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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수라구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10.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오, 라마여! 흥미로운 전설을 말할 터이니 귀 기울이십시오!

히말라야 산맥에 까일라사로 알려진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의 기슭에 헤마자따(노란머리)로 알려진 언덕 부족이 살았습니다. 수라구는 그들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힘이 세고 강력하고 현명했습니다. 그는 참나 지식을 타고났고 시와 문학에 아주 뛰어났습니다. 그는 피로를 몰랐습니다. 축복을 받을 이들에게는 축복을, 처벌을 받을 이들에게는 응징을 가하는 그만의 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을 하는 가운데 그의 영적인 눈은 점점 흐려지게 되었습니다.

수라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는다. 그들의 고통은 진실로 나의 고통이다. 나는 그들에게 풍요함을 주어야만 한다. 네가 풍요로워진다면, 내가 기뻐하는 것처럼 그들도 기뻐할 텐데, 그들의 즐거움은 나의 즐거움이다. 아아! 사람들이 겪는 축복과 처벌의 엇갈림, 나 자신도 즐거움과 고통이 번갈아 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수록, 왕은 매우 괴로웠습니다.

어느 날, 현자 만다뱌가 왕을 방문하러 왔습니다. 수라구는 그 현자에게 경배하며 물었습니다. "신이시여! 저는 저의 백성들에게 주는 축복과 처벌이 저에게로 되돌아오는 일로 인해 고통스럽습니다. 제발 저에게 공정한 눈을 주시어 편견과 불공정으로부터 저를 구하여 주십시오."

만다뱌가 말하였습니다.

모든 정신적 약함은 참나 지식에 확고히 뿌리박은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지혜에 근거를 둔 자기 노력으로 끝이 납니다. 마음의 고뇌는 참나의 본성에 대한 탐구에 의하여 제거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여야 합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기분, 양태, 감정은 무엇인가?' 그와 같은 탐구에 의하여, 당신의 마음은 확장됩니다. 당신이 그와 같은 탐구에 의하여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깨달을 때, 당신은 환희와 낙담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버립니다. 그럼으로써 그것에 대해 복잡하게 짜여진 기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당신은 지고의 평화를 경험합니다. 당신이 이러한 평온의 상태에 있을 때, 당신은 많은 부와 세속적인 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든 이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게 됩니다. 당신이 참나 지식을 얻었을 때 그리고 당신의 의식이 무한히 확장되었을 때, 마치 코끼리가 웅덩이에 들어가지 않는 것첢, 당신의 마음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작은 쾌락과 힘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작은 마음입니다.

지고의 비전을 얻을 때 마음은 모든 것을 버립니다. 그러므로 지고의 비전을 얻을 때까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단호하게 포기하여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저버리기 전에는 참나 지식이 얻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관점들이 버려질 때 얻어지는 것이 참나 지식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조차 진실입니다. 즉 장애물이 제거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참나 지식에 있어서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현명한 만다뱌가 이 말을 하고 떠났을 때, 수라구는 이렇게 명상했습니다.

'나'로 알려진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메루가 아니다, 메루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언덕 부족이 아니다, 게다가 언덕 부족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나의 왕국으로 불릴 분이다. 나는 그 개념을 버린다. 이제 그 수도는 잊혀졌다. 나는 이 도시도 아니고, 그것은 나의 것도 아니다. 그러한 개념 또한 버렸다. 심지어 아내, 아들들 등 가족 관계의 개념조차 나는 버린다.

이 몸을 탐구해 보자. 나는 몸과 살과 뼈와 같은 둔한 물질이 아니며, 피도 아니고, 행위 기관들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둔한 물질이다. 하지만 나는 지각력이 있다. 나는 쾌락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들은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이 지성과 감각 기관은 내가 아니다. 게다가 그것들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둔하고 나는 지각력이 있다. 나는 이 무지한 생과 사의 순환의 근원인 마음이 아니다. 나는 식별의 능력이 아니며 자아감도 아니다. 이것들은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개념들이다.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남은 것은 지각력이 있는 지바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관련되어 있다. 지식과 이해의 대상인 그것은 참나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인 대상을 버린다. 이제 남는 것은 의심의 기미가 전혀 없는 순수한 의식이다. 나는 무한한 참나이다. 왜냐하면 이 참나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창조자 브람마, 신들의 왕 인드라, 죽음의 왕 야마, 바람의 왕 바유와 같은 신들과 모든 헤아릴 수 없는 존재들이 이 무한한 의식에 묶여 있다.

이 전능한 의식의 힘(찌뜨 샥띠)은 객관적 대상의 결함으로부터 자유롭다. 비록 그것이 모든 존재 안에 있는 실재이지만, 그거은 존재와 비존재 너머에 있다. 그것은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모든 것 안에 있는 빛이다. 그것은 모든 형태와 변형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있다.  늘 그것은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존재라는 열네 국면들로 펼쳐져 있다. 심지어 이 우주에 관한 개념조차도 단지 이 의식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은 고통과 즐거움의 조각난 개념이다. 왜냐하면 이 전능한 의식의 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내가 깨달았을 때, 그것은 참나이다. 내가 미혹에 있을 때, 그것은 왕이 된다. 몸과 마음 등이 기능하는 것은 그것의 은총으로 인한 것이다. 온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곡조에 맞추어 춤추는 것은 그것의 힘에 의해서이다. 축복하고 벌주는 것에 대해 힘들어하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는 깨달았다. 나는 보이는 모든 것을 보았다. 나는 달성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고통과 즐거움, 행복과 슬픔, 축복과 처벌이라는 이 모든 것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브람만에 의해 퍼져 있다. 슬픔과 미혹에 대한 정당화는 어디에 있는가? 누가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것은 단지 존재하는 무한한 의식이다. 당신에게 경배하노라, 오 아름다운 신이시여! 무한한 참나에게 경배하노라.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그와 같은 탐구에 의해, 수라구는 지고의 의식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다시는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그는 마음의 평형 상태에 줄곧 남아 있으면서 그의 일을 행했습니다. 동정적인 그러나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 상반되는 쌍들을 피하지 않는 그리고 질투하지 않는, 지적이지도 않고 또 지적이지 않은 것도 아닌, 그는 독같은 비전과 내부의 평온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은 단지 의식의 다양한 나타남일 뿐이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해의 충만함에 도달했기에 그는 고통과 즐거움 모두에 평화로웠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상당 기간 동안 이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러고 난 뒤 그는 자연스레 그의 몸을 버렸습니다. 그는 무한한 의식과 하나됨을 얻었습니다. 오, 라마여! 깨달은 마음으로 세상을 다스리십시오.

라마가 물었다.

그러나 오, 스승이시여! 마음은 늘 불안한 상태에 있습니다. 완전한 평정의 상태에 어떻게 이를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하였다.

오, 라마여!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 대화가 바로 왕 수라구 현자와 왕 빠리가 사이에 있었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왕 수라구와 가까운 친구인 빠리가라 불리는 왕이 페르시아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빠리가의 영통에 엄청난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또한 고통을 없애려는 그의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는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빠리가는 고행을 하기 위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숲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말린 잎을 먹고 살았으며 그래서 빠르나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수천 년간의 고행과 명상 후에 그는 참나 지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유롭게 삼계를 누볐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전에 알고 지냈던 수라구 왕을 만났습니다. 이 두 명의 깨달은 왕은 서로에게 예를 갖추어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 후, 빠리가가 수라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현자 만다뱌의 가르침을 통해 참나 지식을 얻은 것처럼, 나는 고행을 통해 얻은 신의 은총에 의해 그거에 이르렀습니다. 제발 나에게 말해 주었으면 합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완전한 평정 상태에 있는지요? 당신의 백성들은 평화와 번영 가운데 있는지요? 당신은 냉정한 상태에 확고히 자리 잡았는지요?"

수라구가 답하였습니다.

신이 의도하는 바를 누가 참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과 나는 지금까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함께 있습니다. 신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당신의 성스러운 방문에 의해 진실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당신이 있음에 의해, 우리 모두는 죄와 결함에서 자유로워졌고, 당신의 모습 속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모든 번영이 느껴집니다. 선하고 성스러운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지고의 자유의 상태와 똑같은 것입니다.

빠리가가 말하였습니다.

오, 왕이시여! 평정에 확고히 자리 잡은 사람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행위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행위들과는 달리, 즐거움을 낳는군요. 당신은 사마디로 알려진, 마음에 어떤 생각과 개념이 없는 지고의 평화의 상태에 자리 잡았는지요?

수라구가 대답하였습니다.

성자여! 나에게 이렇게 물어 주십시오. 왜 생각과 개념들에서 자유롭게 된 상태만이 사마디라 불리는가? 진리를 아는 자라면, 그가 끊임없는 행위들을 하건 명상을 하건 간에, 그의 마음은 늘 사마디의 상태를 잃지 않습니다. 깨달은 이들은 비록 세상의 일들에 종사하고 있다 할지라도 사마디 상태에 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이들은 연화좌를 하고 앉아 있다 하더라도 사마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진리의 지식인 신은 모든 희망과 욕망을 마치 마른 풀잎인 양 태워버리는 불과 같습니다. 그거은 사마디라는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지 침묵으로 있는 것이 아닌 그것은 영구적인 만족, 있는 것에 대한 명확한 지각, 자아 없음, 상반되는 쌍들에 지배를 받지 않는, 무엇인가를 얻거나 거절하려는 소망과 갈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라 불립니다. 시간이 움직이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있듯이, 참나 지식의 사람은 참나를 잃지 않습니다. 물질적 대상이 영원히 물질인 것처럼, 참나 지식을 가진 현자는 영원히 참나 지식을 지닌 현자입니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 안에 항상 깨달아 있고, 순수하며, 평화에 있으며, 사마디의 상태 안에 있습니다. 어떻게 그거이 다른 것일 수 있겠습니까? 참나 아닌 어떤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시간과 모든 방법으로 참나만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으로 있는데, 사마디 아닌 다른 상태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이 사마디로 불리 수 있겠습니까?

빠리가가 말하였습니다.

오, 왕이시여! 확실히 당신은 완전한 사마디에 이르렀군요. 당신은 축복과 평화와 달콤함과 순수함으로 빛나며 광채가 납니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자아감, 욕망이나 싫음이 존재하지 않는군요.

수라구가 계속 말하였습니다.

오, 현자시여! 바라거나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아무것도 없스빈다. 이러한 것들이 대상들로 보이는 한, 그것들은 개념, 지각 그리고 관념들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얻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 때, 아무것도 포기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과 악, 크고 작음, 가치 있거나 가치 없는 것은 모두 바람직하다는 개념에 근거합니다. 바람직하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을 때, 다른 것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산, 바다, 숲, 남자와 여자, 모든 대상 등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에는 진실로 아무런 본질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에 대한 아무런 욕망이 없습니다. 아무런 욕망이 없을 때, 가슴에 지고의 평화가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세상 모습의 환영의 본질을 숙고하고, 서로 존경을 표한 후에, 수라구와 빠리가는 그들 각자의 의무에 관계하기를 계속했습니다. 이러한 지혜 가운데에 확고히 자리 잡고는 그대의 가슴으로부터 순수하지 못한 자아감을 버리십시오. 순수한 가슴이 모든 희열의 근원이며 모든 것이 쉽게 닿을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의식의 무한한 공간(차원)을 묵상할 때, 그것은 지고의 참나 안에 쉽니다. 안으로 향하게 하고 그리고 참나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무한한 의식에 전념하는 마음은 슬픔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대가 그대의 일상생활에 관련된 활동들에 종사하고, 그대 가운데 싫어하고 좋아하는 감정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대 내면의 존재는 결코 불순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빛만이 어둠을 제거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이 무지의 창조라는 지식만이 세상의 악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입니다. 일단 이 지식이 일어나면, 세상이 어떤 실재를 가지고 있다는 무지스러운 지각은 단번에 끝납니다. 따라서 비록 그대가 그대 스스로 활동에 종사할지라도, 그대는 그것에 집착되지 않습니다. 마치 물고기의 눈이 바닷물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듯이, 그대는 그것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습니다. 그대는 결코 다시는 미혹을 경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나 지식의 빛이 자신의 가슴 안에 밝게 빛나는 그날에만 사람은 진정으로 살게 됩니다. 모든 자신의 행위들은 그러한 날에 희열로 충만할 것입니다. 자신의 가슴 안에 진정한 초연과 또한 참나 지식을 일으키는 것이 친구, 경전 그리고 세월입니다. 오, 라마여! 세상의 모습이라는 이 무서운 수렁으로부터 그대의 지바를 구하십시오. 일단 그대가 그것에 관한 진리를 깨달으면, 그대는 결코 다시는 이 수렁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 라마여! 성스러운 현자들과의 교제는 그대에게 참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그와 같은 교제가 가능하지 않은 곳에는 살지 않아야 합니다. 현자들과의 교제에서, 구도자의 마음은 즉시 평온해질 것입니다. 자신을 높임으로써 무지의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부, 친구, 친척, 경전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참나 탐구에 몰두하고, 초연을 지닌 오로지 순수한 마음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바다를 건너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신체를 생명이 없는 둔한 실체로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은 참나 지식을 얻습니다. 무지와 자아감의 어둠이 떨쳐질 때, 참나 지식의 빛이 빛납니다. 참나 지식이나 완전한 깨달음의 그 상태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설탕의 달콤함이 단지 직접적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본성 또한 직접적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마음과 자아감이 멈출 때, 이 참나 지식은 일어납니다. 그것은 요가 수행으로 도달합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깊은 잠에 비길 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로 비교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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