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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비따하뱌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10.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현자 비따하뱌가 행한 탐구의 또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이 현자는 빈댜스라는 산맥이 있는 숲을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단계에서, 그는 미혹을 일으키는 세상사에 완전히 환멸을 느꼈습니다. 모든 잘못된 개념들과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운 명상을 통하여, 그는 세상을 닳아 해진 환영으로 여기고는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오두막으로 들어가 산봉우리처럼 확고한 태도로 연꽃 자세로 앉았습니다. 감각을 거두어들이고 마음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명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정한가! 비록 마음이 안으로 향해 있더라도, 마음은 안정되어 있지 않으며 곧 바다의 표면처럼 동요한다. 감각들에 묶여, 마음은 공처럼 되풀이해 튀어 오른다. 감각들에 의해 자양분을 얻은 마음은 자신이 포기하였던 바로 그 대상들을 잡는다. 그리고는 미친 사람처럼 억제하고 있던 대상들을 향하여 달려 나간다. 마음은 원숭이처럼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뛴다.

나는 마음을 분산시키는 오감의 특징을 이제 생각해 볼 것이다. 오, 감각들이여! 도대체 참나 지식을 얻을 시간이 당신에게 아직 도래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쾌락을 추구한 후에 오는 슬픔을 기억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 공허한 흥분을 포기하라. 참으로, 당신은 둔하고 지각이 없다. 당신은 마음이 대상적인 경험에 이르기 위하여 밖으로 흐르는 통로이다. 나는 당신의 주인이고, 나는 의식이다. 나만이 순수한 지성으로서 이 모든 것을 한다. 오, 감각이여! 당신은 거짓이다. 당신과 참나인 의식 사이에는 도무지 아무 관련이 없다. 사람들이 햇빛 안에서 다양한 행동들을 하는 것처럼, 아무런 의지가 없는 의식의 빛 안에서 당신은 기능한다. 오, 감각들이여! 당신은 현명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현명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지 말라. 당신이 거짓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은 단지 슬픔만을 오게 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오로지 의식만이 있다. 오, 사악한 마음이여!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대단한 원기 회복의 물질처럼 보이는 '나는 행위자다.', '나는 향락자다.'라는 것은 사실 치명적인 독극물이다. 오, 마음이여! 미혹당하지 말라. 진실로 당신은 어떤 것의 행위자도 아니고 경험자도 아니다. 당신은 둔하고 당신의 지성은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얻어진다. 쾌락이 어떻게 당신과 관련되었는가? 당신 자신은 존재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당신은 관련을 가질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나는 오로지 순수한 의식이다.'를 깨닫는다면, 그때 당신은 정말로 참나이다. 당신이 무한하고 조건이 없는 의식일 때 어떻게 당신 안에서 슬픔이 일어나는가?

비따하뱌는 계속하였습니다.

오, 마음이여! 나는 당신이 행위자도 경험자도 아니라는 진리를 당신에게 친절하게 알려 줄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둔하다. 어떻게 돌로 만들어진 조상이 춤을 출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의 지성이 무한한 의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당신은 그 깨달음 안에 오래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성 혹은 다른 것의 에너지로 행해진 것은 후자에 의해서 행해졌다고 생각한다. 낫은 농부의 에너지로 수확한다. 그러므로 농부가 수확자라고 말해진다. 마찬가지로, 자르는 것이 칼일지라도 칼을 휘두른 사람이 살인자다. 오, 마음이여! 당신은 둔하다. 당신의 지성은 무한한 의식으로부터 얻어진다. 그 참나 혹은 무한한 의식은 그것 자신에 의해 그것 자신을 알며, 그것 자신에 의하여 그것 자신 안에서 그것 자신을 경험한다. 신은 계속해서 당신이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러므로 현명한 이들은 수많은 방법으로 무지한 자를 가르쳐야 한다. 참나의 빛은 의식으로 혹은 지성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 자체가 이제 마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당신은 즉시 녹아 사라질 것이다.

오, 어리석은 자여! 당신은 참으로 무한한 의식인데, 왜 슬퍼하는가? 무한한 의식은 동시에 어디든지 있고, 그것이 전부이다. 당신이 그것을 깨달을 때, 당신은 전부가 된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 동질의 존재 안에서 '나' 그리고 '당신'이라는 다양한 개념들이 존재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만약 당신이 참나라면, 그때는 참나만이 존재하며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둔하지만, 그러나 참나와 다르다면, 그때도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참나 혹은 무한한 의식만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의식과 둔한 물질이 아닌 제3의 것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

오, 마음이여! 그러므로 당신은 행위자도 경험자도 아니다. 현명한 이들은 무지한 이들과 대화할 때 가르치기 위한 수단으로 마음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사실상 그 수단은 실재하지 않으며 둔하다. 참나만이 실재이다. 만약 농부가 낫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수확할 수 있겠는가? 그 칼은 죽이는 힘도 갖지 못하고 있다. 오, 마음이여! 당신은 행위자도 경험자도 아니다. 그러므로 슬퍼하지 말라. 신(의식)은 당신과 다르다. 그러므로 신을 위해 슬퍼하지 말라! 그는 행하거나 행하지 않음으로 무엇을 얻지 않는다. 그만이 모든 곳에 퍼져 있다. 그 이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그가 무엇을 하겠으며 무엇을 갈망하겠는가?

꽃과 향기의 관계와 달리, 당신은 참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관련은 비슷한 성질을 가진 두 독립적 존재가 하나 되기를 갈망할 때만 존재한다. 오, 마음이여! 당신은 언제나 동요하고 있다. 참나는 언제나 평화에 있다. 따라서 당신과 둘 사이에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사마디의 상태 또는 전적인 평정의 상태로 들어가면, 하나라거나 많다는 개념이 없이, 다양성으로부터 생긴 흔들림이 없이, 의식 안에 확고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무한한 존재들로서 빛나는 무한한 의식인 하나의 참나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따하뱌가 말하였습니다.

오, 감각들이여! 당신이 무지의 어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나의 충고의 빛에 의해 모두 쫓아 버려졌다고 생각한다. 오, 마음이여! 외형의 모습으로 당신이 나타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슬픔을 위함이다! 당신이 존재할 때, 어떻게 하여 헤아릴 수 없는 존재들이 미혹당하고 그래서 행운과 불운, 질병, 노화와 죽음을 가진 슬픔의 바다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라. 어떻게 탐욕이 모든 좋은 성질을 부식시키고 파괴하는지를 보라. 어떻게 탐욕과 갈망이 어지럽게 하고 에너지를 흩뜨리는지를 보라.

오, 마음이여! 당신이 존재하기를 멈추었을 때, 모든 좋고 고귀한 자질은 꽃을 피운다. 거기에는 평화와 가슴의 순결이 있다. 사람들은 의심과 실수로 넘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모든 것의 행복을 촉진시키는 우정이 있다. 걱정거리와 근심들은 말라 버린다. 무지의 어둠이 버려질 때, 내면의 빛이 밝게 빛난다. 바람이 바다의 표면을 세게 흔드는 것을 멈출 때 바다가 고요해지는 것처럼, 마음의 산만함과 고민은 끝이 난다. 안에서 참나 지식이 일어난다. 그리고 진리의 깨달음은 세상 환영의 지각을 끝낸다. 무한한 의식은 홀로 빛난다. 갈망으로 가득 찬 무지한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희열의 경험이 있다. 심지어 새로운 순들이 불에 탄 잎사귀로부터 일어날지도 모르듯이, 새로운 삶이 이것으로부터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환영의 혼란을 피한 그는 항상 참나 지식 안에서 휴식을 취한다. 오, 마음이여! 그러한 것이 당신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오는 결실들이다. 오, 마음이여! 무수한 다른 것들이 있다. 오, 마음이여! 당신은 우리의 모든 희망과 갈망의 지주이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멈출 때, 이 모든 희망과 갈망은 끝난다. 당신은 실재와 하나가 되거나 독립적 실체가 되기를 멈추는 것 중에서 어느 하나를 지금 선택할 수 있다.

오, 마음이여! 참나와 다르지 않고 참나와 동일한 것으로의 당신의 존재는 행복에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오, 마음이여! 당신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깨달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라. 확실히, 행복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다. 만약 당신이 내적인 존재 혹은 의식으로 존재한다면, 누가 당신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 것인가? 그러나 당신은 진정한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행복은 착각이다. 당신은 진정한 실재가 아니었다. 당신은 무지와 미혹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당신으 본질과 감각들과 참나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당신은 한 번 더 존재하기를 멈춘다. 이 탐구를 하지 않는 한 당신은 존재한다. 탐구의 정신이 일어날 때, 완전한 평정 혹은 동질성이 있다. 당신은 지혜와 식별의 부재인 무지로부터 태어났다. 이 지혜가 일어날 때, 당신은 존재하기를 멈춘다. 그러므로 나는 지혜를 경외한다! 오, 마음이여! 당신은 많은 방법을 통하여 일깨워진다. 이제 당신이 마음의 거짓된 특성을 잃었으므로, 당신은 이제 모든 한계와 조건화로부터 자유로운 지고의 존재 혹은 무한한 의식으로 존재한다. 무지에서 일어났던 마음은 지혜 안에서 죽는다. 오, 착한 마음이여! 당신 자신에도 불구하고 이 탐구가 당신 안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확실히 희열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참으로 마음은 없다. 마음은 없다. 참나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만이 있다. 그 외에는 없다. 나는 그 참나이다. 그러므로 우주에서 나와 다른 것은 없다. 나는 오로지 나의 활동적인 상태가 우주로서 나타난다. 나는 그 나타남이 있게 하는 무한한 의식이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이 탐구를 한 후에, 성자 비따하뱌는 완전한 고요(사마디)의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심지어 그의 쁘라나조차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의식은 안으로 고정된 것도 아니고 외부의 물체들을 자각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은 코 주위에 부드럽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꼿꼿이 세워져 있어서, 그는 마치 살아 있는 조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그의 육체를 포기하지 않고 300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의 사마디는 수많은 자연의 소동에 의해서도, 인간과 인간 이하의 존재들에 의해서도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는 300년을 한 시간처럼 보냈습니다. 의식 안에 반사된 육체는 의식에 의해서 보호되었습니다.

이 기간 이후에, 그의 마음은 그의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개념이 그 안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그는 까일라사 산에서 현자로서 100년을 지냈습니다. 100년 동안 그는 신인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다섯 세계 순환의 주기 동안 하늘의 왕 인드라였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어떻게 인드라와 같은 신들의 시간표를 간섭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오, 신성한 분이시여!

바시슈타는 대답하였다.

무한한 의식의 에너지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무한한 의식은 좋아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좋아하는 것은 무엇에든지 나타납니다. 무엇이든지 어디든지 어떤 방법이든지 이 의식이 질서를 상상하면, 그것은 그렇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모든 조건화로부터 자유로운 그 자신의 가슴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무한한 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개념들이 의지 없이 그것 안에 분명히 일어났습니다. 이후에, 그는 한 시대 동안 쉬바 신의 수행원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해방된 현자 비따하뱌는 경험하였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만약 그러한 것이 해방된 현자인 비따하뱌의 경험이라면, 그것은 마치 속박과 자유가 현자에게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해방된 현자들에게 이 세상은 순수, 평화 그리고 완전을 지닌 채 무한한 자인 브람만으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속박과 해방이 그들에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따하뱌가 무한한 의식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의 경험들을 경험합니다. 지금조차도 그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만약 현자의 창조가 허구이고 상상의 것이라면, 어떻게 창조 안에 있는 존재들이 의식적이고 감각적이게 되었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만약 비따하뱌의 창조가 허구였다면, 이것도 그렇습니다. 그것과 이것은 둘 다 순수한 무한한 의식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마음의 미혹의 결과입니다. 진실로 그 창조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것 또한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브람만만이 시간의 세 주기 동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 진리가 깨달아질 때까지 세상은 견고한 실재로 보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부디 나에게 어떻게 비따하뱌가 동굴에서 그의 몸체를 소생시켰는지를 말하여 주십시오!

바시슈타가 계속했다.

그 현자는 무한한 의식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따하뱌라고 불리는 마음이 무한한 의식의 속임수였음을 알았습니다. 쉬바 신의 종으로 있는 동안에, 그는 비따하뱌의 육체를 보는 것에 대하여 한때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였을 때, 그는 그 자신의 의식 안에서 그가 가졌던 모든 화신들을 보았습니다. 화신들의 몇은 끝에 와 있고, 다른 것들은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따하뱌로 알려져 있는 몸이 진흙 속의 벌레와 같이 가라앚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그것을 보자, 그는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나의 이 몸은 생명의 힘이 없다. 그러므로 기능할 수 없다. 나는 지금 태양의 궤도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삥갈라라고 알려져 있는 태양 에너지의 도움으로 나는 그 몸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혹은 내가 그것을 버릴까? 혹은 비따하뱌의 육체를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또 한편으로는, 이 몸을 버리거나 살아 있어도 나에게는 동일하다. 이 육체가 분해되지 않고 원소들 안에 되돌아가는 것을 본 이상, 나는 그것 안으로 들어가 잠시 동안 기능할 것이다.'

그 다음에 현자의 미묘한 몸은 태양의 궤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태양의 궤도 안으로 현자가 들어온 목적을 반사하여, 태양은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자신의 에너지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 결과 현자의 미묘한 몸은 태양에게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태양의 에너지가 길을 인도하였으며 그리고 태양에 의해 명령된 대로, 그 에너지는 태양의 궤도로부터 떨어져 내려온 뒤에 빈댜의 영역으로 들어갔습니다. 현자의 시신을 들어 올리려고, 그것은 시신이 진흙에 덮여 눕혀진 곳에 내렸습니다. 그것을 따라, 비따하뱌의 미묘한 몸 또한 그 시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시신은 즉시 소생되었습니다. 그때 비따하뱌는 돌아가려고 인사를 하는 태양 에너지 삥갈라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삥갈라는 태양의 궤도로 되돌아갔고, 현자는 그의 몸을 깨끗이 씻기 위해 호수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몸을 깨끗이 한 후 태양을 숭배하고, 현자는 전처럼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친절함, 균형 잡힌 마음, 평화, 연민 그리고 기쁨을 지닌 깨달은 삶을 살았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저녁에 현자는 깊은 명상을 하기 위하여 잘 아는 숲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갔습니다. 그는 '나는 감각의 허위성을 이미 깨달았다. 그들에 관련한 더 이상의 탐구는 모순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있다.'와 '이것이 없다.'와 같은 헛된 공상을 모두 포기하고 그는 다시 결가부좌로 앉았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나는 완전한 평정의 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 깨어나라. 나는 마치 자는 것처럼 있다. 의식의 초월 상태에 자리 잡고서, 나는 육체가 죽을 때까지 존재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그는 6일 동안 명상을 했습니다. 그 날들은 마치 순식간인 듯 흘러갔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해방된 현자로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그는 기쁨과 슬픔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때때로 그는 그의 마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습니다. '오, 마음이여! 당신이 지금 균형이 잡힌 상태에 있으므로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라! 항상 균형 잡힌 상태로 머물러라.'

그는 그의 감각들을 다음과 같이 부르곤 했습니다. '오, 감각들이여! 참나는 당신에게 속하지 않으며, 당신도 또한 참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당신 모두가 죽기를! 당신의 갈망들은 정지되었다. 당신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밧줄을 지각하지 못함으로 뱀에 대한 잘못된 지각이 일어나는 것처럼, 당신 존재의 실수는 참나에 대한 무지로부터 일어났다. 이런 모든 실수들은 비현명함의 어둠 속에 존재한다. 지혜의 빛 속에서는 그것들이 사라진다.

오, 감각들이여! 당신은 참나와 다르며, 행위의 행위자는 이 모든 것과 다르며, 경험들의 경험자도 무한한 의식도 역시 이 모든 것과 다르다. 무엇이 누구의 잘못이며, 어떻게 그것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나무들은 숲 속에서 자라고, 여러 섬유들로 밧줄이 만들어지고, 그 밧줄로 목재들이 묶이고, 대장장이가 도끼를 만드로, 이 모든 것을 가지고 목공은 집을 짓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집을 짓는다. 까마귀가 야자나무에 앉을 때 잘 익은 야자열매가 우연히 떨어지면 무지한 사람들은 그 까마귀가 야자열매를 떨어지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아무런 관계없이 우연적으로 일어난다. 누가 이 모든 것을 비난할 것인가? 이 진리가 알려질 때, 실수는 실수로 남아 있고, 지식은 선명한 지식이 되고, 실재는 실재가 되고, 실재하지 않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파괴된 것은 파괴되었고, 남는 것은 남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 지식에 자리 잡은 그 현자는 오랫동안 이 세상에 살았습니다. 그는 무지와 실수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감각의 대상들과 접촉할 때마다, 그는 명상의 평화에 들어가서 참나의 희열을 즐겼습니다. 그의 가슴은 구하지 않은 모든 경험이 그에게 올 때조차도 유혹과 혐오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한번은 현자 비따하뱌는 그의 육체를 포기하고 결코 화신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는 사햐 산 위의 동굴에 가서 결가부좌로 앉았습니다.

비따하뱐느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오, 유혹이여! 당신의 유혹의 힘을 포기하라. 오, 마음이여! 미움을 포기하라. 당신은 나와 같이 충분히 오랬동안 놀았다. 오, 쾌락이여! 당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당신은 여러 해 동안 참으로 나를 떠받쳐 왔고 심지어 나에게 참나를 잊게 만들었다. 오, 슬픔이여! 당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당신은 참나 지식을 탐구할 때 나를 격려했고, 이 참나 지식을 얻은 것은 당신의 은총이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참으로 기쁨을 주는 자이다.

오, 나의 친구 육체여! 나의 영원한 참나 지식의 거주지에 가도록 허락하라. 그러한 것은 참으로 자연의 과정이다. 모든 사람은 조만간에 육체를 포기해야만 한다. 오, 나의 친구 육체여! 당신은 오랫동안 나와 관계를 맺어 왔다. 나는 지금 당신을 포기한다. 당신 스스로 참나의 실재에 나를 훌륭하게 인도함으로 이 분리를 초래하였다. 놀랄 만하다! 내가 참나 지식을 얻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은 당신 자신을 파괴하였다.

오, 어머니 갈망이여! 내가 갈 수 있도록 해 달라. 내가 지고의 평화의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이제 당신은 시들기 위해 홀로 남아 있다. 오, 탐욕이여! 당신을 정복하기 위하여, 나는 당신의 적 초연과 친해졌다. 나를 포기하라. 나는 자유로 나아간다. 나를 축복하라. 오, 미덕이여! 당신은 나를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였기에, 당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통과 처벌의 원인인 결점에 경의를 표한다. 내가 긴 시간 동안 괴로워하였던 것과 지금 나에게 보이지 않는 미혹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마디(명상)의 동료인 오, 동굴이여! 당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당신은 내가 세상 존재의 고통으로 괴로워할 때 나에게 피난처를 주었다. 오, 지팡이여! 당신은 또한 나의 친구였고 뱀 등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구덩이 등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나를 구해 낸 당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 육체여! 당신을 이루고 있는 원소들로 되돌아가라. 목욕 같은 활동에 경의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활동에 경의를. 나의 동료였던 쁘라나에게 경의를. 내가 이 세상에서 행하였던 것이 무엇이든지 당신을 통하여, 당신과 더불어, 당신의 에너지 때문에 하였다. 지금 내가 무한한 의식인 브람만에 들어갈 것이기에 제발 당신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 가라. 이 세상에서 함께 있는 모든 것은 어느 날엔가 헤어져야 한다. 오, 감각이여! 당신 자신의 근원 즉 우주의 원소들로 돌아가라.

나는 원료 없는 등불처럼 옴 소리의 정점에 의하여 나타나는 참나에 의해 참나로 지금 들어갈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활동과 경험과 지각의 모든 생각들로부터 자유롭다. 나의 가슴은 옴의 공명에 의해 나타난 평화에 자리 잡는다. 환영과 실수는 지나갔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하였다.

마음 안에 있는 모든 갈망은 아주 조용해졌고, 비이원의 의식의 차원에 자신의 기초를 잘 세운 현자 비따하뱌는 신성한 옴을 소리 냈습니다. 옴의 심오한 의미를 명상하면서, 그는 실재를 현상과 혼동하였던 실수를 지각했습니다. 모든 개념과 지각의 대상들을 포기함으로 그는 삼계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도공의 물레가 휴식할 때처럼 매우 조용해졌습니다. 옴을 소리 냄으로 그는 바람이 냄새를 분산시키는 것처럼, 감각 기관들과 그것들의 대상들이라는 거미집을 쫓아 버렸습니다. 이후에, 그는 무지의 어둠을 관통하였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내적인 밝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즉시 포기하엿습니다. 그는 밝음과 어둠 둘 다를 초월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생각의 모습의 자취만 남았습니다. 이것 역시 현자는 마음을 통하여 눈의 반짝임으로 산산조각냈습니다. 이제 현자는 순수하고 무한한 의식에 남아 있었으며, 조금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갓 태어난 갓난아기의 의식 상태와 같았습니다. 그는 의식의 모든 대상과 심지어 의식의 가장 가벼운 움직임조차도 버렸습니다. 그는 '빠슈얀띠'라는 상태를 건너 깊은 수면의 의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그 너머로 계속 갔습니다. 그래서 초월의 즉 뚜리야의 의식에 도착했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있다'와 '있지 않다'이며, '어떤 것'과 '어떤 것이 아닌 것'이며, 빛과 어둠입니다. 그것은 비의식과 대상 없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부정 즉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에 의해서만 지적될 수 있습니다. 그는 설명 너머에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상태는 여러 관점들을 가지고 있는 신비가들에 의해 공, 브람만, 의식, 샹끼야 학파의 뿌루샤, 요가 수행자의 이슈와라, 쉬바, 시간, 아뜨만 혹은 참나, 비자기, 중도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경전적인 관점들에 의해 진리로서 자리 잡은 그 상태입니다. 그 상태 안에 현자들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채 있습니다.

따라서 현자가 무한한 의식과 하나가 되었을 때, 육체는 분해되고 원소들은 그들 각각의 근원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오, 라마여! 현자 비따하뱌의 상서로운 이야기를 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을 반추하여 보십시오. 내가 그대에게 말하였던 것은 무엇이나 그리고 내가 이제 그대에게 말할 것은 무엇이나 직접적인 지각, 직접적인 경험과 깊은 명상으로 태어납니다.

오, 라마여! 이것을 명상하십시오. 그래서 지혜를 얻으십시오. 해방은 오직 지혜와 참나 지식에 의하여 얻어집니다. 오직 그러한 지혜를 통하여 슬픔 너머로 가고 무지를 파괴하고 그리고 완점함에 이릅니다.

비따하뱌라고 묘사된 것은 오직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개념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고, 그래서 그대가 있습니다. 이 모든 감각과 온 세상은 다름아닌 마음입니다. 오, 라마여! 그밖에 무엇이 세상일 수 있겠습니까?

라마는 물었다.

신이시여! 왜 우리들은 이 많은 해방된 현자들이 지금 하늘을 횡단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오, 라마여! 하늘을 나는 것과 여러 힘들은 어떤 존재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는 특수한 능력들과 재능들은 그런 존재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참나 지식을 가진 현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중을 나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능력들은 어떤 물질에 의해서 또는 어떤 수행에 의해서 해방이나 참나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개발됩니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있는 참나 지식의 사람에게는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쾌락을 추구하면서, 무지로 얼룩진 이 힘들을 획득한 이들은 확실히 무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나 지식의 현자들은 그러한 과정을 택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든 진리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든, 공중을 나는 것과 같은 힘들은 어떤 수행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생깁니다. 그러나 참나 지식의 현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얻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수행은 그러한 것이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이 수행의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오, 라마여! 독이 모두를 죽이고, 술이 모두를 취하게 하듯이, 이 수행들은 하늘을 나는 등의 능력을 가져옵니다. 지고의 참나 지식을 얻은 현자들은 이러한 것들에 조금의 흥미도 지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갈망들로 가득 찬 사람들에 의해서만 얻어집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어떤 것에 대한 조금의 갈망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참나 지식은 가장 큰 이익입니다. 어떻게 참나 지식을 지닌 현자들이 그밖에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을 마음에 지니겠습니까? 그러나 비따하뱌의 경우에, 그는 이런 힘들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런 힘들을 구하지 않았는데도 그것들이 그에게 왔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비따하뱌가 동굴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있었을 때 벌레들과 해충들이 그의 육체를 파먹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비따하뱌가 첫 단계에서 육체를 분리시키는 해방을 이루지 못했습니까?

바시슈탄느 대답했다.

오, 라마여! 무지한 사람의 육체는 마음의 조건화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조건화를 가지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해체를 위한 힘이 없습니다. 게다가, 모든 존재의 마음은 그것이 접촉하게 되는 대상의 성질들에 반응합니다. 폭력적인 성품을 지닌 생명체가 완전히 평온한 사람과 만날 때, 비록 만남이 없어지면 원래의 과격한 상태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그 생명체는 일시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해집니다. 그러므로 비따하뱌의 육체 역시 해를 입지 않은 상태로 있었습니다. 의식은 모든 곳에 퍼져 있기 때문에 흙, 나무 등과 같은 물질적인 재료들에도 적용됩니다. 비따하뱌의 의식이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았기에 그의 몸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 안에 쁘라나의 움직임이 조금도 없었으므로, 심지어 분해조차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현자는 독립적이며 그리고 살거나 육체를 버리는 것에 자유롭습니다. 그가 한때는 육체를 포기하지 않았디만 나중에 포기한 것은 순전히 동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업 등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업 너머에, 운명 너머에 그리고 마음의 조건화 너머에 있습니다. 까마귀가 잘 익은 야자열맬르 떨어뜨리는 것처럼 순전히 우연적인 것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비따하뱌의 마음이 탐구의 수행을 통하여 무집착하게 되고 완전한 자유로움을 얻었을 때, 우정 등과 같은 고귀한 자질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마음이 절대자인 브람만 안에 녹아 사라졌을 때, 우정과 같은 자질이 누구 안에서 일어납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마음의 죽음'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형상이 남아 있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형상이 끝나는 곳입니다. 전자는 그 현자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일어나고, 후자는 그가 육체에서 분리될 때 일어납니다. 마음이라는 존재는 고통의 원인어며, 그것의 중지는 즐거움을 가져옵니다. 마음이 그것 자신의 조건화에 너무 조건화되어 있거나 관련되어 있을 때, 계속적인 탄생을 가져옵니다. 그러한 마음은 불행을 초래합니다. 시작이 없는 자질들을 '나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 지바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참나 지식을 가지지 않고 있는 마음 안에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불행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한, 슬픔의 중지는 없습니다. 마음이 끝날 때, 세상의 나타남도 존재하기를 멈춥니다. 마음은 불행의 씨앗입니다.

이제 어떻게 마음이 존재하기를 그치는지 말하겠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마음의 절대적인 평정에 있는 사람을 움직이지 못할 때, 그의 마음이 죽었다는 것을 아십시오. '이것은 나다.'와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개념들이 그의 의식을 제한시키기 위하여 일어나지 못할 때, 그의 마음은 죽은 것입니다. 재앙, 빈곤, 의기양야, 자긍심, 둔함, 흥분이라는 개념들이 그에게서 생기지 않을 때, 그의 마음은 죽은 것이며,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해방된 것입니다.

마음의 본성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죽을 때 맑음과 고귀한 자질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현인들은 순수한 마음을, 마음이 죽은 해방된 현자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완전한 맑음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해방된 현자의 마음은 우정 등과 같은 고귀한 자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해방된 현자 안에 있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선함의 존재가 순수(사뜨바)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또한 '형상이 남아 있는 곳에서으 마음의 죽음'이라고 불립니다.

형상조차 사라지는 마음의 죽음은 육체와 분리된 현자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경우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 안에는 자질들과 그것들의 부재도, 미덕들과 그것들의 부재도, 빛과 어둠도, 아무런 개념들도, 아무런 조건화도, 존재와 비존재도 없습니다. 그것은 지고의 정적과 균형의 상태입니다. 마음과 지성 너머로 일어선 그들은 지고의 평화의 상태에 이릅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무엇이 마음으로 알려진 이 무서운 나무의 씨앗입니까? 그리고 무엇이 그 씨앗 중의 씨앗입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라마여! 이 세상의 나타남을 위한 씨앗은 선과 악의 개념들과 그것의 생각들을 가지고 육체 안에 있습니다. 그 육체 역시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희망들과 갈망들의 방향으로 변함없이 흐르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또한 존재와 비존재라는 개념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슬픔의 갸념들을 있게 하는 창고입니다. 세상의 나타남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꿈의 상태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릇들이 진흙의 변형이듯이, 세상으로서 여기에 보이는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확대된 것입니다.

무수한 개념과 생각들을 나르는 마음으로 알려진 이 나무에는 두 가지 씨앗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력(쁘라나)의 움직임이고, 둘째는 고집센 공상입니다. 적당한 경로를 통해 쁘라나가 움직이면, 의식 속에 움직임이 일어나 마음이 생깁니다. 게다가 그것은 쁘라나만의 움직임입니다. 마음이 그것을 보거나 지각하게 되면, 그것은 하늘의 푸름만큼이나 실재하는 세상의 나타남으로 보입니다. 쁘라나 움직임의 정지는 또한 세상 나타남의 중지입니다. 어디든지 있는 의식은 쁘라나의 움직임에 의해서 '깨어납니다.' 만약 이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거기에 지고의 선이 있습니다.

의식이 '깨어나' 대상들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생각들이 일어나면 거기서부터 슬픔이 일어납니다. 다른 한편으로, 급히 드는 잠처럼 의식이 그 자신 속에 머무른다면, 그때 그 사람은 가장 바람직한 지고의 상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가 자신의 심리적인 바탕인 개념들과 생각들의 안에서 쁘라나의 움직임을 억제하거나, 또는 의식 안에서 동질성의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그대는 의식의 태어나지 않은 상태를 깨달을 것입니다. 이 동질성이 깨어지고 의식이 다양성을 경험하여 다양성이 일어날 때, 수많은 심리적인 상황들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의 정지를 가져오기 위하여, 요가 수행자는 생명력의 움직임의 억제인 쁘라나야마, 명상, 그리고 다른 옳고 적합한 방법들을 수행합니다. 위대한 요가 수행자들은 마음의 고요와 평화 등의 성취를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쁘라나야마라고 여깁니다.

나는 직접적인 경험을 가지고 태어난 현자들에 대한 다른 견해를 그대에게 얘기할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공상이나 거짓 상상에 매달리는 강한 집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공상에 완고하게 매달림으로 그래서 진리의 본성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포기했을 때, 그 사람은 그 공상으로 대상들을 이해합니다. 그러한 이해를 조건화 혹은 제한이라 합니다. 그러한 공상을 지속적으로 강하게 탐닉할 때, 이 세상의 나타남이 의식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 자신의 조건화 속에 갇힐 때, 자기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 실재라고 생각하여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상과 조건화의 강렬함 때문에, 그는 그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오로지 세상의 환영을 지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이렇게 지각이 전도된 것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잘못된 지각 안에서 굳혀질 때, 그것은 되풀이되는 출생과 노화 그리고 죽음을 위한 씨앗이 됩니다.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개념들이 일어나지 않을 때, 마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지고의 평화가 있습니다. 개념, 상상, 생각과 기억들만이 마음의 형상을 구성합니다. 이것들이 없을 때, 어떻게 마음이 존재합니까?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에 자리 잡은 사람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명상할 때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각할 때, 마음은 마음 없음이 됩니다. 심리적인 조건화나 제한이 많지 않아서 마음이 맑아졌을 때, 그는 해방된 현자가 됩니다. 심지어 주어진 힘이 사라진 후에도 도공의 물레가 회전하는 것처럼, 그 현자는 확실히 살아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시간들 때문에 그는 살아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경우는 말하자면, 그 씨앗이 기름에 튀겨졌고, 세상의 환영으로 싹트지 않을 것입니다. 그 육체가 떨어질 때, 그는 무한한 자 안으로 흡수됩니다.

이 세상 환영을 위한 두 씨앗 즉 쁘라나의 움직임과 공상에의 집착 중에, 만약 하나가 제거되면 다른 것도 떠납니다. 두 개가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세상 환영을 만들고 마음은 자신의 조건화 안에서 쁘라나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집니다. 또한 쁘라나의 이 움직임은 마음의 조건화와 공상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처럼 이 악순환은 완성됩니다. 하나는 다른 것을 공굽하고, 하나는 다른 것을 활동하도록 합니다. 움직임은 쁘라나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의식 안에서 움직일 때,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때 그 조건화는 쁘라나를 움직이도록 합니다. 하나가 제지될 때 둘 모두 사라집니다.

심리적인 조건화나 제한만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며 무지의 바탕입니다. 그러나 심리적인 조건화나 제한이 끝나면, 마음은 그것과 더불어 즉시 끝납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쁘라나의 움직임의 정지에 의하여, 마음은 마음 안에 있는 세상을 지각하지 않고 정지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라마여! 지식과 경험의 대상이라는 개념은 쁘라나의 움직임과 공상에 집착을 있게 한느 씨앗입니다. 왜냐하면 쁘라나의 움직임과 마음의 조건화가 일어나는 가슴에서만 그런 경험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경험을 하고자 하는 갈망을 포기할 때, 이것들은 즉시 멈춰집니다.

물론 내재하고 있는 의식은 경험을 위한 이 갈망의 씨앗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식이 없이는 그러한 경험에 대한 갈망이 전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식에는 내부든 외부든 경험의 대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 안의 생각의 움직임 때문에 그것 자신을 대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것은 의식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나 또는 외국으로 여행하는 꿈을 꾸듯이, 이 의식도 영리하기에 대상으로 자기 자신을 경험합니다. 그러한 경험이 일어날 때, 이 세상의 나타남이 있습니다. 오, 라마여! 이 진리가 깨달아질 때 환영은 존재하기를 멈춥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은 다름 아닌 무한한 의식이고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것은 무한한 의식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이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래서 자신의 눈을 정화시킵니다. 깨끗하지 못한 눈은 세상을 지각합니다. 깨끗해진 눈은 무한한 의식을 지각합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해방입니다. 오, 라마여! 그러므로 경험하려는 갈망을 없애도록 노력하십시오. 게으름을 없애십시오. 모든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십시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어떻게 이 둘을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제가 모든 경험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동시에 비활동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여기에 있는 어떤 것도 갈망하거나 희망하지 않는 사람, 활동하지 않음에 휴식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지바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비활동적이지도 않고 경험을 하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끊임없이 활동을 하지만, 대상들에 대한 경험과 지각을 향하여 마음이 쏠리지 않는 사람은 비활동적이지도 않고 어떤 것을 하거나 경험하지도 않습니다. 대상적인 경험은 그의 가슴에 전혀 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이 비활동적이지 않은 사람은 여기 그리고 지금에 해방된 현자입니다.

모든 조건화로부터 자유로운, 변경되지 않은 의식의 상태에 완전히 자리 잡은 요가 수행자는 어린이나 바보처럼 머무릅니다. 하늘의 푸름처럼 그의 안에는 희열이 있습니다. 이 희열은 경험이 아니라 의식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혼란으로 작용하지 않고 의식 안에 통합된 채로 있습니다. 모든 경험들로부터 자유가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요가 수행자는 항상 행위에 관여합니다. 그러므로 나탸함으로부터 자유가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라마여! 아무리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이 어렵더라도, 그것을 위해 노력하여 이 슬픔의 강을 건너십시오.

경험을 하고자 하는 이 갈망은 의식 안에서 생각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생각의 반복으로 그것은 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 안에서 환영을 창조한 후에, 의식은 그 자신을 그것 자신의 해방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의식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나 물질화됩니다. 누에고치를 가진 누에처럼, 그것은 스스로를 구속하여 슬픔에 빠져 있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해방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성은 무한한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오, 라마여! 우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순수한 의식입니다.

순수한 존재만이 이 무한한 의식을 위한 씨앗입니다. 그것들은 햇빛과 그것의 광선처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순수한 존재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양성이며, 다른 하나는 단일성입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너'로 기술되는 것은 다양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다양성이 포기될 때 그리고 순수한 존재가 있을 때, 그것은 단일성으로 간주됩니다. 다양성이 없어지고 단일성이 우세할 때, 경험 역시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단일성은 '사물'도 아니고 경험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단일성은 영원하고 불멸합니다.

오, 라마여! 그러므로 모든 구분을 버리십시오. 시간과 물질이라는 의미의 그런 구분을 말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존재 안에서 휴식하십시오. 이 구분들은 개념들을 일어나게 합니다. 그것들은 순수한 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들은 그와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구분의 묵상은 비전의 순수로 아나가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 안에 아무런 구분이 없는 오로지 순수한 존재는 우리가 지금까지 토론해 왔던 이 모든 것의 씨앗입니다. 그리고 이 순수한 존재를 위한 씨앗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원인이고, 그것 자체는 원인이 없습니다. 그것 안에 이 모든 것이 비추어집니다. 다양한 맛이 하나의 혀에 의해서 맛보아지는 것처럼, 모든 다양한 경험은 순수한 존재 안에서 경험됩니다. 무수한 우주가 태어나 존재하다가 그것 안으로 녹아듭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것 안에서 상호 관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 순수한 존재는 모든 무거운 것의 무거움입니다. 그것은 빛나는 모든 것의 밝음입니다. 그것은 거칠고 그것만이 미묘합니다. 그것은 첫 번째 중의 첫 번째이고, 마지막 중의 어둠입니다. 그것은 모든 물질의 실체이며, 그것은 또한 공간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도 아니며, 그것은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있으며, 그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보이며,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이며,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

오, 라마여! 그러므로 그대의 힘이 닿는 모든 수단을 다해 그 지고의 상태에 있도록 하십시오. 그러고 난 다음 적절한 것을 하도록 하십시오. 순수하고 썩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의 참나의 진리에 이르는 이들은 지고의 평화를 얻습니다. 그것에 이름으로써 그대는 이 세상 존재의 두려움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성한 분이시여! 나에게 자상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정신을 흐리게 하는 이 모든 씨앗을 재빨리 없애고 지고의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말했다.

오, 라마여! 슬픔의 이 씨앗들은 각각 이전 것을 파괴함으로써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지대한 자기 노력으로 순수한 존재 상태 안에 휴식할 수 있다면, 만약 그대가 그 상태 안에 일 초 동안만이라도 있을 수 있다면, 그대는 즉시 그것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순수한 존재 안에 그대의 근거지를 찾기를 바란다면, 그대는 보다 큰 노력에 의하여 그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한한 의식을 명상함으로써 그대는 또한 지고의 상태에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합니다.

경험의 대상들에 관한 명상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의 대상들은 오로지 의식 또는 참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조건화인 생각, 개념, 버릇 등을 없애려 한다면, 한 순간에 그대의 모든 실수와 질병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한 것들보다 하기에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생각의 움직임에서 자유로울 때까지는 조건화를 그만두기가 어렵습니다. 그 반대도 그렇습니다. 진리가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마음은 기능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 반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조건화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조건화되지 않은 진리는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 반대도 그렇습니다. 진리의 깨달음, 마음의 중지 그리고 조건화의 멈춤은 섞여 있습니다. 그것들을 개별적으로 분리하여 다루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그대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쾌락의 추구를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세 가지 모두에 의지하십시오. 이 모든 것을 상당한 시간 동안 동시에 수행했을 때, 그때 그것들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다. 오, 라마여! 이 세상의 나타남은 오랫동안 진실이라고 경험되어 왔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계속해서 이 세 가지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명한 이들은 조건화의 포기와 쁘라나의 억제가 동등한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동시에 수행해야만 합니다. 쁘라나는 구루가 가르쳐 준 혹은 다른 방법에 의해 배운 요가 아사나와 쁘라나야마의 수행에 의하여 억제됩니다. 갈망, 혐오와 열망의 대상들이 눈 앞에 보이더라도 그것들이 마음 안에 일어나지 않을 때, 마음의 조건화가 약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마음이 조건화가 더욱 약해지면,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때 마음이 정지됩니다.

적절한 방법들이 없이는 '마음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참나에 대한 지식, 신성한 이들과의 교제, 조건화의 포기 그리고 쁘라나의 억제, 이러한 것들이 마음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들입니다. 이것들을 무시하고 하타 요가, 금욕 생활, 순례 여행, 의례 그리고 의식과 같은 것들을 격렬하게 수행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입니다. 참나 지식만이 그대에게 기쁨을 줍니다. 참나 지식의 사람만이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참나 지식을 가지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했다.

참나 탐구에 의하여 조금이라도 마음을 조절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인생이 주는 결실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참나 탐구가 그의 가슴 안에서 팽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탐구가 초연으로 나아가고 수행으로 안정성이 얻어질 때, 모든 고귀한 자질들이 저연적으로 그것에게로 옵니다. 참나 탐구 안에 있는 사람, 그리고 왜곡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무지와 무지에 따르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것들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습니다. 영적인 토대에 자신의 발을 확고하게 할 때, 감각의 즐거움이라는 도둑은 그 사람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감각적인 즐거움들에 압도 당합니다. 참나 탐구 안에 계속 머무르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참나를 항상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오로지 죽은 사람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오, 라마여! 그러므로 계속해서 이 탐구를 하십시오. 이 탐구는 무지라는 어둠을 쫓아 버리고서 진리를 나타나게 해 줍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이번에는 슬픔을 모두 몰아냅니다. 지식과 더불어 진리의 경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경전들의 적절한 연구와 진리에 대한 탐구로 밝혀진 내면의 빛이 진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빛나게 할 때, 그것들의 전체적인 정체성이 깨달아집니다. 신성한 이들은 이 내면의 빛 그 자체를 참나 지식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경험은 참나 지식의 통합적인 부분이며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참나 지식을 가진 사람은 늘 그 경험에 젖어 있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자유로우며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처럼 삽니다.

그러한 현자는 다른 이들이 즐겁거나 불쾌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다양한 경험들에 의하여 흩뜨려지지 않습니다. 쾌락이 그를 구속하거나 압도하지 못하며, 그에게는 쾌락에 대한 갈망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참나 안에서 완전히 만족합니다. 그는 어떤 대상 또는 어떤 사람에게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슴속에는 증오나 미움도 없습니다. 숲 속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나 적의 외침에도 겁먹지 않습니다. 그는 정원에 갈 대도 기뻐하지 않으며 사막을 여행하더라도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내적으로 그는 늘 자유롭지만 순간에 적절한 행동을 합니다. 살인자와 박애주의자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모두 같습니다. 그는 온 우주가 다름이 아닌 순수한 의식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우주적 비전 안에 있는 크거나 작은 모든 것이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행위의 기관들과 더불어 집착 없이 활동하는 그는 즐거움도 슬픔도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의 행위들은 의지에 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보더라도 그는 보지 않고, 귀는 듣더라도 그는 듣지 않고, 몸이 만지지만 그는 만지지 않습니다. 확실히, 집착(접촉, 연합)이 세상 환영의 원인입니다. 그것만이 대상들을 만듭니다. 집착은 속박과 끊임없는 슬픔을 야기시킵니다. 그러므로 신성한 사람들은 집착의 포기가 해방 그 자체라고 선언합니다. 오, 라마여! 집착을 포기하십시오. 그래서 해방된 현자가 되십시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나에게 이 집착이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말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오, 라마여! 쾌락의 대상들이 있는가와 없는가에 따라 쾌락과 고통의 경험을 반복적으로 일으킴으로 마음의 조건화가 더욱더 강해지는 것이 집착입니다. 그래서 그런 연관성을 만드는 것이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쾌락의 대상들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해방된 현자의 경우에 이 조건화는 기쁨과 슬픔의 경험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화되었습니다. 즉, 조건화가 파괴되면서 그 조건화는 약해집니다. 비록 육체가 죽게 될 때까지 그것은 아주 약화된 상태로 있겠지만, 너무나 순수하고 약해진 상태에서 나온 행동은 다시 탄생하는 결과를 낳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리석은 자들 속에 있는 강한 조건화는 집착으로 알려진 그것 자체입니다. 만약 그대가 그대 안에 있는 나쁜 개념들을 일으키는 이 집착을 포기한다면, 여기에서 그대가 자발적으로 하게 될 행위들은 그대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기쁨과 슬픔 너머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같다고 여기면, 그리고 그대가 유혹, 혐오,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그대에게는 집착이 없습니다. 그대가 슬픔 안에서 괴로워하지 않고, 행복 안에서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대가 그대 자신의 갈망과 희망으로부터 독립된 채로 있다면, 그대는 집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대가 여기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진리의 동질성의 자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그대는 집착이 없습니다. 그대가 참나 지식을 얻었고 동일한 비전을 가지고 있고, 여기 지금에서 그대 자신을 자발적이고 적절한 행위에 관여시킨다면, 그대는 집착이 없습니다.

노력 없이 집착하지 않는 상태에 자리 잡음으로써, 어떤 것에도 유혹 당하지 않는 해방된 현자로서 여기에 사십시오. 해방된 현자는 자긍심이나 허영심 없이, 질투 없이, 그리고 자신의 감각들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으면서 내적인 침묵 안에 삽니다. 세상의 모든 대상이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갈망이 없는 해방된 현자는 그것들에 유혹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자연스러운 행위에 관여시킵니다. 불가피하고 적합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그는 합니다. 그러나 그의 즐거움과 기쁨은 안에서 옵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의 나타남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우유가 끓여진다고 색깔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끔찍한 재앙이 그를 시험하더라도 그는 현명함을 잃지 않습니다. 큰 고통을 받거나 하늘의 통치자가 되더라도, 그의 마음은 균형 잡혀 있습니다.

오, 라마여! 그러므로 늘 참나 탐구를 하십시오. 그래서 확고하게 참나 지식 안에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대는 결코 다시는 탄생과 속박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앞의 페이지들에서 비차라는 탐구 또는 참나 탐구라 번역되어 있다. 그것이 일반적인 번역이다. 그러나 그 단어는 자신의 내면의 지성이 효과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산스크리뜨 '짜르'는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을 지적인 분석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직접적인 관찰 내지 '내면으로 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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