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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데바 뿌자

by Yuneelif 2018. 4. 26.

이렇게 한동안 자기 자신 속에 몰입해 있다가, 쉬바 신은 눈을 뜨고 계속 말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그대는 마음으로 사물들을 이해하는 버릇을 버리십시오. 그것(참나)을 아는 사람들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봐야 하거나 보지 말아야 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나를 보십시오. 평화로 간주되는 것과 불안으로 간주되는 것을 자르는 검이 되십시오. 아니면, 주의력이란 다소 약간의 외향성에 의지하여, 내가 그대에게 말하려는 것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냥 침묵을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몸은 생명력 즉 쁘라나에 의해 살아서 움직입니다. 그 생명력이 없다면, 몸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몸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쁘라나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경험하는 지성은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형태가 없지만 심지어 하늘보다도 더 순수합니다. 생명력과 몸의 관계가 끝나면, 오직 생명력만이 몸에서 분리됩니다. 공간보다도 더 순수한 의식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순수한 거울은 그 앞에 있는 것을 비추지만, 만약 그 거울이 먼지로 덮여 있다면 영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몸은 있지만 쁘라나가 몸을 떠나면, 지성은 대상을 비추지 않습니다.

의식이란 비록 무한하고 편재하지만, 마음과 몸의 움직임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객관화나 개념화의 결점이 제거되면, 그 자체는 절대자로서 빛납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주 브람마, 비슈누, 쉬바, 인드라, 태양, 달 그리고 최고의 신입니다. 브람마와 비슈누와 쉬바 같은 이들 몇몇 신들은 우주의 환영에 의해 기만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의 본성을 공유하고 있는 빨갛게 단 쇠처럼 실로 무한한 의식의 진정한 본성을 공유하고 있는 그 의식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실재로 무한한 의식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으며, 또 그것과 별도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개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개념은 다른 개념보다 농도가 더 진할 뿐입니다. 무지에서 일어난 그러한 개념들의 정도를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말하자면, 지고의 존재(무한의 의식)는 브람마와 비슈누, 쉬바 그리고 기타 신들의 아버지입니다. 그 무한한 의식만이 숭배와 경배를 받기에 적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숭배하기 위하여 그것을 초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어떤 만뜨라도 그것을 숭배할 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즉시적 즉 가장 가까이 있는 자기 자신의 참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초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편재하는 참나입니다. 이러한 무한한 의식을 어떠한 노력도 없이 깨닫는 것만이 가장 나은 형태의 숭배입니다.

쉬바 신은 말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루드라 신을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순수한 참나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대상에 있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그것은 모든 씨앗 중의 씨앗이며, 이 현상계의 본질이며, 가장 위대한 행위입니다. 그것은 모든 원인 중의 원인이고, 모든 존재들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어떤 것을 일으키는 원인도 아니고, 또한 존재의 개념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각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움직이는 모든 것 안에 존재하는 자각이며, 그것은 그 스스로를 그 자체의 대상으로 알며, 그것은 그것 자신의 지고의 대상이며, 그것은 그것 자신 안에 무한한 다양성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경험 안에 있는 의식이지만, 그것은 순수하고 무제한적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개념으로서의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와 거짓의 정의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지고의 진리나 근본적인 실재의 바로 끝(종점)입니다. 그것은 순수한 절대적인 의식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애착이 있으면 스스로 채색이 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쾌락의 경험자나 쾌락의 경험이 되고, 또 쾌락이 야기한 불순물이나 얼룩이 됩니다. 비록 그것은 무한하고 나누어지지 않는 하늘과 같지만, 곧 그것은 한계와 조건화를 받게 됩니다. 이 무한한 의식 안에 지금까지 현상계라고 하는 수백만 개의 신기루가 존재했고, 앞으로도 또한 현상계라고 하는 수백만 개의 더 많은 신기루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무한한 의식과 관계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빛과 열이 불에서 나오는 것 같지만, 그들이 불과 무관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이 무한한 의식은 아직도 그 가슴 내부에 가장 큰 산들을 숨기고 있는 궁극적인 소립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수한 시대의 전 기간을 에워싸고 있지만, 한 순간도 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 한 올의 머리카락 끝보다 더 섬세하지만, 전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아직까지 아무도 그 한계들이나 경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를 만들어 냈습니다. 전 우주를 유지시키면서도,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물질은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그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비록 그것이 비물질적이지만, 그것은 모든 물질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주가 그것의 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지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일(아침)입니다. 흔히 분명히 의미가 없는 소리들도 서로 소통을 하면서 의미를 지니게 되고, 또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와 꼭 같이, 그 무한한 의식도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것은 심지어 본질이 아니기도 합니다. 본질과 비본질에 대한 이 모든 진술은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한한 의식은 진리를 초월하고 논리를 초월해 있습니다.

쉬바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땅이나 물, 시간 등의 도움을 받아 씨앗을 싹트게 하고, 또 음식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무한한 의식입니다. 그것은 꽃을 피게 하고, 코가 향기를 맡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같은 의식에서 생겨나는 적절한 수단의 도움을 받아 세상 속의 물질과 그들의 감각 기관들을 창조하고 계속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이 의식의 에너지는 전 우주를 창조할 수 있고, 그러다가 '이것은 없다.'란 생각을 춤으면, 모든 것을 공의 상태로 바꿉니다.

이 눈에 보이는 창조는 의식이 그 자체 내에 반영되어, 마침내 하나의 몸을 분명히 얻은 것에 불과합니다. 삼위일체는 '그것은 그렇게 될 것이지, 달리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결정해 주는 그 우주적 힘이나 에너지의 표현이기도 하고, 또한 그 우주적 힘이나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활동들이 일어나는 방을 비추는 등불과 같습니다.

바시슈타가 물었다.

신이시여! 이 쉬바(의식)의 에너지는 무엇이며, 그 에너지의 힘들과 활동들은 무엇입니까?

쉬바 신은 대답했습니다.

지고의 존재는 형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의지, 공간, 시간, 질서(혹은 운명) 그리고 우주의 나타나지 않은 본성이라는 다섯 가지가 그의 측면들입니다. 그것은 무한한 힘이나 에너지 혹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것은 지식, 동력(다이나믹), 활동 및 무활동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순수 의식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이 의식의 잠재력이라 불리기 때문에, 그것들은 의식과 분명히 구별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창조물은 의식의 이 모든 잠재력이 시간이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무대와 같습니다. 이 가운데서 으뜸인 것은 '질서'(사물의 자연스러운 순서와 결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행위, 욕망 혹은 하려는 의지, 시간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풀잎에서부터 창조주 브람마에 이르기까지 개개의 사물이 어떤 특성을 가져야 한다고 정해주는 것은 바로 이 잠재력입니다. 이 자연의 질서는 그것이 세상의 나타남으로 알려져 있는 드라마인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기분(연민, 화 등)을 연기하고, 다양한 계절들과 시대들을 만들고 없애며, 천상의 음악과 바다의 노호를 대동하며, 그 무대는 태양과 달과 별들의 조명을 받으며, 그 무대의 남녀 배우들은 모든 세상 내에 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것이 자연의 질서의 춤입니다. 무한한 의식인 신은 이 우주적 춤을 조용히, 그러나 방심하지 않고 지켜보는 목격자입니다. 그는 우주적인 자연 질서인 춤추는 '무희', 그리고 사건들인 '춤'과 다르지 않습니다.

쉬바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거룩한 분들이 변함없이 숭배하기에 적합한 신은 바로 이러한 신입니다.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고 쉬바나 비슈누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들로 숭배를 받는 것은 정말로 이 신입니다. 이제 신이 어떻게 숭배를 받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선 사람들은 몸이라는 생각('나는 이 몸이다.'라는 개념)을 버려야 합니다. 명상만이 참된 숭배입니다. 그러므로 명상을 통하여 삼계의 신을 끊임없이 섬겨야 합니다. 어떻게 신을 명상해야 합니까? 신은 순수한 지성이며, 십만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뜬 것만큼이나 밝게 빛나며, 모든 햇빛을 비추는 빛이며, 또한 내면의 빛입니다. 무한한 공간은 그의 목구멍이며, 창공은 그의 발이며, 방향들은 그의 팡입니다. 여러 세상들은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무기이며, 전 우주가 그의 가슴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신들은 그의 몸에 난 털이며, 우주적 잠재력들은 그의 몸에 있는 에너지입니다. 시간은 그의 문지기이며, 그는 수천 개의 머리와 눈과 귀와 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만지며, 모든 것을 맛보며, 모든 것을 듣고, 비록 생각들을 초월해 있지만 모든 것을 두루 생각합니다. 그는 늘 모든 것을 행하며, 사람이 생각하거나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에게 줍니다. 그는 모든 것에 내재해 있고, 그는 전부이며, 그만이 모든 것이 추구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렇게 그를 명상해야 합니다.

이 신은 물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식에 의해서 숭배를 받아야 합니다. 등불을 흔들거나, 향불을 피우거나, 꽃을 바치거나, 심지어 음식이나 향로를 바침으로써 경배를 올려서도 안 됩니다. 최소한의 노력도 없어야 신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신은 오직 참나 깨달음에 의해서만 숭배를 받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상이며, 이것이 최고의 경배입니다. 다시 말해, 내재해 있는 존재나 내면의 빛이나 의식에 대한 지속적이고 단절이 없는 자각이 최고의 숭배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면서, 예컨대,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거나 먹거나 움직이거나 잠자거나 숨 쉬거나 혹은 이야기하면서도, 사람은 자신의 본성이 순수 의식이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정말로 해방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명상은 봉헌이며, 명상은 신의 손과 발을 씻도록 신에게 바쳐진 물입니다. 명상을 통해 얻은 참나 지식은 꽃입니다. 진실로 이 모든 것은 명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참나는 명상 이외의 어떤 수단에 의해서도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이 단지 13초만이라도 명상할 수 있다면, 비록 그가 무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소 한 마리를 자선 사업에 기부하는 공덕을 쌓게 됩니다. 만약 그가 101초 동안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공덕은 신성한 의식을 올리는 공덕과 같습니다. 그 지속시간이 12분이라면, 그 공덕은 천 배나 됩니다. 지속 시간이 하루라면, 그는 가장 높은 세상에 거주하게 됩니다. 익서이 최고의 요가이며, 이것이 최고의 끄리야(활동 또는 봉사)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숭배를 실천하는 이는 신과 악마와 기타 모든 존재들로부터 숭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적인 숭배입니다.

쉬바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그대에게 더러움을 없애 주는 모든 정화제 가운데서도 최고의 정화제이며, 모든 어둠을 완전히 소멸시켜 주는 참나에 대한 내적인 숭배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걸어가거나 서 있거나, 깨어 있거나 잠자거나, 자신의 모든 활동을 통하여, 중단 없이 이어지는 명상의 모습입니다.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말하자면 자기 자신 안에서 모든 변화들을 불러일으키는 이 지고의 신을 명상해야 합니다. 잠을 자고 깨어나며, 돌아다니거나 서 있으며, 만질 수 있는 것을 만지며, 버려야 하는 것을 버리며, 쾌락들을 즐기고 포기하며, 다양한 외적 활동들에 종사하며, 모든 활동에 가치를 부여하며, 신체 내의 주요 기관(영적 중심과 관련이 있는 세 개의 '링감' 즉 데하 링감을 의미할 수도 있다)들에서 평화로운 상태로 있는'보디 링감'(나타난 의식 또는 참나 자각)을 숭배해야 합니다. 구하지 않았는데도 그에게 찾아오는 모든 것을 가지고, 이 내면의 지성을 숭배해야 합니다. 참나 지식에 흠뻑 젖은 뒤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과 경험에 확고히 자리 잡은 채, 참나 깨달음이란 재료를 가지고 이 내면의 지성을 숭배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신을 명상해야 합니다. 즉, 그는 달의 힘뿐만 아니라 태양의 힘에 의해 빛을 내는 빛입니다. 그는 모든 물질 속에 영원히 숨겨져 있는 지성입니다. 그는 몸의 길을 통해 외부 세상으로 흘러나가는 외향적인 자각입니다. 그는 사람의 얼굴(코)에서 움직이는 쁘라나입니다. 그는 감각의 접촉들을 의미 깊은 경험들로 변형시킵니다. 그는 쁘라나와 아빠나로 구성된 마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는 사람의 가슴이란 동굴에 비밀스럽게 거주합니다. 그는 알 수 있는 것을 아는 자이며, 모든 활동의 행위자이며, 모든 경험의 경험자이며, 모든 생각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모든 부분이나 수족들을 철저히 알고 있으며, 존재와 무존재에 의해 자각되며, 모든 경험을 밝게 비추는 분이 바로 신입니다.

그는 부분들이 없지만 전체이며, 몸 속에 살지만 편재합니다. 그는 즐기기도 하고 즐기지 않기도 합니다. 그는 매 수족 속에 존재하는 지성입니다. 그는 마음의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그는 쁘라나와 아빠나의 중간에서 일어납니다. 그는 가슴, 목구멍, 구개의 중앙, 눈썹의 중앙, 그리고 코끝에 거주합니다. 그는 36개의 모든 원소(또는 형이상학적인 범주들) 안에 존재하는 실재이고, 내면의 상태들을 초월하여 있으며, 내부의 소리들을 만드는 자이며, 또한 마음이라고 하는 새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는 상상과 무(無)상상이라고 묘사되는 것의 실재입니다. 그는 마치 기름이 씨앗에 내재해 있듯이, 모든 존재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그는 가슴의 연꽃 속에 내재해 있고, 또한 신체에 두루 내재해 있습니다. 그는 순수 의식으로서 빛을 냅니다. 그는 어디에서든지 즉시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경험 속에 있는 순수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경험의 대상들을 이해하려 할 때 분명히 그는 자기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쉬바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신이 몸 속의 지성이라고 명상해야 합니다. 몸 안의 다양한 기능들과 능력들은 마치 배우자가 그들의 남편을 섬기듯이 그 지성을 섬깁니다. 마음은 신에게 삼계의 지식을 가져다가 선사해 주는 전령입니다. 두 가지 근본적인 에너지, 즉 지혜의 에너지(냐나 샥띠)와 활동의 에너지(끄리야 샥띠)는 신의 배우자들입니다. 지식의 다양한 양상들은 그의 장신구입니다. 활동 기관들은 신이 바깥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나는 나누어질 수 없는 그 무한한 참나이다. 나는 충만하지만 유한하다.' 이렇게 지성은 몸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명상하는 자는 평온 그 자체이며, 그의 행위도 똑같은 비전의 안내를 받기 때문에 침착합니다. 그는 타고난 선과 내면의 순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그의 존재의 모든 모습 속에서 아름답습니다. 그는 그의 몸 전체에 충만해 있는 지성인 신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숭배는 마음을 평온한 상태에 확고히 확립한 채, 바른 영(왜냐하면 신은 의식이고, 오직 바른 영만을 바라기 때문이다)과 평온에 확고히 자리 잡은 마음으로 노력 없이 획득한 물건들을 신에게 바치면서 밤낮 중단 없이 행해집니다. 사람은 노력 없이 획득한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치면서 신을 숭배해야 합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하여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서도 안 됩니다. 신은 먹고 마시소, 배우자와 함께 있고, 또한 다른 그러한 쾌락들을 통하여 몸이 즐길 수 있는 모든 즐거움에 의하여 숭배를 받아야 합니다. 신은 자신이 경험하는 여러 질병들과 함께, 또 그가 겪는 모든 종류의 불행이나 고통과 함께 숭배를 받아야 합니다. 신은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모든 꿈을 포함한, 그의 모든 활동에 의하여 숭배를 받아야 합니다. 신은 그 사람의 간나이나 성공에 의하여 숭배를 받아야 합니다. 신은 스포츠와 기타 오락들은 물론 심지어 싸움이나 언쟁과 함께, 그리고 애착과 혐오의 감정 표현들에 의하여 숭배를 받아야 합니다. 신은 우정, 동정, 기쁨, 무관심과 같은 경건한 가슴의 고귀한 특성들에 의하여 숭배를 받아야 합니다.

신은 청하지 않았는데도 주어지는 모든 종류의 쾌락들과 함께, 비록 그러한 쾌락들이 경전 등에 의해 인가받았든지 아니면 금지되었든지 간에, 숭배를 받아야 합니다. 신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로 여겨지는 것들,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또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더불어 숭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숭배를 위하여 잃어버린 것은 포기해야 하고, 노력 없이 얻어진 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쉬바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모든 지각의 대상들과 관련하여, 비록 그 대상들이 유쾌하든 불쾌하든 간에, 지고의 평온 상태를 확고히 유지하면서 언제나 이 숭배에 관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좋고 상서로운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아니면, 모든 것을 선과 악의 혼합물로 간주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참나라는 것을 깨달은 뒤에, 이러한 정신으로 참나를 숭배해야 합니다. 즐겁고 아름다운 것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한 것을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참나를 숭배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이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와 같은 구별하는 개념들을 버리고, '이 모든 것은 정말로' 하나의 나눌 수 없는 무한한 의식인 '브람만이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정신으로 참나를 숭배해야 합니다. 그 어느 때고 형태들과 그 변화들 속에서도 자기가 얻는 모든 것 안에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참나를 숭배해야 합니다.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의 구별을 버린 뒤에, 참나를 숭배해야 합니다. 아니면 심지어 그러한 구별에 의존하고 있는 동안이라도 (그들을 숭배의 재료로 이용하면서) 참나를 숭배해야 합니다.

갈망하거나 거부함도 없이,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획득된 것은 즐겨질 수 있습니다. 마치 하늘이나 공간 그 어느 것도 그 안에 존재하면서 성장해 가는 다양한 대상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것과 같이, 무의미하거나 의미 있는 대상들과 마주쳤을 때 침울하거나 들떠서는 안 됩니다. 시간과 장소와 활동의 일치 때문에 순수하게 얻어지는 각각의 모든 대상과 더불어 통속적으로 그것들이 좋거나 혹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든 간에, 심리적인 곡해 없이 참나를 숭배해야 합니다.

참나를 숭배하는 이러한 절차에서, 숭배에 필요한 것으로 언급된 품목이면 무엇이든지, 비록 사용된 표현들은 다를지라도, 다른 모든 것들과 똑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온은 매우 달콤하며, 이 달콤함은 감각과 마음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 평온과 접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묘사나 정의가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즉시 달콤하게 변합니다. 공간의 평온처럼 평온한 상태에 있을 때 행해지는 그것만이 숭배로 간주됩니다. 왜냐하면 그때 마음은 아무런 생각의 움직임이 없이 완전히 정지해 버렸기 때문이고, 또한 비뚤어진 마음이 저절로 없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이러한 평온의 상태에 정착한 뒤에, 갈망하거나 거부함이 없이 외적으로 자연스런 활동을 행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무한한 팽창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이 지성을 숭배하는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런 사람의 경우에, 망상과 무지와 자아감은 꿈속에서조차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 현자시여! 모든 것을 마치 아이처럼 경험하면서 이런 상태에 머무르십시오. 시간과 상황과 환경이 그대에게 가져다주는 모든 것과 함께 이 몸에 충만해 있는 지성의 신을 숭배하고, 욕망이 없는 지고의 평화 속에 안주하십시오.

쉬바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할 때마다 혹은 그것을 하지 않을 때마다, 그 모든 것은 순수 의식인 신에 대한 숭배입니다. 그 모든 것을 신인 참나에 대한 숭배로 간주함으로써, 그는 기쁨니다.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 애착과 혐오 등은 참나의 본성과 관계없이는 참나 안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즉, 그것들은 단지 말에 불과합니다. '주권', '빈곤', '쾌락', '고통', '자기 자신의 것', 그리고 '다른 것들'과 같은 단어들이 가리키는 개념들마저 사실상 참나에 대한 숭배입니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그 지성이 참나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존재에 대한 지식만이 우주적 존재에 대한 적절한 숭배입니다.

'이 세상'과 같은 표현들이 가리키는 것은 오로지 참나 즉 우주적 의식입니다. 순수 의식이나 지성인 참나가 어떻게 해서 그 자체의 본성을 잊고 그 스스로를 지바(개인)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다니, 이얼마나 신비스럽고 놀라운 일입니까 사실, 모든 것 안에 있는 실재인 그 우주적 존재 내에는 숭배자와 숭배와 숭배 받는 대상에 대한 구분마저 없습니다. 아무런 구분이 없이 전 우주를 지탱해 주는 그 우주적 존재를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그것들을 배울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이 시간과 공간의 조건화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모든 제한적인 개념들을 버리고, 심지어 숭배자와 숭배 받는 신이라는 구별들도 버린 채, 참나에 의해 참나를 숭배하십시오. 평화롭고, 순수하고, 갈망이 없는 상태로  존재하십시오. 그대의 모든 경험과 표현들이 참나에 대한 숭배라고 생각하십시오.

(바시슈타가 쉬바와 브람만과 참나 등이 왜 그렇게 불리는지 그리고 그러한 차이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좀 더 충분히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에 대한 대답으로, 신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했다.)

실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그것은 심지어 어떤 것에도 비추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감각들을 통하여 그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비존재인 것처럼 간주되기까지 합니다.

("만약 그것이 마음을 초월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라는 바시슈타의 물음에 대하여, 쉬바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무지를 벗어나 자유를 얻고 싶어 하며, 그러므로 소위 미묘한 무지(사뜨빅 아비디야)를 갖추고 있는 구도자의 경우에, 이 미묘한 무지는 경전의 도움을 받아, 마치 세탁하는 사람이 또 다른 형태의 비누인 때의 도움으로 때를 제거하는 것처럼, 그 무지를 없애 줍니다. 이러한 촉매 작용에 의하여 무지는 제거되고, 참나는 참나를 깨달으며, 참나는 그 자체의 밝게 빛나는 본성 때문에 참나를 보게 됩니다.

쉬바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아이가 숯을 가지고 놀 때, 그의 손은 검게 변합니다. 그가 손을 씻지만 곧바로 숯을 가지고 다시 놀면, 그의 손은 다시 검게 변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손을 씻고 난 뒤에 다시는 숯을 만지지 않으면, 그의 손은 계속 청결할 수 있습니다. 그와 꼭 같이, 만약 사람이 참나의 본성을 알아보고, 동시에 아비디야 즉 무지를 조장하는 그런 활동들을 그만두면, 그 무지의 어둠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참나를 작가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참나뿐입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참나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나 지식이 스승의 가르침 때문이라는 느낌을 지니지 마십시오. 구루 즉 스승은 마음과 감각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나나 브람만은 마음과 감각을 초월해 있습니다. 다른 것이 멈춘 뒤에야 비로소 얻어지는 그것은 그것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 그것의 도움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들과 그 나머지 모두가 실제로 참나 지식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그 수단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참나는 경전이나 스승의 가르침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나는 스승의 가르침들과 경전의 도움 없이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참나는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날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참나 지식이 성취되는 것은 오직 경전의 지식과 스승의 가르침들과 참된 제자 관계가 함께 할 때 일어납니다.

모든 감각이 작용을 멈춘 뒤에, 그리고 쾌락과 고통의 모든 개념이 사라진 후에 존재하는 그것이 참나 즉 쉬바이며, 그것은 또한 '그것', '진리' 혹은 '실재'와 같은 표현으로 지칭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는 그것은 무한한 공간처럼, 이 모든 것이 존재해 있을 때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망상에 사로잡힌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그들을 영적으로 일깨워 주고 또 그들의 마음에 해방에 대한 갈망을 일깨워 주고자 브람마, 인드라, 루드라 및 기타 신들로 알려진 우주의 구원자들이 베다와 전설인 뿌라나들과 같은 경전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경전들 속에서 그들은 '의식', '브람만', '쉬바', '참나', '신', '지고의 참나' 등과 같은 단어들을 이미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이 다양성을 함축하고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러한 다양성이 전혀 없습니다.

'브람만' 등과 같은 단어들이 가리키는 진리는 정말이지 순수 의식입니다. 그것과 관련하여 심지어 무한한 공간마저 거대한 산만큼이나 거칠고 단단합니다. 그 순수한 의식은 알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보이고, 비록 가장 내면의 참나이기 때문에 그것이 지식의 대상은 아니지만, 지성이나 의식의 개념을 일으킵니다. 순간적인 개념화 때문에 이 순수 의식은 자아의식인 '나는 알고 있다.'를 일으킵니다.

쉬바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이 자아감은 다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낳습니다. 그 다음 그것이 생명의 공기가 주는 에너지를 부여받으면, 그것은 지바 즉 개인이 됩니다. 그때부터 개인은 개념들의 명령을 따르고 그래서 짙은 무지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은 자아감과 다른 여러 가지 형태의 심리적 에너지와 관련하여 태어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미묘한 몸(아띠바히까)이라고 합니다.

이후에, 미묘한 몸의 미묘한 여러 에너지에 해당하는 세상의 대상물들인 대상들이 잉태되었고, 또한 이런 식으로 시각, 촉각, 청각, 미각, 후각과 같은 다양한 감각들이 그에 해당하는 대상과 그 대상과 관련된 경험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를 뿌르야스따까라고 하며, 그들이 미묘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을 또한 미묘한 몸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 모든 대상들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 것도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하나의 무한한 의식에서 일어나는 분명한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꿈 속의 대상들이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은 무한한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한 대상들을 꿈꾸고 있을 때처럼, 그것들은 그 사람의 자각의 대상들이 되는 것 같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이 객관적인 실체인 것처럼 나타나 보입니다.

그것들에 관한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이 모든 것은 신으로서 빛이 납니다. 그러나 심지어 그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결코 물질들이나 대상들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그것들이 물질이라는 그 자신의 생각들 때문에 그것들은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떠올림으로써, 의식은 실체를 보게 됩니다.

의식이 그러한 개념들에 조건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고통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건화는 슬픔입니다. 그러나 조건화는 생각들과 개념들(혹은 감각적, 심리적 경험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러한 경험들을 초월해 있고, 세상은 신기루와 같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런 경우에, 심리적 조건화가 무엇이며, 누가 무엇을 조건화하며, 그러한 조건화로 누가 조건화된단 말입니까? 누가 신기루의 물을 마시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이 모든 것들이 거부되면, 어떤 조건화도 없고, 조건화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실재만이 남게 됩니다. 그것은 존재나 비존재로 불릴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존재합니다. 심리적 조건화는 유령과 같이 가공의 비존재입니다. 즉 그것을 없애면, 세상의 환영도 또한 사라집니다. 이 자아감과 세상이라고 알려진 이 신기루를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스승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갖춘 사람만을 가르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직 꿈 속에서 본 남자에게 자기 딸을 결혼시키는 그런 무지한 사람처럼, 그들의 믿음과 희망을 현상계에 걸고 있습니다.

쉬바 신은 계속 말했습니다.

마치 꿈꾸는 사람이 내면의 공(空) 속에서 다양한 대상들을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지바도 공 속에서 그 몸을 구성하고 있는 이 다양한 원소들을 작가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실입니다. 우주 의식이나 우주적 존재는 마치 꿈꾸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다양성을 자각하는 것처럼, 그 자체 내에서 다양성의 우주를 자각합니다.

지바는 그 스스로를 브람마나 비슈누 등으로 생각하지만, 이 모든 것이 생각의 형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의 형태는 다른 여러 생각의 형태들을 상상하고 자각하며 그것들을 경험합니다. 이 모든 지각 안에 있는 유일한 실재는 자아감이라고 하는 일차적인 개념입니다. 자아감은 그 자체 내에서 하나의 대상을 생각하고, 그것이 그것의 대상으로 분명히 그것을 지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납니다. 그 순간 그 자체는 한 시대이고, 또한 여러 시대들을 곱한 배수이기도 하며, 그것들을 나눈 것이기도 합니다. 존재의 매 원자 속에서 참나 가림과 참나 지식의 드라마는 늘 상연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우주적 의식이 만들어 낸 생각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우주 의식에 의해서나 혹은 우주 의식 안에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주 의식은 불변이고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꿈 속에서 본 산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어떤 공간도 차지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나타나고 사라지는 데 시간도 걸리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도 그와 같습니다. 무한한 힘을 가진 신이 어떤 식으로 존재 안으로 들어오든지 간에, 그와 꼭 같은 식으로 지렁이도 또한 눈 깜짝할 사이에 생겨납니다. 루드라 신에서부터 아래로는 풀잎에 이르기까지, 우주에서 보는 모든 존재들은 비록 그것들이 미생물이든 아니면 거대한 인물들이든 간에, 똑같은 식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이 삼사라(현상계)의 본성을 탐구한다면, 다양성의 지각은 참나 지식이나 신의 실현이 시작됨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무한한 의식의 참된 본성을 100분의 1초의 절반 동안이라도 놓치게 되면, 이 모든 불행한 가공의 세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혜로운 현자들이 '브람만'이란 표현을 쓸 때, 그 의미는 무한한 의식 속에 영원히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가 깨어지면, 이 세상이 실재한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며, 이것은 신, 악마, 인간, 인간 아류, 식물, 벌레 등과 같은 끝없이 연속되는 다양성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우주 의식의 상태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진리가 어디에서나 늘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시슈타가 말했다.

오, 라마여! 이렇게 말을 하고 난 뒤 쉬바 신은 나의 숭배를 받았고, 나에게 축복을 내린 뒤에 그의 배우자인 빠르바띠와 함께 떠나갔습니다. 나는 그의 가르침을 이해했으므로 이전의 숭배 방식을 버리고, 편재하는 비이원적인 참나에 대한 숭배를 시작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비실재적인 지바는 비실재에 대한 비실재적인 영향 때문에 비실재적인 세상을 자각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무엇이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무엇이 비실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겠습니까? 가상의 한 대상은 누군가에 의해 상상적으로 묘사되면, 사람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또 그가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상상합니다. 유동성이 액체에, 운동이 바람에, 청 빔이 공간에 있는 것과 꼭 같이, 편재는 참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쉬바 신이 나에게 가르침을 준 때부터, 나는 무한한 참나에 대한 숭배를 해 왔습니다. 그러한 숭배의 은총을 입어, 비록 나는 끊임없이 다양한 활동들에 종사하고 있지만 슬픔이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내 손에 들어오는 꽃이면 무슨 꽃이든지 그 꽃을 가지며, 나에게 오는 자연스러운 활동이라면 무슨 활동이든지 그 활동을 하면서, 나는 지금도 분명히 겉으로는 나뉘어 있지만 분할되지 않는 그 참나에 대한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소유하고 소유당하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신체를 가진 모든 존재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은 영원히 방심하지 않으며, 그러한 방심하지 않음이 참나에 대한 숭배입니다. 이러한 내면적 태도를 취하고, 어떤 애착도 전혀 없는 마음을 가지고, 나는 이 무서운 삼사라라는 현상계의 숲을 떠돌아다닙니다. 그대도 그렇게 한다면 고통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에게 재산의 상실과 친척들의 죽음과 같은 큰 슬픔이 일어나면, 앞에서 기술한 대로 진리의 본성을 탐구하십시오. 그대는 기쁨이나 슬픔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제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멈추는지를 알고 있으며, 또한 그런 것들에 의해 현혹되어 있는 사람과 그들의 참된 본성을 탐구하지 않는 사람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대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그대 또한 그들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이 세상의 비실재적인 본성인 것입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라마여! 그대는 우주의 다양성에 대한 환영적인 자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 으식입니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안다면, 어떻게 그대의 마음속에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의 생각이 일어나겠습니까? 오, 라마여! 이렇게 깨달은 뒤에는 의식의 초월적(뚜리야) 상태에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라마는 말했다.

신이시여! 저는 이원성의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브람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지성은 정화되었고, 의심들과 욕망들과 심지어 의문들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천국도 바라지 않고,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참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 신이시여! 당신의 은총으로, 저는 이 삼사라(현상계)의 바다를 건넜습니다. 저는 직접적인 참나 지식의 완전함을 깨달았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그대가 애착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단순히 행위 기관들로 그저 행하는 것은 활동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감각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기쁨은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의 반복이 반복적으로 똑같은 기쁨을 주지는 않습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그러한 순간적인 기쁨을 바라겠습니까? 더구나, 대상이란 그대가 그것을 바랄 때만이 그대에게 쾌락을 줍니다. 그래서 쾌락은 욕망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욕망이나 갈망을 버리십시오.

불원간 그대가 그것(참나)의 경험을 얻으면, 다시 한 번 욕망처럼 소생될 수 있는 하나의 기억이나 자아감으로서 그대 마음속에 그것을 저장해 두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대가 참나 지식의 정상에 있을 때, 다시 자아감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희망들도 끝나고 개념들도 사라지게 하십시오. 집착이 없이 살아가면서, 마음을 무심의 상태에 이르게 하십시오. 그대는 그대가 무지할 때만이 속박되어 있습니다. 그대가 참나 지식을 갖게 되면 속박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방심하지 말고 참나 지식에 머물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대가 감각의 경험들에 관여하지 않고, 또한 구하지 않았는데도 그대에게 찾아오는 모든 것을 경험하면, 그대는 잠재적인 경향성들이나 기억들이 전혀 없는 평온과 순수의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하늘처럼 그러한 상태에서는 그대가 일천 번이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려도 그대는 물들지 않을 것입니다. 아는 자와 알려진 대상과 지식이 하나의 참나 속으로 통합되면, 순수한 경험자는 내부에서 다시는 분리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즉 마음의 눈이 깜빡거릴 때, 삼사라(현상계)는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쁘라나와 바사나들을 억제함으로써 마음의 눈을 깜빡거리지 않게, 생각의 움직임이 없게 하십시오. 쁘라나의 움직임(깜빡거림)으로도 삼사라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따라서 부지런한 수행을 통해 쁘라나에 그러한 움직임이 없도록 하십시오. 어리석음(무지)이 일어나고 멈춤에 따라, 자기를 구속하는 활동이 일어나고 멈춥니다. 따라서 자기 수양과 스승과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 그것을 억제하십시오.

이 세상이라는 환영의 마음속에서 생각이 움직이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그 생각이 그치면 그 환영도 그칩니다. 그러면 마음은 무심이 됩니다. 이것은 또한 쁘라나를 억제함으로써도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고의 상태입니다. 무심의 상태에서 경험되는 희열, 즉 어떤 원인도 없이 일어나는 그 희열은 가장 높은 천국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 희열은 표현할 수도 없고 형언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 행복이라고 불러서도 안 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의 마음은 무심입니다. 즉, 그것은 순수한 사뜨바입니다. 그러한 무심의 상태로 얼마간 산 뒤에는, 뚜리야 아띠따(초월의 상태, 즉 뚜리야 상태 너머의 상태)라고 하는 상태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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