟아올랐다. 지금 내게 있어 마음, 몸, 감각은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 순수, 욕망의 완전한 충족 그러므로 욕망의 부재, 모든 것에 대한 다정함, 진실함, 지혜, 고요함과 희열, 말의 달콤함, 최상의 관대함, 빛남, 하나로 향함, 우주적 합일의 깨달음, 공포 없음, 분리 의식의 부재, 타락되지 않음, 이것들이 나의 믿음직한 동료들이다. 늘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모든 식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유쾌한 것이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내게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나 혐오가 없다. 모든 미혹이 끝났기에, 마음이 존재하는 것을 멈췄기에, 그리고 모든 사악한 생각들이 사라졌기에, 나는 나 자신의 참나 속에 평화로이 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나서 현자 우달라까는 연꽃 자세로 앉아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는 최상의 상태를 주는 신성한 단어 옴을 읊조렸습니다. 그렇게 옴을 읊어서 그 진동이 그의 전 존재를 채우고, 머리 정수리까지 가게 했습니다. 그의 수행의 첫 번째 단계로, 그는 호흡을 완전해 내쉬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의 생명력이 몸을 버리고 순수한 의식의 공간(차원)에서 돌아다니는 듯했습니다. 가슴에서 나온 불이 그의 온 몸을 불태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달라까는 하타 요가에서 수반하고 있는 격렬함이 없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타 요가에는 고통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신성한 단어 옴을 두 번째 발음하자, 그는 평온 상태에 다다랐고, 흔들림이나 진동 없이 저절로 호흡의 멈춤이 일어났습니다. 생명력은 안쪽이나 바깥쪽도, 아래도 위도 아닌 곳에서 고요히 있었습니다. 몸을 재로 만든 후, 불은 다 타버리고 없어졌습니다. 순수한 재만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뼈들이 경배 속에 불타고 있었던 장뇌로 변한 것과 같았습니다. 강한 바람이 재를 날리고, 그것은 공간에 흩어집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 신성한 단어 옴이 절정 즉 평온에 이르렀을 때, 들이쉬는 호흡이 일어났습니다. 이 단계 동안에 의식이라는 감로의 바로 중앙에 있었던 생명력은 시원한 바람이 되어 공간으로 퍼졌습니다. 이런 힘들은 달의 영역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그것은 경사스러운 빛으로 퍼져 갔고, 몸의 남아 있는 재 위로 내렸습니다.

즉시 재에서 비슈누 신처럼 네 개의 팔을 지닌 빛나는 존재가 생겼습니다. 우달라까는 신처럼 빛났고, 그의 전 존재는 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생명력이 소용돌이처럼 퍼져 내부의 꾼달리니를 채웠습니다. 그래서 우달라까의 몸은 완전히 정화되었습니다. 그런 후, 이미 연꽃 자세로 앉아 있던 그는 자세를 확실히 하고 감각을 '묶고' 나서, 그의 의식을 생각의 움직임이 조금도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반쯤 감은 눈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내적 고요함에 있는 채로, 쌍을 이루는 두 생명력인 쁘라나와 아빠나를 똑같게 했습니다. 기름이 씨앗에서 분리되듯이, 그는 내부의 감각들이 그들의 대상들과 닿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경험들이 만들어 낸 마음의 조건화를 직접적으로 자각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자각의 제한을 풀고 그것을 순수하게 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직장(直腸) 및 눈 등과 같은 몸의 다른 배출구들을 닫았습니다. 이처럼 완벽한 수련으로 생명력과 자각을 외부로 향하게 하지 않은 채, 그는 마음을 가슴속에 두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우달라까의 마음은 절대적 평온을 얻었으며, 어떤 산만함도 그것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참나 지식의 빛을 가렸던 무지의 어둠을 그는 가슴속에서 보았습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난 지식의 빛으로, 그는 그 무지조차도 몰아냈습니다. 다음에 그는 내부의 빛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빛이 희미해지자, 현자는 잠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면의 둔함 또한 몰아냈습니다. 졸음이 없어지자 현자의 마음은 다양한 빛나는 형태들 위로 올라갔습니다. 현자는 의식의 이런 비전들을 없앴습니다. 그러자 그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큰 둔함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는 그런 둔함 역시 극복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묘사된 이 모든 것과는 다른 상태 안에 그의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잠시 동안 이 상태에 있은 후에, 그의 마음은 존재의 완전함에 대한 경험을 깨우쳤습니다. 그때까지는 다른 요인들과 연관이 있었던 이 자각이 이제 순수해지고 독립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흙 항아리 속에 있던 흙탕물에서 물이 증발하자, 진흙이 같은 물질로 된 항아리의 일부가 된 것과 같았습니다. 파도가 바다 속에 녹아 하나가 되어 바다와 다르지 않게 된 것처럼, 의식은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을 버리고 자신의 절대적 순수함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우달라까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브람마와 같은 신들이 누리고 있는 지고의 희열을 맛보았습니다. 그의 상태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근느 희열의 바다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곧 우달라까는 무한한 의식 속에 있는 위대한 현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모르는 체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지고의 희열의 경험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해방된 자의 상태를 얻었습니다. 그는 신들과 현자들, 세 신들까지 보았습니다. 그는 그런 상태조차 넘어갔습니다. 그는 희열 그 자체로 완전 변형되었으므로, 희열의 영역조차 넘어갔습니다. 그는 희열도 비희열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수 의식이 되었습니다. 잠시 동안이라도 이런 것을 경험한 이는 천국의 기쁨에도 무관심합니다. 이것이 지고의 상태이며, 이것이 목적이며, 이것이 영원한 거주지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이는 다시는 미혹되지 않으며,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는 완전히 깨어났고, 대상화나 관념화 같은 개념을 결코 다시 갖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깨달음'은 아닙니다.

우달라까는 심령적인 힘들의 유혹을 주의 깊게 피하면서, 여석 달 동안 이 상태로 있었습니다. 신들과 현자들조차 그를 경배했습니다. 그는 천국으로 올라오라고 초대받았지만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모든 욕망이 완전히 없어진 채, 우달라까는 살아 있는 동안 해방된 현자로서 거닐었습니다. 산에 있는 동굴에서 며칠씩 혹은 몇 달씩 지내면서 명상을 했습니다. 때로는 일상적인 평범한 활동을 했지만, 그는 완전한 평온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같은 시각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내적 빛은 떠오르지도 지지도 않으면서 늘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원적인 모든 개념이 완전히 정지된 채, 그는 순수한 존재 속에서 몸의 의식이 없이 살았습니다.

라마의 순수한 존재에 대한 질문에 바시슈타는 답했다.

물질적 존재에 대한 개념들이 완전히 없어져서 마음이 존재하기를 멈출 때, 의식은 의식으로 그 자신의 본성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을 순수한 존재라고 합니다. 대상화의 개념들이 없는 의식이 자신 안으로 녹아들어 개별적 정체를 잃을 때, 그것이 순수한 존재입니다. 모든 외적(물질적), 내적(개념적) 대상들이 의식 안으로 녹아들 때, 의식의 순수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들이 몸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것이 모든 깨달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지고의 비전입니다. 이런 비전은 깨달은 사람, 깊은 명상에 있는 사람, 참나 지식의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자에 의해 경험되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현자들과 세 신들은 이런 의식 속에 있습니다. 이런 의식 상태를 얻은 후에도 우달라까는 얼마간 살았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이 몸은 형태를 버릴 것이다.'라는 바람이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그는 산의 동굴로 가서, 눈을 반쯤 감은 채 연꽃 자세로 앉았습니다. 발꿈치를 눌러 직장(直腸)을 압박하고, 몸에 있는 아홉 구멍을 막았습니다. 감각들을 가슴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력(쁘라나)을 억제했으며, 몸을 완전한 평온의 상태에 두었습니다. 혀끝을 눌러 입천장 뿌리를 압박하자, 턱이 서로 조금 떨어졌습니다. 그의 내적 비전은 안도 밖도, 위도 아래도, 물질도 빈 곳도 아닌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순수 의식 속에 있었으며 자신의 내부에서 순수 희열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희열의 상태를 넘어서 순수 존재의 의식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그의 존재 전체가 절대적으로 순수해졌습니다.

우달라까는 얼마 동안 이렇게 완전히 순수한 상태에서 그림처럼 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점차로 그는 완벽한 고요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순수한 존재 안에 있었으며,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넘어 올랐습니다. 모든 의심이 정지되었습니다. 왜곡된 생각도 중단되었습니다. 가슴의 모든 불순함이 씻겨졌습니다. 그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의 몸은 여섯 달 동안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빠르바띠에 의해 인도되어, 몇몇 여신들이 헌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신들에게 경배를 받던 여신이, 우달라까의 몸이 태양의 뜨거운 열로 말라붙은 것을 보고, 그의 몸을 자신의 머리 정수리에 얹었습니다.

오, 라마여! 이것이 가슴의 그늘 속에 머물고 있는 이의 가슴 안에 최고의 지혜를 일깨운 현자 우달라까의 영광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오, 라마여! 이처럼 살면서, 끊임없이 참나 본성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평화를 얻으십시오. 이런 의식의 상태는 초연의 수련, 경전의 탐구, 구루의 지도, 지속적인 탐구의 수행으로 획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깨워진 지성이 예민하고 날카롭다면, 다른 도움이 없이도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어떤 이들은 참나 지식 안에 있고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활동하며, 다른 이들은 스스로를 격리시켜 명상(사마디)을 행합니다. 이들 중 누가 더 나은 것입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라마여! 묵상 혹은 명상(사마디)이란 그것을 행하는 중에 감각의 대상들이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늘 내적 고요와 평온을 누리는 것입니다. 대상들은 오직 마음에만 관련된다는 것을 깨닫고 내적 평화에 있으면서, 어떤 이들은 활동을 하고, 어떤 이들은 분리되어 삽니다. 그 둘 모두 명상의 희열을 누립니다. 사마디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의 마음이 흐트러지면, 그는 미친 사람입니다. 반면에 미친 듯이 보이는 이의 마음이 모든 개념들과 흐트러짐에서 자유로우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고 중단되지 않는 명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가 활동하고 있든 혹은 숲 속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든, 개달음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조건화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은 활동에 관여하고 있더라도 오염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무활동을 정지(사마다나)라고 합니다. 그것은 전적인 자유입니다. 그것은 행복입니다.

명상과 명상하지 않음의 차이점은 마음속에 생각의 움직임이 있는가와 없는가에 의해 나타납니다. 따라서 마음이 조건화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조건화되지 않는 마음은 확고하며, 그 자체가 명상, 자유, 영원한 평화입니다. 조건화된 마음은 슬픔의 근원입니다. 조건화되지 않는 마음은 행위하지 않는 자이며 깨달음의 지고의 상태를 얻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모든 조건화를 노력하여 없애야 합니다. 그것을 명상이나 사마디라고 합니다. 그 안에는 세상과 관련된 모든 욕망과 희망들이 중단되고, 슬픔, 두려움, 욕망이 없습니다. 그것에 의해 탐나는 자신 안에 쉽니다.

참나를 여기에 있는 대상들과 그릇되게 동일시하는 것 모두를 마음으로 버리십시오. 그러고 나서 집이나 산의 동굴 중, 그대가 원하는 곳에서 살아가십시오. 마음이 완전한 고요를 얻은 이에게는 자신의 집이 숲입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아무런 자아감이 없으면, 도시마저 텅 빈 곳입니다. 한편 가슴이 욕망과 악으로 가득한 자에게는 숲도 도시와 같습니다. 마음의 흐트러짐은 깊은 잠 속에서 가라앉습니다. 깨달음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참나를 초월적 존재나 내재하는 존재(모든 것의 참나)로서 보는 사람은 평온 속에 있습니다. 좋은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내부에서 멈춘 자, 모든 존재가 똑같은 자, 꿈 속의 대상들을 지각하듯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세상을 지각하는 자, 그런 이는 평온 속에 있으며, 마을에 살지만 숲에서 삽니다. 자신의 의식을 내부로 오게 하여 돌아다니는 이는 도시나 마을 숲으로 봅니다.

내적 고요와 평화를 얻은 사람은 세상의 모든 곳에서 평화와 고요를 발견합니다. 마음이 들뜨고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불안정으로 가득한 세상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안에서 경험하는 것만을 밖에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늘, 땅, 공기, 공간, 산, 강은 모두 내적 도구인 마음의 부분입니다. 그것들은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씨앗 안의 나무처럼 존재하며, 그것들은 꽃의 향기처럼 밖으로 나타납니다. 사실밖이라는 것도 안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으식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렇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참나만이 이 모든 것입니다.

내적 기쁨으로 가득 찬 자, 기쁨이나 슬픔으로 흔들리지 않는 자, 육체적 몸으로만 행위를 하는 자는 평온 속에 있습니다. 그는 하늘처럼 순수하고 욕망이 없으며, 그의 행동은 적절하고 자발적입니다. 기쁨과 슬픔에 관계될 때, 근느 나무나 흙으로 만들어진 듯이 행동합니다. 그는 평화로우며, 모든 것을 자신의 참나로서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이 소유한 것을,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먼지로 여깁니다. 그런 이만이 진리를 봅니다.

무지한 자는 크거나 작은 대상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실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순수 존재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결코 더렵혀지지 않습니다. 그가 살든 죽든, 집에 있든 다른 곳에 있든, 사치스럽게 살든 구걸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즐기며 춤을 추든 그렇지 않든, 모든 것을 버리고 산에서 고립되어 살든 그렇지 않든, 값비싼 크림이나 향수를 바르든 헝클어진 머리털을 하든, 불 속에 떨어지든 그렇지 않든, 죄를 저지르든 선행을 하든, 세상 순환의 종말까지 살든 죽든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것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아감과 그에 따른 개념들로 인해 오염되는 것은 조건화된 마음일 뿐입니다. 모든 개념들이 멈추고 지혜가 일어날 때, 마음의 불순함들은 자연스럽게 제거됩니다.

깨달음을 얻은 현자들은 어떤 것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아무것도 얻지 않은 채 있습니다. 나무가 돌에서 나지 않듯이, 욕망은 현자의 삶 속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때로 욕망들이 일더라도, 물 위에 쓴 글씨처럼 그것들은 즉시 사라집니다. 현자와 우주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무한한 의식은 고추의 매움을 자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게 자아감을 일어나게 합니다. 무한한 의식은 사탕수수의 달콤함을 작가합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차별을 지닌 자아감을 일어나게 합니다. 무한한 의식은 소금 속에 있는 맛을 작가하게 합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차별을 지닌 자아감을 일어나게 합니다. 무한한 의식은 설탕에 있는 달콤함을 자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특별한 특징의 자각을 일어나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 내재하고 있는 무한한 의식은 바위, 산, 나무, 물, 공간의 본성을 자각하게 되고, 그래서 자아감 즉 개체성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의식 안에 있는 원자와 분자의 자연적 결합은 어떤 것을 구분시키는 벽으로 확실히 작용하며, 그래서 '나'와 '당신'이라는 등의 구분이 생기게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의식의 대상이 되어 의식의 외부에 있는 듯 보입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의식 안에 있는 투영들에 불과합니다. 의식은 그것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들을 자각하게 됨으로써 그것들에 분명한 개체성을 부여힙니다. 의식은 자신과 다르지 않은 자각인 그것 자신을 맛봅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아감 등을 일어나게 한느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무한한 의식이라는 수정은 이 모든 원자들의 결합 안에 있는 그것 자신의 의식의 불빛을 반사합나디. 그리고 그때 원자들의 결합들은 분명한 자아감을 얻으며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등을 생각합니다.

사실, 이러한 모든 결합 안에 내적 자각은 무한한 의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 간에 주체와 대상이라는 관계는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다른 것을 경험하지도, 얻지도, 변형시키지도 않습니다. 오, 라마여!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것은 그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언어의 놀이입니다. '나'나 '세상'과 같은 것과 원자 등의 결합은 없습니다. 마음도, 지식의 대상도, 세상 환영도 없습니다. 물이 자신의 특징을 지닌 소용돌이에서 모습을 얻은 곳처럼, 의식도 그것 자신 안에 '나' 등에 대한 모습을 주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스스로를 쉬바 신으로 생각하든 작은 지바로 생각하든, 의식일 뿐입니다!

'나'와 '그대' 등 그리고 물질적 존재라는 이 다양한 모든 것은 무지한 자의 만족을 위해 일어납니다. 무지한 자가 무한한 의식 속에서 무엇을 상상하든지 간에 그것만을 그는 봅니다. 자각의 빛 속에서, 삶은 의식으로 보여집니다! 삶이 삶으로 여겨질 때, 삶은 삶 이상의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삶과 의식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같은 식으로, 개체(지바)와 우주적 존재(쉬바) 사이에도 실재적이고 본질적 차이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구분되지 않고 구분할 수 없는 무한한 의식으로 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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