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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부순다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26.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무한하고 나눌 수 없는 의식 속에는, 말하자면 그 의식의 한 모퉁이에 신기루와 같은 현상계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나타남을 분명히 일으킨 창조자 브람마가 거기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마음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옛날 내가 인드라의 천국에 있었을 때, 나는 나라다와 같은 현자들로부터 장수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위대한 현자 샤따따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메루 산의 모퉁이에 금과 은으로 된 잎사귀를 가진 추따라는,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그 나무 위에는 어떤 애착이나 혐오도 전혀 없는 부순다라고 하는 까마귀 한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지상이나 천국에서 그보다도 더 오래 장수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장수했을 뿐만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평화로운 새입니다. 그대들 중 누구라도 그만큼 오래 산다면, 그것은 매우 칭찬받을 만하고 상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삶으로서 간주될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말을 듣고 감격했습니다. 나는 곧 이 부순다를 만나러 출발했습니다. 즉시 나는 부순다가 살고 있는 메루 산의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그 산은 빛을 발했는데, 그 빛은 요기가 요가 수행을 통해 머리의 정수리와 수슘나(그것은 또한 메루라고 알려져 있다)라고 하는 나디의 위쪽 끝에 위치한 영혼의 관문을 통해 나오는 요기의 광채와 견줄 만했습니다. 정상은 천국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꽃과 잎이 보석처럼 빛나는 추따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오려 낸 나무였습니다. 그 나무 위에서 사는 천인들은 그들의 노래 소리로 대기를 가득 채웠습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형태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 현자들도 거기에 살았습니다. 그것은 잴 수 없는 크기의 거대한 나무였습니다.

나는 각기 다른 종류의 새들이 그 나무 위에 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창조자 브람마의 이동 수단이던 그 유명한 백조를 보았습니다. 나는 불의 신의 이동 수단이고 경전에 박식했던 슈카라는 새도 보았습니다. 나는 까르띠께야 신의 다른 새들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나는 그 나무 위에 있는 까마귀들을 보았습니다. 그 까마귀들 가운데 나는 커다란 부순다를 보았는데, 그는 완전한 평온과 평화 속에서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빛이 났으며, 평화스러웠습니다.

이것이 장수했던 그 유명한 부순다였습니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세상 순환 주기를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는 무한히 긴 여러 시대 전에 살았던 사람들마저 기억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는 생각과 '나의 것'이라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는 만인의 친구이며 친칙이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나는 부순다의 바로 앞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내가 바시슈타임을 알고, 나를 적절히 맞아 주었습니다. 그는 단지 생각하는 힘만으로 꽃을 만들어, 그 꽃으로 나에게 예배를 올렸습니다. 그는 자기 가까이에 나를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순다는 다음과 같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당신이 우리를 방문해 주신 것을 큰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의 딜샨(봄, 만남)이라는 감로수에 몸을 적시고 난 뒤, 우리는 좋은 나무처럼 다시 새로워졌습니다. 당신은 숭배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분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이곳을 찾게 된 것은 나의 선업이 누적된 결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방문하시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확실히 당신의 가슴속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이 현상계의 본질에 대한 계속적이고 강렬한 탐구로 인하여 불붙은 그런 참나 지식의 빛이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방문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아! 당신의 축복받은 발만 보고도 난 당신의 목적을 알아차렸습니다. 당신은 최고의 장수 비밀을 알아보려고 여기를 찾아온 것이지요. 그러나 당신의 입으로 직접 그 목적을 말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진실로 축복받은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 주변 곳곳에서 지고의 평화를 주리고 있고, 최고의 지혜(참나 지식)를 부여받았으며, 현상계라고 하는 환영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디 그대 자신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좀 알려 주십시오.

그대는 어떤 씨족에서 태어났습니까? 그대는 오직 알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그대의 지금 나이는 얼마이며, 그대는 과거에 대한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대가 장수할 것이며, 이 나무에서 살아야 한다고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입니까?"

부순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현자여! 당신이 나에 관하여 이런 질문을 하니, 나는 거기에 충분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주의 깊게 귀 기울여 주십시오. 내가 말하려는 이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죄를 모두 없애 줄 것입니다."

오, 라마여! 이런 말을 하고 난 뒤에 부순다는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은 엄숙하고도 정중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모든 욕망과 쾌락의 추구를 초월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슴은 순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그것 자신의 성취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피조물의 탄생과 소멸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달콤했습니다. 그는 창조자 브람마의 위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감로수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부순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우주에는 신들의 신이며, 또한 천상의 모든 신들의 숭배를 받는 하라라는 위대한 신이 있습니다. 그의 배우자는 그의 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강가라고 하는 신성한 강이 그의 머리 타래에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또한 밝은 달이 빛나고 있습니다. 한 마리의 치명적인 코브라가 그의 목을 둘러싸고 있는데, 그 독사는 달에서 흘러내리는 감로수를 먹고 그 독을 빼앗겼음이 분명합니다. 그의 유일한 장식은 그의 전신에 칠해진 신성한 재입니다. 그는 공동묘지나 화장터에서 삽니다. 그는 해골로 만든 화환을 걸치고 있습니다. 그의 부적과 팔찌는 뱀들입니다.

한 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악마를 죽입니다. 그는 우주 전체의 복지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명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언덕과 산들은 그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의 부관들은 면도기와 같은 머리와 손을 가지고 있고, 곰이나 낙타, 쥐 등과 같은 얼굴을 가진 악귀들입니다. 그는 세 개의 눈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이들 악귀들은 그에게 고개 숙여 절합니다. 그리고 14계(界)의 존재들을 먹고 사는 여신들이 그의 앞에서 춤을 춥니다.

이들 여신들도 다양한 동물들을 닮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은 산꼭대기나 우주, 각기 다른 세상, 아니면 화장터나 몸을 받은 사람들의 몸 속입니다. 이들 여신 가운데 여덟 명이 주요 여신입니다. 즉, 자야, 비자야, 자얀띠, 아빠라지따, 싯다, 락따, 알람부사,우뜨빨라가 그들입니다. 나머지 모든 여신들은 이 여덟 여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 중 일곱 번째인 알람부사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녀의 이동 수단은 까마귀로서, 그 까마귀는 대단히 강력하며 푸른색을 띠고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 이 모든 여신들이 공간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뚬부루(루드라 신의 모습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신에게 적절한 예배를 올렸고, 지고의 진리를 드러내 주는 좌도의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들은 뚬부루와 또한 바이라바 신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포도주에 취한 채, 여러 종류의 의식을 치르기 시작했습니다. 곧 그들은 하나의 중요한 문제, 즉 우마의 신(하라)이 왜 우리를 경멸적으로 대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지금부터는 다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용맹성을 보여 주어야겠다." 그들은 마력의 힘으로 우마를 제압했고, 그녀를 그녀의 신인 하라로부터 갈라 놓았습니다. 모든 여신들이 황홀경 속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어떤 여신은 술을 마셨고, 어떤 여신은 웃음을 터뜨렸고, 어떤 여신은 고함을 질렀으며, 어떤 여신은 달렸고, 어떤 여신은 넘어졌고, 어떤 여신은 고기를 먹었습니다. 술에 취한 이 여신들은 이 세상 전체에 혼돈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신들이 이렇게 흥청망정 놀면서 축하하고 있는 동안, 그들을 태워다주던 동물들도 술에 취에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백조 암놈들은 알람부사의 이동 수단인 까마귀(찬다)와 춤을 추었습니다. 이들 백조 암놈들이 이렇게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 짝짓고 싶은 욕망이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한 마리 한 마리씩 모든 백조들은 그 까마귀와 짝짓기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백조들이 모두 취해 있었게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축하연이 끝나고, 모든 신들은 하라 신(쉬바)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마력을 사용하여 음식으로 바꾸어 버린 우마의 몸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신은 그 사실을 알고, 그 신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신 전과 같이 우마를 만들어, 신에게 우마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신은 다시 그의 배우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신들은 각자 그들의 거처로 돌아갔습니다. 브람미의 이동 수단이던 백조들은 브람미 여신에게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브람미 여신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들 모두가 임신했으므로 너희들은 맡은 의무를 수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분간 너희들이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이렇게 말을 한 후, 여신은 깊은 명상에 잠겨 앉아 있었습니다.

백조들은 적당한 시기에 스물한 개의 알을 낳았고, 그 알들은 곧 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스물한 명이 까마귀 찬다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과 함께 우리는 브람미 여신을 숭배했습니다. 그 여신은 은총으로 우리는 참나 지식과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에게 다가갔고, 그는 우리 모두를 사랑스럽게 안아 주었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알람부사 여신을 숭배했습니다.

찬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애들아! 바사나 즉 정신적 조건화의 족쇄를 끊고, 현상계라고 하는 이 그물을 벗어났느냐? 그러지 않았으면 최고의 지혜를 얻게 해 줄 은총을 주는 여신을 숭배하도록 하자."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브람미 여신의 은총으로 얻을 가치가 있는 지식을 이미 얻었습니다. 우리는 살기 좋은 한적한 곳을 찾고 있습니다."

찬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루라는, 세상에 아주 좋은 산이 하나 있다. 그 산은 14계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떠받치고 있다. 모든 신들과 현자들도 그 위에서 살고 있다. 그 산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바로 그 나무가 있다. 그 나무의 한 가지에다 나는 람람부사 여신이 깊은 명상에 들어 있는 동안에 둥지 하나를 튼 적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아름답고 훌륭했다. 애들아! 그 둥지로 가서 거기에서 살아라. 너희들은 어떤 장애물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훈계에 따라서 우리 모두는 여기로 왔고, 그 둥지에서 거처를 잡았습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아주 옛날에, 그러나 우리가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기억 저편 멀리 있지 않은 그 옛날에, 하나의 세상이 있었습니다.

바시슈타는 이렇게 물었다. 그대 형제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냐하면 나는 오직 여기에서 그대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오, 현자여!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마침내 나의 형제들은 그들의 육체적인 존재를 버리고, 쉬바 신이 계신 천국으로 올라갔습니다. 정말로 신성하고 거룩하며, 건장했을지도 모르는 장수한 사람들마저 마침내 시간의 신(즉 죽음)에게 먹히고 말았습니다.

바시슈타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대는 더위와 추위와 바람과 불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까?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진실로 비록 창조주가 초라한 까마귀의 생존을 위해 충분히 대책을 마련해 두었지만, 사람들의 경멸을 받는 까마귀는 몸을 받아 태어난 것은 행복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토록 많은 재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신체와 마음의 고통에 지나지 않는 헛된 활동을 버리고, 참나 속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지내 왔습니다. 이 육신에게는 삶이나 죽음 그 어디에도 없는 불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세상들의 운명을 봤습니다. 우리는 몸과의 동일시를 마음으로 버렸습니다. 참나 지식 속에 굳건히 선 채, 나무 위에서 떠나지 않고, 나는 시간의 경과를 지켜봅니다. 쁘라나야마 수행을 통해 나는 시간의 구분을 초월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가슴 내부가 평온하며, 세상의 사건에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가 사라지거나 생겨난다 해도, 우리는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모든 존재가 시간(즉 죽음)이라는 바다에 들어간다 해도, 우리는 그 바다의 해안에 앉아 있으므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받아들이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는 이렇게 나무 위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다양한 활동들에 종사하고 있어도, 우리는 마음의 변화에 빠져들지 않고, 실재와의 접촉도 결코 잃지 않습니다.

신이시여! 신들이 바다를 휘저어 만든 그 감로도 당신과 같은 현자들의 존재 그 자체로부터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축복보다는 못합니다. 나는 모든 갈망과 욕망이 없는 현자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칭찬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분이시여! 비록 내가 이미 참나 지식을 얻었다 해도, 나는 오늘에야 당신을 만나 당신과의 교분을 즐겼기 때문에 비로소 나의 탄생이 진실로 그 목적을 성취했다고 생각합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소원을 이루어 주는 이 나무는 다양한 자연 재해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또한 살아 있는 존재들이 일으키는 지각의 대변동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악마들이 지구를 파괴하거나 멸망시키려고 했을 때, 지각의 대변동이 여러 차례 있었고, 또한 신이 개입하여 악마의 손아귀로부터 지구를 구출했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격동의 기간 중에도 이 나무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홍수와 우주의 소멸을 수반하는 태양의 타는 듯한 열기마저 이 나무를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 나무 위에서 사는 우리도 해악을 모면했던 것입니다. 악이란 신성하지 않은 곳에 사는 자를 덮치기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소멸되면서 우주의 생명이 끝났을 때, 그대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까?

부순다는 대답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그 기간 동안에 나는 마치 배은망덕한 사람이 그의 친구를 버리는 것처럼 이 둥지를 버렸습니다. 그 다음 나는 모든 생각과 마음의 변화를 전혀 받지 않은 채, 우주의 공간과 하나가 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열두 개나 되는 우주의 태양이 이 세상에 견딜 수 없는 열길르 쏟아 부을 때도, 나는 바루니 다라나를 수행하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루나는 물의 신이다. 바루니 다라나는 바루나에 대한 명상이다.) 바람이 심지어 산마저 날려 버릴 정도의 강력한 힘으로 불 때도 나는 빠르바띠 다라나를 수행하였으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빠르바띠는 산이고, 빠르바띠 다라나는 산에 대한 명상이다.) 전 우주가 우주의 소멸을 가져다줄 바닷물로 범람했을 때도, 나는 바유 다라나를 수행하였으며,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유는 바람이고, 바유 다라나는 바람에 대한 명상이다.) 그리고 나는 다음의 우주 주기가 시작할 때까지, 마치 깊은 수면에 빠져 있는 것처럼 그대로 있었습니다. 새 창조주가 새 우주를 창조하기 시작할 때, 나는 이 둥지가 있는 거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바시슈타는 질문했다.

당신이 하셨던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 할 수 없습니까?

부순다는 대답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절대자의 뜻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본래의 그들처럼 되는 것이 절대자의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헤아릴 수 없고 또한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각 존재의 본성에 따라서, 되어야 할 것은 그렇게 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의 힘이나 개념 작용에 따라서, 이 나무는 모든 세상의 순환 주기를 거치면서도 바로 이런 식으로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바시슈타는 물었다.

그대는 그대가 궁극의 해방을 얻었다는 것을 암시해 줄 그런 장수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현명하고 용감하며 또한 위대한 요기입니다. 부디 현재의 세상과 이전의 여러 주기에 걸친 세상들과 관련하여 그대가 기억하고 있는 어떤 특별한 사건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부순다는 말했습니다.

내 기억에 아주 먼 옛날에는 이 지구상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무도 식물도 심지어 산도 없었습니다. 일만천 년의 기간 동안 지구는 용암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극지방 아래쪽에는 낮도 없었고 밤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나머지 지역에는 태양이나 달이 빛을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극지방의 절반만이 밝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악마들이 지구를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막강하고 번창했습니다. 지구는 그들의 놀이터였습니다.

극지방을 제외한 지구의 나머지 지역은 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 다음 매우 오랫동안 전 지구는 극지방을 제외하고 숲으로 뒤덮였습니다. 그 다음 큰 산들이 생겨났지만, 어떠한 인간 거주자도 없었습니다. 일만 년의 기간 동안 지구는 악마들의 시체로 덮여 있었습니다.

한때는 하늘을 떠돌아다니던 신들이 두려움 때문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구는 흡사 단 한 개의 산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나는 이러한 많은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내 일생 동안 수많은 마누(인류의 원조)들의 출현과 소멸을 보았습니다. 한때는 이 세상이 신과 악마가 전혀 없는, 하나의 빛나는 우주의 알이었던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알코올에 중독된 브람마나(성직자 계급의 구성원)들과, 신을 조롱하던 수드라(하인 계급)들과, 일부다처의 여성들로 이 지구가 붐비던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또한 지구가 숲으로 덮여 있었고, 바다는 심지어 상상될 수도 없었고, 또 인간이 자연스럽게 창조되었던 그런 또 다른 시기도 기억합니다. 또 어떤 때는 산도 없었고 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도 없었고 현자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둠만이 사방을 지배했습니다.

맨 처음 창조의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그 다음 빛과 우주의 구분이 생겨났고, 그 다음 잇따라 다양한 존재물이 창조되었으며, 또한 별과 행성도 창조되었습니다.

나는 어느 한 시기에는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가 비슈누 신(비슈누, 일반적으로 보호자로 간주됨)이란 것을 알았고, 또 어떤 때는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가 브람마임을 알았으며, 또 어떤 때는 쉬바 신이 창조주임을 알았습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물론 나는 최근과 먼 과거에 살았던, 당신과 같은 현자들, 가우리와 같은 여신들, 히라니약사와 같은 악마들, 시비와 같은 왕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 현자시여! 당신이 현자 바시슈타로 태어난 것은 이번이 여덟 번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도 이번이 여덟 번째입니다. 한때는 당신이 공간으로 태어났고, 또 한때는 물로 태어났고, 또 한때는 바람으로, 또 한때는 산으로, 또 한때는 불로 태어났습니다.

현재의 세상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든지 그것은 세 번에 걸친 이전의 세상에서 정확히 똑같은 식으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열번에 걸친 그러한 세상의사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석: 이어서 중요한 세상 사건들이 열거된다. 그 모든 사건들이 각 세상에서 항시 반복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부순다가 목격한 횟수의 차이를 설명해 준다. 그들 중 몇 개는 이것을 예시하기 위하여 여기에서 다시 이야기된다.) 모든 시대에는 진리를 설명하고 베다의 경전들을 밝혀 준 현자들이 있었습니다. 전설(즉 유사 이전의 이야기들)을 기록했던 비야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번이고 발미끼는 신성한 라마야나를 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라마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는 신성한 지혜의 책 한 권이 발미끼라고 하는 현자에 의해 또한 기록이 되었습니다. 원래 그 책은 십만 개의 시로 되어 있었습니다. 현 시대에 들어와서도 또한 그 책은 발미끼에 의해 열 두 번째로 기록이 될 것입니다. 잊혀져 왔던 '바라따'라고 하는 똑같이 위대한 경전이 하나 있었습니다.

악마들을 멸하기 위하여, 비슈누 신은 거듭 라마의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현 시대에서는 그가 열한 번째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비슈누 신은 열여섯 번째로 끄리슈나의 모습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가공의 나타남입니다. 이 세상 자체는 실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망상이 있는 마음에는 실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의 물결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어떤 시기 중에는 삼계가 같았고, 또 어떤 시기 중에는 삼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런 모든 차이들 때문에 각 시대마다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친척들과 새로운 하인들과 새로운 집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히말라야 산에서 거주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말라야 산에서 거주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타고난 성벽 때문에 둥지가 있는 이곳에서 거처를 잡기도 합니다.

방향마저 시다마다 바뀝니다. 나 혼자만이 창조자 브람마의 밤마저 이겨내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나는 이들 변화들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극지방의 위치와 별과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따라 방향(북쪽, 동쪽 등)이 결정됩니다. 이런 것들이 변화하면 방향도 바뀝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이 실재하지도 않으며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일한 실재는 우주 의식 내의 에너지의 이동입니다. 잘못된 이해 때문에 이것은 이 총조로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즉, 그러한 망상이 또한 인간관계와 의무의 혼란을 일으킵니다. 어떤 시대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처럼 활동하기도 하고, 친구가 적처럼 활동하기도 하며, 남자가 여자처럼 활동하기도 합니다. 가끔 '암흑의 시대'에서는 사람들이 마치 '황금시대'가 지배하는 것처럼 활동하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합니다.

바시슈타는 질문했다.

오, 부순다여! 어찌하여 그대의 몸은 죽음으로 소진되지 않았습니까?

부순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하인의 웅변술을 계발하기 위하여 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것이 성인을 숭배하는 최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신은 애착(라가)과 혐오(드베샤), 그릇된 생각과 마음의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신은 마음의 병으로 고통 받지 않는 사람, 근심 걱정을 일으키는 욕망과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 탐욕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 몸과 마음이 분노와 증오의 불길로 타지 않는 사람, 육욕이란 제분기에 돌려져 가루로 빻아지지 않는 사람, 절대자 브람마의 순수 의식에 확고히 자리 잡은 사람, 그리고 마음이 원숭이처럼 분산되지 않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 현자시여! 이들 죄악은 완전한 고요와 평온의 상태를 찾은 사람에게는 접근조차 못합니다. 또한 몸과 마음의 병들도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의 자각은, 싶은 수면 상태에 있든지 깨어 있는 상태에 있든지 간에, 일어나거나 지지 않습니다. 마음과 가슴이 지고의 평화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은 애욕과 증오에서 태어난 맹목적인 죄악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비록 끊임없이 적절한 활동들을 하고 있지만, 구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으며, 포기하지도 모으지도 않습니다. 악의 어떤 세력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합니다. 모든 기쁨과 행복과 상서로운 특성이 그에게로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오, 현자시여! 사람은 무지가 전혀 없고, 모든 구함도 전혀 없는 불멸의 영원한 참나 속에 확고히 자리 잡아야 합니다. 사람은 이원성이나 분리의 유령을 없애고, 가슴을 하나의 진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만이 처음과 중간과 끝이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기쁨은 신이나 악마와 함께 있을 때나, 천상의 예술가들과 함께 있을 때나, 천상의 선녀들과 함께 있을 때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영원히 즐거운 것을 천국이나 지상이나 심지어 하계에서나, 아니 이 우주의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모든 활동들에는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많은 형태의 불행이 수반됩니다. 즉, 영원히 좋은 것은 그 속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영원한 선은 감각들의 그 어떤 활동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각의 경험들은 처음과 끝이 더렵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의 통치도, 신의 형상에의 도달도, 경전에 대한 연구나 타인의 일에 대한 봉사도, 이야길르 귀담아 듣거나 들려 주는 일도, 장수나 죽음도, 천국이나 지옥 그 어느 것도 거룩한 사람의 마음 상태에 필적할 수는 없는 습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모든 상태들 가운데 최상의 상태는 정말로 하나의 무한한 의식에 대한 통찰입니다. 심지어 무한한 의식인 참나에 대한 명상만으로도 슬픔은 사라지고, 현상계에 대한 오랜 꿈과 같은 비전도 끝이 아고, 마음과 가슴이 정화되며, 걱정과 불행이 사라집니다. 참나의 그 명상에는 마음의 작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쉽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참나의 명상에는, 말하자면, 그러한 명상을 아주 닮은 벗들이 있습니다. 그 벗들 가운데는 쁘라나에 대한 명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극복하고 상서로움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명상을 채택해 왔습니다.

나에게 장수와 참나 지식을 준 것은 바로 그 쁘라나 명상입니다. 나는 이제 그것을 당신에게 설명해 주겠습니다.

신이시여! 세 기둥(세 개의 몸이나 세 개의 나디?)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또 아홉 개의 관문을 가지고 있으며, 여덟 명의 배우자(뿌르야스따까)와 많은 친척(근본 원소)들을 거느리면서 자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 매혹적인 몸을 보십시오.

이 몸의 중앙에는 미묘한 이다와 삥갈라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연꽃과 같은 세 개의 바퀴들이 있습니다. 이 바퀴들은 뼈와 살로 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공기가 이 바퀴를 적시면, 이들 연꽃 바퀴의 꽃잎과 바퀴살이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공기는 그들의 팽창 때문에 팽창합니다. 그러므로 이들 나디들은 위아래로 바퀴살 모양으로 퍼집니다. 현자들은 이 생명의 공기들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작용 때문에 그 공기들을 쁘라나, 아빠나, 사마나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이들의 작용은 중앙에 있는 영혼의 센터인 가슴의 연꽃에서 그 에너지를 이끌어 냅니다.

이렇게 가슴의 연꽃에서 진동하는 그 에너지가 쁘라나입니다. 그 에너지 때문에 눈은 볼 수 있고, 피부는 느낄 수 있고, 입은 말할 수 있고, 음식은 소화될 수 있으며, 신체의 모든 기능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두 개의 다른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하나는 위에 다른 하나는 아래에 있는데, 그것들은 각각 쁘라나와 아빠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에게 헌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피로가 전혀 없으며, 가슴에서 태양과 달처럼 빛나고 있으며, 몸이라는 도시의 수호자인 마음의 수베바퀴와 같으며, 자아감이라고 알려진 왕의 총애하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헌신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영원히 동질의 의식 속에서 마치 깊은 수면 상태에 빠진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쁘라나와 아빠나를 숭배하는 자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고, 그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쁘라나는 신체의 내부와 외부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즉, 쁘라나는 신체의 위쪽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생명의 공기입니다. 아빠나는 마찬가지로 신체의 내부와 외부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신체의 아래쪽에 있습니다. 깨어 있거나 잠자고 있는 사람의 안녕에 도움이 되는, 이러한 생명력의 확대나 통제에 대한 수행에 부디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가슴의 연꽃에 집중된 생명력이 아무 노력 없이 저절로 방출되는 것을 레차까, 즉 숨의 토해냄이라고 합니다. 가슴의 연꽃에서 가운데 손가락 12개의 길이 정도로 아래에 위치한 생명력의 근원과 접촉하는 것을 뿌라까, 즉 숨의 들이킴이라고 합니다.

아빠나가 움직이지 않고, 쁘라나가 일어나 가슴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그리고 이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까지)를 꿈바까(채워진 항아리의 경우처럼 보유)라 합니다. 레차까, 꿈바까 그리고 뿌라까에는 세 개의 주요 지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바깥(코)이며, 둘째는 드바다샨따(가운데 손가락 12개의 길이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이마의 위나 전면)라고 하는 곳의 아래이며, 셋째는 쁘라나의 근원(가슴의 연꽃)입니다.

항상 자연스럽고 노력 없이 움직이는 생명력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생명의 공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12개의 손가락 길이까지 이동하는 것을 레차까라고 합니다. 아직 흙으로 빚어지지 않은 도자기처럼 아빠나의 힘이 드바다샨따에 머물고 있는 그 상태는 외부 꿈바까라고 합니다.

밖으로 나가는 공기가 코끝까지 이동하면, 그것을 레차까라고 합니다. 그것이 드바다샨따의 범위까지 이동하면 그것을 외부 레차까라고 합니다. 쁘라나가 밖으로 이동하는 움직임을 멈추고, 아빠나가 아직 일어나지 않을 때, 그것을 외부 꿈바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쁘라나가 내부에서 일어나지 않고 아빠나가 내부로 흘러들어 오면, 그것을 내부 꿈바까라고 부릅니다. 아빠나가 드바다샨따에서 일어나 내부 팽창을 하면, 그것을 내부 뿌라까라고 합니다. 이러한 꿈바까들을 알고 있는 자는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가거나 서 있거나, 깨어 있거나 자거나 간에, 이 생명의 공기들은 자연히 불안정하므로, 이러한 수행들을 통해 억제됩니다. 그런 다음 그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든지, 이 꿈바까를 알고 있는 자는 그러한 활동의 행위자가 아닌 것입니다. 며칠 사이에 곧 그는 지고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이들 꿈바까를 수행하는 자는 외부의 대상에 끌리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비전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든 움직이든 구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그들은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을 얻은 것입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쁘라나와 아빠나에 헌신함으로써 가슴과 마음의 불순물이 소멸되었을 때, 그는 망상에서 풀려난 것이며, 내면의 일깨움을 얻었으며, 무엇이든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자신의 참나에 조용히 머물러 있습니다.

신이시여! 쁘라나와 가슴의 연꽃에서 일어나, 신체의 바깥 12개 손가락 길이의 거리에서 끝납니다. 아빠나는 드바다샨따(신체에서부터 열두 개의 손가락 길이)에서 일어나, 가슴의 연꽃에서 끝납니다. 따라서 아빠나는 쁘라나가 끝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쁘라나는 불꽃과 같아서 확 타올랐다가 꺼집니다. 반면에 아빠나는 물과 같아서 가슴의 연꽃 쪽으로 내려갑니다.

아빠나는 몸을 외부로부터 보호해 주는 달입니다. 번면에 쁘라나는 태양이나 불과 같아서 신체 내부의 안녕을 증진시킵니다. 쁘라나는 매 순간마다 가슴의 공간 안에 열을 발생시키고, 이 열을 발생시킨 뒤에는 얼굴 앞의 공간에 열을 발생시킵니다. 달과 같은 아빠나는 얼굴 앞에 있는 공간에 자양분을 주며, 그 다음 가슴속의 공간에 자양분을 줍니다.

아빠나가 쁘라나와 결합하는 그 공간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며, 또한 다시 태어나지도 않습니다.

사실, 타는 듯한 열기를 버린 뒤에 변화를 겪어 아빠나처럼 보이는 것은 오직 쁘라나입니다. 그 다음, 똑같은 쁘라나가 이미 달의 차가움을 버렸으므로, 태양의 정화하는 불이 본성을 되찾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쁘라나가 그 태양의 본성을 버리고 달이 되지 않는 한, 그 쁘라나의 본성을 탐구하십시오. 자기 자신의 자슴속에서 태양과 달이 뜨고 지는 것에 대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자기의 가슴속에서 신이나 태양을 보는 사람은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완벽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람은 외부의 어둠을 막지도 보호하지도 말며, 가슴속에 있는 무지의 어둠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외부의 어둠이 사라지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속에 있는 무지의 어둠이 사라지면 참나 지식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쁘라나와 아빠나를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 대한 지식이 해방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빠나는 쁘라나가 일어나는 바로 그 가슴에서 끝납니다. 쁘라나가 태어나는 곳에서 아빠나는 죽습니다. 반면에 아빠나가 태어나는 곳에서 쁘라나는 끝납니다. 쁘라나가 움직이지 않고 아빠나가 막 일어나려 할 때, 사람은 외부 꿈바까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습니다. 아빠나가 이동을 멈추고 쁘라나가 조금만 일어나도, 사람은 내부 꿈바까를 경험합니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어도 더 이상 슬퍼하지 않습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아빠나가 일어나는 곳(손가락 12개 길이의 거리)에서부터 더 멀리까지 쁘라나를 내보낸 뒤에, 꿈바까(호흡의 정지)를 수행하면, 그는 더 이상 슬픔을 겪지 않습니다. 또는 만약 들이마신 호흡이 내쉬는 숨의 충동으로 바뀌는 자기 내부의 그 공간을 볼 수 있다면, 그는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쁘라나와 아빠나가 그들의 운동을 끝마치는 지점을 봄으로써, 그리고 그 평화의 상태를 꽉 붙잡음으로써, 사람은 다시는 슬픔을 겪지 않습니다.

쁘라나가 아빠나에 의해 소멸되는 장소와 그 정확한 순간을 예리하게 관찰할 수 있다면, 그의 마음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체의 내외부에서 쁘라나가 아빠나에 의해 소진되고, 또 아빠나가 쁘라나에 의해 소진되는 그 장소와 그 순간을 지켜보십시오. 쁘라나가 이동을 멈추고, 아빠나가 이동을 시작하지 않은 그 정확한 순간에, 아무 노력도 없이 꿈바까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현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중요한 상태로 간주합니다. 아무 노력도 없는 호흡의 정지가 있을 때, 그것은 지고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참나이며, 그것은 무한한 순수 의식입니다. 여기에 도달한 자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무한한 의식을 명상합니다. 그 의식은 쁘라나 안에 내재해 있는 현존이지만, 쁘라나와 같이 있지도 않으며, 또한 쁘라나 이외의 다른 것과 같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 무한한 의식을 명상합니다. 그 의식은 아빠나 안에 내재하는 존재이지만, 아빠나와 함께 있지도 않고, 또한 아빠나 이외의 다른 것과 함께 있지도 않습니다. 쁘라나와 아빠나가 멈추어 버린 뒤에 존재하는 그것과, 쁘라나와 아빠나 사이의 중앙에 있는 그것. 나는 그 무한한 의식을 명상합니다. 나는 쁘라나 중의 쁘라나이고, 생명 중의 생명이며, 오직 신체의 보존을 책임지고 있으며, 또한 마음 중의 마음이며, 지성 속의 지성이며, 자아 안에 있는 실재인 그 의식을 명상합니다. 나는 만물이 태어날 때부터 그 안에 거주하고, 사방 어디에든지 존재하며, 완전한 것이며, 영원한 것인 그  의식에 경이를 표합니다. 나는 또한 만물을 정화해 주는 자이며, 그 비전이 가장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것인 그 의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쁘라나가 이동을 멈추고 아빠나가 일어나지 않는, 그리고 코의 전면(혹은 뿌리) 공간에 있는 그 의식에 경이를 표합니다. 나는 쁘라나와 아빠나 모두의 근원이고, 이 둘의 에너지이며, 감각이 작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의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사실 내외부 꿈바까의 본질이며, 쁘라나 명상의 유일한 목적이며, 쁘라나가 작용할 수 있게 해 주며, 모든 원인의 원인이기도 한 그 의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그 지고의 존재 속에서 위안을 찾습니다.

부순다는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설명한 대로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쁘라나야마의 수행을 통해, 나는 순수의 상태를 얻었고, 메루 산(즉 북극)이 흔들린다 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마디의 상태 즉 완전한 평온은 내가 걸어가거나 서 있거나, 깨어 있거나 잠자거나 꿈을 꾸고 있거나 간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내 비전을 참나 쪽으로 돌려놓은 채, 나는 참나에 조용히 머물며, 이 세상이나 주위 환경에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삶의 모든 조건 속에 존재하는 그 참나와 함께 있습니다. 나는 이전의 우주가 소멸되던 때부터 이렇게 살았습니다.

나는 과거나 미래 그 어느 것도 명상하지 않습니다. 나의 주의력은 끊임없이 현재로 지향되고 있습니다. 나는 결과를 생각함이 없이 현재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바람직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나 비존재에 대한 생각도 없이, 나는 참나 속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하고 건강하며 병도 없습니다.

나의 상태는 쁘라나와 아빠나가 결합되는 순간(참나가 드러날 때)을 명상한 결과입니다. 나는 "나는 이것을 획득했고, 그것도 얻을 것이다."와 같은 헛된 생각을 지니지 않습니다. 나는 어느 때고 어떤 사람(나 자신도, 타인도)이나 어떤 것을 칭찬하지도 않고, 또한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내 마음은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얻는다고 우쭐해지지 않으며, 또한 나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얻게 된다고 해서 우울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하고 건강한 상태에 있습니다. 나는 살고 싶은 욕망마저 포기했으므로, 지고의 포기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갈망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평화로우며,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나는 나무 한 조각, 아름다운 여자 혹은 남자, 산, 풀잎, 얼음과 불, 그리고 공간과 같은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하나의 바탕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또는 "나는 내일 아침 무엇을 억을 것인가?"와 같은 생각으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노년기와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또는 행복을 갈망함으로써 괴로움을 받지 않습니다. 또한 나는 어떤 것을 '나의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으며, 또한 다른 것들을 '나의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항시 어디에서든지 모든 것이 하나의 우주 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내가 행복하고 건강한 상태를 지키는 비밀입니다. 내가 육체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라도 나는 이 현상계가 환영의 것임을 알고있기 때문에, "나는 몸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마치 곤한 잠에 빠진 듯이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나는 행운과 불운이 나에게 주어졌을 때, 그 어느 하나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두 팔을 팔로 보는 것과 똑같이 그들을 똑같은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욕망이나 자아감의 진흙으로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힘 있는 자리에 있을 때도 이성을 잃지 않으며, 가난한 위치에 있을 때도 구걸하러 가지 않습니다. 나는 희망과 기대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낡고 닳았을 때도, 나는 그것이 마치 새 것인 양 그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들과는 함께 기뻐하고, 비탄에 잠긴 사람들과는 함께 슬퍼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모두의 친구라서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며, 또 그 어느 것도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세상이며, 그 안의 모든 활동이며, 그것의 지성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내가 장수한 비결입니다.

바시슈타가 말했다.

그러자 나는 부순다에게 말했습니다. "오, 신이시여! 그대의 이 이야기는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대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대는 제2의 창조주와 같습니다. 그대와 같은 존재들은 참으로 보기 드뭅니다. 나는 그대를 봄으로써 이미 큰 공덕을 쌓았습니다. 계속 그대에게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내가 이곳을 떠나도록 해 주십시오."

오, 라마여! 이 말을 듣자마자 부순다는 나에게 경배했고,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정의 표시로 내 손을 꼭 잡고서 멀리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친구끼리의 헤어짐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이전의 끄르따(Krta) 시대에 있었고, 지금은 뜨레따 시대입니다.

오, 라마여! 이상이 부순다의 이야기입니다. 그대도 부순다가 설명한 쁘라나야마를 수행하고, 부순두처럼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라마가 질문했다. 신이시여! 그대가 비춘 빛에 의해 암흑의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기쁩니다. 우리는 참나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을 이미 알았으므로, 말하자면 당신과 꼭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들려준 부순다에 대한 그 감동적인 이야기에서 당신은 세 개의 기둥과 아홉 개의 관문 등을 가진 몸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다. 부디 그 몸이 처음에는 어떻게 일어나고, 또 어떻게 그것이 존재하며, 그 안에는 누가 사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말했다.

오, 라마여! 몸이라고 하는 이 집은 사실은 어떤 누구에 의해서도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물을 보는 복시증 환자가 달을 두 개로 보는 것처럼, 단지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달은 실제로 하나뿐입니다. 둘로 보이는 것은 시각적 환영입니다. 몸은 신치적 몸의 개념이 마음을 지배할 때 존재하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몸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재하기도 하고 실재하지 않기도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꿈이란 꿈을 꾸는 동안에는 실재하지만, 그 밖의 때에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물결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질 때는 그것이 하나의 실재하는 실체로서 경험될 때는 실재합니다. 비록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가공의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몸이다.'라는 생각은 마음의 소인 때문에, 진실로 뼈 등을 가진 살집 조각인 것과 관련하여 일어납니다. 그것은 환영입니다. 이 환영을 버리십시오. 그대의 생각하는 힘으로 생겨나게 된 수천 개의 그러한 몸들이 있습니다. 그대가 잠자면서 꿈을 꿀 때, 그대는 그 꿈에서 하나의 몸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그 몸이 어디에서 일어나며, 또한 존재합니까? 백일몽을 꿀 대도, 그대는 천국 등에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런데 그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끝났을 때, 그대는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 다양한 활동들에 종사합니다. 이때 그대가 이런 활동들을 하는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가 친구들과 함께 놀고 즐기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때, 그 몸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오, 라마여! 이렇게 몸이란 단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몸은 실재하기도 하고 실재하지 않기도 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몸의 활동은 마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들은 마음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이것은 재산이다.', '이것은 몸이다.', '이것은 국가이다.'라고 하는 이 모든 것은 마음의 에너지가 나타난, 달리 말하면 가공적인 생각들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기나긴 꿈, 또는 오래 계속된 환각, 또는 백일몽, 또는 희망하는 생각임을 아십시오. 신이나 참나의 은총으로 그대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대는 그때 가서야 이 모든 것을 명확히 알 것입니다. 그대 혹은 마음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 세상은 단지 마음의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마치 생각이 하나의 실체인 양, 그 생각을 인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창조주의 마음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했습니다. 그와 꼭 같이, 이 세상도 하나의 개념으로서 마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창조주조차 우주적 마음에서 일어난 하나의 개념에 불과합니다. 현상계도 또한 마음에서 일어난 하나의 개념입니다. 이러한 개념들이 반복적으로 진리의 외투를 입게 됨으로써 마음속에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개념들은 거듭 일어나서 가공의 현상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이 개념들의 근원을 단호히 찾으려고 하면, 그는 의식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가공의 현상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세상이다.'와 같은 개념들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러한 개념들이 실제성의 모습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영구불변하다는 것도 또한 환영입니다. 꿈의 상태에서는 정말로 짧은 한 순간이던 것이 꿈꾸는 사람에 의해서는 한 평생으로서 경험되고 있습니다. 신기루에서는 오직 가공의 '물'이 보이지, 그 바탕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와 꼭 같이, 무지의 상태에서는 가공적인 현상계만을 보지, 그 바탕은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지를 떨쳐 버렸을 때는 가공의 현상도 사라집니다. 심지어 정상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가상의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개념이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현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자신의 참나의 외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그가 누구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비전이 참나 탐구로 깨끗이 정화될 때, 이 세상과 관련된 그의 잘못된 이해는 사라집니다.

자신의 본성이 깨끗이 정화되는 것은 명료한 지각과 이해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그 본성이 불순해지지 않습니다. 그 바른 이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순수 의식의 반영(그러므로 현상)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이 세상은 실재하지도 않고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탄생과 죽음, 천국, 지식과 무지, 이 모두가 의식의 반영입니다. 나와 너, 사방과 이 모든 것은 의식입니다. 이런 것이 바른 이해입니다. 바른 이해가 있을 때, 마음은 일어나지 않으며, 또한 지지도 않습니다. 마음은 지고의 평화를 얻습니다. 그것은 칭찬이나 비난, 또는 기쁨이나 슬픔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침착하며, 진리에 조용히 머물러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죽음이 만인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가 왜 친척의 죽음이나 다가오는 자신의 종말에 대해 슬퍼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때로는 부유하고 또 때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왜 의기양양해 하거나 의기소침해야 하겠습니까? 살아 있는 존재들이 의식의 수면에 나타나는 잔물결들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안다면, 슬퍼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진실한 것은 항상 진실하며 즉 존재하는 것은 항상 존재하며, 실재하지 않는 것은 항상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슬퍼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란 것은 현재에도 없으며,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몸은 불가사의한 망상에서부터 일어났고, 그래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슬퍼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몸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나'란 것은 그 몸과 다르며, 또한 '나'란 것은 무한한 의식의 반영에 불과하다는 그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다면, 슬픔이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념과 희망과 포부를 실재하지 않는 것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희망은 속박이기 때문입니다. 오, 라마여! 그대는 어떠한 희망도 품지 말고, 이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적절하지 못한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바람직하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도 없이 이 세상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십시오.

무한한 의식만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합니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 현상을 현상으로 깨달을 때, 실재하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고, 이 경험들은 내 것이 아니다.'를 깨닫든지, 아니면 '나는 모든 것이다.'를 아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현상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다 좋습니다. 그대에게 맞는 것을 하나 채택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애착과 혐오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이 세상과 창공과 천국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애착과 혐오라는 두 개의 세력을 소멸시킨 자가 그것을 얻습니다. 만약 무지한 자가 이 두 세력의 자극을 받아 무슨 일을 한다면, 그는 그 일로 즉각 슬픔을 겪을 것입니다. 이 두 세력을 극복하지 못한 자는 비록 그가 경전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정말로 가련하고 멸시받을 만합니다. 그가 하는 말들은 '나는 또 다른 사람에게 강도를 당했다.'이든지, 아니면 '나는 부와 쾌락을 버렸다.'인 것입니다. 부와 친척과 친구들은 왔다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그들을 구하지도 않고 또한 그들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현명한 사람들의 주의를 끌 가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누군가가 어떤 것(딸과 같이)을 만들어 내고, 그 밖의 누군가(신랑과 같이)가 그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로 누가 속고 있습니까?

오, 라마여! 그대의 영적인 깨달음을 위하여 나는 몇 번이고 이 현상계는 기나긴 꿈과 같다고 말합니다.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태양처럼 빛나는 참나를 바라보십시오. 그대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감로와 같은 말을 듣고 정말로 깨어났습니다. 그대는 탄생과 슬픔과 죄와 망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모든 개념을 버리고, 참나 속에 조용히 머무르십시오.

바시슈타는 라마가 완전히 참나에 몰입해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침묵을 지키다가, 잠시 뒤 라마가 정상적인 의식으로 돌아온 뒤에 다시 강연을 시작했다.

오, 라마여! 그대는 깨어났으며 참나 지식을 얻었습니다. 이 숭고한 상태에 영원히 머무르십시오. 이 현상계에 연루되지 마십시오. 이 현상계라는 수레바퀴(모든 것의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는 그 바퀴통의 중심에 사상이나 생각이나 개념을 달고 있습니다. 이들이 정지되면 현상계도 또한 끝납니다. 어떤 사람이 그 수레바퀴를 정지시키려고 의지력을 행사하더라도, 생각에 의해 일어난 마음의 동요가 멈추지 않으면 그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상의 자기 노력과 힘과 지혜와 상식에 의지하여 그 바퀴통의 중심(생각과 개념)을 억제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치된 활동으로 성취할 수 없는 일은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미숙하고 유치한 마음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신의 개입에 잘못된 의존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강한 자기 노력으로 마음에 대한 지배력을 얼어야 합니다.

이 현상계는 창조주의 생각하는 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 안에서는 다양한 원소들의 자연스런 특징에서 태어난 이들 몸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쾌락과 고통이 실제 상태라는 생각을 다시는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런 무지한 사람은 그림이나 동상보다도 훨씬 못합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에는 슬픔의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상은 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음의 지배를 받지도 않습니다. 동상은 누군가가 그것을 파괴시킬 때만 파괴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필연적으로 죽어야 할 운명에 있습니다. 만약 동상이 잘 보호되고 보존된다면 그것은 좋은 상태로 장기간 존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체는 비록 잘 보호되고 보존되더라도, 나날이 부패해 가서 좋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동상은 생각과 개념이 만들어 낸 몸보다도 더 나은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인간의 몸에 기초를 두고 어떤 희망을  품겠습니까?

이 몸은 사람이 꿈 속에서 보는 몸보다도 더 나쁩니다. 꿈 속의 몸은 잠깐 동안의 생각(꿈)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그 몸은 오래 지속되는 슬픔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상태의 몸은 오래 계속된 관념들과 개념들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그 몸은 장기간 오래 계속된 슬픔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몸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든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든 간에, 그것이 생각들과 개념들의 산물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과 관련하여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동상이 깨어질 때 어떤 생명을 잃지 않는 것과 꼭 같이, 생각들과 개념들에서 태어난 몸이 죽을 때도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복시 시각 장애가 치료되었을 때, 두 번째 달이 안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무한한 의식인 참나는 죽지도 않고, 또한 어떤 변화도 받지 않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사람은 세상이 반대 방향으로 빙빙 돌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와 꼭 같이, 무지의 수레바퀴를 타고 도는 사람은 이 세상과 몸이 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영웅은 이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몸은 무지한 마음이 지닌 생각들과 개념들의 소산이기 때문입니다. 무지가 만들어 내는 이 세상은 가짜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활동적이고 모든 종류의 활동들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마치 밧줄을 오인하여 생긴 가상의 뱀이 영원히 비실재적인 것처럼 여전히 비실재적인 것입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에 의해 이루어진 어떤 일은 실제로 그것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체도 비록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둔한 몸은 (몸의 활동에 동기를 부여할) 어떤 욕망도 품지 않습니다. 참나(무한한 의식) 또한 그러한 욕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활동의 행위자는 아무도 없고, 단지 그 활동을 목격하는 지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등불이 바람이 없는 곳에서 등불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빛을 내는 것과 꼭 같이, 사람은 모든 조건 속에서도 참나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태양이 항상 자기 자신과 자신의 본성에 안주하면서 끈임없이 하루의 업무에 임하듯이, 그대도 그대 자신의 참나에 안주하면서 국가의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 거짓된 몸이 실재라는 기만적 생각이 일단 일어나면, 어린 소년이 상상하는 유령처럼 자아감의 악귀 즉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다은 이 가짜의 마음이나 자아감은 심지어 위대한 사람들마저 그 소리에 놀란 나머지 스스로 몸을 움츠려 깊은 명상으로 들어갈 정도로 큰 고함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몸 안에 있는 마음(또는 자아감)이라고 하는 그 유령을 때려눕힌 자는 세상이라고 하는 공(空) 속에서 아무 두려움이 없이 살아갑니다.

심지어 지금도 사람들이 마음이라는 가공의 유령이 만들어 낸 몸을 참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들은 마음이라는 유령의 손아귀에 잡힌 채로 죽어가니, 그들의 지성은 무지 그 자체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유령이 출몰하는 집을 믿고 거기에 사는 자는 악귀이며, 그는 정말로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몸)은 영구적이지도 않고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 라마여! 자아감이라고 하는 유령을 이처럼 비굴하게 추종하는 일을 그만두고, 다시는 자아감을 생각하지 말고, 참나에 조용히 머무십시오.

자아감이라고 하는 유령의 사악한 영향을 받고 있는 자들은 망상에 빠져 있으며, 사실상 그들에겐 친구도 친척도 없습니다. 자아감에 압도당한 지성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유독하며, 그것은 죽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지혜와 용기가 전혀 없고, 자아감과 결혼한 그런 바보는 이미 죽은 것이나 같습니다. 그는 지옥이라는 난로불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장작과 같습니다.

자아감이라고 알려진 이 유령이 몸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든지, 아니면 몸을 떠나가든지 간에, 오, 라마여! 그대 마음은 그것을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자아감이 일깨워진 지성에 의해 무시되고 방치되어 그 껍질이 벗겨지면, 그것은 더 이상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참나는 무한한 의식입니다. 자아감이 비록 이 몸 안에 거주하더라도, 참나가 어떻게 거기에 영향을 받겠습니까?

오, 라마여! 마음의 영향을 받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불행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듣는, '아! 슬프다. 나는 죽었다.'라든가, '아! 슬프다. 나는 불타고 있다.' 등의 눈물 흘리며 한탄하는 이 모든 절규는 자아감의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물에 충만해 있는 공간이 그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는 것과 꼭 같이, 사방에 편재해 있는 참나는 자아감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이 몸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실제로 자아감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고삐의 도움을 받아 하는 것입니다. 참나는 간접적으로 이 모든 것의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식물이 공간 속으로 뻗어 가는 것을 공간이 막지 않으므로, 공간이 간접적으로 식물의 성장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과 꼭 같습니다. 등불이 대상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원인으로 간주되는 것과 꼭 같이, 참나는 신체의 활동이나 마음 등의 원인으로 간주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참나의 빛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둔한 몸과 의식으로 있는 참나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습니다. 마음이 참나와 혼 동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어디에서나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면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쁘라나의 에너지 때문입니다.

오, 라마여! 그대는 마음이 아니라 참나입니다. 그대는 마음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이러한 망상을 버리십시오. 몸 안에 거주하는 악귀 같은 마음은 참나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용히 '나는 참나이다.'라고 간주합니다. 이것이 탄생과 죽음의 원인입니다. 이렇게 간주해 버리면, 그대는 용기를 잃게 됩니다. 오, 라마여! 이 유령을 버리고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십시오. 경전도, 친척도, 심지어 구루나 스승도 마음이라고 하는 유령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자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만약 누군가가 이 유령을 쓰러뜨렸다면, 구루와 경전과 친척들은 마치 진흙 웅덩이에 빠진 동물을 우리가 쉽게 구출할 수 있는 것처럼 쉽게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 이 유령을 쓰러뜨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얼마쯤 공헌을 한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아감이라고 알려진 이 유령을 때려눕힘으로써 이무지로부터 자기 자신을 건져 올려야 합니다. 오, 라마여! 인간의 복장을 한 동물처럼 이 세속적인 생존의 숲에서 방황하지 마십시오. 영구적이지 않은 이 몸을 위하여 가족 관계라고 하는 이 진흙 속에서 뒹굴지 마십시오. 몸은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 자아감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그 안에서 행복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대단히 불가해한 일입니다.

항아리의 본성과 천 조각이 본성이 전혀 다르지 않은 것과 같이, 마음의 본성과 무한한 의식의 본성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그대에게 쉬바 신이 직접 나에게 전한 가르침을 이야기해 주갰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 속에 드러난 비전은 가장 큰 망상마저도 소멸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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